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 9월 14일 강의
안산 9월 14일 강의
이름 : 우리교회(IP:124.59.87.70)
안산070914고린도후서5장13절‘en Cristo’/이근호 목사
강의 시작합시다. 오늘은 고린도후서 5장13절부터 봅시다. 고린도후서 5장13절 시작하기 전에 지난 시간에 한 거 한번 정리해보면, 고린도후서 5장10절에 보면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개역한글』 이래 돼 있죠?
신앙생활과 평소의 생활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평소의 생활은 현재에서 미래로 밀어내는 생활을 합니다. 신앙생활이라 하는 것은 미래에 두 발을 딛고 거꾸로 현재를 내려다보는 생활을 합니다. 완전히 다르지요? 현재를 산 밑으로 보고 미래를 산 정상으로 본다면 보통 사람은 미래를 위하여 열심히 일하는 게 되죠?
오늘을 열심히 일해야 그것이 축적되어서 내일 행복한 미래가 보장된다, 산 밑에서 올라가는, 내일을 향하여 진격하는 생활이라면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이미 미래에 뭘 다 아는 미래의 입장에 있을 때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소급해서 살죠. 되돌아오는 거예요. 미래에 만약 나이 80이라 합시다. 아니면 90. 내일 모레 다 산다고 생각하면 오늘 2007년도9월 달을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겁니다.
돈? 명예? 권세? 낼 모레 죽을 사람이 그런 신경을 왜 쓰겠어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지금 내가 소원이 하나 있는데 뭐냐,「이 몸을 떠나서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지금 사도바울은 가고 싶어서 들썩들썩하는데요, 보통 사람들은 아름다운 내일을 위하여 열심히 살고자, 현재에서 내일로 밀어붙이는 삶을 사는 반면에 사도바울은 미래에 대해서 훤하게 알고 그 현재에서 미래에 대해 어떻게 처신해야 되는가를 생각하면서 사니까 고린도후서5장13절에 ‘미쳤다’ 했습니다.
시대를 초월하고 시간을 초월하니까 미쳐서 한 그룹 사도바울과 돌아다니는 그 인간들을 미쳤다고 했어요. 나중에 고린도후서에 나옵니다만, 이단이라는 소리 들었습니다. 미쳤다고 하니까, 고린도후서5장13절에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14우리가 미쳤어도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성경을 해석할 때 잊지 말아야 될 것은, 하나님의 개입을 가지고 성경을 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개입. 내가 갖고 있는 것을 없애버리고 하나님이 내 속에 무엇을 퍼부어 주시는가, 그런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해버리면 성경해석이 됩니다. 주님의 사랑이 폭포수처럼 나를 뒤집어씌웁니다. 여름에 등물하면 시원하잖아요. 어릴 때 많이 해봤거든요. 등에 물을 확 부어버리면 시원하지요?
사도바울은 사람들과 정치적으로 어떻게 잘 놀아볼까 그런 거에는 관심 없고 사람의 개입이 아니라 하나님의 개입을 우선시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퍼부은다 이 말이죠. ‘그래, 미쳤다 미쳤는데, 주님의 사랑에 의해서 내가 미쳤다’ 하나님의 사랑이 개입해버리죠. 하나님의 사랑이 개입해버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그 다음 15절부터 보면 이런 이야기 나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나에게 강권하게 되면 이제부터 ‘나를 위한 삶은 없다.’ 나를 위해 사는 삶이라는 것은 없다 이 말입니다. 보통 목사들 모임이나 교인들 모일 때, “목사님, 그래하시면 안 됩니다.” “왜요?” “그렇게 하시면 목사님한테 손해가 될 텐데요?” 사람이 누구를 평가할 때 자기 입장에서 ‘저 사람도 나와 똑같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해서 조언도 하고 위로도 하고 안타깝게도 여기고 하는 거예요.
그러나 사도바울은, 사도바울에게 우리가 조언을 하려면 사도바울과 똑같은 사고방식을 가져야 조언이 됩니다. 사도바울은 이제는 나를 위한 삶은 없다, 이러는 겁니다. 여기 나옵니다. 읽어봅시다. 같이 읽어볼까요? 『15절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
여기서 보면,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이게 자본주의 사회에서 ‘미쳤다’는 소리 들을만해요. 이게. 내 조카가 목사다. 내 외삼촌이 목사다. 얘기해보세요. ‘요새 교회 잘 됩니까?’ 이거 뉘앙스가 주의 일을 한다 해놓고 따지고 보면 ‘자기 위함’을 포기를 안 해요. 어떤 경우라도. “에구, 집사님 절에 다니다가 교회 가시니까 어떻습니까?” “아이고, 교회에 오니까 하는 일도 잘 되고 그렇습니다.
교회 다니는 목적이, ‘자기를 위하여’를 빼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평소에도 날 위해 살았는데 교회 다녀서 나를 위해 사는 삶을 더욱 더 확고히 하기 위해서 교회 다니는 것밖에 안돼요. 이런 사람들에게 간증하라 하면 가만히 들어보면 ‘주를 위해 삽시다’ ‘하나님을 위해 삽시다’ 끝에 보면 결국은 ‘우리 잘됩시다.’예요. 이걸 철학에서는 ‘실용주의’라고 합니다.
진리라는 것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나에게 이익이 오면 그건 진리고, 나에게 손실이 오면 그건 진리가 아니다 합니다. 현대철학에서 이미 다 규명해 냈습니다. 심지어 교회 하는 목사 그 자체도 해체해버리면 덩치 큰 나만 남아요. 나를 위해서 이 교회가 잘 돼야 합니다. 저 사람이 우리 교회에 와야 되는 것은 그만큼 내 교회 헌금이 늘어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항상 성경을 해석할 때 나를 포기하게 한 해석이 아니고, -다시 해봅시다.- 하나님의 개입이 도화지 같은 나에게 詩처럼 새겨지는 것이 뜻이 아니라 나를 위해 하나님이 무엇을 도와줄 거요? 라는 식으로 성경해석을 하게 되면, 그렇게 성경해석을 했더니 납득이 된다. 이랬다면 아, 그 교회 문제 있습니다.(그 목사의 잘못은 간단하다-녹취자)
은혜받기는 받았는데 그 은혜 받았다는 사람하고 고린도후서5장15절에 나오는 사도바울과 의사소통이 안 돼요. 의사소통이 되지를 않아요. 지금 우리가 이 성경말씀을 제대로 해석하려면 기본적으로 사도바울과 똑같은 사고방식을 가져야 사도바울과 의사소통이 가능합니다.(아멘)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쉽게 말해서 우리교회에 이번 수요일 날 사도바울을 모셨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강대상에 서 가지고 하는 이야기가 뭐냐,
이제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기로 손들고 작정합시다. 하고 손들기를 강요할 때, 나 잘되라고, 우리 남편 사업 잘되라고 하기 위해서 왔는데 사도바울이라는 작자가 강대상에서 하는 말이 ‘이제는 남편이고 뭐고 나를 위해 살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 손드세요.’ 이러다 보니까 손들기가 뭐하다 이 말이죠.
나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님이 고맙긴 고마워요. 아무리 자기에게 잘해주고 고맙다 해도 그 고마움 때문에 ‘나’까지 포기해라? (미쳤나 포기하게) 이게 성령이 아니면, 영적 사람이 아니면 안 됩니다. 육적인 사람이 영으로 넘어가려하면서 흉내는 내요. 폼 잡는 것뿐이지. 슈퍼맨이요, 이쪽에서 저쪽으로 날아가면 그만이거든요. 그런데 가짜 슈퍼맨은 알아요. 날아간다는 것은 알지만, 날아간다는 것과 안다는 것, 이거는 하늘과 땅차이죠!
영적인 사람과 육적인 사람. 육적인 사람은 폼만 잡는 거예요. 영적인 사람은 성령 받은 사도바울과 의사소통이 가능해져야 됩니다. 수요일 날 강대상에 사도바울 강사 모시고 ‘이제 날 위해 살지 않는다’ 라고 했을 때 손 들어보라고 했을 때 ‘사도바울과 저와 생각이 같네요.’ 라고 하면서 나올 때, 그걸 가지고 ‘하나님의 개입’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개입.
모든 성경은 나에게 디 밀면 뭐가 따라 오느냐 하면 나의 이익이 따라와요. “주여, 저 성경 또 봅니다.” “보는 건 좋은데 왜 보는데?” 하면 “봐야 복 받죠.” 라는 이익이 따라오더라 말이죠. 이게 자기개입이에요. 성경은 사사로이 풀지 못하고… 사도바울의 모든 글들은 사사로이 풀 것은 아니라,고 베드로도 이야기했다고요.
베드로는 수제자면서 그래 사도바울이 뒤늦게 합류한 사람을 왜 그렇게 인정해줍니까? 자기도 제자 중 수제자인데, 자기 위신도 생각 않고, 지금 베드로는 위아래고 뭐고 간에 옳은 건 옳은 거예요. 사도바울의 이야기는 대부분 육적인 사람한테 동의되지 않지만 영적인 사람한테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만 골라 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에게 하나님이 개입한다면
결국 사도바울이 이런 얘기했다는 것은 뭐냐, 나와 같이 영적인 사람은 누구요? 뜻입니다. 하나님의 개입을 해버리면, -쉽게 가봅시다- 쉽게 에를 들면 ‘하나님’이라는 덩어리가 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못 보니까 하나님을 덩어리로- 덩어리가 계시면 하나님께서 지금 일 합니까 안 합니까? 하나님 일 하지요? 무슨 일 합니까? 선별 작업하죠.
영적인 인간과 육적인 인간을 선별 작업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목사나 교인들은 자기가 죽자고 일 해야 하나님 일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개입해가지고 뭔가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고 마음을 푸근하게 가져야 됩니다. ‘아, 내가 주의 일 하는 게 아니고 주께서 알아서 하시는구나,’ ‘그러면 내가 여기 일하는 것도 주께서 시켜서 하는 일이구나’
뭔가 일하는 가운데서도 안심이 되죠. 이제는 날 위해 살지 않고 나보다 더 열심히 일하시는 주님이 하신 일을 증거하기 위해서 나는 살아간다. 이런 공식이 나오는 겁니다. 첨부터 이야기하면, 하나님의 개입이에요. 하나님의 개입이 없으면 자기 성과에 대해서 낙심하고 넘어질 수가 있지요.
내가 남편 전도했는데 안 먹히면 ‘에라 모르겠다.’ 나자빠질 수 있다고요. 주님이 일한다는 게 안 보이니까 맨날 자기만 열심히 일 해. 그런데 예상된 숫자가 안 나오니까 뿔따구가 나버린 거예요. 화가 나가지고, ‘내가 무슨 쪼다도 아니고 주의 종 맞아 이렇게 성과가 없다니?’ 스스로 자기하는 일에 낙심하는데 그 자체가 뭐라고요? ‘나를 위해 살지 않고’가 아니고 그게 결국 하나님의 개입이 안 되니까 ‘내 위신’ ‘내 가치’를 내가 찾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것밖에 안 됩니다.
이거는 푸근함도 아니고 편안함도 아니에요. 마귀 시험에 딱 알맞은 사람들이에요. 제가 좋아하는 성경구절도 있지요? 사도행전 19장에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마귀가! 사도바울을 안대요. 마귀가 사도바울을 ‘저 인간은 주의 종’이라는 겁니다. 사도바울을 주의 종이라고 마귀 쪽에서 안다면 지금도 영적인 사람은 무시해도 마귀는 안 무시할 겁니다. ‘저 사람 저래도 주의 종이다.’
마귀나라에서 유명한 사람 돼야 되지. 누가 됐든 마귀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핸드폰 자주 울리는 분 누굴까 궁금) 주를 위해 사는 사람. 이거 한 마디로 ‘기적’입니다. 제 경험상 봐도 이거는 기적입니다. 이런 사람 찾으면 횡재한 겁니다. 해변가 모래 가운데서 진주 하나 발견하는 겁니다. 누가 진주를 얻을꺼냐 (목사님도 진주 얻으셨다는-녹취자)
성경에서 사도바울이, 영적인 사람이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죽었다가 다시 산 그분을 살게 함이라」 라고 예수쟁이. 마귀도 알아 모시는 예수쟁이가 기준이 됐다면 교회는 뭐냐 교회는 예수쟁이만 모여야 말이 되는 겁니다. 자동적인 공식입니다. 여호와증인들이 오면 오게 한 것도 주께서 일하는 것뿐인데 그분에게 복음 전하면 되지 내가 시켜서 가라 마라 하는 그런 것은요, ‘자기가 교회’입니다. 이거는 워치만 휘트니스 그 동네가 하는 거예요.
일종의 자기 조직의 자긍심이죠. 자기부인이 안 되는 우리 조직은 거듭난 사람의 집합이라 하는, 그것에 어떤 기쁨을 얻으려고 하는 거죠. 복음 가지고 주님의 개입으로 기쁨을 얻는 게 아니고 우리끼리 뭔가 건전하게 모였다는 데에 완벽한 공동체에서 즐거움을 찾으려는 이것도 하나의 교만입니다. 주님의 개입 같으면 그것까지 주님께 맡겨야지 내가 심사해가지고 너 오라 오지마라, 그거는 교만의 선봉이 될 수가 있거든요.
제가 뭘 도와드릴까요? 이런 자세를 평생 동안 가지고 가야되지 너는 가고 너는 오라, 이럴 필요 없어요. 복음만 전하면 되지 그것까지 우리 소관이 아닌 것 같습니다. 여기 다시 한번 14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사랑이 우리에게 강권하신다」이게 앞뒤가 말이 안 되지요? 왜냐, 그리스도의 사랑. 사랑은 달래지 강권하는 게 아니잖아요. 우리의 성실 아닙니까! 사랑하면서 때린다. 이건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런데 히브리서에 보면 사랑하는 자에게 매를 든다, 징계를 준다 이 말이죠. -욱이도 엄마가 사랑하니까 좀 크면 매를 들어야 되요.- 그럴 때 애는 그걸 사랑으로 보지 않고 미움으로 보지요.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은 틀이 있다는 겁니다. ‘정도’ 바른 길이 있다, 그게 뭐냐 ‘십자가의 좁은 길’입니다. 빌립보서 1장에 보면 너희들이 은혜로 믿게 된 것은 은혜를 받을 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고난도 함께 받기 위함이라,」 했습니다. 이거… 사람들이 빼먹어요.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고난도 함께 받기 위함이라…, 이 말은 뭐냐, 이익 보려고 교회 오지 말고 주님의 고난이 얼마나 깊었었는가, 내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주께서 얼마나 수고하셨는가, 그 수고에 동참할 때 그게 영적 사람인데 그게 우리 하고 싶다고 맘대로 됩니까? 턱없는 소리에요. 어느 인간이 자진해서 고난의 길을 가요?
미쳤나 가게. 힘든 일을. 그러니까 주님의 사랑은 말로 할 게 아니라 주님의 사랑이 강권해야 되지, 그러면 주님의 사랑이 강권할 때 어떻게 강권하느냐, -오늘 강의에서 이게 중요한데.- 사람은 나를 위해 살아요. 이걸 부인하면 안 됩니다. 아침에 눈만 뜨면 나를 위해 살아요. 아침에 눈만 뜨면 고린도후서5장15절과 달라요. 그런데 성경의 표적은 뭡니까? 영적인 사람은 ‘나를 위해 살지 않고’입니다.
주를 위해 살지 나를 위해 살지 않고 입니다. 이 두 가지의 개입을 우리 힘으로 안 됩니다! 큐티해도 안돼요. 이것은 놀랍게도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내 뜻대로 안 되게, 나를 위함이 안 되게 주께서 조처를 하셔서 날 위해 살지 않도록 해주시고, 다른 말로 하면 ‘말씀대로’ 살게 하시는 그 사랑. 정리해 봅시다. 사랑이 뭐라고요? 성령이 말씀대로 살게 하시는 그 사랑…
내 힘으로 성경말씀대로 된다고요? 천만에! 우리는 고집이 있어요. 먹는 것 입는 것 족한 줄 알라. 배고플 때는 이 말씀 지키는 거죠? 도표내서 보세요. 안 지킵니다. 먹는 것 입는 것 족한 줄 알라, 디모데전서6장8절에. 안 지킵니다! 먹는 것 입는 것 족한 줄로 알라니 어디 짐승입니까, 사람은 품위가 있어야 되지. 사람이 배고플 때는 먹는 것 입는 것이 땡깁니다. 주여 그것만 주시면 감사합니다.
일단 배불러 놓으면 골프 치러 가요. 그리고 차 바꿀라합니다. 이거는 목사고 집사고 다 그래요. 우리는 우리 사랑을 평생 생산해냅니다. 우리 속에서 생산해내요. 생산. 평생 우리는 아침에 눈 뜨면 나를 위해 사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성경이 표준은 뭐다? 날 위해 살지 않습니다. 이 두 가지의 갭, 그 차이를 그리스도 사랑에서 강권해버리면 뭘 느끼느냐 하며는 ‘내가 성경을 허투루 봤구나,’ ‘건성으로 봤구나’
주님께서 성경말씀을 요구하는데 나는 나를 위해서 내 이익만 챙겼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하고 회개하는 그 하나님의 현상이 뭐냐, 주의 사랑이, 하나님의 개입이 나를 강권하신다는 고백으로 튀어나온다는 겁니다. 여기 17절에 그걸 가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교회 세워놓고 손님 끌어 모으고 이게 위험한 짓이죠!
교회라 하는 건 주님이 개입해서 만드는데 우리가 만든 교회는 우리 자신부터 맨날 그렇습니다. 자, 새로운 피조물인데 앞에 뭐가 있어요. 누누이 말했어요. 누구든지 내 안에서, 그리스도 안 -햐, 이거 박사학위 논문감 아닙니까?- en Cristo,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새로운 피조물’ 하고 ‘그리스도’를 끊으면 틀려요. 새로운 피조물은 ‘날 위해서 살지 않기’예요.
칼빈신학, 루터신학, 개혁주의신학, 웨스트민스터신학 다 조사해보세요. 전부다 조사助詞를 많이 써요. 주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 형상을 본받기 위해서? 아예, 도배를 해놓았어요. 도배를 쭉 했는데 그 신학공부는 도대체 뭘 노리고 공부했느냐 이 말이죠. 나는 루터 신학 했다, 칼빈신학 했다,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청교도신학, 다 좋아요. 다 틀린 말 아닙니다.
좋은데, 그 신학을 왜 했는데?! 그걸 공부한 이유가 뭔데? 혹시 설교 잘하면 내 가치를 더 높일 수 있어서? 교회부흥에 보탬이 되고자? 주의 천국을 확장하는데 일꾼 되고자? 그것은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이 내가 개입해서 새로운 피조물?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가 힘들어 만든 새로운 피조물은 없어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무조건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제 말 아니죠? 사도바울이죠.
왜냐면 내 힘보다 더 큰 힘이 강권하여 작용한 공간이기 때문에. 뉴스에 보면 삼성반도체 공장에 대해 나오죠? 키 판에 보면 지도가 먼저 써 있고 날카로운 손가락 집게가 칩을 타다다닥 박잖아요. 텔레비전 뒤에 보면 키 판이 사람 손으로 한 게 아니고 기계가 다 박아버린다고요. 우리가 키 판이에요. 우리가 키 판이면 주께서 주님의 말씀을 가지고 다다다닥 ~박아버려요.
오늘은 예레미야 박아버리고 내일은 출애굽기 박아버리고 다다다닥~ 박아버리고 ‘아이고,; 보기 좋다.’ 이러거든요.(ㅋ) 이거는 아침에 눈 뜨면 나만 생각하는 내 인간상은 아니에요.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리스도께서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말씀대로 인도하지, 내 뜻대로 인도 안 해줍니다. 왜냐하면 나의 책임자는 내가 아니기 때문에. 내 인생의 책임자가 내가 아니에요.
제가 이해합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나밖에 모르기 때문에 앞으로 잘 되고 못 되고는 나 하기 나름이다 이렇게 생각하기 마련인데 처음부터 얘기했잖아요. 현재에서 미래로 나를 밀어붙이는 방법이 있는데 이건 보통생활이고, 이미 미래에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는 입장에서 어떤 존재냐 소급해서 되돌아보는 두 가지 타입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말씀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성경말씀을 안 보지만 주께서 보게 하시면 봐야 되죠.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서 화장실에서 성경말씀 보던지 아니면 주일 날 버스타고 가다가 성경말씀 보거든 주님께서 지금 역사하고 있다, 생각해야 되요. ‘역시 난 똑똑해,’ ‘역시 나는 신앙생활 하나는 끝내줘’ 이러면 안 된다 이 말이죠. 수요일 같은 경우에 몇 사람 안 와요. 우리교회도.
사람은 과거의 산물입니다. 과거에서 미래로 뭘 하냐면, 기대를 합니다. 기대. 이번 수요일 열 명 와야 돼, 그런데 두 명밖에 안 왔어요, 갑자기 기가 팍 죽어버려요. 기가 죽은 이유가 뭣 땜에 죽냐, 과거에 기대한 게 있기 때문에 기가 팍 죽어버린 거예요. ‘이번 수요일에는 한 명도 안 올 걸?’ 라고 했다가 한 명 오면 감사할 건데 열 명을 기대했기에 두 명 왔기 때문에 짜증나는 거예요.
짜증난다는 말은 그날의 수요일 주관자가 누굽니까? 입술로는 주님이라고 해놓고는 자신의 과거에 의한 자기가 주인공 돼버렸어요. 그러니까 「범사에 감사하라」 했는데 자꾸 짜증난 일만 만들어 놔요. 그러면 누가 훼방꾼입니까? 내가 훼방꾼이라, 욕심 많은 내가 훼방꾼이라.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는다」 했는데 그 말은 들리지도 않아요. 내 욕망대로 하고 싶어.
그러니까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사망을 낳는다」설교는 목사들이 그렇게 하면서 본인은 욕심을 생산해 내거든요. 그런데 감사하게도, 왜 열 명 와야 하는데 두 명밖에 안 오느냐, 라고 했던 것은 누가 개입해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일부러 그렇게 한 것입니다. 수요예배에 하나님의 덩어리가 보여야 됩니다. 아, 나 혼자 있는 게 아니고 주께서 발걸음을 세시고
참새를 인도하듯이 나를 인도하는데 평소에 내가 얼마나 내 욕심밖에 모른 것을 깨닫게 하여서 협력하여 선을 이루어 나로 하여금 불신앙적인 면을 도출해내려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얻고자 하는 게 뭐냐, ‘근호야, 나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너를 포기할지언정 성경말씀은 포기한 적이 없는 걸 네가 마음먹고 교회 나가라’ 주님은 성경말씀을 포기 않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우리가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주께서 주의 말씀대로 할 뿐이지 힘들다 해가지고 성경말씀을 어긋나게 우리한테 은혜로 주신 법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통해서 영광 받는 방식이 주님의 일하심을 통해서 영광받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개입이 돼야 되죠? 다시 한번 16절 봅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
이 말씀이 무슨 말이냐 하면, 보통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대로 살아간다 이거예요. 육체대로 눈에 보이는 대로. 15절에 뭡니까, 내가 사는 것은 1)눈에 보인다. 2)눈에 안 보인다. 사도바울은 어느 것입니까? 눈에 안 보이는 주님을 위해 산다고 돼 있잖아요. 그렇다면 그 전의 사울은 뭐냐 하면 눈에 보이는 대로 살았던 거예요. 다메섹에서 예수님 만나기 전까지는.
예수님은 한물 간 사람이고. 예수님은 이미 끝장난 사람이고. 내가 안 보이니까 예수님이 없는 거예요. 목사가 돼서 신앙생활 하기 힘든 것이 뭐냐 하면, 목회는 잘 하는데 신상생활 잘 안하는 이유는 뭐냐, 목회는 눈에 보이잖아요. 사람들이. 장로님 몇 분계시고, 심방 다니고, 제일 힘든 것이 눈에 안 보이는 예수님을 의식하면서 예수님과 은밀한 교제 나누는 것, 목사가 가장 하기 힘들어요.
수요일 날 또 보세요. 기가찰 것 아닙니까? 짜증날 것 아닙니까? 그러면 눈에 안 보이는 분이 툭 치죠. ‘너, 뭐가 꼽나? 네가 왜 짜증나?’ (ㅋㅋ...어무이 따라온 욱이가 ’짜증나‘ 따라하네요. 끝내 목사님도 웃어버리시는.-욱이가 보고 싶은 녹취자) “오호, 네가 과거에 음흉한 욕심이 있었구나,” 주일 날 몇 명 모여야 되고, 헌금은 어느 정도 나와야 되고, 나는 나중에 노회장은 돼야 되고,
제 말 오해하지 마세요. 이걸 하지 말라가 아니라, 이거 안 하면 우리는 우리 힘으로 구원받은 줄 아니까, 하세요! 욕심도 내고 다 하시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을 못 느끼면 영적사람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내 말은… 영적 사람이 완벽한 사람을 두고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도 세상 사람과 똑같아요. 똑같은데 다만 다른 점이 뭐냐, 눈에 안 보이는 분이 날마다 내 인생을 개입하더라 말이죠.
이게 「그리스도 사랑이 우리를 강권 하시도다」는 거죠. 이걸 사도바울은 느꼈고 다른 사람은 못 느낀 거예요. 항상 주의 일이 아니다하는 것은 뭐냐, 그 기준이 뭐냐, 범사에 감사하면 주의 일이고 짜증내면 주의 일 아닙니다! 평생을 주께서 떠밀어서 사는 거예요. 지금 애가 건강하지만 아파보세요, 애 하나도 내 맘대로 안 되는 거 알죠? 우리는 주님께서 개입해서 떠밀어서 살지 오늘날 내가 통밥 굴리고 연구해서 오늘날 내가 된 게 아닙니다.
목사는 목회는 잘하는데 목사 본인의 신앙생활은 정말 하기 힘들어요. 날마다 자기 위해 살지 않아야 되기 때문에. 날마다 자기 위해 살지 않아야 되기 때문에 세상에 그게 인력으로 될 수가 없어요. 자기 마음대로 안 되니까. -오늘 한 거 정리 한번 하면서 마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개입입니다. 개입할 때 그게 사랑으로 오는 거예요. 여기 사도바울이 있다면 본인이 잘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물 덮치듯이 덮쳐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사랑은, 사랑이 강권해서 덮치는데 사랑은 목적이 있어요. 목적이 뭐냐, 우리는 나밖에 모릅니다! 강의 하는 나도 마찬가지고, 강의 끝나도 마찬가지고, 잘 알아요. 나는 나에 대해서 알아요.
나는 나밖에 몰라요. 이건 빈틈없는 진리입니다. 남이고 자식이고 부분적으로 쪼개고 남는 것은 결국은 ‘내가 잘 되어야’ 되요. 마누라 죽어도 나만 잘돼야 되고, 나밖에 몰라요. 그리스도 사랑이 덮치니깐 그리스도 안에서 주의 말씀의 고집이 나로 하여금 주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나는 나밖에 모른다는 그것을 깨닫게 하는 말씀이 우리예요. 그것을 가지고 ‘새로운 피조물’이라.…
새로운 피조물은 독립이 아닙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계속해서 강권해서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나를 구원했다는 것을 고백하고 증거 하는 그러한 키 판. 나 잘났다가 아니라 나 같은 못난 인간을 그리스도의 사랑은 이렇다, 라고 증거 하라고 하는 그것이 바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러니 자기를 속일 생각을 하지 마세요. 우리는 나밖에 모릅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예요. 욱이도 크면 지밖에 몰라요.
이런 인간도 주님의 십자가가 오게 되면, 십자가가 뭡니까?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과거의 십자가에서 다 해결되었음을 육적인 인간은 그걸 거절하는데, 주님께서는 너 같은 인간을 위해 대신 피를 흘렸다는 그것이 나에게 기쁨이고 남에게 전달되고 증거 된다는 사실. 이것! 기적입니다!
나 같은 인간. 쪼다 같은 인간 나를 살리신 그리스도 피밖에 없습니다. 당신도 그리스도 피만 있으면 구원됩니다. 라는 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다는 것은, 내 안의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개입이 작용하기 때문에(내 자랑이 아니고) 주님 자랑만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을 욕할 게 아니고 날마다 우리를 버리지 않고 십자가만 알게 하시는 주님의 사랑이 내 행실보다 더 위대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만 새로운 피조물인 것을 알았사오니 그리스도에게서 독립하거나 벗어날 생각 말고 날마다 주님의 개입을 감사할 수 있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안산070914고린도후서5장13절.hwp (53.5K), Down: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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