광주강의(07. 10. 25) 1강 녹취록
광주강의(07. 10. 25) 1강 녹취록
이름 : 서경수(IP:116.37.101.23)
광주 강의(07. 11. 23) 30-1
오늘은 디도서를 공부하겠습니다.
신약성경 가운데 같이 안 살펴본 것이 거의 없어요. 빌레몬서 하나 남았고 나머지는 다 했습니다.
디도서. 신약성경 348페이지입니다.
이 디도서는 디도에게 사도바울이 편지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디도에게 편지한 것이 아니고 고린도교회에 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왜냐하면 디도라는 이 제자는 고린도교회와 관련이 있어요.
그래서 고린도교회가 과연 신앙생활 잘 하고 있는가 하고 중간에 보고하는 중간단계에 이 디도라는 사람을 보냈습니다. 사도가 바쁘니까 믿을 만한 사람들을 여러 군데 보내서 과연 그 교회가 제대로 신앙생활 잘 하고 있는지를 살폈던 것입니다.
살필 때 그 살피는 기준이 뭐겠습니까? 그것이 뭐냐 하면 복음이죠. 이 복음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니까 뭐가 빠지겠어요? 인간의 행함을 여기에서 빼야 됩니다. 사랑이란 것은 마치 뭐와 같은가 하면, 여름철에 방역차가 약을 뿜으면서 가면 어린 아이들이 뿌연 연기 속에 막 따라 다니잖아요. 그럴 때 집집마다 창문을 다 열어 놓지요. 공차로 모기약 들어오라고.
애들은 방역차에서 나오는 모기약을 뒤집어쓰잖아요. 뒤집어쓰게 되면 애가 빨간색 옷을 입었던 파란색 옷을 입었던 검정색 옷을 입었던 방역차의 안개 같은 그 모기약 밑에서 보면 차별이 없지요.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이 지상에 나올 때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 하면 사람들 간의 차별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 간의 차별을 없게 만드는 것이 뭐냐?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람들 간의 차별이 없다는 말도 되고, 또 한 사람의 움직임. 전과 후 그 뒤에 무슨 짓을 하던 간에 한 사람에게 있어서 여러 가지 행위도 역시 하나님의 사랑이 덮어버리면 차이가 나겠어요, 안 나겠어요? 이것도 차이가 안 나는 거예요. 교회 나왔을 때나 교회 안 나왔을 때나 하나님의 사랑이 덮쳐오면 인간의 행동이 별 의미가 없고 차이가 안 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게 되면 사람들 간의 차별이 없고, 그 개인적으로 과거에 무슨 행동을 했으며 앞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5년 뒤에 무슨 행동을 할 것이며 10년 뒤에 무슨 행동을 할 것이냐에 대한 것도 사랑이 덮쳐오면 묻지를 않습니다. 왜? 사랑이란 일체 차별을 두지 않으니까. 이 하나님의 사랑이 복음이죠.
오늘 디도서를 공부하는데, 이 디도서는 실제적으로 누구에게 편지하는 것이라고 했습니까? 디도에게 한 것이 아니고 실제로 고린도교회에 편지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이 디도서를 쓰면서 ‘복음대로 교회가 잘 있는가?’ 안부를 묻는 식으로 편지를 보내는데, 교회가 복음대로 잘 있다는 말은, 하나님이 주신 사랑이 녹녹하게 아직까지 남아 있는가? 그것을 살피겠지요.
신약에 와서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간의 차별이 없고, 인간 행동에도 차이가 없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왜 그런가? 이유를 따져야 해요.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가 하면 구약을 봐야 돼요. 구약을 보게 되면, 구약은 하나님의 법이 주어집니다. 법이 주어지면 이 법은 법을 지킨 사람과 안 지킨 사람, 이렇게 이스라엘 내부적으로 자기들끼리 차이를 내죠. 그러나 사실은 아무도 법을 지킨 사람이 없는데.
법을 주니까, 그 사람이 ‘지켰다.’ 혹은 ‘안 지켰다.’는 차이를 두고, 자기들끼리 계급을 만들고 이렇게 한단 말이죠. 그런데 신약에 오면 어떻게 됩니까? 신약에 오게 되면 그 당시 법 잘 지킨다고 소문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보다 세리와 창기가 먼저 하늘나라로 가버리는 그러한 시대가 된 겁니다.
이 사랑이 고린도교회에 그대로 남아 있는가를 지금 살피는 거예요. 그리니까 ‘고린도교회는 계급이나 차별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훼손하지 않는가? 보고하라.’ 이런 뜻이죠. 하나님의 사랑이 구약에서는 법이 있기 때문에 ‘법을 지킨 자.’ ‘안 지킨 자.’ 그 자체로 문제가 많지만, 신약에 오면 법이 아니라 사랑이거든요. 법의 완성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사람간의 차별이 없고 개인의 행위에도 차별이 없는 이런 시대가 되었는데, 여기에 만약에 사람들이 이 사랑을 보고, 복음을 보고 교회에 다니면 참 좋겠는데, 여기에 만약에 특정 인물, 특정 성직자나 교회 유지 이런 것이 부각이 되어 버리면 무엇이 날아가 버립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성직자나 교회 때문에 가리워지겠지요.
사랑은 누가 주는 겁니까? 하늘에 계신 예수님이 주는데, 그 예수님 자리에 어떤 인간이 등장하고 교회 조직 이런 것이 등장하면 그때부터 누구 눈치를 보는가 하면 사랑을 못주는 사람의 눈치를 보게 되는 그런 상황에 돌입하고 맙니다. 사랑을 주지도 못하는 사람의 눈치를 보고 “아, 이 교회는 참 교회 다와. 이 교회는 질서가 있어.” 이런 식으로 사랑 아닌 다른 관점으로 바뀌겠죠.
그러면 여기에서 사랑 자리에 뭐가 들어가겠습니까? 법이 들어가겠지요. 법이 들어가면 너도나도 이 법을 지켜서 자기가 위대한 사람으로, 위대한 존재가 되고자 노력하게 되는 겁니다. 법이 하나 뜨게 되면 사람들은 내가 지킬 수 있는 법으로, 자기 마음대로 해석을 해 버려요.
제가 어렵게 이야기를 했는데 좀 더 쉽게 해 봅시다.
구약에서 법을 줬더니만 여기서 계급이 생겼다. 계급이 생긴 이유는 사람들이 전부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타인보다 더 위대해 지기를 원하는 것이 바로 자기 사랑이죠. 그런데 신약에는 법 자리에 뭐가 들어왔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오니까 여기는 계급이 없어지지요. 왜냐하면 차별이 없으니까. 모든 인간에게 차별이 없어요. 차별이 없으니까 모든 신약의 교인들은 누구를 봅니까? 사랑을 주신 주님만 쳐다보고 살지요.
아까 방역차를 예로 들었지만, 방역차에서 약을 뿜어내면 그 뒤를 따르는 아이들이 노란 옷을 입었던지 빨간 옷을 입었던지 상관없이 안개와 같은 모기약에 뒤덮여 똑같이 따라가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교회가 뭡니까? 자기가 지금 무슨 처지인지도 모르고 주님의 십자가 보혈을 보고 무조건 따라가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을 보고 “야, 방역차다!” 하고 아이들이 따르는 것처럼, “야, 주님의 십자가 보혈의 피다!” 하고 그냥 따라가는 거예요. 이것이 교회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적인 차이가 없어요. 그런데 법이 뜨면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 법을 지켜서 자신을 더욱 더 돈독케 하는, 자기 자신을 위대하게 만드는 자기 애착에 빠져 버려요.
사람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내가 나를 사랑한 만큼 하나님이 나를 사랑 안 해주기 때문에 하나님께 원망하는 겁니다. 그렇잖아요? 자기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입니다. 들뢰즈는 나와 자아를 구분해요. 어려운 이야기인데, ‘나’는 그냥 뭔가를 불려야 되니까 ‘나’라고 불러요. ‘자아’라는 것은 몸으로 뭉쳐진 유기체를 가지고 자아라고 합니다.
그래서 ‘나’라고 불리는 그 ‘자아’를 ‘나’가 신봉해요. 어느 정도로 사랑하느냐 하면, 이 세상에 어떤 인간도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없어요. 이 글에 대해서는 오늘 내가 [십자가 마을]에 올린 글이 있어요. “사모님들과 목사들”이란 글이 있어요. 혹시 읽어보셨습니까? 재미있지요?
왜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것을, 나는 오른쪽을 원하는데 하나님은 왜 왼쪽 길로 인도하느냔 말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미운 거예요. 왜 미우냐 하면 지독하게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러니까 나보다 하나님이 나를 더 사랑하지 않는 이상은 하나님을 안 믿는 겁니다. 하나님이 미운 거예요. 적어도 내가 사랑해 주는 그것 이상으로 사랑해 줘야 그때만 하나님을 사랑해요.
그러니까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사이비고 엉터리고 거짓된 것인지 알 수 있지요. 진짜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나를 사랑하는 나와 저 사람과 하나님이 같이 본다는 것을 알아야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입니다. 지독하게 나를 사랑하는데, 그리고 저 사람은 나는 라이벌이라서 미운데, 하나님의 십자가 보혈의 피 앞에서는 내가 미워하는 저 사람도 동일하게 구원할 수 있는 보혈의 피라는 것을 알 때, 그때야 “주님께서는 내 식대로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 식대로 날 사랑하는구나!” 하고, 내 사랑에서 주님 사랑으로 바뀌게 됩니다.
바뀌게 되면 우리는 방역차 따라가는 어린 아이가 되지요. 신나게 모기약 냄새가 좋아서 따라가는, 그냥 주님만 보고 따라 가는, 그 순간에 따라가는 나와 남의 차이를 생각할 필요도
없고 겨를도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부모가 자식을 나무랄 때에 자식들은 항상 뭘 생각하는가 하면, ‘그래, 엄마는 잘 났고, 나는 못났단 말인가?’ 이렇게 자꾸 비교하는 버릇이 있어요. 그런데 부모가 자식을 나무랄 때는 ‘나는 잘 났는데 너는 왜 못하느냐?’는 식으로 하면 안 되고, “나도 못한 게 있다.” 하고 이야기를 해 줘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엄마는 옳고 그름의 차원에서 말한 것이지, ‘나는 잘났는데 너는 나보다 못났다.’ 하고 깔보는 차원에서 하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알지요.
선생님들도 마찬가지예요. 애들을 꾸중할 때, ‘선생님은 잘 하는데, 너희들은 왜 그러냐?’는 식이 되면, 애들이 순종은 하면서도 반발심을 갖게 돼요.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인간은 자기 자신을 최고로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데 주님의 사랑은, 자기 자신을 최고로 사랑한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이것을 비켜 가지요. 예수님이 우리와 어떤 흥정도 없이 일방적으로 자기 아들을 죽이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에게 오는 공격을 비켜가서 하나님은 자기 아들에게 다 퍼부음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그대로 가지고 우리 사랑에다 모기약처럼 덮쳐 버립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내 사랑이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도, 오늘 참 중요한 이야기 하는데요, 내 사랑이 남아 있어요. 평생 안 없어져요. 남아 있으면서도 워낙 덮쳐진 사랑이 덩치가 크기에 우리는 거기에 감복하고 탄복하지요.
아까 식사하면서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감사와 희열이 충만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놀라운 생각지도 않은 은총을, 내가 예상치도 못한 엄청난 그런 혜택을 입은 거거든요. 그렇지 않습니까?
누가 아들 보내라고 했습니까? 예수님보고 내 대신 십자가 지라고 했습니까? 아무것도 한 것 없이 우리는 기껏 내 욕심 때문에 ‘저 사람 말고 날 사랑해 주세요.’라고 이렇게 이기주의에 빠져 있었는데, 난데없이 주님께서 우리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예수님을 죽이셔서 “너는 용서 받은 자야!” 하고 다가올 때, 당연히 우리는 여분의 것, 내 사랑위에 덮쳐진 여분의 것, 이것을 가지고 ‘잉여’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과잉’입니다.
‘잉여’가 무슨 뜻인 줄 아시죠? 잉여, 과잉, 분에 넘침 이것이 감사, 감사로 이어져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잉여와 과잉 이것을 감사할 생각 안 하고 자기 자신이 새 인간 되어서, 내가 새사람 되어서 ‘내 인간성 달라졌다.’는 이것을 자꾸 자랑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메말라 있지요. 바짝 메마른 거예요.
그리고 뭔가 실수하면, “하나님 아버지. 제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실수를 하게 하십니까?”
수요일에 제가 접촉사고가 있었는데, 큰 사고는 아니고 지나가는 사람 빽밀러로 살짝 쳤는데 사과를 못해서 미안스럽다는 말입니다. 어쨌든 굉장히 미안한 거예요. 그럴 때 순간적으로 “주여, 나에게 왜 이런 수모를 당하게 하십니까?” 하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내가 뭔데 나에게 실수가 있고, 나에게 실패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건방진 이야기입니까? 내가 태어난 것 자체가 실수인데. 우리 부모님의 실순데.
자기가 ‘실수다. 실패다.’ 말하는 것은 평소에 자기는 잘났다는 뜻이에요. 그렇게 되면 뭐가 없어집니까? 감사와 감격이 나올 수가 없어요. 왜냐? 잉여, 여분의 것, 과잉 이것이 없이 “야, 나는 좀 더 완벽해야 돼. 완벽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돼. 좀 더 완벽해야 돼.” 이런 식으로 나간다면, 이것은 제 잘난 맛에 살아가는 것이지 여기에 무슨 하나님께 대한 감사, 감격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개뿔도 신앙도 아닙니다.
예전 십자가 마을에서 논쟁할 때 제가 수십 번 이야기했어요. ‘사람의 행함이니 방종이니 그것이 아니고 성도의 존재 이유는 증거하는데 있다.’ 라고. 그런데 무슨 말인지 똑같은 이야기를 열댓 번 해도 못 알아들어요. “증거하는데 있다.”고 했거든요.
자, 증거가 뭔지 예를 들겠습니다.
증거와 증거 아닌 것의 차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대머리가 되면 구원 받는다.’ 라는 것이 성경에 있다고 합시다. 이럴 때 누가 증거냐 하면, 대머리 채로 나온 사람은 증거 받은 사람입니다. “주여, 저 대머리입니다. 구원 받았어요.” 이렇게 나오는 것이 증거입니다.
그런데 어떤 것이 증거 아니냐 하면, 자기 머리카락 뽑는 사람. 자기 머리 뽑아서 대머리 만드는 사람. 이것은 행함입니다. 행함과 증거의 차이점을 저는 이것보다 더 깨끗하게 설명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대머리만 나오너라. 대머리만 천당 간다.”고 하면, 이미 대머리 된 사람만 오면 돼요. 아닌 사람은 자기 머리 쥐어뜯지 말고. 그것은 지옥 가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뭐라고 했는가 하면, 예수님이 부활하든 말든 베드로는 고기 잡으러 갔어요. 그런데 고기가 안 잡혔어요. 그 때 동 틀 무렵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하셔서 그대로 했더니 고기 153마리인가 잡았잖아요. 이것이 요한복음 마지막 대목 아닙니까.
이 때 베드로에게 주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었지요. 이 말은, 네가 현재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내가 보기에는 잉여도 아니고 과잉도 아니에요. 그냥 자기 최선의 노력을 다 하는 것뿐이에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니까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했는데, 이것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물으니까 거짓말이 들통 나지요. “주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하고. 이 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네가 백날 날 사랑한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내가 너에게 기대를 거는 것은 아니고, 너는 네가 원치 않는 길로 간다.” 저는 이 말씀에 완전 뽕 갑니다.
베드로는 대머리 안 되고 싶은 거예요. 머리카락 송송 계속 나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대머리 돼야 천당 가는 거라. 그러니까 대머리 되게 하시는 거예요. 대머리는 본인이 원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성도 되겠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우리는 성도 되기 싫어하는 사람이에요. 우리는 내 사랑에 도취되고 싶어요. 그러나 주님이 가만 두지 않습니다. 반드시 우리는 내 사랑을 하되 여기에 과잉과 잉여, 그것이 뭡니까? 십자가의 보혈에 용서라는 그런 여분의 보너스가 항상 우리를 떠나지 않고 주어집니다.
그리고 구원 받는 것은 이 과잉과 잉여, 여분의 것이 주어진 것으로 인해 구원 받습니다. 이 여분의 것은, 이 사람이 창녀인지 깡패인지 묻지 않습니다. 강의 처음에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사랑에는 차별이 없어요. 왜? 모든 인간은 자기사랑 밖에 모르니까. 평생토록 죽도록 자기 사랑밖에 못하니까.
오늘 여기 참석하라고 해도 안 참석하고, 아까 보니까 전화해서 “오지마라!” 하고 집사님이 화를 내고 하시던데, 자기는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고 하거든요. 아까 전화하신 분이. 모르기는 뭘 몰라요. 간단해요. ‘이 세상에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 이겁니다. 자기 사랑이에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 사람에게는 뭐가 없습니까? 잉여와 과잉이 없어요. 그 사람은 평생토록 자기 관리를 누가 해야 돼요? 자기가 관리해야 돼요. 왜? 자기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자기 부인보다 자기가 자기를 더 사랑해요. 자기 자식보다 자기가 자기를 더 사랑하고.
이영하 씨와 선우은 씨. 26년 만에 헤어진다고 안 합니까. ‘헤어져도 서로 사랑하고 --’ 이런 핑계를 대지만. 사람들은 이해가 안 된다는 거예요. 왜 이해가 안 됩니까? 사람의 모든 행위는 지루함을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이것뿐이에요. 한 여자와 한 남자가 오래 살았잖아요. 26년 살았으니까. 지겨울 때도 됐잖아요. 처음에는 ‘저 남자 없이는 못 산다.’고 했지만, 나중에는 ‘저 남자 때문에 못 살겠다.’고 합니다. 지루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양쪽 다 돈이 있어요. 능력 있으니까. 이 지루함을 계속 이어간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지옥 같아요. 그래서 그 지옥에서 구원 받아야지요. 그 구원 방법이 뭡니까? 서로에게 자유를.
어떤 사람이 직업을 구하는 것도 노는 것이 좋지만 노는 것도 하루 이틀 계속 놀아보세요. 지루해서 못 견딥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취직해야 합니다. 노는 것도 타고난 재질이 있어야 잘 놀지 보통 사람은 놀라고 해도 몇 시간 정도이지 더 이상 놀면 지루해서 누가 강제로라도 일시키는 것이 낫지 지루해서 못 놉니다.
노인들의 가장 큰 문제가 ‘돈이 없다. 자식들이 안 찾아온다.’ 등등을 말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시간 때우는 것이 가장 큰 고역입니다. 자식들 보고 찾아오라고 하는 이유가 뭡니까? 놀아달라는 것이지요.
제가 이런 이야기 하는 것은, 사람들은 자기밖에 몰라요. 자기 사랑에 빠져있지 남의 사정은 일체 모릅니다. 남의 사정을 알아준다는 것도 자기 지루함을 면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자기 바깥을 못 벗어납니다. 안 벗어나니까 주님께서 구원하는 방법은 ‘네 안에 갇혀 있어라. 너 위에 덤터기로 씌워서 구원할 게.’
우리가 우리 자신 밖으로 못 나오잖아요. ‘나는 이제부터 내 사랑 안 해야지.’ 이게 안 돼요. 이것은 거짓말이에요. 어떤 사람이 ‘이제부터는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할 때, 물어보세요. “왜 당신은 당신을 사랑 안 하기로 작정했습니까?” “나는 내가 미워서.” 이렇게 말하거든요. 그러니까 “당신이 사랑 안 하겠다고 한 자체가 이미 당신을 사랑하는 방법이다.” 이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양파 껍질을 아무리 벗기고 벗겨도 못 빠져 나오게 되어 있어요. 주님의 구원 방법은 “빠져 나오지 마라.”고 하시고, 그냥 덤터기로 구원 하시는 거예요. 십자가 옆에 있는 강도가 주님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여기서 또 ‘자기를 생각해 달래요.’ 그런데도 구원 받았잖아요. 보세요. 자기 생각해도 구원 받았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그러면 이 사람이 자기 생각한 것이 잘했단 말입니까? 잘한 게 아니고 덤터기로 사랑이 오니까, 잉여와 과잉이 오니까 그 사람이 구원 받은 겁니다.
이러한 사랑이 임하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에 관심을 두게 됩니다. 이렇게 될 때 자기 사랑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그 순간만큼은 줄어들겠지요? 왜냐하면 사랑이라는 것은 대상이 하나로 정해지면 자기 생각을 안 하게 되어 있어요. 이쪽 생각을 깊이 하면 저쪽 생각을 덜하게 돼요.
주님 사랑을 크게 생각하면, 다른 말로 하면 잉여, 과잉, 여분의 것입니다. 추석 때 곶감 한상자 보내달라고 했는데 열 상자가 왔다면 나머지 아홉 상자는 잉여가 되겠지요. 그러니까 주님의 십자가 사랑이란 것은 우리에게는 한 상자 달라고 했는데 열 상자가 온 셈입니다.
아담은 무죄지만 우리는 의인입니다.
로이드존스의 [로마서 강해]에 보면 나오지요. 수도꼭지를 열었는데 잠그는 것을 잊어버렸어요. 양동이에 물이 넘쳐서, 원래는 양동이에 찰만큼 물을 원했는데 수도꼭지 잠그는 것을 잊어서 물이 넘치고 넘쳤는데, 이것을 로이드존스는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치고 또 넘치고 넘친다.” 은혜의 수도꼭지를 안 잠궈서.
이것이 주님의 잉여입니다. 과잉입니다. 너무 큰 사랑을 베풀었어요. 감격밖에 나올 것이 없어요. 그 순간만큼은 누구를 잊어버려요? 나를 잊어버리겠지요. 그게 바로 사도바울이 이야기했던 ‘성령의 열매’라는 것입니다.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이 바로 이런데서 나오는 거예요.
그렇지 않고 ‘온유해야지.’ 하는 것은, 온유하기 전과 온유한 후를 다 챙기려는 것은 누구사랑? 내가 나를 보다 완벽하게 만들려는 내 사랑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베드로후서입니까?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데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벧후1:5) 더하는 것도 전부 주님의 사랑 안에 들어 있는 택배 회사에서 온 곶감 상자들이에요.
사람들이 뭘 모르느냐 하면,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 할 때, 믿음이란 것에다가 덕을 더 보테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사람들의 선입관이 뭐냐 하면, 성경 말씀은 내가 하지 아니하면 내게서 안 지워진다고 여기는 거예요. 그런데 분명히 사랑은 선물로 오는 거예요. 택배로 오는 겁니다. 뚜껑 열어보니까 온유가 배달되었고, 뚜껑 열어보니까 화평이 배달 된 거예요.
그러니까 옆에서 하는 말이 “당신 오늘 왜 그리 온유하노?” “그것은 주님의 선물이 임해서 그런 거지요.” 이렇게 될 때 그것을 은사라고 합니다. 이럴 때 모든 공로는 누구한테 돌아간다? 택배를 보내주신 주님의 공로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에서 나오는 사랑을 더하라고 하니까, 자기가 사랑 유사한 유사품 사랑을 해 놓고 거기다고 혹시 내 자랑할까 싶어서 연습을 해요. ‘형제여, 내가 지금 사랑을 베풀지만 이 모든 것은 다 주님의 은혜입니다.’ 이런 멘트를 후렴처럼 붙여요. 백날 붙여봐야 그것은 지독한 자기 사랑이죠. 이것은 위장술입니다. 이것은 ‘증거’가 아니고 자기 머리털을 자기가 뽑아서 대머리 만들어 천당 가려는 ‘행함’의 일종입니다.
성화론 때문에 논쟁할 때, 가만히 들어보면 우선 ‘증거’라는 말을 모르고, 두 번째 모든 성경 말씀은 다 은사, 택배로 와서 우리에게 현실화 된다는 사실, 하나님의 개입을 인정하지 않고, 내가 만들어야 비로소 생긴다고 이렇게 그 원천을 자기에게서 파내려고 시도하기 때문에 그런 오해가 있어요.
그럴 때 제가 말하지요. “그것은 법입니다. 그렇게 하라고 해버리면 법이 됩니다.” 법이 되면 여기에 뭐가 반드시 도입된다고 했습니까? 그 법을 지켜서 지금의 나보다 더 우수한 나를 만들려 하는 차별화가 시작 되지요.
“그것은 법입니다.” 라고 하니까, 그쪽에서 할 말이 없어서 “그 법도 있지만 이 법도 있다.”고 합니다. 이 법이든 저 법이든 법은 반드시 안 지킴을 염두에 두고 법이 있어요. 이것도 어려운 말인데, 법이란 것이 언제 개입된다고요? 그 법을 못 지킨다는 것을 들통 내기 위해서만 법이라는 말을 쓸 수 있습니다.
유사성이란 것은 다르다는 뜻보다도 진품으로 위장하는 뜻이 강해요. “이게 진짜다.” 라는 것이지요. 요나단과 다윗이 헤어질 때 어떻게 헤어졌는지 아십니까? 요나단이 자기 종에게 시켜서 화살을 쏘게 하지요. 지금 요나단의 아버지가 누구입니까? 사울이죠. 아버지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지 아니면 사랑으로 대하는지 그것을 파악해서, 화살이 넘어가게 되면 다윗을 죽이려는 신호로 알고 도망치라는 뜻이에요. 이것이 요나단과 다윗이 언약을 맺었거든요. 다윗은 숲속에 숨어 있습니다. 그 때 요나단이 화살을 쏩니다. 쏘면서 화살이 넘어간 것이 신호가 되어서 다윗은 도망치라는 신호인줄 알고 도망을 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언약이 곧 만남이 아니고 헤어짐으로 이어지죠. 우리 둘이 언약 맺었다는 말은 우리는 이제 영영 두 번 다시 못 볼 서로 다른 영역으로 갈라질 수밖에 없는 사이라는 거지요. ‘나는 아버지 사울과 함께 죽고 다윗 너는 따로 가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한다.’ 하고 헤어지죠.
하나님의 새언약이 우리에게 들어오면 우리는 언약 속에 있지 않은 사람과 헤어질 준비를 해야 합니다. 더욱 돈독한 게 아니에요. 사는 세계가 달라요. 우리는 안 믿는 사람과 동창회도 하고 친구로 잘 지내고 싶은데, 오늘이고 내일이고 계속 날아오는 택배를 뜯어보면 거기에 믿음, 소망, 사랑 이런 것만 자꾸 하늘나라에서 택배로 주어지는 거예요.
택배회사 이름이 뭡니까? 성령이죠. 성령이란 택배 회사를 통해서 자꾸 선물이 오는데, 그 선물이 뭐냐 하면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영원한 은총이기 때문에 인간의 행위에서는 나올 수 없는 것이고, 하늘에서 던져준 거예요. 그래서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영원합니다.
그래서 제가 장난삼아 이런 이야기했어요. 때로는 믿음이 없다고 가정하고 한 번 살아보시기 바랍니다. 가끔, “나는 믿음 없다. 지금까지 내가 예수 믿은 것은 내가 지어낸 거다. 천당 보내줄까 싶어서.” 그리고 “이제까지 아는 성경 지식도 다 지워버리고, 이제부터는 절이 더 좋다.” 이렇게 일부러라도 다짐에 다짐을 한 번 해 보세요.
이렇게 해서 믿음 끊어지면 그것은 진짜 자신이 만든 믿음입니다. 그래도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이 확실히 믿어지면, 내가 이런 소리하는 그 순간에도 2,000년 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했고 그 십자가의 피가 내 죄를 위한 피 흘리심이란 사실이 믿어지면, 그것은 하늘나라 택배회사에서 온 믿음의 선물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거절할 수 없습니다. 왜? 이것은 우리가 원한 과잉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여분이고 잉여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처음에 사랑을 설명할 때,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게 되면 첫째, 사람들 사이에서 차별이 없다고 이야기 했지요. 그리고 두 번째는 개인의 전, 후 행위에도 차이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교사가 있습니다. 친하게 지내던 교장 선생님께 꾸중을 심하게 들었어요. 내가 전혀 예상치도 못할 정도로 심한 꾸중을 들었어요. 그 때 짜증이 나서 ‘에이, 죽어버릴까.’ 이러잖아요.
전에는 나를 상당히 우호적으로 대하면서 늘 칭찬을 해 주던 교장 선생님이 많은 보는 사람들 앞에서 나를 꾸중을 해서 여러 사람 앞에 우사를 당했단 말이지요. 그래서 짜증나서 죽어버리겠다고 할 때, 그 때 뭘 생각해야 되는가 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칭찬 받을 때나 남한테 욕먹을 때나 상관없이 하나님의 사랑은 잉여고 과잉인 거예요. 이걸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자식이 애먹인다. ‘아이고, 하나님이 내 원대로 안 해 주셨다. 이제 하나님 안 믿겠다.’ 이렇게 나오시면 안 된단 말입니다. 자식이 애를 먹이든 말 잘 듣든 상관없이 주님의 사랑은 여전히 잉여고 과잉이고 여분의 것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목사님들이 강단에 서서 설교할 때 뭘 설교해야 돼요. 잉여, 과잉을 설명하기 위해서 반드시 뭘 설명해야 됩니까? “목사 나는 나밖에 모르는 인간입니다.” 라는 이야기를 짝을 이루어서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만약 목사가 “나는 나밖에 모른다.”는 것을 빼놓고 “하나님의 사랑이 넘칩니다.”라고 하면, 교인들이 “목사 너는 참 좋겠네. 할 짓이 없어서 만날 성경만 보니까 그런 은혜를 받는구먼. 그런데 나는 지금 바쁘거든. 그래서 나는 당신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누릴 여유가 없어.” 대번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요. ‘나도 목사 되면 당신보다 더 은혜롭게 살 수 있다.’ 이렇게 나올 수가 있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여기에서 차별이 생기지요. “하나님을 사랑하세요.” 하는 것이 법이 된다고. 법이 되면 이것은 자기 머리카락을 뽑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자기밖에 모릅니다.’ 라는 것을 깔고, 심지어 ‘목사 나도 나만 챙깁니다.’ 라는 것을 깔고, 그 다음에 잉여와 과잉과 여분의 것을 이야기해 줄 때, 이것은 법이 아니고 이것은 공짜요 은혜요 사랑이라는 것을 안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교인들이 이것을 듣고 난 뒤에 “아하, 목사님이나 우리나 똑같은데, 결국은 내가 바빠서 사랑 없다는 이것이 말이 안 되는구나.” 내가 바쁘든 한가하든 관계없이 주님의 사랑은 잉여요 과잉이요 여분의 것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 직장이나 가정에서 주님에 대한 사랑이 나오지요. 예를 들어 손님을 접대했는데 그 손님이 낮술을 한잔 했어요. 와서 행패를 부립니다. 이 때 “야, 참 더러워서 못해먹겠다. 거래처 손님만 아니면 한 대 때렸으면 좋겠다.” 하는 그 순간 뭘 잊어버렸어요? 참으면 또 하나의 자기 의가 되지요. 자기 의가 되면 ‘역시 나는 훌륭해.’ 이렇게 되거든요.
이렇게 되면 참는 것만 나오지 감사가 안 나오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내가 이렇게 더러운 손님 만나나 나를 잘해주는 손님 만나나 주님의 사랑은 여전히 잉여요 과잉이요 여분의 것으로 주어진다.” 이러면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이런 놈 저런 분 오셔도 감사는 계속 이어집니다.
바로 그 사랑이 있는지를 사도바울은 디도를 통해서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낸 겁니다. 서론을 이렇게 길게 할 수밖에 없어요. 해 보니까 과연 고린도교회가 소문 듣기로는 나쁜 소문이 들렸는데 실제로 와보니까 괜찮다는 평을 내립니다. 그때 사도바울은 굉장히 기쁨을 느끼면서 그래도 그 고린도교회에 안 좋은 소식이 들리니까 그것을 감안해서 이 편지를 보냅니다.
디도서 1장 10절을 봅시다.
“복종치 아니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특별히 할례당 가운데 심하니 저희의 입을 막을 것이라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를 취하려고 마땅치 아니한 것을 가르쳐 집들을 온통 엎드러치는도다”
이러한 안 좋은 것들이 자꾸 섞여 나온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디도서를 공부하면서, 이 그레데 사람들, 디도가 그레데만 아니고 고린도나 다른 지역에도 많이 가거든요. 그 지역을 2차 전도할 때 다 돌아다니니까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는데,
여기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교인들 가운데서 이러한 질 나쁜 교인들이 있을 때,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윤리적으로 처리하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제가 미리 말씀 드립니다. 왜 그런가 하면, 성경에서 ‘이것은 나쁘다. 악한 자다.’ 할 때 윤리, 도덕적 관점에서의 이야기가 아니고, 구약에서부터 나오는데 구약에서 나쁜 사람은 오직 한 부류의 사람밖에 없습니다. 누구냐? 우상 숭배하는 사람들. 구약의 죄는 오직 한 죄밖에 없어요.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바로 유일한 나쁜 짓입니다.
‘아니, 목사님. 구약에서 그것 말고 안식일에 나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부모를 저주하는 사람을 죽이라고 하고, 간음한 사람을 죽이라고 하는 등 여러 가지가 있던데 왜 우상숭배 죄 하나밖에 없다고 합니까?’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참 여호와 하나님과 우상과의 차이점에 의해서 그 사람의 행동이 나타난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안식일에 나무한 인간은 죽이라.’고 할 때, 안식일에 나무 안 하면 괜찮다는 뜻이 아니고, 억지로 참는 것도 문제가 돼요. 그러니까 ‘네가 알고 있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냐’에 따라서 행동도 자연적으로 뒤따라 나오게 되어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수 천, 수 만 가지의 죄가 나오지만 그 모든 죄를 하나로 모아놓으면 이것이 우상숭배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상이라는 것은 거짓 신이에요. ‘유사품에 주의하라.’고 하지요. 우상은 유사 신이에요. 신 아니면서 신이라고 우기는 그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우상숭배 때문에 디도서에 나오는 여러 가지 거짓말도 하고, 악한 일도 하고 하는 이 모든 것이 사도바울이 전하는 참 복음, 참 예수를 모르기 때문에 나오는 현상들로 그렇게 해석을 해 줘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의 할례를 강조한 신명기같은 경우와 결부시킬 수 없습니다. 항상 마음의 할례와 연관되어서 나오는 것입니다. 마음이 달라지지 아니하면 이런 죄들이 언제 어디서나 계속 튀어나올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거짓말 했으니까 그 예수는 엉터리 예수다.’ 라는 뜻이 아니고, 예수 믿는 사람도 거짓말 할 수 있고 매일 거짓 말 하잖아요. 그런데 우상숭배에서 나오는 거짓을 따지고 보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신의 관점에서 나오는 이 거짓말을 이런 성경에서 다룬다 이 말입니다.
참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용도로서 이러한, 우리 보기에는 윤리적으로 보이는 것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그러니까 ‘이것 고치면 괜찮습니다.’ 라는 뜻이 아니고, “당신이 믿는 예수님이 진짜 예수님 맞습니까?” 그런 차원에서 말하는 겁니다.
이것을 모르고 그냥 디도서를 읽으면, 7절을 봅시다.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라는 말씀을 보고, ‘아, 그렇다면 목사는 고집대로 안 하면 훌륭한 목사구나.’ 하지만, 목사치고 고집 없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다 있잖아요. 그러면 고집대로 하면 목사 그만 둬야 됩니까?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 목사가 자기 마누라 구타하고 술을 즐기고 하는 것을 어떻게 하겠어요. 그러면 목사 그만 둬야 되는가? 이런 문제를 자꾸 윤리적으로 접근하니까 ‘당신은 다른 것은 좋은데, 이런 것만 고치면 됩니다.’ 이렇게 해석 하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그렇게 해석하면 안 되고, 지금 디도를 통해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거예요. ‘당신은 뭘 고치면 됩니다.’ 라는 당신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복음을 증거하는데 ‘당신이 잘못된 주님을 증거하면 안 된다.’는 식으로 이야기 한단 말이지요. 말이 너무 어려워져 버렸는데 ---
1절부터 봅시다.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여기 사도가 된 것은 사도를 통해서 뭐가 흘러 들어간단 말입니까? 믿음과 경건과 진리와 영생의 소망 이것이 지금 사도를 통해서 흘러 들어가지요. 그렇다면 지금 관심사가 뭐냐? 사도의 관심사는 하나님이 사도를 통해서 제대로 알려준 그 영원한 약속의 말씀, 거짓이 없는, 그러니까 유사품이 아닌 진짜 영생의 소망, 이런 하나님의 약속 이것이 무엇이냐를 알려 주기 위해서 사도가 너희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디도서란 편지를 받았으면 우리가 제대로 해석하면 뭐가 나와야 돼요? ‘야, 진짜 약속은 이런 것이고 진짜 복음은 이것이구나! 진짜 믿음은 이거구나! 진짜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구나!’ 이것을 알면, 자연적으로 뭐가 없어집니까? 거짓된 것, 탐하는 것, 구타하는 것, 술 취한 것 이런 것들이 없어져 버린단 말입니다. 그런 모습이 안 보인단 말이지요.
근본이 바뀌면 그런 것이 안 나타난단 말입니다. 뭔가 중간에 잘못 전달되었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 구타하는 것이고 술을 즐기는 것이고 급히 분내는 것이고 고집대로 하는 것이고 더러운 이익을 탐내는 것이고 나그네를 대접 안 하는 것이고 절제 안 하는 것이며 --
사도가 전하는 믿음이 중간에 뭔가 잘못 전해졌어요. 복음 내용이 잘못 전해졌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디도서를 보면서 진짜 믿음이 뭐고, 진짜 영생이 뭐냐를 알면 이런 것 걱정 안 해도 그것은 자연적으로 해소가 돼버리는 거죠.
제가 왜 이것을 강조하는가 하면, 사람들이 이 대목을 보면서 자꾸 ‘나는 믿기는 믿는데 앞으로는 화 안 내면 되겠네.’ 이런 식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여러분, 화 내지 마세요. 급하지 마세요.” 시간 없는데 급해야지 뭘. “구타하지 마세요.” 패고 싶은데.
그런 식으로 자꾸 윤리, 도덕으로 멈춰버리면 진짜 중요한 알맹이 영생의 소망 이런 것은 다 끄집어냈는데 이런 껍데기만 해서 하나의 위장이 되지요.
결국 하고 싶은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차별 없는 사랑으로 마지막에 이어지려면 처음부터 차별 없는 사랑으로 여기에 투입이 되어야 차별 없는 사랑으로 나오는 이것이 진짜 경건함이 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2007. 11. 9. 09:43 녹취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