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 2번 녹취록
광주강의 2번 녹취록
이름 : 서경수(IP:122.36.190.11)
광주 강의(07. 8. 24) 28-2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신앙에 자기 존재나 행동을 넣지 마세요. 왜 넣지 말아야 되는가 하면, 하나님의 약속에 우리의 존재가치는 포함이 안 돼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용할 뿐이지 우리 의사를 들어서 하나님의 일이 보탬이 된다는 생각은 하지 말아야 됩니다.
우리를 배제하고 일하십니다. 배제하면서도 은혜 줄때는 배제를 안 해요. 배제해 놓고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그냥 우리에게 주시지요. 아브라함이 아기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때는 아기를 안 줘요. 아브라함과 사라가 다 태가 죽어서 이제는 아기 낳는 것은 끝났다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아기를 줌으로 말미암아 100%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아브라함이 믿습니다.
이것을 믿을 때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지요. 믿음은 이렇게 믿어야 믿음이지 자기의 것이 섞이면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란 것은 이렇게 믿어야 천당 가는 믿음이란 것입니다. 100% 주님이 주신 것으로 하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브라함이 대단하고 착한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은 제 성질대로 살아요. 살아도 그것과 상관없이 아브라함은 없는데서 주시고, 죽은데서 살린다는 것을 믿었으니까 그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된 겁니다.
그러면 왜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구원 되는가? 그 핵심이 뭐냐를 유다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 때문에 그렇단 말이지요. 그러면 아까 아령에서 오른쪽의 예수님이 하신 일이 왼쪽 우리 죄인에게 스며들어오는 이 과정이 바로 유다서에서 예수님을 소개할 때 그런 식으로 소개하는 겁니다.
우리 목사들이 설명할 게 바로 이것을 설명해야 돼요. 죄인이 왜 예수님께 다가설 수 없는가? 이것을 이야기해야 되고, 왜 우리 인간이 종교적인 행위로서 구원 받지 못하는가? 그것을 설명해 줘야 돼요. 여기는 뭐가 개입되었습니까? 자아가 깨집니다.
제가 근래에 영화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공부를 좀 하는데, 영화가 장난감이냐 아니면 진리를 내포하고 있느냐 이 문제입니다. 영화 전공하시는 분은 영화가 장난감입니까, 아니면 거기에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문제가 너무 어려웠나? 영화가 하나의 오락이라고 지금까지 봤거든요. 미술, 음악 등 예술의 한 분야라고 보는데, 그렇게 되면 영화에 미쳐버린, 영화에 푹 빠져버리고, 영화의 가상현실이 진짜현실과 일치될수록 거기에 매료하게 하려면 인간 속에 들어있는, 영화가 오기 전에는 미처 몰랐던 인간 자기의 속성을 영화가 밝혀낸다는 점에서 영화에 진리적인 측면이 있지 않겠느냐?
영화를 보기 전에는, 영화라고 하지 말고 드라마라고 합시다. 드라마를 보기 전까지는 ‘나는 내 하는 일도 바쁜데 내가 애도 아니고 드라마나 쳐다보고 있을 필요가 없다.’ 하고 자신만만했는데 [하얀 거탑]이라든지 이런 것을 남녀노소 다 보거든요. ‘야, 내가 왜 저 드라마의 허상에다 관심을 기울이냐’고 하지만 [주몽]같은 것을 보면 시청률이 몇 %입니까? 40%를 넘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봤다는 말 아닙니까. 집사님은 [주몽] 봤습니까? 한 번도 안 봤다고.
영화나 드라마에 어떤 진리의 측면이 있다고 보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가 뭐냐? 영화에 기법, 기술 이것이 달라지면 달라질수록 영화의 그 이미지가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변화되니까 종잡을 수 없는 거예요. 진리라고 하면 뭔가 하나를 잡아야 되는데, 영화 기술이 계속 바뀌면 바뀔수록 거기에서 새로운 뜻이 나오니까 어느 것을 잡아서 ‘영화는 정말 이런 것이다.’ 라고 이야기할 게 못된단 말이지요.
바로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이 왜 자기 종교적인 행위로서 구원을 받지 못하는가 하면, 죄인이 만든 것 중에 하나가 영화 아닙니까. 그렇다면 죄인이 종잡을 수 없어요. 내가 누군지를 모르는 거예요. 어떤 때는 신앙에 열심 내다가 어떤 때는 소홀해지고 하기 때문에 자아가 해낼 수 있는 모든 경우들을 목사님들은 이걸 설교를 해 줘야 돼요. 인간이 자아를 갖고 있을 때 종교적인 행위, 기도나 전도나 봉사를 할 때 이것이 결국은 예수님의 뜻이 아니고 자아를 투사, 이것이 기투라고 하는데(피투, 기투라는 말을 썼지요. 피투는 던져진 존재, 누가 나를 던져버린 것. 기투는 내가 계속해서 나를 던지면서 살아가는 나.) 죄인이 구원되고자 찾는 그 예수는 진짜 예수가 아니고 내가 기대한 나의 예수, 나의 종교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두 번째 이러한 죄를 역으로 주님께서는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접근 했는가? 이 두 가지를 다 설명해 줘야 이것이 약속에 맞는, 부합되는 설교가 되는 겁니다.
약속은 아령이니까 예수 그리스도 쪽에서 오는 것과 죄인 쪽에서 예수님께 다가가는 것 이 양 방향 다를 설교해 줄 때, 교인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오직 예수님의 공로와 십자가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게 됩니다.
설교를 듣고, 나는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 받았다는 기쁨이 나오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유다서가 진행됩니다.
그러면 유다는 뭘 해야 됩니까? 죄인이 나갈 때 뭐가 잘못 되었는가를 설명해 줘야 합니다. 양쪽 다 설명을 하지만.
3절을 봅시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 이렇게 되어 있지요.
방금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구원 받았다고 자처하는 너희에게 편지한다. ‘너 구원 받았느냐?’ ‘예 구원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구원 받았다는 너희에게 이야기한다. 너희들이 믿음의 도를 지켰느냐?’ 이렇게 되는 거예요.
결국 구원이란 것은 행함이 아니고 믿음의 도, 믿음의 원리죠. 믿음으로 구원이 임하게 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겁니다. ‘나는 아무것도 행하지 않았지만 주님 하신 것을 믿습니다.’ 라고 믿을 때, 그 때 당신은 ‘믿습니다.’ 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당신은 구원 받았습니다.’ 라는 말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도를 지키기 위해 너는 얼마나 싸웠느냐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싸웠다는 말은 우리 속에 믿음이 들어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난다? 내 행함으로, 믿음이 아니고 행함으로 구원 받겠다고 하는 시도가 끊임없이 우리에게 계속해서 올라오고 있다는 것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피히테 이야기를 다시 한 번 해 봅시다. 뭐냐 하면, 나라는 것은 나 밖에 절대 신이 있다면 절대 신은 내가 삼키지 못하지요. 내가 차지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내가 차지하지 못한 게 있으면 나에게 미진한 것이 되고, 이것이 나를 불안하게 하지요. 맞지요? 사람이 남 눈치 보는 것이 뭡니까? 상대방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눈치 보는 것 아닙니까.
며느리가 친정에 가면 불안합니까? 안 불안하지요. ‘엄마! 수제비 해줘.’ 하면서 안기죠. 그런데 시댁에 가서 ‘엄마! 수제비 해줘.’ 합니까?
어떤 철없는 며느리가 시어머니의 말, ‘나는 시집 온 너를 며느리로 생각하지 않고 딸처럼 여긴다.’는 말을 듣고, 딸처럼 행동했어요. 아침 10시에 일어나고, 아침밥도 안 하고. 딸처럼 행동했어요.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어요. 아무리 시어머니가 잘 해줘도 며느리한테는 부담됩니다. 그런데 엄마는 (피히테의 글에 나오지요.) 처음부터 애기는 엄마하고 자궁에서 함께 있었기 때문에, 자궁에 있는 애는 자아에 대해서 타인을 다시 점령할 그런 수고를 안 해도 되는 거예요. 그것은 엄마가 다 해주니까 자기는 자궁 속에 앉아서 발로 차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탯줄 끊고 세상에 나오고부터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은 내가 알아서 타인과 만나는 가운데 새롭게 정립해 나가야 돼요. 그러니까 그만큼 불안한 거예요. 불안하니까 애들은 울어요. 애들은 울고 어른들은 술 마시고. 술을 왜 마십니까? 기분 더러워서 마셔요. 회복하려고. 알콜 성분에 의해서 기분을 업 시키려고 하잖아요.
우는 이유가 뭐냐? 왜 세상 일이 내 마음대로 안 되느냐는 것이지요. 이 말은, 나 밖에 누가 있다? 나를 둘러싼 다른 것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것을 점령해 줘야 비로소 여기에서 불안감이 없어져요.
그러면 ‘종교를 가진다. 신을 믿는다.’ 이것은 뭐예요? 내가 어디까지 장악한다? 신마저 꼭두각시로, 내 원대로, 내 기도로 장악함으로 말미암아 내 마음에 평화를 누리고자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종교를 갖고 교회에 갑니다.
우리 집에 왜 우환이 있는가? 왜 부부간에 갈등이 있고, 하는 사업이 안 되고, 이사는 언제 가야 되고, 애가 시름시름 앓고 이럴 때는 뭘 찾습니까? 절을 찾아가서 빌어야지요. 빈다는 말은 내가 미진한 것, 모르는 것을 장악함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나의 불안감을 줄여나가는, 나를 점점 절대적으로 확장시키는 그런 행위가 종교라는 겁니다.
이 세상에 종교 없는 인간은 아무도 없어요. 종교 없는 사람을 무교라고 하는데 그 사람도 종교를 갖고 있지요. 계속 자기를 절대화 시키는 것. 자기가 이용할 사람을 만나고, 이용 가치가 없으면 피하고 그런 식으로 해서 연결, 연결해서 사회 속에 파고 들어가서 친분을 형성하고 이것이 하나의 종교거든요. 계속해서 뭔가 불안감을 해소한단 말이지요.
그런데 ‘믿음의 도’란 것은 뭡니까? 예수든 하나님이든 내 쪽에서 장악하고 내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피히테는 그런 소리를 했지요. 사람의 자아를 열어보면 자기의 소유한 것이 들어있다고 했습니다. 자기 재산, 지위, 학력 이런 것들이 가득 들어 있어요.
요새 학력 위조 사건이 만연하지요. 저도 그런 오해를 받았어요. 옛날 대구에서 성경공부 할 때 ‘교사 출신 맞느냐?’ 그래서 어떤 사람이 뒷조사해서 ‘맞더라. 봉화종합고등학교 교사 했더라.’ 그런 에피소드가 있어요. 누가 저를 음해해서 그런 일이 있었는데 ---
내 보따리 속에 나의 학력, 나의 재산, 지위, 직분 이런 것들이, 이 덩어리가 나를 이루거든요. 이런 것들이 나를 이루니까 여기에 어떤 방해나 공격에 대해서 반드시, 이것을 피히테는 ‘활행’이라고 했는데, 사람은 자기 속에 있는 소유를 확장시키려고 움직인단 말이죠. 짐승과 사람의 차이점은 짐승은 무더운 오뉴월에는 축 늘어져서 잠을 자지만, 사람은 소유를 확장하기 위해서 더운데도 조깅하잖아요. 이게 ‘활행’이에요. 뭔가 움직인다는 거죠.
움직임으로 말미암아 나의 나 됨을 발달시키려 하는데, ‘믿음의 도’라는 것은 내가 뭔가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찾아오는 거예요. 내가 내 보따리 속에 예수를 장악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나를 자기 보따리 속으로 가져가는 것. 이게 바로 믿음의 원리(믿음의 도)라는 겁니다. 행함이 아니고 믿음의 원리.
나는 주님께 사로잡혔다. 이제 주님의 것이 되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란 말을 썹니다. 여기에 대해서 힘써 싸우라고 합니다. 나에게는 끊임없이 소유된 자아가 오니까 힘써 싸우라는 겁니다. 마그마처럼 계속 들끓어요. 불안을 느껴서,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겠나.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내가 주저앉게 되고 망한다. 그러기에 뭔가 조치를 해야 돼. 자꾸 뭔가를 행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도는 아니고 그냥 내 본성에서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도를 위해 힘써 싸우라’는 말은 누구 이야기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죠. 하여간 우리한테 ‘믿음이 이러면 안 돼. 일어서야 해. 앉은뱅이 믿음은 안 돼. 살아있는 믿음이 되어야 해.’ 라고 할 때, 그때 주님의 이 유다서의 음성이 ‘너는 믿음의 도를 따라 사느냐?’는 음성이 들릴 때, ‘아하, 믿음은 나의 활동과 관계없이 이미 다 주신 거구나.’ 그 짧은 순간에 또다시 깨달음이 오는 거예요.
특히 사업하시는 분들, 어려울 때 ‘이 상황에서는 뭔가 조치를 해야 돼. 은행에서 돈을 빌리든지 사채를 쓰든지 뭔가 해야 돼. 주님이여, 주님은 왜 내 기도에 응답 안 하십니까?’ 할 때, 주님이 ‘그 식당 누구 것이지?’ 라는 물음이 들려올 때,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취하신 자도 하나님이다. ‘아하, 이 식당은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식당을 내가 종으로서 운영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지요. 집사님은 그런 느낌을 가져본 적이 있습니까?
주님의 식당인데 거기서 한평생 살라고 맡겨 놓았구나. 그래서 어렵다고 남한테 맡기면 안 되는구나. 고생하고 힘들어도 내가 알아서 해야겠구나. 그런 것을 느끼지요. 주님의 소유권, 아령이지요. 이게 바로 ‘믿음의 도’입니다.
‘믿음의 도’는 우리가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이 말씀대로 성취되기 때문에 우리 속에 가시처럼 계속 파고 들어오는 그런 사태가 일어납니다. 나는 평소에 내 식대로 내가 살기위해 몸부림 치고 그런 순간순간에 뭐가 파고 들어오는가 하면 예수님의 활동이 우리 속에 파고 들어와서 ‘백날 까불어도 네 모든 것은 내거야!’ 라는 그런 기쁜 소식이 우리에게 들어오죠.
여름에 애 3명과 참 힘든데, 그 자녀들이 힘들게 할 때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업보다.’ 그런 생각 안 들어요?
4절에 봅시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여기서부터 어려운 게 “판결 받기로”라고 했는데 이 판결은 뭐냐? 이미 지옥 가기로 판결을 받았다는 겁니다. 1절에 보면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자들에게” 라는 말을 해서, 이미 나처럼 그리스도로부터 구원 받기로 판결난 사람이 있는 반면에 이미 지옥 가기로 판결난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중간 지점은 없습니다.
신약성경 다시 이야기해 봅시다. 모든 사람이 그냥 평범하게 살고 있어요. 어떤 사람은 공직에 있고, 어떤 사람은 장사하고 그렇게 사는데, 이 중에 A라는 사람을 딱 집어서 ‘세상 끝 날이다. 종말이다. 너 구원 받았어.’ 이렇게 되면, 졸지에 나머지 사람들은 종말도 모르고 구원 못 받은 사람이 돼요.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구원 받았다는 이야기를 함으로써 자동적으로 다른 사람은 구원에서 탈락된 것으로 분류하는 작업을 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림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처럼 살지 못한 사람들은 전부 하나님이 죄인 되게 만들어요. 여름 수련회 강의할 때 사도행전에 나오는 말씀을 이야기했지요?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는 그들에게 허물치 아니하고 그들이 어떤 신을 섬겨도 그것을 묵인했는데 마지막 때에 정하신 사람으로 죽은데서 살려 줌으로 말미암아 나머지 모든 사람들은 자력으로 살수 없는 죄인이었다는 것을 폭로시키는 방법으로 구원하십니다.
그래서 성도는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만 믿게 되지요. 왜? 자기는 그리스도와 비교해서 죄인 되니까. 여기에서 ‘차이’가 생기는데 여기에 대해서 좀 말씀드리겠습니다.
옳고 그름은 차이 나는 게 없으면 옳고 그름이 안 생겨요. 항상 비교해서 차이나는 것을 통해서 옳고 그름이 생기고, 이 차이에서 뭐가 나온다고 했습니까? 운동이 나온다고 했지요. 사람이 딱 고정되어 있으면, 아까 피히테처럼 절대 자아가 되면 여기에는 차이가 없어요. 차이가 없으면 자기가 최고가 돼버려요. 그런데 자기 자신에게 타인이 찾아오면 여기서부터 차이가 발생하지요. 차이가 나면서 네가 옳은지 내가 옳은지 판가름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과 모든 사람을 차이 나게 만들었어요. 그렇게 아끼는 내 자신, 나에게 그렇게 충성하고 나 자신에 대해서 그렇게 진실하고, 세상 다 없어져도 나는 내가 지킨다고 여겼던 내가 나의 구원자가 될 수 있다, 없다? 될 수가 없는 거예요. 이걸 믿어야 해요. 이걸 목사님들이 설교할 때 교인들이 믿어야 돼요. 이것을 ‘자기 부인’이라고 합니다. 자기를 부정하는 것.
내가 없다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애지중지하면서 우주가 깨져도 나는 나에게 충성할 거예요. 나는 나밖에 몰라요. 자식이고 남편이고 아내고 간에 결국 남는 것은 나만 남는데, 나만 남는 내 자신도 나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은 언제 안다고요? 예수님 십자가 앞에서 알아요. ‘야, 내가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구나.’ 나는 그렇게 내가 좋은데, 나는 나를 버릴 수가 없어. 너무 좋기 때문에. 하지만 내가 나를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 가려고 하는데 시어머니 때문에 못 간다고 해요. ‘우리 어머니가 가지마라고 해서 안 간다.’ 이건 다 핑계입니다. 시어머니에게 좋은 인상 받고 어머니에게 어떤 혜택을 입기 위해서 지금 정치적은 타협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누가 누구를 보호하는 것입니까? 내가 나를 보호해서 나를 지키는 방식이죠. 그런데 십자가 앞에 가면 이런 것이 아무 소용없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아무리 애지중지해도 나는 나를 지킬 수 없습니다. 모든 영화나 드라마의 끝은 이것입니다. ‘네 일은 네가 알아서 지키면 네가 영웅 된다.’ 모든 스토리가 그래요. 어떠한 역경과 어떠한 고난이 온다 할지라도 결국 믿을 놈은 누구밖에 없다? 나 자신밖에 없다. 너 자신이 열심히만 하면 영웅이 될 수 있다. 이 노래가 [마법의 성]입니다. “마법의 성을 지나 늪을 건너 ---” 결국 공주를 건지잖아요.
[마법의 성] 노래 가사처럼 우리는 다 동화의 세계에 살면서 ‘시뮬라크르’라고 하지요. 허상밖에 없는, 실상은 없어요. 허상으로 연결된 각자가 뿜어내는 그 허상. 그 허상들이 뭉게구름을 이루면서 우리에게 소낙비로 오는 거예요. ‘누구는 서울대학 수석합격 했더라. 누구는 좋은데 시집갔더라.’ 이게 우리한테 소낙비로 와요. 그러면 그것이 타인이죠. 타인에 의해서 나는 자극을 받습니다. ‘그래, 나는 못할 줄 아나. 나도 얼굴 뜯어고치고 하면 된다. 나도 부잣집 재벌과 결혼할 수 있다. 나도 노현정처럼 살 수 있다.’ 그러면서 시도를 하지요.
타인이 만든 허상에 내가 놀아날 정도로 나는 허상밖에 찾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 실상을 모르니까. 내가 누구인줄 모르니까. 허상이 와서 나를 일깨워 줄때 그 때만 실상이 되고, 또 다른 허상이 와서 ‘너는 이렇다.’ 하면 또 그 허상에 빠지는 겁니다. 놀아나는 거죠.
이것은 내가 나를 지키고 내가 나를 살리는 방식이지 믿음의 도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이런 짓하라고 우리에게 믿은 준 것이 아니지 않느냐’ 하는 것이 유다서입니다. 믿음의 도를 지키라니까. 딴 것 생각하지 말고. 그런데 멸망 받기로 작정된 사람이 자꾸 우리를 흔들어 대요. ‘너도 같은 인간인데 왜 저만큼 못 갔어? 너도 신학 공부한 목사인데 왜 만날 교인 5명밖에 안 돼?’ 자꾸 열등의식을 조장해요.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꿔요.
색욕의 특징이 뭐냐? 쉽게 식상한다는 겁니다. 성경에서 성욕을 말할 때는 항상 아내 또는 남편 그 사이를 기준으로 해서 합니다. 성적 욕망은 항상 식상해요. 따분해요. 이런 걸 대표하는 것이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입니다. 번갈아가면서, 대상을 바꿔가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대상에 약간 매료를 느끼면서 다시 식상해서 차버리고 또 새로운 것을 찾고 또 차버리고. 이것이 성적인 욕망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성경에서는 보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영화나 드라마가 사람들을 흡입하는 요인이 뭐라고 생각합니까? 예를 들어, ‘그 두 사람은 늙을 때까지 잘 먹고 잘 살았단다.’ 이러면 재미 하나도 없어요. 특히 아침 드라마 [내 곁에 있어] 이런 것 있지요. 이게 뭐냐 하면 파트너를 계속 바꿔요. 프로이드는 세상만사를 이걸로 보는 겁니다. 전공도 바꿔 봤다가 음식도 바꿔 봤다가. 나이 40대 중반쯤 되면 전국을 다니면서 유명 음식점을 찾아다니는 사람이 있어요. 맛있다고 하지만 두 번 다시 안 가고 계속 새로운 것을 찾잖아요.
계속 대상을 바꾸고 계속 자극 받고 여기에 대해서 프로이드가 ‘리비도’라고 해서, 성적인 욕망은 내가 주체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관리하자. 절제하자.’가 아니고 이게 터지면 터지는 거지 ‘하지마라. 부탁이다. 내가 체면이 있지. 제발 하지마라.’ 이게 안 돼요. 이것을 사랑이라고 해요. 사랑의 힘.
사랑의 힘은 무저갱이라. 바닥이 없는 우물 같아. 끊임없이 쏟아나요. 사랑은. 사랑의 대상은 자꾸 바뀌면서. 그래서 도대체 이 사랑이란 것이, 이것을 ‘리비도’라고 하는데, 욕망이 어디서 나왔느냐? 프로이드는 이것을 정확히 몰랐어요. 현대 생물학에서 발견했는데, 이것이 뭐냐 하면, 번식 본능이라고 합니다.
‘사랑이란 것은 허구이고, DNA가 자기의 새끼를 까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이용한다.’ 이게 유명한 리처드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에서 이야기하지요. DNA가 우리를 이용해요. DNA가 주체라. 우리가 주체가 아니고. 우리의 주인이 DNA다. 이것이 우리를 주체하지 못하게 만들어요. 계속 새끼를 까는 본능이 있으니까. 이것을 우리가 말릴 수 없다는 겁니다.
이 설명에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적당합니까?
들뢰즈란 사람은 ‘신은(혹은 자연은) 자기의 활동성을 주체할 수 없어서 다양성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그런 작용을 한다.’ 이게 인간의 욕망 속에 들어 있다고 합니다. 인간의 욕망 속에 신이 준 활력소가 있는데 이 활력소는 다양성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데, 여기서 다양성 즉, 차이를 만들어 내요.
차이를 만들 때 여기서 뭐가 생긴다고 했습니까? 운동이 생깁니다.
여기 [비타 500] 디자인이 있잖아요. 이것도 몇 년 지나면 바뀝니다. 왜? 식상하니까. 그러면 여기에서 또 차이를 만들어 내요. [비타 500]이 아니라 [비타 5000]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차이를 만들어 내요.
여기 포도가 있는데 옛날에는 이만큼 안 컸습니다. 그런데 자꾸 유전자 조작해서 크게 만들었지요. 물론 크게 되는 것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떡은 옛날보다 요즘이 더 작아집니다. 어쨌든 간에 사람은 뭔가 차이나는 게 없으면 살맛을 잃어버려요. 목적도 없고 이유도 없이 그냥 사는 거예요. 왜? 자기 욕망이 자극 받는 대로 그냥 사는 겁니다. 왜 사는지 묻지 말라고 합니다. 그냥 차이나는 골, 파도 그것만 찾아서 더 자극이 되는 쪽으로만 자꾸 눈이 가고, 손이 가고, 발길이 가는 것. 여기에서 잠시 느끼다가 또 식상하니까 다른 차이를 찾고.
그래서 프로이드는 ‘인간의 모든 욕망은 다 색욕이다. 성적 욕구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어떤 철학자는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세상에 한 남자와 평생을 산다는 그것보다 더 큰 고문은 없다.’ 그래서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곳에서는 몇 명까지는 공적으로 봐주고,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것은 12명이고, 좀 과한 사람은 40명. 부럽지 않습니까? 열두 번째 왕자가 한국에 와서 나이트클럽에서 누구를 꼬셨는데 결혼한다고 해서 반지까지 받았는데 가보니까 10번째 부인이라. 그래서 이혼을 하니까 수억 원의 위자료를 받았답니다.
그래서 요새 여자들은 그냥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보고 계속해서 나올 것이 있으면 결혼하고 더 나올 것이 없으면 그때 헤어집니다. 끊임없이 나올 것이 있는 것을 원하지요. 그러니까 목사들이 설교를 하면서 죽는 거라. ‘아, 식상하다. 다 아는 건데.’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이 나와야 해요. 뭔가 차이나는 것이 나와야 해요.
‘믿음의 도’와 색욕거리를 지금 비교해서 유다서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디에 약하고, 무엇 때문에 몸도 가누지 못하는 것을 알고 유다서가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5절 봅시다. “너희는 본래 범사를 알았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 이렇게 되어 있지요.
여기서 ‘믿음의 도’를 우리는 흔히 ‘믿습니다.’ 하잖아요. ‘믿습니다.’ 하면 누가 믿어요? 내가 믿잖아요. 이것이 잘못이라니까. 우리는 버릇이 그래요. 문법의 버릇이 그래요. ‘배고프다.’가 먼저입니까, ‘내가 배고프다.’가 먼저입니까? ‘배고프다’가 먼저 밀려오지요. 이것을 남에게 표현할 때는 ‘배고프다’ 누가? ‘내가 내고프다. 빵 줘. 떡 줘.’ 이렇게 하잖아요.
‘나는 배고픈 것한테 못 이긴다.’고 하는데, 이것이 정상이잖아요. 주어란 게 필요 없어요. 사람은 움직이잖아요. 그런데 ‘나는 여기 있다. 다음에 뭘 할까? 내가 저기 있어야지.’ 이렇게 해서 가지는 않는단 말이지요. 표현할 때는 그렇게 합니다. 그렇지만 표현하고 가지는 않는단 말이지요. 어떤 주어진 상황이 있는데 이 주어진 상황 뒤늦게 ‘내가’, 또는 ‘그가’를 뒤늦게 같다 붙이는 거예요. 하지만 뒤늦게 같다 붙은 것을 빼버리면 남는 것은 ‘믿어진다.’만 남아요. 내가 믿는 게 아니고.
피히테의 글을 보세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이 틀렸다고 했지요. 내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생각을 갖고 있다.’ 고 해야 돼요. 왜냐하면 생각할 때만 내가 존재한다면 내가 잠잘 때는 죽은 것이 되니까. 말 맞잖아요. 그래서 피히테는 절대자아를 주장한 거예요.
믿음의 도를 믿습니다. 할 때는 ‘믿습니다.’의 주체가 누구냐 하면 예수님입니다. 이것은 신약성경에서 유일하게 이야기 한 거예요. 구약에는 이런 것이 없어요. 구약에 왜 없습니까? ‘믿으라.’ 이거죠. ‘여호와를 믿으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신약에 오면 믿음의 주체가 누굽니까? 예수님이 믿음의 주체죠. 믿음은 예수님이 선물로 주신 거예요. 주님의 믿음이 우리한테 온 거예요. 주님의 소망이 우리한테 온 거고. 주님의 사랑이 우리한테 온 거고. 그러니까 믿음, 소망, 사랑을 선물이라고 하지요. 다른 말로는 은사라고 합니다.
주신 것이기 때문에 영원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 중에 대표되는 것이 사랑이다. ‘믿습니다.’만 있을 뿐이에요. 우리는 ‘믿습니다.’에 포착된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내’가 들어가 버리면 하나님이 주신 행위와 충돌을 일으킵니다.
자, 봅시다. 출애굽 할 때 애굽에서 나가자고 누가 이야기했습니까? 나가자는 아이디어를 누가 끄집어냈습니까? 하나님이잖아요. 애굽에서 고생하는 사람 어느 누구도 애굽에서 나가자는 사람 없었어요.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과거처럼 좋은 임금님 만나서 잘 대우받고 사는 것이지요.
나이 드신 권사님들이 기도하면서 ‘어서 죽어서 하늘나라 가야지’ 하는 그 순간에 ‘죽어라.’고 하면 화 낼 거란 말이지요. 죽어야지, 죽어야지 하면서 막상 이곳을 떠나기 싫은 거예요.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출애굽이란 것은 결국 누가 시켰단 말입니까? 우리가 원치 않은 것을 누가 시킨 거예요? ‘믿습니다.’의 하나님의 행동이 나타난 거잖아요. 출애굽 했다는 말은 하나님의 믿음의 도가 덩어리 채로 그들에게 임한 겁니다. “나가자!” “안 나갈 랍니다.” “나가야 돼!” “가기 싫습니다.” “나가자!” “모세 당신이나 나가라.” 이렇게 되잖아요. 그런데 강제로 나갔지요. 이것이 바로 믿음의 도가 됩니다.
여러분 속에 믿음이 있거든 믿음이 여러분에게 강제성을 띠고 있는지를 한 번 확인해 보세요. 그게 바로 박윤진 씨의 글입니다. 이분의 글 내용이 뭔가 하면 자발성이 될 수 없는데 왜 자꾸 자발적인 것으로 믿음을 표현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미아 씨에게 약간의 시비조로 글을 썼지요. 믿음은 자발성이 아닌데, 주님의 자발성인데 왜 나의 자발성으로 전환시키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이미아 씨는 ‘기쁜 것을 기쁘다고 했는데 뭐가 문제냐?’ 결과를 보자는 것이지요. ‘누가 했는가를 따지지 말고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닌가?’ 라고. 박윤진 씨는 ‘과정까지 포함해서 결과를 봐야하지 않겠는가?’ 그 이야기입니다.
두 분 다 같은 이야기를 하고 계신데, 내 자발성으로 믿음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믿습니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믿잖아!’ 갑자기 ‘내가’가 중요시 되지요. 이렇게 내가 중요시되면 어떤 오류에 빠지느냐 하면, ‘저 인간은 믿는데 나는 못 믿겠나?’ 해서 믿는 사람 흉내 냅니다. ‘가만 보자. 저 인간이 주일날 어디 앉나? 앞자리 앉네. 나도 앞자리 앉아야지.’ 그러면 또 목사는 사기를 치지요. ‘앞자리는 은혜가 넘칩니다.’ 무슨 앞자리에 은혜가 있어요. 앞자리에는 어디 ‘은혜’라고 쓰여 있습니다. 우리교회 앞자리는 졸기만 하든데. 무슨 앞자리에 은혜가 있어요.
그런데 사람은 흉내를 내요. 사람이 어떤 장소에서 은혜 받았다고 할 때, 제일 허무할 때가 언제인가 하면 예배 후 다 마치고 썰렁할 때 다시 그 자리에 가 보세요. 아무 생각도 없지요. ‘아, 내가 군중심리였구나. 내가 분위기에 말려든 것이구나!’
진짜 믿음은 나의 자발성이 아니라 주님의 자발성이 나를 그냥 가만두지 않고 나에게 찾아온다는 느낌을 줘요. 이 성경 말씀을 우리는 평소에 보기 싫어합니다. 신문 읽는 것도 싫어하는데 성경을 뭐 하러 읽습니까? 안 봅니다. 그런데 깨닫게 한다니까요. ‘내가 죄를 지었구나. 나는 왜 이럴까?’ 절망에 빠져 있다가, 갑자기 ‘바보같이 주의 의로 구원 받는 것을 또 잊었구나!’ 이게 내 허락도 없이 주의 말씀이 들어와 버려요.
하나님의 구원은 내 행위와 상관없이 주신다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을 깨닫게 하는, 다시 회상하게 만드는 그런 기능이 말씀을 통해서 작용해 와요. 그게 바로 ‘믿음의 도’라는 겁니다.
다시 출애굽을 생각해 봅시다. 출애굽이 누구의 계획인가 말이지요. 그러니까 내가 구원 받는 것이 내 계획이라면 우리는 종교인입니다. 이것은 종교라는 취미생활 하고 있는 거예요. 그 따위 종교는 기독교가 되었든 천주교가 되었든 있으면 있을수록 손해입니다. 갖고 있으면 안 돼요. 우리는 종교를 버려야 돼요. 내가 내 잘되기 위해서 보험 들어놓은 것은 깨야 됩니다. 그런 보험은 들지 마세요. 이것은 내가 나를 속이는 거예요. 허전하니까 절대자까지, 신까지 내가 장악해야 안심이 된다는 자기 욕망에 불과한 겁니다. 자아는 그대로 생생히 살아 있고. 이게 성화론이죠. 갈수록 더 착해 진다는 것.
주님께서 출애굽이라는 것을 통해서, 십자가를 통해서 ‘십자가가 너희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너희를 꾀더냐?’ 라고 하거든요. 내가 지금 이 땅에서 무슨 짓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 뒤에 이미 이루어진 십자가가 나의 운명을 장악하고 있는 거예요. 내 사업이, 내 행동이 내 운명을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내 하는 짓거리가 내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2,000년 전 십자가 사건이 이미 나를 장악해 버렸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인정될 때, ‘참 주는 나의 구세주 맞습니다.’ 하고 고개를 끄덕일 때 이것이 바로 ‘믿음의 도’입니다. 이게 믿는 자의 모습이에요. 이것을 촉구하는 겁니다.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다.’(5절)
제가 이야기했지요. 출애굽이란 것이, 너희끼리 취미 생활하라는 것이 출애굽이 아니고, 출애굽 사건은 믿지 않는 자에게는 멸망으로 이어지는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 예수 믿는 사람에게만 중요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자를 지옥에 보낸다는 표시로서 십자가 사건이 있는 겁니다.
이걸 들뢰즈 철학에서는, 제가 지금 글을 하나 준비하고 있는데 [십자가의 뜻과 의미]라는 글을 쓰는데, 뜻과 의미가 달라요. 뜻이란 것은 문자적 뜻인데, 십자가의 문자적 뜻은 뭐냐 하면, ‘그때 총독 빌라도가 재판을 열었고, 명절에 죄수 하나를 풀어주는 관습이 있는데 재판장이 누구를 풀어줄까 물었더니 바라바와 풀어달라고 해서 풀어주고 예수는 십자가에 죽게 넘겨주었고 ---’ 이런 이야기. 문자적 뜻. 이것은 십자가와 전혀 상관이 없는 거예요.
십자가의 의미가 뭐냐 하면, 의미가 뜻을 진리가 아니라고 공격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어떻게 잡혔고 어떻게 십자가 졌고 이런 것들이 무의미라고 알려주는 것이 의미가 되는 겁니다. 그런 것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란 말이지요.
그러면 의미는 뭐냐? 의미란 나를 제쳐 놓는 것. 나를 제쳐 놓고 불쑥 내 속에서 튀어나오는 것이 의미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나는 아무리 의미를 찾아도 다 누구 좋으라고 하는 의미입니까? 내 좋으라고 하는 거예요. ‘나는 예수 믿습니다. 그래서 나는 구원 받았다.’ 이게 결국은 내 구원 받는 목적을 위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잠시 이용한 것밖에 안 돼요. 여기에서 ‘나는 십자가의 뜻을 압니다.’ 뜻을 알아도 소용없어요.
십자가의 의미는 나와 상관없이 불쑥 튀어나와야 돼요. 그러니까 의미가 주인이에요. 의미가 주인이 되고 나는 그 의미에 졸졸 따라다녀요. 복속되어야 돼.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나는 그 의미에 맥을 못 춰. 십자가의 의미에 맥을 못 추겠어. 내가 잘났다고 설치는데 십자가가 등장하니까 또 기 팍 죽어버려요. 십자가 뜰 때마다 나는 팍 죽어요. 다 이루셨다는데 나는 죄인 맞구나. 저쪽의 십자가 의미가 떠버리면 내가 내 욕망을 위해 추구하는 모든 것이 다 빛을 잃어버리는데 이때 의미가 밑에서 솟구쳐 올라올 때만 의미라는 겁니다.
기존에 지식으로 알고 있는 십자가와 성경 달달 외우는 이것은 아무 소용없습니다. 출애굽이 어떻고 다 소용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말이 맞는 것이 분명히 40만 대군이 바다 갈라져서 홍해를 건넜잖아요. 홍해를 건넜는데 홍해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모세를 포함해서 몇 명 안 돼요. 갈렙과 여호수아.
홍해의 의미를 안다면 그 가나안 땅에 장대 같은 신장을 가지고 있는 거인족이 있더라도 홍해를 건너게 하신 하나님이 그들을 이길 것이라는 것을 믿을 것 아닙니까. 그게 바로 믿음입니다.
10분 쉽시다.
(2007. 8. 30. 14:23 녹취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