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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안산 10월 12일 강의강의고린도후서

안산 10월 12일 강의

이름 : 우리교회(IP:124.59.87.70)

고린도후서5장10절 다시 한 번 봅시다.

『고후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할 때, 사도바울이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언급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사도바울이 기다리고 있는 게 뭡니까? ‘그리스도이 심판대’를 기다리고 있죠?

그리스도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제가 그림을 하나 그려볼게요. 지금이 2007년도다. 내년은 2008년도, 2009년도 있죠. 할 때, 사도바울 생각 말고 우리들 생각부터 먼저 해보면, 우리들 생각 2008년도 계획이 있을 것 아닙니까, 2007년도 11월 달 계획 있죠? 그러면 2007도 11월 달 계획이 있다면 2008년도 계획은 빛을 잃어버립니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요. 왜냐면, 2007년도 11월이 앞에 벽처럼 먼저 계획이 세워져 있기 때문에 2008년도는 관심 없지요.

자기아이가 어린데 25살 때 생각 않잖아요. 다음 달에 예방주사 맞추는 얘기하지 25살 30살 얘기 않는다고요. 당장 앞에 있는 사건, 당장 앞에 있는 계획 그것이 현재 나의 눈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2008년도 2009년도 생각은 우리에게 중요하지가 않죠. 다시 얘기할게요. 현재 2008, 2009년도가 쭉 있는데 2007년도 11월 달 계획이 있다 하면, 2008년도 게획은 의미 없습니다. 바로 앞 2007년도 계획이 있으니까 말이죠.

그래서 얼른 생각하기에 2007년도 11월 달이 있다면 12월 달 계획이 스톱 돼버리죠. 2008년, 2009년이 죽어버립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10절에서 뭐라 합니까, 그리스도의 심판 때가 있다 그래 돼있죠? 반드시 그리스도 심판대 앞에 드러나고 각각 심판을 받는다 했죠? 사도바울의 생각은 뭐냐 하면, 2007년도 2008년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심판의 날이죠? 심판의 날을 초조하게 기다린다면 2008년도 2009년도 이런 계획들이 중요하겠습니까, 안 중요하겠습니까? 안 중요하죠.

내가 만약에 2008년 5월 달에 결혼한다, 그 앞의 생각들은 안 중요하잖아요. 큰 사건이 앞에 있기 때문에 안 중요하다 이 말이죠. 우리가 더욱 더 정비해야 될 생각은 2008년 5월에 결혼한다면 계획의 초점이 무엇을 위한 일들이 되겠어요? 2008년도 결혼을 위해서 모든 것을 양보해야 되고, 여기서 토지 문제로 소송이 일어나고, 물세 전기세 때문에 옆 사람과 싸우더라도 2008년 5월 달에 결혼하면 그만인데 양보하지 뭐, 양보자세가 나올 거라는 말이죠. 별로 안 중요하다 이 말이죠.

그런데 사도바울 같은 경우에는 그리스도의 심판이 있기 때문에 2007, 2008년 이런 일들이 중요하겠어요? 안 중요하겠어요? 안 중요하지요! 심판이 있다는데. 심판이 있다면 누구한테 사기 당하고 욕 얻어먹는 일들이 큰 문제 아니다 말이죠. 사도바울이 살아가는 방식이에요. 심판이 있다. 어젯밤에 하나님이 계시해가지고 “근호야, 낼 아침 되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 이런 계시가 왔다 합시다, 그러면 아침 7시에 밥 먹으면서 무슨 생각하겠습니까?

“반찬이 이게 뭐야,” 이런 생각 하겠어요? ‘낼 오전 중에 심판이 있으리라’ 이러면 심판 생각하기 바빠서 앞의 생각은 않게 된다 이 말이죠. 사도바울의 삶은요, 산 넘어 산 중첩이라도 시련이 있고 자기 인생이 고달플지라도 피터팬처럼 가볍게 날아버립니다. 날아가지고 심판이 있다고 했을 때 2007년도 2008년도에 마음(?) 아프게 생각 않습니다. 이게 사도바울의 사고방식이에요.

심판이 있다는데 난 뭐할까, 뭐하긴 뭐해요 심판 증거 하면 되지. 심판 증거 하면 되는데 ‘심판 증거 하면 남들이 날 욕하면 어떡해, 날 싫어하면 어떡해’ 심판이 곧 오는데, 확실한데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는 게 확실한데 내가 남에게 욕 얻어먹는 그게 무슨 대수냐 말이죠. 그거 문제 아니죠? 애를 키운다고 애 아플 때는 안와요. 그럴 때마다 ‘애를 괜히 낳았느니 어떠니 왜 이렇게 살기 힘드나,’하지만 2009년도에 주님의 심판 온다고 하면 애가 아프더라도 ‘얘야 아프더라도 주의 심판을 네가 믿고 아파라’ 하는 먼저 올거다 말이죠.

그리스도이 약속의 말씀을 믿는 신앙이 자기애한테 우선이 된다 이 말이죠. 본인이 심판이 실제상황이라고 확신하면 나머지 문제는 큰 문제가 아니고 사소한 문제고 심각하지 않은 문제가 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그런 관점에서 고린도후서 편지를 우리한테 쓰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느냐, 산 넘어 산 넘어 피터 팬처럼 날아다닐 줄 알아야 되는데 우리는 사랑했다 하면 엎어져가지고 울고불고 난리라,

갈수록 태산이라, 그러니까 자살하고 술 먹고 엎어지고 자빠지고 이혼하고 어쩌고저쩌고… 이게 뭐냐 하면, 이 사도바울이 살아가는 모습은 다른 말로 하면 성령의 모습인데, 성령의 삶이란 게 피터 팬 같은 삶이에요. 아무것도 아니다 이 말이죠. 그리스도 심판대 앞에 나서는데 뭐, -진도 나갑시다-

「그리스도 심판대 앞에 서리라.」그리스도 심판대 앞에 섰다고 생각할 때 뭐가 제일 중요하냐, ‘새로운 피조물’ 되는 게 제일 중요합니다. 오늘 강의는 여기입니다. ‘새로운 피조물’ 예수님께서 심판 하실 때 ‘네가 새로운 피조물이냐?’를 따지는 겁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어떤 것이냐, -조금 어렵게 들어갑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빛을 보고 ‘빛이 있으라,’ 했습니까? 답변해 보세요. 빛이 있을 때 빛이 있으라 했습니까, 아니면 빛이 없을 때 빛이 있으라 했습니까? 빛도 없는데 대화가 시작된 거예요.(주의 전능성 발견, 놀람. 녹취자) 빛보다 말씀이 우선이죠? 말씀이 있고 말씀이 말씀대로 명령하매 빛이 있었던 겁니다. 그러면 빛이 만약에 이성(생각)이 있다면 눈은 뭘 보겠어요. “하나님이여! 신이시여! 누가 나를 이렇게 했습니까!” “내가” “ 어떻게 했습니까?” “말씀으로!” 빛이 있다가 “감사합니다” 하면 그뿐이죠.

1)누가 나를? 2)어떻게? 3)감사합니다. 이게 범사에 감사하고 하나님을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이게 주 안에서의, 성령 안에서의 하나님의 뜻이 되겠지요. 감사가 어떤 게 감사가 되느냐 하며는, 하나님의 개입이 들어올 때 무조건 감사하게 돼 있습니다. 언제 감사 않느냐, 내 인생에서, 내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의 개입이 안 될 때 무조건 불평하게 돼 있습니다. 남편 탓이고, 자식 탓이고, 남 탓이고, 심지어 그보다 더 나쁜 것은 ‘내 탓’이고. 이러면 안 됩니다! ‘내 탓이오’ 하면 안 되요.

김수환 추기경 ‘내 탓이오’<ㅡ이게 겸손한 것 같지만 겸손이 아니에요! (ㅋ) 천주교에서 자동차 뒤에 ‘내 탓이오’ 써 붙여 다니곤 했는데 ‘내 탓이오’ 하는 자체가 자기는 ‘의인쯤’ 돼야 될 텐데 자기는 의인이 못 돼서 미안합니다. 그런 사공방식이 있어요. 죄인인 주제에 당연히 ‘내가 죄인이요’ 이래야지 내 탓이오 라는 말 할 필요 없어요. ** 한다고 죄인이 의인 되는 게 아니니까.

첫 째는 ‘누가 나를 이렇게 했습니까,’ 그 다음에 ‘어떻게 했습니까,’ ‘감사합니다’ 이래야 되지요. 왜 감사하느냐는 ‘어떻게’와 관련 있어요. ‘어떻게’ 가 만약에 내 공로가 들어가고 내 명예가 들어가면 ‘감사합니다’가 들어가는 게 아니고요 자기 행위가 들어가면 ‘아, 나도 참 애 많이 썼구나’ 이래 되는 거예요. 어떻게 다음에 감사합니다가 나오는 건 어떻게 안에 뭐가 들어갔다? 나의 행위는 일절 안 들어간다는 겁니다.

나의 행위는 일체 안 들어간다는 말은 내가 나에게 어떤 힘을 가미하지 않더라도 지금의 내가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한다면, 누가 내게 힘을 주었느냐, 존재의 힘을 주었느냐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죠. 제가 지금 이야기하는 ‘새로운 피조물’ 되지 아니하면 주님의 심판 이겨내지 못하니까 새로운 피조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 이야기하면서 빛을 들어서 예로 든 겁니다. 빛의 창조에 대해서.

‘누가?’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으로!’ 이렇게 얘기했는데 ‘말씀으로 오늘날 내가 있다,’ 할 때 여기서 우리가 죄인 입장에서 이해 안 되는 게 하나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며는, 보통 말이라는 것은 의사소통용이지 이게 힘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잖아요? 여기 ‘지우개’가 있는데 지우개에게 ‘지우개야! 왼쪽으로 2cm' 가만히 있잖아요. 말은 내 의사를 전달할 뿐이고 그렇게 되기를 희구(소망)하지만 듣는 쪽에서 안 들으면 그만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이라는 것이 쓸모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러한 선입감이 어디까지 이어지느냐 하면 하나님까지 이어져가지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셔도 내가 안 들으면 그만이지, 이러한 ‘돼먹지 못한 방식’이 우리한테 들어옵니다. 빛이라든지 자연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오죽 답답했으면 로마서9장21절에서 토기장이 이야기를 했겠습니까.

토기장이가 토기를 빚을 때 토기에게 물어보고 빚습니까? “어이, 니 뭐 만들어줄까? 찻잔 만들어줄까, 물병 만들어줄까?” 물어봅니까? (ㅋ) 진노의 그릇 만들어줄까, 아니면 긍휼의 그릇 만들어줄까? 물어봅니까? 안 물어보지요? 우리는 말이라는 것은, 말을 나에게 걸면 내가 납득이 되는 말을 해줘야 말 답다고 하나님께 따지는 경향이 있어요 우리가.

내가 알아듣는 이야기를 해서 내 협조가 가미돼야 하나님과 나 사이에 의사소통이 되니까 그런 식으로 요청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거, 잘못 된 겁니다. 이거! 종교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신이라 하는 것은 인간, 자기 생각을 바깥으로 구상해내기 때문에 내가 만든 신과 나 사이에는 서로 의사소통이 가능합니다. 의사소통이 가능한데 무슨 말이냐면, 내가 평소에 이웃집 아줌마와 이야기한 거나 하나님과 이야기한 거와 별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렇게 하는 건 좋은데, 뭐가 하나 빠졌느냐 하며는 사람의 말은 실효성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고 하나님 말씀은 반듯이 실효성이 있다는 것을 비교해야 되는데 비교도 안 해보고, ‘내가 남한테 말해도 먹어주지도 않고, 얘야 누가 좀 해줘 해도 듣지도 않는데…‘하나님께 말해도 듣지도 않을 건데 뭐,’ 이래 생각하는 거예요. 그거 잘못된 거예요.

말씀이 육신이 된 거예요. 마찬가지로 하나님 말씀은 실제로 우리에게 나타난 새로운 피조물로 되게 한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말씀이 어떻게 우리한테 구체적으로 닿는지 고린도후서 5장14절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라고 돼있죠? 한번 적어보겠어요. ‘그리스도의 사랑’ 그 다음에 ‘우리를 강권’ 사랑이라는 것은 모든 신구약 성경 전체의 율법의 완성을 뭐라고 하죠?

‘율법을 완성했다,’ 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사랑이 비로소 발생되었다.’ 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랑이 발생되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영생을 얻게 하느리라」 중간은 생략하고 끝에 뭐라고 돼있어요?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중간은 빼버리면 사랑이 올 때만 뭐다? 영생이죠. 그러면 우리가 죽어가고 있는 것은? 사랑이 없을 경우에는 우리가 죽지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따먹고 죽은 것은 뭐 때문에 그렇습니까? 뭐가 없기 때문에? 사랑이 없기 때문에. 사랑이 없기 때문에 죽은 거예요. 사랑이 없는 게 결국 뭐냐, ‘죄’ 죄 그대로 있는 거지요. 다시 얘기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마지막에 뭐라고요? ‘영생이 온다’ 방금 제가 요한복음 3장16절 이야기했는데, 신약 말고 구약성경을 이야기한다면 시편119편 같은 경우에 모든 말씀이,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 뭐가 온다? 생명을 얻는다.

잠언서3장18절을 통해서 보면 ‘지혜를 얻는 자에게는’ 뭐가 있다? ‘생명나무’가 있다. 똑같잖아요. ‘나는 말씀을 지켰다’ 이러면 안 죽어야 되요. 안 아파야 되고. 우리가 말씀을 지킬 수는 없어요. 사랑이 와야 되요. 사랑이 오게 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면 율법의 완성이라 했습니다. 그러니 사랑이 오게 되면? 모든 말씀을 완성했어요.

사랑에 의해서 안 되는 일이 없지요. 왜냐면 사랑은 완성이니까. 다시 합니다. ‘사랑은 완성이다’ 완성이기 때문에 다 이룬 거예요. 사랑이 왔다는 것은 우리가 이룰 게 남아 있다는 거예요? 안 남아 있다는 거예요? 남아 있을 게 없어요. 그리고 마지막 그리스도 심판 때는 뭘로 확인한 겁니까? 사랑의 방패를 받은 사람이 누구냐는 것으로 따지는 거예요. 하나님의 율법 완성, 하나님이 벌이신 율법 완성이 두 자로 뭐가 되죠? ‘사랑’

그 사랑이 뭐라 했습니까, 강권적으로 온 자가 누구냐를 분류하는 작업이 심판 작업입니다. 마지막 그리스도 심판대 앞에서.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고 무슨 심판? 그리스도의 심판입니다. 이걸 다른 말로 쉽게 하면 내가 만든 것 가운데서 남은 찻잔은 천국. 물병은 지옥 보내겠다, ‘찻잔 손 들어보세요.’ 이겁니다. 이걸 동물로 말하면 토끼는 천국으로 두더지는 지옥으로. ‘토끼 손 들어보세요.’ 이거다 말입니다.

내가 만든 자 손 들어보세요.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사랑으로 만든 자 손 들어보세요.’ 또 다른 말로는 율법의 완성으로 빚어낸, 율법으로 완성됐다는 증거물로, 내가 다 이루었다는 증거물이 되는 사람 누구예요? 누가 보면 ‘주님께서 다 이루었구나’가 담겨 있는 자가 누구에요? 그걸 찾아보는 겁니다. 얼마나 쉬워요. 참 쉽죠잉~

그런데 이 쉬운 것을 방해하는 놈들이 있어요. 다른 복음. 거짓 복음. 얼마 전에 우리교회 강구만 장로님이 그런 질문을 해요. “목사님이 글을 쓰셨는데, 목사 됨으로써 버려버린 인간,이라고 쓰셨는데 누구를 지칭하는 겁니까?” 물어요. 그래서 제가 “저를 포함해서 모든 목사에게 그렇게 얘기한 겁니다.” 목사의 특징은 신앙생활을 어떻게 할 줄을 모른다는 거에요.

왜 그러는지 알아요? 남 가르치기 바빠서 남 가르치는 것을 신앙생활이라고 대신 생각하는 거예요. 제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기 미용실 있죠? 미용사가 손님 머리 해 주면 그것으로 신앙생활 다 한 겁니까? 아니죠?! 권투선수가 권투했다고 신앙생활 끝난 겁니까? 목사가 목회하고 심방하고 성경 읽고 기도하면 신앙생활입니까? 아니지요! 아니죠! (진짜 맞는 것 같습니다. 평소에 생각해보지 못한 부분.-녹취자)

그런데 목사가 그것만 하다보니까 신앙생활 대체한다고 오해한 거예요. 본인이 신앙생활 할 줄을 몰라요. 할줄 모르니까 강대상에서 남들 가르치는데 열중해요. 나는 이렇게 신앙 생활합니다, 라고 설교하는 게 아니고 부지런히 남 가르치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인간을 보고 버려버린 인간이라고 한 거예요. 차라리 그 사람이 이발사가 됐으면 낮에 이발하고 밤에 신앙생활 할 건데, 그 인간이 목사 되고 난 뒤에는 실컷 목회만 하다보니 신앙생활 어떻게 할 줄을 모르는기라, (ㅋ)

어떻게 신앙생활인지 몰라요!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신앙을 증거 하는 겁니다. 내가 받은 신앙을 증거 하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내가 받은 ‘믿음, 소망, 사랑’을 증거 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뭐가 됩니까, 내가 아무리 목회하고 심방해도 내 힘으로 뭘 못 이룬다? 말씀을 못 이룹니다. 무엇이 다 이루었다? 주님이 주신 사랑이 완성이지 내가 목회하고 기도하고 설교하고 … 이것은 주의 말씀과 아무 상관도 없는, 나의 기능적인 요소에 불과합니다 하는 것을 깨닫고 깨닫는 그게 신앙이고요, 그것을 그대로 강권해서 깨뜨려버릴 수 있어야 신앙 생활하는 목사입니다.

오늘도 신앙생활 안 하고 생활한다고 참석 않는 분 더러 있는데, 말씀은 공부하는 게 아니에요. 뭐 한 수 배우는 게 아닙니다. 다시 한 번 우리 본색을 검진 받는 거예요. 엑스레이 가지고 다시 한 번 단층촬영 해보는 겁니다. 그동안 얼마나 더 나아졌는가가 아니고, 한 달 더 살았으니까 얼마나 더 나빠졌는가를 보는 거예요. 폐병이라면 폐가 얼마나 더 썩어 가는가? 이걸 안 하면 자기가 건강한 줄 안다니까요. 안 썩어가고 있는 줄 알아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면 그걸 무슨 복음이라 합니까? 다른 복음이라고 합니다. 고린도후서11장에서 굉장히 중요한 것을 이야기해요. 뭐냐 하면, 보통 예수 증거 하면요,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든 예수 증거 하면 다 좋다했으니까 봐주자 하지만 사도바울은 분명히 얘기했어요. 예수라고 다 예수가 아니고, 복음이라고 다 복음이 아니고 예수도 무슨 예수가 있다?

다른 예수가 있고 복음에도 뭐가 있다? 다른 복음이 있고 다른 영이 있다. 그렇다면 진짜 복음을 아는 사람 같으면 무엇을 아울러 이야기할 수 있어야 되요?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도 얘기해야 된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해요? 안 해요? 안 하지요.하게 되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라, 는 게 다 깨지니까요. 예수사회에서 다른 복음 다른 영 다른 예수 이야기 하던가요?

‘예수사회’에서 ‘누가 이단입니까?’ 할 때 제가 그랬어요.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이 바로 이런 거다, 를 이야기하지 않는 그런 게 바로 이단이다 했어요. 사도바울은요 복음을 전할 때 반드시 이렇게 했습니다. ‘이것이 복음이다’ 하지 않고 뭐라 했습니까?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나’라 할지라도! 천사라 할지라도!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게 심판을 기다리는 사도바울의 모습 아닙니까?

복음을 전할 때, ‘이게 복음이다’ 하는 게 아니라, ‘이게 복음이고 이건 다른 복음이다.’ 라고 지적할 수 있어야 복음이라는 것을 안다고 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겁니다. 저는 묻고 싶어요. 다른 복음은 무엇입니까? 라고 묻고 싶어요. 그러면 도망가죠! 왜 도망간 줄 알아요? 다른 복음을 전하면, 자기가 지적한 다른 복음 받은 사람에게 뭐라고 공격받겠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인데 나를 다른 복음이라고 지적한 너는 왜 교만하냐? 라는 소리를 들을까 싶어서 말을 못하고 있는 거예요.

결국, 그런 말을 못한다는 것은 사도바울이 말한 것과 같이 다른 예수 다른 영을 받은 사람이입니다. 다른 영은 태어나면서 받은 게 다른 영이에요. 뭡니까? 악령이에요. 마귀예요. -조금 더 어렵게 해봅시다.- 새로운 피조물에 대해 더 어렵게 해봅시다. 뭐냐 하면, 선악과를 따먹을 때 아담의 자아가 어디 있습니까? -아참, 질문 어렵다-

선악과에 손을 대고 따먹는 순간 그 이전의 아담의 자아는 어디 있습니까. 아담은 자아를 알았었어요? 몰랐었어요? 몰랐겠죠. 그래서 결국 이건 뭐냐, ‘내가 뭐가 되리라’ 하는 것은 뭘 뜻하느냐 하면, 지금 내가 뭐 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걸 객체화시켜서 ‘너는 신처럼 될 수 있다’는 악마의 제안이 왔을 때 마귀의 말을 들을 그 순간부터 ‘나’는 갑자기 객체가 되죠. 객체가 대상자죠.

컵이 나에게 있으면 내 몸과 한 덩어리지만 컵이 밖에 있으면 ‘저기 컵이 있네’ 하고 대상이 되지요? 대상물이 될 때 나는 컵 안에 있다? 밖에 있다? 컵하고 따로 떨어져있는 게 되잖아요. 선악과를 따먹지 마라고 하는 것이 몸 안에 있을 때는 ‘내가 뭐 될까?’는 없어요. 왜? 선악과 따먹지 않은 범위 내에서 ‘나’기 때문에 현재 있는 나 그대로 족한 거예요. 거기서 여자가 태어나도 남이라하지 않았지요? 뭐라 합니까? 내 살 중의 살이요 내 뼈중의 뼈라, 어디까지나 내 안의 여자기 때문에. 내 바깥의 여자가 아니다 말이지요.

나중에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저 여자’가 라고 했어요. 저 여자가. 보세요, 남자가 얼마나 문제점이 많습니까. 갑자기 하나님이 만든 저 여자가 따먹으라 했다는 거예요. 자기는 하나님과 여자에게 하나의 대상이 되어버리잖아요. 하나의 객체가 돼버리잖아요. 하나의 대상이 된다고요. 티브이처럼. 탁자처럼. 이 찻잔처럼. 이 컵처럼. 나와 무관한, 나와 뚝 떨어진 하나의 대상으로 남아버려요.

그러면 아담이 자기 자신을 아는 순간 뭐냐, 계명이 깨질 때 그랬다는 말이에요.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계명이 깨질 때… 그것을 깨버리고. 그것이 깨질 때 자아를 건진 거예요. 말씀을 깨는 보상으로 자아가 등장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자아는 하나님 보시기에 이미 신적인 영역에 속해버려요. 왜냐하면 네가 선악과를 아는 것은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겁니다. 그걸 요한복음에서는 뭐라 하냐면 네가 하나님 말씀을 범한 자는 신처럼 보았다는 말씀이 나와요.

그런데 그걸 가지고 예수 믿는 것은 신이 된다고, 오히려 그걸 인정하는 희한한 사람도 있다 이 말이죠. 이미 그거는 인간이 선악과 알았다고 신의 범주에 들어갔다는 이 말은 인간에게 좋은 거라는 말입니까? 나쁜 거라는 말입니까? 이거는 인간답지 않다는 말이지요. 인간이라고 볼 수 없다 이 말이죠. 오히려 이걸 정리돼야 될 문제지 다듬어질 문제가 아닌 거예요 이거는.

선악과 따먹은 게 죄 맞습니까? 안 맞습니까? 죄 맞지요? 선악과 따먹어서 신처럼 된 게 선악과에 대한 지식이 신과같이 된 것이 죕니까, 죄 아닙니까? 죄 맞지요? 그런데 십자가를 믿을 때 뭐가 포함돼야 됩니까? 내가 하나님처럼 된다 하는 것도 죄 속에 포함돼야 되요? 안돼야 되요? 논리상 돼야 되잖아요. 이 논리에 문제없잖아요. ‘십자가 믿습니다. 십자가에 주님이 내 죄 때문에 돌아가신 것 믿습니다.’ 받아들이면 뭐가 받아들여지는 거예요?

‘내가 신처럼 되는 것도 죄 맞습니다.’를 받아들이는 거다 말이죠. 신이 되겠다는 죄는 어디서 처리한 거예요? 그거는 어떻게 처리한 거예요!? 성령을 받지 않으면 인간의 자기 본성을 가지고 구원받은 증거처럼 수집을 하게 돼 있어요. -다시 해봅시다. 벌써 다 잊어버렸을라나-

성령 받은 특징이 뭐라고요? -다 잊어버렸죠?- 내 노력이 일체 가미가 안됐는데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뭐가 왔다? 영성이 왔다. 그런데 왜 우리는 우리 노력이 가미될 수 없다했죠? 우리는 뭐기 때문에? 죄인이기 때문에! 그러면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이 뭡니까? 주님만이 온전히 일 했다는 것 앞에서 나는 뭐가 되는 거예요? ‘죄인’되는 게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이에요.

얼마나 못났으면 주의 일에 나를 안 끼워줬겠어요 그래. 일방적으로 직접 다 이루셨겠습니까. 내가 추가적인 노력을 가미 하지 않더라도 말씀이 다 이루었다 이 말이죠. 그걸 두 자로 뭐라 했습니까? ‘사랑’이라고요. 사랑. 사랑이 오면요, 정말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도 괜찮아요. 왜?! 챙길 건 다 챙겨버렸는데요 뭐, 어떻게 죽어도 내 안에는 뭐가 남아있어요? ‘다 이루었다’가 남아있고 내 안의 영생은 내가 죽는다 해도 소멸되지 않습니다.

2009년 2010년을 지나서 마지막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요, 우리는 사랑의 강권함을 입었다 하는 그런 사랑으로서 사랑이 여전히 담겨있는 사람으로 등장할 거예요. 다시 얘기합시다. 자아가 언제 생겼다고요? 선악과를 깰 때 생긴 거예요. 그러면 로마서7장에 보면 율법은 우리에게 뭘 내줍니까? 자아, ‘우리가 죄인 중에 괴수임을 알려주는’ 그걸 하기 위해서 율법이 가미됨은, 율법은 우리에게 죄를 더 풍성케 하죠. 왜?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죄라고 따지는 관점이 우리를 피조물로 잡아서 죄라고 관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선악과를 아는 이상 하나님의 신의 영역에 들어갔다는 입장에서 죄인이 되는 거예요. 코스모스는 저주를 안 받아요. 저주는 우리가 받습니다. 인간이 받아요. 왜? 코스모스는 신의 영역을 가지 않았기 때문에. 마귀는 저주가 없습니다. 돌멩이는 해체돼버리지 돌멩이가 저주받지는 않아요.

하나님의 저주는 신의 영역에 속한 것,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상숭배하지 말라는 것 아닙니까, 나는 나 외에 다른 신은 용납하지 않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 값도 못한 게 하나님인 체 꺼떡대는 것 못 보겠다 이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죽이고 새로운 인간을 만들죠. 그 새로운 인간은 뭐냐, 새로운 피조물이다. 17절의 새로운 피조물.

『고후5:17 보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

보라! -좀 보세요!- 어떻게 되었다? 새것이 되었다. 이게 다 사랑이 강권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2007년도, 2008년도 계획, 그거 아무 의미 없습니다! 우리는 피터 팬처럼 날아다녀야 되요. 마지막 심판이 있으면 내가 할 일은 끝나버렸어요. 심판이 있다는 이야기만 하면 그뿐이지 2007년도 뭐하고 2008년도 뭐하는 거 문제 삼을 것도 못 되요. 피터 팬인데 뭐, 훨훨 날아다니는데 뭐,

그것도 모르고 뭐한다고 공부하는데 참석도 않고… 날아다닌다고 바빠서 그런가? 여기 22절 끝에 봅시다. 「…오직 우리로 말미암아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뭐로 자랑하는 자를? 「외모로 자랑하는 자를 대항하느니라.」외모로, 심판이 있다는 걸 모르고 ‘내가 이만큼 됐다’ 하는 자기 노력의 대가를 자랑하는 인간들.

외모로 자랑한다는 것은 차별화 하겠다는 것인데, ‘너는 그렇고 나는 이렇다’고 차별하는 것. ‘그런 인간들을 꾸중하기 위해서 이 말을 한다.’ 하면서 너희들은 내가 미쳤다고 하는구나, 그래, 미친 것 맞다. 미쳤어도 나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고후5:13』뭐가 빠져요? 하나님을 위한 것이고 너희를 위한 것이나. ‘자아’가 빠지잖아요.

처음에 자아가 어디서 생겼다? 하나님 말씀을 깰 때 ‘자아’가 생겨요. ‘나는 신 되면 안되나? 왜 하나님만 하나님 돼야 되?’ ‘나는 왜 하나님 되면 안 되는데? 나는 자유의지도 없나? 나는 고집 있다 왜,’ 이런 식으로 나서면 그것은 아직까지 옛 피조물이죠. 새 피조물의 특징은 하나님 위한 것도 있고 이웃을 위한 것도 있지만 무엇을 위한 것은 없습니까? ‘나를’ 위한 것은 있을 필요가 없죠. 왜냐면, 나는 이미 사랑으로, 사랑의 강권함으로 주의 말씀의 강권함으로 내가 새로운 피조물이 됐는데 내가 나에게 필요한 게 뭐가 있어요. 생긴 대로 살면 되죠.

그리스도 사랑이 강권한다 하는데 그리스도 사랑이 무엇이냐, 봅시다. 그리스도 사랑이 무엇이냐 할 때에 내가 아까도 얘기했지만 복음이 무엇이냐 할 때 반드시 같이 붙는 게 뭐라 했습니까? ‘다른 복음’ 예수를 이야기할 때 반드시 붙어야 할 게 뭐가 있냐면 ‘다른 예수’ 성령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다른 성령이. 제가 논문이 있어요. ‘성령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더불어 악령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제대로 이야기 못하는 게 된다.’ 라는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성령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악령과 더불어 이야기해야 되고, 예수를 이야기할 때 다른 예수와 더불어 이야기해야 되고, 복음을 이야기할 때 다른 복음을 이야기해야 됩니다. 마찬가지로 여기서 사랑을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사랑 아닌 것을 더불어 이야기해야 되요. 그러면 사랑 아닌 것은 뭐냐, 사랑 아닌 것은 십자가가 빠진 것은 무조건 사랑이 아니에요.

십자가 빼놓고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불교’ ‘철학’ 세상의 모든 ‘과학’ 어떤 사람이 당뇨가 많은데 어떤 연구원이 당뇨병 특효약을 개발했다, 그래서 그 특효약으로 많은 사람이 살았다. 그거 사랑한 겁니까? 아니죠! 왜냐면 당뇨병에서 나아도 영생은 못 얻잖아요. 아까 얘기 다시 돌아갈까요? 사랑이 온전한 사랑이 와야만 우리한테 뭐가 온다? 영생이 주어지죠.

당뇨병 치료약은 당뇨병은 낫게 할지는 모르지만 영생은 주지는 못해요. 온전한 사랑이라 하는 것은 영생을 주게 돼 있지 당뇨병이나 고치고 이거는 아닙니다. 물론, 아픈 건 고쳐야죠. 하지만 모든 사람을 피터 팬처럼 날아다니게 하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이죠.

akfanrjtehahfkrakfk..........41:00

이번에 농협에서 어떤 건설회사에 수백억 부실 대출 해준 사람, 거기에 명예를 빌려준 사람이 누구냐면 은행의 아는 친척들입니다. 그 사람들 몽땅 망해버렸어요. 도박이에요. 위험하기 짝이 없어요. 산 넘어 산입니다. 한번 들어주었다고 해서 사랑이라고 하지만 최고의 사랑은 뭐냐, 마지막 심판 날에 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요 그 뒤에는 심판이 있으리니」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이미 주님께서 한번 죽으사 죽음과 사망 없는 곳으로 데려가기 위해서 두 번째 오시리라. 하고 이렇게 증거 할 때 이미 심판을 이야기하고 주님의 저주를 이야기하는 것 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어머니의 사랑? ‘지옥 간다’ 이것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어요? 뭐? 데레사 수녀의 사랑? ‘지옥 간다’ ‘지옥 갔데이’ 그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어요. 다른 복음을 이야기해준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여기 십자가가 빠져버리면 사랑이 아닙니다. 율법의 완성은 어디서 완성됩니까? 십자가에서 완성되기 때문에, 십자가로서 완성하는 그 율법 가운데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며는, ‘희생양’이 들어있습니다.

15절,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어렵다, 이거 정말 어렵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이것이 우리 인간들 세계에서는 그게 해당이 안 됩니다. 인간들 세계에서는 만약에 어떤 사람이 빚을 졌다면 자기의 모친이 빚을 갚을 수가 있어요. 하지만 모든 사람이 빚져 와가지고 그 모친 나와 보세요. 그걸 갚을 능력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인간에게는. 없어요.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줄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어요. 그리고 한 사람이 자기 죄도 감당 못하는데 무슨 남의 죄까지 감당하게 됩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자기도 빚이 없으면 남의 빚 대신 갚아줘도 되는데 자기 빚도 있는 게 뭘 또…돌려막기 합니까? 한 사람이 대신하여 죽으려면 그 사람은 뭐가 없어야 되요? 죄가 없어야 되요. 죄가 없으려면 죄 없다는 증거가 확보 돼야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에게는 뭐가 주어지느냐, 모든 구약성경 말씀을 짊어지게 돼 있어요.

그런데 구약 모든 성경말씀은 무엇을 겨냥하게 돼 있어요? 바로 악마를 겨냥해서 악마를 저주에 보내기 위해서 주어진 율법이거든요? 따라서 예수님은 공생애 하루 이전에 누구한테 시험 받습니까? 마귀한테 시험 받는 거예요. 마귀를 이길 수 있으면 말씀도 지킬 수 있고, 마귀한테 못 이기면 말씀도 못 지키는 겁니다. 왜냐면 모든 말씀을 지킬 때 누가 거기에 함께 갑니까.

말씀 지키려고 하면 거기 있다가, “왜, 그 말씀 말고 떡으로 살아야지 그 말씀 지켜서 되나?” 또 지키려 하면 “왜, 그 말씀 지켜버리면 팬들 많은 건데…?” “그 말씀 지키면 추종자 많아 너를 메시야로 알아볼 건데.” 그렇게 하다가 또 말씀 지키면 “ 세상부귀영화가 더 안 좋나?” 이런 것들이 왔기 때문에 우리는 그동안 말씀을 못 지켰어요. 이 말씀 지키면 주님이 부귀영화 줍니까? 이 말씀 지키면 나를 주의 종으로 알아봅니까? 이 말씀 지키면 돌이 떡이 됩니까? 나의 생존문제가 해결됩니까?

이런 생각이 와글와글 거리면서 이 말씀 지켜가지고 나중에 아무 소식 없으니까, “:에이, 치워라~” 이러거든요. 일반 교인들이나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만, 하루에 3장 주일날 5장 읽으면 일 년에 성경 다 읽는다, 이러거든요. 목사는 할 일이 없으니까 지킬라나 모르겠습니다만, 일반 교인들은 직장 다녀와서 언제 지킵니까? 직장에서 와서 씻지도 않고 방에 들어가 창세기1장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한 장도 보기 전에 침 질질 흘리면 “야야~ 바로 누워 자라~” 그러면 “예~”

뭔 성경을 봐요? 아침에 본다고? 눈 덜 깨가지고 ‘태초에 천지를 창…’ ‘에이, 다음에 여섯 장 읽자,’ 못 지킨다 아닙니까, 그런데 실제로 또 큐티 한다는 식으로 억지로 보면 ‘오늘은 드디어 성공했구나,’ 이제는 좋은 일 생길 것이고, 사람들이 나를 알아줄 것이고, 거기다 축복해주면 부귀영화 따라올 건데, …이걸 기대 않고 볼 수가 없어요. 만약에 주님께서 “어이, 근호야” (ㅋ) “예,” “성경 다 읽었나?” “예, 읽었습니다.” “그래? 그러면 이제 죽어라” “다 하면 죽으라 하면 안 할걸 그랬네, 죽으면 나만 손해게,”

예수님께서는 모든 성경말씀을 마귀와 이기는 가운데서 비로소 성경말씀을 다 지킬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경말씀을 대해도요, 선입감 자체가 마귀로부터 와글와글~ 선악과를 따먹어가지고 선악과 지식으로 걸어가지고 성경을 봐도 성경 본래의 뜻을 분간을 못해요. 자기가 지 맘대로 지켜놓고 다 지켰다고 우기는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고 있습니다. 이걸 지킬 수가 없어요.

그런데 죄 없는 분이,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다」이게 과연 성립되느냐 하는 것이죠. 한 사람의 의가 한 사람용으로만 되게 돼 있어요. 이게 성경에도 해당됩니다. 그러면 여기에 예수님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 죄를 짊어질 수 있다는 말은 **(?)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은 아담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아담은 두 번째 아담의 자격으로 아담 속의 같은 한 명이란 입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의가 이쪽 죄를 한 사람용으로…그래서 불신자들도 구원 받습니다? 천만에 말씀!

이 아담은 그때 그 아담이 아니고, 두 번째 아담, 마지막 아담이라서 새로운 아담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이건 택한 백성의 죄만 짊어지고 나머지는 마귀자식입니다. 아담의 자식이라도 다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한, 구원받은 자의 죄만 의인의 자격으로 같은 아담으로 보고 데려간다 이 말이죠. 다시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아담이기 때문에 아담으로 교체해 들어갈 수 있어요.

이 원리가 유지가 돼 줘야 그리스도 몸 안에 여러 지체가 들어가는 것이 논리적으로 합당하죠. -야, 이거 어려운 말입니다.- 1과1의 대응이 계속 유지를 해줘야 예수님 부활하고 난 뒤에 우리가 그리스도지체 아닙니까? 예수님의 지체가 많더라도 두 몸이 한 몸이라도 봐야 되는 거예요. 왜냐면 첨부터 예수님은 아담, 한 몸으로 오시기 때문에 그 한 몸의 계획이 그 틀이 그대로 오늘날까지 이어져서 여러 지체가 있지만 성령 안에서 우리가 뭉뚱거려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한 몸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몸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요, 하나님도 하나다 그겁니다. 그걸 ‘하나 됨’이라고 하죠. 하나 됨. 그래서 하나님과 성령과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하나 되게 되는 겁니다. 이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었다. 그러면 그 대신이 되느냐 하는 문제예요. 죄는 저 사람이 짓는데 왜 이 사람이 대신 죽느냐, 대신 죽으면 이쪽에서 저쪽으로 이동해야 되는데 하나님의 의가 이동이 돼야 하는데 이동이 어떻게 되느냐 말이죠.

이동.… 경로.… 이쪽의 의가 어떻게 저쪽의 죄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느냐? 하는 그 문제예요. 제가 이 물을 마셔볼게요. 제가 물마십니다. 시원하십니까? 아니지요. 물은 내가 마셨는데 시원하긴 개 코가 시원해요? 목욕을 내가 해도 목욕은 따로 해야 되요. 내 치아가 아파도 그쪽에서는 안 아파요. 그런데 예수님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되고,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이 내 십자가 지심이 되고 예수님 눈물이 내 눈물이 되는 이유가 뭐냐 이 말입니다.

그거는 한 몸 때문에 그렇거든요. 마치 산모가 커피 마시면 애에게 영향을 주듯이 산모가 술 마시면 아이도 술 취하듯이. 그게 한 몸이기 때문에 그렇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 몸이 우리 몸속에 들어갈 수 있느냐 하는 게 문제입니다. 어떻게 우리 몸 따로 인데 그리스도의 몸과 결합이 가능 하냐 이 말이죠. 아담과 하와가 아무리 한 몸이라고 해도 첨에는 내 살 중에 살이라고 한 몸이라고 하지만 그거는 선악과 따먹기 전이고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는 백날 해봐야 한 몸 안 되지요.

그리스도를 뭐라고 부르느냐, 신랑이라고 하는 거죠. 우리를 신부로 보는 겁니다. 왜 그러냐면 신랑 신부는 한 몸이면 일촌이잖아요. 이게 한 몸을 이루잖아요. 이것은 바로 창세기 1장에서 아담 몸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 여자입니다. 남자 몸에서 떨어져 나왔다고 해서 여자로 지은 거예요. ‘여자’의 뜻이 뭐냐 남자의 몸이라는 뜻이에요. 여자가 돼도 남자 몸이지 남자 몸에서 흡수 통합되지 여자 몸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여자 몸 따로 돼 있는 건 이름이 바뀌어요. 하와로 바뀌고 남자는 아담으로 있지만 여자는 하와로 바뀝니다. 이미 이름이 따로 있다는 말은 없어요. 하와가 아담에게 한 몸 되려면 이 하와는 죽어야 됩니다. 그게 어디 있냐면 갈라디아서 2장20절「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십자가의 의미가 뭐에요? 나를 죽이는 의미죠? 나를 죽여서, 나의 옛 피조물을 죽여서 새 피조물로 만들어내는데 어떻게 만드냐,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 안에 누가 산다는 말이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것은 뒤에 뭘 말해줘요? 「내가 산 것이 아니요…」라는 것을 붙여줘야 되요.

예수를 이야기하려면 뭘 이야기한다? 다른 예수 이야기해야 되고, 성령을 얘기하려면 다른 영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되고, 복음 이야기하면 다른 복음을 이야기해야 되듯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야기하면, 반드시 내 안에 뭐가 사는 게 아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을 십자가를 아는 사람이다 이 말입니다.

‘대신했다’는 말은 나를 죽여 버린 거예요. 함께 죽은 거예요. 대신 죽었다는 말을 로마서6장에서는 함께 세례 받고 함께 장사되고 함께 부활되었으며…라고 했어요. 그러니 부활 될 때는 혼자 부활되는 것이 아니고 함께 부활되기 때문에 나의 부활은 없어요. 주님의 부활에 종속되지 내 부활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 부활의 첫 열매라 이거죠. 그 다음에 있는 열매는 땅에 있는 자고 그 다음에 우리들이죠. (어디선가 삼계탕 끓이는 냄새 풍겨오는 순간…)

고린도후서 5장12절에 나오죠? 한 성령을 마셨기 때문에 우리는 따로 따로 노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한 지체라는 것을 알듯이 우리는 한 삼계탕 냄새를 맡았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삼계탕만 생각하게 되는 거예요. 자기 생각 않고…자기 생각 않는다는 게 뭡니까? 계명을 깨기 이전의 아담의 모습이다 말입니다.

내가 따로 ‘나’를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그냥 삼계탕 냄새만 맡고 살면 되요. 내 것 네 것이 없이, 초대교회는 내 것 네 것이 없잖아요. 한 몸이다 이렇게 돼 있죠. 그래서 그 뒤에는 다시는 ‘산 자들로 하여금’ 뭘 위해서 살지 않고? ‘다시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 이게 있어야 되요.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 자신이 없으니까!

오히려 「저희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해 살게 하려 함이라」16절에 봅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육체는 죽어버렸는데 뭐,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 필요가 없고, 우리도 육체대로 알 필요가 없고. 그렇다면 결국 이것은 뭐냐, ‘당신은 누굴 믿어요?’라는 말 가지고 사귀어야지 당신은 직업이 뭐요? 당신은 키가 몇 센티미터요, 그걸 묻는 게 아니고. 개입할 필요 없이 너는 너 나는 나 라고 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남자, 여자 개입할 필요가 없다 말이죠. 우리는 지금 누구를 쳐다보고 있어요? 왜? 같은 삼계탕 냄새를 같이 맡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살지 않고 우리는 삼계탕을 위해 살게 하려 함이라. 그걸 새로운 삼계탕 피조물? (비유가 쩜 거시기...ㅋ)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는 것은 더 이상 자기 위해 살지 않는 것, 그리고 사람을 볼 때 육체대로 알지 않는 것. 그리스도를 볼 때 육체대로 알지 않고, 성령 안에서 십자가를 중심으로 십자가와 나와 함께, 십자가로 인하여 내 속에 들어오신 분으로 이해하는 것. 그것이 바로 새로운 피조물의 특징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세상에 물들다 보니 나만 생각하고 그리스도를 생각하지 않은지 오래 되었습니다. 이제는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의 것이오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담겨 있는 긍휼의 그릇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수고하셨습니다.-녹취 박온정)

첨부파일 : 안산071012고후5장10.hwp (62.5K), Down: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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