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42: 1- 4 (조용한 메시아)
사 42: 1- 4 (조용한 메시아)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41)
본문: 이사야 42장 1- 4절
제목: 조용한 메시아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이사야-2005/110강-사42장,1-4,(조용한,메시아)-isa071017.hwp
이근호
07-10-17 20:57
조용한 메시야
2007년 10월 10일 본문 말씀: 이사야 42:1-4
(사 42:1)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사 42:2)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사 42:3)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사 42:4)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공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메시야가 어떤 모습으로 오느냐 이야기입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은 이 땅에서 실제로 일을 하시게 되는 종입니다. 문제는 그 메시야가 일을 하셔도 사람들이 그 분의 일이 메시야로서의 일인지를 과연 알아 보느냐 하는 겁니다.
지난 구절을 보게 되면, 하나님은 심판주를 보내셔서 토기장이가 진흙을 밟는 것처럼 세상을 지근지근 밟겠다고 하십니다. 따라서 이 말씀에 부합되는 메시야가 이 땅에 오신다면 상당히 요란하고 드센 분위기를 몰고 등장할 것이라는 것이 인간들의 선입견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예상한 그런 모습을 띤 메시야를 보내시는 것이 하나님편에서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정작 오신 메시야는 인간들의 머리로서는 도저히 예상 못할 모습으로 일하시는 분입니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분으로 오십니다. 전혀 심판을 행사할 자질이나 능력을 품고 있지 않을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싫어하고 기피할 인물이다 는 점입니다.
사람들이 특정 인물을 반기는 것은 내심 자신의 욕망달성에 유리하게 작용할 경우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사람들이 천성적으로 기피할 수 밖에 없는 인물로서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평소에 제일 싫어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추락’입니다.
사람들은 추락하는 것을 제일 겁냅니다. 절벽에서 떨어지는 물리적 추락도 본성적으로 겁을 내지만 신분상의 추락이나 위신상의 추락이나 경제적인 추락이나 건강상의 추락도 대단히 겁을 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상승시켜주는 메시야가 아니라 추락한 몰골을 하신 메시야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 분은 자진해서 하늘의 영광을 포기하시고, 죽기까지 낮아지셨는데 곧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따라서 십자가 죽음에서 우리는 제대로 완성된 메시야상을 볼 수가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삶의 방향성은 모든 사람들이 다 싫어하는 삶의 방향성으로 다가옵니다. 그 누구도 자력으로는 그 분의 동행하고자 하지 않는 분으로 활동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악마로부터 시험을 받게 되는데 두 번째 유혹이 바로 사람들이 고대하는 메시야상으로 세상에 나서라는 제안입니다. 성경 말씀대로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어디서부터 난데없이 천사가 나풀나풀 날아와서 예수님의 발이 땅에 닿기 전에 바치게 되는 기적을 보여준다면 예수님의 메시야 사역은 수월하고 대중적으로 인기를 한 몸에 받으면서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는 제안을 악마가 건넵니다.
이 방식은 추락의 방식이 아닙니다. 세상적인 목회 성공의 방식입니다. 왜 하나님은 사람들이 기피하는 모습으로 메시야를 파견했을까요? 그것은 자력으로 구원받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입니다. 감추어진 하나님의 비밀은 감추어놓으신 그 하나님께서 알려주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모르도록 되어 있습니다.
마치 입법자가 아니면 아무도 제대로 준법자가 될 수 없는 이치입니다. 왜냐하면 법을 지켜야 하는 준법자는, 법을 만든 자가 법을 만들 때의 본래의 취지를 분명히 알고 있을 경우에만 제대로 준법이 성사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나오는 모든 말씀의 취지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데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본성상 이런 취지를 아는데 실패하고 반대로 성경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의로움과 정당함을 챙기는데 급급합니다. 하지만 인간들의 법 지키기란 매일매일이 다릅니다. 똑같은 규칙을 준수해도 그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는 날마다 다른 공상들로 채워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법 지키기’가 매일매일이 다릅니다. 그 날들 가운데 어느 날에 지킨 규칙을 가지고 제대로 지켰다고 대표로 내세울 수 없는 형편입니다.
예수님이 알하심에도 사람들은 제각기 예수님에 대한 평이 다 달랐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레미야와 같다고 했고, 어떤 엘리야를 닮았다고 했고, 어떤 이들은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고 물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고 말입니다.
이 때 베드로가 말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이 말씀을 대하고 난 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그 고백의 실체를 말해주십니다. ”베드로야 네가 복이 많구나, 이런 고백을 하는 된 것은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니라“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초라한 행색으로 모든 인간들의 능력을 배제하고 오직 예수님 쪽으로 찾아가신 자들만 알게 하시는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신 겁니까? 그것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재간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예가 창세기 19장 소돔과 고모라 성의 심판 사건에 나옵니다. 롯이 천사의 말을 듣고서는 자꾸만 그 성에서 빠져나오기를 지체합니다. 하지만 하늘의 유황불을 실제로 보고 있는 천사들은 그런 롯을 그냥 둘 수 없어서 강제로 집 밖으로 이끌어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두 번 다시 뒤돌아보지 말라고 말입니다.
이런 강제력이 동원된 사람이 참으로 복 받은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 많은 보석들이 있지만 예수님을 알게 된 만이 진정한 보석입니다. 무엇보다도 소중합니다. 재물보다도 소중합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거지 나사로의 경우를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철저하게 거지 나사로를 인생 끝날까지 고생시킵니다.
병이 낫지 않는 상태에서 천국으로 데려갑니다. 돈이 한 푼 없게 만들어서 천국으로 데려갑니다. 과연 나사로가 그런 자기 인생에 대해 실망했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런 앞에 있는 부잣집에서 매일같이 울려나오는 풍악소리보다 자신의 마음에 찾아와 주신 하나님의 구원을 더 큰 재물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돈없고 건강 잃은 것이 전혀 문제거리가 되지를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씀은 마태복음 12:18절에서 재인용됩니다. ‘상한 갈대를 꺽지 않고 꺼져가는 등불을 꺼지 않는다’는 말씀은 갈대가 아깝고, 등불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그들에 심판을 잠시 유보하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시간에 하나님이 건질 자를 위한 낮아짐으로 인한 구원사역이 조용하게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알지 못하게, 인위적인 안목이나 양심이나 종교심으로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신 메시야, 이런 메시야를 주를 영접한 자는 이미 보배같은 인물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고생이 나의 고생보다 더 심했음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