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10월 15일 티끌만도 못한 주제에 1
대구 10월 15일 티끌만도 못한 주제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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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10월 15일 강의 티끌만도 못한 주제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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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11-20 21:56
[티끌만도 못한 주제에]
정재현 저 분도출판사(왜관:1999)
이근호 2006-05-20
이 책은 ‘사람됨’을 대해서 철학적인 탐구와 신학적인 탐구를 시도한 책이다. 철학적인 탐구란, 인간이 인간에 대해서 어떤 이해가 가능한 지를 신학적인 탐구란, 신으로 인해 생겨난 피조물인 인간이 신과 어떤 관계로 맺어져 살아가는 것을 탐구하는 것이다.
우선 철학적인 탐구에 들어가게 되면 인간은 인간에게 다음과 같이 묻게 된다. “인간이 무엇이냐”고. 이것은 인간이 ‘참된 인간상’이 궁금해서 묻는 것이다. 그렇다면 ‘참됨’과 ‘인간’이 서로 관련 있다는 것을 기정사실화 하고 묻는 것이 된다. 즉 ‘참된 인간상’이 분명히 ‘있음’을 전제한 물음이다.
여기서부터 철학은 ‘참’과 ‘있음’을 연결시키는 작업에 나서게 된다. 서양의 고중세 철학은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을 ‘참’이라고 간주했고 다른 것은 참이 아닌 거짓이라고 분류했다. 예를 들면, 사람마다 원을 그려도 다 조금씩 틀리는 원을 그려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진짜 완전히 둥근 원은 따로 생각할 수 있다. 바로 그 생각할 수 있는 완전한 원은 ‘참’ 즉 ‘진리’가 된다.
하지만 근대 철학에 들어서서는, 그 진리가 어떻게 알려질 수 있는가 하는 인식론 문제가 대두된다. 즉 ‘무엇이냐?’에서 ‘어떻게?’로 물음의 관심사가 바뀌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니 ‘어떻게’라고 묻는 그 주체가 독자적이고 절대적인 영역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이 대상의 위치를 점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이루어진 주객관계에서 ‘무엇’의 객관성과 ‘어떻게’의 주관성을 상호 연관시키는 방식을 갖게 되었다.
나아가 칸트에 이르러서는 대상에 대한 주체의 인식적 우위를 선언하는 선험성까지 부여받게 되었다. 그런데 인간의 주체적 부상과정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피히테와 쉘링을 거치면서 존재론적으로 세계구상적 자아로서의 위치까지 부여받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헤겔에 이르면 ‘있음’과 ‘앎’이 같다는 것을 선포하게 된다.
하지만 헤겔 이후 현대철학에 와서는 “인간이 왜 ‘참’을 묻는가?”라는 실존을 해부하기 시작한다. 즉 보편성과 자존성을 근간하는 하는 본질과는 대비해서 이제 실존이라는 개별성과 우연성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언제, 어디서 사느냐에 따라서 ‘누가’가 규정되는 것이다. 즉 인간이란 개별적 주체의 시공적 상황성을 포함시킬 때만 대답될 수 있는 질문으로 바뀐 것이다.
전에는 ‘무엇-어떻게’에 관심을 갖다가 이제는 ‘누가-언제/어디서’에 관심을 갖게 되는데 이로 인해서 전에 관심을 가졌던 것, 즉 ‘무엇-어떻게’가 ‘왜?’라는 질문을 고리로 하여 하나로 연결지어진 것이다.
‘인간이 무엇이냐?’로 질문을 던졌던 것으로 인해 절대적 보편성을 찾고자 했던 것이 이런 ‘보편적 인간’이라는 같음의 대표 단수성을 거부하고, ‘개별적인 사람들’이라는 다름의 복수성(複數性)을 외치게 된 것이다. 이 개별실존은 사건이고 행위이기 때문에 명사(名詞)적이 아니고 동사(動詞)적이다. 즉 개념화에 의한 명사의 고정화적 속박으로부터 해방을 의미한다. 인간은 명사적 완결존재가 아니라 ‘되어가는’ 동사적 ‘사람됨’이다. 만약에 자신을 명사적으로 규정하려고 한다면 자기구축 작업으로 인해 자기동일성으로 목적으로 삼게 되고, 이렇게 되면 타자를 자기 안으로 예속시키든지 아니면 타자를 자기로부터 몰아내려는 경향을 띠게 된다.
‘같음’과 ‘다름’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다름’을 억지로 조성해서 기어이 ‘자기 같음’에 매몰되고 싶어 한다. 현대철학은 이러한 ‘존재철학’의 오류를 찾아내어서 ‘동사화’된 ‘생성철학’으로의 전환을 모색하는 것이다. 이 전환에는 타자(他者)의 역할이 요긴하다. 서로 다르다는 것이 도리어 나에게 없는 것과 모르는 것을 발생시키는 힘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열린 관계성’이다. ‘열린 관계성’을 유지하는 가운데서 ‘열린 가능성’이 나온다.
만남과 대화를 통해서 끊임없이 ‘같음’으로 묶어내려는 시도를 거부해야 한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 자신이 아니다!”고 외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나를 주체로 설정하려는 경향에 대해 타자가 원리적으로 장애로 등장할 때 비로소 관계적 개체성을 통한 잉여지대의 본격적 개시가 이루어지며, 이 잉여지대(여분)야말로 바로 실체의 자기충족성이 지니는 폐쇄성의 족쇄로부터의 해방이 선포되는 ‘다름=차이’의 자리이다. 이 차이가 곧 관계성의 지평이며 자유의 실현가능성의 터전이다. 이로서 타인에 대해 상호동격임을 알 때 비로소 진리는 그 가운데 피어난다는 것이 현대 철학의 ‘참다운 인간’에 대한 결론이다.
신학적인 인간 탐구는 인간에 대해서 다음 두 가지 전제를 가지고 들어간다. 하나는 피조성이요, 다른 하나는 죄성이다. 피조성이란 인간의 유한성을 의미하고, 죄성이란, 타락성을 의미한다. 인간의 피조성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성격이 담겨 있다. 하나는, ‘인간은 무로부터 창조되었다’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인간은 신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라는 점이다.
무로부터 지음 받았다는 것은 인간의 유한성을 뜻하고, ‘신의 형상 부여’는 인간의 초월성을 가리킨다. 인간에게 있어 비록 ‘없음’으로부터 창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없음’은 여전히 살아있다. ‘없음’은 단순히 ‘없음’이 아니라 ‘다 알 수 없음’을 의미한다. 즉 인간은 늘 신비적인 기운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말이다. 이미 아는 것으로부터 알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무지(無知)의 지(知)’이다.
반면에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 이레네우스를 비롯한 초대 교부들은 신과의 관계에서 인간을 이해하면서, ‘형상’과 ‘유사성’을 구별했다. 즉 신의 형상은 인간에게 주어진 것으로서 ‘인간의 타고난 이성과 정신적 자유’로, 그리고 신의 유사성은 ‘신의 은총에 의한 완전을 위해 인간이 이루어야 할 과제’로 이해하였다.
이에 근거해서 이레네우스는 인간은 하나님에게 불순종하고 그를 거역하여 죄인이 되었지만 이것은 주어진 형상의 영역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이루어야 될 유사성의 영역에서 일어났으며, 죄로 인해 ‘신의 닮음’은 상실되었지만 창조의지에 의한 ‘신의 모습’은 파괴되지 않고 존속한다고 주장한다.
신의 형상을 죄와 분리시키는 이레네우스의 이러한 초월주의적 견해는 중세 스콜라 신학에 이어졌는데,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은 에덴 동산의 아담에게 자연적 능력을 가리키는 형상뿐 아니라 초자연적 선물인 유사성도 주었는데 범죄로 인해 초자연적 선물은 소실되었지만 인간의 본질적 특성을 의미하는 자연적 능력, 즉 신과 관계할 능력은 남아 있다는 입장을 취했다.
칼빈은 신의 형상이란 신의 능력과 영광을 나타내는 거울이라고 하면서 그것을 광의와 협의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전자는 신이 창조한 삼라만상의 피조물을 뜻하고 후자는 인간의 영혼과 육체에 관련된다. 그런데 그에 의하면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육체적 특성에서도 신의 지혜와 능력과 영광을 볼 수 있다고 했다.
몰트만은 신의 형상에 대해 이러한 전통적인 실체 유비와는 달리 관계 유비로 접근해야 함을 역설한다. 그는 신의 형상에 대한 실체적 이해는 인간을 동물과 구별하는 특징에서 시작한다고 보면서 이러한 출발점은 인간 중심주의적 편향성을 지님으로써 온당치 못한다는 견해를 취했다.
그에 의하면 신의 형상이란 인간론적 개념이기 전에 신론적 개념이므로 신의 형상으로 창조되는 인간에 대해 무엇인가를 말하기 전에 자기의 형상을 스스로 만들고 그것과 특별한 관계를 맺는 신에 대해 무엇인가를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신의 형상은 먼저 ‘인간에 대한 신의 관계’를 말하며 그 다음에 ‘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말한다는 것이다. (저자, 정재현은 이 견해를 따른다) 왜냐하면 그러한 신과의 관계에서 인간의 본질이 생성되기 때문이다.
신의 형상이 신-인 사이의 상호관계성을 지칭하는 것이라면 신과 함께 인간도 관계적 존재임을 뜻하는 것이며, 타락으로 인한 신의 형상의 상실이란 곧 관계성의 파괴를 의미한다고 할 때, 이 관계성의 복원에 대해 인간도 마땅히 능동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지시함으로써 인간을 자유로운 존재로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신의 형상이란 창조사건의 맥락에서 볼 때 이미 주어진 것일뿐 아니라 이루어 가야 할 것이기도 하다.
신의 형상이 시원인 동시에 종말인 과정적 관계의 사건임을 말한다. 이로서 신의 형상이란 이미 창조된 인간에게 덧붙여지는 속성이 아니라 인간이 그 자체로 무엇인가를 설명하려는 의미를 지닌다. 곧 그는 인간이기 때문에 신의 형상인 것이다. 신의 형상이란 인간의 특수한 기질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됨을 의미한다.
이것을 실존적으로 보면, 신 앞에 선 존재로서 인간이 자기를 실현할 수 있는 자유와 신이 물어오는 질문에 답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유한성을 부정하지 않는 초월성이 유한자에게 허용된다는 말이다. 이로서 인간은 유한하면서도 이를 넘어서는 초월성을 지닌다. 유한성에 대한 체험은 곧 초월성에 대한 체험이다. 이처럼 인간의 삶이란 유한성과 초월성이 서로 만나 얽히는 과정이다.
이러한 얽힘이 최고조로 극대화 하는 것이 바로 죽음이다. 하지만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향해 가는 자유를 지닌 자이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있어 죽음은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인간의 죽음은 인간의 죄성과 타락과 연관해서 탐구해야 한다.
루터에 의하면 ‘신의 형상’은 죄 가운데서 잃어버리고 그 자리에 ‘마귀의 형상’이 자리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인간의 전적 타락→유전적 원죄설→죄와 죽음의 인과론적 고리’라는 일련의 구도를 축으로 하여 죄론과 구원론을 수립하려는 작업이다.
이 구도는 한편으로는 인간을 죄인으로 낮추고 신을 높이 떠받드는 경외의 자세를 견지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러한 자세는 그 의도하는 방향과는 정반대로 엄청난 신성모독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성경은 분명히 신이 인간을 그의 형상대로 창조했다고 했는데, 신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된 피조물이 자진해서 신의 형상으로서의 존엄성을 훼손하고 포기하고 비하시킨다면, 즉 자기 것도 아닌 남의 것(하나님 것)을 함부로 취급한 것이 된다면 그 피조물의 창조적 원주인 되시는 신의 입장이 어떻게 되겠는가?
인간을 낮출수록 신이 높아진다는 아니 더욱 노골적으로 말한다면 인간을 낮추어야만 신을 높일 수 있다는 발상은 이것이야말로 오히려 신과 인간의 동격화에 입각한 신성모독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인간이 신성을 모독한다고 해서 모독될 신성이라면 그것은 애시당초 신성이 아닐 터인즉, 신성모독보다도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인간 자신의 자기이해의 비열함에 있다고 하겠다. 그래서 기존 신학에서의 죄의 강조는 인간을 억누르기 위해 사용된 것이다.
그렇다면 죄란 무엇이며 죽음이란 무엇인가? 타락이 ‘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옴’이라면 이것은 이미 ‘신과 이어져 있음’의 견지에서 보면 ‘있어야 될 본래 자리로부터의 이탈’이라고 하겠는데 이것이 곧 죄이다. 인간은 자기 존재의 근거를 계속해서 자기 안에서만 찾으려고 할 때에 그런데 인간의 죄는 두 가지의 모습을 드러내는데 하나는 부정적인 ‘자기 비하’이며 다른 하나는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자기 구축/자아 실현’이다.
‘자기 비하’라는 것은 자신의 욕망에 자아를 맡기는 모습이다. 예를 들면, 속죄에 대한 확신에서 주어지는 평안은 결국 자기확보로 귀결됨으로써 ‘죄의식→속죄→평안→자기유지’라는 이기적 죄성의 고리를 오히려 더욱 조장하게 된다. 즉 죄의식의 심화나 부추김이 인간의 자기비하라는 제스처를 통해 결국 승리주의적 자기확보를 노리는 반신앙적 작태인 것이다.
또한 자기 비하는 타자를 절대화시키는 사태에 이른다. 타자가 만약 자기 눈에 절대적으로 보인다면 그 절대를 절대로 용납하지 못하고 파괴시켜버리고 싶은 욕망을 부추기게 된다. 쉽게 말해서 상대방의 완벽과 완전이 꼴보기 싫어서 없애버리지 않고서는 못견디는 관계를 수립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죄, 즉 소외는 ‘자기 구축/자아 실현’의 긍정적인 면도 ‘떨어져 나옴’은 그 무엇인가 새롭고 창조적인 것을 ‘향해 움직임’의 동기가 된다는 점을 확인해 준다. 죄는 넘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겪어가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죄가 마술적인 속죄 선언을 통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자기부정의 과제를 부여해 주는 기제로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한다.
죄성의식이 구원 가능성과 연관된다고 할 때,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라는 로마서 5:20의 말씀이나 ‘죄의식은 신 앞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바로 자유로운 행위’라는 키에르케고르의 외침은 의미가 있다. 그러기에 ‘구원받은 죄인’이라고 하지 않던가?
인간은 이처럼 유한성과 초월성 사이의 괴리로 인하여 죄성을 피할 길은 없는데 죄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자기를 겸허히 비우고자 하는가, 아니면 죄성을 깨닫지도 못하거나 부인함으로써 오만스럽고도 무지몽매한 상태에 머물 것인가의 선택만이 있을 뿐이다.
이레네우스에 있어 악이란 단지 인간이 미성숙성에서 유발된 모습일 뿐이다. 종국에 가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온전하게 다 하신다. 인간에게 있어 타락이란 신의 선하신 목적의 성취를 가리키는 완전성에 인간이 근접하기 위해 신이 친히 지정하신 조건이다.
이러한 사상은 쉴라이어마허에게도 이어지는데, 죄라는 것은 벌로서의 고통에 연관되는 것이 아니라 죄의식과 신의식 사이의 정비례성에 의거하여 구원이 구현되게 하기 위함이다. 쉴라이어마처는 이러한 목적론적 구원관에 입각해서 종래의 아우구스티누스와 칼빈 전통에서 유구하게 견지되어 오던 임의적 예정에 의한 구원과 저주의 갈림길, 즉 양과 염소의 구별을 거부하고 보편구원론에 대한 희망을 피력한다.
즉 그에 의하면 만일 영원한 축복의 천당과 영원한 형벌의 지옥이라는 영역이 확연히 분리되어 있다면 이것은 두 영역이 서로 그 존재를 의식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렇게 된다면 천당의 사람들은 그들의 품성으로 미루어 지옥의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동정을 느낄 것이 분명한데 이런 상태에서 그들이 결코 행복하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영원한지 축복이라는 것이 영속적 저주와 공존하다는 것 자체가 어느 쪽도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되는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쉴라이어마허에게 있어서 신의 절대적 주권성이란 양과 염소를 임의로 가랄 처분하는 폭군적 횡포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이러한 분리가 오히려 신의 절대성에 대한 제할일 뿐이라고 단호하게 일축한다. 그에 의하면 인과론적 결정주의자들이 그렇게도 애지중하는 신의 절대적 주권성이란 바로 종국적 구원의 단계에서 모든 영혼들을 회복시키심으로써 태초에 시작하는 창조를 비로소 완성하신 것을 의미한다. 이 얼마나 해방적 복음인가!
하나님은 인간과 더불어 구원과 완성을 위한 대화적 구도를 짜기 위하여 자기 아들 예수를 보내었다. 그리고 자기 아들의 수난 안에서 자신도 함께 수난을 받았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피조물과 더불어 ‘피조성과 죄성의 상호공속성’을 맛보기 위해서이다. 예수님의 고통은 ‘인간 때문에’나 ‘인간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인간과 더불어’의 고통이다.
고대 철학에 의하면 형상을 질료를 움직이게 해주지만 형상 자체에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런 철학을 받아들인 전통 신학은, 신은 인간을 사랑하기는 하지만 겵코 고통을 당하지는 않는다는 주장을 철저히 고수했다. 그러나 본회퍼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고통받은 신만이 고통받은 인간을 도울 수 있다”고.
‘신 자신으로서의 신’과 ‘인간을 위한 신’ 사이의 긴장은 예수의 죽음에서 해소가 된다. 몰트만은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해서 죽음의 고통을 받으셨고,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고통을 받으셨다고”고 했다. 즉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으로 인해 인간은 유한성과 초월성의 갈등으로부터 종말적으로 해결될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즉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신다’가 아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은 사랑하실 수도 있고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한일서 4:18) 이 하나님의 사랑이 이 세상 창조의 근거요 인간의 자유를 필연케 한다. 이 자유에 의하면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란 곧 신의 자발적 제한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신에게 있어서나 인간에게 있어서나 자유보다 앞선 것은 없다. 인간의 자유란 창조보다 앞선다. ‘인간의 자유란 창조되지 않는 자유다’고 러시아의 종교철학자 베르쟈예프가 말했다. 신은 이 자유를 사용하여 스스로 죽음을 향해 돌진해 나갔다. 즉 창조의 충만을 위해서 창조의 공허로도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예수를 통해 신이 인간에게 주신 것도 이것을 위한 자유다.
인간에게도 죽음을 향해 다가설 자유가 있다. 존재는 그 죽음으로 인해 자유를 구성하고, 자유는 그 충만으로 존재를 구성한다. 인간의 유한성이란 곧 초월성으로 향하여 자유를 통해 체험된다. 삶의 힘이 없이는 죽을 능력도 없다. 죽을 수 있다는 것은 삶을 긍정할 수 있음을 뜻한다. 삶과 죽음은 긍정적으로 상호 연합되어야 한다.
죽음 안에서의 참된 삶이 있기에 늘 자신을 죽음에 내어줄 때 실존의 궁극적 가능성이 주어진다는 깨닫게 하며 인간이 이루어놓은 무수한 형태의 실존에 대한 모든 집착을 초월하게 한다. 이를 위하여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사용하면서 늘 실존적 선택과 결단을 행사해야 한다.
(평가)
저자는 이방인의 신과 택함 받은 이스라엘의 신과의 차이점을 무시하고 있다. 이것은 곧 언약 자체의 내용과 괴리되게 만들며, 그 언약과 맹세를 자신의 열심만으로 이루어나가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의 특수성을 도외시하게 만든다.
저자는 441페이지 관주에서 다음과 같이 자기 의문을 드러내고 있다. “일찍이 구약성서에서도 지배적이었던 대리적 죽음관이 예수의 죽음에 대한 대속적 죽음관으로까지 발전하면서 예수의 죽음을 인간의 죄에 대한 ‘대속제물’로 그리게 되었다. 여기서 문제는 그러한 대속적 죽음관이 지니고 있는 법적-제의적 사고 및 인과응보적 사상의 한계성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구원의 위해 예수의 죽음이 반드시 그리고 불가피한 절차였는가라는 소박한 질문에 대해 만족스런 답을 구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의 희생이 신의 은총과 사랑의 발로였다고 고백되지만 그 소박한 질문은 여전히 유효한데 그 이유는 신의 사랑이 반드시 그러한 방식이어야 하는가를 묻고 있기 때문이다. 즉 신의 사랑이 꼭 피를 보아야 하는가라는 단도직입적 질문은 신성목독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만일 그렇게 들린다면 그는 신에 대한 흡혈귀적 공포의 이미지를 어느 한 구석에 갖고 있을 뿐이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희생이 왜 꼭 ‘피’의 상징물로만 모아지는 그 이유에 대해서 아직도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피라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지 않고 그냥 포괄적으로 ‘희생했음’을 알리는 무의미한 흔적으로만 간주하고 만다. 이는 저자는 그 어떤 식으로도 ‘인간의 자유’가 침해받고 억압당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즉 신은 그저 인간의 자유를 원초적으로 기살리기 위한 사랑과 창조 행위를 했다는 것을 최종 결론으로 잡고 있기에 삐져나온 실밥이다. 구태여 피를 부각하지 않더라도 인간의 자유성을 말해줄 수 있는 실력이 하나님에게 있지 않았겠느냐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인간의 구타와 폭행없이 그냥 곱게 자살하셔도 희생의 의미가 얇아지지 않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저자는 구원의 능력이 십자가 피 자체에서 나온다는 점을 모른다. 피가 곧 언약이다. 저자는 이것을 모른다. 저자는 그저 신과 협동할 자리를 얻으려 한다. 그래야 자신의 자유를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이러한 인간의 원초적 자유본능을 저주하는 사건임을 저자는 모르고 있다. 그것은 신과 인간의 ‘단절’을 받아들이는 믿음의 눈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교회(IP:220.♡.176.141)
08-04-16 18:41
이하는 강의 녹취록 입니다.
대구071015티끌만도못한주제에1
07 대구강의 14 - [티끌만도 못한 주제에]1 정재현 저, 분도출판사(왜관:1999)
07,10,15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가로되, 티끌과 같은 '나' 라도 !!
오늘은 '티끌만도 못한 주제에' 라는 책에 대해서 하겠는데, 이 책제목은 창세기 18장에 나오는 성경구절을 인용한 것으로서, 거기에 보면 세 사람이 등장하는데, 가운데는 여호와 하나님이고 양쪽에는 두 명의 천사들이 보디가드로서 나오고 말이다. 이들은 소돔과 고모라의 범죄사실에 대해서 실사를 나왔다는 것이다.
그때 아브라함은 롯을 생각해서 간절히 기도하게 되는데, 그리고 하나님은 높은 곳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낮은 데로 찾아오시는데, 식사를 대접받을 정도로 말이다. 마치 친구처럼 그렇게 밀접한 관계로 오셨다는 것이다. 그때 아브라함은 자기 기도의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자기를 더욱더 낮춘다는 것이다. 즉 "저는 티끌만도 못한 주제이지만, 감히 기도합니다" 라고 말이다.
이런 의미가 무엇인고 하니, 정말 티끌만도 못한 주제라면 기도도 하지 말고 그냥 찌그러져 있어야지, 기도는 무슨 기도이냐는 것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자기가 티끌만도 못한 주제인 줄 알지만 기도를 하는데, "의인 50명만 있으면 이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지 않을 수 있습니까?" 라고 말이다.
(창 18:20)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창 18:21)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하노라
(창 18:22)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창 18:23) 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창 18:24) 그 성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창 18:25)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창 18:2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만일 소돔 성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
(창 18:27) 아브라함이 말씀하여 가로되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 하지만 심판은 차질 없이 !!
결국은 창세기 18장과 19장이 보여주는 것은, 아브라함이 계속해서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가? 심판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가?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면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심판은 사전에 협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감행하시는데,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런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면 하는데, 그래서 50명에서, 40명으로, 30명으로, 20명으로, 그리고는 10명으로 점점 줄여 가는데, 그러나 그렇게 기도하면서 알게 되는 것은 이 심판은 차질 없이 그대로 감행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심판은 그대로 진행되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거기에서 구원이 진행되느냐는 것인데, 유황불이 그렇게 내리는 가운데서 말이다.
◈ 소돔과 고모라, 과연 그 대비책은?
우리가 이 소돔과 고모라 사건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유황불을 떨어뜨려서 심판을 하는데, 그런데 과연 천사가 직접 오지 않고 그냥 심판이 있다는 사실만 알려주었다고 한다면, 그들이 대피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겠는가? ①방공호를 판다. ②교외로 잠시 대피한다. ③물을 충분하게 준비한다.
사실은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감행될 때, 그런 하나님의 심판행위는, 거기에서 구원될 수 있는 인간적인 가능성이 전혀 제공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심판행위만이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어떻게 구원이 됩니까?" 라는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달린 문제라는 것이다. 즉 "심판만 알려주시면 그 나머지 대피하는 것은 저희들이 알아서 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은, 그것조차도 사실 우리 인간들에게는 전혀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 인간은, 심판과 구원에 대해서는 깜깜 !!
따라서 십자가로 구원이 된다고 할 때, 즉 구원문제로 십자가를 이야기할 때, 우리가 이런 심판행위에 대해서도 ①심판과 ②구원을 전혀 우리가 모르는데, 여기서 1번을 안다고 해도 2번은 우리 인간들의 머리에서 전혀 나올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1번과 2번이 다 우리에게서 나올 수 없다고 할 때, 그런데 신약에서는 십자가로 구원한다고 2번에 대해서 그 해결책이 나왔는데, 그렇다면 1번은 어떻겠느냐는 말이다. 지금 1번은 어떻게 되었기에 2번으로 구원을 받느냐는 것이다.
결국 십자가로만 구원을 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자면, 예수님의 공로로만 구원을 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인간이 그 어떤 노력을 해도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는 방식으로 심판이 진행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심판에 대해서 인간이 그 어떻게 대처를 해도 대처가 되지 않는데, 그러니 처참하기 이를 때 없는 심판이라는 말이다. 도저히 그 심판 앞에서 견딜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종이나 자유자나 전부가 다 하는 말이, "바위야 내 위에 덮쳐라. 하나님의 진노에서 누가 피하리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우리에게는 납득할 만한 그런 구원론이 전혀 허락되어있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해준다는 말이다.
(계 6:15)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 틈에 숨어
(계 6:16)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계 6:17)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 왜 아브라함은 말꼬리(?)를 달았는가?
그래서 아브라함이 이렇게 자기 자신을 '티끌만도 못한 주제에' 라고 했을 때, 아브라함이 왜 이러한 발언까지 하면서 까지 자꾸 하나님의 심판행위를 저지하려고 했는지, 정말로 자기가 티끌만도 못한 주제라면 그냥 꼬꾸라져 있으면 되는데, 왜 자기가 티끌만큼도 못하다고 분명히 말은 하면서도, 그렇게 뒤에 말꼬리를 달면서 참견하듯이 하느냐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데, 그 이유는 바로 아브라함이 생각한 심판과 하나님의 심판방식이 달라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생각한 심판방식은 무엇인가? 의인만 있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의인이 어떻게 악인과 함께 심판을 당하는 것이 어떻게 공의의 하나님에게 합당하느냐는 말이다. 아브라함의 생각에는 그런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말하는 그 의인이 누구인고 하니까, 약속의 사람이 바로 '롯' 인데, 즉 롯이 엄연히 있는데 왜 소돔과 고모라에 심판을 내려야만 하는지, 그러니 제발 그 심판을 연기하든지 어떻게 좀 해달라고 하나님께 무려 6번이나 간청을 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말이다.
◈ 과연 '의인' 이란 무엇인가?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방식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참 의외의 방식인데, 하나님은 소위 아브라함이 말하는 그런 의인과 악인을 함께 심판하시면서 그 중에서 의인을 새롭게 정립하겠다는 것이다. 말을 하고 보니까, 이것이 더욱 더 중요하게 느껴지는데, 즉 "저는 의인입니다" 라고 우긴다고 해서 의인이라고 간주하지 않겠고, 이런 심판행위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의인은 오직 하나님이 제공하는 것에 의해서 의인으로 인정하겠다는 말이다. 그러니 "저는 의인이 맞습니다" 라고 우긴다고 해서 심판에서 빼주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계시의 반응을, 어느 정도로 심판에 대해서 반응을 나타나야 하는고 하니, 순순히 그 심판에 대해서 순응할 정도가 되어야만 의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 잘하셨습니다. 심판이 너무나 당연합니다. 정말이지 합당합니다" 라고 말이다.
◈ 의인과 악인의 동시심판을 통해서 !!
그래서 결국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롯에 대한 의견수정에 들어가는데, 즉 "의인이니까 악인과는 함께 망하지 않을 것이다" 라는 것은 아브라함과 롯의 생각이고, "의인과 악인이 함께 망하는 식이다" 라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이란 말이다. "의인과 악인이 함께 망하면 안 됩니다" 라는 것은 아브라함의 생각이고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생각은, "의인과 악인이 함께 망하는 것을 통해서, 비로소 의인이 의인다움이 거기에서 피어난다" 라는 것이고 말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설교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제대로 된 심판을 이야기하게 되면, "의인인데 왜 심판을 합니까?" 라는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맞습니다. 옳습니다. 저는 개입니다" 라고 하면서, 주님의 심판을 합당하게 여기는 마음자세를 가진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 의인이라는 말이다.
◈ 왜 '티끌만도 못한 주제에' 인가?
그런 의미에서 정재현 씨의 '티끌만도 못한 주제에' 라는 제목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내용도 맞지 않고 말이다. 하지만 이 양반이 창세기 18장에서 그런 제목을 따온 이유는, 인간이 제 아무리 자기가 죄인이라고 해도, 즉 인간이 티끌만도 못한 주제인 것은 맞지만, 그러나 하나님과 이야기하고, 그렇게 대들 수(?) 있는 권한까지 박탈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에서 이런 제목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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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재현 - 연세대학교 철학과 문학사. 미국 Emory University 신과대학원 MTS, 문리대학원 종교학부 Ph.D.를 마쳤다. 이화여자대학교 강사, 성공회대학교 교수를 역임하였고, 현재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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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내용과 주제도 그러한데, 주제가 바로 '인간론' 인데, 사실상 440페이지를 넘어가는 두껍고도 굉장히 어려운 책인데, 얼마나 어려운지 앞으로 공부를 해보면 알겠지만, 저자가 철학과 신학을 모두 전공한 사람이기에, 그것들이 다 농축되어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가 말하는 신학도 철학의 연장인데, 성경에서 말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 저자, 복음도 모르고 십자가 신학을 어떻게?
하지만 저자는 나름대로 기존신학을 극복하려고 하는데, 이 책은 1999년도에 '신학을 이해하기 위한 철학' 다음으로 나온 두 번째 책이고, 이것 말고 '신학은 인간학이다' 라는 것을 비롯해 그 뒤에 계속해서 나온 책들이 있는데, 아무튼 그의 책들을 읽어보면, 이렇게 안경을 쓴 이 저자의 자신감이 어느 정도인고 하니, 이 한국에서 자기 신학을 벗어날 인간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철학을 전공했기 때문인데, 이렇게 철학을 전공한 사람은, 한국에서 말하는 신학들이 이미 철학에서 모두 다루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별로 새로울 것이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새로울 것이 없는 한국신학의 상황에서, 자기는 이미 그런 것을 다 마스터한 상황에서 새로운 신학을 첨가했기 때문에, 더 이상 그 누구도 자기 신학을 능가할 수 없다는 자신만만함으로 이러한 글을 썼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여전히 철학이고 복음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데, 왜냐하면 어릴 적부터 복음을 들어본 적이 없고, 외국으로 나가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복음을 들어본 적이 없는 인간이 어느 정도로 십자가 신학을 이야기할 수 있는지, 책의 뒷부분은 그가 말하는 십자가 신학인데, 즉 복음을 모르는 인간이 십자가 신학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흥미진진하게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부터 교재를 살펴보자.
** 이 책은 '사람됨'을 대해서 철학적인 탐구와 신학적인 탐구를 시도한 책이다. 철학적인 탐구란, 인간이 인간에 대해서 어떤 이해가 가능한 지를, 그리고 신학적인 탐구란, 신으로 인해 생겨난 피조물인 인간이 신과 어떤 관계로 맺어져 살아가는 것을 탐구하는 것이다.
◈ 철학, 신학, 복음 ??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학과 신학의 차이점을 먼저 알아야 하는데, 인간학이란 것은, 즉 철학이란 인간이 인간을 탐구하는 것이고, 그리고 신학은 인간이 신과 어떤 관계로 살아가는지를 탐구하는 학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신학은 신을 먼저 우선하는데 비해서 철학은 인간을 우선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놀라운 것은, 신을 우선으로 여기지만, 그러나 그 신 개념을 철학적으로 따져서 해체를 시켜버리면 다시금 인간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 ①인간에서 인간, ②인간에게서 신, ③신에게서 인간 !!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까, 인간에서 인간으로 가는 것은 철학이고, 신에서 인간으로 가는 것은 신학인데, 그런데 이렇게 인간에서 인간으로 다가가면서, 그 인간에게 무엇이 있는가? 그 인간에게 신이 있는데, 그렇다고 한다면, ①인간에서 인간, ②인간에게서 신, ③신에게서 인간인데, 그러면 결국 이것들은 다 무엇인가? 철학이지 않느냐는 말이다.
첫째는, 이렇게 신에게서 인간으로 나가는데, 그래서 인간 속에 있는 신을 규명하고 말이다. 그리고 둘째는, 인간 속에 있는 신을 끄집어내어서 인간을 다시금 되돌아보게 되는데, 거기에서 인간은 바로 티끌만도 못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존 철학에서는 그것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높이는데, 그것이 어디까지인고 하니까, 신의 경계에까지 나아간다는 말이다. 굳이 성경에 나오는 용어대로 하면, 드디어 인간이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중세 토마스 아퀴나스 이후에 인간이 그렇게 높여졌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인간이 높여졌는데, 그런데 저자에 의하면, 자기 딴에는 나름대로 제대로 된 철학을 공부해보고 또 신학을 공부해보니까, "아하, 인간은 티끌만도 못한 존재이구나" 라는 결론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티끌만도 못한 주제에, "도대체 인간이 신의 개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저자는 대답하기를, ①'인간에서 인간'을 철학으로 보고, ②'인간에게서 신'을 신학으로 보고, ③'신에게서 인간'을 복음으로 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이 양반은 그야말로 자신만만한데, 자기는 여기 있는 이 1,2,3번으로서 그 질문에 대해서 모두 다 설명했다는 것이다. 물론 개혁주의 신학까지도 포함해서 말이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런 모든 것들이 철학에 지나지 않는데 말이다. 신학도 아니고 복음이 아닌, 그냥 철학이라는 말이다.
◈ 목사님, 여기 아침햇살 1박스 !!
그러니 이 책이 읽을 가치가 있다는 것인데, 물론 너무나 어려워서 탈이지 말이다. 얼마나 어려운지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한 문장 한 문장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어려운 것을 A4 7페이지 분량으로 노축해서 요약하다보니, 얼마나 힘이 드는지, 저는 나름대로 쉽게 하려고 무진장 애를 섰으니 그 노고를 좀 이해해달라는 것이다. (ㅋㅋ)
지금부터 하나하나 살펴보겠는데, 다시 교재를 보자.
** 여기서부터 철학은 '참'과 '있음'을 연결시키는 작업에 나서게 된다.
◈ 고대철학의 시발점 -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이렇게 철학은 '진리'와 '존재'를 연결시키는 작업인데, 즉 자기가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참다운 인간다움인지, 그것이 바로 고대철학의 시발점이라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인간에게 맞닥뜨리는 것이 신이 아니고 대자연인데, 자연은 인간보다 강하다는 말이다. 즉 태풍에 인간은 허약하고, 가뭄에 인간은 목말라하고, 거센 파도에 인간은 도저히 대항할 힘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에게 있어서 한 수 배워야 할 어른이 누구인고 하니, 곧 '대자연' 인데, 그렇게 자연에게서 한 수 가르침을 얻으려고 하면 대자연의 원리를 끄집어내어야 하는데, 이 자연의 원리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고정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변화한다는 것이다.
◈ 대자연 - 고정과 변화, 어느 것에 우선권이 !!
이런 "고정이 우선인가, 변화가 우선인가?" 라는 싸움에서, 그 두 가지 흐름이 나란히 가는데, 그 주도권은 '고정' 쪽이 쥔다는 것이다. 그 고정됨을 '존재' 라고 하고, 변화됨을 '운동'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즉 존재와 운동이 어느 것에 우선권이 있느냐고 할 때, 존재의 방향으로 나간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예를 들어서 선풍기가 이렇게 돌아갈 때는 변화하는 것 가지만, 그러나 끄게 되면 프로펠라가 선풍기 몸체에 고정되어있다는 것이다. 사람의 경우에도, 낮에 활동할 때는 마구 움직이는 것 같지만, 그러나 밤에 잠을 잘 때는 고정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움직이는 것이 인간다움인가? 아니면 고정되어있는 것이 인간다움인가?
사실은 그 두 가지 다가 나름대로 인간다움이 있는데, 그 원인과 결과를 따질 때, 사람이 잠을 자야 원기를 회복하고, 그 다음에 일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인간의 경우에는 "휴식에서 노동으로, 그 노동에서 휴식으로", 그렇게 돌아온다는 말이다.
그러니 역시 인간에는 고정된 존재가 우선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자연도 인간도 존재에 합당하게, 변화를 무시하고 존재를 우대하는 쪽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리에 가장 근접하는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플라톤의 철학이고 말이다.
◈ 아빠,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뭐예요?
이런 플라톤의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의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까, 어저께 우리 집에 있는 사랑스러운 딸 진주가 다정한 모습으로 다가와서는 "아빠,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한 마디로 뭐예요?" 라고 하면서, 아주 부담스러운 질문을 던졌는데, 그 엄청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간단명료하게 한 마디로 말해달라는 것이다.
◈ 진주야, 그것은 바로 '개별자' 란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개별자' 인데, 이에 반해서 플라톤은 개별자를 무시하는데, "이 모방체가 어디서 까불어?" 라고 말이다. 즉 인간이 중요하지 철수나 영희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철수나 영희는 죽으니 말이다. 그렇게 죽으면 남아있는 것이 인간의 모상(模像)인데, 즉 인간의 본질이 중요하지, 개별자가 무엇이 그리 중요하냐는 것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는, 일단 그것은 안다고 치고 더 연구해보니 개별자를 따로 더 알아보아야 하겠다는 것이다. 즉 인간자체보다도 개별자를 하나 하나 연구해서, 이것을 다시 종류별로 구별하는데, 성질 급한 놈, 더러운 놈 등등으로 말이다. 이렇게 인간에게 귀납법적 방법을 사용해서, 그렇게 진리에 접근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이 논리적으로 연역적 방법을 사용한다면 말이다. 이렇게 아리스토텔레스는 개별자를 강조한다는 것이다.
◈ 토마스 아퀴나스와 개별자 !!
이렇게 개별자를 강조하는 것이 토마스 아퀴나스 철학에서는 아주 유용하게 쓰이는데, 왜냐하면 교회에서 성경말씀대로 하라고 하지만, 그러나 민중들은 인쇄술이 발달되지 못해서 성경책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없고, 설령 성경이 있다고 해도 헬라어나 히브리어, 그리고 라틴어로 된 성경을 어떻게 보겠느냐는 것이다. 프랑크의 토속 민족들만 있으니 말이다.
◈ 기억하자, 플로티누스 !!
그럴 때는 교회가 전체적인 교인들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개별자로부터 출발을 해서 하나밖에 없는 하나의 존재, 즉 신플라톤주의인 플로티누스의 주장처럼 하나의 절대신에게 향하는 그 여정을 사다리처럼 서열화시킴으로 말미암아서, 지금의 이데올로기인 정치적 통치를 정당화 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요즘 교회도 마찬가지인데, "목사, 장로, 집사", 이런 식으로 해서, 목사의 권한과 절대권위가 이렇게 서열화를 시킴으로서 더욱 더 굳어지는 것을 정치적으로 노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당시 중세에서도 당연히 환영을 받았는데, 이런 것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나왔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서양의 고대나 중세 철학은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을 '참'이라고 간주했고, 다른 것은 참이 아닌 거짓이라고 분류했다. 예를 들면, 사람마다 원을 그려도 다 조금씩 틀리는 원을 그려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진짜 완전히 둥근 원은 따로 생각할 수 있다. 바로 그 생각하는 완전한 원은 '참' 즉 '진리'가 된다.
이것이 바로 플라톤 철학인데 그를듯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하나님이 조금씩 다른데, 도대체 누가 가까운가? 역시나 성경을 독점하고 있는 성직자들이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서 분명히 아니까, 그들의 말을 들어야 질서가 잡히고 나중에 구원받는데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 이제는 복음으로도 구원받지 못한다 ??
오늘날 목사들이 구원을 이야기하면서, 이제는 복음으로도 구원받지 못한다고 겁 없이 함부로 점점 더 강조하는 추세에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복음으로 안 된다는 말은, "진리라고 하는 것은 모호하기 때문에 어느 놈이라고 안다고 하는 자체가 건방지다" 라는 의미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것은 사도바울이 욕을 듣는 것과 같은 맥락인데, "내가 전하는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 라고 말을 하니까, "아니, 우리도 모르는 것을 니 혼자 어떻게 아는가?" 라고 하면서, 사도바울에게 욕을 바가지로 퍼부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좋다고 하는 것은 모두 다 갖다 붙이자는 말이다. 복음도 믿어야 되고, 행함도 있어야 하고, 성령의 삶도 있어야 하고, 열매도 있어야 하고 말이다. 이렇게 좋은 것을 모두 가져다 붙이면, 설마 성경에 나오는 내용들을 붙여놓았으니, 아마도 한 개보다는 두 개가, 또 세 개가 더 진리에 가깝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듣는 교인들이 헷깔리든 말든 그것은 관심도 없고, "지금 내가 하는 말이 틀리지 않았잖아" 라고 하는, 자기 정당성과 자기 변명에 치중해서, 자기를 옹호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 십자가의 복음만으로는 안 된다 ??
이것이 중요하니, 여기서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이렇게 "십자가 복음만으로 안 된다" 라고 했을 때, 이 사람도 마찬가지인데, 십자가의 복음을 철학으로 다 변질시켜놓았으니 말이다. 우리가 저자에게 "당신은 십자가의 복음을 믿습니까?" 라고 하면, "나는 믿기는 믿지만, 그러나 그 십자가의 복음만으로는 안 됩니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 우리가 물을 수 있는 것은, "당신은 당신이 알고 있는 십자가의 복음을 어떻게 통과했습니까?" 라는 것인데. 그렇게 해서 그 통과한 과정을 조사해보면 다 드러난다는 것이다. 십자가를 안다고 했으니, 자기 딴에는 통과를 했을 것이란 말이다. 즉 어떤 십자가로 간주하고 통과했기에, 십자가만으로는 안 된다고 하는, 즉 부족하다는 소리가 나오느냐는 것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의 100%가 무엇인고 하니, 십자가에서 자아가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자기가 구원을 받고자 하는 그런 의지가 말이다. 즉 "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이라야만 옳은 하나님이다" 라고 주장한 것이 십자가에서도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 무인도에 떨어진 성경책 한 권 !!
제가 서울에서 첫 번째 시간에 이런 강의를 했는데, 예를 들어서, 여기 아무도 살지 않는 무인도 섬이 하나 있는데, 이렇게 야자수가 있고 물이 있고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 '따다다다' 하면서 헬기가 한 대 떴는데, 거기에서 성경책이 하나 뚝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가 이러한 장면을 지켜보면서 질문하기를, "그렇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됩니까?" 라고 했을 때, "예, 성경대로 됩니다" 라고 답변을 했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지요?
그런데 무인도에 성경책이 떨어지고 난 뒤 2년쯤 후에 그 근처를 지나던 어선이 그만 커다란 파도에 난파가 되었는데, 한 사람이 겨우 헤엄을 쳐서 이 무인도에 올라왔다는 것이다. 그때 그 양반이 마침 이 성경책을 보았는데, 그렇다면 여기서 누군가가 2년 전과 동일하게 이러한 장면을 보면서, "그러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됩니까?" 라고 했을 때, 그 대답은 어떠해야 하는가? 역시나 "예, 성경대로 됩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 나의 구원과 말씀성취가 무슨 의미가?
지금 여기에서 제가 강조하고 싶은 이야기가 바로 이 점인데, 인간이 성경책을 보던 말던 그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이, 이 세상은 성경말씀에 있는 그대로 모두 다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아니, 무인도에 어떤 인간이 겨우 상륙해서 목숨을 부지해서 성경책을 본다고 한들, 그것 때문에 이 세상에서 뭐가 달라지는 것이 있느냐는 말이다.
바꾸어 말하면, "내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성경말씀에서 의미가 있는가?" 라는 것이다. 전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의미가 없다고 하는 이런 사실을 아는가? 그것은 바로 십자가 복음을 통과해야 안다는 것이다. 그 십자가의 복음이 성경의 중심이고, 그래서 구약과 신약으로 나눈다는 말이다.
그렇게 성경의 중심에 십자가의 복음이 있다고 한다면, 이 세상은 십자가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지 않는냐는 것이다. 그것이 골로새서 1장 16절에 나오는데, 이 세상 모든 만물은 십자가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 십자가를 통과했다면, 더 이상 자기 구원은 !!
그러니 이런 십자가를 정말로 통과했다면, 과연 십자가의 복음만으로 구원한다는 말이 나오겠는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더 이상 '나' 라는 것이 의미가 없기 때문에 말이다. 즉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주님이 십자가를 지셨다" 라는 것이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제가 지난주에 서울에서 이 무인도를 한 예로 던지고 두 시간을 강의했는데, 아마 이것이 의존교회 교인들에게 상당히 어려웠던 것 같은데, 끝까지 이것을 처음 것과 연관시키는 게 힘들었다는 말이다. 사실 이것이 상당히 난해한 문제인데, 제가 그것을 예상하고 강의 중간 중간에 헬기를 다시 띄우고 했는데, 사람이 자기를 전적으로 상실한다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지 말이다.
교인들이 이것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제가 잘못 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제가 보기에 첫 번째 있는 이것을, 즉 무인도 사건(?)을 성경전체에 들어맞게 이해를 했는지 말이다. 물론 주께서 다 알아서 하실 일이지만, 아무튼 의구심이 좀 들었다는 것이다. 물론 제대로 알아들었을 줄로 인정을 합니다만.
그러니 십자가를 통과한다는 것은, 그것보다 먼저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는가? 바로 무인도에 헤엄쳐온 인간의 입장이 된다는 것이다. 즉 "신은 왜 여기에 왔을까? 아하, 나를 구원시켜주려고 왔구나" 라고 말이다. 그것은 십자가를 통과하지 못했으니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갑자기 더 어려워졌습니까?
"아하, 하나님께서 성경책을 주신 것은, 그것을 내가 읽고 구원받으라고 그렇게 하셨구나" 라고 하는 것이 오해라는 것이다. 자기가 없어도 이 세상은 십자가 중심으로 잘 돌아가는데 말이다. 그렇게 돌아가는 도중에 물레방아에 '나' 라는 것이 그 하나로 걸려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의 구원 위주로 이 세상을 바라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 이장우 목사님의 명설교 !!
어제 이장우 목사님이 설교한 것을 들어보니 얼마나 제 마음에 쏙 들든지, 너무나도 잘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글을 좀 남기고 싶은데, 그 내용이 어떠한고 하니,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불을 던지러 왔는데,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싸우고, 아버지가 자식과 싸우는 대목을 설교하면서 제일 먼저 무엇을 띄우는고 하니, 프란체스카의 '평화의 기도'를 도입부로 삼았다는 것이다.
(마 10: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 10: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마 10: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마 10: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마 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이것이 바로 제대로 된 설교자 모습인데, 평소에 교인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할 것이라고 운을 띄워서, 거기에서 동의를 얻어낸다는 것이다. "제가 평화의 도구가 되게 하옵소서" 라고 말이다. 이것은 누구나 그럴 것이라고 동의하는 부분인데, 그런데 성경본문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 둘을 딱 대입시켜서 교인들이 믿는 예수님을 다시 한번 점검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장우 목사님의 설교는 육에 대한 견해를 충분히 실어주고 있는데, 제가 항상 강조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냥 성경본문으로 들어가지 말고 육에 대한 부분을 먼저 끄집어내어서 이야기해 주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물론 힘은 좀 들겠지만 말이다. 제가 그렇게 원했던 것이 바로 꼭 맞게 나왔다는 것이다.
'평화의 기도'를 먼저 실어줌으로 말미암아서, 교인들로 하여금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았는지, 잘못된 하나님관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은 빼도 박도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런 평화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가정에 불화를 주려고 오셨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이다. 그들은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는데, 그동안 안일하게 교회에 그냥 왔다 갔다 한 것이 아닌지 말이다. 그러한 하나님을 수정하지(?) 아니하고 그냥 밀어 부치려고 한 것이 들통나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싸워도, 당연합니다 !!
그러니 불화를 좋아할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는가? 모두가 다 평화를 선호하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십자가를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십자가를 통과하게 되면, 예수님처럼 불화하게 하는 생각이 없었다고 하는 것이 잘못된 것임이 드러나게 되고, 예수님이 그렇게 불화하게 하는 것을 두고 박수를 친다는 말이다. "감사합니다. 항상 기뻐합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며느리와 시어머니를 싸우게 하신 것도 잘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지 않았다면, 하마터면 시어머니와 친할 뻔했네. 아비가 자식과 싸우는 것도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이것은 전적으로 자기를 부셔버리는 것인데, 그러니 십자가는 설교를 하면서 먼저 자기 자신의 선입관을 박살내는 것인데, "역시 하나님은 결코 내 말을 듣지 않고 일하시는구나" 라고 하면서 말이다. 물론 철학에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들리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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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ayer For Peace
- St. Francis of Assisi
Lord,
make me an instrument of your peace.
Where there is hatred, let me sow love;
where there is injury, pardon;
where there is doubt, faith;
where there is despair, hope;
where there is darkness, light;
where there is sadness, joy.
O Divine Master,
grant that I may not so much seek
to be consoled, as to console;
to be understood, as to understand;
to be loved, as to love.
For it is in giving that we receive;
it is in pardoning that we are pardoned;
and it is in dying
that we are born to eternal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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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하지만 근대 철학에 들어서서는, '그 진리가 어떻게 알려질 수 있는가?' 하는 인식론 문제가 대두된다. 즉 '무엇이냐?'에서 '어떻게?'로 물음의 관심사가 바뀌게 된 것이다.
이것은 근대철학이 중세철학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중세철학에서 말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다 아는 것이고, 그 기본에다가 더 첨가할 것이 없느냐고 연구를 해보니, '어떻게' 라는 것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 이전까지는 진리에 대해서 '어떻게' 라는 것이 없었는데, '무엇이냐' 라는 것이지 말이다.
◈ 어떻게? - 근대주체사상의 시작 !!
그러니 이렇게 '무엇이냐?'에서 '어떻게?'로 물음의 관심사가 바뀌게 되면, 즉 그동안은 달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것이 과거 중세철학이라면, 이제는 달을 알기는 아는데, 그런데 "내가 어떻게 달을 알지?" 라고 한다면, 즉 그 동안은 달을 보다가 이제는 그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쳐다본다는 것이다. 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