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교회사 4강 - B
2005 교회사 4강 - B
이름 : 구득영(IP:203.223.97.160)
교회사 4강 - B
05,11,05 강의 이근호
이제 시작합시다. 교재 3페이지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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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라기우스는) 인간은 선과 악을 일일이 선택할 수 있는 타고난 능력을 올바르게 사용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올바른 조화를 이룬다는 형식적인 자유를 강조하였던 것이다. 그러기에 펠라기우스에게는 하나님의 은총이 인간 생활에 크게 작용하지 않으며, 어거스틴이 주장한 인간의 죄의 필연성도 맞지 않는 것이다. 펠라기우스는 아담이 타락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아담의 자연적 죽음은 죄의 결과가 아니라 정신적 죽음에 지니지 않는다고 보았다. 아담은 본래 죽을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범죄와 상관이 없이 자연사한 것이다. 그는 아담을 다만 인류와 단절된 개체로 보는 것이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모든 인간의 아담의 타락 이전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본성은 죄로 말미암아 약해졌거나 변하여진 것이 아니며 조금도 상처를 받은 것이 아니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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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펠라기우스 - 아담이 지은 죄의 책임을 물려받을 이유가 없다 !!
여기서 펠라기우스는 아담의 타락을 인정하는데, 그러나 그것은 죄의 결과가 아니라 정신적 죽음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아담은 다만 인류와는 단절된 개체라는 것이다. 이렇게 단절되었기에, 그래서 아담 이후에 태어난 인간들은 아담이 한 행동에 대해서, 즉 죄의 책임에 대해 물려받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인간이 아담의 죄를 물려받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 인간들이 제 아무리 노력해도 아담의 죄에서 못 벗어나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을 향해서 "바르고 선하게 살라" 라고 하신 말씀과 서로 모순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펠라기우스가 통탄하면서 하는 말이, 교회가 말씀을 제대로 가르쳐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선한 사람이 되고, 그리고 바른 인간이 되어야, 그래야만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담이 범죄를 했기에 우리도 날 때부터 죄인이라고 해버리면, 그러면 우리도 자동으로(?) 죄인이 되고 말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 아, 어쩌란 말인가 이 아픈 마음을 !!
(만약에 교회가 그렇게 가르친다고 하면 교인들이 어떻게 나오겠는가?) "아니, 죄인으로 태어났기에 죄를 짓는데 도대체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 라고 하면서, 자기 잘못에 대해서 반성은 고사하고 자기 변명으로 일관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자기 잘못조차도 하나님 탓으로 돌려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어떻게 선하게 살라고 하는 하나님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 되느냐는 말이다.
교재를 계속해서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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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볼 때 펠라기우스는 인간이 죄가 없다는 것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다만 인간이 죄를 짓지 않을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주장한 것이다. 그는 단지 어거스틴이 주장한, 인간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다는 죄의 필연성을 거부한 것이다. 아담의 죄가 후손들에게 미친 영향은 유전에 의해서가 아니라 본보기에 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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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펠라기우스 - 인간은 죄를 짓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
그러므로 펠라기우스는 인간이 죄가 없음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즉 인간이 천사라는 말이 아니라, 다만 인간은 죄를 짓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죄를 지을 그런 가능성마저도 부정하면, 인간이 무엇을 해도 죄가 되는데, 그렇게 되면 당연히 상식(?)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 펠라기우스 - 아담의 죄는 유전이 아니라, 다만 본보기 !!
다시 말해서, 아담의 죄가 유전에 의해서 우리들에게 미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본보기' 라는 것이다. 죄는 어쩔 수 없이 받아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본보기라는 말이다. "아하, 저러면 안 되는구나" 라는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중보기도'도 역시 마찬가지고 말이다.
제가 질문을 하겠는데, 만약에 아담의 죄를 우리가 그대로 물려받는다면, 즉 한사람의 죄를 우리에게 물려진다면, 그러면 예수님의 의가 우리에게 본보기가 되는가? 아니면 능력이 되는가? 로마서 5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의가 우리에게 본보기인가? 아니면 능력인가?
당연히 능력이라는 것이다. "여러분, 예수님이 착한 분이지요. 그러니 본받으세요" 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의가 우리를 완전하게 통치하고 지배한다는 것이다. 마치 아담의 죄가 우리를 지배하듯이 말이다. 그러니 아담 전체가 예수님과 우리 관계의 표상(예표)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로마서 5장의 내용이고 말이다.
(롬 5:17)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롬 5: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롬 5: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하지만 펠라기우스의 주장은 그게 아니라, 아담은 그냥 본보기이고, 그리고 예수님도 역시 본보기라는 것이다. (능력이 아니고 말이다.) 그런데 사실 펠라기우스나 어거스틴 같이 따지던 사람도 있었지만, 사실 그 당시에도 교리 같은 것을 가지고 그렇게 따지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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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죄가 인간을 얽어매는 힘은 습관이며, 이 힘은 범죄의 계속적인 행위에 의해 형성되는 힘이라고 보았다. 결국 인간이 인간과 더불어 살면서 범죄하게 되고 죄를 배운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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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펠라기우스는 죄를 습관이라고 하는데, 즉 습관은 고치면 고쳐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원죄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하는데,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고치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고칠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죄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인간은 인간과 더불어 살면서 범죄하고 죄를 배운다는 하는데, 사실 펠라기우수는 이렇게 하는 말마다 너무나 상식적이고 옳은 말만 골라서 하니, 성경을 전혀 보지 않은 사람도 고개를 끄떡이면서 "참,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 있구나"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 4페이지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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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유의지에 대해 논하기를, 하나님께서 인간이 선한 일 혹은 악한 일을 행하거나 말하며 생각한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 이 가능성을 주셨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선한 일의 원인이나 악한 일의 원인은 모두 하나님에게서 나온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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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인간이 착한 일과 악한 일을 행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런 '가능성'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바로 이런 가능성에서 나온 것이 무엇인고 하면 윤리와 도덕과 성화론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런 가능성이 없으면 인간에게서 윤리와 도덕이 나오지 않고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성화론이 성립되려면 인간에게 무엇인가 선해질 가능성이 그 기초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펠라기우스가 바로 이런 가능성을 이야기하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이야기해야 그 가능성에서 무엇이든지 다 끄집어낼 수가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 펠라기우스가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하는가?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방금 이야기한 것을 주장하니, 그것이 오늘날 천주교나 개신교의 이야기와 똑같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하지 않고, 십자가로 구원받는 것도 거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인가?
◈ 펠라기우스 -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도 본보기 !!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을 하나의 '본보기'로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이란 자기 하기 나름이지, 즉 예수님이 주신 선물이 아니라는 말이다. 현재 한국교회가 주장하기를,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총은 주기는 주되 직접적 은총이 아니고, 간접적으로 분위기를 잡는, 하나님이 그런 은총을 준다고 하는 것이다.
◈ 아싸, 호랑나비 - 분위기 띄우고 !!
예를 들면, 회사에서 회식을 갔는데, 1차로 저녁을 먹고 2차로 노래방에 가서 수줍음 많은 여사원에게, "노래를 불러라, 불러라" 라고 하면 그것이 은총이란 것이다. 이렇게 "불러라, 불러라" 라고 할 때에, "애라, 모르겠다" 라고 하면서 분위기를 따라서 함께 노래를 불렀는데, 그런데 만약에 그때에 노래를 잘 불렀다고 하면, 그것이 분위기를 잘 띄워져서인가? 아니면 자기가 노래를 잘 부를 가능성이 있어서 노래를 잘한 것인가? (그것을 살펴보자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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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의하면, 하나님의 은총과 더움은 개개의 행동에 대해서 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곧 자유의지 또는 율법과 교훈으로 주어진다고 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이 돕는 것은 의지와 행동의 '가능성'이지 의지와 행동 자체가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인간이 자유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더 쉽게 이룰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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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위의 노래방의 경우에서, "불러라, 불러라" 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인간의 행동할 수 있는 가능성이지, 인간의 의지와 행동 그 자체는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가능성은 가능성이지 행동 그 자체는 아니라는 말이다.) 쉽게 말하자면, '분위기 조성용' 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자유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분위기가 조성되어) 쉽게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불러라, 불러라" 라고 하면 쉽게 부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자극을 유발시켜 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창조의 은총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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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라기우스의 이런 사상은 결국 인간 의지에 선을 택하도록 어떤 특별한 압력이 가해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그는 반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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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펠라기우스의 사상은, 인간의지에 새로운 것을 선택할 수 있는 특별한 압력을 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불러라, 불러라" 라고 하고서는 안 부르니까, 마이크를 대고 (억지로) 입을 벌려서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면, 이게 무슨 노래를 잘 부르는 것인가? 그냥 장난감 인형처럼 가지고 노는 것에 불과하지 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가능성을 부추겨서 착한 일을 행할 수 있는 그런 은총을 주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은총이지 실제로 선을 행하는데 있어서 압력을 가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니, 하나님이 무슨 깡패두목인가? 인간에게 압력이나 가하고 말이다.) 즉 은총이란 인간의 가능성을 부추기는 것이란 말이다.
여러분, 어때요? 납득이 잘 되지요. 그의 주장이 참으로 상식적이고 논리적이지 않습니까?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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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라기우스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세 가지 기능 중에서, 첫째 가능성은 본래적 은총 또는 창조의 은총이라고 한다. 그는 또한 창조의 은총과 더불어 '계시의 은총' 혹은 '가르침의 은총'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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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인고 하니, 노래를 부르라고 분위기를 잡는 것도 은총(창조의 은총)인데, 그런데 자기는 극구 노래를 못 부른다고 하니, 김 과장이 하는 말이 "그러면 내가 시범으로 한번 부를 테니 잘 봐라" 라고 해서, 그렇게 해서 기차게 부르는 것을 보여주고 가르쳐주면 그것도 은총이라는 것이다. '계시, 혹은 가르침의 은총' 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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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용서의 은총’을 주장했는데, 이 은총은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죄를 회개하고 올바르게 생동할 수 있는 노력을 하게 하며, 자신이 행한 잘못을 고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방인들도 자신들이 가진 자유의지를 가지고 믿음을 가지게 되며, 그 공로로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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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방에서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도 은총이고, 노래를 시범으로 불러서 가르치고 보여주는 것도 은총이고, 그런데 마지막으로 놀랍게도 용서의 은총인데, 이 은총은 하나님이 인간들이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올바르게 행동할 수 있도록 노력하게 한다는 것이다. 즉 자기 자신의 잘못을 고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용서를 해준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일종의 '목적을 지닌 용서' 라는 말이다.
◈ 3가지 은총 - 창조의(본래적) 은총 !! 계시(가르침)의 은총 !! 용서의 은총 !!
다시 정리하면, "불러라, 불러라" 라고 분위기를 띄워서 조성해주는 것이 첫 번째 은총이고, "이렇게 불러라" 라고 가르치는 것이 두 번째 은총이고, 그리고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해도 회사에서 쫓아내지 않고 월급도 올려줄 게" 라는 것이 세 번째 은총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노래를 잘하고 못하고 하는 이 모든 것에 대해서 이미 용서해줄 할 자비가 하나님께 있으니, "이렇게 해 주는데도 니가 바르게 안 살아" 라고 하는 것이다. 즉 분위기를 한껏 띄워 주는데 까지는 조성해주겠단 말이다. 그러니 용서란 무엇인고 하면, 행동을 하지 않았는데도 용서해주는 것이 아니고, 미리 가르친다는 것이다. 즉 "니가 이렇게 하면 용서해 줄게" 라는 조건부로 말이다.
여러분, 이 펠라기우스의 주장을 듣고 나니 어때요? 제대로 말이 되지요? 그래서 그 당시 사람들이 완전히 펠라기우스의 펜들이 다 되는데, 이러한 펠라기우스의 주장을 듣고 난 뒤에는 그야말로 반박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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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펠라기우스의 은총관 *
첫째: 인간은 이성적 의지와 함께 원초적으로 부여된 힘으로 인해 죄 없이 살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둘째; 율법과 그리스도의 삶의 모범, 계시가 하나님의 은총이다.
셋째, 그리스도의 교훈은 율법과 마찬가지로 인간 본성과 구원에 적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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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대해서 어거스틴이 반박하는데, 어거스틴이 반박한 것을 살펴보기 전에 우리가 먼저 생각해볼 것이 있는데, 이 펠라기우스가 주장한 것 중에서 세 번째 은총인 '용서' 라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 용서의 은총 - 항상 용서할 준비가 되어있다 !!
"하나님, 제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너무나 잘못되었습니다" 라고 했을 때, 유대인은 율법으로 죄의식을 느끼고, 이방인들은 양심으로 느끼는데, 그런데 그때 하나님께서 "야, 나는 용서를 못해" 라고 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무자비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용서의 은총이란, 항상 용서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차원에서의 은총이라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엄마가 아이를 보고 "너, 잘못했다 - 예? - 잘못했다니까? - 예,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 이제 늦어서 안돼. " 라고 하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중에 회개만 한다면 용서해 줄게" 라고 하는 용서가, 즉 조건부용서가 되어있어야만, 비로소 그것이 은총이라는 말이다.
만약 지금 펠라기우스와 같이 설교를 한다면, 한국교회나 천주교에서 거부감을 나타내겠는가? 거부감보다는 오히려 환호성을 지른다는 것이다. "나도 인간답게 살 가능성이 있구나"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하는 말이 "그 귀한 것을 저 목사님이 가르쳤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 펠라기우스의 두 번째 은총이 무엇인고 하니, 성경말씀의 교훈, 즉 가르치는 것인데, 이런 가능성을 사람들에게 주면, 사람들이 자기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높여서, 자기를 가치 있는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서 더욱더 성경대로 살기에 정진한다는 것이다. 즉 신앙의 진보를 나타낸다는 말이다.
그리고 성경말씀을 보고 자기 잘못을 깨달았을 때, 마치 1907년 우리나라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시작해서 불길처럼 일어난 평양대부흥운동처럼, 그때 엄청난 회개의 물결이 평양을 휩쓸었는데, 이렇게 회개했을 때에 펠라기우스가 주장한 세 번째의 은총인 용서의 은총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 바르게 살도록 인도해주신 펠라기우스에게 감사하자 !!
다시 정리하자면, 사람들은 선해질 가능성이 있고, 그 다음은 (가르침을 받아) 성경을 보게 되고, 성경말씀을 보고 죄를 회개하니 용서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은 펠라기우스가 주장한 이 구원 이야기에 대해서 너무나 만족해하고 고마워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르게 살도록 인도해주신 펠라기우스에게 감사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펠라기우스가 무엇을 반박해서 나온 이론인고 하니, "우리는 선할 가능성이 없으며, 즉 자유의지가 없으며, 아담의 죄에 대한 책임을 그대로 물려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성경말씀을 보고 노력해도 아담의 원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라는 것이다.
◈ 이근호 - 안 되는 자리에서 구원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 !!
만약에 이런 것을 가르치게 되면, 조금 전에 말한 펠라기우스처럼 살고자 하는 그런 신앙적 의욕이 일어나겠는가? 안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니 참으로 하나님께 감사한 것이,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들이 잔머리를 굴려서 되는 것이 아니라, 안 되는 자리에서 구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논리와 인간의 이성으로, 즉 펠라기우스처럼 가르쳐야 받아들이지 그 반대로 가르치면 어느 놈이 미쳤다고 신앙생활을 하겠는가?" 라고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바로 그러한 환경 속에서 주님이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한다는 것이다. 주께서 그런 환경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펠라기우스는 어찌 보면 주님에게 말려들었는데, 복음의 능력에 의해서 말이다. 이 펠라기우스나 아리우스 쪽이나 다 그러한데, 사실 어거스틴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 어거스틴 - 동문서답 !!
여기에 대해서 어거스틴이 복음적으로 이야기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사실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의 주장에 대해서 제대로 반박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만 이단이라고 윽박지르기만 했다는 말이다. 물론 자기 나름대로 반박은 했지만, 영 엉터리이리고, 복음적이지도 않고 앞뒤가 제대로 맞지 않다는 것이다. 펠라기우스는 논리가 맞는데 어거스틴은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여기서 어거스틴 주장을 제대로 한번 살펴보자. 교재 5페이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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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354-430)은 저서 '삼위일체론'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지닌 인간을 세 가지 측면으로 분류
첫째: 하나님의 모습으로 만들어짐으로써 인간이 있게 된 것이다.
둘째: 인간은 하나님의 모상이로되 참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영역이 있다. 그 영역을 그대로 반영하는 분이 성모 마리아다. 인간의 영혼은 바로 하나님의 모상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무엇이다.
셋째: 이같은 모습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모습에 대한 참여적인 모습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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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삼위일체론이 튀어나오면 안 되는데, 어거스틴이 이것을 왜 삼위일체론에서 다루는가? (이것이 어거스틴의 한계라는 것이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가 왜 개입되는가? 아니, 성모 마리아가 왜 개입을 할 수밖에 없는가?
시릴이라는 깡패(?)가 "성모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이다" 라고 주장했는데, 이것 때문에 네스토리우스는 그만 이단으로 내몰려서 중국 쪽으로 도망을 가서, 거기서 '경교' 라는 이름으로 전도하다가 사라졌던 것이다. "마리아가 무슨 하나님의 어머니인가? 예수님의 어머니이다" 라고 주장해서 말이다.
또 네스토리우스는 주장하기를, "마리아는 예수님의 인성을 낳았지, 어떻게 예수님의 신성을 낳았는가?" 라고 했는데, 그래서 시릴이 황제에게 뇌물을 주어서 재판에서 이겼고, 네스토리우스는 쓸쓸히 퇴장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 성모 마리아 - 예수님을 대변할 수 있는 代打 !!
그러면 왜 이렇게 성모 마리아를 중요시하는가? 그녀가 아니라면 예수님으로 구원받는데 인간의 대변자가 없다는 것이다. 디모데전서에 보면,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중보자는 오직 한 분 예수님밖에 없는데, 그런데 예수님이 지금도 할아버지처럼 살아 있으면 되는데, 그만 하늘로 가시고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대변할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했는데, 그 대타(代打)가 성모 마리아라는 것이다.
(딤전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러면 또 질문하는데, 왜 하필 성모 마리아인가? 다른 남자나 여자들은 안 되는가? 이 성모 마리아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아담에게서 내려오던 죄성이 마리아에게서 잠시 중지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무염잉태(無染孕胎), 즉 원죄로 오염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 잉태했다는 것이다.
만일 마리아가 아담의 죄를 그대로 갖고 있다면 예수님은 죄를 가지고 태어난 것이고, 그런데 마리아가 아담의 죄가 있기는 하지만 잉태할 때 죄가 정지되었다면, 예수님은 죄가 없는 인간으로 태어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성모 마리아는 죄가 없다는 말이다.
◈ 죄 없는 존재에서 죄 없는 행동이 나온다 !!
예수님의 죄 없음을 예수님의 착한 행동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이미 태어날 때부터 죄 없는 상태에서 태어나셔서 죄 없는 삶을 사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논리가 놀랍게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나오는데, 즉 "죄 없는 존재에서 죄 없는 행동이 나온다" 라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인간의 행동은 그 사람의 존재에서 나온다고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동철학을 그대로 적용했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이것과는 조금 다른데, 인간이 행동하는 것은 인간에게 어떤 우연적인 사태가 터지면 관계론적으로 자기가 죄 짓고 싶지 않지만 죄가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플라톤이 이렇게 이야기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존재에서 행동이 나온다고 했고 말이다.
이것은 좀 어려운 이야기이니 다음 이 시간에 교리들을 다룰 때 더 하기로 하고, 325년 제1회 니케아 회의에서 삼위일체론 논쟁 이후에 교리적인 문제들이 나오는데, 성모 마리아론, 화체설, 예정론 논쟁, 영혼문제 등을 다루려고 한다는 것이다.
화체설은 샐러드 말고, 예수님의 몸(체)이 실제로 포도주와 떡으로 변하는지 말이다. 그리고 프랑크 왕조와 관련된 아주 치열한 예정론 논쟁이 나오는데, 모든 인류는 다 예정이 되었는지, 그리고 예정이 있으면 유기(방치)도 있는지 말이다. 그리고 영혼이 물질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지 말이다.
◈ 펠라기우스 - 인간이 선한 행동을 하도록 교리적 동기를 !!
그렇다면 이런 교리들이 무엇과 관련이 되어있는가? 사람이란 자기가 납득이 되는 소리를 들어야만, 그래야 교회에 가서 졸지 않고 듣고서 신으로부터 구원받았다고 여겨 선한 행동이 나온다는 것이다. 만약 그런 선한 행동이 나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구원받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선한 행동을 하려면 그만한 교리적인 바탕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 교리적 바탕을 펠라기우스가 이야기하였는데, 그런데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의 논쟁을 살펴보면, 좀 엉뚱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대식씨 옷이 새까맣네. 떼가 묻은 것 아닌가?" 라고 하면, "아닙니다. 오늘 아침에 새로 입은 것입니다" 라고 하든지 해야 하는데, 난데없이 "우리집 도배지는 깨끗합니다" 라고 엉뚱한 소리를 한다는 것이다.
펠라기우스가 말하기를, "아담의 죄를 그대로 물려받았으면 인간에게는 선한 것이 없다" 라고 했으면, 어거스틴은 "그래, 없다" 라고 해야할 것인데, 그런데 어거스틴은 엉뚱하게도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 라고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아니 여기서 왜 하나님의 형상 이야기를 하는가? 그것은 펠라기우스의 주장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고, 그의 주장이 성경의 일부라고 해서 포함시킨다는 것이다. 즉 "당신이 주장하는 것도 맞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이야기할 때는 그래도 되지만, 그러나 성경전체에서 볼 때는 그렇지가 않다" 라고 그의 주장을 보담아(안아주는) 주는 식으로 대답해 버린다는 것이다. "이단아, 물러가라" 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어거스틴은 반대할 것은 반대한다고 확실하게 이야기해야 할 터인데, 그냥 포용하는 식으로 해버린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는고 하니, "니보다는 내가 더 넓게 본다" 라는 식인데, 그렇게 해서 은근슬쩍 이기려고 한다는 말이다.
교재 5페이지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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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의 영성의 본질적인 부분은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회복에 있다. 어거스틴은 형상과 유사함을 번갈아 사용하지만, 일반적으로 교부들에게 있어 전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지성으로 연결되었음 있음을 말한다면, 후자는 원죄에 의해 상실된 것으로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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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거스틴 - 인간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
하나님의 형상은 어거스틴의 영성을 이야기할 때 본질적인 부분인데, 인간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데 그것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에게 들어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회복, 이것은 이레니우스와 오리겐이 다 주장한 것인데, 이렇게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있으니 인간은 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펠라기우스이 말하기를, "어거스틴, 당신 말이야, 인간은 뭘 해도 죄라고 하지 않았느냐?" 라고 하니, 어거스틴이 말하기를, "이 인간아, 니가 보기에는 내가 죄를 조장하는 자로 보이느냐? 그것이 아니고 인간은 신이 될 수 있어" 라고 한다는 것이다. 펠라기우스가 나이가 조금 많지 싶은데, 실제로 둘이 만난 적은 없지만, 만남을 전제로 해서 지금 이야기하는데, 사실 이게 답변이 되는가?
어거스틴은 계속해서 "펠라기우스, 너는 말이야 사람의 약점만 갖고 그렇게 말하면 안돼. 물론 세태가 악한 것은 알지만 이 사회와 교회가 아름답게 되는 다른 방식이 있다. 너는 자유의지와 아담이 지은 죄가 서로 관계가 없다는 식으로 교회를 정화시키려고 하지 말고, 내 방식대로 하면 정화할 수 있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우리 목적이 서로 같으니 친구 아이가, 그냥 잘 지내자" 라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하나님과 유사성이 있고, 바로 이 유사성 회복에는 예수님의 새롭게 하시는 능력으로 그렇게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정리하자면, 어거스틴은 "인간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데, 이 형상을 회복됨으로써 펠라기우스가 그렇게 걱정했던 것을 해결할 수 있다. 즉 국가와 교회의 타락을 개선할 수 있는 비책이 성경에 있는데, 하나님 형상을 회복하면 그 문제가 풀리게 되어있다. 그리고 내가 인간은 죄만 짓는다고 하는 뜻은, 하나님의 형상 회복에는 예수님의 구원의 능력이 임해야 회복된다" 라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교재 5페이지를 보자. 위에서 말한 것이 나온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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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어거스틴은 '삼위일체론'에서, 삼위일체로서의 형상인 인간이 삼위 하나님의 내적인 삶에 어떻게 참여하는가에 관심 갖는다. 인간이 동물을 넘어서는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된 데 있으며, 그것은 이성이나 마음 또는 지성으로 불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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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재 6페이지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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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는 그의 저서 신국론에서 인간이 육체에 따라 살 때 허약한 것이지 하나님을 따라 살 때에 허약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태초 창세기에 인간의 본성은 본래 순수하고 흠 없는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인간 본성은 그 자체로 악한 것이 아니다. 비록 어거스틴이 종종 ‘타락한 본성’들의 표현을 쓴다 할지라도 인간 본성 자체는 타락이나 부패로 간주한 것이 아니다. 육체의 본성 그 자체는 악이 아니지만, 육을 따라 사는 것은 확실히 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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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인간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보는데, 긍정하는 이것이 바로 신의 사랑에 참여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로서의 자기 자신과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서, 인간본성이 회복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본성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비록 종종 타락한 본성이 나오지만 말이다. 다시 말해서, 육체의 본성은 그 자체가 악이 아니라 육을 따라 사는 것이 악이라는 것이다. 즉 인간이 죄는 짓지만 완전히 악만 행하는 악인이 아닌데, 즉 악이 나오는 선한 사람이란 것이다.
* 펠라기우스 - 선을 행해야만 선이 된다.
* 어거스틴 - 악을 행해도 선을 추구하면 선이 될 수 있다.
* 펠라기우스 - 악을 행하면 악인이고 선을 행하면 선인이다.
* 어거스틴 - 악을 행해도 선인으로 봐주자.
다시 말해서, 펠라기우스의 말은, 자기가 착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나쁜 짓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자유의자가 있고 선을 행할 가능성이 있기에 말이다. 그런데 선을 행할 가능성을 발휘하지 않으면 나쁜 놈이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 어거스틴은, 나쁜 짓을 해도 선을 추구한다면 선한 사람으로 봐주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본성은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니 말이다.
교재 7페이지를 보자. (계속되는 어거스틴 부분은 여기 설명보다 교재를 참고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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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죄악이나 패덕(悖德)의 책임을 육체의 본성에 돌려서 조물주를 모독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육체의 본성은 그 본질 및 질서에 있어서 선한 것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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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은 모든 존재하는 것을 선으로 보았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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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인간이 하나님이 모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완전하게 자유와 영원을 가진 존재로서 창조되었다는 말이다. 어거스틴의 인간에 대한 출발점은 창조주의 손에서 나온 그대로의 인간 본성을 그대로 그려내는 것이다. …… 아담이 가지고 있는 자유는 죄를 지을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는 뜻에서 자유이다. 본디 인간의 자유란 선을 지향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선이란 신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랑과 동일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선을 지향하는 한 인간은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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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이 말을 참 어렵게 하는데, 아담의 자유는 "죄를 지을 수 없다" 라는 자유가 아니라,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 라는 자유라는 것이다. 이것이 굉장히 심오한 뜻이 담긴 것 같기도 한데, 그것이 그 뒤에 나오는데, 인간은 선을 지향하게 되어있는데,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자체가 선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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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인류를 대표하는 아담은 왜 타락했나? 어거스틴에 의하면 아담의 타락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다. 그리고 아담이 인간인 이상 아담 이후의 인간은 그 원죄에 물들게 되었다. 죄로 인해 근본적인 선들은 어둡고 약하게 되었기에 조명과 치료를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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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은 아담의 타락은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있다고 했는데, 아담 이후 인간은 그 원죄에 물들게 되었고, 그 원죄로 인해서 근본적 선은 어둡고 악하기에 조명과 치료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런 잘못은 창조되어 온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의 잘못인 원죄로부터 온 것이라는 말이다.
◈ 아담은 인류의 대표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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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서 아담은 죄된 의지를 가진 죄인이 되었다. 영혼은 하나님의 도움을 상실하였으며, 그와 동시에 육체에 대한 지배력도 상실되었다. 마음은 정욕으로 가득 차게 되었으며, 저급하고 변하기 쉽고 불확실한 사물을 의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어거스틴은 원죄의 실재를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한 결과는 무엇인가? 아담은 인류를 대표하는 사람이라서 아담의 죄는 인류 전체의 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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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은 인류를 대표하는 대표자이기에, 그래서 아담의 죄가 인류전체의 죄가 되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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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는 것으로 전체로서 인간의 본성이 최초의 인간에게 이미 종자상태(種子狀態)로 나타나고 있다고 가르쳤다. 즉 개인적 행위로서의 최초의 죄는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의 행위였다. …… 어거스틴은 이러한 원죄가 부모로부터 자녀에게 전달되는 수단은 불순한 성질의 성적 욕망, 즉 육체적 출산 행위에 의하여 부모로부터 자식에게 전해진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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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집단 공동체로 볼 때, 우리 모두가 다함께 아담 안에서 죄를 지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혼하지 않으면 그 죄를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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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의 이론은 인간의 자유의지가 박탈당했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이 의지를 가지고 있지만 의지의 사용은 결국 죄를 짓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끝없는 죄악의 굴레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갇혀 있는 신세인가? 어거스틴은 '아니다'라고 답변을 한다. 이 죄악의 굴레 속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은총이라고 그는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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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은 인간의 자유의지가 박탈당했다는 뜻이 아니라, 의지를 사용하면 결국에는 죄를 짓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죄악의 굴레 속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은총' 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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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회복은 오직 은총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한다. 이러한 은총은 상대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절대적인 의미에서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구원을 필요로 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인간에게 남아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포착하게 한다. 이러한 은총은 세례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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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은 은총을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이런 은총은 상대적 의미에서, 즉 분위기를 띄우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 의미에서 필요하단 말이다. 그리고 세례가 나오는데, 세례가 없이는 구원이 없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 9페이지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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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펠라기우스는 인간 스스로가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고,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은총의 덕분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어거스틴의 자유의지에 관한 사상은 두 단계를 거치고 있다. 첫 단계는 펠라기우스가 나타나기 전의 사상으로서, 이 때의 자유의지론이 사실상 주체는 악의 본질과 기원에 관한 것이다. 두 번째 자유의지론은, 펠라기우스를 반대하기 위한 자유의지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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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라기우스는 인간 스스로가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고, 어거스틴은 이것을 하나님의 은총 덕분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거스틴의 '자유의지론'은, 악의 본질과 기원에 관한 것과, 펠라기우스에 반대한 것, 이렇게 두 종류가 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 10페이지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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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한편으로는 악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인간에게 돌린다. 즉 악은 창조 후 인간에 의해 이 세계에 들어왔기 때문에 전적으로 인간의 책임이며 원칙적으로 구속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창조가 선하며 악의 원인이 인간에게 있다는 확신은, 인간으로 하여금 책임성을 심어주게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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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재 11페이지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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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 결핍' 이론은 고대교회 도처에서 발견된다. 사실상 '선의 결핍' 이론은 어거스틴 이전에 존재했던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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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이 어거스틴의 주장인데, 과연 펠라기우스가 이야기했던 것을 제대로 답변을 했는가? 전혀 엉뚱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래서 펠라기우스의 반박이 나오니, 어거스틴이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착해질 수 있는가?' 라는 것이 좁은 의미에서는 니 말이 맞는데, 그러나 세상 전체가 다 선하게 움직인다고 보면, 펠라기우스야,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유전되는 것도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보자. 그걸 가지고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하지 말고 말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선하고, 혹시 죄가 있다면 그건 아담이 죄를 지은 것이고, 아담이 우리의 대표자이니 그래서 책임은 우리에게 있지 않느냐. 따라서 인간이 구원을 받는 것은 은총으로만 구원받는다. 그것을 가지고 '아담은 아담이고 나는 나다' 라고 자기 노력으로 시도해버리면,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러한 어거스틴의 답변을 들어보면, 무엇인가 빠진 듯하고 조금은 미심쩍은, 그래서 뭔가 주저주저 하는 느낌이 들지 않느냐는 것이다. 저 이근호만 그렇게 느끼는가?
◈ 어거스틴을 부정하면 개신교가 부정된다 !!
지금은 그 어느 누구도 어거스틴에게 시비를 걸지 않는데, 왜냐하면, 칼빈과 루터가 어거스틴을 바탕으로 신학을 했기에 말이다. 그래서 이 어거스틴을 부정하면 개신교가 부정된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에서 바로 루터와 칼빈으로 끌어당겨 왔기에 말이다. 어거스틴을 공격하면 루터와 칼빈을 공격하게 되고, 그러면 개신교에 무엇이 남겠는가?
왜냐하면, 개신교는 어거스틴에서 바로 루터와 칼빈으로 끌어당겨 왔다는 것이다. 그 중간지점에 있는 중세시대는 다음 이 시간에 할 것인데, 아벨라드, 에르게나, 안셀무스, 아퀴나스, 스코투스 등 쟁쟁한 신학자들을 다 제겨두고서 말이다. 물론 어거스틴은 사도바울에서 땡겨 왔는데, 역시 중간지점을 모두 다 생략했다는 것이다.
◈ 어거스틴의 은총론 - 하나님의 형상을 예수님의 은총이 와서 회복 !!
이렇게 어거스틴이 어거스틴 된 것은 바로 이 '은총론' 때문인데,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이 말하는 은총론의 근거가 무엇인고 하니, 우리 속에 있는 신적 요소, 즉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와서 회복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처음부터 하나님은 인간을 선하게 지었기에 말이다. 즉 선한 것을 선한 하나님이 회수해 가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내 것이네" 라고 하면서 말이다. 이런 선한 것을 회수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우리 형상 속에 다가와서 건진다는 말이다.
◈ 펠라기우스는 '사실'을 질문했는데, 어거스틴은 '설명'을 함 !!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을 겨냥해서 예수님의 은총이 오게 되면, 그 사람이 비록 죄를 짓더라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때문에, 그래서 그 은총 덕분에 선한 행동이 나오게 되고, 선한 사랑들이 나온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어거스틴의 태도는, 펠라기우스는 '사실'이 무엇인가를 물었는데, 어거스틴은 '설명'을 하는 것과도 같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이 성경책을 보고서 "이것이 무엇인고?" 라고 물으면, "그것은 성경책이다" 라고 대답을 해야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이것은 새까맣고, 여기에 글자가 적혀져 있고, 또 이것은 종이로 되어있거든" 라는 식으로 대답을 한다는 것이다.
◈ 펠라기우스 - 인간의 선을 향한 현재의 '자유의지'가 중요 !!
◈ 어거스틴 -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바라보는 것이 선(善) !!
이제 결론을 내려보면, 어거스틴은 은총이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고 했고, 펠라기우스는 은총도 필요하지만 그것은 분위기 조성용이고, 다른 무엇이 더 중요한데, 그것은 바로 인간의 결심, 즉 인간의 선을 향한 현재의 '자유의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선한 영광을 돌리는데 말이다. 어거스틴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바라보는 그것이 선한 모습이라고 했고 말이다.
◈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 - 둘 다 삼위일체론에서 벗어나지 못함 !!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둘 다 십자가의 복음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데,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 이들 두 사람이 다 어디에 관심을 가졌는고 하니,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 라고 하는데, 즉 "하나님이 사람이 되고, 사람이 신이 된다" 라고 하는, 즉 삼위일체론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성경이 아니 교회가 결정한 삼위일체론에서 말이다.)
물론 어거스틴은 예정도 믿고 예정론을 말하는데, 펠라기우스는 믿지 않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 예정(豫定)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고 유기(遺棄)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데, 그냥 "선택했다, 구원했다" 라고 주장만 하는데, 왜냐하면 악의 책임을, 즉 지옥에 가는 책임을 사람에게 돌리고 하나님께 돌리지 않기 위해서 라는 것이다.
제가 보기에는,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둘 다 오로지 인간 구원론에, 즉 "인간을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 라는 것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이다. 물론 교회의 모든 교리 자체가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있기에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말이다.
다시 말해서,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은 둘 다 어디에 관심이 있는고 하니, 사람을 어떻게 끌어 모으고 얼마나 납득시키는가에 따른, 즉 인간적인 전도와 사람을 설득하고 납득시키기 위해서 열심을 내고 관심을 가지는 것이지, 참된 복음을 증거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 이근호 - 피조물 됨이 오히려 영광 !!
만약에 펠레기우스가 저에게 그런 공격을,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해왔다면, 어거스틴은 피조물이 인간의 약점이라고 말했는데, 그러나 저는, "아니 피조물이라는 것이 무슨 약점인가? 오히려 그것이 영광스러운 것이지" 라고 대답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거스틴의 사고방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인간이 약하다는 것을 문제시하고 중요하게 따지지만, 그러나 인간이 약한 피조물이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왜 개인적으로 강하다든지, 약하다든지 하는 것에 관심을 두느냐는 말이다. 인간이 피조물이 된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피조물 된 것인데, 그래서 인간은 반드시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이 이렇게 나오는 것은, 정신을 엉뚱한데 팔아서 예수님을 잊어버렸기 때문인데,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잊어버린 것이 아니고 말이다. 사실 어거스틴이 말한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 수도 없지만 말이다.
◈ 참된 성도 - 예수님이 지금 어떤 일을 하고 계시는가?
예수님께서 직접 찾아오셔서 자기 백성을 데리고 간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데리고 가겠다고 하는데, 그런데 인간들은 이것을 종교로 바꾸어버린다는 것이다. "나는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고, 어떻게 하면 신이 될 수 있는가?" 라고 말이다.
그러나 과연 참된 성도라면 어떻게 나오겠는가? "예수님이 지금 어떤 일을 하고 계시는가? 예수님이 무슨 일을 벌이고 있으신가? 예수님은 지금 어떤 작업을 하시는가?" 라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오직 예수님만을 증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도라는 것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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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라기우스가 하는 이야기가 아주 예리하지만, 사람들이 펠라기우스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펠라기우스를 이단이라고 말하는 자신들이 사실 펠라기우스가 한 이야기를 그대로 다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펠라기우스의 주장과 그 내용들은 덮어버리는 것이다.
* 질문 - 애초부터 그들은 '보편 구원론' 이었습니까?
* 답변 - 그렇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나 다 나오라는 말이다. 인간이 어떤 논리를 펼치더라도 이 펠라기우스 수준밖에 안 나온다는 것이다. 어거스틴도 펠라기우스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 질문 - 성화론자들이 그들의 신학을 다 걸치고 있으니, 자기들 주장의 근거들을 루터나 칼빈에게서 찾고있지 않습니까?
* 답변 - 시간이 없어서 다 강의를 못했는데, 삼위일체에서 '위' 혹은 '일체' 라는 용어가 성경에 없다는 것이다. 그냥 예수님을 증거하면, 그것이 구원이고 천국인데 말이다. 그러니 삼위일체를 굳이 다듬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듬는 이유는, 그렇게 해야 신부들의 권위가 살고, 그래야 자기 말을 듣는다는 것이다. 한 하나님 밑에 한 교회(감독)인데, 어느 교회에 가야 구원을 받겠는가? 어디에 가서 세례를 받고, 누구에게 성만찬을 받으면 구원받는가? 그러니 참으로 쉽다는 것이다. 세례를 받고 떡만 먹으면 되니 말이다. 그러니 인간들은 이렇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상태에서 무엇이든지 다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진짜 예수님이 와 버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나님 형상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 내가 예수님을 위한 피조물이구나. 예수님 복음을 위해서 태어났구나" 라고 한다는 것이다.
다음시간에는 어거스틴에서 루터와 칼빈으로 바로 넘어가는데 있어서, 바로 그 그냥 넘어가서 빠진 부분들을 할 것이다. - See you 다음 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