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9월 4일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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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9월 4일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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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9-16 21:18
busan070904a
20070904a 부산강의 : 조지 래드 [신약신학]-기독론(1) 녹취 이름 : 한윤범 2007-09-10
20070904a 부산강의 : 조지 래드 [신약신학]-기독론(1)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18과 [기독론] 요한복음에서의 로고스부터 기독론에부터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18과 보시면 기독론, 로고스 나오고, 그 다음에 메시아 나오고, 이렇게 인자 나오고, 아들의 임무 이렇게 나오는데, 그 요한복음에서 기독론이라고 이렇게 따로 분류를 시키고, 그 뒤에 19장에 [영원한 생명]이라고 이렇게 분류를 이렇게 시킬 수 있느냐부터 먼저 한번 생각해 봐야 되거든요.
이거는 ‘기독론’이다. ‘그리스도론’이다. 이거는 ‘하나님론’이다. 라고 이렇게 딱딱 분류를 하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냐? 하는 겁니다. 이렇게 기독론, 신론, 뭐 생명 이런 걸 나누겠다는 그 의도가 이 책의 의도가 뭐냐부터 한번 생각해 봅시다.
성경책이 이래 있고, 이거 성경책입니다. 성경책이 이래 있고, 여기에 우리 사람이 있다 이 말이죠. 사람이 있으면 성경이 하나의 생각하는 이걸 주체라 하고, 성경은 우리 하나의 대상이 되겠지요. 대상을 이렇게 치워버리면, 성경이 없다고 하면 뭐만 남습니까? 나만 남지요. 주체만 이것이 남죠. 주체 이것만 남는 여기에 성경이 다가왔다 이 말이죠. 성경이 다가올 때 사람들이 성경을 볼 때 그것은 자기한테 무슨 도로 어떤 의미가 되는 식으로 성경을 보게 되겠지요.
천사가 성경을 보는 것, 하나님이 예수님께서 성경을 보는 것 하고, 우리가 성경을 보는 것 하고 이게 다르다 이 말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성경에 의하면 천사나 예수님은 죄 없으신 분이잖아요. 그럼 우리는 죄가 있잖아요. 그죠? 그러면 죄가 있는 주체가 앞에 성경이 됐든 물건이 됐든 동물이 됐든 간에 볼 때, 여기서 이 죄가 가만있지 않고 작용을 한다 이 말이에요. 작용을.
성경에 의하면 우리는 죄인이잖아요. 죄인이기 때문에 죄가 안 드러나는 경우가 있겠어요? 죄가 안 드러나면 죄인이 아니잖아요.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뭘 하든지 죄인이라면 죄가 드러나게 돼있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성경을 볼 때 무엇과 다르냐 하면, 예수님께서 성경 보는 것 하고 하나님이 성경 보는 것 하고 다를 수밖에 없다 이 말입니다.
이게 다메섹에 보면 그 사울이라는 사람이 그 유대인에 정통한 사람이잖아요. 유대인들은 뭘 봤습니까? 구약성경을 봤을 거잖아요. 유대인들은 누구의 후손입니까? 아담의 후손이죠. 그러면 여기에 저와 여러분들은 누구 후손입니까? 아담의 후손이잖아요. 그럼 같은 아담의 후손인 사울이 구약성경을 볼 때 우리하고 똑같이 죄를 지고 구약을 봤을 것 아닙니까? 봤는데 예수님 만나기 전까지도 그는 구약성경을 분명히 봤다 이 말입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멸망한 그 사람들도 하나님의 십계명을 받았고 모세 밑에서 모세의 지시와 명령을 받았잖아요. 이스라엘 왕들도 다 성경을, 율법을 옆에 두고 공부한 사람이죠. 그리고 선지학교 출신, 거기 있는 거짓 선지자들도 뭐, 선지학교 출신이니까 뭐만 했겠어요? 전공이 뭐겠어요? 이발하는 건가 패션디자이너 아니잖아요. 뭐 하겠어요? 성경만 봤을 것 아닙니까? 그리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뭐에 도사에요? 성경도사 아닙니까? 그리고 그들이 누구 후손이라고요? 아담의 후손이고. 우리는 누구 후손입니까? 우리도 아담의 후손이고.
성경에 실력대로 믿으면 구원받는다. 이래 나올 것 같으면 저들은 실력이 좋아서 그렇고, 우리는 실력이 안 되서 그렇다 이래 되는데. 우리 신약성경에 보면, 성령께서 믿음을 선물로 줘야 믿어진다 하잖아요. 그러면 성령이 안 오면 우리는 뭐와 동일한 인간입니까? 성령이 안 오면? 예수님 팔아치운 가룟 유다나 바리새인이나 우리하고 똑같은 아담의 후손이고, 죄인이기 때문에 똑같은 인식을 한다 이 말이죠.
바리새인들이 칼 쥐고 강도질하고 간음질 한 사람들이 아니잖아요. 그 사람들이 하루 종일하는 일이 뭐냐 하면, 말씀을 삶으로 전환시키는 일을 했잖아요. 그 사람들이. 그런데 그 사람들이 누구 자식이라고? 마귀 자식이라고 했다고. 예수님이 요한복음 8장에 보면. 니체도 신학교 출신이에요. 스탈린도 마찬가지고.
사람이 다시 말해서 성경을 볼 때 뭣과 보는 것과는 다르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나 천사나 하나님께서 성경 보는 것 하고 이미 죄인 된 우리가 성경 보는 것 하고 다르다 이 말이죠. 이거 인정해야 됩니다. 이거 인정해야 돼요.
율법이 가미된 것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더 죄 되게 함이라 돼있다 이 말이죠. 만약에 우리가 성경 없는데 방금 제가 이런 가설처럼 우리는 죄를 가지고 성경을 본다는 가설을 이걸 틀렸다고 봅시다. 틀렸다고 보면 뭐가 문제 되느냐 하면, 성경 오기 전에 우린 안 죽어야 돼요. 하나님의 율법 오기 전에 안 죽어야 됩니다.
그런데 로마서 5장에 보면 뭡니까? 율법이 오기 전까지는 사람들은 죽었잖아요. 죽었는데 왜 죽었다고 돼있습니까? 그 사람 왜 죽었어요? 재수 없어서 죽은 게 아니고 왜 죽었어요? 그들은 자기가 죄인인줄 모르고, 왜냐하면 교과서가 없으니까. 죄라고 지적할만한 교과서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냥 죽어가는 거예요.
나중에 교과서 보니까 소급해서 보니까 그들이 죽었던 이유는, 그들이 늙어 죽은 게 아니고, 무슨 값이다? 죄 값으로 죽었다 이 말이죠. 그걸 율법이 오니까 유대인들은 알았고, 모세 사람들은 알았고, 이방 사람들, 개 같은 이방 사람들은 계속 그 사람들은 모르는 거예요.
지금 제가 처음에 강의 운을 뗄 때 기독론, 뭐 생명, 영생 이렇게 분류하는 그 취지가 뭐냐? 그것부터 시작했어요. 분류한다는 취지가. 분류하겠다는 것은 우리가 성경을 보다 명확하게 알기 위해서 이렇게 분류를 하는 거예요. 기독론, 신론, 성령론, 구원론 분류를 한다 말이죠. 분류를 하는 이유가 우리가 성경을 바로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할 때 뭘 놓치기 쉬우냐 하면, 우리가 지금 성경을 기독론 이렇게 분류하는 이것이 마치 하나님 보시기에도 정당한 행사를 하는 것처럼 오해할 소지가 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만약에 이 성경을 볼 때 기독론, 신론, 성령론 이렇게 분류를 하겠습니까? 안 하지요. 왜냐하면 자기에 대해서 증거하기 때문에. 자기에 대해서 증거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복음의 회복]이란 제일 먼저 나온 책에 보면, 방금 이 이야기를 해놨어요. 그 이야기를 하게 된 동기가 뭐냐 하면, 조직신학에 대해서 문제가 있다 하는 것을 누가 별로 언급을 안 해 놓은 거예요. 그래서 제가 만나는 사람마다 또는 동기들한테 이야기했어요. 조직신학에서 이렇게 신론, 계시론 분류 문제 있다하니까 그것은 우리는 믿음 너무 좋아서 안 하는데, 초짜들, 처음 오는 사람들을 성경으로 안내하고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분류를 해야 됩니다. 라고 이야기하더라 이 말입니다.
그럴 때 제 생각에는 그렇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 혹시 죄에서 나온 죄성의 발상이 아닌가 하는 겁니다. 저 사람들을 쉽게 하기 위해서 성경을 가지고 조직신학으로 해 놓으면, 이 성경은 버려도 괜찮지요. 조직신학을 가지고 그 사람에게 들이대어서 일단 그 사람을 조직신학이란 수조에 모았다가 조직신학에 있는 사람을 다시 성경으로 당긴다. 라는 그러한 아이디어다 이 말이죠.
그러면 조직신학을 전문으로 누가 합니까? 목사가 하잖아요. 그러면 목사는 성령께서 그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목사의 아이디어와 목사의 깊은 신학적인 그것이 사람을 구원하는 방편으로 하나님께서 충분히 땅땅땅. 너를 인정해. 인정했다는 것으로 간주하고 깔고 들어가거든요. 그게 루터주의와 루터교와 칼빈의 신학의 큰 차이점인데.
루터는 만인제사장이잖아요. 칼빈은 만인제사장은 아니에요. 차이를 두지요. 목사급과 평신도급을 차이를 두고, 평신도들은 목사한테 심사를 받아야 돼요. 검사를 조사를 받아야. 숙제검사를 받아야 돼요. 그렇게 된다고.
루터가 처음에 만인제사장 이야기했다가 루터 죽고 난 뒤에 그 뒤에 사람들은 유야무야 다 때려치우고 천주교로 돌아가지만. 칼빈 교회와 천주교의 차이점은 칼빈 교회는 주님, 목사, 평신도 세 계급이라면, 천주교는 그 계급을 약간 더 나눴다는 것뿐이에요. 약간 더 나눈 거예요. 교황, 주교급, 신부 나눈 거예요.
나눴지만 사실은 주님, 목사, 평신도에서 목사를 스펙트럼 가지고 세분화시키면 그 안에 교황, 교주 다 들어있다 이래 되는 거예요. 마치 순복음교단이나 감리교처럼. 스펙트럼 안에 다 들어있는 거예요. 마찬가지에요. 결국은. 천주교나 개신교나 차이점이 없어요.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은 천주교에서 다 이야기하는데 뭐. 그거 다 이야기하는 거고.
그 원인을 [복음의 회복]이란 책을 내기 전에 그 원인이 어디서 나왔는가? 바로 성경을 하나의 체계화. 시스템화 시켜서 조직신학 만들어서 성경을 제쳐놓고 조직신학을 대체해서 그것 가지고 들이댄다 말이죠. 들이대고 하자 하는 원인 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목사 없이 구원 없다. 다른 말로 하면, 교회 없이 구원 없다는 칼빈의 주장, 이것과 똑같이 돼버린 거예요. ‘목사 없이 구원 없다’를 칼빈은 ‘교회 바깥에 구원이 없다’ 이래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교회라 하면 목사 빠지면 교회가 아니니까.
교회라 하는 것은 중심이 성만찬이 있어야 되고, 성만찬을 사찰이 하지 못 해요. 성만찬을 사찰이나 집사가 하지 못하고 누가 해야 된다? 담당 전임자가 있어야. 이 전임자를 목사라 하고 천주교에선 이걸 뭐라 합니까? 신부라 한 거예요. 어쨌든 간에 성만찬 있으면 교회고, 성만찬 없는 것은 교회 아니고. 왜? 올 때까지 죽기까지 주의 죽으심을 기념하라 했으니까.
기념하려면 성만찬 있어야 되고, 그리고 세례 줘야 되고. 세례와 성만찬 합쳐서 이걸 주도할 수 있는 목사가 있어야 되고. 이 목사에게는 다른 사람은 못한다는 배제적인 원칙, 절대로 다른 사람은 안 된다는 배제적인 원칙 하에 목사가 이걸 하는 거예요. 지나 개나 바쁘면 다 하세요. 라가 아니라 못한다를 두고 이렇게 해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목사와 평신도의 차이를 하려면 똑같은 아담의 후손인데 이 사람은 목사고, 이 사람은 평신도라면, 이 사람을 목사 되게 하고 평신도 되게 하는 또 다른 기준이 필요하겠지요. 또 다른 기준을 가지고 오늘날 교회에서 뭐라 합니까? 이 사람은 성직자의 기름부음이 있고, 이쪽에는 성직의 기름부음이 없다 이래 보는 거죠. 은사가 가르치고 하는 은사와 이거는 그냥 배워야 되는 은사로 나눈다 이 말이죠. 성령의 은사로써.
이걸 확정 질 때 디모데전후서에 의해서 장로한테 감독 될 사람은 아무나 될 수 없다 나오고, 집사도 마찬가지고. 집사 될 사람은 어떤 술에 인 박이지 않고, 여자, 아내를 많이 두지 않고 나오잖아요. 돈을 사랑하지 않고 나그네를 대접하고 있잖아요. 그 자체가 그런 목사, 집사 이런 것이 있음을 초대 후기 사도 이후에 이런 체제, 이런 형식을 갖추었을 때 이걸 뭐라 합니까? 이걸 교회라 하는데,
이런 형식에 중구난방으로 니도 목사, 니도 집사 세우면 안 되니까 일률적으로 합법적으로 법적으로 이런 사람만 목사고, 이런 사람만 집삽니다. 이런 사람은 장로입니다. 라고 유권해석을 내릴 수 있는 또 다른 상위계층이 필요하죠. 그 상위계층이 누가 됐습니까? 그게 로마교회가 한 거지요.
로마교회가 했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부산에 교회 많은데 성문교회가 당회장 지가 부산의 목사 수급을 내가 하겠다고 나선 것 하고 똑같은 거죠. 왜 그럼 당신은 로마교회 왜 나서느냐 하니까 베드로 무덤이 여기 있다 이 말이죠. 베드로 무덤이 있는 게 무슨 의미냐?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반석 위에 내 집을 지어라는 주님의 계시대로, 예언대로 베드로 무덤 위에 있는 교회가 전 것을 당신은 목사 맞아. 당신은 가짜 목사야. 당신은 집사 맞아. 당신은 가짜 집사야를 총괄할 수 있는 그런 공적인 기관으로 그렇게 잡았다 이 말이죠.
개신교가 뭐예요? 루터, 칼빈의 뜻, 위클리프의 뜻이 뭐예요? 성경박사 위클리프의 의도가 뭡니까? 뭘 깨자는 겁니까? 성경의 돌아가자. 이 말 아닙니까? 이 말 보세요. 참 재미있잖아요. 지금 이 천주교가 성경 설교 안 합니까? 다 가르치잖아요. 그런데 위클리프가 하는 말이 뭐로 다? 성경으로 돌아가자.
그러면 그렇게 이야기하는 그 취지가 뭐예요? 성경 잘 가르치겠다고 성경 가르치는 은사 받아서 그 사람을 공적인 가르치는 신부나 목사로 그때에는 목사 없었으니까 신부로 세우고, 그 신부 자격 맞아. 라고 또 다른 위에 있는 신부, 그러면 뭡니까? 주교급이고. 주교를 세우는 추기경 있고, 추기경 위에 뭡니까? 교황 있고, 교황 위에 그리스도 있잖아요.
그렇게 해서 성경 가르치는 이렇게 하겠다는데. 그들은 문자를 아니까 일반인들은 그들은 문자를 모르니까 인쇄술이 발달 안 되서 문자를 모르니까요. 그래서 옛날 성당에는 그림 같은 것으로 성당 들어오기만 하면 신구약이 다 보이도록 그렇게 모자이크 처리한 겁니다. 그래서 성당 공사가 굉장히 컸어요. 왜? 성당 공사하는 것은 성경책을 그림책으로 만드는 공사하고 똑같은 거예요. 공사를 하되 큰 공사를 한다 이 말이에요.
그렇게 할 때 위클리프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말은 그가 주장하는 말은 뭡니까? 성경이 있고 우리 인간이 있을 때 성경이 말씀하는 대로 하자 이 말이거든요. 그럼 지금까지 뭣을 모르고 나갔다는 말입니까? 우리 인간이 성경으로 방향이 우리가 인간이 성경으로 나아간 거예요.
여기 요한복음 20장 한번 봅시다. 20장 31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다시 읽어볼게요.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뭘 얻게 하라?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하지요.
그러면 제가 질문 들어갑니다. 이미 요한복음 읽고 생명 얻은 사람은 성경 필요 없네요. 답변해보세요. 성경 필요 없겠네요. 너희가 이 책을 보며 요한복음을 쓴 것은 이 책을 믿고 뭣을 얻으려 함이라? 생명을 얻게 함이죠. 그러면 이미 예수 믿고 생명 얻은 사람한테는 요한복음이나 성경책 없어도 되겠네요. 여러분 이야기해보세요. 답변해보세요. 없어도 됩니까, 안 됩니까? 이게 오늘날 큰 문제에요. 진짜 큰 문제입니다.
쉽게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롯데백화점 세일한다. 라는 전단지를 받았어요. 봤어요. 아, 9월 5일 날 롯데백화점 세일하네. 전단지 봤습니다. 명품 헐게 판다는 소리 들렸어요. 그래서 전단지 보고 롯데백화점 가서 9월 5일 날 명품 헐게 샀습니다. 샀잖아요. 그런데 가다 보니까 어떤 사람이 9월 5일 날 롯데백화점 명품 싸게 판다고 할 때 그거 볼 필요 있어요, 없어요? 없잖아요. 그런데 왜 또다시 보는 이유가 뭐냐 이 말이죠.
지금 한국교회가 이 답변도 못합니다. 이 답변하나 제대로 못해요. 이런 질문조차 할 생각을 못해요. 할 생각을 안 하는데 다만 일반교인들은 질문 안 해도 이미 답변을 알고 있지요. 왜냐하면 나는 롯데백화점 가 세일해서 영생 얻었다. 한가할 때 교회 나와 줄게. 아시겠습니까? 한가할 때. 나중에 나이 많아서. 안 바쁠 때 교회 나와 줄게. 차마 그 이야기를 평신도가 목사한테는 못하지요.
그런데 하지만 그 꿍꿍이속은 뭡니까? 요한복음 20장 31절 믿는다 안 카나 내? 요한복음 목사님 강해설교 일년 동안 다 들었다. 그래서 이제는 예수 믿어 영생 얻었다. 그럼 요한복음 뭘 덮어야 돼? 요한복음을 덮어도 상관없는 거예요. 영생 얻었는데 뭐.
바로 그런 사고방식이 뭐가 되겠어요? 예수님이 보는 성경관은 아니겠지요. 그렇잖아요. 예수님이 보는 성경관과 일반 평교인들이 요한복음 20장 31절 말씀대로 나, 일년 동안 요한복음 강해 다 듣고 예수 믿는다. 얻었다. 그러니까 성경 이제 안 들을래. 물론 안 바쁘면 오겠지만 목사 안면 보러 오겠지만 바쁘면 못 온다. 지금 장사해야지. 언제 오겠느냐? 라고 하는 그 사고방식과 예수님 사고방식 차이점이 뭡니까? 알아야 돼요. 그 차이점을.
오늘 강의 계속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이 보는 것과 인간이 성경 보는 것과 차이점을 이야기했는데 그 차이점이 뭘까요? 그것은 예수님은 성경을 누굴 위해 증거한다? 자기를 위한 증거하는데 죄인 아담 후손인 인간은 이 성경 가지고 뭘 하려 했습니까? 자기 이익을 얻기 위해서 성경을 본 거예요. 이익을 얻기 위해 하는데 이미 요한복음 20장 31절 보고 이미 영생 얻어 버렸지요. 이미 백화점 가서 명품 헐게 샀잖아요. 이익 얻었잖아요. 이익 얻었는데 뭐 하려고 또 봐요. 그거 뭐 하는데 보느냐 말이죠.
이게 제가 평신도 이야기한 것 같지만 사실 평신도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사실 그것만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목회자들이 성경 보는 관, 이것이 목회자로서의 죄가 나오겠지요. 예수님하고 달리. 평신도는 요한복음 20장 31절을 보고, 내 영생 얻기 위해서 교회 나왔습니다. 아이고, 요한복음 잘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요한복음 다 들었으니 영생 얻었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하는 그거나 일반 목회자들이 성경 볼 때 이 성경 가지고 교인들에게 성경 잘 가르쳐서 우리 교인들 계속 붙잡아 둬야지. 하는 그 사고방식과 차이점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습니다. 똑같습니다.
평신도가 자기 이익 생각하나 목회자라는 이유 때문에 이미 목회자가 되었다는 이유 때문에 성경을 볼 때 그리스도 중심이 아니고, 나 목회자입니다. 라는 중심으로 성경을 볼 때 그게 바로 뭐다? 아담에 내려오는 뭐가 돼요? 죄가 돼요. 그게 죄가 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조직신학이 나오는 거예요. 기독론 나오고, 영원한 생명 나오고 분류가 되는 거예요. 신학자가 나오고 이래 되는 거예요. 자기 부인이 안 되는 거예요. 자기 부인이. 사람의 행동이라 하는 것은 단호히 이야기합니다. 사람은 물 마셔도 제가 물 마시는데 이병권 집사님 좋으라고 물 마시는 거 아니에요. 사람은 무슨 행동을 해도 전부 누구 좋으라고 합니까? 그 행동하는 주체가 누굽니까? 날 좋으라고 하는 거예요. 나한테 유리하라고 하는 거예요.
목사 됐다가 목회가 잘 안 되서 접고, 평신도 된 사람이 있다 칩시다. 그런 사람 한두 사람이 아니지만. 있다 칩시다. 그 사람이 어느 교회 출석할 때 이제 목사 아니잖아요. 평신도 맞잖아요. 자기 본업이 있기 때문에 바쁘다 보면 예배 출석 못한다 말이죠. 못할 때 그 사람이 전직 목사인 줄 모르고 기존의 목사가 씨, 주일이 중요하지. 그게 중요하나. 할 때 듣는 사람이 뭐라 하겠습니까? 나도 많이 했다. 나도 참 많이 했다. 옛날 목회할 때 참 많이 했다.
그러면 당신이 목회할 때 어떤 마음가짐으로 그렇게 교인들 보고 교회 나오라고 했던가? 자기가 일반 직업을 가지고 목회 접을 때는 몰랐지요. 뭐냐 하면, 주여, 교인들에게 주일 지키라 하는 것은 내 목회 성공하려고 한 게 아니고, 순수하게 주님을 위한 양들을 양육하기 위해서 했습니다. 라고 본인도 그렇게 생각했을 거 아니냐 말이죠. 그런데 막상 평신도 되서 목사 대해 보니까 나도 참 많이 했다. 이래 된다 이 말이죠.
결론적으로 말해서 인간이 성경을 알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백날 성경은 자기 정당성을 다시 확인하는 하나의 자기가 자기를 쳐다보는 거울에 불과합니다. 성경을 무슨 구절을 봐도. 자기가 자기 정당성, 자기 의로움을 쳐다보는 거예요.
제가 어제 월요일 강의하면서 아주 중요한 것 대목을 이야기했는데 여기서 한번 이야기해 볼게요. 이 이야기하면 이 세상 실체가 다 보일 거예요. 제가 쉽게 말씀드릴게요. 예를 들어서 여기 노무현이 있고, 여기에 최홍만이 있지요. 누가 힘셉니까? 최홍만이 힘세잖아요. 노무현은 아주 나이가 육십 다 된 사람이고, 여긴 젊었으니까 힘세잖아요. 근데 누가 힘이 있습니까? 누가 힘이 셉니까? 이 사회에서 누가 힘이 있어요? 노무현이 힘 있잖아요.
그런데 여기서 힘의 의미가 뭐냐 말이죠. 의미가. 노무현이 최홍만 붙들고 귀싸대기 때리던가요? 아니잖아요. 그런데 노무현이가 최홍만은 근육 자라는 병이 있어서 한국에서 K1 자격 없다. 이래 한 마디 해버리면, 최홍만이는 대통령님 잘못했습니다. 한번만 봐주세요. 그 덩치 큰 놈이 노무현이한테 살살 빌 거 아니냐 말이죠. 때리지도 안았는데 윽박지르지도 안 했는데. 말 한 마디 하니까, 말 한 마디 했는지 안 했는지 그건 모르지. 내가 지어서 하는 이야기니까. 지어내서 예를 들어서 니는 한국에서 K1 못 뛰어. 니가 말아 먹든지 니 병이나 치료해. 이러면 아닙니다. 나는 돈 벌이 해야 됩니다. 벌벌 길거다 이 말이죠. 그게 뭐냐? 그걸 뭐라고 합니까? 한 자로 ‘힘’이잖아요. 힘. 힘이죠.
이게 목사, 교인들하고 관계도 마찬가지인데. 힘을 이상하게 분명히 키 큰 데 이상하게 맥을 못 추더라 말이죠. 마치 조폭들이 형사한테 맥을 못 추듯이. 자, 그럼 힘을 분류를 할 때 여기 마르크스가 힘을 무슨 힘으로 말하느냐 하면, 마르크스는 돈 힘을 받습니다. 경제에서. 아담 스미스 이후에 이 세상에는 손이 있지요. 무슨 손입니까? 그 보이지 않는 손이죠. 그 보이지 않는 손은 무슨 손이라 했습니까? 시장에서 통용되는 손이지요. 그러면 돈 아닙니까.
그러니까 최홍만이가 빌빌거리는 것은 뭣 때문에 그렇다? 노무현이 이뻐서 그런 게 아니고, 무서워서 그런 게 아니고, 뭐가 무섭다? 돈이 무섭다고 이야기했고. 똑같은 힘을 돈으로만 규정하지 않고 달리 규정한 사람이 있어요. 막스 웨버 있어요. 막스 웨버는 그 힘을 뭐라 하느냐? 이걸 도덕의 힘이라 해요. 도덕이 뭉쳐지면 뭐가 돼요? 법이 돼요.
앞으로 키가 2미터 넘는 사람은 무대에 못 선다. 라고 우리나라에서 법으로 만들어버리면 최홍만이는 한번 봐주소. 봐주소. 우린 굶어죽습니다. 이래 된다 말이죠. 결국 뭐냐 하면, 법의 힘인데 도덕의 힘인데, 법이 도덕이고, 도덕이 법이에요. 그 사회에. 도덕이라 하는 것은 착하다는 말이 아니고, 그 사회의 공동적인 관행을 말합니다. 이 도덕의 힘이 뭐냐 하면, 나는 살만큼 정당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로마서에 의하면 이건 뭐냐 하면, ‘자기 의’, 이거에요.
아프카니스탄 순교하는 이유가 뭡니까? 결국 뭐가 있어요? 힘에 이끌려 가는데 그 힘이 뭐예요? 샘물교회 목사가 뭐로 꼬여 충동질해서 보자기 뒤집어쓰고 갔습니까? 뭣 때문에 그렇습니까? 자기 의죠. 그래서 로마서에서는 그림 다시 그리면, 인간이 뭘 본다? 성경을 볼 때 바리새인들이 성경을 볼 때 다메섹에서 있는 사울이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인 사울이 구약성경을 볼 때 죄로 볼 수밖에 없지요. 죄인 중에 괴수니까.
그 죄가 뭡니까? 사울이 간음을 했습니까, 도적질 했습니까, 강도질 했습니까, 살인을 했습니까? 뭐 했어요? 안 했어요. 왜? 율법에 흠이 없는 자니까. 그럼 그는 뭣 때문에 죄인 중에 괴숩니까? 여기 뭐가 나와요? 로마서 3장에 인간은 자기 의로 하나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이거. 인간은 자기 의로 어떤 자기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그전까지는 사울이라는 사람은 누구 입장에서? 자기 입장에서 성경에 다가섰지요. 옛날에 구약에 망했던 사람 마찬가지로. 자기 입장에서 다가섰는데 내가 다가선 것이 자기는 하나님 보시기에 내가 다가선 자체도 정당하다고 본 거예요. 누구 만나기 전까지는? 다메섹에서 예수님 만나기 전까지는 내가 성경 보는 것이 정당하고 해석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본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뭐가 들통 났습니까? 사울이라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는 동기가 뭐냐 하면, 동기가 영생 못 얻어서가 아니라 구원 못 얻어서가 아니라 얻은 사람으로서 더욱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하나님 보시기에 정당한 일을 하기 위해서 예수 믿는 사람을 족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 하는 말이 니가 하는 짓이 나를 핍박하는구나. 핍박하는 짓이라니까요. 우리가 그냥 가만있어도 주님은 핍박 받아요. 우리는 뭘 해도 자기 의가 튀어나오니까. 로마서 3장 의해서 자기 의가 튀어나오니까.
그러면 우리가 목사가 됐든 평신도가 됐든 목사님, 저 요한복음 일년 동안 강의 잘 들었어요. 한번도 안 빼먹었어요. 이제 영생 믿었으니까 성경 말씀대로 니가 예수를 믿고 영생 얻었다. 영생 얻었으니까 성경 덮어버립니다. 라는 것이 결국은 예수님이 성경 보는 게 아니고, 내가 은밀하게 내가 몰랐던 자기 죄를 가득 안고 그동안 죄인 주제에 감히 천국 들어가려고, 지가 죄인인 것도 모르면서 나니까 영생불멸하려고 죽어서 좋은 나라 들어가 편하게 살려고 예수 이용한 것 밖에 더 돼요? 그 예수 가짜 예숩니다. 이거는 심각한 중요한 문젭니다. 지금까지 강의한 거 정말 중요한 문젭니다.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성경을 아는 것은 예수님의 영이 와야 성경을 알지, 그 말은 뭡니까? 인간은 육이기 때문에 절대로 성경을 모르게 돼있다. 하, 참. 나는 성경을 모릅니다. 라는 말을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 될까? 나는 성경 모릅니다. 나는 백날 봐야 내 이익만 챙길 뿐입니다. 내 정당성, 자기 의, 내 정당성만 꼬깃꼬깃 챙기고 그것뿐입니다. 내가 믿잖아. 내가 믿잖아. 하는 거. 내가 믿었으니까 내가 구원받는 믿은 주체가 내니까 믿었다는 그걸 근거로 해서 내가 챙긴다.
위클리프가 무슨 의도로 그렇게 했는지, 루터가 무슨 뜻으로 하는지 루터는 안 만나봐서 모르겠고 하는데. 성경으로 돌아가자. 하는 말은 이 말은 정말 대단한 말이고 옳은 진리입니다만 그 취지가 무슨 취지로 그런 소리했는지는 좋게 생각하게 되면, 기존에 있는 인간 쪽에 성경 다뤄가는 것은 결국 기껏 해봐야 천주교의 그 우수한 머리를 따라갈 수 없고, 바리새인의 사두개인의 유대인을 따라갈 수 없어요. 인간 쪽에서 성경 바라보는 것은 이미 바리새인들이 천재 중에 천재에요.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할 정도로 최고의 천재들이에요. 수천 년 동안 계속해서 연구하고 실험해본 그 결과가 성경 중심으로 성경 가르쳐서 구원시키는 거예요. 모든 제도를 합법화시키고 정당화시키는 그 방법이에요. 이 조직신학적으로 기독론하고 이거요 벌써부터 래드가 이 자체가 문제점이 있어요.
그래서 언젠가 그런 리플 단 적이 있어요. 목사가 어떤 주장을 했을 때 목사의 문제점이 뭡니까? 라고 했을 때 제가 리플 달았지요. 사람들이 알아듣는 소리 한 것이 그 목사의 치명적인 문제점입니다. 그 미국까지 갔던 감리교 목사가, 미군이 한국에서 철수해야 된다는 소리 했잖아요. 미군이 한국에서 철수해야 된다는 소리는 이거는 성령 받은 사람이나 안 받은 사람이나 다 알아듣지요. 그러니까 그게 문제에요. 그게 문제였던 거예요.
알아듣는 소리를 했다는 것은 이미 옳고 그름에 차이 없이 그 자체가 뭐가 돼요? 죄가 되는 거예요. 성령 받은 사람만 알아듣고, 안 그러면 못 알아듣는 소리를 해야 되는데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소리를 해야 되는데 알아듣는 소리를 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요한복음 강해할 텐데 서론이 너무 길었는데 중요하지만 길었는데, 요한복음을 강의할 때 뭐 해야 돼요? 육의 사람들이 못 알아듣는 내용이 어떤 내용인가를 연구해야 돼요.
지금 똑같은 글자를 알고 한글을 아는 사람이 요한복음 다 읽었다. 그런데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어떤 식이다? 요한복음을 다 보고 난 뒤에 요한복음 20장 31절에 말씀대로 내가 예수 믿었으니까 영생 얻었으니까 이제는 요한복음 덮어도 됩니다. 라는 쪽으로 자기 편의 위주로 자기 편리 위주로 간편한 종교행위 위주로 복잡한 종교에서 간편한 종교행위로 뭔가 유리하다고 여길 때 그 사람 불러다가 당신은 요한복음 1장부터 21장까지 어떻게 해석했습니까? 줄줄이 내 뱉어보세요. 라고 나오는 그가 생각했던 요한복음 해석 있잖아요. 평신도가 봤던 느낌, 필링, 요한복음에 대한 느낌 이걸 줄줄이 다 끄집어내서 그걸 그대로 목사가 교인들에게 다 알려주고 이게 바로 육적인 해석입니다. 라고 칸막이를 딱 쳐버려야 돼요.
이 세상에 불신자들이 있다는 것은 우리한테 불리한 게 아니에요. 그 사람들의 의식과 사고방식을 우리는 그걸 캐치해서 아하, 이게 육이니까 이거는 설교시간에 다 이야기해야 된다. 하는 식으로 해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설교할 때 본문을 보면, 이 본문 보자마자 두 종류 나오겠지요. 하나는 뭐냐 하면, 육에 속한 사람이 이 본문 봤을 때 해석 있잖아요. 그걸 그대로 이야기해 주는 거예요.
그리고 육에 사는 사람은 거부할 수밖에 없는 성령에 의한 해석을 줘서 딱 대비를 시켜 놓으면 끝나고 난 뒤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는 사람이 나타날 것이고, 희열이 있는 사람이 나타나겠지요.
그래서 여기서 뭐냐 하면, 육에 속한 해석은 방금 제가 이야기했지요. 자기 의를 자기 정당성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차원에서 성경 보는 것은 이건 육적인 해석이다 말이죠. 그럼 영적인 해석은 뭐냐? 영적인 해석이라는 것은 요한복음 속에 무지무지하게 들어 있어요. 자기를 미워하지 않고서는 결코 생명을 얻을 수가 없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예수님 말씀 듣는 그 순간부터 그때부터는 진짜 영에 속한 사람은 무슨 짓을 해야 돼요? 밉다, 미워. 밉다, 미워가 속으로 계속해서 목사님 설교 들을 때마다 누가 미워? 내가 밉다가 계속 튀어나와야겠지요. 순간순간마다 시간시간마다 정말 내가 밉다. 남이 미운 게 아니고 내가 밉다. 이단이 미운 게 아니고, 내가 밉다 하는 그게 계속 튀어나와야겠죠.
그러면 목사가 그 설교하려면 목사부터 뭐 해야 됩니까? 목사부터 설교준비하면서 누가 미워야 돼요? 목사 자기가 미워져야 돼요. 내가 목사질하고 있다는 게 밉다 이 말이에요. 목사질 안 하는 짓이 미운 거예요. 이래도 밉고, 저래도 미운 자기 누굽니까? 나에요 나.
그것을 그대로 미워라하면 그만큼 이유가 있어야 되겠지요. 그 이유. 그 이유는 바로 설교를 통해서 십자가 복음을 이야기해야 됩니다. 자, 예를 들겠습니다. 예레미야를 설교했다. 예레미야 설교하면, 너희들이 고아와 과부를 돌보지 아니하기에 이 성전은 성전이 아니다. 예레미야 7장에 나오지요. 자, 이 본문을 설교할 때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같이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걸 그대로 육적인 사람들은 뭐 합니까? 고아와 과부를 돌보면 뭐가 돼요? 나의 의는 그대로 유지되고, 내가 고아와 과부를 돌본다는데 내가 미울 이유는 없잖아요. 남은 안 돌보는데 나는 돌보니까 미울 이유는 없다 이 말이죠. 그럼 돌보면 되잖아요. 돌보면 되지 내가 밉다, 밉다 할 건 없다 이 말이죠. 그렇게 될 때 그것이 바로 육적인 해석이 되죠.
그런데 이걸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 하는지 영적인 해석을 하게 되면, 왜 고아와 과부를 돌봐야 되느냐? 그것은 출애굽에 보게 되면 출애굽하기 전에 애굽 나라에서 이스라엘은 전부다 뭐였습니까? 이스라엘은 전부다 똑같이 처지에 있었습니다. 똑같이 뭐였어요? 과부였고, 똑같이 고아였다. 그래서 출애굽기 21장에 보면, 누구든지 출애굽하고 난 뒤에 어떤 고아와 과부를 학대하게 되면 학대한 그 놈을 고아와 과부로 만들어버리겠다. 하는 거예요.
만들어버리겠다 해놓고 그 뒤에 나오는 것은 나는 무슨 하나님이다? ‘자비’라는 개념이 나와요. 이 자비라는 개념은 반드시 그 과정이 뭐냐 하면, 심판은, 다른 말로 하면 이게 분류거든요. 심판, 육의 인간을 기어이 분류시키는 이것보다 큰 자비는 없다 이 말이죠. 이거는 우리의 모든 상식을 깨는 거예요.
불교의 자비는 뭡니까? 식물이든 동물이든 불쌍히 여기고 베푸는 것이 자비라면, 하나님의 자비는 뭡니까? 될 놈과 안 될 놈을 완전히 분류시키는 요 행위가 자비, 헤세드, 자비에요. 그걸 공의라 하고, 다른 말로 하면 사랑이라 하고 다른 번역으로 하면 사랑이라 한다. 나는 자비의 하나님이다.
고아와 과부의 처지에 있지 아니하면 누구든지 그거는 하나님의 자비라는 게 안 보인다. 그래 고아와 과부라는 게 뭐냐 하면, 이거는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이거는 완전히 소경된 자, 문둥병자가 예수한테 갈 때 다윗의 자손이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거다 이 말이죠.
만약에 요한복음 20장 31절 듣고, 목사님 저는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성경 볼 필요 없습니다. 라고 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챙길 걸 챙긴 사람이기 때문에 더 이상 고아도 아니고 과부도 아니죠. 불쌍히 여길 필요도 없지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저를 비방하고 공격하는 게 뭐냐 하면, 이미 구원받았는데 와 자꾸 자기를 부정적 관점을 가지고 자기를 쳐다보느냐? 이카고 있다고. 이미 구원받았으면 됐는데 왜 이미 구원받은 사람 같으면 불쌍히 여기소서. 그런 소리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이제는. 긍정적으로 나가야지 부정적으로 돌아가느냐 이런 비난을 해요. 제가 보기에는 성령을 받지 못해서.
자, 고아와 과부가 되면 그 사람에게는 더 이상 자기한테 자기 유리, 불리를 따지겠습니까, 안 따지겠습니까? 안 따지지요. 나한테 이거 유리하다. 오늘 내 교회 갔으니까 이번 주는 유리하다. 아니, 교회를 안 나갔으니까 나한테 불리하다. 교회 나가고 안 나가고 문제가 아니라 이미 자기부터 먼저 챙기고 그 다음에 내가 어떤 행동을 할 때 나한테 유리하냐를 그러한 논리구조를 갖고 있다는 자체가 그 사람은 뭐냐 하면, 고아와 과부의 심정이 아니다 말이죠.
아직도 자기한테 뭐 있다? 자기한테 자기가 정당화 될 수 있는 가능성, 자기한테 나도 아직까지 완전히 깨지지만 완전히 깨질 필요 없을 정도로 나도 어떤 권리, 이 땅에서 존재할 수 있는 목숨을 유지하는 어떤 권리가 있다고 여기는 절대 자기 부인이 안 된 상태기 때문에 그 사람은 그렇게 부정적으로 못 나오겠다. 이래 나온다 말이죠.
성경을 예레미야를 통해서 아, 나는 매일같이 하나님의 개입이 있어야 되는구나. 매일같이 하나님의 개입,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이 여기고, 이게 매일같이 있어야 되는구나. 라고 느끼는 거죠.
자, 이제 요한복음 들어가 봅시다. 이래 놓고 목사님, 서론이 왜 이렇게 깁니까? 하는데 지금 18장에 제일 먼저 뭐가 나오죠? 로고스 나오죠. 로고스 개념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방금 이러한 긴긴 서론이 없으면 로고스란 말을 이해를 못해요. 김세윤이 됐든 누가 됐든 맨 날 그 사람들은 학자들은 모여서 로고스가 헬라적 배경이냐, 아니면 필로적 배경이냐? 맨 날 이거만 따진다고요. 우선 그 사람의 의견을 그 사람의 그런 취지를 먼저 한번 봅시다. 여기 책에 로고스 나왔으니까. 길게 나왔는데 쉽게 하면 이렇지요.
요한이 지금 요한복음을 가지고 사람들한테 전도하려고 하잖아. 전도한다 말이죠. 할 때 요한복음을 가지고 전도하는데 요새 요한복음만 쪽 복음 만들어서 전도하려고 전도하는데 전도 대상이 그 당시 헬라 사람들을 대상으로 할 거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태초에 무엇이 있었으매. 라고 할 때, 태초에 무엇, 무엇이 있었음에 그 분이 누구와 함께 있었다? 그분은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 할 때 이 안에 뭘 집어넣을 거냐 이 말이죠. 지금 전도를 하려고 하는데.
자, 지금 하나의 예를 들어봅시다. 지금 부산 땅에 요한이 와서 요한복음 가지고 전도할 때 요한복음 1장 1절에 태초에 ... 있음에 그분이 하나님과 함께 하셨다. 이 안에다가 우리 장근식 목사님, 이 안에 뭘 집어넣겠습니까? 생각해보세요. 그 구체적인 개념은 예수님 아닙니까? 예수님인데 자, 예수님을 이 안에다 다른 표현으로 집어넣는다 말이죠. 예수님은 안 되죠. 왜냐하면 나중에 말씀이 뭐가 된다? 육신이 돼야 예수님이니까.
육신이 되기 이전에 ... 그분을 이 안에다가 이 사하구에 있는 이 부산 땅에 있는 자갈치 시장 장사하는 아줌마한테 뭘 집어넣어야 토착, 한국이라는 이 토착적인 이러한 삶의 정황 속에서 어떤 개념을 집어넣어야 되겠습니까? 이야기해 보세요. 참, 이게 어렵지요. 학자들은 이런 관점으로 로고스를 이해합니다. 그냥 청소년수련회 와서 자장면, 자장밥 먹기 위해서 외우라 해서 요한복음 1장 1절 외우는 게 아니고, 하나하나 따지는 겁니다. 분석하는 거예요.
자, 이게 부산 땅이다. 부산 땅에 태초에 육신 되기 이전에 예수님을 뭐라고 표현해서 이걸 있었으매 그분이 곧 하나님이 함께 계셨으니 그분이 아니면 세상은 하나도 있지 아니하였다 이 말이죠. 그분은 생명이었고, 그분은 우리의 빛이었다. 라고 할 때 뒤에 설명하는데 그분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는 그분의 개념을 뭐라고 잡아야 되느냐 이 말이에요. 뭐라고?
여기 래드의 책에 보면, 다양한 의견을 제시했어요. 그 첫째 의견이 뭐냐 하면, 첫째 의견이 이게 로고스라 돼있지요. 로고스라 할 때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으매 그 로고스 그 분이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 이렇게 이야기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로고스라 하는 것은 그 당시 요한복음이니까 그 당시 누굽니까? 헬라인들이죠. 헬라인들에게 이미 익히 알고 있는 개념이 있었을 것 아니냐 말이죠.
익히 아는 개념이 뭐냐? 헬라인들의 의식구조가 삼층에 세 층으로 돼있거든요. 삽겹살. 첫째 층이 뭐냐 하면, 하나님인데 하나님은 이건 성격이 묵직해서 움직이면 안 돼. 하나님은 변함이 있으면 안 돼요. 하나님은 이게 듬직해야 돼요. 하나님은 쫄랑대면 안 돼요. 하나님은 그냥 근엄하게 계셔야 돼요. 그럼 하나님은 뭐만 하면 돼요? 명령만 누구한테 위탁만 하면 돼요.
그러면 하나님은 한분으로 계시고, 그분이 하는 일은 용역회사가 용역업체하는 거죠. 이 세상 만드는 일은 하나님한테 지시받은 하급 신이니까 하급 신을 다른 말로 하면 뭐가 되겠어요? 천사지요. 여호와증인처럼 천사. 이미 구약에 보면 하나님은 뭐예요? 하나님은 두 분 됩니까, 한 분입니까, 세 분입니까? 하나님은 한 분이에요.
하나라는 개념 속에는 둘이란 개념이 있을 수가 없어요. 그것이 성경에서 분명히 구약성경을 통해서 나는 뭐다? 나는 하나. 나는 오직 홀로 계시니라. 나 외에 다른 신은 없다. 이사야에 나오잖아요. 나 외에 다른 신은 말도 안 된다. 나는 오직 하나다 말이죠. 둘이 될 수 없는 유일하신, 욥기에 보면 나오잖아요. 천지를 만드신 분은 둘이 만든 게 아니고, 한 분이 만들었어요.
근데 잠언서에 보면 뭐라 돼있어요? 그 한 분이 만들 때 옆에 누가 보조하는 분이 있었죠. 보조자. ‘지혜’라는 분이 보조자가 돼있다 이 말이죠. 그게 필로의 로고스죠. 여기서 이 책에 보면 로고스를 두 개 있습니다. 헬라적인 로고스와 또 하나 뭡니까? 필로, 유대인들 쪽에서 나온 유대와 헬라와 결합된 로고스 나오지요. 또 한 가지 소개해 놨어요. 이것은 뭐냐 하면, 말씀이다. 구약성경 말씀이다. 세 가지 돼 있는데.
이 사람 래드는 보수주의기 때문에 일번도 아니고, 이번도 아니고, 뭐다? 헬라적 로고스도 아니고, 필로의 로고스도 아니고, 세 번째 뭡니까? 성경 말씀이다. 이렇게 봐요. 근데 논리가 약간 약하거든요.
자, 그렇다면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는 말은 하나님은 계시고, 중간에 하나님의 명을 받아서 천지를 만드신 하급 신이 따로 있다. 데미우르고스나 이런 게 있어요. 하여튼 하급 신이 있는데 하급 신이 만들다보니까 하급 신이 있는 그 하급 신은, 이거 두 가지가 있어요. 하급 신이 있다고 본 것은 필로고, 헬라는 하급 신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신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의 기, 에너지 이 책에 나와요. 에너지가 있다 말이에요.
그러면 모든 만물의 공통점은 뭡니까? 모든 만물은 뭔가 살아 움직인다는 공통점이 있잖아요. 살아 움직일 때 그 살아 움직인다. 저 화초가 있는데 화초는 물주니까 크더라. 살아 움직인다. 나도 밥 먹으니까 똥배 나온다. 살아 움직인다. 그러니까 너 살아 움직이니까 나 살아 움직이는 것과 같다. 이러면 안 되고, 적어도 같은 힘이 있어서 살아 움직인다. 이래 돼야 돼요. 그 같은 힘을 뭐라 표현합니까? 그걸 그 당시는 로고스라 한 거예요.
여러 말로 하면, 태초에 어떤 기가 있었으니 어떤 생명력이 있었으니 그 생명력이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그 생명력에 의해서 하나님은 생명력을 가지고 모든 만물들에게 빛을 주셨다. 이래 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석을 할 때 그 생명 되시는 그분이 육신이 되셔서 예수님이 되었으니까 예수를 이해할 때 뭐로 본다? 야, 우리가 지금 생명은 있지만 늙어 죽잖아요. 후패가 생기지만 야, 진짜 하나님과 함께 했던 원래 창조의 생명이 우리한테 오게 되면 우리는 영생불멸한다. 라는 식으로 그들에게 전도했다는 것이 대부분의 학자들의 의견입니다.
제가 이 책을 봐야 될 이유가 바로 이런 식으로 쉽게 다가가기 위해서 이런 식으로 교인들에게 일단 가르쳐서 예수 안에서는 생명을 얻습니다. 지금 살아 있는 것 하고 연장됩니다. 지금 살아 있는데 좀 더 오래 사십니다. 라는 식으로 가르치시면, 그것은 결국은 다 설교 듣고 난 뒤에 나는 예수 믿고 이제 영생 얻었으니까 챙겼다. 그럼 결국은 그 사람들이 챙기고 가서 누구 위주로 갑니까? 예수님 위주가 아니고 누구 위주로? 자기 위주죠.
야, 예수님 되게 고맙네. 왜? 나한테 영생불멸 줬으니까. 이거는 도대체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자기를 미워하는 게 없잖아요. 잘난 자기, 교회 가서 더 잘난 자기 돼버렸잖아요. 그 책임이 목사한테 없다 할 순 없지요.
10분 쉽시다.
우리교회(IP:220.♡.176.141)
07-09-16 21:34
busan070904b
20070904b 부산강의 : 조지 래드 [신약신학]-기독론(2) 녹취 이름 : 한윤범 2007-09-10
20070904b 부산강의 : 조지 래드 [신학신약]-기독론(2)
(강의:이근호 목사)
지금 로고스 문제에 있어서 여기 기독론을 이렇게 책에 길게 한 것은 그냥 넘어갑시다. 라고 할 수 없어요. 목사님, 그 이야기 헬라철학이야기, 넘어갑시다 할 수 없는 게 목회를 처음 한 사람한테는 신학교 배운 데로 해요.
여러분, 로고스라 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이고 그건 하나님의 구약 예언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온 것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러 왔다. 그 뜻이라 하는 것은 이미 전에 옛 언약에 주어진 모든 그 말씀이 이제는 육신이라는 걸 통해서 완성태를 본다. 완성의 상태에 들어간다. 그렇게 처음 목회할 때는 그렇게 학교에서 배운 데로, 학교는 이것까지는 안 배워주지만 하여튼 정답은 배운 데로 그냥 말씀이다. 천지를 창조하신 그 말씀이다. 말씀이 육신이 된다.
하는데 목회 십년, 이십년 되면 교인들이 히딩크가 이야기하죠. 나도 4강해도 아직까지도 배고프다. 하는 거 있죠. 교인들은 자극적인 걸 원해요. 특히 오래된 교인들은 이미 식상한 것은 권태를 느끼는 거예요. 사람이 권태를 느끼면 헌금을 적게 냅니다. 항상 자극할 때 자극줄 때 돈이 빵빵 나오거든요. 그러면 자극을 준다 하는 것은 안에 있는 욕망을 간질러야 돼요.
욕망이 뭡니까? 현재 어느 선까지 들어왔으면 선에 머물지 말고 놀라운 신의 경지에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수준 높게 살아보겠다. 수준 있게. 그러면 내 속에 들어온 신의 기를 능력을 부풀어서 계속 확장시키는데 대해서 어떤 정당성을 목사님이 좀 설교에서 보장해 달라. 나는 이만큼 위대하다는 것을 존재할 만한 가능성
그렇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그 말씀이 뭐가 되느냐 하면, 생명이 역시 생명발이 남보다 좀 세네요. 하는 그런 소리 듣고 싶다. 기도발, 영생발이 좀 세네요. 라고 할 거 아니냐. 그러면 예수님의 그 기가 주신 생명이 남보다 큽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거 하기 전에 그 이야기하기 전에 일번, 이번은 했지요. 일번은 헬라 로고스. 로고스는 뭐라 했습니까? 신은 아니고 하나님의 생명 능력이 있고 두 번째 필로의 로고스는 뭐라 했습니까? 신인데 하급 신이다. 또 이렇게 해도 되고, 사실은 필로가 또 헬라철학으로 갔기 때문에 바꿔서 이야기해도 마찬가지에요. 둘 다 포함되어 있으니까 이 안에. 필로란 사람도 맨 헬라철학이니까 둘 다 다 포함되어있어요. 다만 편리에 따라서 하는데. 어쨌든 간에 둘 다 공통점이 뭡니까?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거. 이거는 때려죽어도 양보 못해. 하나님은 한분이다 두 분 될 수 없다.
그런데 김세윤 교수 같은 경우에 그걸 때려치우기 위해서 하나님 옆에 한 분 더 붙였다. 뭐냐? 말씀도 뭐다?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갑자기 몇 분 됐어요? 한 분에서 두 분 되는 것이 전도의 목적이다. 김세윤 교수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세 번째 말이 뭐였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됐다 할 때 말씀이 육신이 됐다. 하나님의 성경 말씀이다 할 때, 이 세 번째 경우가 되게 되면, 아까 이야기한 토착민에게 알아듣는 소리는 이다, 아니다? 아니지요.
세 번째 맞는 이유가 뭐냐? 아까 이야기했지요. 말씀이라 하는 것은 알아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약성경처럼 구약에 있는 메시아 오기를 대망하는 사람, 고대하고 고대하는 사람들에게만 다가오는 메시아여야 하기 때문에 못 알아듣는 말씀이라는 사용을 했다. 이래 볼 수 있어요.
누가복음 1장에 보면 과부 나오지요. 과부의 평생소원이 뭐였습니까? 내 평생소원 이것 뿐. 과부의 소원이 뭐였습니까? 메시아 보는 것. 시므이 소원이 뭐였습니까? 메시아 보는 거예요. 지나 개나 소경된 자나 문둥병자들이 뭘 기다렸습니까? 다윗의 자손이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메시아 기다린 거예요.
유대인들만 메시아 기다린 게 아니고, 유대인의 구약을 보면서 비록 이방인이지만 유대인의 메시아가 진짜 메시아이라는 걸 알고, 그 메시아 오기를 학수고대한 사람에게만 알아먹기는 말씀. 그렇다면 그 말씀은 뭐냐? 구약에 예언된 예언의 말씀이에요. 태초에 말씀이 계셨으니. 예언된 말씀이 계셨으니, 그 말씀이 조금씩, 조금씩 사람들에게 빛으로 생명으로 왔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두웠기 때문에 그 빛을 못 알아먹었다.
이 마지막 때에 또 누굴 보냈어요? 마지막 때 요한복음 1장에 누굴 보냈습니까? 세례요한을 보냈지요.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여기 보세요. 9절에 보면, “그가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해서 증거하는 것이라” 그 빛을 증거하는 사람들을 세례요한을 두고 하잖아요. 이 말은 이 뉘앙스가 뭐냐 하면, 세례요한만 증거하는 게 아니고, 그전부터 태초부터 계신 말씀께서 말씀 따라서 세례요한 같은 선지자를 계속해서 보내셨다. 라는 것을 이미 깔고 하는 이야기다 말이죠.
결국 요한복음은 헬라철학과 어떻게 엮어보려는 책이 아니고, 결국 신약의 구약성경이에요. 구약성경을 그대로 배경으로 깔고 용어는 신약적인 용어를 사용해서 그 구약의 말씀대로 완성했습니다. 하는 그렇게 해야 맞다는 겁니다. 그게 요한복음 구석구석에 보면, “말씀을 응하게 함이라” 하는 그 말씀. 이게 공관복음에도 나오지만 요한복음에도 나오거든요. 말씀을 응하게 함이라 하는 말을 한 걸로 봐서 하나님은 예언 없이 일하는 법은 없다.
그래서 구약 무시하는 놈, 너거 이미 죽었다. 구약을 믿거든 구약대로 오신 분이 바로 육신이 되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라고 한 거예요. 그 증거가 어디 있느냐 하면, 요한복음 1장 17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율법을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맞잖아요. 율법은 모세로. 벌써 요한복음 자체가 헬라철학하고 전도하려고 사람에게 납득하려는 책이 아니고, 모세 율법 모르거든 다시 새로 배워라 이 말이에요. 율법은 모세로 왔지만 이제 마지막 때는 율법을 준 게 아니고, 율법의 완성태, 말씀 자체가 이제는 육신이 된 거죠. 율법은 모세로 왔지만 율법 이전에 뭐가 있었다? 율법을 율법 되게 하는 말씀이 먼저 있었다.
그 말씀이 육신이 되었으니까 이제는 율법 가지고 육신을 해석하는 게 아니고, 말씀 가지고 육신을 해석해야 된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모세가 준 율법 가지고 들이대면서 뭐라 합니까? 예수 당신이 오실 메시아 맞나, 안 맞나 우리가 조사해 할게. 이것은 잘못됐다 이 말입니다.
이제 요한복음의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 하는 것은 율법의 이전의 말씀. 이게 저는 이렇게 봅니다. 말씀이 계신데 그 말씀이 로고스죠. 말씀이 계신데 이 말씀이 그 당시의 헬라의 개념에 의하면, 말씀은 말씀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신으로 살아계신 선재하신 어떤 분으로 인격으로 그렇게 헬라철학에서 있기 때문에 그 용어를 써서 로고스라. 어떤 로고스란 분이 계신데 그 내용을 들어보면 하나의 예언이었다. 하나의 말씀이었다.
그 말씀이 육신이 온 것은 그 말씀을 육신을 통해서 다~ 이루게 함이라. 그래서 요한복음 19장에 보면, 십자가에 달릴 때 뭐캅니까? 다 이루었다. 뭘 이루었는데? 요한복음 1장 나오잖아요. 말씀이 육신이 되었으니까 육신을 통해서 독생자 영광을 다 이룬 거예요.
자, 이제 제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제일 먼저 이야기했던 것. 과연 기독론, 영생 이렇게 분류할 수 있느냐? 저는 그렇게 분류한다는 그 자체가 우리의 죄성을 드러내 것 밖에, 분류 자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고, 분류 안 하면 못 알아듣는다는 그 자체가 우리에게 이미 우리 입장을 고려한 것이 들어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 입장을 고려하지 말고 주님께서 직접 보는 걸로 하면 되지 않겠느냐? 우리는 그래 할 수 없지요. 우리는 결국 뭘 해도 그게 나쁜 줄 알면서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요. 분류 할 수밖에 없어요. 분류를 안 했다고 해서 안 한 걸로 구원 받을 수 없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성령이 아니니까. 이 분류를 통해서 우리의 이러한 부족함과 우리의 미흡함과 우리의 죄성을 드러내면 그걸로도 충분히 의의가 있다 이래 보겠습니다.
자, 여기에 보면 로고스 개념에 유대적 개념의 배경은 지혜가 인격화된 개념을 더한다. 계속해서 로고스 이야기가 계속 나옵니다. 이게 로고스, 기독론에 대해서 쭉 이야기했는데. 로고스는 창조의 대행자다. 골로새서 1장 16절. 모든 것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왔다. 그래서 선재하신 어떤 그 분이다. 이렇게 돼있다 이 말이죠.
여기서 아까 괄호했는데,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 이 말을 부산 사람 같으면 이래 하면 돼요. 태초에 하나님이 계시니 그분이 하나님과 함께 천지를 다 만들었다. 이렇게 틀을 잡아놔야 되죠. 그 안에 깨보면 그분은 예언의 말씀이 되고. 첫 번째 말씀이 계시니. 라고 할 때 그 말씀은 우리가 말하는 것만 생각하는 한국사람 심정에서는 하나님의 인격이라는 개념이 포함이 안 돼 있잖아요. 예언하시는 하나님이라고 길게 집어넣으면 그게 적당하다. 미리 말씀하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이 함께 계시니 그 말씀하신 대로 이루기 위해서 오셨다. 이게 무난하다 이렇게 저는 생각합니다.
그 다음에 [메시아] 봅시다. 여기서 메시아 대목에서 래드는 좀 특이한 이야기를 해요. 무슨 특이한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그리스도가 고유한 이름이 아니라 명칭으로 사용했다. 이 말이 신학을 좀 한 사람한테도 상당히 어려운 말이에요. 그리스도를 고유한 이름이 아니고 명칭이다. 요한복음에서는 어디서든지 두 가지 예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가 고유한 이름이 아니라 명칭으로 사용됐다. 그 이름은 예수님이지 예수 그리스도는 아니다. 라고 여기 책에 나와 있는데 이렇게 이야기하는 취지가 뭐냐 이 말이죠.
그것은 과연 그런가 그거는 요한복음에서 한번 봅시다. 요한복음 1장 20절.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이래 돼 있잖아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하니까 이 그리스도는 이미 하나의 명칭으로써 그 당시 많은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이 고대하고 또 고대했었다 이 말이죠.
결국 이건 뭐냐 하면, 세례요한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이 말은 그들이 기대하는 것을 비켜가는 듯한 그들이 오는 코스 있잖아요. 그 코스대로 안 오는 코스다 이 말이죠.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는 식으로 나는 온다. 이 말이거든요. 말이 어려워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라는 식으로 온다는 말은 그들의 의견을 들어주는 것도 아니고, 그들의 의견을 반대하기 위함도 아니에요. 그들에게 동의하는 것도 아니고, 반대하는 것도 아니다. 이래 되는 거예요.
논리에서 이래 돼요. 이거는 안경이다. 이거는 안경 아니다. 둘 다 이렇게 이야기할 때 이 이야기가 둘 다 성립되려면 뭘 해야 됩니까? 이거는 철이거든. 이러면 되거든요. 그죠? 지금 세례요한이 이야기하려는 것은 너희들이 알고 있는 그리스도 명칭, 그거 붙들어 봐도 이게 맞았다, 이게 틀렸다 이래 돼버리면 그들의 명칭에 또 합류한 셈이 되는 겁니다.
오늘날 목사님들이 복음을 전할 때 이미 기존의 복음이다, 아니다. 라고 알고 있잖아요. 복음입니다. 아니다. 양쪽 다 깨는 복음을 전해야 돼요. 그래서 설교시간에 못 알아듣는 소리를 해야 돼요. 뭔가 교인들이 기대하고 고대하고 있잖아요. 그걸 비켜가야 돼요. 비켜가면서 아하, 내가 먼저 선입관 잡은 선입관 자체에 문제가 있구나. 있지. 그게 뭡니까? 죄고, 죄가 뭐라 했습니까? 자기 의, 자기 존재 정당성. 나는 존재해도 당연해. 나는 안 죽어야 돼. 이런 존재 정당성, 이게 죄 아닙니까.
그러면 이 전체를 자기 의, 자기 정당성, 자기 죄를 비켜가는 식으로 하려면 결국 뭐냐 하면, 결국은 제가 이야기합니다. 관심사입니다, 관심사. 교인들이 교회 올 때 목사님, 교회 왔습니데이. 저 착하지요. 자기 부인할까요? 예, 부인할게요. 내 미워할까요? 미워할게요. 하고 있다고요.
결국 미워하고 부인하든 간에 그 관심사가 누굽니까? 결국 자기 아닙니까. 그런데 설교를 다 듣고 난 뒤에 아하, 내가 한 주일 동안 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