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만과 하버마스]
[루만과 하버마스]
이름 : 이근호(IP:117.55.144.217)
루만과 하버마스
이 근 호 목사
저 자 : 김삼룡
출판사 : 장원출판사 (서울 : 1995)
현대 사회학에서 양 대 거목이라고 할 수 있는 니클라스 루만(1927∼ 현재) 과 위르겐 하버마스( 1929∼현재)의 이론을 소위 ‘정당화 문제’를 중심으로 하여 상호 대비를 시도한 글이다. 오늘날 사회에는 많은 사회단체들이 들끓고 있다. 그 단체들마다 자기 존재의 정당성을 한결같이 주장하면서 버티고 있다.
교회는 교회대로, 회사는 회사대로, 가게는 가게대로 자신들을 이 사회에서 꼭 필요한 단체로서 존재라고 있다고들 한다. 같은 업종이나 같은 성격의 단체들 끼리 경쟁에 돌입하게 되면 결국 어느 단체의 정당성이 합당한가 하는 식으로 판가름 나게 되어 있다. 오늘날에는 사이트 끼리 이 정쟁에서 예외가 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어느 교회 치고 옆의 교회의 부흥을 위하여 자진해서 자신들이 설립한 교회의 문을 닫는 법은 없다. 어느 사이트 치고 다른 유사 성격의 사이트를 위하여 자진해서 자신이 개설한 사이트를 폐쇄시키는 사이트는 없다. 곧 망하고 곧 죽어도 자신들의 단체의 정당성 만큼은 양보하지 않는다. 이러한 정당성에 대한 집착이 과연 전체 사회를 조망하는 안목에서 보면 과연 정당한 논리를 갖고 있는가 아니면 무조건적으로 일단 우기고 보는가?
먼저 루만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1, 루만의 정당화 문제 이해
루만은 교회를 비롯해서 모든 사회체계들은 ‘자기 자신과의 접촉을 통해서만 환경에 반응하는 자기관계적 체계들’로 본다. 이 말은 곧 “모든 정당화는 자기 정당화다”라는 것이다. 이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사회 전체를 아우를 수 있을 정도로 이 세계는 경계선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늘 개방되어져 있기 때문에 한정된 범주만을 가지고 확정적 의미로 종결지울 수 없다. 그만큼 세계는 인간의 인식을 넘어설 정도로 복잡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의미 있는 세계’를 구축하고자 시도하는 그 활동 자체를 두고 정당성을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정당성은 외부에서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 활동을 시도하는 그 단체의 ‘자기 정당성’으로 피어난다. 이 사회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이란 다른 단체와의 진정 의사소통 자체를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단체를 운영하려는 시도와 관련 있을 뿐이다. 이것은 당연히 조직의 폐쇄성을 나타낸다. 하지만 이 폐쇄성은 항상 이 세계의 ‘확정 지을 수 없는 복잡성’에서 비롯되기에 늘 개방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는 폐쇄성이다. 다음 단계의 선택을 강요받게 되는 것이다.
사회단체의 시스템은 환경과 교류하면서 이루어지기에 그 환경 앞에서 비로소 그 지점과 시점에서의 의미를 누린다. 하지만 사회단체는 폐쇄적이기에 외부만 교류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적으로 조직원과 조직체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막스 베버에 의하면 자기가 소속된 정당성이란 조직원들의 동의나 이양된 권한에 대한 확신으로 정립이 된다. 그러나 루만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개인의 주체개념은 ‘자기관계적 체제의 개념’으로 대체된다. 조직을 운영하는 정치체계가 그 사회단체의 환경 속에서 안정될 수 있는 조건들과 전제들이다. 이로서 내부적으로 구성원의 인격 문제와 정치적 권력의 정당성 문제가 상호 타협 할 필요가 있다. 그 타협안 자체를 조직의 정당성이라고 루만은 주장한다. 그 타협안이란 바로 ‘특정한 관용의 경계 내에서 내용적으로 불확정적인 결정을 수용할 일반화된 준비성’을 두고 말한다.
즉 구성원들의 동기중립적인 태도를 수용해 주는 것을 조직의 정당성이라고 보자는 것이다. 이런 원칙에 입각해서 조직의 정당성을 위해서는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사업체에서 사업주는 그의 노동자가 특정 정당을 선택하도록 강요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단체의 정당성을 훼손된다.
루만에 의하면 인간이란 자기를 표현하는 존재이다. 이것을 보장하는 것이 조직의 정당성이다. 즉 “내가 원하는 것을 네가 하지 않으면 나는 네가 원하는 것을 하지 않는다”는 주의를 추호도 양보할 생각들이 없다. 이러한 개인적 선택권이 환경을 만나게 되면 실망과 위험의 가능성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인간들은 선택 메커니즘에서 안정화 메커니즘으로 방향을 틀게 된다.
즉 내가 선택하는 것보다 훨씬 안정적인 조직체의 선택에 기대를 갖게 된다. 이것이 개인적인 측면에서 보면 환경과 접촉한 결과다. 이 결과에 의해서 개인은 권력코드와 법의 배합을 원한다. 이것은 개인이 조직 자체의 영광이나 번영보다는 보다 효율적인 기능을 담당해주기를 요청하기에 갖는 태도다.
세계의 복잡성에 앞에 노출되어 있는 개인의 입장에서는 조직이 기능적으로 제 역할을 다 해주는 것이 이상으로 정당한 것은 없는 법이다. 그런데 복잡성이란 간소화 하면 할수록 더욱더 복잡해지기 마련이다. 여기서 조직원들은 조직체가 그 복잡성에 적응하는 빈도에 속도를 더 내어주기를 바라게 된다. 빠른 융통성이 발휘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소위 그동안의 정의(正義)는 체계 속에서 일시적으로 상품으로 타조직체와 거래되기도 하고 다른 변수들의 상승으로 인해 잠시 포기되거나 희생되기도 한다.
루만의 기능적 구조이론은 현 자유주의적 경제체계를 옹호하는 사람들에게 대단히 환영받고 있는 이론이다. 왜냐하면 철저하게 실용주의적 입장을 대변해주기 때문이다. 이익우선이다. 이익획득이 곧 조직의 정당성이요 조직 내에서의 진리요 정의(正義)다. 정의란 그 자체를 실현하기 위함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생산해서 응용만 하면 그만이다. 루만은 '정의(正義)없는 정의(正義)이론‘을 개발해 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루만이 생각한 정당성이란 체제에 대한 일시적 신뢰감 정도이다.
이번에는 하버마스의 정당성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2. 하버마스의 정당화문제 이해
하버마스는 궁극적인 행위 주체를 인간이 아니라 이성(理性)으로 본다. 즉 이성적으로 살지 아니하면 도저히 인간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뭐든지 이성적 합리성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고 보고 있다. 인간이라면 마땅히 이성을 사용하여 모든 위기와 환경을 이성적으로 극복하고 대처해서 이성이 갖는 진보적 빛을 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심리학자인 삐아제의 이론이나 도덕발달 단계론을 주창한 콜베어그의 인간 이해에 근거해서 인간 사회의 정당성 문제도 논의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정당성’보다 ‘정당화’에 치중한다. 정당한 질서를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당하다고 여겨지는 질서를 포착하는 것이다. 이것은 형식적으로 분석될 수 있는 ‘정당화 근거’를 찾는 작업이다.
정당성이 요청은 이성을 지닌 인간이라면 누구나 요청하는 바이다. 즉 정당성에 대한 긍정이 곧 정당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루만처럼 단순히 ‘정당성을 부정하는 것을 금지하자’는 식의 소극적인 태도와는 차별화 된다.
하버마스에 의하면 ‘정당성’이란 사(事)경제적 조직에서는 사용할 수 없고, 오로지 국가에서만 사용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것은 사경제적 조직에서 정당화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그 수위에서는 정당화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구조에서 야기되는 갈등들을 포착, 제도화된 분배투쟁들을 정치체계 속으로 결속시켜야 된다는 것이다. 국가의 합리성에 있어 위기란 정치체계에서 경제체계에서 야기된 조정명령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지 못할 때 일어난다.
국가는 두 가지 중요한 임무를 지닌다. 한편으로 국가기구는 이익과 수입의 창출을 통해 성공적으로 세입을 확보하고 처분 가능한 재정자금을 위기적 성장장애가 극복 될 수 있도록 합리적으로 사용하여 한다. 또 하나의 중요한 임무는, 선택된 징세, 지출의 인식 가능한 우선순위 유형 및 행정조직체들이 정당화 수요를 충족시키도록 해야 한다. 국가가 전자의 임무에 실패할 때, 행정합리성의 결여가 나타나며, 후자의 임무에 실해하는 경우엔 정당성결여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 정당화 형식을 위하여 하버마스는 ‘더 나은 진리를 위한 논증의 힘’을 믿는다고 했다. 더 나은 해결책이 계속 나올 수 있도록 의사소통이 가능한 형식을 유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모든 관계자들이 실천적 토론에 참여하여야 하며 최소한 참가할 기회는 가져야 하기 때문에 담화적으로 형성된 의사의 이성화가 공동이해를 높인다고 보았다. 이렇게 해서 정당화란 보다 나은 형식을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그는 이 형식적 진리나 정당성을 정치적 흥정의 대상물로 삼아서는 아니 된다 는 것이다.
그러나 하버마스에 있어 진리란 결국 이성적인 형식의 조건 안에 갇히는 꼴이 된다. 이것은 곧 제도적 지배에 놓이는 상황이다.
복음적 평가
명분을 위하여 개인이 희생한다고 하지만 인간으로서 자아라는 명분보다 더 우선적인 것은 없다. 왜냐하면 아담이 범죄 한 후에 인간은, 자신이 ‘자아’를 소지하고 있다는 의식을 갖고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 속에 있는 자아를 곱게 키워내기 위해서 외부로 행동에 나선다. 마치 캥거루 어미가 배에 달린 주머니 속의 자기 새끼를 위하여 먹이를 넣어주는 식으로 인간들은 자아를 돌본다.
이런 입장에서 사회나 국가나 민족이나 교회나 모두 ‘자기 관계적 단체’로 전락된다. 자기가 출석하지 않는 이웃 교회가 부흥되기를 기도하지 않는다. 옆집의 집 값이 자기 집 값보다 더 크게 올라가기를 기도하지 않는다. 자기 나라의 축구 국가 팀이 라이벌 관계에 있는 나라의 국가축구팀에서 크게 패하기를 기도하지 않는 법이다. 이웃 교회나 옆집이나 이웃 나라는 단지 ‘내 것’이 아니라 타인이란 객체에 속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있어 ‘자아’란 절대 명분이며 최종적인 가치며 궁극적으로 소지한 정당함의 주체이다. 따라서 사회란 인간에게 있어 항상 ‘환상 덩어리’다. 벗겨 낼 수 있는 환상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자아가 만들어 내는 ‘환상 덩어리’다.
이렇듯 조직의 정당함이란 곧 자아의 정당성을 투사시켜서 스크린에 비친 환상의 영상에 불과하다. 이 조직을 집단적으로 ‘나’라는 자아를 냉혹하게 취급하거나 박대하지 않는 조건하에서만 즐길 수 있는 환상이다.
그 조직에서 더 이상 자기 의로움이 먹혀들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다른 조직을 찾든지 만들어서 기어이 환상적인 ‘자아 대체물’을 포기하지 않는 법이다. 사람들이 이민을 가는 이유도, 소위 선교를 하는 이유도 다 여기에 있다. “내가 왔노라!”라는 말은 곧 “나의 의로움이 여기 떴노라!"라는 말이다.
아담의 수치를 가렸던 무화과 나뭇잎, 이 세상은 아직도 번성하고 있다.(창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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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IP:124.♡.84.82)
09-03-07 19:55
루만과 하버마스
이 근 호 목사
저 자 : 김삼룡
출판사 : 장원출판사 (서울 : 1995)
현대 사회학에서 양 대 거목이라고 할 수 있는 니클라스 루만(1927∼ 현재) 과 위르겐 하버마스( 1929∼현재)의 이론을 소위 ‘정당화 문제’를 중심으로 하여 상호 대비를 시도한 글이다. 오늘날 사회에는 많은 사회단체들이 들끓고 있다. 그 단체들마다 자기 존재의 정당성을 한결같이 주장하면서 버티고 있다.
교회는 교회대로, 회사는 회사대로, 가게는 가게대로 자신들을 이 사회에서 꼭 필요한 단체로서 존재라고 있다고들 한다. 같은 업종이나 같은 성격의 단체들 끼리 경쟁에 돌입하게 되면 결국 어느 단체의 정당성이 합당한가 하는 식으로 판가름 나게 되어 있다. 오늘날에는 사이트 끼리 이 정쟁에서 예외가 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어느 교회 치고 옆의 교회의 부흥을 위하여 자진해서 자신들이 설립한 교회의 문을 닫는 법은 없다. 어느 사이트 치고 다른 유사 성격의 사이트를 위하여 자진해서 자신이 개설한 사이트를 폐쇄시키는 사이트는 없다. 곧 망하고 곧 죽어도 자신들의 단체의 정당성 만큼은 양보하지 않는다. 이러한 정당성에 대한 집착이 과연 전체 사회를 조망하는 안목에서 보면 과연 정당한 논리를 갖고 있는가 아니면 무조건적으로 일단 우기고 보는가?
먼저 루만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1, 루만의 정당화 문제 이해
루만은 교회를 비롯해서 모든 사회체계들은 ‘자기 자신과의 접촉을 통해서만 환경에 반응하는 자기관계적 체계들’로 본다. 이 말은 곧 “모든 정당화는 자기 정당화다”라는 것이다. 이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사회 전체를 아우를 수 있을 정도로 이 세계는 경계선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늘 개방되어져 있기 때문에 한정된 범주만을 가지고 확정적 의미로 종결지울 수 없다. 그만큼 세계는 인간의 인식을 넘어설 정도로 복잡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의미 있는 세계’를 구축하고자 시도하는 그 활동 자체를 두고 정당성을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정당성은 외부에서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 활동을 시도하는 그 단체의 ‘자기 정당성’으로 피어난다. 이 사회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이란 다른 단체와의 진정 의사소통 자체를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단체를 운영하려는 시도와 관련 있을 뿐이다. 이것은 당연히 조직의 폐쇄성을 나타낸다. 하지만 이 폐쇄성은 항상 이 세계의 ‘확정 지을 수 없는 복잡성’에서 비롯되기에 늘 개방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는 폐쇄성이다. 다음 단계의 선택을 강요받게 되는 것이다.
사회단체의 시스템은 환경과 교류하면서 이루어지기에 그 환경 앞에서 비로소 그 지점과 시점에서의 의미를 누린다. 하지만 사회단체는 폐쇄적이기에 외부만 교류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적으로 조직원과 조직체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막스 베버에 의하면 자기가 소속된 정당성이란 조직원들의 동의나 이양된 권한에 대한 확신으로 정립이 된다. 그러나 루만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개인의 주체개념은 ‘자기관계적 체제의 개념’으로 대체된다. 조직을 운영하는 정치체계가 그 사회단체의 환경 속에서 안정될 수 있는 조건들과 전제들이다. 이로서 내부적으로 구성원의 인격 문제와 정치적 권력의 정당성 문제가 상호 타협 할 필요가 있다. 그 타협안 자체를 조직의 정당성이라고 루만은 주장한다. 그 타협안이란 바로 ‘특정한 관용의 경계 내에서 내용적으로 불확정적인 결정을 수용할 일반화된 준비성’을 두고 말한다.
즉 구성원들의 동기중립적인 태도를 수용해 주는 것을 조직의 정당성이라고 보자는 것이다. 이런 원칙에 입각해서 조직의 정당성을 위해서는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사업체에서 사업주는 그의 노동자가 특정 정당을 선택하도록 강요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단체의 정당성을 훼손된다.
루만에 의하면 인간이란 자기를 표현하는 존재이다. 이것을 보장하는 것이 조직의 정당성이다. 즉 “내가 원하는 것을 네가 하지 않으면 나는 네가 원하는 것을 하지 않는다”는 주의를 추호도 양보할 생각들이 없다. 이러한 개인적 선택권이 환경을 만나게 되면 실망과 위험의 가능성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인간들은 선택 메커니즘에서 안정화 메커니즘으로 방향을 틀게 된다.
즉 내가 선택하는 것보다 훨씬 안정적인 조직체의 선택에 기대를 갖게 된다. 이것이 개인적인 측면에서 보면 환경과 접촉한 결과다. 이 결과에 의해서 개인은 권력코드와 법의 배합을 원한다. 이것은 개인이 조직 자체의 영광이나 번영보다는 보다 효율적인 기능을 담당해주기를 요청하기에 갖는 태도다.
세계의 복잡성에 앞에 노출되어 있는 개인의 입장에서는 조직이 기능적으로 제 역할을 다 해주는 것이 이상으로 정당한 것은 없는 법이다. 그런데 복잡성이란 간소화 하면 할수록 더욱더 복잡해지기 마련이다. 여기서 조직원들은 조직체가 그 복잡성에 적응하는 빈도에 속도를 더 내어주기를 바라게 된다. 빠른 융통성이 발휘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소위 그동안의 정의(正義)는 체계 속에서 일시적으로 상품으로 타조직체와 거래되기도 하고 다른 변수들의 상승으로 인해 잠시 포기되거나 희생되기도 한다.
루만의 기능적 구조이론은 현 자유주의적 경제체계를 옹호하는 사람들에게 대단히 환영받고 있는 이론이다. 왜냐하면 철저하게 실용주의적 입장을 대변해주기 때문이다. 이익우선이다. 이익획득이 곧 조직의 정당성이요 조직 내에서의 진리요 정의(正義)다. 정의란 그 자체를 실현하기 위함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생산해서 응용만 하면 그만이다. 루만은 '정의(正義)없는 정의(正義)이론‘을 개발해 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루만이 생각한 정당성이란 체제에 대한 일시적 신뢰감 정도이다.
이번에는 하버마스의 정당성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2. 하버마스의 정당화문제 이해
하버마스는 궁극적인 행위 주체를 인간이 아니라 이성(理性)으로 본다. 즉 이성적으로 살지 아니하면 도저히 인간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뭐든지 이성적 합리성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고 보고 있다. 인간이라면 마땅히 이성을 사용하여 모든 위기와 환경을 이성적으로 극복하고 대처해서 이성이 갖는 진보적 빛을 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심리학자인 삐아제의 이론이나 도덕발달 단계론을 주창한 콜베어그의 인간 이해에 근거해서 인간 사회의 정당성 문제도 논의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정당성’보다 ‘정당화’에 치중한다. 정당한 질서를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당하다고 여겨지는 질서를 포착하는 것이다. 이것은 형식적으로 분석될 수 있는 ‘정당화 근거’를 찾는 작업이다.
정당성이 요청은 이성을 지닌 인간이라면 누구나 요청하는 바이다. 즉 정당성에 대한 긍정이 곧 정당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루만처럼 단순히 ‘정당성을 부정하는 것을 금지하자’는 식의 소극적인 태도와는 차별화 된다.
하버마스에 의하면 ‘정당성’이란 사(事)경제적 조직에서는 사용할 수 없고, 오로지 국가에서만 사용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것은 사경제적 조직에서 정당화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그 수위에서는 정당화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구조에서 야기되는 갈등들을 포착, 제도화된 분배투쟁들을 정치체계 속으로 결속시켜야 된다는 것이다. 국가의 합리성에 있어 위기란 정치체계에서 경제체계에서 야기된 조정명령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지 못할 때 일어난다.
국가는 두 가지 중요한 임무를 지닌다. 한편으로 국가기구는 이익과 수입의 창출을 통해 성공적으로 세입을 확보하고 처분 가능한 재정자금을 위기적 성장장애가 극복 될 수 있도록 합리적으로 사용하여 한다. 또 하나의 중요한 임무는, 선택된 징세, 지출의 인식 가능한 우선순위 유형 및 행정조직체들이 정당화 수요를 충족시키도록 해야 한다. 국가가 전자의 임무에 실패할 때, 행정합리성의 결여가 나타나며, 후자의 임무에 실해하는 경우엔 정당성결여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 정당화 형식을 위하여 하버마스는 ‘더 나은 진리를 위한 논증의 힘’을 믿는다고 했다. 더 나은 해결책이 계속 나올 수 있도록 의사소통이 가능한 형식을 유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모든 관계자들이 실천적 토론에 참여하여야 하며 최소한 참가할 기회는 가져야 하기 때문에 담화적으로 형성된 의사의 이성화가 공동이해를 높인다고 보았다. 이렇게 해서 정당화란 보다 나은 형식을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그는 이 형식적 진리나 정당성을 정치적 흥정의 대상물로 삼아서는 아니 된다 는 것이다.
그러나 하버마스에 있어 진리란 결국 이성적인 형식의 조건 안에 갇히는 꼴이 된다. 이것은 곧 제도적 지배에 놓이는 상황이다.
복음적 평가
명분을 위하여 개인이 희생한다고 하지만 인간으로서 자아라는 명분보다 더 우선적인 것은 없다. 왜냐하면 아담이 범죄 한 후에 인간은, 자신이 ‘자아’를 소지하고 있다는 의식을 갖고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 속에 있는 자아를 곱게 키워내기 위해서 외부로 행동에 나선다. 마치 캥거루 어미가 배에 달린 주머니 속의 자기 새끼를 위하여 먹이를 넣어주는 식으로 인간들은 자아를 돌본다.
이런 입장에서 사회나 국가나 민족이나 교회나 모두 ‘자기 관계적 단체’로 전락된다. 자기가 출석하지 않는 이웃 교회가 부흥되기를 기도하지 않는다. 옆집의 집 값이 자기 집 값보다 더 크게 올라가기를 기도하지 않는다. 자기 나라의 축구 국가 팀이 라이벌 관계에 있는 나라의 국가축구팀에서 크게 패하기를 기도하지 않는 법이다. 이웃 교회나 옆집이나 이웃 나라는 단지 ‘내 것’이 아니라 타인이란 객체에 속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있어 ‘자아’란 절대 명분이며 최종적인 가치며 궁극적으로 소지한 정당함의 주체이다. 따라서 사회란 인간에게 있어 항상 ‘환상 덩어리’다. 벗겨 낼 수 있는 환상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자아가 만들어 내는 ‘환상 덩어리’다.
이렇듯 조직의 정당함이란 곧 자아의 정당성을 투사시켜서 스크린에 비친 환상의 영상에 불과하다. 이 조직을 집단적으로 ‘나’라는 자아를 냉혹하게 취급하거나 박대하지 않는 조건하에서만 즐길 수 있는 환상이다.
그 조직에서 더 이상 자기 의로움이 먹혀들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다른 조직을 찾든지 만들어서 기어이 환상적인 ‘자아 대체물’을 포기하지 않는 법이다. 사람들이 이민을 가는 이유도, 소위 선교를 하는 이유도 다 여기에 있다. “내가 왔노라!”라는 말은 곧 “나의 의로움이 여기 떴노라!"라는 말이다.
아담의 수치를 가렸던 무화과 나뭇잎, 이 세상은 아직도 번성하고 있다.(창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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