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11월 2일 강의 창세기 22, 24장
울산 11월 2일 강의 창세기 22, 24장
이름 : 우리교회(IP:124.59.84.26)
071102 창세기 22장, 2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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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11-03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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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11-11 17:59
울산071102a창세기22장
20071102a 울산강의-창세기22장 이름 : 한윤범 2007-11-08 18:47:49
(강의:이근호 목사)
창세기 22장 14절에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고 불렀습니다. 여기 아브라함이 그 땅의 이름을 준다는 것은, 이름을 주는 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영향력이 그 땅에도 그대로 존속하게 되는 겁니다.
그림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여기 중간에 아브라함이 있고,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현재 뭘 딛고 있습니까? 땅을 딛고 있지요. 근데 지금 아브라함이 이 땅의 이름을 짓지요. 뭐라고 지었습니까? ‘여호와이레’라는 이름을 지었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이 땅은 새로운 이름을 얻은 거지요.
그런데 여호와이레라는 땅에 이러한 이름을 붙였단 말은, ‘여호와이레’라는 그런 경험을 아브라함이 하늘로부터 이미 그걸 부여받은 거죠. 하늘로부터 ‘여호와이레’다운 어떤 무슨 일이 벌어져서 아브라함이 그 벌어진 결과에 의해서 땅의 이름을 ‘여호와이레’라고 지었다 이 말은 이 땅에 앞으로 뭐가 나온단 말입니까?
아브라함이 경험했던 것이 그 뒤로 이 땅에 계속 남아있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위에서 물을 확 부어버리면 그 물이 아브라함 서 있던 자리, 땅을 촉촉이 적신다면 아브라함이 비록 죽어도 여기는 뭐가 남겠어요? 하나님의 약속은 남겠지요. 이게 우리 역할입니다. 우리 성도 역할이에요. 성도는 자기 노동, 실적을 자기가 챙기려고 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다운 어떤 체험을 이 지상에 남기고 그리고 우리는 그냥 훌쩍 떠나는 겁니다. 떠나버리면 우리가 떠난 자리에 뭐가 남겠어요?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줬던 그 일이 그 땅에 새로운 속성으로써 남게 되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하면, 하늘에서 약속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졌고, 아브라함은 그 약속에 준해서 자기가 있는 땅에다가 그 약속의 이름을 부여함으로 말미암아 이젠 아브라함이 떠났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주신 그 약속은 이 땅에 새로운 역사, 새로운 놀라운 하나님의 일을 ‘여호와이레’에 준해서 여기서 이 땅에서 벌어지는 겁니다.
여기 만약에 아브라함 자리에 누가 오겠어요? 이삭이 오겠지요. 이삭이 오게 되면 하나님이 이삭에게 어떤 준 하나님 약속이 있을 것이고, 그 약속이 전에 있었던 아브라함 받은 약속에다가 중첩이 되겠지요. 또 추가가 되겠지요. 그 이삭이 떠나고 난 뒤에 그 자리에 누가 오겠습니까? 야곱 오겠지요. 야곱이 받은 계시가 맨 그 땅에 또 누적이 되겠지요.
그래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그리고 오늘날 우리의 구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되는 겁니다. 계속 위에서부터 샤워기 물 내려오듯이 계속 내려옵니다. 저는 이것을 가지고 약속이 중요하지, 우리가 안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신약 식으로 한다면 예수님의 새 언약이 중요하지 우리가 안 중요하다. 동일한 말입니다.
이것이 누적이 되면 이 모든 누적된 것이 다 합쳐서 뻥~하고 터져버린 사건이 무슨 사건이냐 하면, 십자가 사건입니다. 다 이루었다. 구약의 아브라함도 누굴 보기를 원했다? 아브라함도 예수님 보기를 원했다. 아브라함뿐이겠습니까? 이삭 마찬가지고, 야곱도 마찬가지고 예수님 오시면 되는데, 예수님 오시면 되는데, 예수님 오시면 우린 영생인데, 예수님 오시면 우린 죽음도 없이 부활인데. 그저 예수님, 메시아여, 어서 오시옵소서. 그 모든 것이 누적이 되어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이 말이에요.
십자가 체험을 했고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 체험을 했다는 것은 이 미리 받았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미리 받았던 체험을 한꺼번에 십자가에서 다 받은 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성도는 어깨 위에 십자가 체험이 있다는 말은 하나님의 매체, 하나님이 활동하는 중간 매체로써 거기 동참이 되는 겁니다.
말은 이렇게 쉽게 하는데 이걸 아주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면, 복음 모르는 인간은 인간도 아니다. 십자가 모르는 인간은 하나님이 인간 취급을 하지 않습니다. 지옥불로 유황불로 저주받는 세계에 보냅니다. 십자가를 모르는 인간은 인간도 아니에요. 다른 말로 하면 십자가 아는 인간만이 인간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인간입니다. 나머지는 아닙니다.
이리 생각하면 무척 대단히 건방지고 뭐, 독선적이고, 패주고 싶고. 그래서 스데반 집사 맞아 죽었지만. 스데반 집사 맞아 죽었습니다. 이래 하겠지만 이게 우리가 우쭐대려고 까불려고 촐랑대려고 하는 소리가 아니고, 성경 골백번 수천 번 읽어도 답은 하나에요. 복음 모르면 허수아비다. 인간 아니다. 저 나무 조각보다 못하다.
노아방주 안 들어간 인간, 인간 취급 안 하고 완전히 시체로 보지요. 완전히 시체로 간주해버려요. 물이 고관대작을 가리지 않고 물로 확 쓸어 내려가 버리죠. 누구만? 방주 안에 들어있는 사람 빼놓고는 고관대작, 민주화운동한 사람, 노동운동한 사람들 그거 가리지 않고, FTA 반대 데모 나갔고, 양파 값 내려라 올려라 그 데모 가담했던 가담 안 했던, 현대중공업 파업에 가담했던 가담 안 했던 상관없이 복음 모르는 사람은 인간 아닙니다.
그러면 목사님, 그런 사람과 우린 헤어질까요? 미쳤다고 헤어집니까? 그 사람 도움 받아야지. 복음 아는 우릴 돕기 위해서 있는 사람들인데 왜 헤어져요. 마음껏 이용해야지요. 헤어지는 왜 헤어져요. 갑자기 왜 헤어져요. 고맙습니다. 하고 마음껏. 어서 오이소. 물건 하나라도 더 팔아야 되고. 복음을 위해서 하나님이 배치해 놓은 사람들인데 왜 헤어져요. 더 친하게 지내야지. 개추도 가고. 술 먹고 이러진 말고. 전부다 복음을 위해. 하나님은 자기 약속을, 새 언약을 위해서 있기 때문에 도와주라고 있는 사람들인데 왜 헤어져요. 엄청나게 도움 받아야지.
어려운 이야기하겠습니다. 이게 뭐냐? 복음 안에서는 약속 안에서는 시간이 역순돼요. 이거 첫째 시간 이거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상당히 어려운데. 창세기 11장을 한번 봅시다. 창세기 11장이 아니고 13장. 13장 14절에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약속은 미리 완료돼있어요. 미리 다 성취돼있는데 누가 모르냐 하면, 아브라함은 몰라요. 약속 성취는 주님의 머리 속에 마음속에 들어있는데 누가 모르느냐 하면, 아브라함이 몰라요. 아브라함은 거기에 하나님의 약속에 지금 어프로치, 접근하는 중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갖고 있는 완결된 종결된 약속의 내용을 아브라함은 지금 차츰차츰 알아가는 중이에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다가가는 게 아니고, 약속이 당겨주지요. 당겨줍니다. 약속이 당겨주면 마치 지남철이 쇳조각을 당기듯이 아브라함은 지 갈 길을 가질 못하고 당기는 대로 당김을 당하는 그런 인생을 살아요. 약속은 이미 완료됐는데 이미 완료된 약속이 아브라함 시대에 거꾸로 접근해서 아브라함을 자기 시대까지 당기는 식으로 가는 겁니다.
이 점에 대해서 우리 성도들이 주님의 약속에 대해서 너무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걱정하는 사람은 약속은 저기 있는데 내가 다가서려 하니까 걱정이 되는 거예요. 주여, 말씀대로 살아야 되는데 아이고, 바쁘다 보니 말씀대로 못 살았습니다. 지가 다가가, 지가. 아이고, 조금만 열심히 하면 하나님의 십자가를 아는데 아이고, 내가 갑자기 무슨 일이 생겨서, 장인어른이 돌아가셔서 경황이 없어서 이래 못했구나. 자기가 다가서는데 그거는 얼토당토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이야기할 때는 약속이 너를 당겨준다는 뜻도 포함되어서 약속을 우릴 안겨줘요. 우리는 만약에 아브라함이 여기 있고 하나님 약속은 여기 있다면, 아브라함 보기에 하나님 약속은 아직도 시간적으로 이만큼 거리가 있어요. 아브라함은 다가서야 되고, 시간적으로 미래니까 다가서야 되고, 약속은 미리 완료된 상태에서 아브라함에게 다가오니까 이게 역순이다 이 말이에요. 내 말이. 시간의 역순이다 말이죠. 이미 우리가 걱정 안 해도 이미 완료된 하나님 안에서 이미 완료된 것이 이만큼 완료된 것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좀 더 내가 어렵게 이야기하지 말고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함 팔잖아요. 함 사세요. 해서 오징어 구멍 뻥뻥 뚫어서 얼굴 뒤집어쓰고, 요새는 아파트에 그런 게 없어요. 왜냐 하면 주민들이 시끄럽다 해서 안 돼요. 온 동네에 함 사시오, 함. 하잖아요. 함 사면 금방 안 들어오지요. 제치잖아요. 돈 봉투 주면 에이, 가준다 하고 그러고 하는데.
아브라함은 자가가 복의 근원이기 때문에 함 사시오, 하나님. 하고 온다고요. 그러면 신부 쪽에서 뭐라고 전갈이 옵니까? 아이고, 그러지 말고 빨리 좀 들어온나. 들어오면 좋은 거 있습니까? 들어오기만 하면 술상 다 봐 놨으니까 빨리 추운데 길거리에서 밀고 당기고 하지 말고 그냥 들어오소. 아이고, 들어오소. 아이고, 와이카노. 자, 이 봉투 받고 빨리 들어오라고 당긴다고요. 함을 받아야 할 것 아닙니까? 신랑 측에서 온 함을 신부 측에서 받아야 되거든요. 빨리 들어오라고 당기지요. 색시는 안 나오고 색시 친구들이 여자친구들이 함을 당기고, 함지고 온 신랑친구들은 함 가지고 제치면서 돈 좀 더 봉투 밟고 들어오게 한다 말이죠.
이미 우리는 함지고 가는 것이 대단한 것 같지만 우리가 지는 함보다도 더 완료된 완성된 영생의 나라 천국이 우리를 아쉽지 않도록 우리를 섭섭지 않도록 다 있습니다. 시편 23편에 뭡니까? 내 잔이 넘치나이다. 여호와는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도다. 마지막에 상을 베푸시고. 내 잔이 넘치나이다. 그때는 넘치도록 아픈 것도 없고, 괴로운 것도 없고, 슬픈 것도 없고 넘치도록 이 세상에선 지금 아플까 싶어서 괴롭고 돈 벌려고 힘들지만, 하지만 우리를 기다리는 주님께서 마련하신 그 잔칫상은 넘치고, 넘치고 또 넘쳐서 감당이 불감당이라. 그 정도로 넘치는 에덴동산보다 더 좋은 행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약속이 우리를 위해서 다 마련했어요. 그 완료된 것이 조금씩, 조금씩 우리에게 시간을 역순해서 방향을 반대로 우리에게 조금씩 맛보기로 탁탁 던져주는 기라. 봉투에 어떤 놈 오만 원 넣어주고. 들어 오라카이 빨리. 십만 원 넣어주고. 이걸 가지고 뭐라 하느냐 하면, 나그네 삶이라 합니다.
정처 없이 허무하게 하는 것은 나그네 삶은 나중에 객사하고 빌어먹고 나중에 늙어 빠져 독수리가 와서 시체 뜯어먹는 아주 비참한 허무주의지만, 성경에서 나그네 삶은 그게 아니고, 빨리 개기지 들어오란 말이죠. 함 그것 가지고 너무 재지 말고 빨리 신부 집에 혼인잔치 벌이자 이 말이죠. 빨리 들어오라 이 말이죠.
우린 그걸 가지고 뭐냐? 환란 중에 즐거워한다는 말이죠. 소망 중에 즐거워한다 말이에요. 이미 소망이 있는데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뭐, 인생 낙오자네, 실패니 내 인생 망가지니. 그런 소리를 함부로 하면 안 됩니다. 시간을 거꾸로 거슬려서 다가오는 약속이 없기 때문에 약속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지가 자꾸 이렇게 지가 천국에 들어가려고 애쓰기 때문에 지쳤다, 안 된다, 실패다, 믿음도 파산이다. 교회 가서 천당 가려고 애썼다만 도저히 목사님, 안 되겠습니다. 교회 그만 나올랍니다. 이것은 뭔가 받은 게 없기 때문에 나온 거예요.
하나님의 믿는 구석이 없어요. 자기가 자기 노린 것만 믿어요. 지, 함 졌다는 것만 믿어요. 그 함 속에 아무것도 안 들어있는데. 자기의 때 묻은 내복 밖에 없어요. 속옷 밖에 없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가 이 땅에 죄 지은 것 밖에 없어요. 그 함은 우리가 그렇게 자랑하는 과거의 이력 같은 그거 보면, 진짜 때가 졸졸한 속옷 밖에 안 들어있습니다. 그거 다 태워버려야 돼요. 사람 죽을 때는 속옷이고 모든 것을 다 태우잖아요.
다 버리듯이 우리가 지고 있는 무거운 인생의 짐이라는 걸 뜯어보면 자기가 참 우사스러운 거, 그런 것들로 가득 차 있어요. 그거 족히 올 천국과 영광과 비교가 안 됩니다. 그런 것은 없어도 그만, 있어도 그만 이에요. 거지 나사로 보세요. 거지 나사로가 무슨 함을 졌습니까? 병든 몸 밖에 더 있어요? 아무것도 없었어요.
창세기 13장 15절, 16절에 보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너희 자손에게 주리라 영원히 이루리라” 얼마나 하나님이 씩씩하십니까? 아니 용감하시잖아요. 줄게. 동서남북 전부다 너 꺼야. 그걸 항상 듣는 아브라함은 생뚱맞게 아무것도 없는데 뭐. 현재 아무것도 없어요. 다만 아브라함이 갖고 있는 것은 뭐냐? 이러한 자신만만한 하나님의 약속, 그 약속뿐이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 약속에 대해서 아브라함이 뭐, 하겠습니다가 없어요. 약속이 당기는데 하고 말고 어디 있어요. 당기는데. 약속이 당기는데 내가 뭘 해서 약속을 하겠습니다는 그런 건 없어.
좀 어려운 이야기입니다만 인간들은 자꾸 실수해요. 아브라함도 그런 실수했는데 니 자손에게 동서남북을 주리라 하니까 아브라함은 자꾸 뭘 생각하느냐 하면, 주리라 하는 약속을 약속이 자기를 장악한다는 생각을 안 하고, 자기가 그 약속을 들은 것을 자기가 지키려고 하려는 문제에요. 지키게 되면 그게 소유가 돼버립니다. 소유가 돼버리면 그 소유 유지한다고 꽤나 애를 먹어요. 나 하나님 말씀 열댓 개 지켰다. 그런데 어제 죄를 지었기 때문에 두 개 놓치고, 내일 세 개로 보충해야지. 맨 날 이런다고. 하나님의 약속은 약속을 지키는 능력까지 우리 소관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수도관이 샌다. 거기 배관 설비하는 곳이지요. 예. 수도관 세는데요? 아이고, 고쳐줄게요. 집에 새 수도관이 없습니다. 허어, 내가 가져간다니까. 그런데 펜치도 없고. 허어, 그것도 우리가 가져가요. 전화했으면 됐지, 왜 자꾸. 기다리세요. 옵니다. 오게 돼있어요. 우리 보고 이거 왜 준비 안 해놨어, 저거 준비 안 했어. 이럴 필요 없어요.
저는 요한복음 12장 보고 큰 은혜를 받았어요.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거기에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가 나오는데 향유를 가지고 예수님의 발에 부어요. 그게 무슨 의민 줄 아시겠습니까? 그게 예수님의 장사를 준비하는 거예요. 이 뭐냐 하면, 향수 가지고 자기 몸에 바르면 지 몸에 향수하지만, 이 향수를 장차 예수님의 죽으시는 그 죽음이 아름답다. 이렇게 향기 날 가치 있는 죽음이라는 것을 자기한테 불 향수를 예수님의 몸에다 갖다 부어버려요.
이건 뭘 의미하느냐 하면, 이 몸은 날 대신해서 죽을 몸이라는 겁니다. 세상에 이런 믿음이. 이런 최고의 믿음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도 깜짝 놀랐어요. 이 여인이 하는 행동은 앞으로 온 복음에 전파될 것이다. 그런데 그 후손들이 뭐, 복음의 해석을 할 줄 알아야 전파되지, 해석도 못하고. 그때 향수 바쳤더니 교회 돈 바쳐라. 그 따위 해석을 하고 있지.
이것은 우리 성도가 뭘 실적과 업적을 남기는 것이 아니고, 자꾸 저쪽 담당입니다. 담당자가 제가 아니고, 약속 담당자는 따로 있습니다. 라는 행위를 하는 겁니다. 누가?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가. 일을 저지르는 것은 예수님이십니다. 내가 아니라니까. 내가 말씀 지켜서 내가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말씀대로 일을 사건이 터지고 일을 저지르고는 담당자가 따로 있습니다. 누굽니까? 예수님이십니다.
그걸 마리아가 믿었어요. 그래서 향수를 예수님 멀쩡하니 살아있는 걸 보고 그냥 향수를 뿌려요. 예수님이 해석을 해버립니다. 저 향수는 내 장사지낼 것을 미리 앞당겨서 알고, 장사지낸 시체에는 뭘 뿌립니까? 향수를 뿌리잖아요. 그걸 산 사람에다 향술 뿌리는 것은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하고 뿌린 것이라고 해석을 내려버립니다.
그러니 마리아 입장에서는 내가 그동안 성경 말씀을 몇 퍼센트 지켰냐 하는 그러한 부담이 전혀 없지요. 자기가 담당자가 아니니까. 자기 구원담당자가 본인이 아니에요. 그걸 가지고 믿는 구석이 있다. 이래 말해요. 믿는 구석이. 니, 와 큰 소리 치노? 난 믿는 구석이 있어. 누굴 믿는데? 안 가르쳐 줘. 그런 사람 있어. 나한테 미리 당겨서 약속 전해준 그분 있어.
그 마리아의 그 행동을 방금 제가 간단하게 설명했는데 이 시간 내내 그걸 잊지 말아야 돼요. 왜냐하면 그것에 비추어서 앞으로 성경해석 그렇게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약속을 부각하는 쪽으로 아브라함이 행동할 수밖에 없는 쪽으로 해석이 돼야 됩니다. 아브라함이 뭘 했느냐가 아니라 아브라함이 뭘 양보하고 약속을 부각하는 쪽으로 행동했느냐 이 말입니다.
이삭을 모리아 산에 갖다 바쳤다.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아까웠지만 주의 약속이 주어졌기에 주의 약속에다가 자기 아들을 합류시켜버려요. 그걸 창세기 22장 한번 봅시다. 창세기 22장에 보면 16절 끝에.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끝에 읽어 볼까요. 시작.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아니 부모가 되서 지 자식 지가 아껴야지. 이게 무슨 이런 말이 있어요. 지 자식 지가 보호하고 아끼고 지켜줘야지, 그럼 누가 지켜줍니까? 근데 하나님이 뭐라 했습니까? 니 아들을 어떻게 했다고요? 아끼지 아니했다는 거죠. 아까워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아까 마리아가 그 아깝고 비싼 향수를 아끼지 아니하고 주님 발에 붓는 그것을 염두에 보세요. 그것은 뭐냐? 자기 위주가 아니고, 뭐 위주다? 약속 위주에요. 약속은 약속 자체가 이미 완료된 거예요. 미완성, 미완료 내 위주가 아니고, 이미 완료된 그 약속 위주다 이 말이죠. 미완성되고, 미완료되고 하루에도 골백번 주의 말씀보다도 세상만 좋아한 돈만 좋아하는 이 미완료, 어설프기 짝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고 해놓고 피해는 남한테 피해주고.
이번에 장례식하면서 아, 인간이란 게 이렇게 피해주는 인간이구나. 죽을 때까지 피해줘요. 죽는 순간까지 자식들에게 피해주고 힘들게 하고. 손님이 천 명 이상 왔어요. 허리 나가는 줄 알았어. 이렇게. 오신 손님하고 이야기도 별로 못했어요. 그 먼데서 오신 분들 이야기도 못했어요. 왜? 또 다음 손님 있으니까. 완전히 이천 번 절하는 불교 중, 완전히. 뱃살이 좀 빠졌으면 나한테 남는 게 있을 텐데.
아껴야지요. 지 자식인데. 그런데 아끼지 아니했어요. 그걸 아끼지 않았다고 칭찬이 늘어져요. 이거 뭔 뜻입니까? 아브라함아, 니는 너 행함보다도 너에게 다가온 약속을 더 부각하는구나. 그러니까 그걸 증거하여, 약속을 증거하는데 강조점을 두고 살아가구나. 그걸 칭찬하는 거예요. 니가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하나님이 주신 약속대로 니가 니 씨를 하늘의 별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하늘의 별같이 많아지게 할 것이다. “니가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그러니까 하늘의 별같이 자식이 바다의 모래같이 많다는 것은 평소에 아브라함이 원했던 바가 아닙니다. 자식은 열댓 명만 해도 많아요. 그런데 이거는 하늘의 별같이 이거는 뭐, 고아원 차릴 일 있습니까? 뭐, 양자 들일 일 있어요. 자식 많은 게 뭐 좋습니까? 키우려 하면 애 먹는데.
요새 자식 세 명만 되도 아주 존경스러워요. 우에 잘 키워요. 키우다, 키우다 못 키우면 방목하든지, 사료 줘서 지가 저거들이 알아서 놀든지 뭐 이렇게 할 수밖에 없지, 그 세 명을 어떻게 다 신경을 쓰겠습니까? 저희끼리 싸우든지 말든지 방치할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별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이것은 뭐냐 하면, 철저하게 이 약속은 너의 허락 없이 일방적으로 너에게 다가가서 너를 이용해서 너를 통해서 약속은 살아있다는 것을 네 시대에 전파하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에 의해서 붙잡힌바 될 때 그것은 약속에 의해서 당겨지고, 약속이 인도하는 대로 갈 수밖에 없는 그런 처지에 우리가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22장을 보면서 우리는 참참 신기하다, 참 아브라함 대단하다 이런 쪽으로 보면 안 되고, 정말 신기하다. 어떤 아버지가 지 자식을 아껴야 되는데 안 아꼈다고 칭찬받는 이런 아버지가 세상에 다 있느냐. 무슨 그런 칭찬이 다 있어요. 아끼지 않았다고 되게 좋아하는 게 어디 있어요. 이때부터 아브라함은 약속이 자기보다 더 세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그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일임하는 식으로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게 23장에 보면 나옵니다. 23장 보기 전에 22장 22절 한번 보겠습니다. “게셋과 하소와 빌다스와 이들랍과 브두엘이라” 끝에 보면 중요한 인물이 끝에 나오는데 브두엘이 나오죠. 이 브두엘이 누구냐 하면, 아브라함의 동생 자식들 명단이 나옵니다.
여러분, 춥습니까? 안 추워요.
브두엘이 나오는데 브두엘이 여기서 왜 나오는지 이제부터 23장을 보겠습니다. 오늘 23장 해보겠습니다. 아참, 23장 전에 한 가지 더 할 게 있네. 22장 17절.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이래 돼있습니다.
갑자기 하나님께서 대적의 문을 얻는다 했으니까 아브라함한테는 이거는 생소한 거죠. 아브라함에게 적이라 하는 것은 그 당시에 전쟁했던 다섯 종족 그것 밖에 없는데 대적의 문을 열리라. 이 뭐냐 이건? 그러니까 이거는 아브라함도 자세히는 몰라요. 왜냐하면 약속이 다가오기 때문에 자세히는 모르고, 하여튼 약속이 덤터기로 완전히 우리한테 머리 위에 퍽 덮어씌운다 이 말이죠.
너는 예를 들어서 지금 여러분들이 울산이 사시는데 주님께서 길에 가시다가 성령께서 알려줍니다. 아무개야, 너는 죽었다가 부활한다. 그럼 뭡니까? 죽는 것은 사람의 정하신 거고, 다시 부활한다. 부활을 따내란 말입니까, 부활되도록 애쓰란 말입니까? 그게 아니고, 니는 죽어도 안 죽는다 이 말 아닙니까? 영생 얻는단 말 아닙니까?
그럼 그 영생이란 약속이 길 가다가도 울산시내 복잡한 길 가다가도 너는 영생 얻으리라 그게 덤터기로 씌우면 이 땅에 걱정할 게 뭐가 있느냐 말이죠. 아침에 가스 불 안 끄고 왔는데, 가스 불 안 꺼도 영생 얻습니다. 이웃집에 세 들어 주인하고 물 값 때문에 싸웠는데 물 값 때문에 싸우고 또 싸워도 영생 얻는데 지장 없어요. 아무 지장 없어요. 아 성적이 한 십 등 내려갔는데 내려가도 영생 얻는 건 아무 지장 없습니다.
그래 덤터기로 뭔가 씌워져야 돼요. 말씀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말씀으로써 완전히 덤터기로 씌워져서 말씀이 내 행위보다 더 우월함을, 더 위층에 있음을, 이층집에 있음을, 상위차원에 있음을 알아야 돼요. 그래야 우리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벗어지지. 뭐, 교회 가서 빨리 구원 얻어야 될 건데. 구원에서 딸 수 있는 그런 행위는 없습니다. 행위로 구원 받지 않습니다.
어떤 행위를 해 보세요. 구원 얻는가? 안 됩니다. 말씀이 덤터기로 우리에게 덮어씌워야 돼요. 위에서. 한 오층에서 길 가는 사람들 바깨스로 물 확 버리면 물 확 뒤집어 씌듯이 그런 재수 좋은 날이 있어야 돼요. 말씀으로 우리가 머리부터 생쥐 꼴이 돼야 됩니다. 그렇게 돼야 돼요.
그중에 하나가 23장에 나옵니다. 23장에 보면 사라가 죽어요. 사라가 일백이십칠 세에 죽습니다. 죽는데 사라가 죽는 게 문제가 아니에요. 사라가 죽는 걸 통해서 또 약속이 튀어나와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약속은 사라가, 하나님이 죽였다는 말은 어폐가 있는 거고, 약속에 의해서 사라가 죽어줘야 되는 겁니다. 우리 죽음도 마찬가지에요. 이근호, 너는 좀 죽어줘야 돼.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사람은 사나 죽으나 주님의 약속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약속이 때가 되면 죽어줘야 돼요. 스데반 집사도 알아서 그때 되어 죽어줘야 되는 겁니다.
성도의 죽음은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병든 사람, 차마 어떻게 아파서 몸부림치는 암에 걸려서 고통하는 사람, 어느 자식이 자기 아버지 그런데 목 졸라 죽이는 그런 불효 못해요. 심지어 너무 아파서 애야, 나 목 졸라 죽여라. 해도 어떻게 감히 목 졸라 죽입니까? 자식을 살인자로 만드는데. 그런데 목 졸라 죽이시는 분이 있어요. 누가? 하나님의 약속이. 사람이 아무리 지독해도 죽으면 편안~합니다.
지는 땡 잡았어. 자식들은 아이고, 아버지여. 이제 가시면 우리 우에 삽니까? 특히 자기 배우자 같은 경우에 우울증 걸려서 허전해서 종잡을 수 없어. 붕붕 뜨는 것 같아. 도대체 정신이 넋이 나가 버려요. 한 육 개월 동안. 나이 많아서 자기 배우자 죽으면 그 정도 돼버려요. 왜냐하면 잔소리하는 사람 없기 때문에. 달달달 잔소릴 해야 자기 존재감이 성립되는데 존재감, 정체성이 성립되는데, 집에 잔소리 할 사람이 없어요. 그러니까 자기 존재성이 날아가 버렸으니까 미치는 기라. 내가 누군지를 몰라요.
남편이 십일 간 출장가 보세요. 뭘 해도 재미가 없지요. 설거지도 재미가 없고, 설거지 안 하고 이래 놔두고, 아침에 이불도 안 개고. 뭐, 남편이 없는데 이거 해서 뭐 하노 말이죠. 남편 출장 갔다가 돌아오기 한 이틀 전에 후다닥 온단다. 설거지도 해놓고 이불도 새로 빨아놓고, 호청 다려놓고 난리법석하지요. 그래서 출장 갔다 오면 그때부터 잔소리 시작하는 거예요.
존재감이 박탁, 존재성이 박탈돼버려요. 넋이 나가버립니다. 하지만 그렇게 아프고, 아프고 모진 고통에 있는 사람은 땡 잡았지, 뭐요. 좋지. 죽었으니까. 육체가 죽고 없는데 그때부터 쉼이 있으리라. 하나님의 죽이심보다 더 큰 땡 잡은 게 어디 있어요. 최곱니다, 최고. 편안하게. 그래 성도의 죽음은 안식이라 안 했습니까? 이제는 편히 쉬란 말이죠. 본인은 좋고, 떠나는 사람은 아쉽고. 우는 게 죽은 사람보고 우는 게 아니고, 지 신세가 처절해서 우는 거예요.
사라를 죽이십니다. 죽이는데 그냥 죽이는 게 아니라 죽이는 걸 통해서 또 사라를 죽이는 완료된 약속의 다른 면, 몰랐던 면이 톡 튀어 나와요. 치약 짜면 톡 뭐 나오듯이. 주님께서 사라를 죽이심으로 말미암아 그 사라 죽음 자체도 하나 계시가 되서, 살든지 죽든지 주님이 거기서 새록새록 나오도록 그렇게 합니다.
그리고 사라가 죽고 난 뒤에 뭘 또 새로운 게 있느냐 하면, 이게 뭐냐 하면, 사라를 장사하기 위해서 남편 된 아브라함이 그 지역 사람들에게 장사지낼 묘실, 선친이라 하죠. 선친 땅을 마련하려고 이렇게 계약을 합니다. 그러니까 그 지역사람들이 하는 말이, 그러지 말고 우리가 그냥 줄게. 라고 했거든요. No. 아브라함은 거부해버려요. 이게 또 중요해요. 왜냐하면 그 땅을 그냥 가져버리면 그 땅에서 나그네라는 인식이 사라져버립니다.
아브라함은 끝까지 나그네여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지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다 이 땅에서 무슨 삶을 살았다? 나그네 삶을 살았다. 떠돌이 삶이에요. 이 땅이 고향이 아니다 이 말이죠. 그러나 그 주위에 있던 이방민족은 당신은 우리의 선지자요 방백이기 때문에 우리와 더불어 살 사람이라고, 더불어 하는 거예요. 친구 아이가. 같은 입장 아이가. 아브라함은 같은 입장 아니거든. 니 세계 따로 있고, 우리들 갈 세계 따로 있다는 겁니다.
장사지낸다 했는데, 요한복음 12장 꼭 기억하라 했지요. 거기 뭡니까? 마리아가 예수님의 장사지냄을 위해서 자기가 시집갈 때 쓰려고 했던 향수를 예수님 발에다 부어버립니다. 부을 때 그 순간 예수님의 죽으심이란 그 약속이 부각이 되고 그게 올라가죠. 그게 뜻이 활용되죠. 아브라함은 장사지낼 자리를 거저 주겠다는 것을 마다하고 기어이 값을 주고 사요. 그게 뭐냐 하면, 땅값을 은 사백 세겔을 4.5 킬론데 이걸 헷 족속한테 기어이 땅값을 달아주고 그걸 사게 됩니다. 값을 주고 사게 됩니다.
이것은 소유지가 소유지 없는 곳에 자기만의 소유지를 따로 만들어요. 이거는 한 통속으로 그러니까 이방민족과 같이 어울리는 같은 레벨의 같은 수준에서 같은 영토 안에 일부라는 개념이 아니고, 여기서 똑 떨어져 나온 이방인들이 생각하는 그런 땅의 개념이 아니라 독특한 다른 개념, 개념이 새롭게 피어있는 아브라함 자손만의 소유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 의한 소유지를 따로 이렇게 장만하죠. 이 소유지는 다른 땅과는 차이 나는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의미라 하는 것은 나중에 창세기 끝에 보면 나와요. 바로 애굽에 내려갔던 요셉이 뭘 앞장세워서 이 소유지를 향하여 진격하느냐 하면, 바로 요셉의 해골을 앞장세웁니다. 죽은 해골 앞장세워 뭐 할 건데? 이 해골은 바로 약속을 보증합니다. 그러니까 이 소유지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고, 죽음에서 영생을 보여주는 그걸 증거하기 위해서 장사지내는 소유지에다 이 땅의 중심을 삼는 거예요.
그러니까 영생 얻을 자의 흔적은 이 땅에서 죽음이라는 겁니다. 죽은 자들, 해골이 모여지는 그것이 하늘의 천국과 이 땅의 유일한 접촉지점이 된다는 겁니다. 미국에 보면 우주 로켓을 미국의 아무 주나 날립니까? 어디서 날립니까? 오직 텍사스줍니까? 무슨 주인지 모르겠다. 나사 있는 곳, 거기서 우주정거장 있지요. 우주정거장에서 쏘아야 달까지 로켓이 올라가듯이 이 약속이 담았고 죽었던 매장지가 지구상 유일하게 영생과 통하는 우주정거장이 되는 겁니다.
우리를 뭐라 합니까? 예수님께서 너를 값 주고 샀다 했지요. 예수님 십자가 죽은 장소에요, 이게. 예수님 십자가 죽었다가 부활한 장소에요. 이 장소가. 이것이 확대되면 나중에 예루살렘까지 갈보리 언덕까지 전부다 포함되지만 어쨌든 이 장소가 죽음의 의미를 보통 죽음은 끝인데, 하나님의 약속이 장차 올 약속이 이 땅에 흔적을 남긴다는 유일한 흔적은 뭐냐? 죽었다는 하나님의 약속된 사람이 죽고, 죽고, 죽고 그 약속된 메시아가 죽은 그 장소가 하나님의 약속이 보장된 영생이 보장된 유일한 장소라는 겁니다. 이게 참 어려운 이야기에요, 이게.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은 곳이 그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를 행한 그 장소가 약속된 장소가 아니에요. 마지막 장소는 예수님이 어찌하여 버리시나이까 죽었던 그 죽음, 죽음이 하늘에 영생이 있음을 보여주는 유일한 흔적으로써 작용한다.
당신은 뭘 믿습니까?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예수님과 그의 죽으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한다. 예수님의 세계가 이 땅에 매치되는 유일한 장소는 나의 죽음도 아니에요. 이근호 죽음도 아니고 열성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외에는 나는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그 죽음에 아브라함도 합류되고, 이삭도 합류되고, 요셉마저 해골지고 합류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죽음 안에 비로소 생명이 있기 때문에.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않고서는 결코 너희에게 생명이 없느니라. 예수님 이 한 소리하니까 왔던 제자들 다 떠나고 두 번 다시 그와 다니지 아니했더라. 참 이상하죠. 예수님 쫓아가기 위해서 수 백리, 수십 킬로를 힘들지만 그걸 마다하지 않고 따라왔던 그 사람이 말 한 마디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것이 정말 신기하지 않아요. 말 한 마디에.
니가 나를 찾는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오늘날 한국교회 교인들하고 똑같아요. 니가 교회를 찾아오고 철야기도를 하는 이유는, 니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나는 너에게 내 살과 내 피만 이야기한다. 하니까 교회 그때부터 텅텅 비기 시작했어요. 다 가버렸어. 두 번 다시 그와 다니지 아니하였더라.
그래서 예수님께서 끝에 하는 말씀이 뭡니까? “아버지께서 내게 오게 하지 아니하면 아무도 올 수 없다.” 어떤 인간이 죽음마저 이기고, 죽음 뒤에는 영생이 있다는 걸 눈치 챌 인간이, 인간의 능력으로 그게 될 수 있는 거냐 말이죠. 예수님 죽으신 뒤에 영생이 있다는 것을 영생이 위치한 자리가 예수님 죽음 안에 들어있다는 거예요. 죽음이라 우물 속에 손 넣어보면 그 안에 영생을 끄집어낼 수 있다는 것을 누가 알겠느냐 이 말이죠. 전부다 살려고 애쓰지 예수님 죽음 속에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 누가 있느냐 이 말이죠.
일본의 이상한 영화, 무서운 영화 [링]이란 영화에 보면, 그 영화 안 봤습니다만 난 무서운 영화 간이 약해서 못 봐요. 머리 푼 귀신이 우물에서 나와서 티브이 속으로 막 기어 나오는 거. 링이란 영화 보면 티브이 화면 속으로 기어 나오는 거 있어요. 그게 원래 우물 속에 있던 건데요.
죽음의 우물 속에 주님의 영생이 있고, 다른 장소엔 없어요. 영생이 없어요. 오병이어, 아니에요. 물 위를 걸었다. 소용없어요. 산상설교 다 지켜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교회 부흥시켰다. 아닙니다. 주여, 주여 내가 기적을 행했나이다. 나, 니 모른다. 몰라요. 아무것도 몰라요.
주님이 가신 그 십자가 속에 거기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갈라디아서 6장에서 하는 말입니다. 내가 십자가 안에 있어 하는데, 한번 봅시다. 갈라디아서 6장 15절. 이 대목 상당히 중요합니다. 몇 페이지인가 모르겠다. 309페이지. 14절. 누가 한번 읽어 보세요.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이걸 말을 바꿔봅시다. 어떻게 바꾸느냐 하면, ‘그러나 내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우물 밖에’ 그 죽음의 우물 밖에 자랑할 것이 없으니 세상이 나에 대해서 우물에 빠져 죽고. 나는 세상에 대해서 우물에 빠져 죽었다 이 말입니다. 어두운 우물 속에 갇혀있어서 우물 속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나는. 사도 바울은 죽음의 우물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니까 저 놈들은 죽은 놈이고, 세상 보기에는 사도 바울이 우물 속에 빠져 죽었데이. 세상 봐서는 나를 죽은 놈으로 본다. 죽은 놈으로.
그런데 우물 속에 있는 사도 바울이 보니까 누가 죽은 놈이에요? 우물 속에 안 들어오니까 지가 고관대작이라 하더라도 방주 밖에 나가면 물에 씻겨가듯이 십자가 복음 모르니까 죽은 놈이라니까. 그걸. 한국교회 부흥된 것이 십자가 이야기해서 부흥된 게 아닙니다. 떡을 준다고 소문나서 온 거예요. 빌면 떡 준다는 거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란 말이지요. 그래서 부흥된 거예요. 그래서 돈 모아서 교회 짓고, 교회 지니까 천당 갈까 싶어서 큰 교회 더 모이는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이 새순교회 안 옵니다. 큰 교회 갈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왜 왔느냐? 아버지께서 당겨주니까 당길 수밖에 없는 거예요. 물론 우리가 당기면서 저쪽 바라보지만. 우리 교회 언제 부흥되노? 우리 교회 교인들 언제 재벌되노? 귀는 당겨가면서 저쪽을 아, 부러워 죽겠다. 이래 보고 있지만 이 당기는 힘이 더 세기 때문에 계속 당겨가는 거지요. 이 당기는 힘이 더 세다카이. 이 당기는 힘이 팽하고 다시 저쪽으로 가버려요. 그런 사람 안 많습니까? 복음, 복음 하다가 돈 안 되니까 에이, 복음이고 뭐고 세상 이쪽으로 나가자. 뭐, 성화론이 어떠니, 개혁주의가 어떠니 다.
그거는 그 사람은 자기가 시간을 역순으로 거슬러오는 약속이 온 게 아니고, 자기가 그냥 애 쓴 거예요. 약속이 있는 곳으로 가려고 애를 썼는데 백날 애 써도 나중에 피곤해서 못 가요. 지쳤어요. 아이고, 말씀대로 살리, 십자가대로 살리. 십자가대로 살면 돈 생길 줄 알았더니 십자가도 돈 안 생기고, 에이 세상 가버리자.
제가 얼마 전에 썼던 글, 사모님과 목사들 글 봤지요. 일반 교인들은 그 생생한 면을 체험을 못해요. 사모님들 보셔야 야, 참 이 글 생생하다. 느낄 거예요. 목사님들, 사모님들 보면 이 글 생생할 거예요. 그 글을 왜 아이고, 목사님. 왜 상처 주는 이제 사모까지 상처 줍니까? 왜 상처 주는 말을 합니까? 제가 상처 줬다고 해서 상처 받으면 그거는 분명히 당기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나중엔 결국 돌아갈 사람이란 말이죠. 그 정도로 상처 줘도 복음 안다면, 그건 진짜 위대한 사람이죠. 위대한 사모가 되는 겁니다.
어떤 분이 그 글을 쓰니까 목사님은 사모님한테 많이 당했는 모양이라 하는데, 제 아내는 그 글을 교정을 봤습니다. 글자 틀린 거 교정 봤습니다. 일차는 통과했죠. 무슨 뜻인가 알고 교정 봤는가 그건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약속이 아브라함의 행동보다 더 셉니다.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행한 것도 없고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행한 것도 없이 경건치 않는 자를 의롭다 하는 복을 아브라함이 미리 당겨서 다 받았어요. 자꾸 아브라함의 귀를 당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사람은 죽으면 그만이지만, 죽으면 그만이 아니라 그 죽음 자체를 아브라함은 중요시 봐서 값을 주고 사서, 너거들 땅하고 내 땅하고 달라. 이 놈들아. 같은 줄 알았더냐. 기어이 값을 치루고 삽니다. 내 세계는 네 세계가 따라와도 못 따라온다. 이 세계가 어떤 세계인데 너희들이 흉내를 내. 안 돼.
이 세계는 약속이 나중에 여기서 폭발하는 무덤이에요. 이 무덤이 보통 무덤 아닙니다. 요셉이 해골 쥐고 진격하면 홍해 강가도 다 열립니다. 그러니까 여리고 성도 무너지고, 모든 열 족속 다 물러가야 되는 요셉의 해골, 여호수아 마지막에 뭡니까? 결국은 성공해서 여호수아 마지막 대목에 보면 여호수아 24장 32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이끌어낸 요셉의 뼈를” 어데 장사했더라? “세겜에 묻었더라”
값을 주고 산 땅, 약속의 땅을 미리 땅 될 걸 돈 주고 미리 사서 이거는 하나님께서 값을 주고 산 땅이다. 예수님이 우릴 구원할 때 여러분, 십자가 피가 공짜가 아니고, 그만큼 값을 치루고 하는 겁니다. 값을 치뤘다 한다 이 말이죠. 하나님께서 우리한테 안 집니다. 우릴 십자가 피로 용서했잖아요. 그 십자가 피 공짜 아닙니다. 그 값을 평생 동안 다 치러 냅니다. 우리한테.
세상이 좋아서, 돈 좋아서 백날 가 보세요. 기어이 이거 들고 이 귀 들고 이리 와, 이리 와. 저게 좋은데. 이리 와. 더 세게 값을 합니다. 십자가 우물 속으로 잡아당기고 당겨버립니다. 영생의 힘에서 빠져나갈 위인이 없어요. 성도치고 영생 못 받을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의롭다 하는 그 아주 완악한, 완악이 아니지, 아주 완력 속에서 그 힘 속에서 아무도 헤어날 수 없어요.
우리의 죽음까지 철저하게 우리의 죽는 순간까지라도 주님께선 우리 죽음을 통해서 대외적으로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을 전파하는 용도로 우리의 죽음까지 활용하십니다. 우리의 죽는 것도 활용하는데 평소에 생활 통해 활용 안 하겠습니까?
여러분, 마음껏 돈 좋아하시고 이렇게 이야기하세요. 그런데 난 돈으로 구원받는 거 아니거든. 나는 구원 받는 거 따로 있지롱^^ 그거는 뭐냐? 십자가 죽음의 우물. 나를 빠뜨리는 십자가 우물이 있어요. 그 안에 영생이 돈 좋아하는 나도 구원받거든. 니 약 오르지. 싫으면 예수 믿든지. 그렇게 해요.
10분 쉽시다.
우리교회(IP:220.♡.176.141)
07-11-11 18:00
울산071102b창세기24장
20071102b 울산강의-창세기 24장
(강의:이근호 목사)
지난 시간에 보통 죽음이라 하는 것은 그것은 모든 것이 별 볼 일없는 게 되는데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죽음이 도리어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보여주는 본격적인 중요한 사건을 죽음으로 봤다 이 말입니다. 비록 죽더라도 그 죽음에 담겨있는 약속의 힘은 여전히 이 땅에서 힘을 발휘하게 된다. 결국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의 죽음과 무관하게 인간이 죽어 없어져도 하나님의 약속은 죽음을 모르고, 죽음을 통해서 더욱더 발현되는 그런 개념입니다.
거기 비해서 이방민족들은 우리가 있는 보통 무덤과 같이 동급으로 생각해서 좋은 것 땅 해서 무덤하세요. 아, 그런 식으론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죽음은 당신 죽음과 다릅니다. 독특한 죽음입니다. 죽음이 일을 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막벨라 땅을 사서 사라를 거기다 묻고, 나중에 보면 아브라함 본인도 그 속에 묻힙니다. 물론 이삭도 야곱도 그리고 요셉도, 요셉은 그거지만 야곱까지 그렇게 하고, 나중에 그 땅이 확대 되서 약속의 땅으로.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 조상이 약속을 품고 죽었던 조상이 약속대로 값을 주고 산 이 무덤 있는 이 곳 전체가 약속대로 하나님의 땅이 되었구나. 라는 것을 증거하는 용도로 나중에 확산이 되는 겁니다.
24장에 넘어가게 되면, 무덤이라 하는 것이 사람은 죽어도 약속은 죽지 않는다. 그런 뜻이죠. 24장에 넘어오면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의 배필을 생각해서 4절에 보면,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이렇게 합니다.
그렇다면 이걸 그림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그림으로 그리면, 이게 지중해고 이게 현재 이스라엘, 레바논, 시리아, 터어키, 이태리 이런데. 이게 지금 이라크 아닙니까? 이라크 전쟁. 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가 여기 있는데. 여기 이라크 근처 여기에 갈대아 우르 본래 아브라함 고향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이렇게 와서 현재 약속의 땅 여기까지 들어왔거든요. 지중해 여기 있고, 아프리카 이집트 여기 있는데.
다시 자기 종을 본토 아비 집에 보냅니다. 보내는데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하나님 지시이기도 하지만 여기에 보면 9절에 보면, “종이 이에 주인 아브라함의 환도뼈 아래 손을 넣고” 환도뼈에 손을 넣는다 하는 것은 뭐냐 하면, 환도뼈라 하는 것은 남자의 생식기입니다. 이것은 바로 신성한 핏줄. 하나님이 아브라함 핏줄을 하나님께서 선택했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선택했다. 그러니까 약속이 살아있고 약속이 작용하는 그러한 핏줄이기에 그 핏줄에 주신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는 뜻에서 하는 겁니다.
종이나 아브라함이나 전부다 어디다 몰두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주신 약속대로만 되게 하옵소서. 쉽게 말하면,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내 몸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이 말입니다. 나의 핏줄은 포기하고 주님께서 약속의 핏줄대로 되게 하옵소서. 그런 식으로 기도하는 거죠.
기도란 것은 간단해요. 하늘의 뜻이 기도하는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그럼 그런 기도하려면 누구 뜻이 날아가 버려야 돼요? 내 뜻은 밟고 지나가게 하옵소서. 내 뜻대로 안 되게 하옵소서. 절대로 내 뜻대로 안 되게 하옵소서. 오직 하나님의 뜻만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그러면 목사님, 그럴 것 같으면 기도 안 해도 되는 건 어떻게 생각합니까? 기도를 안 하게 되면 마지못해 주어진 현실을 마지못해 아이고, 주의 뜻이니 어쩌나? 할 수 없이 견뎌야지. 이래 된다니까. 마지못해. 감사가 안 되지요. 오늘 하루도 주의 뜻대로 되게 하옵소서. 진정으로 주의 뜻이라면, 하루 온 종일 다 감사, 감사가 되지요. 왜? 내 뜻이 아니기 때문에. 주의 뜻인데.
아이 참 뭐, 주의 뜻대로 하려면 하세요. 내가 뭐 하나님도 아니고, 우짜겠노? 뭐, 하나님이 하겠다는데 싫어도 따라가 줘야지. 축 쳐져서 삐져있는 거예요. 감사와 고마움 이런 게 없어지고 마지못해 예, 믿습니다. 주의 은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니 뭐, 뭔가 싫나? 싫은 건 아니고 하나님이, 하나님이 알아서 해버리는데 제가 반발해도 안 되잖아. 어떻겠습니까? 그럼 내 하는 게 못마땅하다 이 말이지? 못마땅해도 어쩌겠습니까? 하나님인데. 이렇게 삐딱하게 나오지요.
그런데 아침에 주의 뜻대로 되게 하옵소서. 하면 저녁에도 오늘 하루도 주의 뜻대로 이렇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것은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주님과 우리 사이가 남남이 아니고, 한 가족이니까 아버지 하는 일에 동조를 하고 자발적으로 참여를 하는 것이 좋지, 질질 마지못해 끌려가는 식은 안 되잖아요.
그래서 제 강의 하고 난 뒤에 그럼 목사님, 기도할 게 없네요. 맨 날 끝에 그런 소리 나오는 것은 뭐냐 하면, 관심사가 자아한테 관심 있어요. 내 기쁜 거, 내가 기뻐야 하나님답다. 이러면 이건 내가 만든 하나님이에요. 내가 만든 하나님 같으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하나님 뜻도 내가 만들어요. 내가 하나님 뜻을 내가 일방적으로 만들어놓고 그대로 해주면 하나님이 하신 거고, 안 하면 나쁜 하나님 돼버려요.
제가 지난 수요일 날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앉은뱅이 뭐라고 했습니까? 맨 날 돈 줘, 돈 줘. 베드로와 요한이 아주 냉정하게 이야기했어요. 내게 돈 없다. 나는 금과 은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 네게 줄게. 니 달라는 것 내 안 준다. 금과 은은 내 없다. 맨 날 거지가 자기는 앉은뱅이 밖에 없으니까 앉은뱅이를 부각시켜서 그걸 장점으로 삼아서 돈 뜯을 밑천으로 삼는 거예요. 앉은뱅이잖아. 돈 줘. 이 말이에요. 베드로는 돈 없다. 돈 없으면 왜 오노? 네게는 없고, 내게 있는 것 줄게. 그게 뭔데? 나사렛 이름으로 걸어라.
예수 이름은 소유용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 이름이 자기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너도 나처럼 주님한테 소유돼봐라. 제발 니가 돈 소유하려 하지 말고 누구로부터 소유함 당해 봐라. 니도. 주님께서 너를 사용하도록 해봐라. 이 말이죠. 그리고 그걸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도록. 마지못해가 아니라.
아브라함은 신성한 핏줄 되기를 원합니다. 하는 뜻에서 종하고 기도해서 나뿐만 아니고, 내 자식도 하나님 주신 약속의 핏줄 되기를 원한다. 그러니까 고향처녀를 원한다는 말은 우리 집안은 차이 나는 집안, 보통 집안이 아니고, 약속이 작용하는 집안이라는 뜻입니다. 이걸 우리는 자식들에게 유언으로 남겨야 돼요. 사실은. 하나님의 약속을 전파하는 것이 우리 죽을 때까지 우리 자식들에게 이야기할 겁니다. 우리 집안은 보통 집안이 아니다. 주의 약속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집안이다. 그렇게 해야 되죠.
그런데 이런 문제 가지고 그러면 목사님, 신자 아니면 남잔데 아들이 교회 나가는데 예수 안 믿는 여자하고 그러면 결혼하면 안 됩니까? 하는데 교회 다니는 것이 천당 가는 것입니까? 종교를 하나 갖는 것이지, 그게 천당, 지옥하고 관계없잖아요.
어떤 남자를 어떤 여자를 사랑할 때에 종교를 뛰어넘어서 왠지 저 여자는 사랑하고 싶어라. 왠지. 이거는 인력이 아니고, 진짜 사랑이 오면 주체를 못해요. 사람이. 주체를 자기가 못해요. 상사병은 진짜 큰 병입니다. 어떻게? 밥 맛 떨어지지요. 잠 못 자지요. 잠자도 그녀 얼굴 보이지요. 손에 일 안 잡히지요. 그녀를 만나기 전에 100미터 전에 가면 가슴이 두근거리지요.
이래 돼버리면 종교고 신학이고 나발이고 그 모든 것도 국경과 나이, 열두 살 차이 난다? 그것도 문제 아니에요. [아현동 마님] 괜히 싫어서 그렇지 열두 살 차이 뭔데. 사랑하는데. 지났구나. 아현동 마님 할 시간. 아무것도 아니라. 전부다. 사랑한다는데.
이것은 인력이 아니고,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어 그렇습니다. 그 뜻은 뭐냐? 신자든 불신자든 사랑하는 여자가 불신자라 해서 죽을 때까지 불신자로 남아도 그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 주의 뜻일 수가 있어요. 뭐냐 하면, 불신자 한번 당해봐라 이 말이죠. 당해보는 가운데서 신앙에 하나님 주신 선물이 얼마나 고귀한 걸 알고, 깨닫는 방법이 있고.
또는 성경에 나오는 대로 안 믿는 여자와 믿는 남자 해서 안 믿는 여자까지 용서를 얻을 수 있는 방편이 될 수 도 있고. 그 결과는 하나님이 알지 우린 몰라요. 어쨌든 결혼할 때 중요한 것은 사랑으로 해야 된다는 겁니다. 저 사람은 교회 다니니까 유리하겠지. 그런 통박 굴리는 것은 안 돼요. 그런 식으로 하나님께 맡겨야 되는 겁니다.
맡길 때 12절에 보니까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오늘날 나로 순적히 만나게 하사 나의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주여, 순적히. 아주 일이 잘 풀려서 진짜 하나님이 원하시는 찍어놓은 그 배우자 원합니다. 라고 하고 있는데 마침 어떤 아가씨들이 물 길러 나왔지요. 그래서 종이 가서 하죠. 내 물 좀 마시게 해 달라. 물주니까 이번엔 나귀에게 물 줘라. 물주거든요.
그러니까 슬슬 그때부터 작업에 들어갑니다. 실은 내가 이까지 온 게 우리 주인의 아들에게 배우자 했는데 그 사람은 자기 친척만 원하더라. 내가 바로 아까 이야기한 누구 딸이냐 하면, 브두엘. 삼촌의 딸을 만나죠. 이삭의 삼촌의 딸을 만나죠. 오빠가 누구냐 하면, 라반이죠. 우연히 그렇게 만났어요. 만나서 집으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오게 되서 그때 내력을 죽 이야기하죠. 이야기하니까 한 십일만 있다 가라하니까 성질이 급해서 너무 좋아서 지금 당장 가겠다 해서 보따리 싸서 보냅니다. 집에 갑니다. 60절에 보세요.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 될지어다 네 씨로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
자, 왜 이런 이야기하느냐 하면, 신성한 핏줄이냐, 아니냐는 뭐가 주도권 쥐느냐 하면, 하나님의 약속이 주도권을 쥡니다. 우리는 그 약속대로 배치될 뿐입니다. 자리 배치하지요. 우리는 그 약속이 배치되는데 그 배치된 그걸 통해서 하나님은 전체적으로 이런 약속의 내용을 갖고 있다는 것을 윤곽이 드러나는 하나의 도구로써 활용되죠.
하나님의 약속이 하나의 거대한 우산이라면 아브라함, 리브가, 이삭 이거는 뭐냐? 우산대에 해당되는 겁니다. 우산 구조물에 해당되죠. 전체가 하나의 약속이라면. 우리는 하나하나가 이루어서 전체 약속을 다 이루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걸 누가 아느냐? 라반 오빠가 알고 내 동생아, 니가 가는 것은 그냥 시집가고 애 낳고 그냥 보통 가정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을 구현해야 될 그러한 막중한 의무감을 가진 하나님의 약속의 대상이 되는 신성한 핏줄에 니가 합류하는 것이다. 이게.
참, 이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결혼이라는 그 방식을 통해서라도 그 약속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한다. 결혼이라는 것은 약속을 드러내는. 결혼이라는 것은 누구 위주의 결혼이 아니다? 결혼하는 신랑, 신부 위주가 아니에요. 결혼을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을 구현하는 하나의 배치가 되고, 방편이 되도록 그렇게 하나님께선 사용합니다. 주의 뜻대로 하는 약속이 결혼이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불신 여자하고 결혼하더라도 그 여자는 알 수가 없지. 그 여자는 남자 하나 만나서 행복하게 애 낳고 행복하게 살려고 하겠지만, 남편이란 사람은 내가 당신과 결혼한 것은 이거는 우연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함이다.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이 말이죠. 이거는 하나의 운명이다. 그럼 그 여자가 당신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결혼 못하겠다. 하면 파혼도 운명이지 뭐. 할 수 없지 뭐. 그러나 파혼하더라도 내가 너를 사랑한 것은 확실하다. 이런 식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지고, 그런 것도 되고.
하여튼 결과는 어쨌든 간에 성도는 결혼을 하던 안 하던 간에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알아서 다루신다는 겁니다. 구슬 다루듯이 하나님이 알아서 다 다뤄요. 그것 때문에 결혼 했니, 안 했니 인생 낙오자다, 실패다 그렇게 절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기 리브가가 평소에 기도한 게 아니에요. 주여, 주의 뜻대로 좋은 남편 만나게 해주소서. 남편감은 아브라함 자손, 아들 되게 하옵소서. 그런 기도한 적 없어요. 그냥 물 줬다 이 말이죠. 그런데 여기 또 하나 우리가 주의할 것은, 물을 안 줬으면 안 됐잖아. 해서 자꾸 물주는 걸 좋아하는데. 여기 물 준 사람이 여자 한두 명이 아닙니다.
그런데 뒤에 나오면서 다음에 결혼할 때 서서히 인간적인 면이 가미가 돼요. 뭐냐 하면, 야곱이 라헬을 좋아할 때는 약속이 뭐고, 얼굴 예쁜 것 보고 했습니다. 근데 더불어 끼워 준 게 뭐냐? 못 생긴 언니가 더불어 끼워 들어가죠. 그래서 라반이 하는 말이 우리 동네 풍습에 의해서는 정품에다 유사품 하나 끼워 주는 게 우리 동네 결혼법이다 해서 정품을 위해서 유사품까지 끼어드는 거예요.
그래서 대판으로 싸우고 둘이 자매간에 한 남자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서 싸우고 이렇게 하지요. 남자가 두 여자 거느려 보면 아마 골치 아플 거예요. 윗방, 아랫방 있으면 저쪽에서 안 오나? 하면 가야 되고. 온나? 하면 가야 되고. 집안 꼴이 말이 아닐 겁니다. 다 능력 돼야 되는 거지, 능력 없는 사람은 되지도 않은 문제.
자, 그런데 왜 하필이면 네 씨로 원수의 성문을 열게 할지어다. 라는 이런 이야기를 왜 했느냐? 네 씨로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 라는 말을 왜 했느냐? 그거는 모르지요. 왜냐하면 시집 간 여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