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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미운 짓만 골라하는 행함이 있는 믿음자유게시판미가

미운 짓만 골라하는 행함이 있는 믿음

이름 : 김대식(IP:220.81.176.141)

미움 받을 짓만 골라하는 행함이 있는 믿음
(기생 라합의 미움 받을 짓)

여호수아서는 영과 육의 대립을 한세트로 해서 점점점 그 이후의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갈등을 구체화 합니다. 영에 속한 자와 육에 속한 자로 이스라엘 내부를 갈라 버립니다.

기생 라합은 자기를 멸망시키러 온 하나님의 군대의 정탐군을 영접합니다.
자기를 죽일려고 오는 그 무리를 영접한다는 의미가 뭘까요?

이런 도발적인 행위인 불륜적인 있을 수 없는 일이 여호와를 통해서 벌어집니다.

에이 어쩔수 없이 자포자기 형태로 영접할 수 밖에 없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적극적으로 도우고, 자기가 속한 세계를 전멸시킴이 마땅함을
자신의 전부를 때려부어서라도 가장 앞장서서 증거합니다.
그것도 아예 총알받이가 될 각오로 말입니다. 평생이 미움 뿐임을 뻔히 알고서 말이죠.

그것은 자기에게 외부에서 벌어진 하나님의 일이 벌어졌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성도란 땅에서 난 자가 아니라 하늘에서 난 자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증명하는 믿음이란 그 반대의 위치에서 증거 됩니다. 전혀 믿음 없는 모습으로써 증거 됩니다. 즉 행함도 믿음 다운 믿음이 아니라 유치하기 짝이 없는 무모하고 어리석음의 모습인 액션입니다. 이 액션을 자발적으로 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땅에서 난 행동이 아니라 하늘에서 심어서 펑 하고 자폭하듯이 터지는 행동이기에 괜히 흉내내었다간 그 귀중한 자아가 같이 공중분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공중분해를 당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 자들 속에는 십자가라는 다이나마이트가 있어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심지에 불 붙은 인간들입니다.(떨기나무의 불꽃)

그 다이나마이트인 성도(이스라엘=하늘에 속한 자)를 아무리 땅에 파묻어도 그 보다 더 큰 다이나마이트인 예수님이 파묻힌 그들의 발바닥을 쳐 올리면서 세상 위로 쳐 올려버리고 반드시 거룩한 성에 장착이 됩니다. 이 테러를 무슨 수로 막을수 있단 말입니까?
(다이나아미트 폭파를 위해 연결선이 쭈욱 길게 있고 그 뇌관을 누리는 장치가 있는데 용어를 까먹었는데 그 뇌관을 누르자 불꽃놀이처럼 펑 하고 터지는 것이 십자가 사건이고, 그 연결된 긴 선들이 바로 언약입니다. 이 선의 계통이 아니면 다 가짜죠. 요즘은 기폭장치 없어도 전자기능의 리모콘으로 네트워크 망의 정보가 따로 설정된거지요)

막을 수 있으면 막아보세요

참으로 미운 짓만 골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목사들은 이쁜짓만 골라 할려고 합니다. 그게 다른 복음입니다.
십자가 사건 이라는 피 폭탄을 터트릴 꺼리가 없는 이유는 자신이 그 원폭피해자가 되어본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남을 살리는 이 십자가 지뢰라는 사랑을 주기 보다. 오히려 자신이 사랑받기 위한 짓만 골라서 열심히 달음박질의 몸부림을 치고 있으니

세상을 악하다 라고 증거하신 예수님이 세상으로부터 미움 받은 사건을 전부 다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린 겁니다. 전쟁의 마당을 스스로 철거해 버리고 전쟁 없는 평화라는 기가막힌 정치술로써 말이지요...

(여기서 부터의 아래의 글은 이번주 학생회 교안과 같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발바닥에 지옥 속으로 빠져도 도저히 빠질수 없는 이유는 누군가가 내 발을 머리로 쳐올리면서 받치고 있다는 사실이라는 겁니다. 과연 그런지 안그런지 그 사실을 알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모래 속으로 파묻혀 봐야 합니다. 파묻어 보면 압니다. 내가 사랑받는 지독한 편애를 받은 자인지 아닌지를 알려면 지독한 미움 속으로 집어 넣어보면 압니다. 어떻게요? 안 묻는다는 것을 통해서 압니다. 미움도 죽음도 사망의 권세인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함을 통해서 성도인지 아닌지를 알수 있습니다.

그 죽음의 광야를 통과하게끔 하시는 이유는 온갖 미움과 저주와 죽음을 이기는 뭔가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냥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 가나안 땅에서는 이런 보호자인 신들의 존재와 같은 영웅들이 쫘악 깔려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 아닐까요?

그런데 천국과 지옥이란 사랑이 기준이 되어 고정되어 있지 사랑이라는 기준이 없이는 유동적인 겁니다.

즉 사람들은 나름대로 천국과 같은 에덴동산 건설을 단 한순간도 멈춘적이 없습니다. 그 연장선에 성전건축도 포함이 되며 국가 건설 바벨탑 건설도 다 이런 이유 인 겁니다.

그러니 어디든 다 천국인 겁니다. 어디든 신들의 도시이며, 어느 곳이든 유토피아가 아닌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랑이 없다는 이유로 이 천국을 지옥으로 만들어야 할 임무를 가지고 이 지상 유토피아에 투입된 자들이 있는데 바로 약속이며 이 약속을 받은 민족이 이스라엘이며 이스라엘은 이 약속으로 이 임무를 수행하는 겁니다.

그 약속을 받은 자들이 바로 이스라엘이며 이 약속의 민족은 이 죽음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 죽음을 통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사랑입니다. (마치 참메시아 되신 예수님이 마귀의 3가지 시험이 있는 곳인 광야를 통과 하듯이 인간들이 원하는 메시아상의 유혹을 이기셔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율법의 목적은 바로 사랑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누구 사랑요? 예수님 사랑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지킬려고 달려들면 예수님 사랑이 아니라 자기 사랑을 나타낼려고 올무에 빠진꼴이 됩니다. 신과 같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 이 사랑 때문에 율법에 의해 죽고 그 죽음의 모래 속에 파 묻히고
확실한 죽음 속에서 죽음을 뚫고서 모래 위로 쳐 올리시는 예수님의 사랑에 의해 다시 살아난 입장에서는 다시는 죽음이 묻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그 사랑의 능력을 이제는 자기유익을 위해 이용해 먹는게 아니라
도리어 반대로 내 발에 예수님이 깔려서 나를 지옥에서 밀어 붙여서 모래 속을 뚫고 위로 올라왔듯이

이제는 내가 예수님을 어깨에 매고 이 영웅들이 사는 땅에 예수님의 피만 앞장세우고 돌진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입니다.

이 전쟁을 이스라엘도 아니면서 이미 이 전쟁을 알고 자기민족을 배신하고 적군인 이스라엘이 하는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을 하는 자가 있습니다.

그것도 여자의 몸으로써 그것도 술 파는 기생의 신분으로써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을 적진 속에서 혼자의 몸으로써 전쟁을 하는 자가 있습니다.

이 여인의 믿음을 성경은 놀랍게도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고 예를드는 이야기에 반드시 집어 넣습니다. 그 이유는
행함이 있는 믿음 이라는 성경구절을 사기꾼들이 워낙 사람을 속여서 돈을 가로채는 목적으로 이용하기에
그런 인간의 탐욕을 꿰뚫고 미리 그런 정당성을 못 가지도록 예로 드는 겁니다.

이것은 이 여인의 행동을 따라할수 있거나 모방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 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자꾸 믿음을 자기 쪽에서 또 억지로 만들어 낼려는 종교꾼들의 전형적인 위선으로 자기를 포장할려고 할 겁니다. 성화론자들이나 새생명의 삶의 운동을 펼치는 자들이 그러합니다.

또 한가지 더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제가 지난주부터 미움받을 짖만 골라 한다고 하는 표현을 지금 기생라합의 이야기 속에서도 같이 하는 이유는

놀랍게도 이 믿음은 (물론 아브라함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출처가 인간 쪽에서가 아닌 예수님 쪽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 예가 예수님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미움받을 짓만 골라서 했습니다.

그것도 사랑이 더욱더 풍성하게 나타내기 위해서
마치 빛의 너무 너무 눈부심이 강렬하게 나타날때에 그만 나의 눈은 그 빛에 의해 상실 당하고 말것입니다. 그 빛의 세계에서는 나의 눈이라는 소유물도 필요 없을 정도로 강렬하기에 나의 눈이 사라짐도 그게 그렇게 큰 문제꺼리가 되지 않듯이 말이지요.
그런 것처럼 예수님은 사랑의 풍성함을 말하기 위해 반드시 그 당시의 가장 어두움인 독사의 자식들의 어두움을 대조 시키면서 증거 합니다.

그래서 꼭 바리새인들의 눈에 띄게끔 일하시고
바리새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짓만 골라서 하십니다.

그들이 싫어하는 짓이 뭘까요?
그것은 진리가 자유한 모습이다는 겁니다.

사랑이 없기에 인간들은 율법을 지켜서 자기 의 쌓기를 하는데 그만 자기 의로움에 자기가 갇혀 버렸습니다. 흐물 흐물한 사랑이 아닌 단단한 거룩하고 튼튼한 회칠한 무덤으로 철저하게 자신을 가두어 버렸습니다.

그러니 자기를 자기가 가두어 버렸고 자아라는 최후의 성전에 갇혀서 자기 밖에 모르는 인간이 되어 버린 겁니다. 그 증거가 바로 다윗의 율법 고수정신입니다.

그것을 깨뜨리는 사랑은 반대로 너무 너무 자유한 모습으로써 나타납니다.
그것이 바로 겁탈 당하는 밧세바의 모습이고
또 고도의 계산 속에서 의도적인 살인을 당하는 모습이고
또 회개와 금식과 기도가 통하지도 않는 꺽어져도 상관 없는 아이의 뼈의 모습으로 나타난
자유의 모습입니다.
흐물 흐물 하기에 자기의 것을 하나 챙길 필요 없이 죽어도 상관 없는 자유입니다.

반대로 다윗은 점점점 자기를 딴딴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오로지 자기를 사수하는 길을 자기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원수의 모습입니다.

시편은 바로 이 원수와 흐물 흐물한 사랑의 만남입니다.

마치 시아버지 유다와 며느리 다말의 불륜 속에서 태어난 사랑의 열매처럼
노래 곧 찬송은, 기쁨은, 희락은, 자유는 바로 수치를 제거하는 십자가의 용서인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행위는 미운 짓만 골라 골라서 사람들의 성화된 신앙을 낱낱이 시비를 걸고 나서시는 겁니다.

결과는 당연합니다. 죽음 뿐입니다.
아니 죽어도 상관 없다는 식으로 시비를 걸어온 겁니다.

그리고 죽이는 쪽은 반대로 점점점 딴딴하게 자기를 방어하는 핑개를 하나님을 사모하는 열심히써 포장하면서 이중 삼중으로 겹포장을 하는 겁니다.

아니 주님이 그렇게 유도하여서 더더욱 겹포장으로써 죄의 옷을 겹겹이 껴 입도록 유발케 하십니다. 그 허점난 거룩의 결핍을 채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신비롭게도 수치를 제거 당할 근거가 다 사라지는 겁니다.
무화과 나뭇잎은 점점 화려하고 고급스럽게 가죽옷을 능가하는 더더욱 큰 가치로써 캐슬을 형성하게 됩니다. 어떤 누구도 침범 불가입니다.

마치 두루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지키는 생명나무의 길을
철저하게 지상에서 모방하는 완벽한 재현처럼
인간이라는 최후의 성전은 이렇게 철벽수비로 다져져 있습니다. 완벽한 성전입니다.

이것에 가만히 두고 보시는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니 그것을 허물어 버리시고
무화과 나뭇잎을 벗겨 버리시고 그 수치를 굴러가도록 끊어버려야 하는 개입이 바로
사랑이다는 겁니다.

가나안 땅의 성은 이미 졌습니다.
건축자들의 튼튼한 그 성곽이
그들이 가치 없다고 버린 그 기생 라합이라는 여인에 의해서
무너지게 되는 겁니다.

굴러 들어온 돌이 박힌 돌 뽑는다고 의식하는 목사도 있던데 늘 사랑이 없기에 불안한 겁니다.
그러나 굴러들어온 돌이 아닙니다.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그 건축자들이 세운 건축물의 주춧돌도 자리 잡도록 교체하는 희한하고 신비로운 일들을 벌리시는 겁니다.

가만히 서서 통째로 내어주는 겁니다. 내부싸움이지요

아니 아니 오해 마시고 우리가 아니라 적들이 말입니다. 가만히 있는데 통째로 다 내어주는 겁니다.

(출 14: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이 말씀이 운동력이 있어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닿기도 전에 미리 앞서서
이 기생 라합의 마음을 녹여버렸습니다.

그녀의 미움 받을 짓은 딱 하나입니다. 다말과 같은 선상의 마음입니다.
곧 십자가만 알기로 한 마음입니다.

이게 미움 받을 짓입니다. (장대 높이 달린 구리 놋뱀을 쳐다보라는 말이 얼마나 밉상받을 짓인가를 생각 해보라? 그래서 도저히 못 쳐다봐서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자세히 말씀 드리면 십자가의 어리석은 지혜에 자기를 다 때려 부은 짓입니다.
예수님이 이 십자가에 자신을 다 때려 부은 것이 모든 인간들에게의 미움 받을 짓이듯
향유를 부은 마리아의 모습 또한 그러합니다.
불의한 청지기 또한 그러 합니다.
그것을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 되었다 라고 표현 합니다.

(눅 16: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눅 16:11)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눅 16:12)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눅 16: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눅 16:14)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눅 16:1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작은 것이란 뭘까요?

상대적인 의미로 알 수 있습니다. 놀랍게도 의로운 자아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에게 높임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예수님도 죄인의 몸으로 오셨고 죄인 중의 괴수 취급 받았습니다.

작은 것이란 결국 보잘 것 없는 죄인의 신분이지만 자기 몸과 목숨을 다 때려 붓는 일을 두고 말합니다. 다말이 자기 신체를 다 때려 부었듯이 네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한 겁니다.
여기서 또 오해 말것은 이웃이란 약속을 두고 말하는 거지 인간 유다가 아닙니다.

(고전 13: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이미 자기를 성화된 자나 장성하여 성숙된, 사람 중에 높임의 존경을 받는 몸은 일체 불가능 한 일입니다. 아니 바로 이런 것을 추구하는 입장에서만이 상대적으로 미움받는 짓인 겁니다.

그래서 그냥 라합이 아니라 기생 라합이라고 항상 기생이라는 단어가 죄인이라는 단어가 늘 붙여져서 복음으로써 증거 됩니다.

기생 라합은 다 때려부어 버립니다.

그것을 신약에서는 자기 이름을 부르지 않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그와 그 집이 구원을 얻는 겁니다.
(행 2: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행 16:31)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여기서 행 2장은 요엘서의 성령을 부으시는 종말시대 즉 상대적인 인간의 역사가 이미 심판 받는 시대 이니 인간의 이름을 추구하는 (바벨탑-국가체제)은 이제 끝인 겁니다.

또 행 16장의 내용은 간수가 바울의 감옥탈출로 인해서 임무불이행으로 이제는 끝임을 알고 자결할려고 할때에 더 이상 자기의 이름이 의미가 없을 때에 주 예수 라는 이름이 그 죽음 속에서 깜깜한 어두움 속에서 강렬한 빛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왜 성경은 자꾸 불의하다. 비천한 여성, 또는 자결의 순간이다. 또는 종말이다. 심판의 시대다, 또는 기생이다. 또는 불륜이다. 또는 불임여성이다. 또는 죽은자와 방불하다. 죄인 중의 괴수 이다. 라는 부정한 단어만을 앞장 세우면서 외치는 이유가 바로 사랑의 대상은 원수인 죄인 뿐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이것은 인간이 거울을 통해서 자기를 투시하여 거룩한 하나님을 조작해 내어서 거룩한 하나님과 자신을 일치 시키는 짓을 선악과를 통해서 하듯이
반대로 예수님은 죄인 중의 괴수를 통해서 자기를 투시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부정한 존재 또는 가치 없는 존재 또는 죽은자와 방불한 존재인
없음 없음을 통해서 무에서 유로 창조하는 능력을 거침없이 사랑의 풍성으로 나타냅니다.

그와 대비된 인간의 하나님이 된 선악의 한계는 유에서 유의 창조로 모방만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성화에 목숨 걸고 새생명의 삶에 목숨걸 수밖에 없습니다. 그거 실패하면 내세울꺼리가 없습니다.
내세울 필요도 없는 사랑의 세계를 쪽팔려서 안된다고 보는 겁니다.

다말의 두 아이를 안고 기뻐하는 찬양을 듣기 싫다고 미움받는 짓만 한다고 말리면서 돌아다니는 예수님의 친척과 다윗의 춤을 쪽팔려 하는 이름 뭐더라 아 참 사울왕의 딸 미갈이 비웃는 겁니다.

반드시 이 비웃음과 찬양이 한 세트가 되도록 하시는 겁니다.
(비웃음+웃음=이삭, 비웃음꺼리를 웃음으로)
(약탈자+신들과 싸워 해방케 하는자 = 이스라엘, 구원의 군사, 뿌뿌뿌 희년을 선포하는 자)
(편애받는다고 미워받아 찢어 죽임 당하는자+고엘 후견자=요셉, 원수에게 죽임당한 자가 도리어 원수를 용서함)

이것을 넘어 서는 것은 사랑에 자기 전부를 때려 부은 자 뿐입니다.

(마 11:5)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마 11:6)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결국 사랑이 더 밉지요. 목숨을 챙길려는 시도를 일체 허용치 않으니깐요
이런 고마운 사랑이 있기에 늘 지적 당하는 기쁨을 누릴수 있는 겁니다.

자 기생 라합의 거짓말 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는 우리를 거북스럽게 만듭니다. 거짓말 하라는 말인가? 그 상황에 거짓말이 옳니 아니니 하는 자는 이미 그 성경의 이야기에서 배제 됩니다.

더 냉정하게 따져 볼까요?

하나님의 공격으로 불 태워진 그 불 속에서 자기 가족은 구원을 얻습니다.
그럼 이 거짓말이 그 가정을 살렸습니다. 이것을 찬양한다는 것이 기쁠까요 쪽팔릴까요?

같은 맥락인 시아버지 유다와 며느리 다말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 예수님의 족보에 있습니다.
기쁩니까 쪽팔립니까?

이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선악을 손 놓아라는 겁니다.
너희의 소관이 아니라 주님의 소관이라는 겁니다.

주님의 소관이 된 일은 이 일 밖에 없습니다. 즉 십자가 라는 어리석음 뿐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탐스럽게 복음을 만들어 내고 예수님을 만들어 냅니다. 절대로 손 놓지 못하고 포기할수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와 일치 시킵니다. 그래서 자아라는 최후의 성전을 목적으로만 살아갈 뿐입니다. 그래서 삶 이라는 주제를 유행시키지요.

이것이 다른 복음입니다.

종교꾼들은 그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견디지 못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만. 다윗처럼 홀라당 벗겨짐을 당할때에
외부에서 오는 가죽 옷이 십자가에서 발생한 옷으로써 자랑하는 겁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옷입니다.

그러나 벗겨짐을 당하는 수치가 굴러가는 할례(할례도 결국 십자가를 말하기 위함이다.)를 거부하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릴려고 한다면

점점점 더 위선적인 화려한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하는 선악의 달인으로써 십자가를 거부할 것입니다. 왜냐 서로 원수 지간이거든요.

자 글을 맺고자 합니다.

왜 기생인가. 왜 거짓말인가? 왜 민족 배반인가? 이 모든 것은 우리 속의 죄성인 선악을 들추어내기 위함입니다. 그것이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반대로 종교꾼들의 행함은 이 부정한 십자가라는 불의의 재물로 친구 삼는게 아니라
반드시 자기의 의로움과 성화된 성숙함으로 증거하게 됩니다. 이것이 야보고서의 이 기생의 행위를 높이 높이 기념하는 이유입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 왜 하필 이삭을 재물로 바치는가 하면 자기를 부인하는지를 보시는 겁니다. 이삭의 죽음은 결국 자기의 죽음입니다. 그 죽음에 자신도 함께 때려 부어 버립니다. 그것이 바로 제사 지키기가 아니라
상한심령이 될 수 밖에 없는 순종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바로 이 모습으로 예수님이 옴을 믿음으로 보고 기다리는 겁니다.

신앙이란 내가 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손 놓고 주님이 하시기를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이 밉상 받을 짓에 아주 적극적인 자가 가장 많이 용서받은 자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나를 다이나마이트로써 세상의 캐슬에 장착시킨 자폭하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폭발물입니다. 이것을 제거하고자 세상은 비상 걸려 있습니다.

가만히 서서 주님이 뇌관을 누를때까지 우리는 세상 바벨탑 속에서, 이리떼 속에서 철거머리처럼 딱 가만히 붙어 있을 뿐입니다. 이 미끼가 된 운명이 성도입니다.

이것을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너희는 가만히 서서 구원을 바라보라 뻥 뻥 뻥

(출 14: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출 14: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출 14:1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뇨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앞으로 나가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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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