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904a 부산강의 : 조지 래드 [신약신학]-기독론(2) 녹취
20070904a 부산강의 : 조지 래드 [신약신학]-기독론(2) 녹취
이름 : 한윤범(IP:59.6.189.195)
20070904b 부산강의 : 조지 래드 [신학신약]-기독론(2)
(강의:이근호 목사)
지금 로고스 문제에 있어서 여기 기독론을 이렇게 책에 길게 한 것은 그냥 넘어갑시다. 라고 할 수 없어요. 목사님, 그 이야기 헬라철학이야기, 넘어갑시다 할 수 없는 게 목회를 처음 한 사람한테는 신학교 배운 데로 해요.
여러분, 로고스라 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이고 그건 하나님의 구약 예언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온 것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러 왔다. 그 뜻이라 하는 것은 이미 전에 옛 언약에 주어진 모든 그 말씀이 이제는 육신이라는 걸 통해서 완성태를 본다. 완성의 상태에 들어간다. 그렇게 처음 목회할 때는 그렇게 학교에서 배운 데로, 학교는 이것까지는 안 배워주지만 하여튼 정답은 배운 데로 그냥 말씀이다. 천지를 창조하신 그 말씀이다. 말씀이 육신이 된다.
하는데 목회 십년, 이십년 되면 교인들이 히딩크가 이야기하죠. 나도 4강해도 아직까지도 배고프다. 하는 거 있죠. 교인들은 자극적인 걸 원해요. 특히 오래된 교인들은 이미 식상한 것은 권태를 느끼는 거예요. 사람이 권태를 느끼면 헌금을 적게 냅니다. 항상 자극할 때 자극줄 때 돈이 빵빵 나오거든요. 그러면 자극을 준다 하는 것은 안에 있는 욕망을 간질러야 돼요.
욕망이 뭡니까? 현재 어느 선까지 들어왔으면 선에 머물지 말고 놀라운 신의 경지에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수준 높게 살아보겠다. 수준 있게. 그러면 내 속에 들어온 신의 기를 능력을 부풀어서 계속 확장시키는데 대해서 어떤 정당성을 목사님이 좀 설교에서 보장해 달라. 나는 이만큼 위대하다는 것을 존재할 만한 가능성
그렇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그 말씀이 뭐가 되느냐 하면, 생명이 역시 생명발이 남보다 좀 세네요. 하는 그런 소리 듣고 싶다. 기도발, 영생발이 좀 세네요. 라고 할 거 아니냐. 그러면 예수님의 그 기가 주신 생명이 남보다 큽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거 하기 전에 그 이야기하기 전에 일번, 이번은 했지요. 일번은 헬라 로고스. 로고스는 뭐라 했습니까? 신은 아니고 하나님의 생명 능력이 있고 두 번째 필로의 로고스는 뭐라 했습니까? 신인데 하급 신이다. 또 이렇게 해도 되고, 사실은 필로가 또 헬라철학으로 갔기 때문에 바꿔서 이야기해도 마찬가지에요. 둘 다 포함되어 있으니까 이 안에. 필로란 사람도 맨 헬라철학이니까 둘 다 다 포함되어있어요. 다만 편리에 따라서 하는데. 어쨌든 간에 둘 다 공통점이 뭡니까?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거. 이거는 때려죽어도 양보 못해. 하나님은 한분이다 두 분 될 수 없다.
그런데 김세윤 교수 같은 경우에 그걸 때려치우기 위해서 하나님 옆에 한 분 더 붙였다. 뭐냐? 말씀도 뭐다?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갑자기 몇 분 됐어요? 한 분에서 두 분 되는 것이 전도의 목적이다. 김세윤 교수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세 번째 말이 뭐였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됐다 할 때 말씀이 육신이 됐다. 하나님의 성경 말씀이다 할 때, 이 세 번째 경우가 되게 되면, 아까 이야기한 토착민에게 알아듣는 소리는 이다, 아니다? 아니지요.
세 번째 맞는 이유가 뭐냐? 아까 이야기했지요. 말씀이라 하는 것은 알아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약성경처럼 구약에 있는 메시아 오기를 대망하는 사람, 고대하고 고대하는 사람들에게만 다가오는 메시아여야 하기 때문에 못 알아듣는 말씀이라는 사용을 했다. 이래 볼 수 있어요.
누가복음 1장에 보면 과부 나오지요. 과부의 평생소원이 뭐였습니까? 내 평생소원 이것 뿐. 과부의 소원이 뭐였습니까? 메시아 보는 것. 시므이 소원이 뭐였습니까? 메시아 보는 거예요. 지나 개나 소경된 자나 문둥병자들이 뭘 기다렸습니까? 다윗의 자손이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메시아 기다린 거예요.
유대인들만 메시아 기다린 게 아니고, 유대인의 구약을 보면서 비록 이방인이지만 유대인의 메시아가 진짜 메시아이라는 걸 알고, 그 메시아 오기를 학수고대한 사람에게만 알아먹기는 말씀. 그렇다면 그 말씀은 뭐냐? 구약에 예언된 예언의 말씀이에요. 태초에 말씀이 계셨으니. 예언된 말씀이 계셨으니, 그 말씀이 조금씩, 조금씩 사람들에게 빛으로 생명으로 왔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두웠기 때문에 그 빛을 못 알아먹었다.
이 마지막 때에 또 누굴 보냈어요? 마지막 때 요한복음 1장에 누굴 보냈습니까? 세례요한을 보냈지요.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여기 보세요. 9절에 보면, “그가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해서 증거하는 것이라” 그 빛을 증거하는 사람들을 세례요한을 두고 하잖아요. 이 말은 이 뉘앙스가 뭐냐 하면, 세례요한만 증거하는 게 아니고, 그전부터 태초부터 계신 말씀께서 말씀 따라서 세례요한 같은 선지자를 계속해서 보내셨다. 라는 것을 이미 깔고 하는 이야기다 말이죠.
결국 요한복음은 헬라철학과 어떻게 엮어보려는 책이 아니고, 결국 신약의 구약성경이에요. 구약성경을 그대로 배경으로 깔고 용어는 신약적인 용어를 사용해서 그 구약의 말씀대로 완성했습니다. 하는 그렇게 해야 맞다는 겁니다. 그게 요한복음 구석구석에 보면, “말씀을 응하게 함이라” 하는 그 말씀. 이게 공관복음에도 나오지만 요한복음에도 나오거든요. 말씀을 응하게 함이라 하는 말을 한 걸로 봐서 하나님은 예언 없이 일하는 법은 없다.
그래서 구약 무시하는 놈, 너거 이미 죽었다. 구약을 믿거든 구약대로 오신 분이 바로 육신이 되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라고 한 거예요. 그 증거가 어디 있느냐 하면, 요한복음 1장 17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율법을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맞잖아요. 율법은 모세로. 벌써 요한복음 자체가 헬라철학하고 전도하려고 사람에게 납득하려는 책이 아니고, 모세 율법 모르거든 다시 새로 배워라 이 말이에요. 율법은 모세로 왔지만 이제 마지막 때는 율법을 준 게 아니고, 율법의 완성태, 말씀 자체가 이제는 육신이 된 거죠. 율법은 모세로 왔지만 율법 이전에 뭐가 있었다? 율법을 율법 되게 하는 말씀이 먼저 있었다.
그 말씀이 육신이 되었으니까 이제는 율법 가지고 육신을 해석하는 게 아니고, 말씀 가지고 육신을 해석해야 된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모세가 준 율법 가지고 들이대면서 뭐라 합니까? 예수 당신이 오실 메시아 맞나, 안 맞나 우리가 조사해 할게. 이것은 잘못됐다 이 말입니다.
이제 요한복음의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 하는 것은 율법의 이전의 말씀. 이게 저는 이렇게 봅니다. 말씀이 계신데 그 말씀이 로고스죠. 말씀이 계신데 이 말씀이 그 당시의 헬라의 개념에 의하면, 말씀은 말씀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신으로 살아계신 선재하신 어떤 분으로 인격으로 그렇게 헬라철학에서 있기 때문에 그 용어를 써서 로고스라. 어떤 로고스란 분이 계신데 그 내용을 들어보면 하나의 예언이었다. 하나의 말씀이었다.
그 말씀이 육신이 온 것은 그 말씀을 육신을 통해서 다~ 이루게 함이라. 그래서 요한복음 19장에 보면, 십자가에 달릴 때 뭐캅니까? 다 이루었다. 뭘 이루었는데? 요한복음 1장 나오잖아요. 말씀이 육신이 되었으니까 육신을 통해서 독생자 영광을 다 이룬 거예요.
자, 이제 제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제일 먼저 이야기했던 것. 과연 기독론, 영생 이렇게 분류할 수 있느냐? 저는 그렇게 분류한다는 그 자체가 우리의 죄성을 드러내 것 밖에, 분류 자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고, 분류 안 하면 못 알아듣는다는 그 자체가 우리에게 이미 우리 입장을 고려한 것이 들어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 입장을 고려하지 말고 주님께서 직접 보는 걸로 하면 되지 않겠느냐? 우리는 그래 할 수 없지요. 우리는 결국 뭘 해도 그게 나쁜 줄 알면서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요. 분류 할 수밖에 없어요. 분류를 안 했다고 해서 안 한 걸로 구원 받을 수 없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성령이 아니니까. 이 분류를 통해서 우리의 이러한 부족함과 우리의 미흡함과 우리의 죄성을 드러내면 그걸로도 충분히 의의가 있다 이래 보겠습니다.
자, 여기에 보면 로고스 개념에 유대적 개념의 배경은 지혜가 인격화된 개념을 더한다. 계속해서 로고스 이야기가 계속 나옵니다. 이게 로고스, 기독론에 대해서 쭉 이야기했는데. 로고스는 창조의 대행자다. 골로새서 1장 16절. 모든 것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왔다. 그래서 선재하신 어떤 그 분이다. 이렇게 돼있다 이 말이죠.
여기서 아까 괄호했는데,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 이 말을 부산 사람 같으면 이래 하면 돼요. 태초에 하나님이 계시니 그분이 하나님과 함께 천지를 다 만들었다. 이렇게 틀을 잡아놔야 되죠. 그 안에 깨보면 그분은 예언의 말씀이 되고. 첫 번째 말씀이 계시니. 라고 할 때 그 말씀은 우리가 말하는 것만 생각하는 한국사람 심정에서는 하나님의 인격이라는 개념이 포함이 안 돼 있잖아요. 예언하시는 하나님이라고 길게 집어넣으면 그게 적당하다. 미리 말씀하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이 함께 계시니 그 말씀하신 대로 이루기 위해서 오셨다. 이게 무난하다 이렇게 저는 생각합니다.
그 다음에 [메시아] 봅시다. 여기서 메시아 대목에서 래드는 좀 특이한 이야기를 해요. 무슨 특이한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그리스도가 고유한 이름이 아니라 명칭으로 사용했다. 이 말이 신학을 좀 한 사람한테도 상당히 어려운 말이에요. 그리스도를 고유한 이름이 아니고 명칭이다. 요한복음에서는 어디서든지 두 가지 예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가 고유한 이름이 아니라 명칭으로 사용됐다. 그 이름은 예수님이지 예수 그리스도는 아니다. 라고 여기 책에 나와 있는데 이렇게 이야기하는 취지가 뭐냐 이 말이죠.
그것은 과연 그런가 그거는 요한복음에서 한번 봅시다. 요한복음 1장 20절.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이래 돼 있잖아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하니까 이 그리스도는 이미 하나의 명칭으로써 그 당시 많은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이 고대하고 또 고대했었다 이 말이죠.
결국 이건 뭐냐 하면, 세례요한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이 말은 그들이 기대하는 것을 비켜가는 듯한 그들이 오는 코스 있잖아요. 그 코스대로 안 오는 코스다 이 말이죠.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는 식으로 나는 온다. 이 말이거든요. 말이 어려워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라는 식으로 온다는 말은 그들의 의견을 들어주는 것도 아니고, 그들의 의견을 반대하기 위함도 아니에요. 그들에게 동의하는 것도 아니고, 반대하는 것도 아니다. 이래 되는 거예요.
논리에서 이래 돼요. 이거는 안경이다. 이거는 안경 아니다. 둘 다 이렇게 이야기할 때 이 이야기가 둘 다 성립되려면 뭘 해야 됩니까? 이거는 철이거든. 이러면 되거든요. 그죠? 지금 세례요한이 이야기하려는 것은 너희들이 알고 있는 그리스도 명칭, 그거 붙들어 봐도 이게 맞았다, 이게 틀렸다 이래 돼버리면 그들의 명칭에 또 합류한 셈이 되는 겁니다.
오늘날 목사님들이 복음을 전할 때 이미 기존의 복음이다, 아니다. 라고 알고 있잖아요. 복음입니다. 아니다. 양쪽 다 깨는 복음을 전해야 돼요. 그래서 설교시간에 못 알아듣는 소리를 해야 돼요. 뭔가 교인들이 기대하고 고대하고 있잖아요. 그걸 비켜가야 돼요. 비켜가면서 아하, 내가 먼저 선입관 잡은 선입관 자체에 문제가 있구나. 있지. 그게 뭡니까? 죄고, 죄가 뭐라 했습니까? 자기 의, 자기 존재 정당성. 나는 존재해도 당연해. 나는 안 죽어야 돼. 이런 존재 정당성, 이게 죄 아닙니까.
그러면 이 전체를 자기 의, 자기 정당성, 자기 죄를 비켜가는 식으로 하려면 결국 뭐냐 하면, 결국은 제가 이야기합니다. 관심사입니다, 관심사. 교인들이 교회 올 때 목사님, 교회 왔습니데이. 저 착하지요. 자기 부인할까요? 예, 부인할게요. 내 미워할까요? 미워할게요. 하고 있다고요.
결국 미워하고 부인하든 간에 그 관심사가 누굽니까? 결국 자기 아닙니까. 그런데 설교를 다 듣고 난 뒤에 아하, 내가 한 주일 동안 살아보니까 예수님을 불렀지만 그 부른 이유가 뭐냐 하면, 주여, 내가 관심 가진 만큼이나 좀 나에게 관심 가져주세요. 내 지금 큰 사업 벌렸는데 주님, 좀 도와주소. 내가 지금 사업에 신경 쓰는 것만큼 신경 좀 써주소. 라고 나한테 그 신경 쓰기 때문에 누가 소외됐습니까? 십자가에 관심이 없잖아요. 십자가에 대해서. 주를 위해서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리니. 이런 관심이 없었다고요.
관심사가 야, 말씀에 관심사가 없어요. 말씀을 이용할 생각을 했지, 말씀 자체에 관심이 없어요. 말씀 자체에. 그런데 설교 듣고 난 뒤에 목사님이 여러분 관심사가 문젭니다. 복음이냐, 아니냐, 잘났냐, 못났냐, 착하냐, 안 착하냐 그것도 생각하지 말고, 세례요한의 관심사가 뭐예요? 지금 그들을 훈계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세례요한의 관심사는 이래 보면서도 사실 누굴 봅니까? 오실 그분한테 눈을 돌리는 겁니다. 나는 그리스도 아니거든. 됐거든. 나는 아니거든. 결국 이야기하려는 건 뭐냐? 오신단다. 그분이다. 한데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 명칭하고는 전혀 수준이 그냥 그런 개념이 영역이 완전히 다르고, 다른 엉뚱한 개념으로 왔다.
거기서 더 중요한 것은 이런 나를 빛을 증거한다고 용납할 의도 있느냐? 야, 그게 어려워요. 이런 세례요한을 너희들이 먼저 용납할 의도가 있느냐, 없느냐? 있으면 나한테 세례 받고, 없으면 빛이고 생명이고 너희에게 없고. 이래 된다고.
그러니까 그 당시에 제사장, 서기관이 묻지요. 니가 선지자냐? 그래서 뭐라 합니까? 아니다. 니가 그리스도냐? 아니다. 그럼 니 뭐고? 나는 이사야 하는 것처럼 소리다. 생각해 보세요. 이사야 말씀도 소리라면 이거는 선지자 맞잖아요. 이게 해석이 어렵다니까. 자기는 선지자 아니라 했거든요. 그런데 니 뭐고 하니까 난 선지자 이야기하는 것 같이 소리라 했잖아요. 그러면 선지자 맞잖아요. 세례요한이 맞잖아. 맞으면 선지자 맞다. 이래 나와야 될 건데 왜 아니라고 왜 하느냐 이 말이죠.
그것은 자기 자신이 외치는 것조차도 오실 그분의 말씀 성취 차원에서 내가 지금 세례요한 짓하고 있지,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니듯이 너희들도 나를 알아보고 못 알아보는 것도 니가 결심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장차 오실 그분이 내 뒤에 곧 오실 그분이 구원받을 사람 같으면 날 알아볼 거고, 구원 될 놈 아니면 못 알아본다는 그 주도권을 누구한테? 주님한테 넘기기 위해서.
그렇다면 목사가 설교할 때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설교하는 게 아니고, 뭐냐 하면, 여러분들이 내 말을 알아듣고 못 알아듣고 난 생각 안 합니다. 그건 누구한테 있다? 하나님의 개입, 주님한테 달렸습니다. 하는 식으로 설교를 해야 돼요. 아이씨, 이래 설득해도 안 먹어주나. 이래 갈 게 아니고, 아이고, 믿고 안 믿고 주님 알아서 결정할 문제지 목사, 내가 개입할 문제가 아니지. 라는 식으로 설교를 할 수 있어야 돼요.
그래서 나중에 나오잖아요. 나는 쇠해야 되고, 그분은 흥해야 된다. 교체 멤버. 하나는 빠지고 하나는 등장하고. 결국 이건 뭐냐 하면, 세례요한에 관심 두다가 세례요한에 눈길 두다가 세례요한이 빠지면 세례요한에 눈길 둔 사람도 함께 세례요한과 더불어서 쇠해야 되죠. 그런데 세례요한이 쇠하면서 기분 나빠했습니까? 아니잖아요. 왜? 태양처럼 떠오르는 그 주님의 흥함에 뿅 가서 마치 혼인잔치에서 신부가 신랑을 맞이할 때 신부가 기분 나빠 합니까? 아, 나 내가 뭐고? 이럽니까? 신랑 앞에서. 안 그러죠. 신랑이라고 기뻐하잖아요.
그 기쁨에 세례요한처럼 함께 꺼지면서 세례요한의 기쁨, 신랑을 맞이하는 기쁨에 함께 동참할 때 결국 이건 뭐냐? 관심사가 바뀌면서 오는 어떤 희열, 기쁨이죠. 그래서 교인들은 결국 뭐 해야 되느냐 하면, 관심사가 바꿔서 오는 기쁨이여야 되지, 여전히 하나님 믿어서 이익 봤다. 이런 자기 관심사를 유지하게 되면, 그거는 교회 백 날 나와도 소용없어요. 그거 소용없는 거예요.
내가 꺼져간다는데 오는 기쁨. 그러니까 목사가 설교하면서 오늘 설교 되게 잘했지. 라고 자기가 안 꺼지고 자기 설교 잘했다에 계속 관심을 내 오늘 설교 못했다 계속 관심을 둬 버리면, 교인들은 다 기뻐하는데 목사 혼자 그 기쁨에서 소외되는 수가 있어요. 목사도 인간이니까. 참 이거 어렵지요. 목회자가 어렵습니다. 어려운 게 아니고 불가능하죠.
결국 설교자는 설교 잘했다, 못했다가 아니라 주여, 오늘도 말씀 전하게 해 주신 것만 해도 감사합니다. 이래 되는 거예요. 말씀 전하게 해주신 것만 해도 감사하고 내일 서지 말라 하면 내일 안 설게요. 이건 예레미야처럼 하기 싫어도 내 속에서 역사하게 되면 그 자체를 감사하면서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에요. 주여, 내가 내 권리 없습니다. 권리는 주님 몽땅 다 가져갔잖아요. 다 가져갔는데 내가 무슨 권리 있겠습니까? 목사 본인부터 관심사가 목회자 자기한텐 없어야 돼요. 빠져야 된다고. 자기한테 관심사가 있게 되면 신학을 하게 돼요. 복음을 생각하는 게 아니고, 말씀을 생각하는 게 아니고 자꾸 신학을 하게 돼요. 신학을 하게 되면 한 수 가르치려고 한다고. 자꾸 설교시간에 가르치려고 한다니까. 그러면 설교에 자기 부인이 안 되죠.
자, [인자] 봅시다. 인자에서 여기서 이제 관심사입니다. 메시아에서 한 것은 기존에 메시아 개념은 메시아가 아니었다. 왜? 거기에 뭐가 섞였다? 나에 대한 관심사가 섞인 메시아는 메시아가 아니에요. 나에 대한 메시아는 아니고, 메시아가 뭘 하든지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메시아가 알아서 한다는 게 하나님의 개입이 된 메시아만 진짜 메시아다 말이죠.
그러니까 세례요한은 자기는 쇠해야 된다는 거예요. 같이 꺼지는 거예요. 왜? 신랑이 뜨는데 신부가 지 자랑하면 안 되잖아요. 신부는 신랑 보고 기뻐하면 그만. 그게 요한복음 3장 보면 나오지요. 난 신랑만 보면 댁길이다. 기분 좋다 말이죠. 이게 늘 유지되면 얼마나 좋겠어요. 이게 늘 유지되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목사 본인은 그렇게 주님만 관심 있어 설교했는데 끝나고 난 뒤에 깔짝깔짝 교인들이 건드리죠. 목사님 설교 때문에 상처 받았습니다. 책임지소. 상처, 주께서 주신 거예요. 주께서 주신 건데 나보고 하지 말고 주께서 주신 거예요. 상처 주려고 한 게 아니고, 나도 나한테 관심 없습니다.
인자에 대해서 이 사람은 중요한 대목을 거론했어요. 아주 중요한 대목인데 그건 잘 거론했어요. 뭐냐? 인자=들린다. 앞에 하나 넣는다면, 부~웅 들린다. 자, 이게 지금 이 문제 놓고 래드가 고민에 빠졌어요. 왜 고민에 빠졌느냐 하면, 이 문제에 대해서 해답을 준 신학자가 없어요. 지금까지.
인자가 왜 들려야 하는가? 공관복음에서 인자는 뭡니까? 들리는 것이 아니고, 인자는 죽어야 된다. 고난이죠. 공관복음에선 인자= 뭡니까? 고난 받는 자. 고난 받는 자 이거든요. 이거는 쉽지요. 왜 쉬우냐? 이게 흔히들 엉터리 같은 해석하는데, 인자는 뭐냐? ‘인자=사람’이다. 사람 안에 뭐가 들어있다? 죄가 들어있다. 죄가 들어있으니까 뭣을 치러야 된다? 죄 값을 치러야 된다.
따라서 인자는 사람의 아들이니까 아담의 아들이니까 아담의 아들은 우리와 같이 죄인이니까 십자가에서 뭐 해야 된다? 고난 받고 죽어야 된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내다보기 위해서 뭐 했다? 인자. 나는 사람의 일부다. 이거는 뭔가 설득력이 된 것 같이 보이지요. 그런데 인자가 들린다는 거, 이건 도대체 어디서 나온 해괴망측한 사고방식이냐 말이죠.
아까 이야기 다시 해봅시다. 요한이 그 당시 요한복음 가지고 전도를 할 때 그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인식구조가 얽힌 것은 언어지요. 용어. 그들의 이런 용어, 일상용어들이 있단 말이죠. 지금 요한이 그들에게 요한복음을 전하면서 요한복음을 전하죠. 그러면 할 때 그들이 일상 사용하는 용어는 다 끄집어냅니다. 다 가져와. 가져와 해서 그들이 사용하는 이해되는 납득되는 개념을 가지고 짜깁기 하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행적을 설명하려고 했다. 학자들은 이렇게 본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인자, 분해하면 뭐죠? 무슨? 사람의 아들. 뉘앙스가 뭐예요? 그러니까 사람의 아들, 그 당시에. 어이 그분이 육신이 돼서 사람의 아들이거든. 라고 할 때 자,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에요. 사람의 아들이란 말은 뉘앙스가 뭡니까? 뉘앙스는 그분은 사실은 우리하고 똑같은 팔자거든. 라는 그런 뉘앙스와 강하지요. 그분, 하나님이지만 사람의 아들이야. 우리하고 똑같아. 사람하고 친근하지 하나님하고 친근하지 않잖아요. 인자라는 말 속에.
그런데 그분이 들려야 한다는 이것은 왜 그러냐 이 말이에요. 그래서 기껏 그들이 지어내 주장한 게 뭐냐 하면, 지상에서 하늘까지. 그러니까 품질이 승귀라 승귀. 품질이 영광을 받는 것, 더 나은 품질이 되는 거예요. 초라한 사람이 대단한 인물로 하나님으로 승격될 때 인자는 들려야 된다. 그러니까 인자란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인자가 들린다는 말을 초라한 자가 위대하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인자가 들려야 한다. 라는 식으로 사용했다는 겁니다. 여기서. 그런 주장을 한 거예요.
그런데 래드는 거기에 대해서 이렇게 해요. 아주 중요한 이야기에요. [인자는 사람 가운데 거하신 하나님의 장막이요, 이 땅에 현존하는 하나님의 은총이요, 하늘의 문이다.] 이래 했어요. 이거는 아까 방금 기존 신학자들 이야기하고 다르지요.
인자는 사람의 아들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여러분 사람의 아들, 사람의 아들, 사람의 아들 아십니까? 가는 곳마다 사람의 아들이라고 표현한 것은 뭐냐? 하늘의 문이라는 겁니다. 유일한 하나님의 출입구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성경적으로 맞는 것 같아요. 맞-는-것-같아요.
맞는 것 같은데 논리적으로 뭔가 삐꺽거리는 모습이 있어요. 여러분, 사람의 아들이거든요. 그런데 문이거든요. 이게 뭔가 왜 하나님의 아들인데 문인데, 이건 이해되는데 아, 하늘에서 오신 분이 하늘의 문이 축 쳐져서 땅에 까지 접촉돼서 두레박, 두레박 원리. 하늘에서 두레박이 내려와서 축 쳐졌단 말이죠. 소의 혓바닥처럼. 하늘이 있고 땅이 있잖아요. 혓바닥처럼 축 쳐지면 혓바닥처럼 비록 땅에는 닿았지만 그 원뿌리는 뭡니까? 하늘에 있으니까 축 쳐져서 데려간다.
그럼 이건 뭔가요? 사람의 아들이 아니고 누굽니까? 하나님의 아들 맞다 이 말이죠. 그래서 심지어 요한복음에 보면 이 개념이죠. 하늘에 원래 사시는 분인데 원래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에 거하기 위해서 잠시 왔다가 이제는 본 나라, 내 나라는 이 나라가 아니고 따로 있다고 데려간다 이 말이죠. 너희는 아들이 아니고 내가 아들인데 이제는 아버지가 나의 아버지인데 이제는 누구 아버지다? 나의 아버지만 아니고, 너희 아버지라 할 때 하나님 아들 개념이 맞잖아요.
지금 인자가 뭡니까? 사람의 아들인데 여기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이 말이 뭔가 설명이 필요한 대목이다 말이죠. 그래서 이걸 보면서 하하, 래드 이분이 좀 뭔가 부족한데, 부족한데, 부족한데 하면서 제가 그 뒤까지 계속 봤어요. 뒤에 영원한 생명 뒤에 뭐도 봤느냐 하면, 그리스도의 삶 이전까지 앞에 것, 종말까지 보면서 아아, 래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했느냐 하면, 뭔가 빠졌어요. 지도 뭐가 빠졌는지 모르는데.
내가 찾아서 일부러 빠진 부분을 집어넣어주면 이렇습니다. 인자가 하나님의 문, 이렇게 바로 가면 안 되고, 중간에 하나 거쳐야 돼요. 뭘 거쳐야 하느냐 하면, 인자라 하는 것은 종말론적 개념이다. 이게 하나 붙여야 돼요. 이게 책에 딴 데 보면 나와요.
자, 이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인자가 종말론적 개념이라면 이게 뭔 뜻이냐 하면, 현재 우리가 사는 시대는 크로노스 시대라 해요. 크로노스라 해서 직선 시간론. 과거, 현재, 미래. 기차 철로가 한 방향으로 흐르지요. 똑바로 흐르듯이 직선으로 흐르잖아요. 직선으로 열여섯 살 때 있었고, 청소년, 청년 때 이제는 중년기 직선이잖아요. 다시 돌아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돌아가죠. 한 쪽으로 과거에서 방향을 어디로? 미래로. 이걸 시간으로 본 거예요.
제가 [구원과 시간의 연관성]이라는 글을 썼더니만 어느 목사가 그걸 보고 평하기를 이근호 목사는 시간론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카고 있어요. 여러분, 시간에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크로노스 시간이 있고, 두 번째 카이로스 시간이 있고, 세 번째 아이온이 있습니다.
크로노스라 하는 것은 직선입니다. 전부다 헬라어이니까. 헬라에는 시간을 따로 분리한다 이 말이죠. 심지어 동양에도 시간을 다 분리해요. 카이로스는 시간에 대해 때라고 때. 같은 말로 사건. 아이온이란 말은
크로노스는 뭐냐 하면, 항상 모든 게 현재에요. 그러니까 과거, 현재, 미래로 돼있는 현재에요. 과거, 그 때가 뭐예요? 우리는 여기서 보면 과거지만 과거, 그 때는 뭐였습니까? 현재였지요. 여기서 볼 때 과거라고 불리는 그 때 그 당시 현재지요. 현재는 지금 현재라 보는 현재고. 미래는 앞으로 내일 되면 내일이라는 현재가 되겠지요. 현재 밖에 없어요.
근데 아이온의 특징은 뭐냐? 현재는 없고, 과거와 미래만 있는 시간이에요. 희한한 시간이죠. 현재는 없고, 과거와 미래만 있다. 그러면 결국 뭡니까? 시간을 크로노스를 항상 끊어버리는 끊어서 현재를 과거 아니면 미래로 만들어버리는 그러한 솟아오르는 그러한 어떤 시간이죠.
그러면 이건 뭐냐? 이걸 가지고 묵시라 합니다. 아이온. 묵시라 하지요. 여기서 1, 2, 3 해도 뒤에서 또 묵시 따로 할 수 있지만, 이 세 가지 다 아닌 것이 묵시라 하지만 묵시를 아이온 쪽으로 볼 때 묵시라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묵시 세계와 시간이 만날 때 아이온처럼 만나는 거예요.
만날 때 그 만나는 지점을 가지고 카이로스라 하는 때라 하는 거예요. 아이온이 있어서 시간과 접촉하게 되면 카이로스가 되고, 그 카이로스에서 쪼개지면 뭐가 돼요? 크로노스가 되는 거예요. 아, 이거는 과거, 아 ,이거는 현재, 아, 이거는 미래 이래 되는 거예요. 복잡한 이야기를 하면 여러분 못 알아들으니까 쉽게 이렇습니다.
지금 이 저자도 이야기했지만 이거는 너무나 획기적인 게 크로노스만 있는 시간에는 과거는 없는 거예요. 미래 있습니까? 미래는 없지요. 현재 있는 것은 무조건 현재만 있지요. 내일도 또 현재만 있고. 현재만 있는 곳에 미래가 먼저 들어왔다? 이게 말이 됩니까, 안 됩니까? 예? 이게 지금 자갈치 시장 아줌마한테 물어보세요. 오늘 며칠인데요? 9월 4일입니다. 그런데 저한텐 지금 9월 5일이거든요. 미쳤다고 합니다.
이 어려운 것이 요한복음에 어렵게, 어려운 게 아니고 불가능할 정도로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있는 거예요. 그 정도로 어려운 게 뭐냐? 인자 개념이라 하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종말’이라 하지 않고 ‘종말론적’이라 하지요. 종말론적은 현재 이 세대에서 오는 세대에 섞이는 게 종말론적이고, 종말은 진짜 끝나버리는 게 종말이고.
그래서 성경을 해석할 때 신약을 해석할 때 어떻게 해석해야 된다? 종말론적으로 해석해야 신약성경이 풀려요. 종말론적으로 해석 안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누구냐? 세대주의자에요. 세대주의에서 좀 더 나가면 영지주의 돼버립니다. 영지주의는 더 이상 구약성경은 필요 없습니다. 왜? 지나간 한물 간 거기 때문에. 과거에 그랬지 뭐. 과거에. 모세 그랬어. 지금 내가 모세 지나갔는데. 다윗? 다윗이 그랬었었어. 지나간 건데 뭐. 성경은 가위 가지고 잘라야 돼. 뭐냐? 구약성경을 갖다 버려야 돼. 한 때 무서운 하나님인데 지금은 무슨 하나님? 자비로운 하나님. 이게 영지주의자잖아요.
복음하면 신학하지 말라는 거 아닙니다. 신학은 평생 해야 돼요. 하지만 신학을 한 나 주체에 대해서 관심 둔다면, 그 신학은 누구한테 있습니까? 그리스도한테 관심이 아니고, 나 자신에게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학을 하면서 관심사는 주님에게 두는 그것이 복음이에요. 그런데 목사가 설교하면서 신학을 이야기해 버리면 교인들이 야, 오늘도 신학 몇 개 배웠다고 또 관심사를 자기한테 가지고 그냥 설교, 예배 마치고 자기 집에 가버려요.
그래 놓고 뭐캅니까? 목사님, 요한복음 20장 31절. 니가 요한복음 영생 얻었는데 이제는 교회 따박따박 나오면 안 됩니까? 여러분, 다시 이야기합니다. 종말론적은 따박따박 나오고 싶어도 못 나오게 만들어요. 왜? 종말론적으로 아는 사람들은 나한테 주도권이 있는 것이 아니고, 나한테 믿음을 주신 주님이 내가 교회를 나오든 안 나오든 거기에 누가 함께 있습니까? 주님이 함께 있고, 요한복음처럼 주님과의 사귐이 있어요.
그 사귈 때 뭐라고 사귑니까? 종말론적으로 사귑니다. 다른 말로 하면 아이온이 크로노스 시간을 갖고 나를 박살내는 거예요. 니가 이 순간 뭐 생각했노? 저는 과거 생각했습니다. 그럼 뭐 생각했노? 저는 내일 뭐 할까 미래 생각했습니다. 에라 죽어라. 주님한테는 미래도 없고, 과거도 없어. 하하, 주님 안에선 천년이 하루 같고 천년이 하루 같구나.
베드로후서에 그 이야기할 때 뭐냐 하면, 지금이라도 하늘에서 무슨 불 떨어진다? 유황불 떨어질 수가 있음을 가지고 자갈치 시장에서 장사를 하든지 뭘 하란 말이야. 지금 결혼식 할 때 뭘 생각하라? 아이온, 묵시가 떨어지면 결혼식 하면서 뭘 생각해야 됩니까? 이젠 이 신랑하고 오늘 오후에 신혼여행 제주도 가고, 그 다음 내일 해서 이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베드로후서처럼 말씀이니까 말씀은 아이온이니까 그 묵시세계가 지금 나에게 떨어져도 지금 결혼식 다 때려 쳐도 주여, 주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해라. 이게 바로 관심사에요. 관심사. 이게 관심사 아닙니까.
목사가 설교하면서 지금 이 순간 불심판 나도 주여, 오늘밤 낙원에 있게 해주옵소서. 라는 그런 관점에서 설교해야 된다. 지금 오늘밤, 내일 우리교회는 없습니다. 자, 오늘로 끝났는데 끝나도 좋습니까? 주님 지금 낙원에 간다면. 그런 기쁨. 아, 주님께서 나의 미래가 있는 게 아니고, 내가 없으면 뭐가 없습니까? 내가 없으면 나의 미래도 없고, 나의 미래 자리에 뭐가 있습니까? 주님의 미래만 있을 뿐이죠. 주님의 말씀 적용만 있을 뿐이죠. 그게 성도의 삶입니다.
뒤에 나중에 성도의 삶 나오는데 영원한 생명 나오는데, 제가 미리 말씀드립니다. 영원한 생명, 지금 이 시간 다 할 수도 있지만 영원한 생명이고 한 이야기가 뭐냐? 인자 개념마다 다르다. 인자 개념이 뭐라고? 뭘 몰고 온다? 묵시를 몰고 와요. 묵시를 몰고 와서 우리는 뭐만 생각한다? 에이, 지나간 것은 과거,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어. 지금은 현재 누가 남았다? 나만 남아있다. 라는 사고방식을 뭐로 바꾼다? 종말론적 사고방식으로 완전 박살내는 이걸 누가 한다? 인자가 하신다.
그 인자가 하실 때 어떻게 하느냐? 인자가 역사 개념에서 뭐로 바뀐다? 크로노스 개념에서 아이온 세계, 묵시개념으로 바뀔 때 들린다. 인자는 들린다. 왜 들리느냐? 이제부터는 종말론적으로 자기 백성을 관리하기 때문에 들린다. 니고데모가 하죠. 예수여, 어떻게 사람이 거듭날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 한 마디 했어요. 인자는 들려야 하리라.
이 무슨 뜻입니까? 니가 하는 게 아니다. 니가 하는 게 아니고, 바람이 하는데 그 바람은 그냥 바람이 오는 게 아니고 들린 바람이 온다. 이 말은 인자가 들린 인자로써 종말론적인 통치개념을 가지고 찾아들면 육의 사람도 영의 사람으로 얼마든지 거듭날 수 있다. 하나님이 이 일 하려고 독생자를 주셨으니 저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하리라.
영생은 뒤에 보면 영원한 영생은 뭐라 하느냐? 여기서 저자가 영생은 뭐냐? 간단하게 영생이라 하는 것은 두 자로 이 사람은 잘 이야기했어요. 뭐냐? ‘사귐’이다. 사귐이다 하니까 지금 보세요. 인자가 들린다는 개념을 빼버리고 바로 사귐 들어가 보세요. 어이 됩니까? 그러면 관심사가 누굽니까? 나, 주님하고 친구거든. 왜? 사귀니까. 이래 된다 말이죠. 그죠?
그러면 여전히 사귐 속에서 누가 계속 남아 있어요? 결국은 자기 위주로 사귐이 일어나지요. 자기 위주로. 주님이 날 사귀는 것이 내 요청에 의해서 사귀는 게 아닌데 마치 내가 영생 얻기 위해서 사귀는 것처럼 사귄다 말이죠. 내 너무 진도 너무 많이 나갔네. 그건 좀 있다 이야기합시다.
인자가 들린다 하는 것은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인자가 들리는 것은 인자가 영광을 받은 거예요. 인자가 영광을 받는 것은 어떤 경우에 영광을 받느냐 하면, 인자로부터 모든 말씀을 다 완수가 완성이 될 때 영광을 받아요. 그 완성이 십자가로 영광이. 인자는 밀알이 되어서 썩어서 열매를 맺고 그래서 들리고 영광을 받은데, 그때부터 이 세상은 누구 세상이냐 하면, 심판 받는 것도, 구원하는 것도, 자기 백성 하는 것도 전부다 누구 책임 하에 이루어지냐 하면, 들리신 예수님 책임 하에 모든 게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구원받고, 안 받고는 누구 손에 달려 있습니까? 예수님 소관에 달렸어요. 이게 뭐냐? 아들이 자기 원하는 자를 마지막 때에 살리시고. 이래 돼있어요. 요한복음 21장 마지막에 보면 이래 되어 있지요. 베드로야, 니가 원치 않는 곳으로 갈 것이다.
저는 이 대목에 큰 은혜를 받았어요. 얼마 전에. 원치 않는다는 말이 뭔 뜻이에요? 주님이여 잘 사귈게요. 란 말이 성립이 안 돼요. 내가 주님과 잘 사귈 게요가 성립이 안 된다니까. 왜냐하면 원치 않는다는 것은 나의 원함을 완전히 박살내는 거예요. 내가 뭘 원하는지 계속 살아봐야 알잖아요. 그죠? 살아보면 원하는 것도 바뀌고 많이 바꾸잖아요. 그것조차도 주께서도 계속 원치 않는 쪽으로 비껴간다.
결국 사귐이 뭐예요? 내가 원하는 것은 젖히고 주님 원하는 몰아넣는 것이 결국은 사귐이지, 내가 원하는 대로 사귀서 뭐 되겠지 하는 것은 그거는 진정한 가짜 사귐, 사귐이 아니다. 그래서 사귐 안에 있으면 또또 내가 원치 않는 대로 될 거야. 또또. 근데 그게 굉장히 기쁘죠. 왜냐하면 나는 신랑만 있으면 기쁘니까. 이게 하나님의 개입입니다.
한번 정리하면, 인자의 개념은 들리는 것이다. 들린다는 것은 이런 직선 시간 밖에 모른 이거야. 합류해서 그것을 영원한 시간이 같이 합세를 해서 주도권이 누구한테 있다? 직선 시간을 아는 우리한테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시간대를 갖고 있는 영원한 시간대를 갖고 있는 그 인자께서 자신을 우리를 관리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인도하는 이 개념일 때 그것이 인자 개념이죠. 인자한테는 그만한 자격이 있고 권리가 부여되어 있어서 개념을 인자란 개념입니다. 그 인자 개념은 물론 다니엘서에 나온 겁니다. 인자가 선재하신 분이 오셔서 그렇게 한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아들] 봅시다. 하나님의 아들은 제가 아까 설명했습니다. 혓바닥, 혓바닥. 너희들은 어디서 낳고? 땅에서 낳고. 나는 어디서 낳고? 하늘에서 낳고. 그러면 하늘에서 계신 분이 가만있었습니까? 하늘에 계신 분이 땅에 혓바닥처럼 내려오니까 땅에 있는 사람이 뭘 못 알아본다? 주님 하시는 걸 못 알아보고, 땅에 있는 사람은 뭐만 이야기해요? 땅에 있는 것은 땅에 속한 이야기만 하고, 하늘에 속한 사람은 뭐만 이야기합니까? 하늘에 속한 이야기만 하니까 두 사이에 못 알아보죠.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 보고 뭐라 합니까? 니는 하나님의 아들이 결코 아니다. 너는 메시아, 하나님 아들이 아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자처하고 나섰기 때문에 자처한 게 아니고, 실제로 하나님 아들입니다. 자처하고 나섰기 때문에 결국 그동안 하나님의 아들을 고대했던 사람들의 고대함은 말짱 사기극이었다는 것이 들통 나죠.
그래서 제가 보기에는 ‘하늘의 문’, ‘하나님의 장막’ 이것을 인자라고 붙이지 말고 차라리 하나님의 아들 항목에다 붙이는 게 안 낫겠나. 근데 이분이 일리가 있는 것이 뭐라 하느냐 하면, 인자 위에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했다. 그러니까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그 장소가 구약에 창세기에 보면 뭐라 돼있습니까? 그게 벧엘이죠. 하늘의 문 아닙니까. 그러니까 인자가 하늘의 문이 된 거예요. 그건 일리가 있지요. 아, 인자가 하늘의 문이구나.
하늘의 문을 구체적으로 한 것이 아마 하나님의 아들 개념으로 아마가 아니라 인자라고 하지만 요한은 뭐라고 해석했습니까? 예수님은 자기를 인자라 하고, 예수님은 그걸 인자라 해놓고 인자라 한 것은 예수님이 한 거고, 저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이야기한 것은 바로 사도 요한이 해석을 내렸지요.
사도 요한의 해석이라고 사도 요한의 해석이 아니고, 누구 해석입니까? 주님의 해석이죠. 주님이 인자에 붙이는 내용은 바로 하늘의 문 같은 거라든지 모든 기능은 하나님의 아들의 기능을 발휘해서 함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장막 함께 있고. 또 성전, 그게 뭐냐 하면,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성전이 나오죠.
요한복음을 쭉 이렇게 하는 것은 우리가 지난 시간에 했고, 지금은 이거 따라서 개념들을 설명 중입니다.
[아들의 임무] 하나님 아들의 임무가 뭐냐? 350페이지 아들의 임무가 나오는데, 아들의 임무에 대해서 잘 나와 있습니다. 아들의 임무는 이게 참, 하나님의 아들의 임무 참 어려운데요. 그게 뭐냐? 아버지 속에 그 자신의 생명이 있는 것 같이 아들에게도 그 자신의 생명을 주어 그 자신 속에 생명이 있게 한다. 아들은 아버지처럼 생명을 부여한 동일한 권한이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분이 하는 일이 뭡니까? 물으면 혓바닥이라 할 수 있는데 혓바닥 와서 뭐해 줍니까? 생명을 줍니다. 어떻게요? 그게 중요한데 혓바닥처럼 폭포수처럼 생명을 주는데 ‘어떻게’를 알아야 돼요. 뭐냐 하면,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 관계가 생명이 있는 것처럼 아들도 아버지가 원하는 자에게 생명을 넣어주는 권한이 있다. 이래 되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의 특징을 이걸 두 개를 결합시켜보면 하나님의 아들이 하는 일은 뭐냐 하면, 아버지가 자기에게 생명을 주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일을 하는 거예요. 자, 이렇게 돼버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기존에 아들이 없다고 생각합시다. 아들이 없다고 생각하면 이 사람들에게 생명이 주어집니까, 안 주어집니까? 안 주어지는 거예요. 사람들이 하나님, 하나님 할 때 그 하나님 백날 불러도 뭐가 없다? 뭐가 없는 거예요? 생명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뭐라 하느냐 하면,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고,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이건 요한일서에 나오죠. 요한복음도 같은 이야기가 나와요. 그래서 여기서 따져야 될 것은 왜 하나님이 바로 주면 왜 안 되느냐 하는 거예요. 그거는 이 사람들이 마귀 자식이거든요. “너희들은 마귀라” 마귀 자식인데 예수님이 오셔서 자기가 원하는 자에게 생명을 줄 때 비로소 그 사람은 생명이 있는 거예요. 물론 그 전에 아버지께서 이미 지정해 놓은 자기 백성에게만 혜택이 있지만.
이렇게 해서 그 사람들로 하여금 아들을 영화롭게 만들어요. 하나님이 아니고, 생명주신 아들에게 영화롭게 하는 거예요. 생명주신 하나님이 아니고, 생명주신 아들에게 영화롭게 하는 그것이 곧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기존 모든 조직신학을 다 깨버려요. 왜냐? 조직신학은 신이 있고 인간 있고. 이 틀을 가지고 유지합니다. 그리고 중간에 부록 끼여 있는 것이 바로 예수님 있다가 예수님 빠져버리면 그만이거든요. 이런 모든 조직신학은 생명이 없습니다. 조직신학이 아니라 예수님 위주로 나가야 돼요. 어떤 사람이 저보고 그리스도론 일변도다. 이렇게 비난하는 사람이 있어요. 이근호 그 사람은 삼위일체를 모르고 그리스도 밖에 모른다.
하나님의 아들이 생명 준다는 것은 우린 아들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아들인데 안 줍니까?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린 아들이 아니었어요. 우린 아들이 왜 아닌가? 우린 남한테 생명을 못 줍니다. 그래서 아들이 아니에요. 아들은 뭐만 해야 돼요? 아들이란 말은 뭐다? 생명을 줘야 아들이에요. 그런데 우리한테 죄 밖에 안 남아서 죄 밖에 안 줍니다. 그래서 아들이 아니에요.
우리가 사는 것은 진짜 아들이 와서 우리에게 생명을 줄 때 우리는 더불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우리에게는 아들이 주신 생명이 예수님의 생명이 들어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때부터 우리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다뤘던 그 다룬 방식대로 우린 다뤄지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빼도 박도 못하고 이제 더 이상 나한테 주도권이 있다, 없다? 더 이상 우리한테 주도권은 죄송합니다. 없습니다, 이제는.
왜냐하면 예수님의 생명이 들어왔기 때문에 예수님의 생명은 아버지의 관리 하에 있거든요. 아버지가 관리 하던 예수님의 생명이 이제 우리 생명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관리할 때 그냥 관리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예수를 다루듯이 우리를 다뤄버립니다. 성령님도 마찬가지에요. 성령님이 예수님을 다루듯이 우리를 다뤄버려요. 우린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입니다. 이젠 내 것이 아니에요. 그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입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는 넘어가겠습니다. 넘어가고 그 다음 시간에는 뭐부터 하느냐 하면, [그리스도의 삶] 이거부터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우리 힘으로 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오신 줄 압니다. 우리 힘으로 되는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뭔가 된다고 우기는 이 말도 안 되는 고집 같은 게 있습니다. 아직도 넘쳐납니다. 주님의 개입으로 교회가 되고 주님의 개입으로 교인이 오고나가고 다 주님의 개입으로 되는데 우리 인생이 사는데 죽고 사는 것도 주님의 개입인데 내 열심으로 사는 것처럼 오해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여 주님께서 주님을 다루듯이 우리를 다루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