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산
그리심산 에발산(신 27:4) 너희가 요단을 건너거든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이 돌들을 에발산에 세우고 그 위에 석회를 바를 것이며 (신 27:5) 또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단 곧 돌단을 쌓되 그것에 철기를 대지 말지니라 (신 27:6) 너는 다듬지 않은 돌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단을 쌓고 그 위에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릴 것이며(수 8:30) 『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 산에 한 단을 쌓았으니』(수 8:31) 『이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한것과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철 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새 돌로 만든 단이라 무리가 여호와께 번제와 화목제를 그 위에 드렸으며』(수 8:32) 『여호수아가 거기서 모세의 기록한 율법을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그 돌에 기록하매』(수 8:33) 『온 이스라엘과 그 장로들과 유사들과 재판장들과 본토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 제사장들 앞에서 궤의 좌우에 서되 절반은 그리심 산 앞에, 절반은 에발 산 앞에 섰으니 이는 이왕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하라고 명한 대로 함이라』(수 8:34) 『그 후에 여호수아가 무릇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으니』기독교의 핵심을 다루는 부분이라서 다시 한번 언급하고자 합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 두 번의 전쟁을 치른 후에 법궤를 어느산에 두느냐 하면 신명기 기록대로 에발산 저주산에 둡니다. 이것은 모든 죄악의 저주를 법궤가 대신 지겠다 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고백은 딱 하나 뿐입니다.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자기를 부인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법궤의 의미를 제대로 봤기 때문에 아니 제대로 보여 주셨기에 그런 고백이 나옵니다. 그런데 믿음의 선배들의 고백도 동일합니다. 한마디로 저는 죄인입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즉 나 아니오 주님. 자기 부인 부정이 먼저 나옴으로 인해 참사랑의 의미를 아는 겁니다. 즉 사랑은 여기에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게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즉 주님의 사랑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고정했습니다. 분명히 십자가는 저주입니다. 그런데 그 저주를 주님이 대신 지셨다는 겁니다. 내가 받아야할 저주를 말이지요. 그래서 나 아니오 주님. 아닌 것을 아는 자를, 아니오를 아는 자를 긍휼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겁니다. 제사를 원치 않고 상한 심령을 원한다는 겁니다. 자 그럼 죄인이라는 고백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까? 인간이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자들이 교회에 너무 많습니다. 절대 불가능입니다. 조인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이 임해야만 합니다. 다시말해서 신명기에 유독 에발산에 단을 쌓으라고 한 이유는, 출애굽기도 아니고 민수기도 아니고 레위기도 아닌 왜 신명기냐 하며는 바로 신명기의 새로운 계명 즉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라는 새로운 계명은 돌판에 새기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새긴다는 겁니다. 즉 인간의 행위를 애초부터 기대 안하고 직접 하나님이 직접 우리 마음 판에 새기셔야만 새로운 계명을 실천이 아니라 주체자 되신 친히 보여주시는 분을 고대하고 기다리는 상한 심령이 된다는 겁니다. 상한 심령 된다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상한 심령 되신분의 마음을 미리 앞당겨 알게 된다는 겁니다 마음 판에 새기면 말이지요그래서 성령의 활동은 나 아니오 주님이라는 놀라운 고백을 하게 됩니다.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기적이요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 세례요한도 나는 망해야 하고 주님은 흥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보라 세상 죄 지고가는 어린양을 보라" 그 상한 심령의 외침을 교회는 너무 무시합니다. 참된 축복, 참된 사랑, 참 하나님은 그리심산에 없습니다. 그리심산을 고수하던 무리들은 다 예수님을 통하여 실족하여 넘어진 자들입니다. 그 실족케 하심을 지금도 쭈욱 계속 됩니다. 예수님은 참된 축복이시고, 그 축복 되신 예수님이 가신 길이 저주의 길인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래서 참된 사랑은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요나의 표적 뿐입니다. 바로 이 십자가의 사랑을 보여주심으로 죽음 문제를 죄 문제를 해결하시러 직접 낮아지신 분이 참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의 처 사라의 죽은 태에서 약속의 자녀가 나오듯, 일부러 나 아니오 주님을 증거토록 저주받은자 같으나 실상은 그렇게 그들을 좁은 길로 인도하신 겁니다. 불임여성이나 비천한자 미련한 자 어리석은 자들로 십자가의 도를 증거하심이 바로 주님 홀로의 일하심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인간의 어떤 공로도 원천 차단키 위함입니다.(히 11: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히 11: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이렇게 일관된 광야에서처럼 물없는 저주의 광야, 양식 없는 저주의 광야로 인도하심의 목적이 바로 낮추심이듯. 그 낮추심은 바로 예수님의 마음, 상한 심령이다는 겁니다. 일부러 상한 심령을 흉내낼려고 자해 하는 자들도 많은데 분명 상한 심령은 딱 한분의 마음입니다. 죽음을 이기는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나누어 주시고, 그 사랑을 받음으로만 그 자기 부인의 길에 동참할수 있는 겁니다. 아무리 내 안에서 찾을 수 없는 그 상한 심령을 주님의 낮아지심으로만 선물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고전 1: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고전 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고전 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 1: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5)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 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고전 1: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고전 1: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고전 1:31)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주님 ! 십자가의 지혜는 왜 미련한 자, 약한 자, 천한 것들, 멸시 받는 자, 없는 자를 택하셔서 하나님의 지혜를 드러내시는 겁니까? 우리는 똑똑하고프고, 강해지고 싶고, 인정 받고 싶고, 있는 자로써 위풍 당당한 자가 되고픈데 말입니다. 왜 그런 소원을 가진 우리를 안 도와주시고 오히려 우리를 멸하시고 폐하실려고 하시고 실족케 하도록 하십니까? 왜 축복산 그리심산이 아니고 에발산 이어야 합니까? 주님의 이 십자가의 지혜와 우리의 지혜는 너무도 다름을 직접 간섭하셔서 멸하든지 폐하든지 주님 뜻대로 하시고, 오로지 하나님의 지혜만을 알도록 감히 또다시 아니 날마다 성령의 놀라운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빌어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