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을 통한 천국누림
싸움을 통한 천국누림
이름 : 김대식(IP:124.59.87.70)
싸움을 통한 천국누림
보통 천국운동을 벌리는 자들의 특징이 바로 정치술이다.
그 정치술이 바로 친화술책이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문화로써 펼쳐지는데 이런 집단적 운동은
바로 개인적인 성숙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자아의 성숙을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이다.
즉 여기서 어디에도 주님이 필요 없다. 그 자아발전의 디딤돌로써 예수가 도우미로써 작용해야만 할 뿐이다.
자 그럼 그 자아의 성숙은 곧 자기의 싸움 대상이 있는데
그 자기 싸움의 대상이 바로 자아다
자기를 자기가 상대로 해서 싸움의 승패를 둘려고 한다.
그 승패의 좌우로 성숙의 공든탑이
집단적인 에너지원이 되어서 타인까지 정복할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될려면 먼저 자기를 이겨야 한다.
이 자아를 이기기 위해서 서로가 도울려는 네트워크 정보와 기술과 프로그램이 활성화 되는 것이다.
이것을 축약하여서 집결화 된 것이 바로 종교요 교회이다.
그래서 이 교회는 종말론적 존재로써 마지막 희망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이런 인간의 활동에 예수님은 그저 조력자로써만 밧데리 충전기 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과 대비되는 사람의 일이다.
하나님의 일이란 인간의 배제 시키는데 있다.
즉 말씀을 말씀 혼자 스스로 지키고 이루듯이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 홀로만 하시는 일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다.
이것에 접목시키고자 나서는 것이 바로 기특하기 짝이 없는 사람의 일이다.
그것도 묵시적인 정보를 통해서 모든 정보를 잘 활용하여서 선배들의 실패의 절차를 밟지 않기 위해서 더욱더 전진하고 수고하고 노력하여서 그런 전철을 밟지 않고자 조심 조심
성숙 성숙의 완벽성을 거치고자 모든 튀어난 인간의 지혜를 집결하여서 성취할려고 한다.
결국 바벨탑의 결과 뿐인데 자신들 만큼은 결코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자기에게 도취되어 있다.
그럼 하나님의 일은 바로 이런 사람의 일을 유발케 하면서
상대적으로 대비되어 나타난다.
그것이 바로
죄와 의의 대립이다.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의 대립이다.
성전중심신앙과 성전밖의 십자가 사건의 대립이다.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대립니다.
여기에 모든 인간은 뱀의 후손에 속한다.
그렇지 않다 라고 나서는 자가 수상하다.
또는 과거에 뱀의 후손이였지만 지금은 아니다 라고 나서고 그 아닌 증거를 자꾸
저런 기독교문화의 성숙과 개인의 삶의 거룩성에 둘려고 한다.
놀랍게도 예수님 쪽에서 출발한 일들이 그 사람에게서 매일 매일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신과의 싸움이 매일 매일 함으로써 남과 대비하여 자기 의로움을 높인다.
결국 전쟁을 벌리는 주체와 그 전쟁의 대상이
예수님의 활동에서 그 근거를 찾고
그 예수님이 벌리는 전쟁의 대상에
인간 자신이 놓여졌음을 모르고
반대로 그 싸움을 거부하고자 자신만의 전쟁을 따로 설정해 놓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치술이다.
사랑이 없기에 정치를 하는 것이다.
성화론이란 바로 이런 정치술의 대가를 양성하는 것이다.
육을 겨냥한 성령의 전쟁은 성령의 성화로 나타나며 그 전리품으로써 우리는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자아가 성령에 의해 날마다 죽음으로써 그 죽은 자아를 보고 기뻐한다는 것이
말도 안되는 신비이듯이
상대적으로
죄가 스스로 벌리는 자아를 향한 자기의 싸움에
미숙하고 퇴보적이고 뒷걸음질 하는 자아를 깨우기 위해 게으른 자신을 부지런히 자학케 하는 것이 육이 육을 소멸케 한다는 말이
말도 안되듯이 이 말도 안되는 것에
모든 승부를 거는 인간의 죄성 또한 아주 신비롭고도 놀라운 것이다.
육이 육을 다스리고 자기관리에 나선다는 것이 죄의 신비이다.
자기 죄악을 관리하는 죄의 신비는 자기 콘트롤에서 벗어난 죄가 관리하는 시스템이요
상대적인
성령의 육을 후패케 하는 일은
성령의 전적인 싸움이다. 육이 개입을 거부하고
죄는 그 육의 개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이런 죄의 실체를 날마나 끄집어 내는 독단적인 임무를 홀로 맡은 분이
바로 성령이며
그 성령의 영적 전쟁에
우리는 대상일 뿐이다.
이것이 천국 누림이다.
영적 전쟁에 나도 개입하겠다고 나서겠다는 자체가
육의 싸움으로써 전환할려는 시도이다. 이것이 바로 성화요 종교이다.
모든 종교는 이 성숙을 지혜롭게 탐스러워 한다.
천국을 정복할려는 야심에만 가득하다.
천국에게 일방적으로 공격 당하는 자만이
자신이 천국에 갈 입장도 못되며 지옥백성임을 알게 된다.
남이 아닌 자신이 천국을 피해로 만들려는 시도에 매진하는 가해자이기에
그 가해자는 천국입성이 아닌 당연히 천국심판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신비다 왜 이런 생각을 할까?
십자가를 제대로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십자가를 통한 천국을 바라보지 않는 자는
당연한 입성을 노린다.
자신이 단 한반도 천국을 핍박하는 자임을 알수가 없다.
그런데 이런 자들을 대상으로 십자가는 전쟁을 선포한다.
성전에 두 사람이 있다.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성전을 향해 자신의 모든 것을 때려부은 자이고
십일조 금식 모든 것에 성숙성을 보인 의로움이 가득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그런 의로움에 대비되는 자를 차마 놓칠수가 없다.
비교되어야 우위에 놓이게 된다.
즉 그도 주님의 방법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저 구석에 쳐박혀 있는 고개도 못드는 자와
절대로 같은 인간이 아님에 대해
이 모든 것이 복이요 하나님께 감사함에 가득한 일임을 고백한다.
이 얼마나 멋진 고백인가?
그게 바로 마귀요
지옥만을 누린 자 이다.
그런데 지옥만을 누려서 자기 가슴만을 쳐 왔던 고개도 못 드는 자에게
천국은 그 악한 세리를 거두어 준다.
천국은 그런 자에게만 해당된다고 한다.
이게 천국일까?
아니 그런 천국이라면 조금이라도 착한 일에 정성을 다 해본 자들은
아마 가고 싶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 가고 싶지 않도록 하는 천국을 증거하는 분은 예수님 뿐이며
그 반대의 사람의 일을 하는 사단의 천국증거는
반드시 가고 싶도록 만드는 천국이다.
예수님으로 출발치 않고 자기들 멋대로이다.
이런 마귀의 천국 증거와 천국 누림이
우리들의 욕망과 일치하여서
우리도 건방지게 천국을 탐내고 있지는 않은가?
사랑이 없어서 정치적인 야욕만 키우는
이런 대중과 그 대중에서 나온 목회자와 싸울 의향은 없는가?
그 마귀에게 속한 자들과 싸울 의향이 없다면 같은 무리인 셈이다.
고맙게도 우리가 하기 싫어하는 것을 주님이 먼저 개시를 하신다.
외면하고파 돌아서도
늘 붙여주신다.
우리보고 싸우라는게 아니라 어떻게 주님이 열심히 싸우셔서
그 과정의 승리를 안겨주시는 것이다.
그것을 한 순간 한 순간 놓치지 않도록 우리의 관심사를 집중케 하고 궁금케 하신다.
바로 우리 인간 속에 있는 감추어진 죄를
감추어진 십자가의 사랑이 양발차기로써 보여주시면서
바로 이런 죄를 지적해 주시는 것이 사랑이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이 주님의 열심적인 싸움이 늘 옆에서 벌려주시고 심지어 나에게도 벌려 주시는 것이
바로 천국의 누림이다.
나를 상대로 해서 승리한 그 실제상활의 내용물이 바로 천국의 누림이다.
나는 참으로 아니군요 주님은 참으로 맞군요 라는 고백이
남의 고백에서가 아닌 내 입에서 너무 너무 기가막히고 놀랍게 너무 낮설어
무의식 중에 외치게끔 한다.
아뿔사 당신이였군요.
나의 싸움 대상은 예수님 뿐이다.
외면하기 싫어도 싸우기 싫어도 어쩔수 없다.
아무리 친화력으로 처세술로 다른길을 모색해도
이미 샅바에 묵여서 모래판 위에 놓여진 상태이다.
이제 허리 뿌라질 일만 남았다.
내가 싸우지 않는 예수는 내가 만들어 낼 뿐이다,.
나는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이제 인생이라는 모래판에서
늘 허리가 뿌셔서지는 영광에 놓여있다.
아무나 이 모래판에 예수님과 싸울 영광이 놓인게 아니다.
싸움 전표로써 늘 남을 이기고 올라가서 모두다 꺽고서 최고봉의 4강에서
2강인 결승전에 올라간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아예 내려와서 나랑 영광의 결승전을 펼치겠다고 찾아온 것이다.
이 인생이라는 모래판에서 예수님과 생존의 승부를 걸어야 한다.
죽기살기로 꺽어야만 한다.
불가능한 일을 해내어야만 한다.
이것이 십자가를 상대로하는 인간의 모든 싸움이다.
나의 유일한 싸움 대상은 예수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기 때문이다.
첨부파일 : 싸움을 통한 천국누림.hwp (32.5K), Down:11
이미아(IP:121.♡.82.156)
07-10-21 17:45
지난 과거보다 지금 현재가
어제보다 오늘이 좋은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만을 의지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 내내 자기 욕망을 채우며 살다가
교회를 가기 위해 신발장에서 신발 한켤레를 꺼내 신발을 신을 때까지도
내 욕망을 포기할 수 없었슴에도
결국엔 모든 것을 포기케 하시고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만을 남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에
굶주린 개처럼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미친듯이 헤매며 싸돌아 다녔던 그 과거보다도
오늘 모든 것을 꺽어버리게 하시는
뿌라질 일만 남게 하시는 지금이 좋은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진정한 행복임을 압니다.
십자가는 종교가 아니라 현실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한 사람은 I can do it 이 아니라 "나는 죄인중에 괴수입니다"라는 고백으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김대식(IP:124.♡.87.70)
07-10-23 00:10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는 확정 됨이 나는 죄인 중의 괴수 입니다 라는 자기부인과 한 세트가 되어서
십자가의 승리만이 고정 되었기에 우리는 그 십자가의 사랑만을 외칠수 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이거 대박 입니다. 로또 보다 더 큰 영광이 우리 하루 하루를 점령하면서 날마다 새롭게 덮쳐오는 대박 운명입니다.
원수와 사랑이 한 덩어리가 된 십자가
죄인 중의 괴수 와 그리스도의 본 되심이 한 덩이가 된 십자가
육을 후패케 하심과 영은 날로 새롭게 하심이 한 덩이가 된 십자가
심판 속에서의 구원이 바로 십자가로 고정된 현실 이겠지요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