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리고 전쟁 후(後)
28 여리고 전쟁 후(後)약속의 땅은 거룩이 유지되는 땅입니다. 이 거룩을 위해 가나안 족속을 몰아내어야 합니다. 거룩한 전쟁은 육의 전쟁이 아니라 영의 전쟁이기에 힘과 사람의 능력이나 칼 솜씨 또는 창과 방패의 재주로 하는 전쟁이 아닙니다. 거룩은 세상과 단절된 것입니다. 죄란 하나님과 단절이듯 거룩은 세상과의 죄와의 단절입니다. 분리입니다. 구분입니다. 갈라짐. 헤어짐입니다.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칼을 들고 여호수아의 무리를 가로막음은 바로 이스라엘이 거룩한 전쟁을 할 자들임을 보여줍니다. 천국 차지함이 목적이 아니라, 아들의 나라에 도전하는 악한 권세와 싸우는 자로써 세움을 받은 겁니다. 나를 위해 천국(주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천국(주님)을 위해 내가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아들의 나라를 위해 얼마든지 죽어도 상관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천국의 주인(예수님)되신 분이 죽어도 다시 살아났기에,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겁니다. 그런자는 예수님으로 인해 실족치 않는 자이고, 복있는 자입니다. 죽어도 상관 없는 다시 사는 자, 악이 안 먹혀 드는자(선악과의 사고방식), 율법의 정죄가 먹혀들지 않는자, 죽음의 권세가 전혀 먹혀들지 않는자,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자, 생명책에 기록된 자, 그리스도의 피가 발리움 받은 구분된 자입니다. 오뚝이 인지 아닌지를 철저하게 가려내겠다는 겁니다.(마 11:6)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눅 7:23)예수님으로 인해 넘어지는 자인지, 낙심하는 자인지, 절망하는 자인지 그 가려내는 것은 바로 붙이시매의 전쟁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과연 예수님으로 인해 실족하는 자인지 아닌지를 아는 유일한 길은 바로 거룩한 전쟁의 참여냐 아니면 거부냐로 드러납니다. 광야교회에서 일관되게 인도하시는 주님의 인도는 낮추심이 목적입니다. 그 낮추심이 얼마나 지독한 사랑이면 주님을 사랑하는 것 외에는 다 원수 삼기 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으로 인해 실족하게 됩니다. 질투의 하나님을 뼈저리게 느끼도록 합니다. 나 외에는 다른 것을 사랑하지 말라는 겁니다. 여호와를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우리를 물 없는 곳으로 양식 없는 곳으로 인도하심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사랑을 거부하고 낮추심을 거부하는 자는 반대로 미움의 심판의 대상인 겁니다.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신4:29/6:5/10:12/11:13/13:3/26:16/30:2) (신 10:19)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고전 16: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A : 자 그럼 가나안 땅의 족속들은 이웃입니까? 나그네입니까?1번) 이웃이다 2번) 이웃 아니다 3번) 이웃 일수도 아닐 수도 있다. 4번) 잘 모르겠다B : 저요 저요 저요 정답 2번 ... 아니 3번 인것도 같구A : 에이 그럼 답은 4번이네. 잘 모르겠다 이네요B : ㅎㅎㅎ 그렇네요A : 그럼 더 중요한 문제. 그럼 가나안을 치러가는 이스라엘은 이웃입니까 아닙니까?1번) 이웃이다 2번) 이웃 아니다 3번) 이웃 일수도 아닐 수도 있다. 4번) 잘 모르겠다B : 정답 1번 ... 아닌감? 3번 인것도 같구 ... A : 그럼 또 4번이네사랑과 이웃은 우리가 결정하는 사항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웃이라는 자체가 벌써 우리가 자기 쪽에서 사랑이 가능하다고 착각하는데서 오해가 있는 겁니다. 사랑은 오직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에게 있습니다. 사랑할 권리도 미워할 권리도 내겐 권리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이 기준이기에 이 기준에서 자기 기준을 더하거나 빼버리면 원수와 다를 바 없는 겁니다. 내 사랑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겁니다. 그 사랑이 어떻게 증거 되는가? 그 사랑이 어떻게 이웃에게 확산 되는가를 봐야 합니다. 바로 죄와 전쟁을 벌림을 통해 확산 됩니다.(창 3:15)지금 여리고성을 치러가는 이스라엘에게 여호와께서는 여리고성을 하루에 한 바퀴씩 6일 동안 돌라고 명령하십니다. (수 6:2-5) 『그때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여리고성과 그 왕과 모든 군인들을 이미 네 손에 넘겨 주었다.』(붙이시매 전쟁)『너와 너의 모든 군대는 여리고성 주위를 6일 동안 매일 한 바퀴씩 돌아라.』『제사장 7명이 각자 수양의 뿔로 만든 나팔을 들고 법궤 앞에서 돌게 하고 7일째 되는 날에는 제사장들이 나팔을 부는 가운데 너희가 그 성을 일곱 바퀴 돌아야 한다.』『제사장들이 나팔을 한 번 길게 불면 모든 백성이 큰 소리로 외치게 하라. 그러면 그 성벽이 무너질 것이다. 그때 너희 모든 군대는 곧장 성 안으로 쳐들어가야 한다.'』(현대인의 성경)(수 6:15-21) 『7일째 되는 날에 그들은 새벽 일찍 일어나 전과 같은 방법으로 성을 일곱 바퀴 돌았는데 그들이 성을 일곱 바퀴 돈 것은 이 날밖에 없었다.』『일곱 바퀴째에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제사장들이 나팔을 부는 순간 외치라는 명령과 함께 다음과 같은 세부 사항을 지시하였다. `여호와께서 이 성을 여러분에게 주셨습니다.』『이 성과 성 안의 모든 물건은 여호와께 바치는 제물로 여겨 완전히 부숴 버리고 사람은 모조리 죽이십시오. 그러나 기생 라합과 그 집 안에 있는 사람들만은 살려 주어야 합니다. 그녀는 우리 정찰병들을 숨겨 주었습니다.』『여러분이 전리품을 가질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이미 여호와께 바쳐진 것이므로 모두 소멸해 버려야 합니다. 여호와께 바쳐진 것이 무엇이든지 여러분이 그것을 가지면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재앙이 내릴 것입니다.』『그러나 금, 은, 동, 철로 만든 제품은 모두 구별하여 여호와의 창고에 들여놓으십시오.'』『그래서 백성들은 제사장들이 부는 나팔 소리를 듣고 일제히 큰 소리로 외쳤다. 그때 갑자기 성벽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러자 백성들은 일제히 성으로 진격하여 그 성을 점령하고』『남자 여자 어른 아이 가리지 않고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칼로 쳐서 죽이고 또 소나 양이나 나귀와 같은 가축도 모조리 죽여 버렸다.』(현대인의 성경)자 이 장면이 어떻게 이해가 됩니까? 희안한 전쟁 아닙니까? 어떻게 성이 무너질 수 있는 겁니까? 큰 소리 친다고 무너질 성이면 애초부터 짖지 않았을 것 아닙니까? 또 이런 전략이 오늘날 군사 계획 전략 교본으로 차용 될 수 있습니까? 없지요. 그런데 무너졌습니다. 하루에 한 바퀴씩 6일 동안 돌고, 7일째는 7바퀴식 돈 후에 큰 소리로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었을 뿐인데 그 튼튼한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 칼 하나 대지 않고 어떻게 여리고 성이 무너질수 있는 겁니까? 인간의 어떤 전쟁 이야기 속에도 이런 전쟁 이야기는 없습니다. 인간의 전쟁 이야기 속에는 항상 영웅담이 그 속에 있기 마련인데 여리고 전쟁은 전혀 그런 영웅담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영웅 하나 등장 하지 않는 이상한 전쟁. 이런 비정상적인 전쟁 모습이 인간의 어떤 전략 전술가들에게서는 전혀 웃끼는 이야기입니다. 한치 오차가 없는 현대 전쟁의 전술에는 전혀 도움이 안되는 이야기이지요. 오히려 정상적으로 전쟁했다고 보여지는 아이성 전쟁은 승리하기는커녕 실패를 하고 맙니다. 법궤를 앞장 세우며 성을 돌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사장 일곱이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부는 것은 희년을 선포하는 겁니다.(레 25:8-54) (눅 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눅 4: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즉 희년은 죄에서 자유케 되는 날입니다. 법궤를 앞장 세우고 성을 돌게 하시는 것은 바로 거룩한 전쟁이란 육의 싸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와 사우는 거룩한 전쟁이다는 겁니다. 죄란 하나님과 단절된 것을 말합니다. 반대로 거룩은 세상과 죄와 단절된 것을 말하는 구분 구별됨 입니다. 즉 법궤 안에 3가지 물건,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한 증거 물증(히9:4)인 돌판(신 10:1-5), 만나(출 16:32-33), 아론의 싹난 지팡이(민17:10). 이 증거로 통해 자신의 죄인임을 고백하며 회개하며 도는 것이 여리고 성입니다. [ 나는 이렇게 하나님을 광야에서 원망했습니다 그 증거가 법궤 안에 있습니다. 그렇게 원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악한 죄를 지엇슴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용서를 하셨습니다. 법궤 뚜껑에 뿌려진 그 피로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내 죄가 씻겨 졌습니다. 먹보다도 더 검은 나의 죄가 어린양의 보혈로 깨끗하게 씻어졌습니다. 이젠 죄에서 자유케 하시는 주님의 용서를 찬양 합니다. 뿌뿌 뿌뿌]이 언약의 사랑을 확산 시키는 것이 바로 여리고 전쟁이요, 거룩한 전쟁, 붙이시매 전쟁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오로지 요나의 기적 뿐입니다. 이 사랑에 거부하는 것은 곧 미움이 되는 겁니다. 심판의 대상인 겁니다. 그렇기에 이스라엘 조차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겁니다. 여리고 전쟁의 승리 뒤에 유다 지파 내에서 아간이 탐심으로 여리고 전리품을 땅에 숨김으로 말미암아 또 거룩이 사랑이 위협을 도전을 받습니다. 그래서 충분한 숫자의 군사로도 아이성을 이기지 못하는 원인이 되는 겁니다. 그 원인을 희안하게 전술에서 찾지 않고, 비언약 정신, 비거룩 정신, 불순종 정신, 비사랑 정신을 가려냄으로(마치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칼을 들고 가로막아 가려내듯) 아이성 전쟁의 실패를 아간의 범죄로 인한 것임을 알게 하십니다.이 비거룩을 완전히 철저하게 제거한 후에(수 7장/ 여호와의 분노 26절) 다시 아이성 처들어 갑니다. 첫 번째 실패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작전이 너무 치밀합니다. 이런 치밀한 전략을 애초부터 안알려 주시고 왜 아이성 첫 번째 전쟁 실패 후에 두 번째 공략에서 알려 주십니까? 결국 순종하냐를 보시는 겁니다. 애초부터 주시고자 했던 승리입니다.(기독교란 주시는 겁니다. 받기만 하면 됩니다-성화론자 제일 싫어하는 말) 광야의 낮추심의 목적과 같습니다. 그래야 사랑을 자기에게서 안 찾고 주님에게서 찾는 겁니다. 그저 이러한 죄의 심각성 때문에 통회하고 자복하는 상한 심령만이 주님의 지혜를 알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겁니다. 사랑은 나에게 없습니다. 오직 주님에게 있습니다 그 주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요나의 표적 뿐입니다. 바리세인은 요나의 기적을 싫어합니다. 다른 사랑 달라고 합니다.(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자 그럼 누가 이웃입니까? 누가 이웃이 아닙니까? 이웃이 있다면 이웃이 아닌자도 있다는 겁니다. 사랑이 있다면 미움이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이웃으로 보십니까? 무엇을 미움으로 진노로 보십니까? 여호와의 진노가 아간의 범죄로 극렬하게 작용하는 것은 죄를 철저하게 가려낸다는 어떠한 인간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언약의 정신 사랑의 정신은 확산 된다는 비거룩 제거 작업인 겁니다. 여호와의 진노와 아이성 재함락 이후 여호수아는 요단강에서 채취한 돌을 에발산에 단을 쌓음으로 인해 모세에게 명한대로 이루어 집니다.(신 27장/4절) 즉, 축복산인 그리심 산에 돌을 쌓지 않고 저주산인 에발산에 쌓는 이유는 율법의 저주로부터 해방 시키기 위함입니다. 죄 값을 대신 치러 주심으로 인해 율법의 저주에서 자유케 하신 겁니다. 이 요나의 기적 정신에 참여케 하는 것이 여호와의 전쟁의 목적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의 확대 그리고 동참. 이것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요 생명의 길이요, 영생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사랑은 바로 여호와의 이름이 함께 하심으로 찾아와 주심으로 낮아지심으로만 이루어집니다. 죽음의 권세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가 없는 자들에게, 저주 받은 자들에게 찾아오심으로 인해 세상과 단절, 죄와의 단절, 죽음과의 단절을 위해 직접 죽음으로 저주 속으로 뛰어 듬으로 인해(십자가의 저주) 마치 언약궤가 요단 강속으로 들어옴으로 인해 강이 죽음이 끊어지는 것처럼 철저하게 비거룩, 죄를 심판 하심을 통해 희년을 선포, 사랑의 확대로 인해 언약을 주의 이름 홀로 성취하신다는 겁니다. 십자가의 피만이 참사랑이요 참 이웃입니다.주님 ! 주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저도 싫어하게 주님의 마음과 일치하도록 해주소서. 주님이 가신 그 길에 저도 가도록 하시고, 주님이 다신 사신 그 부활에 저도 부활 되게 하소서. 이제 나를 위하여 살지 않고 주를 위하여 살도록 우리 발걸음을 돌이키토록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