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미래는 십자가 뿐
우리의 미래는 십자가 뿐
이름 : 김대식(IP:124.59.87.70)
미래는 예수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뿐입니다.
미래가 불안하지 않으면 사람은 미래를 대비 하지 않습니다.
만약 미래가 든든하다고 가정해 봅시다.
모든 것이 안정적이고 평화롭기 그지 없는 행복한 날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에덴은 이미 주님이 철수 시켰습니다.
즉 행복과 든든한 미래 이 모든 것은 이미 없는 겁니다.
현실을 직시 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이라는 허상은 이 현실을 거부하면서
줄기차케 에덴 동산의 잔상을 건설하고
미래를 세웁니다.
그것이 바로 바벨탑이요 미래를 대비하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멈출수가 없는 이유는 바벨탑을 쌓은 그 가인의 이마표가 우리에게도 적용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교를 세우고 성전을 건립하고 도시와 국가 등등의 모든 그림자가 목적성을 띠면서 자리매김을 하였습니다.
놀랍게도 실체만 없을 뿐입니다.
그 결핍을 그냥 둘 인간이 아닙니다. 예수로 채웠습니다.
단 십자가를 졌던 예수이니 예수만이 인간의 소망이다고 합니다.
그러니 십자가는 철수 시켜도 되는 겁니다. 이미 과거이니까요
그런데 그런 인간이 세우고 믿기 시작한 예수가 아니라
(인간 쪽에서 출발하여 인간이 선택한 예수)
예수님 쪽에서 출발하여 내세우고 밀어붙이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과거의 사건으로 끝나버려서 예수 만을 남긴게 아니라
반대로 예수님이 이 십자가의 지혜만을 남겨서 미래를 고정화 했습니다.
즉 예수님이 달려서 죽임을 당하신 그 십자가의 사건은
바로 인간들의 미래로 미리 앞당겨서 고정화 시켰습니다.
모든 인간의 미래는 십자가 뿐입니다.
놀랍게도 불의한 청지기의 지혜는 이 십자가를 준비했습니다.
이것이 빛의 아들들이라는 자들보다 더 나은 지혜라는 겁니다.
주인의 마음과 일치 했던 겁니다.
그 내용 속에는 돈 이야기는 단 한푼도 없습니다.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이요
예수님께서 확보하여 확증한 물건이요 재물이요 값어치입니다.
피 값으로 치루었기 때문입니다.
농부가 밭을 갈다가 보물을 발견하고서는 그 밭을 사버렸습니다.
그 감추어진 보물을 역으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천국비유이지만 인간이 보물 곧 천국을 발견하고 모든 것을 때려부었다 도 되지만
반대로 예수님이 우리가 아닌 우리 속에 자신이 심은 약속을 발견하고서는
다 때려부어버립니다. 다말처럼 향유를 부은 여인처럼 불의한 청지기처럼
자신의 행동을 그들을 통해 미리 앞당겨 보여준 겁니다.
곧 예수님이 다말이고 향유부은 여인이고 불의한 청지기인 겁니다.
다시 말해서
미래를 준비한 분은 예수님 뿐이며 그 예수님이 모든 인간들의 미래로써 고정시킨 사건은 십자가 뿐이다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 새생명의 삶? 성화된 그리스도인? 아닙니다. 그거 이미 구약에서 다 실패한것들로써 등장합니다.)
이런 부정함과 사랑의 피가 한 세트가 되어서 십자가로 고정이 된 겁니다. 미래로 자리잡은 겁니다.
다른 미래는 없습니다. 십자가라는 미련함과 지혜가 한 세트가 되었고
옛언약과(부정한 인간의 확정된 증거들) 새언약이 한 세트가 되었고
그래도 끝까지 십자가를 거부하고 자기 의로움을 쌓고자 하는 다른 복음을 쫏음으로써
다른 복음과 십자가(복음)이 한 세트가 되어서
우리의 미래가 고정이 된 겁니다.
우리는 교회라는 그림자를 통해서 왜 교회가 아니 내 자신이
십자가를 왜 거부할 수 밖에 없는가?를 세상이 아닌 교회를 통해서 봐야 합니다.
그것이 미래를 보는 겁니다.
그 미래에 십자가에 달린 어린양 예수님이 그 시점에서 나 라는 과거를 피 값으로
용서를 치르는 겁니다.
십자가는 미래에 고정된 사건입니다. 과거가 아니라 말이지요
결국 불안 곧 미래의 공포와 불안한 마음은 십자가가 흔들어대기 때문입니다.
너의 미래를 보라고
너의 미래는 이 죽음 뿐이라고, 이 십자가의 저주와 심판 뿐이라고
그리고 그 확정된 미래 속에 예수님이 무모하게 어리석게도
나의 미래의 죽음 곧 심판 속에 뛰어 드는
미래는 준비한 제물인 이삭과 같았다고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믿음이 (죽음이라는 심판의 불 속에 어리석게 뛰어든)
나의 미래를 법적으로 고정해 버려 판결해 버리는 땅 땅 땅
십자가 라는 이해 할수 없는
원수와 사랑이 한 세트가 된
원수를 사랑한 십자가의 용서가
모든 인간의 공포의 대상인 겁니다.
자기만의 미래가 철수 당해 버린 블랙홀이기에
십자가만을 겨냥한 모든 인간의 공격성이 바로 인간의 미래를 가득 채울 뿐입니다.
왜냐구요? 사랑은 미움을 통해서 증거 되기에
십자가는 십자가를 거부하는 인간이나 십자가를 옹호하는 인간이나 에누리 없이 인간의 모든 과거 현재 미래를 못 밖았기 때문입니다.
(갈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첨부파일 : 미래는 예수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뿐입니다.hwp (15.0K), Down:22
이근호(IP:117.♡.144.217)
07-10-20 20:11
돈 때문에 불의한 청지기가 된 자가 실은 돈 이야기를 하기 않고 있다는 아이디어가 참 신선하게 다가오는 군요. 그렇다면 실컷 돈 이야기를 하면서도 복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자질이 성도에게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돈 내라" '돈 못 내겠다" 이야기를 상호 던지면서도 오직 복음만 쳐다보고 교회가 그립습니다.
김대식(IP:124.♡.87.70)
07-10-22 23:58
항상 실체는 은폐성을 띄고 있고 누락될 그림자는 마음껏 동원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비유인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의 사람의 관심사 이든 지금의 현대인의 관심사든 뭐든지 다 재료로 해서 그것 속에 은폐 되어 있는 것을 한 세트로 해서 증거하심이 참으로 놀라운 신비가 아닐수 없습니다. 누락될 그림자에 빠져 버리게끔 하시는 것도 신비로움이요 은폐되어 있는 은혜가 덮치는 것도 신비입니다.
(롬 9: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롬 9: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롬 9: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롬 9: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롬 9: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롬 9: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