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교회사 5강 - B
05 교회사 5강 - B
이름 : 구득영(IP:203.223.97.150)
교회사 5강 - B
05,11,12 강의 이근호
(지난 시간 마지막에 한 것을 다시 한번 더 정리하면) 신학적인 논쟁들이 9세기에도 있었는데, 그 중에서 또 하나의 논쟁이 무엇인고 하니, 영혼문제라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영혼문제에 있어서 "영혼은 개별적인 실체는 아니지만 독립적인 실체이기는 하다" 라고 어렵게 이야기했는데, 왜 이렇게 어렵게 이야기했는고 하니까, 영혼은 천사같이 육체가 필요 없게 되면 안 되고, 또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소멸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퀴나스는 말하기를, "영혼은 형상이고, 육체는 질료이다" 라고 했는데, 그런데 또 이렇게 되면 안 되는 것이, 육체를 질료(재료)로 보고 영혼을 그 재료에서 나오는 형상으로 보게 되니 말이다. 이렇게 되면 장점이 무엇인고 하니까, 영혼이 육체의 주도권을 쥐게 되는데, 그것이 인간 속에 있는 지성적인 것들, 즉 기억력이나 이 세상에서 신을 찾는 모습과 같은 것인데, 이렇게 육체에 주도권을 가지고 지시를 하는 것은 좋다는 말이다.
그런데 만일 육체(질료)가 죽어서 썩어지면 어떻게 되는가? 그 형상도 같이 있다가 날아가 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질료와 형상을 이렇게 구분하는 이분법적인 관계로 설명이 안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형상인 영혼을 창조했다" 라고 주장했는데, 그러나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죄를 창조하신 것이 되기 때문에 역시 딜레마에 빠진다는 것이다.
◈ 필리오케 논쟁 -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신다 !!
그 다음은 '필리오케'(아들로부터, Filioque) (~에게서) 논쟁인데, 이것이 콘스탄티노플 신조에 나온다는 것이다. 이것도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서로 다른 주장을 했는데, 문제는 "성령님께서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가? 아니면 성자 예수님에게서 나오시는가?" 라는 것이다.
서방교회에서는 "성부 하나님에게서 성령님이 나오시고, 성자 예수님에게서도 성령님이 나오신다" 라는 것이고, 즉 성령님이 양쪽에서 다 나오신다는 것이고, 이에 반해 동방교회에서는, "성령님은 성자 예수님을 통해서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다" 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은 성령님이 나오시는 것에 대해서 관여는 하지만(통해서), 나오시는 것(발출)은 성부 하나님으로부터라는 것이다.
그러면 왜 이렇게 나오는 출처가 두 군데가 되었는가? 가이샤라의 바질, 닛산의 그레고리, 나지안스 그레고리 등으로 불려지는 갑바도기아의 세 신학자가 있는데, 전에도 언급했지만 이들이 삼위일체를 구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고 말이다.
이들이 주장하기를, "성부, 성자, 성령은 서로 교통하기 때문에 내부적 교류가 있다. 그래서 동일하게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따라서 성부 위주는 삼위일체는 옳은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이다. (여기서 성부, 성자, 성령이 내부적 교류가 있음을 두고 '페리코레시스' 이론이라고 한다.)
이에 비해서 동방신학은 주장하기를, "신약은 구약의 완성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의 완성이다. 구약은 유일신으로서, 하나밖에 없다는 의미라기보다는 배타적인 신으로서, 자기 외에 다른 신을 차버리는 독보적인 신이다. 그래서 배타시하면서 한 분으로 계시는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다" 라는 것이다.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이 신약에 와서 삼위일체로 그 실체가 다 드러났다면, 하나님이 세분이라면 좀 곤란하고 당연히 성부가 대표를 해야한다는 것이 동방신학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아들이 아버지께 나라를 바친다고 했으니, 항상 성부 하나님 중심으로 일이 전개된다는 것이다. 사랑도, 영광도 말이다. 그래서 성령님도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시고, 예수님은 거기에 '통해서' 라는 것으로 관여한다는 것이다.
(고전 15:24)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그런데 이 동방과 서방이 서로 붙은 논쟁에서 누가 이기는고 하니, 서방신학이 이겼다는 것이다. 즉 "성령님은 아버지로부터, 그리고 아들로부터 나온다" 라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20세기의 신학이고(서방이 이겼기에), 그 당시 10세기의 주류를 이루었던 신학이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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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케야-콘스탄티노플신조 (주후381년)/러시아 정교회 신앙고백문 ※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을 믿는다. 그는 전능하신 아버지이시며, 하늘과 땅의 창조자이시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만물의 창조자이시다. 그리고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고, 모든 시대 이전에 아버지로부터 낳으신 자이시고, 빛으로부터 나온 빛이시며, 참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참 하나님이시다. 그는 피조되지 않았고, 낳으셨고, 아버지와 한 본질이시며 그분을 통하여 만물은 존재하게 되었음을 믿는다. 그는 우리 인류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오셨고,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성육신하시어 인간이 되셨고, 본디오 빌라도 밑에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셔서 고난받으시고, 묻히셨다가 성경대로 제3일만에 일어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셨고, 영광 중에 다시 오셔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이며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성령을 믿는다. 그는 주이시며, 생명의 수여자이시며, 아버지로부터 발출된 자이시고,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예배받으시고 영광받으실 분이시며,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분이다. 우리는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를 믿는다. 우리는 죄를 사면하는 하나의 세례를 고백한다. 우리는 장차 올 세계에서 죽은 자가 생명으로 부활할 것을 기대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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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10세기에 보면, '존 스코투스 에리게나' 라는 유명한 신학자가 등장하는데, 이 에리게나의 사람의 신학이 어떤 점에서 유명한고 하니까, 그 이전까지는 "신앙이냐, 신앙이 아니냐?" 라는 것에 주된 관심을 두었다면, 즉 "삼위일체 신학이냐, 아니냐?" 라는 것에다 말이다. 그런데 이 이 '에리게나' 때부터는 "신앙은 물론 기본 전제이겠지만, 그러나 이 신앙을 가지고 난 뒤부터는 이성적으로 따져도 무방하지 않느냐?" 라는 의식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 당시로 보면 그야말로 발상의 대전환이라는 것이다.
◈ 에리게나 - 신앙에 기초한 철학의 시작 !!
다시 말해서, 이제는 신학은 기본이고, 니케아 회의 때 삼위일체론이 정립이 되었으니 말이다. 이제는 신앙인이 갖고 있는 이성을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께, 즉 "하나님 나라를 잘 묘사하고, 신앙자체에 대해서 체계를 잘 세울 것인가?" 라는 점도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에리게나는 그것을 설명하는 방법으로, '긍정과 부정의 방법', 그리고 '능동과 수동의 방법' 인데, 그것으로 우주의 모든 것을 다 설명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그 첫째가 창조하면서 창조되지 않는 자연, 둘째가 창조하면서 창조되는 자연, 셋째가 창조하지 않으면서 창조되는 자연, 그리고 넷째가 창조하지도 않고 창조되지도 않는 자연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영역을 지상에서 신의 영역까지 넓혀서, 자연이라는 이름으로 모두 다 담아낼 수 있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가 들어보면, "왜 쓸데없이 그런 고민을 하는가?" 라고 하겠지만, 이 논쟁이 왜 중요한고 하니, 반드시 신학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즉 삼위일체 논쟁이 아니더라도 이성적으로 따져서, 하나님과 전 우주에 발생하는 모든 것을 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신앙에 기초한 철학의 시작이 바로 이 '에르게나' 에서부터 시작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카롤링 왕조의 시대가 끝이 나고, 9~10세기에 노르망디 쪽에서 바이킹들이 쳐들어와서 왕이고 뭐고 온 나라가 다 엉망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때부터는 분권시대가 되어서, 왕은 돌아가면서 하게 되었고, 영주들이 실제적 힘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10~11세기가 흘러가면서 여러 가지 신학적 논쟁들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 중에 하나가 '성체성사론' 이라는 것이다. "성찬식 전과 후, 거룩한 몸이 그대로 있는가?" 라는 문제 말이다. 그것은 조금 전에 했기에 그냥 넘어가고, 이제 본격적으로 이 시간에 공부할 것들을 살펴보자.
◈ 안셀무스의 신 존재증명 - 이성으로도 가능하다 !!
먼저 12세기 문예부흥에 대해 알아보겠는데, 1100년경에 스콜라 철학의 아버지 '안셀무스'(1033-1109)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100여년 뒤에 나타난 토마스 아퀴나스와 함께 신존재 증명으로 잘 알려짐) 안셀무스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속성과 삼위일체까지도 성경에 대한 의존 없이, 즉 인간 이성으로도 증명할 수 있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안셀무스에게 두 가지 중요한 점이 있는데, 먼저 하나는, "이제는 인간의 이성으로도 신을 증명할 수가 있다" 라는 것이다. 그 다음 두 번째가 "하나님이 왜 인간이 되었는가?" 라는 것인데, 여기서는 먼저 신존재 증명에 대해서 살펴보자.
어떻게 증명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다음과 같은데, "아무리 어리석은 자라도 마음속에 그 어떤 것 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또 더 큰 것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있고 말이다. 이렇게 계속해서 나가면 그 어떤 것보다 작지 않고 최고로 큰 것이 있을 것이다. 그 최고의 것이 곧 신이다" 라는 것이다. (숙제 - 뒤에 나오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존재 증명과 비교하라.)
이것을 좀 더 존재론적으로 자세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안셀무스의 신존재 증명)
"존재한다는 것은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인데, 이것이 인간의 속성이다. 인간은 분명히 있다. 인간은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인간 속에 존재란 속성이 들어 있다. 그러면 나만 있는가? 상대방도 있다. 상대방도 존재하는 속성이 있다. 남자만 있는가? 여자도 있다. 즉 존재하는 속성이 있다. 또 말을 못하는 돌멩이도 있다. 인간과는 틀리지만 역시 존재하는 속성이 있다. 그렇다면,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나를 존재케 한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도 존재하는 속성이 있다. 그러니 하나님도 존재하신다."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모든 만물은 있게 한 것이 분명히 있을 것인데, 이 당시는 과학이 발달되지 않았는데, 모든 만물을 있게 한 것이 신이라면, 그래서 이 피조물 속에 존재라는 속성이 있다면, 그것은 그 피조물을 만든 신에게도 존재란 속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안셀무스의 존재론적 증명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주장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 사람도 자기 속에는 존재하는 속성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자기가 신이 없다고 우기려면 자기가 존재해야 하니 말이다. 그래야 우기든 말든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신은 존재하지 않아도 나는 존재한다" 라는 것이 되어버리는데, 그러나 이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안셀무스의 반박이 상당히 어려운데, 한번 이야기해보자.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우기는 자기가 존재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신은 없기에 존재 속성이 없지만, 그런데 이것을 주장하는 본인은 그렇게 말하고 있기에 존재 속성이 있다면, 그 존재 속성이 있는 한 신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주장하는 자신이 존재 속성이 있으니, 자기가 바로 신이고 말이다. 어떻게 반박이 되겠는가? - 에고고 !!
사실상 이것은 어떻게 반박을 하고 말고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이제 안셀무스에 의하면, 인간의 논리를 가지고도, 즉 이제는 성경을 덮어도 인간의 노력으로서 신의 존재나 삼위일체 등을 다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 보상설 - 하나님은 왜 인간이 되셨는가?
그 다음으로 안셀무스에 의해 제기된 중요한 논쟁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이 왜 인간이 되었는가?" 라는 것이다. 안셀무스는 (그 당시까지 제기되었던) 하나님이 인간을 마귀로부터의 속박에서 풀어주기 위해서 인간이 되었다든지, 또는 인간이 마귀에게 진 빚을 갚아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인간이 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죄로 인해서 자기의 명예가 땅에 떨어졌기 때문에, 자기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 아들을 보내서 죄 값을 치르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땅에 떨어진 공의의 명예스러움을, 자기 아들에게 저주를 퍼부어서 그 죄 값을 치르게 함으로 말미암아서, 떨어진 자기의 명예를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서 보상받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이 되셨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이것을 안셀무스의 소위 '보상설' 이라 한다는 말이다.
◈ 헤겔의 이웃사랑 - 자기 희생을 통해서 !!
여기에 대해서 철학자 헤겔이 동의를 하는데, 이것을 이웃사랑이라고 했는데, 헤겔이 말하는 이웃사랑이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자기 명예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희생을 치르기 위해서 사람이 될 수 있고, 즉 죄인의 모습을 취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이 된 것처럼 자기 희생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말이다.
안셀무스의 이런 주장에 대해서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가? 천주교 교인이든 개신교 교인이든 어디 반대할 사람이 있겠는가? (헤겔도 저렇게 동의를 했는데 말이다.) 사실상 칼빈과 루터도 이것을 반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니, 반대를 못 했는지도 모르고 말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죄의 값에 대한 만족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그 누구도 이룰 수가 없는데, 즉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분은 하나님 외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왜 하나님이 되어야 하고, 또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만족을 받아야 할 분이 하나님이고, 그리고 죄를 저지른 것은 인간이기 때문에, 그래서 인간이 나서서 해결해야 하는데, 그렇게 혼자서 하나님이 되고 혼자서 사람이 될 분은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것이 복음적인가? 제가 지난 시간에 신학의 문제점이 무엇인고 하니까, "하나님이 사람이 되고, 사람이 하나님 된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십자가는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는데 있는 것이지, 하나님의 명예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 안셀무스가 얼마나 십자가에 대해서 무지하냐는 것이다. (헛똑똑이인가?)
◈ 피터 아벨라르 - 유명론(唯名論) !!
그 다음에 나오는 사람이 '피터 아벨라르'(1072-1142) 라는 유명한 사람인데, '유명론(唯名論)' 논쟁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이라는 것이다. 유명론은 '명목상 그렇다' 라는 의미인데, 먼저 이 유명론을 이야기하려면 실재론과 보편론 논쟁을 언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실재론(實在論) 이란, 개별적인 각각의 사물에 본질이 들어있는 것이 아니고, 본질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보편론(普遍論)은, 개별 하나 하나에 진리가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개별 각각에 그 됨됨이가 다 들어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철수', '영희' 라고 했을 때, 사실상 사람은 없고, 철수와 영희, 그런 인물들을 사람으로 하자고 했을 때, 비로소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철수와 영희를 두고서, 보편론적으로 했을 때 사람이지 따로 보면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보편론자이고, 그런데 사람은 있는데, 그 사람이 분배된 것이 철수와 영희라고 주장하는 것이 실재론자라는 것이다. 즉 사람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보편론 중에서 하나가 이름뿐이라고 본 것이 바로 '유명론' 인데, 물론 보편론 중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보편론은 따로 있고 말이다. 이렇게 이름, 즉 개념뿐이라고 사람이 그렇게 보았다는 것이 아벨라르의 유명론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참으로 뛰어난데, 왜 그런지 한번 살펴보자는 것이다.
◈ 동물을 동물이라고 한다고 말들에게 물어보았는가?
동물이란 개념은 사람에겐 합리적이지만 말에게는 비합리적인데, 왜냐하면 사람이 동물을 명했을 뿐이지, 동물 자신에게 그렇게 해도 되는지 사람이 동물에게 물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만약 말들에게 물어보면, "말은 그냥 말이지 왜 우리를 동물이라고 하느냐?" 라고 할 것이다. 이것은 인간들이 자기들 중심으로 생각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원숭이보다 사람이 당연히 더 똑똑하다는 것도 사람의 생각이라는 것이다. 물론 원숭이보다 더 못한 것이 개나 돼지이고 말이다. 사람이 그렇게 정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동물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지어낸 이름뿐인데, 이것이 아벨라드의 주장이란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아벨라르는 "이름뿐이다" 라는 것을 넘어서, 유사성은 있지만 동일하지 않다고 주장하는데, 같은 종류에 속한다고 개념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즉 철수와 영희는 유사하지만 동일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어떤 문제점이 생기는고 하니까, "어떻게 개별자 안에 같은 공통점이 들어있는가?" 라는 것이 과제로 남는데, 이것은 개념뿐이라고 해서 '개념론'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등장하는 사람이 누구인고 하니까, '피터 롬바르드' 라고 약간 유명한 인물인데, 이 사람은 철저하게 천주교의 교리를 확정시킨 사람이라는 것이다. 즉 전통적인 천주교의 모든 제도에 기여한 사람이라는 말이다.
◈ 아퀴나스 신학의 대전제 - 인간의 이성으로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
그 다음이 정말 유명한 '토마스 아퀴나스' (Thomas Aquinas, 1225-1274) 인데, "인간의 이성으로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라는, 그것이 아퀴나스 신학의 기초이고 대전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가? 인간이 그 어떤 방법으로도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말이다.
왜냐하면, 그 이전에 안셀무스는 "신앙은 기본이고, 그 다음에는 이성으로 한번 해보자" 라고 주장했는데, 에리게나도 역시 그렇고 말이다. 그렇게 되면 성경을 다룬 신학이 별 볼일이 없게 되어버렸는데, 그래서 교회를 수호해야할 일이 많이 생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 당시 교회는 타락할 대로 타락을 했고, (교회보다는 수도원이 개혁적이고 말씀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 토마스 아퀴나스도 그 당시 유명한 도미니크 수도원 출신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퀴나스는 (그런 열정으로) 신앙이란 이성으로 되지 않고 하나님은 알 수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의 감각을 넘어설 수가 없는데, 마치 칸트처럼 말이다. 즉 감각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말이다.
◈ 토마스 아퀴나스 - 어거스틴의 신학을 수용 !!
그래서 어거스틴은 하나님을 알려면 '계시의 조명'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이 토마스 아퀴나스는 천주교의 모든 신학을 다 집대성한 사람인데, 물론 개신교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의 신학 속에는 어거스틴의 모든 신학들이 다 수용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천주교가 개신교를 보고 웃는다는 말이다. 개신교가 어거스틴을 옹호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개신교의 신학도 천주교 안에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도 어거스틴의 전통을 이어받아서, "신앙이란 조명으로 되는 것이지, 인간의 이성이 아니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의 이성이 필요가 없는가? 그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을 '존재의 유비' 라고 하는데, 여기서 '유비' 라는 것은 '상징'과는 좀 다른데, (삼국지에 나오는 그 유비는 아니고 말이다. 별들에게 물어봐?) 여기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5가지 신존재 증명을 살펴보자.
◈ 토마스 아퀴나스의 5가지 신존재 증명 !!
1. 존재론적 증명
2. 최초의 원인
3. 최초의 운동
4. 궁극적 목적
5. 궁극적 선함
1. 존재론적 증명 - 이것은 안셀무스가 먼저 한 것인데, 내 속에 있는 존재하는 속성으로 내가 존재함을 증명하는 것이다. (앞의 내용을 참고)
2. 최초의 원인 - 모든 것이 원인이 없는 것이 없는데, 최초의 원인이 다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자기가 있다면 아버지가 있고, 또 할아버지가 있고,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있고 말이다. 결국 최초의 인간인 아담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존재론적 증명은 자기 속에 속성이 있으니 자기가 있다는 것이고 말이다. 그 차이점을 알겠죠?
3. 최초의 운동 - 무엇이든지 움직인다고 하면, 그렇게 움직이게 하는 최초의 운동이 있다는 것이다. 최초의 원인과 조금 비슷하고 말이다.
4. 궁극적 목적 - 예를 들어서, 시계를 만들 때 어떤 목적이 있듯이, 세상의 하나하나도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목적을 누가 주었는가? 그 목적의 궁극적 목적은 바로 신이란 말이다. 물론 이것은 과학시대에 뉴튼에 의해서 깨어지는데, 그에 의하면 '우연적'으로 움직이니 말이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면이 있는데, 우주가 왜 있는고 하니, 인간이 우주라고 불러주기 위해서 있다는 것이다.
5. 궁극적 선함 - 사람은 착해지면 더 착해지고 싶다는 것이다. 도둑놈이라도 도둑질이 나쁜 짓인 줄 안다는 것이다. 그런 마음을 누가 주었는가? 사람이 어떤 행동해도 착한지 나쁜지 따지면서 행동한다는 것이다. 유괴범 유영철도 후회하지 않았는가? 그 착함을 바로 신이 주었다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런 것을 통해서 신학 전체를 총정리했다는 것이다. 물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도 동원했고, 어거스틴도 수용해서 말이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를 '박사' 라고 하는데, 진짜로 박사라는 것이다.
이 토마스 아퀴나스를 이야기할 때 빠트릴 수 없는 부분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론인데, (별들에게 물어봐?) 그리고 그 다음에 토마스 아퀴나스의 예정론이 있는데, 물론 이것은 섭리론이지만 말이다. 그의 예정론이 무엇인고 하면 다음과 같은데, 잘 들어보고 한번 반박을 해보라는 것이다.
◈ 토마스 아퀴나스의 예정론은 하청론 !!
예를 들어서, 어떤 회장님이 있는데 그 밑에 공장장을 세웠는데, 그래서 공장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을 회장에게 보고하면 회장님이 안다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인간이란 공장장을 세웠는데,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일을 안다는 것이다. 공장장으로부터 보고를 받아서 말이다. 물론 보고를 받지 않아도 알지만 말이다. 공장장이 공장 일에 대해서 책임을 지듯이, 세상일은 인간이 책임지고, 하나님은 그 책임을 물으신다는 것이다. 즉 하청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섭리론인데, 반박을 해보라는 것이다. 이 말이 과연 맞는가? 토마스 아퀴나스처럼 이렇게 하면 (예정론에서 살아남기 힘든) 무엇이 살아있는가? 자유의지가 그대로 살아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말이다.
육체와 결합한 인간이 개별적 실체이고, 영혼은 독립적 형상(실체)인데, 형상으로 질료를 관할할 수 있으니 말이다. 영혼이 독립적 실체라는 것은 육체가 독립적 실체가 아니라는 말이다. 육체와 영혼이 결합할 때 독립적 실체가 된다는 것이다. 참으로 복잡한데,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렇게 복잡하게 설명하는 것은, 그가 자꾸만 변증적으로 변호하는 요소를 가미하다 보니까 그렇다는 것이다.
사람이 이렇게 자유의지가 있어야 심판 때 개별적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다. 둘이 다같이 밭에 있어도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남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개별적 심판을 하려면, 개개인이 독립적인 행위 주체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이 주체가 영혼이 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육체가 되어야 하는가? 영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육체는 영혼이 시키는 데로 따라해야 하고 말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설명에 의하면 이렇게 자유의지를 가미해야 하는데, 그런데 그렇게 되면 예정론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잔머리(?)를 써서 예정론도 살리고, 자유의지도 살리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청론(?) 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회장님이 되고, 인간은 공장장이 되고 말이다. 그래서 회장님이 공장에 나와서 물건을 잘못 만들었으면 책임추궁을 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최종 책임자로서, 그들에게 책임을 묻는 심판주로서 섭리하신다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렇게 '예정' 이란 단어를 대신해서 '섭리'를 사용함으로서 이 문제를 은근슬쩍 해결한 것처럼 넘어가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 다음은 조금 복잡한데) 토마스 아퀴나스가 인간 영혼의 행동을 법과 연관시키는데, 인간 영혼은 도덕적 책임을 갖는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자기의 윤리론을 가지고 어떤 법들과 연관시키는지를 한번 살펴보자는 것이다.
법은 영원법과 비영원법으로 나누는데, 영원법은 세상을 통치하는 법으로 신성한 법이고, 비영원법은 인간에게 해당되는데, 여기에는 자연법과 실증법이 있다는 것이다. 자연법은 도덕적인 법인데, 일자무식쟁이도 나쁜 짓을 하면 나쁘다고 생각하는 법 말이다. 그리고 인간의 실증법은 국제법과 시민법으로 나누는데, 실증법에는 신성한 실증법과 인간적 실증법이 있다는 것이다. 이 신성한 실증법은 모세율법과 기독교의 교회법이 있고 말이다. 모세율법은 도덕법과 예절법과 재판법이 있다는 것이다.
◈ 법 - 인간은 전체적으로 신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 !!
토마스 아퀴나스 이렇게 법을 나누어서 하는 말이, 인간은 전체적으로 신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제직회 때의 결정은 신성한 실증법이고, 이것은 비영원법이고, 이것은 (하나님이 만든) 법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신부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고 교황이 승락하면 그런 결정이 오류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천주교이고 오늘날 한국 개신교라는 것이다. 그러니 개신교가 아무리 설쳐대도 토마스 아퀴나스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천주교가 '시~익' 웃는다는 말이다. (같이 스카이콩콩이나 타고 놀자고 말이다.)
여기에 대해서, 그 이후에 나타난 둔스 스코투스나 윌리엄 오컴 등은 반대하는데, 물론 그가 주장한 교회법을 반대한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들은 토마스 아퀴나스처럼 인간이 신을 알 수가 없는 것이 아니라, 토마스 아퀴나스은 어거스틴의 영향을 받아서 인간 이성으로는 신을 알 수 없다고 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주장하기를, 신을 아는 방법은 2가지인데, 먼저 신앙으로도 알 수가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인간의 감각적인 경험으로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이전에 안셀무스는 이야기하기를, 신앙은 기본이고, 그 이후에는 이성으로 한번 따져보자고 했고 말이다. 그 차이점을 아시겠지요?
좀 어려웠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
* 이 강의는 그 당시 교재가 배달사고로(?) 도착하지 않아서 "교재를 보자" 라는 말이 없었음.
2007,10,23 오후 11시 40분에 마침 --- 아들자랑 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