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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대구 9월 17일 성화론의 허구성 3강의[신학]

대구 9월 17일 성화론의 허구성 3

이름 : 우리교회(IP:124.59.87.70)

대구 9월 17일 강의

첨부파일 : 성화론의 허구성.hwp (81.5K), Down:9

우리교회(IP:220.♡.176.141)

08-04-06 15:25

대구070917성화론의허구성3

07 대구강의 12 - 성화론의 허구성3

07,09,17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인간과 언어구조형식 !!

이제 성화론 세 번째 시간을 시작하겠는데, 먼저 교재를 살펴보자.

** 결국 인간이 '옳다, 그르다' 라고 판정을 내리는 것은 대 자연에 대해서가 아니라 같은 인간들이 내놓은 것들뿐이다. 이 '내놓은 것들'이 바로 인간들이 행한 실천이나 문화나 문명인데 이런 대상들은 모두 평가가 가능하고 판단이 가능한 것들이다. 그 이유는 인간들끼리 의사소통이 가능한 구조로 짜여져 있기 때문인데 그 '의사 소통'이 가능한 구조로 되어 있다는 말은 곧 '언어구조 형식'으로 짜여져 있다는 말이다.

◈ 내일은 남부지방에 태풍피해가 예상되오니 !!

인간이 아무리 큰 소리를 쳐도 대자연에 대해서는 꼼짝도 못하는데, 예를 들어서, 태풍이 오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 그것을 태풍의 멱살을 잡고 물어볼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들은 대자연 속에서 살아가면서 대부분을 포기하고서, 같은 인간들을 붙들고 닥달을 내는데, 대자연에 대해서는 손도 대지 못하고 말이다. (그래서 기상청만 욕을 바가지로 듣는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진리의 문제는, 이 진리라고 하는 것은, 사실상 이것은 진리가 아닌데, 태풍마저도 조절을 해야 진리라고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하나님만이 가지고 있지, 인간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태풍에게 질문도 제대로 못하니 말이다. 이렇게 하나님만이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 중세시대라는 것이다.

이것이 근세에 들어오면 이런 진리에 대해서 포기하는 쪽으로 가는데, 대자연을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인간들끼리의 유용성을 가지고 진리라고 쳐주자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현대에 들어오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까, 그러한 진리라는 것은 없어지고 상대적 진리만이 남는다는 것이다. 즉 지즘지즘(각자각자) 진리이지, 뭔가 통합이 된 하나의 진리는 없고, '내 진리 따로', '니 진리 따로' 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둘 사이에 정치적 타협을 해서 수위를 조절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하버마스 - 진리란, 의사소통을 해서 합의를 이루는 그 과정자체 !!

그래서 독일의 철학자인 하버마스(Habermas) 같은 경우에는 무엇이 진리인고 하니, 서로 의사소통을 해서 합의를 이루는 그 과정 자체가 진리라는 것이다. 합의를 해서 어떤 결론을 내어놓았는데, 그런 결론이 진리라고 하면 안 되고 말이다. 그런 것은 바뀔 수도 있으니 말이다. 아무튼 합의에 도달하기 위해서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이 바로 진리라는 것이다.

◈ 참여정부에게 실패란 없다 !!

이런 하버마스의 이론을 노무현 정권이 받아들였는데, 그래서 노무현 정권을 자기들 스스로 '참여정부' 라고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그 이전까지는 한 사람이 진리라고 주장하면 무조건 따라가야 하는데 말이다. 하지만 이 참여정부라고 하는 것은, 너나 할 것 없이 계급에 상관없이 우리 모두가 참여해서 만들어가자는 것이다. 그렇게 386세대가 실험을 했다는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실패했다고 하는데, 그러나 저는 그렇게 보지 않는 이유가, 그들은 하버마스 이론처럼 실험자체를 진리라고 보니 말이다. 지금 제 말뜻을 자 이해해야 하는데, 어떤 결실을 맺어야 진리가 아니고, 그렇게 참여한다는 것 자체가 진리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 어떤 열매를 맺던지 간에, 그것이 옳고 그름이 아니라, 그렇게 참여하는 행태가 바로 진리라는 것이다.

◈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구조형식 !!

그러니 이런 참여정부의 진리관은, 독단적으로 하지 않고 의견을 수렴해서 하겠다는 것인데, 이러한 의사소통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교재에 나오는 '언어구조형식' 이라는 것이다. 즉 의사소통이 가능한 구조와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구조로 나누자는 말이다. 이것이 러셀이 주장한 것인데, 그 다음에 비트겐슈타인으로 넘어가서 완성이 되고 말이다. 그래서 언어구조 가운데서 말도 되지 않는 언어구조는 빼자는 것이다.

사대부고 21회 동기생 사이트에 보면 이런 안내문이 있는데, (이 목사님이 사대부고 출신인가?) "우리 21회 동기생들이 의견을 내고 참여하는 것은 모두 좋은데, 다만 종교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은 빼자" 라고 말이다. 누가 친절하게 적어놓았는지는 몰라도 참 머리가 좋아 보이는데, 이 두 가지만 빼고는 모두다 실을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은 논쟁거리가 되니 서로 동기생들의 분위기를 해친다는 말이다. 처음의 정치적인 것은 어떻게 타협이라도 가능하겠지만, 두 번째인 종교적인 논쟁의 경우에는 '또' 아니면 '모'가 되는 식인데, 그렇게 되면 하나만 빼고서 나머지는 모두가 다 폐기처분을 해야하는 사상에 지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 언어실증주의 - 지시체가 없는 것은 하지 말자 !!

아무튼 러셀 이후에 언어를 설정할 때는, 이것을 '언어실증주의' 라고 하는데, 즉 "지시체가 없는 것은 이야기하지 말자" 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신이나, 귀신, 영혼 등은 말이다. 이러한 것은 지시체가 없는데, 이런 것은 올바른 진리와는 상관이 없는 것으로 보자는 것이다.

이것을 원자명제라고 하는데, 여기서 분자명제로 나가고, 아무튼 논리학에서는 이것이 엄청 복잡한데, 그런 것을 제거하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옳다고 생각하는 것만 골라서 옳다고 이야기하면 그것은 옳은 것이 되는데, 즉 진리가 된다는 말이다. 이것이 어디서 문제가 되는지, 그것은 나중에 살피기로 하고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그 이유는 인간들끼리 의사소통이 가능한 구조로 짜여져 있기 때문인데 그 '의사 소통'이 가능한 구조로 되어 있다는 말은, 곧 '언어구조 형식'으로 짜여져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곧 '언어구조형식'을 통해서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들의 옳고 그름의 개시이다.

예를 들어서, "대한민국의 임금님은 대머리이다" 라고 이야기했을 때, 그것이 과연 옳은가? 아닌가? 또 "프랑스의 왕은 대머리이다" 라고 했을 때, 이 명제가 옳은가? 틀렸는가? 사람이 나이가 들게 되면 자연스럽게 머리카락이 다 빠지고 대머리가 되는 것은 맞지만, 그러나 문제는 지금 프랑스에는 왕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실제상황과 맞아야만 옳다고 한다는 것이다.

** 인간은 자신의 실천성이나 행위에 옳고 그름이라는 판단을 부여하는데 따지고 보면 그 모든 것이 언어라는 형식에서 벗어날 도리가 없는 것이다. '꽥!'하고 고함만 질러도 이것이 그 사회 안에서는 서로 의사가 통하는 언어로서 제 구실을 하게 된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예를 들어서, 재판장에서 판사가 판결을 하니 그것을 피고가 듣고 '꽥' 이라고 한다면, 바로 그것은 판사의 판결에 대한 거부의사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아래 글에 나오는데,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예를 들어, 판사가 언도를 내리는 재판장 안에서 판사의 언어를 듣고 나서는 갑자기 죄수가 '꽥!'하고 고함을 쳤다는 것은, 곧 '당신의 진위와 판단 여부에 나는 동의할 수 없어!'라는 죄수의 강한 불만을 드러낸 말이 된다. 따라서 인간들이 시도하는 모든 진리와 거짓, 참과 오류에 대한 분석은 언어분석으로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같은 성경 말씀을 놓고서도 서로 올바른 해석을 내놓았다고 하는 것도, 결국은 언어분석이라는 형식을 가지고 서로 내세우는 식이 된다. 그렇다면 과연 언어분석이 이 인간 사회에서 옳고 그름을 확정지어 줄 수 있을까? 사전에 각기 갖게 되는 선입견으로부터 과연 자유로울 수가 있을까?

같은 성경말씀을 보면서도, "해석을 바르게 하자" 라는 것이 결국 무엇으로 이어지는고 하니까, 총신이나 장신 교수들이 기껏 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바른 성경해석을 하자고 해놓고, 나중에 보면 언어분석에 들어가고 만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과연 언어분석에 대해서 제대로 공부를 했는지, 사실 그렇게 의문이 드는 것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고 말이다.

◈ 언어분석을 하면 의미가 아닌 주체가 !!

엘름슬레우나 방스니스트 같은 언어학자를 보면, 특히 방스니스트는 '담론'(discourse) 리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는데, 또한 크리스테바나 데리다는 어떤 주장을 하는고 하니, 물론 아주 순박한(?) 신학교 교수들은 언어를 분석하면 '의미'가 나온다는데, 즉 성경을 분석하면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학자들에 의하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 몇십 년 전에 이미 다 밝혀진 것들인데, 조사를 해보니까 언어분석을 하면 의미가 아니라 '주체'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주체가 곧 의미이고 의미가 곧 주체라는 말이다. "너는 왜 그렇게 생각하지?" 라고 질문하면, "내가 그렇게 생각하니 내가 맞지" 라고 하는데, 그것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장난감 놀이를 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 철학 - 결국은 '나'만 외로이 !!

여기 하진씨가 철학을 공부하고 있지만, 이 철학에 대해서 진리라고 기대를 잔득하고 공부를 해보면, 그러나 결국 남는 것은 "나는 나다" 라고 하는 것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철학을 하다가 안 되면 불교로 넘어가고 만다는 것이다. 박형용 같은 경우도 그러한데, 제 말의 뜻은 중이 된다는 게 아니라 불교의 교리를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 양반은 중을 점쟁이라고 여겨서 싫어하고 말이다.

◈ 당사자를 지적하는 언어분석이 있는가?

다시 말해서, "나는 나다" 라고 하는, 즉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이란 것이다. 그러니 인간이 언어를 아무리 제 분석을 하고 분석해도, 그 언어를 향해서 달려드는 것이 곧 자기 자신인데, 그렇게 달려드는 '나'를 지적할 수 있는 그런 언어분석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이미 사전에 그런 해석을 하지 않으니 말이다.

로마서 3장을 몰라서 그런 소리를 하는데,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반드시 자기 의를 향해서 간다" 라는 것인데, 이것이 로마서 초반부에서 사도바울이 증거하는 핵심이라는 것이다. 다시 이야기하면,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자기 의를 추구한다" 라는 것인데, 즉 자기에게 의가 있는지 없는지 따져보니까, 그 결과 의가 없어서 죄인이라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겸손으로 위장해서 남을 속이기 위한 위선에 불과하고, 예를 들어서, "저는 부족합니다" 라는 것 말이다.

실제로는 원래 처음부터 인간은 죄인이라는 것인데, 그렇게 죄인이기 때문에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다른 것은 보지 않고, 어떻게 자기가 의롭고 정당한지, 그런 방향으로 나가는데, 그 결과가 바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라고 하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자기 의가 나오지만, 그러나 이런 자기 의는 말 그대로 자기만의 의이기 때문에, 그 바깥에 있는 타인을, 그리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죄인으로 마구 몰아세운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에 의하면 그 증거가 곧 십자가 사건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과연 이러한 언어분석에 대해서 어떻게 단호하게 이야기하는지 살펴보겠는데, 여기서 고린도후서 5장 15절 이하를 먼저 보자.

(고후 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 5: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 새로운 피조물이란?

여기 15절에 보자면, 새로운 피조물인 경우에 그 안을 들여다보면 이제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겠다고 하는, 그런 요소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이 인정하는 새로운 피조물이지, 그러니 자기를 위해서 사는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를 위해서 산다면 도대체 새로울 것이 뭐가 있느냐는 말이다. 무엇이 새로우냐는 말이다.

◈ 물러가라, '나를 위하여' !!

그렇다면 성경 그 어디를 펼치든지 간에, 잠언서를 보던 아가서를 보던 간에, 또한 창세기 1장 1절을 보면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아무리 고백을 해도, 새로운 피조물은 무엇을 알아야 하는고 하니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라고 하는 언어를 두고서,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경우와,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는 경우에 하는 해석의 차이점을 알아야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철학을 하는 사람들이 여기서 모두가 다 뒤집어지는데,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철학을 하는 목적자체가 '자기를 위해서' 하기 때문에 말이다. 심지어는 철학 안에다 기독교 교리를 다 집어넣어서 뭉개버리려고 하니 말이다.

◈ 사도바울 선생님, 도대체 과거에 무슨 생각을?

사도바울도 처음부터 새로운 피조물은 아니었는데, 그는 과거에 바리새인 중에도 바리새인이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 사도바울은 양 쪽 모두를 알고 있었는데, 자기가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을 때 했던 성경해석이 있었을 것인데, 얼마나 하나님께 열성이 있었으면 예수를 이단취급까지 하고서, 그를 믿는 자들을 잡아죽이려 했느냐는 말이다. 그 정도의 확신이 있는 행동이라면 자기는 나름대로 확실한 체계를 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더 이상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고" 라고 했을 때, 사도바울의 경우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데, 과연 다른 복음 말고 진짜 복음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복음인데, 이런 십자가 복음은 이 세상 자체를 죄로 규정해야만 다른 복음은 안 되고 십자가 복음만이 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갈라디아서 1장 4절에 보면 "그리스도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라고 했으니 말이다. 자기 백성을 말이다.

(갈 1: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 나의 과거는 어두웠지만 !!

그렇다고 하면 이 죄에 대해서, 과거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 사울의 상태로 있을 때는 이 '죄' 속에 본인이 들어있었는데, 즉 이렇게 본인이 들어있으면서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했던 행색이 있었던 것이다. 자기의 행색과 사상과 성경을 바라보는 모든 나름대로의 체계가 말이다.

그러니 그런 체계전체를 죄로 보는데, 체계 일부가 아니고 말이다. 그렇게 자기 체계전체를 모두 죄로 봐야만 '십자가만' 이라는 것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예수님의 의(義)이니 말이다. 만약에 전체 중에서 일부만 죄라고 하면, 예수님하고 자기하고 타협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선을 끄집어내고, 저기서 선을 끄집어내어서, 그렇게 합쳐서 구원을 받으면 되니 말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이 성립되지 않는데, 사도바울이 새로운 피조물이 어떻고, 그렇게 한 모든 말들이 다 거짓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 자기 자신을 살피는 것 자체가 죄 !!

율법으로서는 오히려 죄를 증가함인데, 사도바울 본인이 과거에 그러한 상황에 처해있었는데, 자기는 그리스도가 없을 때 거룩한 법 아래에 있었는데, 그때 자기는 죄인이면서도 그것을 의로 간주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로마서에서 말하는 죄인은 자기 의를 찾으려고 시도하는 그 자체가 죄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을 잘 살펴보아서 죄가 있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라, 그렇게 시도하는 자체가 죄이라는 것이다.

교인들이 흔히 하는 말이, "목사님은 자꾸만 우리를 죄인이라고 하지만, 하지만 제 자신을 살펴보니 어릴 때 엄마 돈을 말하지 않고 가져간 것하고, 중학교에 다닐 때 학교 앞 분식집에서 떡뽁기를 입에 좀 많이 넣은 것하고, 그 다음에 커서는 그렇게 큰 죄를 지은 것이 없는데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그렇게 자기를 살피고 찾는 것 자체가 죄라고 지적하는데, 즉 말씀을 믿지 않고 판단을 하려는 것이 바로 죄라는 말이다. "예, 저는 죄인이 맞습니다" 라고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면서 주님이 주신 복음을 받아들이면 되는데 말이다. 하지만 인간들은 그런 주님의 말씀을 참고사항으로 여기고 만다는 것이다.

◈ 오잉, 자아가 3개라니 !!

그러니 이러한 전체가 '자기를 위하여' 라는 것을 포기하지 않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란 말이다. 사실 이런 '자기를 위하여' 라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인간에는 불가능한데, '자기를 위하여' 라는 것을 포기하게 하는 자아는 새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아가 3개 나오는데, 첫째는 '자기를 위하여'를 위한 자아, 둘째는 그런 '자기를 위하여'를 포기하는 자아, 그리고 세 번째가 이렇게 '자기를 위하여'를 포기한 이후에 등장하는 포기된 자아, 이렇게 3개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얼마나 골치가 아픈지 모른다는 것이다.

◈ 또 즉자(卽自), 대자(對自) !!

"나는 저런 나아가 되기 싫어" 라고 할 때, 이런 자아가 있고, 이것을 '즉자(卽自)' 라고 하고, 또 '대자(對自)' 라고 하는데, "나는 저런 나아가 되기 싫어. 이런 인간이 되어야 돼. 저런 인간은 극복해야 돼" 라고 할 때, 여기에서 원투쓰리로 '정','반','합'이 나온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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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즉자 [卽自, an sich] - 사물의 직접태(直接態)로서 다른 것과의 연관에 의해서 규정되는 단계까지 도달하지 않은 미발전(未發展)의 상(相). 독일의 철학자 G.W.F.헤겔이 사용한 철학용어이다. 따라서 인식하는 주관에 대해서 아직 발현(發現)되지 않는 잠세태(潛勢態), 또한 자기 자신에의 반성적 관계가 결여되었다는 뜻에서 무자각태(無自覺態)의 뜻도 된다. 즉자는 다른 것과 교섭하여 자기의 자립성을 잃게 되는 대타(對他)로 발전하고, 다시 여기에서 자기 자신과 관계함으로써 자기를 회복하는 단계인 대자(對自)로 발전한다. -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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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뢰즈 - 자투리를 버리지 말자 !!

이것을 두고서 칸트는 말하기를, "사람은 이성으로 반성하게 되어있다" 라고 했는데,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들뢰즈가 반대한다는 것이다. 들뢰즈는 말하기를, "이렇게 반성하는 것을 두고서 헤겔은 우연, 혹은 죄, 또는 모순이라고 하는데, 그러나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데, 이렇게 모순되는 것을 긍정하자. 그리고 인간이 자투리라고 해서 쓸데없다고 버린 것을 옹호하자" 라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인간의 본래 모습은 정돈되고, 그렇게 반성하고 옳은 것이라고 제대로 챙긴 것만 옳은 것만 신의 다양성이라고 하면 안 되고, 사실은 그런 것보다는 버려지는 자투리가 더 많으니까, 항상 그 속에서 인간의 본질을 찾자는 것이 들뢰즈의 철학이란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니체에게서 나온 것이고 말이다. (목사님, 말끝을 흐리지 마세요. 녹취가 무지 힘들어요)

◈ 시뮬라르크에서 폼 잡는 인간들 !!

그러므로 '악' 이라고 규정된 것에 우리의 본 모습은 다 들어있는데, '선' 이라고 규정된 것은 하나의 위선이고 말이다. 이것을 '시뮬라르크' 라고, 일종의 '허상세계' 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사람들은 자진해서 반성을 했다고 하면서, 그 반성한 자아를 가지고서 위선자 행세를 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들뢰즈가 그렇게 주장한다는 말이다.

아무튼 신학교 교수를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김세윤 교수처럼 신학을 이야기할 때라도 언제나 그 시작을 언어분석부터 들어가는데, 바로 그 순간 딱 스톱을 하고서, "자기를 위해서 그 본문을 해석했을 때와, 자기를 위하지 않고 해석할 때의 차이점을 이야기해보세요" 라고 하면, 그야말로 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

시편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라고 나오는데, 그렇다면 "이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을 때, "여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라는 것은 자기를 포기하고 하나님만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라고 대답을 했는데, 그런데 그러한 답변에 대해서 "자기를 위해서 했을 때의 뉘앙스와, 자기를 위하지 않았을 때의 뉘앙스가 어떻게 다릅니까?" 라고 다시 물으면, 역시 할 말이 없는데, 왜냐하면 둘 다 똑같기에 말이다. 똑같다는 것은 새로운 피조물이 아니라는 뜻이고 말이다.

◈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 본문말씀을 !!

여기서 "그러면 이 목사님의 철학(?)은 무엇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자기를 위해서 성경해석을 하게 되면, 그것은 자기 의를 위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하는 말 가운데 자기도 함께 묻혀간다는 것이다. "야, 이렇게 내가 착하구나" 라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자기를 위하지 않고 주님을 위해서 한다면, 그것은 십자가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그 본문말씀을 보도록 하셨다는, 그런 방향으로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는 빠지게 되니 말이다.

◈ 영업과장의 기능이 우선 !!

제가 어제 오전에 중요한 설교를 했는데, 일할 사람이 먼저 있어서 영업과장이란 자리와 직책을 주고 사람을 뽑는 것이 아니라, 영업과장으로서 해야할 일이 있기 때문에, 즉 기능과 직책이 먼저 있기에, 그래서 사람을 뽑는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도가 먼저 있어서 주님이 오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어떤 분이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성도가 있다는 말이다. 즉 기능이 먼저라는 것이다. 사람을 먼저 뽑아놓고서, "니는 뭐하지?" 라는 것이 아니고, 영업과장이 먼저 필요했기에 사람을 뽑는데, 그래서 경쟁률이 20:1이 넘고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경우도, 그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우선이지 우리 자신이 먼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 기능이 바로 사도바울처럼, 십자가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하는 것인데, 바로 그러한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를 뽑았다는 것이다.

◈ 죄인은 죄인에 합당한 용도로 !!

그런데 우리를 그렇게 뽑을 때 우리는 이미 죄인인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죄인이라는 것도 이런 기능에 합법적으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뽑으셨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당연히 죄인으로 인정해야 그 기능에 맞는데, 그렇게 해야 더 이상 '나를 위하여' 라는 것이 전혀 의미가 없다는 것이 알려지고, 그렇게 해야 죄인을 용서하시고 구원해주신 예수님의 그 복음이, 죄인을 통해서 제대로 증거가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렇지 않는가?

오늘 아침에 대전에 있는 신직수씨가 로마서 6장 말씀을 질문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김윤진님께서 '나는 하나님이 이근호 목사님을 통해 복음 증거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라고 했는데, 저는 김윤진씨가 어떤 의미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마 인간이 아닌 죄인을 통해서 주께서 전한다는 의미이지 싶은데 말이다.

◈ 개봉박두, 예수님의 일생 !!

사도바울의 경우에 그의 개인적인 생활은 계시가 아닌데, 예수님의 일생을 비디오로 찍어놓으면 그게 계시인가?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님이 어릴 때 엄마 마리아에게 야단도 맞고, 친구들과 놀다가 넘어져서 다치기도 하고, 여자 고무줄 놀이하는 것도 방해하지 않았겠는가?)

◈ 계시는, 예수님의 생애가 아닌 오직 성경말씀뿐 !!

총신에서 제가 겁도 없이(?) 이런 강의를 함부로 하다가 조금 혼 줄이 난 적이 있는데, 하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오직 성경책에 있는 것만이 계시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일생 자체가 계시가 아닌 오직 성경 말씀만이 계시라는 말이다. 성령께서는 이렇게 오직 성경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증거한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그렇게 고생을 하고 요한이 백발을 휘날리면서 일을 해도, 그것은 자기가 한 것이 아니라 주도권이 주님에게 있는 것이고, 그들을 사용해서 복음을 전하게 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니 성령께서 예수님의 주되심을 증거함에 있어서, 인간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그 주도권은 주님에게 있다고 하면, 그것은 말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이근호 목사는 다른 복음을 전한다" 라는 의미라면, 그러면 바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아니, 저 사람은 저렇게 바르게 전하는데, 이근호 목사는 왜 이렇게 전하는가?" 라고 해야 하는데, 그래야 제가 수정을 해서 제대로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얻지 말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죄인을 데리고 복음을 전하게 하는 의도가,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가 아닌데, 즉 "이렇게 해야 구원을 받습니다" 라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구원문제보다 주님의 하신 그 기능을 먼저 생각해야지, 그렇게 해야 '자기 자신을 위해서' 라는 것에 포함되지 않고, 주님의 뜻에 합당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만이 새로운 피조물이고 말이다.

◈ 주께서 성경공부를 빼먹게 하셨다 !!

예를 들어서, "성경공부를 하는데 바빠서 참석을 하지 못했다" 라고 할 때, 새로운 피조물이라면 한번쯤은 생각할 것인데, "나에게는 성경공부가 엄청 중요한데, 그런데 주께서는 더 바쁜 일을 시켰구나" 라고 말이다. 그렇게 되면 성경공부에 참석하지 않아도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를 위해서 산다는 것이다. 반대로 성경공부에 참석하더라도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이 될 수도 있고 말이다.

성경공부 자체가 진리가 아니니, 중요한 것은 그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성경공부보다 이것이 나에게 더 낫겠다" 라는 판단으로 산다면 그것은 분명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이고, 말씀에 의해서 당연히 책망을 받을 짓이고 말이다.

교회에 나오는 것도 마찬가지인데, 추석 때에 "복 많이 받으세요" 라고 외칠 것이 아니라, 그 주도권을 주님에게 맡기고, "주여, 나를 위해서 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라고 했을 때, 주께서 "그래, 교회에 가지 마라" 라고 해서, 그러한 주님이 시키신 이유로 인해서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면 누가 뭐라고 하겠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과연 "이제 나를 위해서 살지 않겠습니다" 라는 질문을 주님에게 진지하게 해본 적이 있느냐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말씀에서 새로운 피조물은 그러해야 한다고 하니까 말이다. 즉 "나를 위해서 사는 것은 너무나 지루해" 라고 말이다.

◈ 이젠 내 몸뚱아리에서 벗어나고 파 !!

이런 것이 나이가 들면 좀 알아지는데, 사람이 젊었을 때는 자기라고 하는 자아에 자기 몸이 종속되는데, 그런데 환갑이 지나가면 자기 몸에 자아가 치게 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아서 하고 싶은 것을 하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치과에 가서 이를 치료한다고 성경공부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말이다. 과거에는 자기 몸이 자기 소유였는데, 그러나 나이가 들면 몸과 자아가 분리되는데, 몸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이가 80세 정도 되면 정말 자기 몸을 그만 떼어버리고 싶은데, 사도바울이 고린도후서이지 싶은데, 뭐라고 했는가? 이제는 이 껍데기를 그만 벗어버리고 새로운 재킷으로 바꿔서 입고 싶다고 말이다. 어서 그런 날이 왔으면 한다는 것이다. (그런 뜻이 아니지 싶은데??)

젊은 사람들은 자기 몸이 자기 모이라고 여기지만,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니 말이다. 그러나 점점 늙어 가면 그때는 몸 자체가 짐이 된다는 것이다. 마음은 20대이지만 몸은 처진다는 말이다. 그래서 자기 몸이지만 발로 그만 차버리고 싶은데, 마치 처음에 잠을 잘 때 이불을 덮으면 이불이 고마운데, 나중에 더우면 짜증을 내면서 발로 차버리듯이 말이다. 물론 새벽이 되면 또 찾겠지만 말이다. 이런 것이 다 누구를 위해서 그렇게 하는가? 모두가 다 '자기를 위해서' 라는 것이다.

◈ 성도의 팔자는 이미 !!

그런데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 보면, 새로운 피조물은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를 보고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기능을 하기 위해서 우리가 부름을 받았으니, 성령을 통해서 우리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그런 팔자에 우리가 사로잡히게 되었다는 말인데, 그렇게 될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증거된다는 것이다.

(고후 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살았잖아" 라고 하면, 자기 자신을 증거하는 것이니까, 그것은 '자기를 위하여' 라는 것에 해당하고, 자기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이다. 사도바울이 자기를 두고서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나의 자기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했는데, 그것은 함부로 한 이야기가 아니라, 더 이상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는다는 게 기본적으로 깔리니 가능하다는 말이다.

◈ 주체가 없는데 어떻게 성화론이 !!

이런 관점에서 보면 과연 개인적이 성화론이 있을 수 있는가? 아니 성화의 주체가 쏙 빠지고 없는데, 무슨 성화론이 성립하느냐는 것이다. 그렇지 않는가? 물론 거룩은 있는데, 그러니 이 거룩은 누구의 숙제인가? 성령님의 과제인데, 이런 직책에 부름 받아서 들어온 우리가, 물론 우리는 당연히 죄인인데, 그런데 그러한 우리에게서 거룩함을 드러내어서 주님을 증거하는 것은 성령님의 몫이라는 말이다.

◈ 피가 튀고 죄가 튀면서 !!

그렇다면 성령님께서 어떻게 하시는가? 그 모든 것을 말씀으로 이루시는데, 이 말씀이 우리에게 들어오면 말씀은 일종의 칼이고 송곳과도 같은데, 이것이 우리를 콕콕 찌르면 우리에게서는 피가 튀듯이 죄가 팍팍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젊었을 때는 이런 것은 죄가 아니라고 여겼는데,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말씀을 보면서 "아하, 이렇게 죄가 아니었다고 생각하는 것마저도 죄이로구나"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조금은 여운이 남아있어서, "설마 요것까지는 죄가 아닐 거야.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게 뭐가 그리 죄인가? 인간의 본능인데" 라고 말이다.

◈ '의'와 '거룩'은 성도와 어떤 관계인가?

그런데 성경말씀을 보니, "처나 자식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면 그것도 죄니라" 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것이 절망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을 누가 작업했는고 하니까, 지금 자기가 앉아있는 자리가 스스로 골라서 앉은 것이 아니라, 그것이 주님께서 맡기신 직책이고, 주님을 드러내는데 걸맞는 기능을 발휘하는 자리에 제대로 놓여있다는 것인데, 그걸 성령을 통해서 비로소 확인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관계가 바로 의이고 거룩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이미 거룩됨인데 말이다.

그렇다면 칼빈의 실수가 무엇인가? 사람에게도 착한 것도 있고 악한 것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큰 실수는, 착한 것도 아니고 악한 것도 아니고 중간지점이 있다고 했는데, 과연 그런 것이 있는가? 죄도 아니고 의도 아닌 그것이 모두 다 죄로 드러나면, 그때 칼빈은 뭐라고 변명을 할지 말이다.

◈ 자아성이 없는 악어들 - 엄마, 죄가 뭐야?

어린아이들의 경우에, 그들에게 "너는 죄를 지었어" 라고 하면, 무슨 말인지 알아듣는가? 전혀 무슨 말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이 왜 죄를 모르는고 하니, 아이들은 자아성이 구축되지 않았기에 죄가 없다는 것이다. (죄가 없다고 하면 조금 어폐가 있지만 말이다.) 아무튼 어린아이들은 그러한데, 이것은 중요한 문제인데, 죄라고 하는 것은 자기에게 집착을 하면 할수록 나오게 되어있는데, 무심코 행동하게 되면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 어른 : 너의 행동은 나쁘단 말이야.
* 아이 : 아니, 왜 나쁜데?
* 어른 : 가게에서 돈도 안 주고 빵을 먹으니 나쁘지.
* 아이 : 그것이 왜 나쁜데, 배가 고파서 먹었는데 말이야.

여기서, "먹고싶어서" 라는 것이 먼저인가? 아니면 "내가 먹어야 하겠다" 라는 것이 먼저인가?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사실 여기서 '내가' 라는 것은 없는데, 그냥 문장구조상 버릇처럼 넣어놓았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자기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먹고싶어라, 먹고싶어라, 먹고싶어라" 라고 해서 먹는다는 것이다. 먹고싶으니까, '나' 라고 하는 것을 지나서 바로 빵으로 손이 간다는 말이다.

◈ 어린아이라도 함부로 '쉬'를 하면 !!

'나' 라는 것이 있으면 '먹고싶다' 라고 하는 것을 '나'에게 허락을 받고 하는데, 즉 자기가 자기에게 "내가 돈이 있나, 없나?" 라고 허락을 받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런 '나'가 구축되지 않으니, 먹고싶으면 바로 음식으로 손이 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줌을 누고 싶으면 곧장 고추로 손이 가는데, 남을 의식하지 않고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드디어 때리는 대상이 등장한다는 말이다. 누가 얻어맞는가? 다름 아닌 '내'가 얻어맞게 되는데, 그래서 그때 그때마다 '나'에 대한 책임과 의무감이 '나와' 더불어서 함께 발생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아버지가 아들을 보고 "이놈의 호로 자식아!" 라고 심한 말을 하는 것은, 그에게 책임과 의무감이 상실되었다는 말이다.

◈ 이제 본능과 충동밖에는 !!

좀더 깊이 들어가서, 이것을 상식적으로 이야기하면, "전혀 남을 배려하지 않는다" 라고 하는데, 사실 이것은 남을 배려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자기가 누구인지 관심이 없기에 남을 배려하지 않는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가 없어져버리면, 자기 속에서 본능과 충동밖에 나오지 않으니 말이다. 본능과 충동밖에 말이다.

그래서 잠언서와 히브리서에 보면, 매를 아끼면 자식이 망한다고 말씀하고, 사랑하는 자에게 징계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징계하는 그 이유가, 우리보고 의인이 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너는 죄인이 맞는데, 왜 까불어"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니 죄인이 맞으면 감사해야지 왜 욕심을 부려서, "나는 저것을 가지지 않으면 나는 감사를 못해" 라고 하느냐는 말이다.

◈ 성화론의 허구성 - 결국 자기 의(義) !!

그러니 '성화론의 허구성' 이라는 것은, 결국은 무엇의 문제인고 하니까, 자아가 있는 이상은 진리가 누구하고 결탁을 하는고 하니까, 자아의 의로움, 즉 자기 의와 결탁된 상태에서 나오도록 되어있다는 것이다. '자기 의(義)' 말이다.

여기서 교재를 보자.

** 만약에 언어분석 형식으로도 옳고 그름이 분명해지지 않는다면, 인간들이 소위, '나는 지금 바른 행위를 하고 있고 바르게 살고 있다'를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어디에서 얻을 수 있겠는가? 도대체 무슨 근거로 '나는 이 말씀에 순종하고 있다'고 객관적으로 그 진리성을 제시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과연 "나는 지금 바른 행위를 하고 있고 바르게 살고 있다" 라는 것을 주장할 수 있는, 그 근거는 도대체 무엇인가? 보통 사람들은 그러한 자기의 올바른 행동의 근거를 어디에서 찾는가? 방금 한 강의내용에서 그 정답은 이미 나왔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나는 의롭다" 라고 하는 본능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자기는 의롭다는 말이다.

◈ 아, 그놈의 바른생활 !!

그런데 그것은 너무 노골적이니까 숨겨놓고는, 남을 속일 수 있는 핑계를 대는데, "다른 사람이 하니 나도 했다", 혹은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가르쳐주었다", 혹은 "교회에서 그렇게 가르쳐주었다", 좀 더 고상하게 말하자면 "성경에서 그렇게 말씀하던데" 라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 어디에 자기가 잘았다고 하는 말씀이 있는가?

얼마 전에 출판된 '질문과 답변' 이란 책에도 나오지만, "아니, 성경에서 전도하라고 해서 전도했는데,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라는 것이다. 교회 바깥에서 하는 소위 노방전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면, 결국 마지막에 하는 말이 "나는 성경대로 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인가?" 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태도가 무엇을 숨기는고 하니, '나' 라고 하는 것이 불편하다는 말이다.

◈ 크리스테바 - 주체는 텍스트에서 폭발한다 !!

여기에서 라캉 이야기를 좀 해야 되겠는데, 먼저 여성 철학자이고 신학자인 크리스테바의 이야기를 해보면, 그녀가 무슨 주장을 했는고 하니, "주체는 텍스트에서 폭발한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자기가 누구인고 하는 것은 자기 변명거리를 찾을 때는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다" 라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그러나 그런 변명거리가 없을 때에는 그만 입을 다물고 만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형사가 "니가 이 양반에게 뇌물을 주었지?" 라고 다그치면, "아닙니다. 그냥 빌려주었습니다" 라고 대답해야 하는데, 차마 그 말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는데, 그런데 옆에서 누군가가 "아닙니다. 빌려준 것입니다" 라고 하니, 그래서 자기도 그 말을 따라서 "그건 빌려준 것입니다" 라고 대답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텍스트가 있을 때 그 텍스트를 통해서 의미가 정당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로마서 7장에 나오는데, "탐내지 마라" 라는 율법을 듣는 순간, 갑자기 우리는 "아, 탐을 내고 싶다" 라고 하는 동시에 "나는 탐을 내지 않았다" 라는 것이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즉 성경이란 텍스트가 들어오게 되면, 그 다음부터 "죄는 나와 상관이 없고, 나는 그것을 지켰다" 라고 하는 변명조로 나온다는 말이다. 그러니 나쁜 것은 외곽에 있고, 자기는 의롭다는 것인데, 그렇게 갈라지도록 되어있다는 것이다.

(롬 7: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 인간에 대해서 살펴보면 !!

왜 그런가? 이것을 학자들이 어떻게 밝히는고 하니, 사람의 경우에 24개월까지 자아는 없는데, 그런데 거울을 보게 되면, 이것을 '상상계' 라고 하는데, 그 맞은편(?)에 있는 것이 바로 '실재계' 이고 말이다. 이 실재계에는 자아가 없는데, 엄마와 한 몸이 되어서 엄마 인생이 자기 인생을 대신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살다가 거울을 보는데, 그런데 거울이 깨진다든지 하면 거울 밖에 있는 자기가 그만 분리된다는 것을 안다는 말이다.

◈ 라캉의 상상계와 실재계 !!

바로 여기 상상계에서 자아가 발생하는데, 그런데 이 상상계는 분리가 되어있으니, 자기는 뭔가 정립이 되어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정립할 건더기가 없다는 것이다. 즉 거울에 있는 것과 지금의 자기와 그 모습은 같지만, 그러나 떨어져 있으니 나름대로 뭔가를 갖추어야 한다고 여기는데, 그때에 부모가 간섭을 한다는 것이다. "해 - 안 해 - 해 - 안 해 - 해 - 안 해" 라고 말이다. 이렇게 되면 부모의 언어가 나오는데, 그래서 라캉은 "인간의 자아는 언어처럼 구조화되었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 양심도 가정교육에 따라서 달라 !!

하지만 언어는 그렇게 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 언어는 반드시 명령으로 인해서 나오는데, 명령은 곧 법인데, 그러니 인간 속에는 법이 있고, 이 법이 곧 양심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양심은 동일한 것이 아니라 가정교육에 따라서 모두 다른데, 똑같은 양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살아온 각자의 환경에 따라서 양심이 다들 다르다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언어가 법적으로 명령으로 인해 구조화되어있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특히 이 자아는 일종의 벽돌로 되어있는데, 갖가지 규칙과 세칙으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면 안 돼, 이것도 안 돼" 라는 식으로 말이다.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라는 것은 누가 이야기를 한 것인가? 그것은 부모가 해준 것인데, 그것은 부모의 자아성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부모의 자아라는 것은, 부모의 법적인 양심, 혹은 체제라는 것이다.

◈ 부모의 양심체제가 쌓이고 쌓여서 !!

그렇게 되면 부모의 양심체제가 이렇게 자꾸만 쌓이는데, 그런데 여기에, 조금 전에 말한 실재계에서 올라온 인간의 욕망이 있는데, 쉽게 말해서 동물적인 욕망인데, 그 동물적인 욕망을 겨냥해서 명령을 한다는 것이다. "야, 여기서 오줌을 싸면 안 돼. 저기 화장실에 가" 라고 하는데, 이렇게 오줌을 누고 싶은 것은 동물적 욕망이고, 그런데 회장실에 가서 누는 것은 그 집안의 규칙이라는 것이다.

◈ 부모의 역할 - 너는 의인이야 !!

그래서 자기는 그때부터 화장실에서 오줌을 누는데, 그런데 어린이집에 가보니 다른 아이들은 그런 것을 가르쳐 줄 부모가 없어서 돌아다니면서 오줌을 질질 싸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아이 부모에 의하면, 이제는 자기의 지식이 되었는데, "저것은 매를 맞아야 될 나쁜 짓이다" 라는 말이다. 그것은 그렇게 나쁜 짓이 되고, 이렇게 나쁘다고 하는 것은 악이 있다는 말이고, 그 악의 반대편에는 의(義)가 있는데, 자기는 바로 의인이 된다는 것이다.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이러한 교육은 부모가 시킬 수 있는데, 선과 악을 구분하는 말이다.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하면 인간이 아니니 정신병원에다 집어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구분할 줄 알아도 인간이 아니기는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아니,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해서야 어떻게 사회생활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본능대로 움직이면 사회가 난리 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규칙적인 것이 자꾸만 쌓이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상징계' 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계속해서 쌓인 규칙을, 즉 복잡한 법을 그대로 두면 자아는 자꾸만 불안해하는데, 그래서 법을 단순화시키면 시킬수록 자아는 안정감을 찾는다는 말이다.

◈ 짝짓기는 왜 하는가?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인 챨스 도킨스 같은 생물학자가 주장하기를, 사람이 왜 짝짓기를 하는고 하니, 물론 동물의 경우에도 역시나 마찬가지인데, DNA가 불안감을 조성해서 그렇다고 하는데, 즉 제때에 제대로 짝짓기를 하지 않으면 왠지 불안해하고 안정감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안정감이 없어지는가? 거기에 대한 해답은 생물학자들의 몫이 아니고, 인간 의식의 문제로서 철학자들에게로 그 역할을 돌린다는 말이다.

그런데 안정감을 가지려면 복잡하면 안정감이 없어서 안 되는데, 다섯은 불안하고, 넷이나 셋도 줄여야하고, 둘은 싸워서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하나가 될 때 가장 안정한데, 결국 인간의 모든 것은 절대신으로 향하는데, 그 절대신으로부터 인정을 받을 때 안정감을 얻고, 그래서 법적인 체제는 신의 계시로 간주한다는 말이다.

◈ 말씀이 오기 전까지 인간은 의인행세를 !!

이 뒷부분은 이번 우리교회 여름수련회에서 강의했는데, 즉 외부에서 누가 침투하기 전까지는 자기가 신이 되는데, 로마서 8장 11절에서 "죽은 너희를 다시 살리신다" 라고 했고,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는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이 땅에 왔다" 라고 할 때, 그런 소리를 들어야 비로소 "아하, 내가 죄가 있는 육신이구나" 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이전까지는, 계속해서 자기는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라고 여긴다는 말이다.

(롬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신인데, 이러한 신을 두고서 '실재계'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처음에도 실재계이고, 나중에 절대신이 될 때도 실재계인데, 그런데 자기가 신이 되려고 할 때 항상 새로운 변화가 오게 되면 신이 되려고 하다가 멀어지고, 또 그렇게 멀어지는데, 왜냐하면 자꾸만 죄를 지으니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뭔 말인지??)

예를 들어서, 친구를 위해서 자기 신장을 떼어주었다면, 주위로부터 "야, 그런 일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데,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데, 정말 참으로 대단해" 라는 소리를 듣는다면, 자기는 친구를 위해서 신장을 떼서 내어준, 그런 절대자와 같은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직장동료가 제발 자기 빚보증을 좀 써 달라고 부탁을 하는데, 그러나 그것은 마누라 등살에 도저히 들어주지를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절대자에서 갑자기 멀어지게 되는데, 그것이 곧 '실재계' 라는 말이다.

◈ 정신병은 왜 생기는가?

그래서 라캉은 말하기를, 상징계는 항상 실재계를 앞서는데 갈등이 생기고 미흡함이 생기는데, 그것이 바로 정신병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스트레스도 거기에서 받고 말이다. 그러니 결국은 인간은 자아가 있으면, 이 자아는 하이데거의 주장처럼 불안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항상 들쭉날쭉하고 안정감이 없다는 말이다.

◈ 이가 빠진 동그라미, 그러나 !!

물론 짝짓기를, 결혼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지만, 하지만 결혼을 해도 그 안정감이 6개월 정도가면 많이 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6개월마다 마누라를 바꾸면 몰라도 말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짐이 되어서 "내 인생 돌리도" 라고 하면서 이혼소송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옛날에는 이혼도 하지 않고 어떻게 잘 살았는가? 과거에는 법이 아니라 밥먹고 살아야 한다는 욕망이 더 우세했기 때문에, 이혼을 해버리면 특히 여자는 갈 곳도 없고, 그만 살아갈 길이 막막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억지로 참고 살았다는 말이다.

지금 미국의 연예인들이 하는 행태를 보면, 마치 이혼을 하기 위해서 결혼을 하는 것 같다는 말이다. 물론 양쪽이 모두 돈이 있으니, 자기들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서 잠시 붙었다가 헤어지고 하는데, 그리고는 또 짝짓기를 하기 위해서 헤매고 말이다. 마치 한편의 '동물의 왕국'을 보는 것 같지 않은가?

그래서 캐나다의 경우에는 동거하는 비율이 이미 결혼비율을 넘어섰다고들 하는데, 아이는 입양하고 말이다. 물론 아이를 낳을 수는 있겠지만 결혼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미리 불안감을 해소하는 차원에서 짝짓기는 하겠지만, 그러나 골치 아픈 일은 만들지 않겠다는 말이다.

◈ 인간은, 신으로부터 자기 행동의 정당성을 !!

그러니 결국은 인간은 "내가 바른 행동을 하고 있다, 아니다" 라는 근거를 어디에서 찾는고 하니까, 그것을 실재계에서 얻는데, 즉 신으로부터 얻는다는 것이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하나님에게서, 그리고 절에 다니는 사람들은 부처에게서 말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자연과 전통에서도 얻고 말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다 자기 변명에 불과한데, 그렇게 자기 정당성을 찾고자 하는 자체가 십자가를 모독하는 것이니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언어 배후에는 선입견이 자리 잡고 있고, 그 선입견 배후에는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고, 과시하고 그 존재의 정당함에 가치를 두고, 그것으로 자신의 의로움과 윤리성을 자랑하고 싶은 욕망이 자리잡고 있다. 언어란 바로 겹겹이 접혀있는 이런 욕망이 내부적으로 편집되고 타협되고, 조심스럽게 조립되고, 그래서 정돈되어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내가 살아있으니 나는 기어이 살아남아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옳고, 정당하고, 마땅하다'라는 욕망의 목소리인 것이다.

이렇게 무조건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 바로 DNA가 외치는 욕망의 목소리인데, 아무튼 이 DNA는 무조건 번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즉 무조건으로 옳을 수밖에 없는 나의 존재는 그 자체로서 이 세상에 모든 것을 판단하고, 분석하고 심판하고 규정짓는 당연한 자격자가 된다는 말이 된다.

◈ 칸트의 반성주의 !!

무조건 옳을 수밖에 없는 '나'의 존재, 그것으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판단하고, 물론 자기도 판단하고 말이다. 이것이 바로 칸트의 '반성주의' 인데, 인간이 이렇게 반성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하냐는 것이다. 반성한다 것 자체가 말이다.

◈ 회개란, 더 이상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는 능력 !!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 라는 것은, 반성하고는 전혀 다른 것으로서, 이 회개는 더 이상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는 능력을 말하는데, 즉 '나' 자체를 건드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철학이나 불교에서는, '나'만 쏙 빼놓고 다른 것을 다 건드린다는 말이다. 자기만 빼고 다 말이다.

그러니 말씀을 아는 목사라면, 설교할 때 교인들을 건드려야 하는가? 아니면 먼저 자기 자신을 건드려야 하는가? 그냥 "저는 죄입니다" 라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라, 평소에 자기를 건드리는 성경해석과 건드리지 않을 때의 성경해석이 어떻게 다른지, 그것을 이야기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내가 판단하기에 나의 판단은 옳을 수밖에 없으며, 만약 나의 판단이 틀리고, 옳지 않고, 죄악 된 것이라면, 그런 잘못을 외부에서 제대로 지적해주는 판단자가 과연 나밖에 따로 있음의 여부를 수용을 위해 판단에 필요해서 발휘되는 사전의 나의 판단력 자체는 늘 옳을 수밖에 없는 법이란 것이다.

◈ 나는 언제나 옳아 = 나는 죽기 싫어 !!

이렇게 인간에게 있어서, 자기의 판단은 항상 옳을 수밖에는 없는데, 그것은 옳기 때문에 옳은 것이 아니라, '나' 라는 존재를 부정할 수 없음을 이렇게 언제나 옳다는 쪽으로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즉 "나는 죽기 싫어" 라는 것을, "나는 옳아"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자기' 라는 존재 자체가 이미 옳다는 것을 바탕으로 장만하고 있다는 것이다.

◈ 하이데거의 딜레마 - 이렇게 옳은데 왜 죽는가?

하지만 그의 딜레마가 무엇인고 하니, 이렇게 옳은데, 즉 자기가 존재한다는 것이 타당한데, "그런데 왜 죽는가?" 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이데거의 딜레마는 "이렇게 옳은데, 도대체 어느 놈이 죽이는가?" 라는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옳은데, 왜 죽이느냐는 말이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왜?' 라는 말을 하지 못하는데, 그래서 그냥 "죽는 것만 알자" 라고 하는 것이다. 왜 죽이는지를 따지게 되면, 그것이 성경에 나오는데, 물론 그것을 하이데거도 말이고 말이다. 로마서 6장에 의하면, 인간은 죄 값으로 말미암아서 죽는다는 것이다.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우리는 여기에서, 성도는 죄의 값으로 죽는다고 하지 말고, 십자가를 보여주는 기능 때문에 죽는다고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경우에 이렇게 되면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자는 것이고, 곧 '자기를 위해서' 산다는 것 자체가 죄가 되고, 철학자체가 붕괴되기 때문에 엄청 곤란해진다는 것이다.

◈ '왜' 라는 질문은 하지 말자 !!

그래서 하이데거에 의하면, "존재는 결국 죽는다. 하지만 '왜' 라는 질문은 하지 말자. 존재는 무조건 죽는데, 이것만이 실제이니 나머지는 침묵하자. 왜 죽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죽는 것은 분명하고, 그러니 죽기 전에 올바르게 살자" 라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여러분 생각은 어때요? 아니, '왜' 라는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러한 상태에서 바르게 산다고 하는 것이 과연 진리가 되느냐는 말이다. 이 '왜' 라는 것을 물어야만 진리가 나오는데, 그것도 모른다고 하면서 바르게 살자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것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사람은 자기를 감당하지 못하는데, "나는 왜 이렇게 얼굴이 못생겼을까?" 라는 것을 한번 생각해보면, 이것을 달리 생각해보면,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생겨야 하는가? 배용준처럼 생겨야 하는가?" 라는 것이다. 혹시 '목 없는 미녀'를 아세요? 그렇게 생겨먹어야 하는 것인가?

◈ 우리 인생의 유일한 딜레마는?

잘 생기기든 못생기든 아무튼 그렇게 생겼으니 자아가 그것을 감당해야하는데, 그런데 왜 생겼는지를 모르면서도 감당은 감당대로 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의 유일한 딜레마가 아닌가? 부모님이 왜 일찍 돌아가셨는지는 자기는 모르지만, 그러나 감당은 자기가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이유도 전혀 모르면서 숙제만 그냥 받은 상태와 같은데, 하지만 예수님은 어떠한가? 예수님은 그 이유를 아는데,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왔다는 것을 아는데, 하지만 예수님 말고 다른 사람들은 그냥 자기 몸통을 들고 무거운 대가리를 붙여서 돌아다녀야 한다는 것이다.

(요 4: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왜 이런 머리가 붙어있고 몸이 있는지를 모르면서 감당해야 한다는 말이다. 하루에 끼니를 세끼씩 꼬박 챙겨서 먹여주어야 하지, 약도 먹여주어야 하지, 제 같은 경우에 알레르기 때문에 가을에는 약인지 밥인지 모르고 먹어야 할 정도인데, 아무튼 간에 감당을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 왜 그렇게 아둥바둥 살아야 하는가?

안산에 같이 성경공부를 하는 분이 있는데, 그분 남편의 경우에, 아침 6시 반에 출근해서 새벽 1시에 퇴근을 한다는 것이다. 아직은 젊어서 견디는데, 그리고 경쟁 때문에 말이다. 저쪽 경쟁업체에서 마구 돌리면 어쩔 수 없이 같이 맞장구를 쳐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점이나 호프집을 하는 경우에도, 상대방이 새벽 1시까지 영업을 하면 일찍 문을 닫을 수가 없는데, 제 아무리 잠이 와도 다같이 열어놓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굳이 왜 그렇게 까지 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부조리인데, 그래서 철학자들이 많이 자살을 하곤 하는데, 왜 이렇게까지 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왜 그렇게 까지 경쟁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도저히 이유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목사들은 얼마나 편한지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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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