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 3번 녹취록
광주강의 3번 녹취록
이름 : 서경수(IP:122.36.190.11)
광주강의(07. 8. 24) 28-3
의미론에 대해서 계속 하겠습니다.
의미라는 것은, 자아가 있으면 자아를 밑에서 올려가지고 깨버리죠. 그렇게 되면 자아가 생각했던 것과 밑에서 올라오는 새로운 면 이 두 가지가 다 보이는 거예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의미가 밑에서 올라오게 되면, 밑에서 올라오던 어떻게 되면 하나의 사건이니까. 의미는 사건이거든요. 십자가는 사건이란 말입니다. 사건이란 말은 우리가 인위적으로 되풀이 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사건이라고 합니다. 이 떡이 맛있지요? 맛있는데, 떡을 맛있다고 그 떡을 다시 먹어보세요. 아까 먹었던 맛이 아니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모든 것을 ‘내가 맛있다고 하면 맛있는 거야.’ 라는 생각을 버리고, 모든 것이 사건이 덩어리 채로 나에게 다가온다고 보세요. 모든 것이 예상치 않은 모습으로, 커든 작든 간에.
제가 지금 발이 건강합니다. 그런데 아파보세요. ‘이 건강한 것이 자동적으로 건강했던 것이 아니고 그 때 건강했을 시점이구나.’ 하는 것을 알지요. 지난 건강이 하나의 사건으로, 은혜의 사건으로 다가오잖아요.
그러니까 나라는 존재에서 의미를 발견하게 되면 나를 위한 의미가 되지만, 이것은 타인에게는 의미가 안 되지요. 그 타인 중에 누가 포함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포함되어 있잖아요. 내 좋아하는 일이 예수님 좋아하는 일은 아니에요. 우리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에 뿅 갑니다. 돈 50억 주면 뿅 가버려요. 그러나 예수님한테 50억 주면 그분은 뿅 안 갑니다. 그분은 50억에 넘어갈 분이 아니거든요.
뜻이 다르잖아요. 다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돈을 좋아하는가? 이게 의미가 나를 기준점으로 삼기 때문에, 내가 있기 때문에 나를 위한 의미로서 계속 채우다보니까, 내 보따리에 돈이나 권력이나 지위나 명예나 이런 것을 계속 채우니까 나에게 의미가 돌아오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을 부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누구를 겨냥하는 겁니까? 십자가는 죽음입니다. 십자가에서 뭐가 흘렀습니까? 피가 흘렀지요. 성경에서 피라고 하면 끝까지 갈 때까지 가본 거예요. 피를 본다는 것은 말끔하게 하나도 남김없이 정체를 다 드러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피를 흘려야 우리를 구원한다는 말은 ‘너 행위에서 어떤 것도 피없이 구원받을 짓은 없다.’는 겁니다. 피가 없이는 전부다 구원 못 받을 짓이고 죄밖에 없다는 거예요. 피를 흘렸다는 것은 우리를 까발릴 대로 다 까발려 봤다는 겁니다. 끝까지 간 거예요.
“저는 예수님 피로 구원 받습니다.” 말은 쉽지요. 그러나 그 뜻은 ‘나는 내 힘으로 절대로 구원 못 받습니다.’ 이런 뜻이에요. 앞으로 무슨 짓을 해도 그 짓으로 구원 못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들의 피를 보기 원했습니다. 이것은 궁극적인 진리의 밑바닥까지 다 들춰내기를 원했던 겁니다.
십자가 피는 결국 예수님의 자아가 깨지잖아요. 자기 몸이 깨지잖아요. 그 깨지는 몸은 누구의 죄를 짊어졌다? 우리의 죄를 짊어졌기 때문에 죽었잖아요. 그렇다면 끝까지 피를 봤다는 말은 이 자아의 죄인과 밑에서 올라오는 용서하는 예수님의 자비의 원래 뜻, 이것을 양면으로 나누는 것, 하나님의 십자가 사건이 우리 속에서 올라오면 나는 내 속이 쫙 갈라져서 하나는 죄인으로 만들고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로 만드는 그런 사건들이 매일같이 우리에게 부닥쳐 온단 말입니다. 우리는 깨닫지 못하지만 매일같이 이런 사건이 쳐들어오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기 본문에서 출애굽 사건이 뭡니까? 출애굽 사건을 그냥 자아가 안 깨지는 것 같으면 ‘살았다. 하나님 덕분에. 찬양 드리세.’ 왜? 나는 살았거든. ‘저 애굽 놈들은 물에 빠지고 우리는 무사히 건너왔네. 나는 살았다.’ 여기서는 역시 나가 남아 있지요? 그런데 그것이 어디에서 깨집니까? 갑자기 물이 없고 양식이 없을 때, 소위 살아남았던 자아 가지고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나옵니다.
그래서 맛사에서 결국 충돌이 일어납니다. 충돌이 일어나면서 반석이 깨어집니다. 반석 깨지는 것을 고린도전서에서는 그리스도가 깨지는 것으로 봤어요. 그러면 그리스도가 깨지는 이유가 뭡니까? 의미를 모르고 자아가 있는 나의 뜻만, 나에게 이익으로 돌아오는 나의 뜻만 챙기는 나를 위해서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가 뭡니까? 자아가 안 깨진 게 죄잖아요. 자아가 살아남아서 모든 것을 내 위주로, 다 내 의미 있는 것으로, 나의 뜻으로 나의 의미로 다 되돌리려는 이 사고방식, 이 의식, 이 속성, 이 본질 이것이 바로 죄지요. 간음 죄, 살인 죄, 거짓말 하는 죄. 그 모든 죄가 뭡니까? 되돌아오는 본부가 있어요. 본부가 누굽니까? 남이 아니고 나에요. 그 남 속에 누가 포함되어 있어요? 예수님도 포함되고 하나님도 포함됩니다.
그러니까 유다서에서는 뭐냐?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가 있다고 했는데, 실제 너희들이 살아가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이용한 것밖에 더 있냐? 이게 무슨 믿음이냐? 이용한 것이지. 라고 하는 겁니다.
6절에 보면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이렇게 되어 있지요.
밑에서 올라오는 사건. 제가 사건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유다서에서는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구원의 일’ 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일이 밑에서 올라오게 되면 여기서 구원 받을 자는 분류되어 있고 악마로 하여금 그 정체를 드러내게 하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구원 사건은 달랑 우리만 구원하려는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악마를 벌해야 하는 과정을 같이 수행하시는 겁니다. 지옥 갈 자들을 처벌하는 일까지 그 구원하는 일이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너무 자기 위주로 생각하지 마세요. 예수님이 하는 일은 지옥 갈 사람들을 가려내는 작업을 하기 위해서 우리를 사용한다. 그런 쪽에서 좀 생각을 해야지 예수 믿어서 내 이익 본 것이 뭐가 있느냐는 식으로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믿고 이익 보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등장한 것은 지옥 갈사람 지옥 보내는 사역이 있다는 것을 겸해서 생각하면 ‘아, 나를 이용해서 지옥 갈 사람은 지옥 보내시는 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꾸 자기 구원 받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내가 전하는 복음을 안 믿는 자에게 지옥 간다는 그것까지도 이미 주님의 일로 포함시켜 놓자는 겁니다. 그래서 목사는 강단에서 오늘이 마지막 설교라고 생각하고 설교를 해야 됩니다. 마지막 설교라고 한다면 결국은, 처나 자식이나 아비나 남편이나 돈이나 지위나 목사라는 직분까지라도 없어도 괜찮지요.
다만 하나님이 사용하시면 누가 지옥 갈 사람인지를 알려주기 위해서 날 사용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게 인력으로 안 돼요. 목사가 설교하기 전까지는 ‘오늘 설교 잘해서 다음 주에 몇 명 더 오게 만들자. 그 사람들 올 때마다 헌금할 것이고 헌금 나오면 내 노후는 보장된다. 교인 수 많다는 체면도 세우고’ 이런 것이 있어요. 일종의 사업이죠.
식당 운영하는 사업가가 손님이 올 때 ‘지옥 갈 놈 한 놈 온다.’ 이렇게 생각 안 하잖아요. ‘한 사람 또 온다. 얼마 벌까? 이번 달 이자는 갚겠구나.’ 이렇게 되지. 사물놀이 취미를 갖고 있는 어떤 분은 사물놀이를 하면서 ‘같이하는 분들이 천당 가겠나?’ 이런 생각 안 합니다. 그냥 정신없이 장고 치고 꽹과리치고 하는 거예요. 이처럼 목사가 하나의 기능인이 되고 목사의 심방이 기능이 되면 이것은 자기를 위한 의미로 되돌아오게 됩니다. 교회가 자기 사업채가 되 버려요. 이 말은 죽기 싫다는 겁니다. 죽더라도 목회 성공하고 죽겠다는 겁니다.
목회 성공하고 죽겠다는 것이 놀랍게도 설교에 고스란히 담겨 나온다는 것을 왜 본인들은 모를까요? 귀신들은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고 했어요. 유상태라는 목사는 말하기를 사도바울 때문에 한국의 기독교를 다 버려놓았다고 해요. 그런데 사도행전에 나오는 귀신은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고 했어요. 이것은 사도바울을 그리스도의 참된 종이라고 인정한 거예요. 그런데 유상태라는 사람은 사도바울을 이단으로 간주했으니 이게 어찌된 겁니까? 목사라는 사람이 귀신보다 못해요.
사도바울이 주님의 참된 종이라는 사실은 귀신도 알아요. 귀신은 영의 세계에 밝습니다. 그래서 정말 복음을 위해 죽으려고 설교하는지 먹고 살려고 설교하는지 귀신들은 다 압니다. 나도 설교 들어보면 아는데 귀신이 모르겠습니까? ‘회개의 모습이 안 나타나는구나! 남 가르쳐서 목사노릇 계속 하려고 하는구나.’
우리교회 어떤 청년이 이런 이야기했어요. “예전에는 내가 목사가 되려고 했는데 목사님 설교 듣고 난 후에 목사 안 되기를 천만 다행으로 생각합니다.”라고. 목사 안 된 것을 천만 다행으로 생각한답니다. 이 청년이 2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국민은행 시험 쳐서 들어갔어요. 아직 총각인데 ---
마귀는 사도바울이 주의 종인 것을 압니다. 바울도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금이나 은을 탐해서 지금까지 온 것이 아니다. 나는 죽을 때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주께서 부르셨다.’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물론 24시간 완벽하게 그런 정신에 사로잡혀 있다고는 할 수 없지요. 인간은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만, 사도바울의 고백 중에서 “나는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이게 뭡니까? 행동이 옳으냐, 잘못이냐(말을 할 때 신중하게 했느냐, 경솔하게 했느냐 등) 이런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인생의 방향이 어느 쪽이냐가 그 인생을 결정하는 겁니다. 그 가는 방향이 ‘복음을 위해서냐 아니면 나를 위해서냐?’ 이것을 보는 겁니다.
이것은 바로 사건 자체가 그 사람의 주인 노릇 해야 돼요. 사건 자체가. 사건 자체가 주인공이 될 때만 나오는 현상입니다. 이것을 성도는 느껴요. 내가 내 주인인 것처럼 살아가는데, 아침 눈뜨고부터 24시간 내가 주인이에요. 그런데 저녁 7시30분에 갑자기 십자가가 나를 인도한다는 것을 깨달을 때는, 그 순간만큼은 주님이 주인 되고 나는 그분의 인도함을 받는 종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참 특이해요.
6절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이란 말씀이 있는데, ‘천사가 자기 지위를 떠난 것이 에녹서에 보면 나온다. 고대 위경에 나온다.’ 이런 주장들이 있어요. 위경에 나오든 어디에 나오든 간에 신약 성경에 박혀 있으면 구약의 완성입니다. 제가 이야기했지요. 이게 위경에 나오는 것이니까 틀린 것이 아니냐고 하는데 아까 이야기했지요. 문자의 뜻과 의미는 다르다고. 문자의 뜻은 내가 그것을 해석하는 것이고, 의미라는 것은 사건이 일어나서 나를 죄인으로 만들고 주님의 은혜는 따로 은혜 되게 분류시키는 것입니다.
사람이 실망할 때는 ‘죽었으면 좋겠다.’ 하다가도, “당신은 귀한 존재입니다.” 라고 칭찬 받으면 갑자기 살고 싶어져요.
7절 봅시다.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소돔과 고모라는 동성애가 범람했습니다. 동성애가 범람한 이유는 소위 남자와 여자, 여자와 남자. 이성간의 관계가 이미 시들해졌다는 겁니다. 자극이 덜 되는 거예요. 결국 소돔과 고모라의 가능 방향이 뭡니까? 복음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극은 자기가 알아서 그 때 그 때 챙긴다는, 어디 가지도 않지요. 제자리 뛰기 하는 거지요.
소돔과 고모라의 특징이 뭡니까? 롯은 떠났지요. 나머지 인물은 제자리 뛰기를 하는 겁니다. 인생을 살면서 누가 복음을 통해서 어디로 데려가는 “떠나라. 너는 나그네다.” 이런 데려가는 기분을 느껴야 될 텐데, 그렇지 않고 늘 제자리 뛰기 하는 것. 떠날 곳도 없고, 떠날 마음도 없고, 떠날 이유도 없이 그냥 제자리 뛰기 하는 것. 이것은 갇혀 있는 거예요. 그런데 롯은 떠났지요.
떠날 때 흉내 낸 사람 있지요?
제가 몇 주 전에 설교 할 때,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차범근하고 삼순이(김선아) CF 나오는 것 있지요? KTF 전화 사용하라고 갑자기 톡 튀어나와서 “KTF 전화 사용해야 요금이 싸.” 하고 이야기해 놓고는 차범근과 김선아가 벽을 통과하는데, 차범근을 벽을 통과했는데 김선아는 벽을 통과 못하고 넘어지잖아요. 이런 CF 있지요?
이게 바로 그냥 흉내 내고 따라 온 거예요. 누가? 롯의 처가. 롯의 처가 따라오는데, 하나님이 참 얄궂어요. 왜냐? 여기서 구원 받는 것은 자기 뜻대로 안 돼요. 사전에 하나님은 원칙을 하나 줬어요. ‘절대로 뒤돌아보지 마라.’는 원칙을 미리 줬어요. 만약 롯의 처가 목에 기부수를 했다면 뒤돌아보고 싶어도 목이 안 돌아가서 볼 수 없을 것 아닙니까. 결국 이것은 뭐냐 하면, 아무리 가짜가 따라붙어도 기어이 가짜는 떼어놓는 거예요.
일곱 살 된 남자아이가 엄마 따라 여탕에 가려고 시도하다가 ‘너는 안 돼!’ 하고 따로 떼서 남탕으로 집어넣는 것처럼, 아무리 가고 싶어도 그 조건이 어떤 조건인가 하면, 기어이 그 조건을 극복 못할 조건을 줘요.
저 같은 경우에 ‘구원을 받으려면 바둑을 두지 말아야 한다.’ 라는 조건을 걸면 저는 끝납니다. 심심할 때는 바둑을 한 판 두면 머리가 식혀지니까 두는데, 만약에 12년째 바둑을 안 뒀다. 그래도 장담 못합니다. 13년 되어서 바둑을 둘 수 있기 때문에.
뒤돌아보지 말라는 원칙이 계속해서 롯과 처를 갈라놓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바둑 두는 놈 지옥 간다.’는 원칙이 있다면, 날 때부터 바둑 본 적도 없는 사람과 나를 붙여 놓으면 나는 지옥가고 그 사람은 천당 갑니다. 조건이 뭐냐? 따로 떼어놓기 위한 조건입니다.
그래서 누가 구원 받는가 하면, 예수님을 믿을 수밖에 없는 사람만 믿도록 하기 위해서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복잡합니다만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만 사랑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구원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만 구원 되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저주 받는 식의 구원 방법이 끝까지 우리를 뒤따라옵니다. 그래서 그 기준을 우리가 변경할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우리의 행동을 위해 새삼스럽게 어떤 기준을 세우지 말라는 겁니다. ‘나는 앞으로 이렇게 한다. 두 번 다시 이런 짓 안한다.’ 이러지 말란 말이지요.
그런 것이 필요하다면 누가 먼저 기준을 제시했겠어요? ‘앞으로 코 골면 나는 개다. 다시는 코 안 곤다. 코 골면 지옥 간다.’ 이런 기준이 있다면, 유다서 1장 5절에 ‘코 골면 지옥 간다.’ 이런 구절이 있었을 거예요.
결국 이게 뭐냐 하면, 성경의 기준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말은, ‘믿음의 도를 지키라’는 것은, ‘예수님의 은혜가 너희를 구원한다’는 말은, 우리가 새삼스럽게 어떤 기준을 만들어 지키려고 할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온유 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온유하다고 여기는 기준 같으면 그것은 이미 온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타고난 성품이지 온유가 아닙니다. ‘온유 하라’는 그 기준은 누가 지키느냐? 예수님만 지킵니다. 그런데 ‘온유 하라’는 기준을 내가 지키려 할 때,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기준을 치우고 스스로 내가 만든 기준을 세우는 거예요.
‘성경에 온유하라고 해서 온유 하는데 뭐가 나쁘냐?’ 이러고 있어요. “너 온유는 온유가 아니야. 예수님의 온유가 온유야.” 십일조 하라고 했는데, 의와 인과 신을 겸해서 십일조 하라. 이것을 누가 합니까?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못해요. 그런데 사람들은 십일조 했다고 하는 거예요. 돈 10% 내면서. 그것은 십일조 아니에요.
제가 다시 이야기합니다. 내 기준을 새삼스럽게 따로 세우지 마세요. ‘나는 예수 믿고 뭐는 안 한다.’ 이러지 마세요. 이미 우리 자아 자체가 어떤 기준을 주님께서 용납할 필요 없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자기 십자가 피로 구원 받습니다. 내 피로 내가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피로 우리를 구원시키는 거예요. 성취입니다. 그냥 받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이게 믿어져야 돼요. ‘주님의 은혜로 구원 받는구나. 주께서 다 이루셨구나.’ 이게 믿음의 도고, 그 믿음의 도를 내 스스로의 윤리, 도덕적인 것으로, 내 양심으로 깨는 일이 없도록 믿음의 도를 지키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일에 우리들이 건방지게 개입하려고 하다가 마귀의 시험에 들고, 또 스스로 낙담하고 낙심해서 뒤로 넘어지고 자빠지는 경우를 매일같이 겪습니다. 이제는 우리 자신의 행동보다도 주께서 우리를 사건으로 인도하고 있다는 것을 먼저 생각하고 그것을 크게, 큰 범위로 우리를 덮어씌운다는 것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7. 9. 3. 09:38 녹취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