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광수 이단에 대해서
류광수 이단에 대해서
이름 : 이근호(IP:117.55.144.217)
류광수 목사와 그 전도 운동에 대해서
Ⅰ 서론
어떤 이를 이단으로 규정할 때만 다음 두 가지 성질의 정황이 조성되어야 한다.
하나는, 그 사람의 주장을 들을 때, “아, 이것은 성경의 중심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논조이다”라는 감이 잡혀야 하고 다른 하나는, 이러한 성경적, 신학적 오류를 가지고 그 사람에게 권면했을 때 그 사람이 완강히 거부했을 때이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경우를 가지고 이단이라고 단정해서는 아니된다. 즉 “우리 교단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우리 교단의 지시에 불복종한다” 혹은 “사람들의 혼을 빼는 설교를 해서 사람이 거리로 몰려가니 기존 교인들이 흔들린다.” 혹은 “그 사람의 성격상 원만하지 못하고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일을 한다” 혹은 “한국 교회 전체에 대해서 부정적 안목을 가지고 맹목적으로 비판을 일삼는 인물이다” 등의 구실로 그 사람을 이단으로 몰 수 없다. 왜냐하면 이단이냐 아니냐는 오직 성경이라는 계시를 기준으로 삼아야지 기존 교권이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참으로 기존 교단과 한국 교회 전체가 참된 주의 종으로부터 회개를 촉구 받아야 마땅한 교회가 될 수도 있지 아니한가! 참으로 바른 말씀을 전하고 참으로 성령에 의해 올바른 계시를 전한다면 그 종을 정치적으로 처단하려고 하지 말고 오히려 그 사람 말을 듣고 하나님 앞에서 용서를 빌어야 마땅하다. 그리고 사회 윤리적인 것으로 이단이라고 지목하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날 가능성이 농후하다. 정치적으로 반감을 품는 인사를 탄압할 목적으로 그 사람의 과거 이력과 약점을 치졸스럽게 들추어내어서 그 사회에서 매장하려고 하는 시도는 그 자체가 비윤리적으로 비도덕적이다. 또한 많은 사람에게 인기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을 이단으로 모는 것은, 한심스러운 질투심의 발로에 지나지 않으며 누가 봐도 속보이는 가벼운 처신이다. 이단이란, 바로 성경적으로 다른 계시를 전하는 것과 또한 그 지적에 대해서 의도적으로 거부할 경우에만 국한되어야 한다. 바른 지적을 받고 자신의 부족함과 성경적 왜곡에 대해서 사죄한다면 그 사람을 일부러 매장하려고 덤벼들어서는 안된다. 그렇게 되면 이 또한 조직의 권위와 절대성을 대외적으로 위협조로 알리기 위해 그 사람을 희생물로 사용하는 것밖에 안된다. 앞으로 누구든지 조직에 반기를 드는 자는 이와 같은 꼴이 된다는 식의 정치적 처단의 시범 케이스로 이용될 뿐이다. 만약 기존 한국 교단이 이런 조직체라면 이미 교회이기를 포기한 것이기에 이단 운운할 자격도 되지 못할 것이다.
Ⅱ 본 론
1. 류광수씨를 대하는 기존 교계의 태도
권위란 인류 역사 내에서 항상 우상이었다. 조직 내의 질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권위가 있기에 잡힌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제멋대로 군다면 여기에 불안을 느끼는 자들이 있다. 조직이 사유화되어 있을 때, 그 조직을 지탱하는 권위에 균열을 줄 만한 일이 생기면 민감한 반응을 나타나는 것이 권위에 기대어 살아가는 자들의 생리이다. 정치적 안정성과 견고성에 대해서 인간들은 지대한 매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서 그 권위에 도전하는 자가 발생될까 봐 불안감도 자리잡고 있다. 실제로 기존 교단들은 다음과 바라고 있다. “류씨 당신이 무슨 활동을 해도 좋은데 제발 윗 분들의 말을 고분고분 지시 받는 자세로서 처신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천방지축으로 날 뛰지 마시고 우리가 시키는 대로 제 자리나 지켜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확신과 전도 사명만 생각하지 마시고 이 한국 교계가 당신 때문에 생기는 혼란과 권위 추락, 교인 떨어짐, 목사의 위신 먹칠, 이런 것도 함께 고려해야 되지 않습니까?. 혼자 인기 얻은 것에 자족하고 또 우리하고 경쟁 관계에 놓이도록 하지 마시고 같은 동력자 위치에 있음을 생각해 주었으면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속사정 뒤에는, 어느 누구도 교계라는 엄청난 대 조직에 흠집을 내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정치적 속셈이 들어 있는 것이다. 물론 류씨는 이러한 사고방식에 대해서 ‘소명 의식 결여’. ‘나태한 삯꾼들의 전형적인 정치적인 고압적 추태’로 볼 것이다. 교계가 류씨에게 왜 이런 바램을 갖는가 하면은 류씨가 주장하고 내세우는 설교나 강의를 전체적으로 들어보면 현재 기존 교회나 교단들이 전도 훈련하는 방식과 크게 벗어나는 요소가 없기 때문이다. 류씨가 정말 말도 안되는 그런 주장을 주류로 하여 전파했으면 교단적인 이단 평가서가 나오기도 전에 먼저 거기에 참석하는 자들에 의해 이단으로 지목될 것이다. 여호와 증인이나 통일교처럼 제대로 신학 공부에 접하지 못하고 무식한 민중들의 한 맺힘으로 포섭하는 형식 같으면 다수의 목회자들이 류씨에 동조할 하등의 사태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류씨를 긍정적으로 보고 동조하는 목회자들의 눈에 비친 류목사의 실체는, 기존 자기네들이 오랜 선배 목사나 부흥 목사나 유명 목사들에게 배우고 왔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개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전도 훈련에 관한 내용에다가 ‘+ α’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 ‘+ α’가 기존의 안일한 목회자에게는 찾아 볼 수 없는 전도에 대한 순교적 각오와 열심을 그들은 류씨에게 배우려고 찾아가는 것이다. 즉 류씨 말고 류씨보다 더욱더 전도 열정을 가진 인사가 또 출현한다면, 아주 엉터리 같은 교리를 전하지 않는 이상 그 류씨에게 갈 것이다. 바로 이러한 다락방 운동의 분위기 때문에 기존의 교단이 류씨를 가지고 털어서 그에게서 세세한 이단성을 끄집어낸다 할지라도 그것은 온 한국 교회가 류씨를 시기하고 질투한 마음의 소산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겁없이 조직에 대드는 자의 결말이 어떻게 끝나는지 그 시범케이스로 보여주기 위하여 류광수라는 사람 하나 매장하기 위한 무리수를 놓고 있다고 류씨 쪽에서는 그렇게 느끼고 있는 듯하다. 만약 류씨의 이단성을 시비걸 듯이 그런 식으로 물고 늘어지고 싶다면 소위, 유명 목사라고 일컫고 한국에서 지도자급이라고 간주되는 주요 목사들의 설교와 강의도 같은 칼자루로 분석해야 공평한 행정적 처리가 아닌가 라는 항변도 류씨 쪽에서 갖고 있는 듯하다.
류씨가 사용하고 있는 낯설은 용어들은 단지 다른 이단들에게 배우고 추종하기 위함이 아니라 류씨 자신이 뭔가 신선감을 청중들에게 제공하기 위한 아이디어의 소산물로 여기는 것이 류씨와 합류한 자들의 보편적 생각인 것 같다. 즉 류씨 자신은, 자기가 그 동안의 목사들과는 뭔가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새로운 개념을 들고 나올 수도 있다. 실제 전도 현장에서 익히고 새로이 알게 된 그 깊은(?) 성경의 핵심과 지혜를 그런 요상한 용어를 등장해서 부각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류씨와 함께 하는 자들은 이 요상한 용어와 개념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얼마든지 변명할 수가 있다. 즉 “그 용어가 등장하는 문맥이나 용법을 함께 고려해 보세요. 그러면 류목사님이 결코 어떤 새로운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현 한국 교회가 잊고 있는 점을 환기시키기 위해 강하고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합니다. 이단일 것이라는 편향된 고정 관념을 버리고 원로 목사님에게 듣듯이 듣게 되면 하등의 문제 될 만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이다.
류씨를 공격하는 상황에서 고려해 보아야 하는 점은, 류씨와 그 집단이 한국 교회를 비판하기는 하지만 그 실체와 끝까지 싸울 의사가 없다는 것이다. 일종의 정치적 타협의 관계를 고대하고 있다. 즉 교계에서 말조심하라고 하면 말조심할 것이고 또한 오해받을 만한 용어나 개념을 들고 나오지 말라면 그 개념을 사용하지 않을 용의까지 되어 있다. 단지 류씨 자신과 다락방 운동을 이단이니 사이비니 하는 공격을 말아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교계는 이러한 류씨의 기대와는 달리 끝까지 물고 늘어져 다락방이 와해되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다. 왜냐하면 대대로 내려오는 소위 교계의 권위에 대해 흠집을 낸 자는 이유 여한을 막론하고 일벌백계로 다스려 차후에 교단 권위에 도전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것이 정치하는 자들의 생리이기 때문이다. 즉 류씨와 그 집단은 결국 하나님께 저주받아 지금은 이름이 없이 되고 말았다는 즐거운(?) 내용이 곧 한국 교회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계시로 삼고 싶은 것이다. 류씨에 있어 그의 종교적 체험과 활성화된 다락방 운동을 계시로 보고 싶은 것과 꼭 마찬가지로 한국 교회의 권위를 스스로 자기 손에서 유지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자들에게는 현 한국 교회가 계시의 결과물이요 증거물이고 간주하고 싶은 것이다.
류씨는 스스로 자신이, 자기를 비판하는 교수나 신학 연구하는 은사를 받은(?) 목사들에 비해 무식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자기는 다른 은사, 즉 전도를 하고 훈련하는 은사가 있기에 그들의 교만성으로인해 애매한 고난과 핍박을 받고 있는 대상이 되고 있다고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은사가 여러 가지인데 어떻게 한 쪽 은사만 우월권을 가질 수 있는가 하고 불평하는 것 같다. 신학적인 논쟁을 기피하는 것으로 봐서 이런 추리가 가능하다. 그래서 류씨 쪽을 말하기를, 지금 열심히 전도에만 치중하는 자들에 대해서 소위 유식한 자들이 왜 그리 괴롭히는가? 라는 식으로 호소하고 있다. 자칫하면 그리스도의 사역 자체를 방해하는 식이 된다는 식으로 반 동정, 반 대항으로 나서고 있는 실정이다.
2. 어떤 자들이 류씨와 함께 하는가?
누구를 존경한다든지 배운다든지 할 때는 뭔가 원하고 있었던 바를 그 자가 충족시켜 줄 가능성이 있을 때에 가능하다. 전도하고 싶어서 미친다든지, 그 사람(류씨)처럼 열심히 주의 종의 사명을 감당하는 모습이 부러워 자기도 저렇게 열심 있는 주의 종이 되고 싶다든지, 아니면 자기가 담임하고 있는 교회가 평소에 생각했던 활성화된 전도의 센터로 변모되었으면 하는 기대를 갖고 있는 자들이 류씨와 관계를 맺을 것이다. 그래서 류씨에게 신학 공부를 처음부터 새로 배우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골치 아픈 신학 공부는 지금 류씨를 이단으로 몰고가는 공작에 나시고 있는 신학 교수들에게 신학교에서 지겹도록 배워 왔다. 따라서 류씨에게 따로 뭘 배우겠다는 것은, 전에 신학교에서 못 배우고 빠트린 부분을 새로 보충하려는 것이다. 왜 신학교에서 이런 전도 훈련에 대해서 가르쳐 주지 않았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신학교 교수 중에서 류씨처럼 목숨걸고 전도에 매진하는 신앙적 자세를 가진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교실 내에 학문으로서의 전도학과 전도 현상에서 직접 부딪쳐 오는 사단의 역사와 마주치면서 배우는 전도가 다르다는 것이다. 이로서 류씨와 함께 하는 자들은 한국 신학교를 걱정한다. 어서 류목사님을 정식 교수로 채용하여 후학들에게도 실제적인 전도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은근히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되면 자기네들도 이단과 놀아난다는 불명예를 씻길 것이기 때문이다.
3. 류광수 목사의 이단성
(1) 다른 예수 (다른 약속된 메시야관)
류씨는 ‘예수’라는 용어를 빈번히 반복하므로서 예수에 관해서는 확실한 정통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외부에 알린다. 하지만 그는 복음으로서의 ‘예수’와 종교로서의 ‘예수’가 어떻게 다른지 감히 생각치도 못하고 있다. 그것은 예수의 내용을 신약의 용어들에만 차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약에서 면면히 내려오는 메시야의 참된 속성을 실어 주지 못한 채 ‘예수’라는 거론하고 있는 것이다. 즉 민중들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메시아 의식으로서의 예수를 마치 예언자들이 약속한 메시아와 분간 못한 채 사용하고 있다. 그 증거로서 그의 전도 개념에서 확연해 진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구약에서의 메시아 개념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상과 대비되면서 싸우는 자로서의 ‘하나님의 이름’이다.
1) 구약에서 메시아 개념
“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출애굽기 15:3)
하나님은 인간과 싸우신다. 인간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원하는 지를 아신다. 그리고 그 인간 배후에 어떤 권력이 자리잡고 있음을 아신다.
인간은 철저히 그 권력의 시녀이다. 그 권력을 지향하고 그 권력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면서도 마치 자신들의 자의적인 선택에 의해서 모든 일을 결정하는 것처럼 알고 있다. 인간은 자기 배후에 누가 있는 지를 모른다. 인간은 자기가 추구하고 시도하고자 하는 모든 것이 자기의 머리에서, 경험의 뭉치에서 조성되는 줄로 여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죽이시고 결국에는 흙으로 몰아넣는다는 사실조차 부정하려 한다. 죽을 때까지…. 성경에서 인간의 죽음을 죄에 대한 징벌이라고 분명히 못박고 있다. 징벌로서의 사망이지 자연법칙에 따른 사망이 아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로마서 6:23) 단순히 흙 되는 것으로 인간에 대한 징벌이 다 끝난 것이 아니다. 심판 받기 위한 부활이 재차 기다리고 있다. “또 인자 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한복음 5:27-29)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성경의 분명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달리 생각하고들 있다. 인간에 대해서 다소나마 긍정하는 면이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들이다. 인간은 율법 앞에서도, 또한 하나님 앞에서도 감히 설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자꾸 자기 자신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려고 한다. 하나님이 완벽하게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생각을 갖는다. “설마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버릴까…”
인간은 자신이 사망의 존재임을 애써 잊으려 한다. 즉 죄에 대해 가볍게 보고 있다는 점이다. 하늘에게 어떤 규칙과 제도나 법이나 의식이 오면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자격이라도 있는 듯이 생각한다.
이단의 출발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인간을 전적인 심판과 저주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과의 동반자 내지는 협력자로 보고자 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금식했을 때, 마귀가 나타났다. 그 마귀는 예수님에게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태복음 4:8-9) 마귀는 자기를 스스로 부정하고 부인하기를 거부한다. 자신의 존재 가치를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이 마귀의 속성이 인간 세계에 그대로 퍼져 있다. 이단이란, 곧 인간의 가치를 높여 주자는 데 있다. 하나님 앞에서도 저주와 징벌과 죽음의 대상이 아닌 것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자는 것이다. 인간을 이런 식으로 조종하고자 하는 이유는 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지워 버리는데 주력을 하기 때문이다. 즉 창세기 3:15에 보면 분명 마귀는 하나님과 원수 관계에 들어가게 된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세기 3:15) 즉 이 본문에서 ‘원수’라는 단어가 나온다. 누구와 누구를 원수 관계에 놓이는가? 한쪽은 ‘여자의 후손’이요 다른 한쪽은 ‘뱀의 후손’이다. 역사가 진행되면서 여자의 후손은 누구이며 뱀의 후손은 누구인가를 명확하게 드러나게 된다. 여자의 후손이란 다름이 아닌 생명의 후손이다. 여자의 이름이 이 약속을 받고 난 뒤 하와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모든 산 자의 어미라고 한다. 생명이란 그 출처가 생명 나무 있는 곳이다. 그런데 그 생명 나무로 통하는 길은 하나님에 의해서 차단되고 말았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세기 3:24) 왜 하나님은 인간들을 향하여 생명 나무 근처에 있지 않게 하셨는가? 그것은 생명 나무 과실을 못 따먹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생명 나무를 따먹을 자격이나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들이 자신들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긍정을 하든 상관없이 하나님은 인간에게 생명 나무를 먹지 못하게 하시며 흙이 되는 죽음만이 안겨 줄뿐이다. 이것이 올바른 현실이다. 그들 인간들은 하나님이 따먹으라고 지시한 적도 없는 선악과를 따먹고 인간에게 있어 그 어떤 경우라도 들어 있지 않아야 될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이 함유되어 있기 때문이요 인간을 더 이상 정상적인 존재로 보시지 않기 때문에 생명 나무로 가는 길을 막았던 것이다. 이제부터 인간은 자체적인 지혜와 모든 지식을 다 동원해서 몸부림쳐 봐도 생명은 요원하다. 생명은 엄연히 인간들에게 있어 도달될 수 없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조치에 대해서 반감을 갖고 도전하는 세력이 있다. 하나님이 정해 놓은 확고한 원칙에 대해서 인간들을 동원해서 함께 대들도록 부축이고 지배하는 세력이 있다. 이들 인간들은, 자신들의 하고 있는 행위에 대해서 이유 없이 신께서 긍정적으로 축복하고 호의적이기를 요구한다. 물론 영생을 보장하라는 것이다. 아벨의 형 가인이 자기가 드린 제사에 대해서 하나님이 받지 않으니깐 안색이 달라지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이로서 하나님과 원수인 악으로부터 지배를 받고 있음이 들통났다. 가인은 가인 나름대로 자기 행위를 인정해 주는 그런 신이기를 내심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취지에서부터 이단은 시작이 되는 것이다. 이단은, 인간 행위를 긍정해 주는 새로운 종교와 신을 창안하게 된다. 하나님의 약속을 무산시키는 다른 신의 약속을 인간들에게 제의해 놓고 있다. 그 약속이 무엇인가? 그 약속은 선악 체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 나라에서 긍정적인 것으로 삼아서 이점을 기초로 한 약속이다.
a 가인의 약속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배이리로다 하였더라”(창세기 4:23-24)
이 본문에서 “가인을 위하여”라는 대목과 “라멕을 위하여”라는 대목이 있다. 라멕은 자기가 행한 행동은 가인과 비교하면서 말하고 있다. 가인보다는 둘 다 오로지 자신만을 위하여 행위 한다는 사실이다. 자신들의 이름을 붙이면서 그 뒤에 “위하여”라는 단어를 붙어 있어 목적을 확실히 한다. 즉 인간은 자기 자신을 확실히 최종 목적으로 삼고 행위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죄인으로 몰든지 아니면 사망의 징벌을 내리든지 상관없이 인간은 자기 긍정에 준해서 스스로의 존재성을 최후의 진리 기준으로 삼아 행세한다. 그 입장에서 자체적인 징벌과 심판을 내린다. 모든 것이 ‘자기를 위해서’라는 한 목적에 부합되어야만 만족한다. 또 하나의 신으로 자처하기에 늘 자기를 위한 약속을 외부로 배출하게 되어 있다. 가인의 후계들이 스스로 창안하는 약속이란, 자기 자신을 축으로 하여 끊임없는 투쟁과 전쟁을 하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을 말한다. 자기가 자기에게 당부하는 약속이요 희구요 희망 사항이다. 타인보다 더 신격화된 자아의 모습을 유지하고자 하는 내용이다. 거기에 비해 창세기 3:15에 나오는 하나님의 약속은 오로지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사단을 제거하고 다시 생명 나무 중심의 세계를 이루는 것이다. 즉 원래대로 하나님이 만이 홀로 영원한 신이 되는 세계이다. 결국 이렇게 되니 세계 역사란, 하나님이라는 신과 인간이라는 신과의 대결장이 된다. 하나님은 인간을 원수로 취급하신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로마서 5:10)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골로새서 1:21)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단으로 태어난다.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실존은 곧 하나님에게 대항하는 존재로 태어난다는 말이다. 악이란 항상 방향성을 지니고 하나님을 향해 반항하고 악한 저의로 돌진하는 속성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아담 안에서 이단 아닌 자가 없다. 악을 담고 있다는 의미에서 이단이요, 하나님 보다 악마에게 철저하게 순종하고 순응한다는 점에서 이단이요, 현 모습 그대로 구원될 수 없다는 점에서 이단이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에베소서 2:2-3)
하나님은 원수들인 인간들에게 찾아와서 그 중에서 몇 명은 긍휼히 여겨 자기 백성 삼는 식으로 마귀의 계획을 무산시키고 악마에게 승리하시는 분으로 나타내신다. 그래서 구원받은 백성들의 특징은 오직 하나님의 승리만을 고백하고 증거 한다는데 있다. 거기에 비해 이단들은 인간들의 가능성과 재주와 능력과 선한 면을 부각시키는 특징을 지닌다. 즉 인간들의 손에 의해서 이러 이러한 종교 운동이 가능하다고 자신들을 긍정한다. 이스라엘이 실수한 면이고 오늘날 류씨 집단들이 실수하고 있는 측면이다. 즉 신도 인간 없이는 아무 일도 못한다는 것이다. 이로서 배후의 악마의 사주를 받아 하나님의 공로에 흠집을 내는 것이다. 겉으로는 ‘하나님 주권’, ‘하나님께만 영광’ 이라고 부르짖고 있지만 그 구호를 부르짖는 자기 자신의 종교적 기술 발휘와 행위에 가치와 의미를 두는 교활한 자들인 것이다. 자기네들이 이런 일을 했기에 자기만큼은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인간 공적의 우열로 측정하고 싶어한다.
악마가 제시한 약속은, 인간의 공적도 같이 부축여주는 영원한 세계를 구성하는데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은 성경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이십 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요한계시록 4:10-11)
자기 존재의 확실성, 혹은 자기 존재의 정당성을 계시의 출발점으로 삼는다면 자기를 위한 새로운 계시를 거론하는 것과 같다. 이 계시 안에는 인간들 서로의 영광만이 존중된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한복음 5:44) 결국 이단이란, 인간을 궁극적으로 긍정하기 위한 계시를 바탕으로 새로운 인간 종교를 건립하는 것을 말한다. 인간은 최종적인 영광이 자기에게로 돌아오기까지는 만족을 모르는 존재이다. 악마의 속성이 이제는 인간의 속성이 되었다.
b 아벨의 약속
아벨에게 나타난 현상은, 아벨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현상이 아니라 다, 아벨을 중심으로 해서 벌어지는 하나님의 자기 약속 실현을 두고 말한다. 하와가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된다는 것은, 죽은 자의 대표자가 된 남편 아담과 대비해서 말하는 것이다. 즉 아담에 속한 모든 이는 죽는다. 생명과 관련 없다. 하지만 생명은 남편 아담과 상관없이 따로이 하나님에 의해서 여자와 관련 지어 땅 위에 나타나게 되어 있다. 남편과 관련 없이 태어나는 자식의 의미란, 일단 하와에게는 자식이 전혀 없어야 한다는 조건이 설치되어야 한다. 갈라디아서 4:26-27에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기록된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이 본문에서 “잉태치 못한 자”라는데 주목해야 한다. 하와가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된다는 약속을 실현시키는데 있어 일단 “모든 산 자의 어미”는 이 지상에 자식이 없어야 된다는 조건 안에 들어 있어야 한다. 실제로 하와는 가인과 아벨 두 자녀가 있었지만 모두 다 자식이 될 수 없었다. 하나는 죽고 다른 하나는 저주받아 부모 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와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되어야 한다. 자식도 없는 주제에 어미는 되어야만 한다면 이런 상황이 어떻게 이어질까? 그것은 죽음과 상관없이 영원한 살아 있는 존재자가 하와의 후손으로 태어나면 되는 것이다. 즉 죽은 자의 대명사인 남편 아담과 상관없이 하와에 담긴 약속에 준해서 하나님이 보내 주신 자식이 출산하면 된다. 그것이 셋이다.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 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창세기 4:25) 그런데 이 본문에서 “아벨 대신에 다른 씨”에 주목해야 한다. 아벨은 분명 죽은 자이다. 하지만 가인으로부터 살해당한 이 아벨 대신에 셋이 태어난 것이다. 셋이 아벨을 대신한다면 아벨은 셋 안에서 여전히 산 자가 된다. 죽은 자이지만 하나님이 주신 셋 안에서 산 자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아벨과 셋 노선은 하와에게 내린 약속의 실현 과정 안에 들어 있는 것이다. 즉 “모든 산 자의 어미”에 합당한 증거자가 된다. 비록 아담이 하와와 동침하여 낳은 자식이지만 성경은 오히려 분명히 하나님이 주신 자식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것도 죽은 아벨 대신이라는 단서를 붙임으로서 하와에게 내린 약속이 가인과 악의 방해 공작에도 결코 끊어지지 않음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 없었던 자식이 새로 생겼고 끊어졌던 산 자의 노선이 다시 이어진 것이다. 모두 다 하나님 혼자 만의 공로이다. 갈라디아서 4:26-27 초반까지를 다시금 적어 본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기록된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어머니가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지상의 혈통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위에 있다. 따라서 인간의 육체로 통한 잉태를 모두 부정하는 어머니이다. 죽은 자밖에 낳을 수 없는 그런 출산을 고발한다. 산 자만이 잉태하고 출산시키는 것은 위에서 할 몫이다. 즉 아벨의 약속은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지 인간을 못하는 법이다. 하지만 이점을 류씨 집단을 받아 들릴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전도 명령을 인간들의 해낼 수 있는 항목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일의 실시는 하나님+인간에 의해서 성취되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인이 생각한 약속관, 즉 예수관이다.
2)신약에서의 메시야 개념
마태복음 16:17에 보면, 메시야를 제대로 알게 하신 것은 오직 하늘에 계신 예수님의 아버지 뿐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인간들의 혈육으로 아는 수준은 기껏해야 더러는 서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한 사람 범주 안으로 막혀 있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 것은 인간들의 자기 의사가 아니라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에 국한 된다. “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태복음 11:27) 왜 이런 사태가 벌어지는가? 그것은 기존의 인간들이 알고 있던 하나님은 마귀가 심어준 종교적 의미의 우상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 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매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요한복음 8:44-47)
그 당시 유대인들은 이 세상에서 어느 민족보다도 메시야를 고대한 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거짓된 메시야를 알고 있었음이 참된 메시야인 예수님을 면전에서 들통났다. 유대인들의 마음이 모든 인간들의 마음을 대변하기 위해 선택된 자들이다. 그 어떤 인간도 자력으로 메시야를 알아 보지 못하게 되어 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한복음 1:12-13)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만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이들로 통해 참된 메시야가 세상에 증거된다. 이름으로만 예수이지 그 알맹이는 전혀 다른 약속과 계시와 심판의 기준으로 나타난다. 그런 자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사실은 광명한 천사를 위장된 채 예수와 복음을 거론하는 사단의 종들이다.(고린도후서 11:4,13-15) 예수님이 광야에서 만났던 그 악마가 취하는 사고 방식을 지니고 있는 메시야를 이들은 전도하고 있다. 매사가 인간들의 눈으로 확인되는 종교적 행위에 근거를 둔 것들이다. 흔히 민중들이 고대하고 있는 바와 기적으로서 다가오는 메시야관을 악마는 소개한다. 소위 접촉점을 만들어서 전도해야 한다는 것이다.(새 새명 강의록 증보판 26페이지) 복음으로 세계를 정복하다는 주장(같은 책 55페이지), 병고침 (복음 편지 강의록 증보판 68페이지) 같은 주장을 나열하므로서 종교화된 욕구를 만족시켜 주는 메시야관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악하고 음란 세대에 요나의 표적(십자가)밖에 없다는 주님의 취지와 어긋난다.(마태복음 16:4) 유대인들이 기적을 통해 메시야임을 확인하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바이다.(고린도전서 1:22)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외에는 알지 않기로 했다.(고린도전서 2:2) 이것은 아무 육체라도 자랑할 것이 없게 하기 위해서이다.(고린도전서 1:29) 이렇듯 참된 메시야를 아는 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자이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린도전서 2:4-5)
십자가 사건이란, 이처럼 인간들의 종교적 욕구와 기적 구함과 지혜를 부정하는 측면을 담고 있다. 성령으로 한다니깐 또다시 ‘성령’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종교적 재주들을 조성하고 그것으로 전도 수단으로 삼을려고 하는 것이 이단들의 수작이다. 결코 그럴 수는 없다. 그런 짓들은 ‘성령’을 도용한 단지 육체의 행위일 뿐이다. 왜냐하면 성령은 십자가만 연관되기 때문이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갈라디아서 3:1-2)
믿음을 종교적 행위로 전환해서 그 신기함 눈으로 확인될 수 있는 믿음의 내용으로 장착하려하고 그 특수한 그 경험들을 뭉쳐서 규범화된 신앙자의 틀로서 해석하고 전도에 이용하려는 자들이 바로 거짓된 메시아를 전하는 이단들이다.
(2) 심판의 기준에 다르다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인간들이 내세운 기준이 아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린도전서 16:22)
그런데 ‘사랑’이라는 것이 어떻게 드러나는가? 바로 인간의 모든 종교적 삶의 영역에서 밝혀진다. 인간은 모두 처음부터 다 종교적 존재이다. 인간들의 살아가면서 활동하고 있는 모든 것이 종교적 속성의 바탕 위에서 벌어진다. 구체적인 조직 종교단체의 한 일원으로서 활동하든 아니면 그냥 무신론자라고 자청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살든 상관없이 종교적이다. 로마서 1:21부터 22절까지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온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이 본문에 의하면 모든 인간이 이미 하나님을 알고 있는 것이 된다. 물론 종교적으로 알고 있다는 말이다. 마치 구약 때의 가나안 종족들이 갖고 있는 종교와 같다.
여기서 구약과 신약의 계시론을 정리해 보면,
1) 구약의 계시
하나님이 자신을 보이시는 것은 ‘선택 작업’을 통해서 진행하신다. 모든 민족 가운데 아무데도 계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선택된 나라인 이스라엘에게만 나타나시는 것을 즐거워하셨다. 다른 민족을 복의 근원으로 삼지 아니하시고 오직 아브라함의 나라만을 복의 나라로 삼으셨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세기 12:2-3)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계시할 때에 오직 자기들에게만 계시함을 알았다. “저가 그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시며 그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보이시는도다 아무 나라에게도 이같이 행치 아니하셨나니 저희는 그 규례를 알지 못하였도다 할렐루야”(시편 147:19-20)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하셨나니”(아모스 3:2)
그렇다면 이방 민족들은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차원에서 무신론자들인가? 아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로마서 1:20-21)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의 의견에 의하면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음이 드러났다. 그들이 어떤 식으로 신의 존재성을 부인하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은 일단 모든 인간이 신의 존재를 알고 있다고 단언해 버리신다. 특히 로마서 1:20에서 ‘핑계치 못한다’는 강한 표현까지 거론된 것을 보면 정말 이들의 마음 속 깊이 신의 존재성과 능력에 대해서 본인들이 핑계하지 못할 무슨 요소를 하나님께서 창조해 집어넣으신 것이 분명하다. 로마서 2:14에 보면, 이방인의 양심도 그들 세계에서는 율법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하셨다. 그러니 하나님이 특별히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을 선택하신 그 취지는 단순히 신의 존재성을 확약시키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참된 하나님의 본질을 계시해 주시기 위함이다. 즉 하나님의 본질을 모르는 이방인이 저들로 ‘계시’ 받았다고 운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 말씀을 받고 보니 단순히 신의 존재성에 대한 인식이 결코 참다운 계시 안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는 점에서 다른 민족과 다른 것이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라는 인간은 모두 종교적이다. 종교성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독려하여 그 민족들과 대결 구조로 몰고 가서 전쟁을 치르게 한다. 이방인을 치는 근거는 오직 하나, 그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누구든지 이스라엘에게만 출현하신 그 여호와라는 하나님을 신봉하지 아니하면 저주와 심판과 멸망을 받는다고 규정된 상태에서 있다. 이 확고한 규정을 위해 이스라엘이 이라는 독특한 국가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 지상에 나타나게 되었다. 이 출현의 의미를 도외시하고 계시론을 정립해서는 안된다. 이스라엘은 이방 민족에게 항복을 요구하고 있다. 결코 그들과 합작해서 보다 더 분명한 계시 정립에 나서겠다는 것이 아니다. 일방적으로 이방 민족의 신은 신이 아니라고 단정해 버린다. 결코 이스라엘이 그들보다 인격적으로, 생활 면에서 훌륭해서가 아니다. 오직 참 하나님의 자기 약속에 따라 ‘선택되었다“라는 바로 그 점에 있다.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신명기 9:5)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아 이제 들으라 너를 지으며 너를 모태에서 조성하고 너를 도와줄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 말라”(이사야 44:1-2)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이사야 4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로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이사야 43:10)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한복음 15:16)
기생 라합이 자기 나라, 자기 민족을 배신하고 남의 나라인 이스라엘 편에 붙은 것은 그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하나님이 참 하나님은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기존의 자기의 신 개념과 이스라엘의 신 개념을 적당하게 혼합하거나 절충하는 것이 아니다. 출애굽기 20:1-3에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이미 기존의 신들이 있었음을 반영하고 있다. 애굽인들이 가나안 이방인들이 결코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의미에서 무신론들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그들의 신은 신도 아니다. “만방의 모든 신은 헛것이요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시편 96:5) 이방들이 주장하는 신 개념은 자신들의 입장이나 그들의 세계 안에서는 통용되는 신이 될는지 모르지만 선택받은 이스라엘 국가 안에서 전혀 신이 아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구태여 그들의 의견을 고려하고 참작할 필요성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택되었음”의 의의가 오직 자기들에게만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지시하시기를 그들과 전쟁하라고 하신다. 결코 타협이나 설득이나 의견 조정을 지시하신 것이 아니다. 아예 “진멸하라”고 하신 것이다. 이들이 진멸당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이스라엘을 통해 나타난 참 하나님을 거부하고 아직도 자신들의 신을 참 신으로 고수하기 때문이다. “너를 섬기지 아니하는 백성과 나라는 파멸하리니 그 백성들은 반드시 진멸되리라”(이사야 60:1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여 너로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무슨 언약도 말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신명기 7: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붙이신 모든 민족을 네 눈이 긍휼히 보지 말고 진멸하고 그 신을 섬기지 말라 그것이 네게 올무가 되리라”(신명기 7:16) “주를 알지 못하는 열방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아니하는 족속들에게 주의 분노를 부으소서 그들은 야곱을 씹어 삼켜 멸하고 그 거처를 황폐케 하였나이다”(예레미야 10:25)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이라도 그들의 신을 섬기면 진멸당한다. “너는 가증한 것을 네 집에 들이지 말라 너도 그와 같이 진멸 당할 것이 될까 하노라 너는 그것을 극히 꺼리며 심히 미워하라 그것은 진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