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40: 9-11 (아름다운 소식)
사 40: 9-11 (아름다운 소식)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41)
본문: 이사야 40장 9-11절
제목: 아름다운 소식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이사야-2005/103강-사40장,9-11,(아름다운,소식)-isa070829.hwp
이근호
07-08-29 21:12
아름다운 소식
2007년 8월 29일 본문 말씀: 이사야 40:6-11
(사 40:6)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사 40:7)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사 40: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사 40:9)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하라』
(사 40:10)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으며』
(사 40:11) 『그는 목자 같이 양무리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이 세상은 나 중심이 아닙니다. 인간 중심이 아닙니다. 하나님 중심입니다. 이런 마당에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삶에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겁니다. 자기 중심으로 살다보니 항상 생각하는 것은 ‘나 자신’의 품위유지입니다. 즉 내가 생각하는 수준의 나 자신이 되어 있어야 한다고 여기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자기 평가는 옳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옳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평가 뿐입니다. 오늘 본문 6-7절에 보면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옳은 하나님의 평판에 전적으로 따라야 합니다.
그동안 자체적으로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기준이나 점검 방식이 따로 있더라도 그것은 버리고 무조건적으로 옳은 하나님의 이 평가에 따라야 합니다. 하지만 이런 하나님의 평가를 수용한다는 것은 거의 미쳐야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를 조절하면서 살고 싶어하지 어디 한군데에 맹목적으로 생을 던져넣는 무모한 행위는 하지 않으려합니다.
그것은 완전히 미친 짓이 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살아가는 중입니다. 서로의 보조를 맞추면서, 서로 견눈질 하면서, 마구 앞서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너무 뒤처지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묻어 살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이런 인식으로 산다고 것이 기껏 ‘넓은길’ 삶이 되는 겁니다.
어디에 미치는 짓은 자신의 품위를 손상시키고 스스로도 수치스럽게 여기는 태도가 우리를 하여금 항상 중용을 취하는 요령만 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점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미치지 않고서는 결코 복음을 전할 수 없다는 겁니다. 일당받고 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의 전도가 아닙니다.
참된 전도란 자신이 자신을 바라보는 평가기준을 저주하고 그 대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바라보는 그 기준을 전폭적으로 미친적이 몰입될 때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전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13에서 자신은 주님의 사랑에 비쳤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으로 인한 미친 짓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강권되어 미쳤기에 참으로 온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이러한 생각은 실은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기준에 전적으로 미친 듯이 따라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평생을 살면서 그저 조심스럽게만 살면 중간쯤은 한다는 자기 위주의 삶은 결국 하나님 말씀을 신나게 전하는 즐거움에서 배제되는 자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이처럼 자기를 늘 부인하면서 하나님 말씀이 너무좋아 거기에 전적으로 올인하는 것입니다.
자기 단도리나 자기를 위한 요령같은 것을 배후에 따라 남겨두서는 아니됩니다. 목사가 목회에 전념한다고 해서 그것은 결코 목사의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마치 이발사가 손님에게 보다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날마다 이용기술을 연마하는 것이 그 이발사의 신앙생활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목사가 교인들을 돕기 위하여 열심히 설교준비하고 교인들을 위하여 기도해주고, 심방하는 것이 결코 목사 개인의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소위 ‘목사직’을 소유하고 있다는 자아에 대한 품위유지를 염두에 둔 태도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설교하면서 자신이 목사님을 자각한다면 그 목사로서의 기준에 부합하기 위해서 조심스럽게 행동을 할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성도로서의 목사라면 오직 말씀에 미친짓 이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정도로 미쳐야 하는 겁니까? 오늘 본문 9절-11절에 보면, 복음을 전하는 자는 ‘여호와의 통치와 인도하심’이 너무 좋아서 힘든 고개길을 마다하지 않고 넘어다닙니다.
즉 전도자가 전도자 자신의 처지나 입장이나 형편을 고려할 여유도 없이 강력한 여호와께서 주시는 말씀의 통치에 인도받고 삽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서 볼 때, 사람이 하나님의 복음이나 의나 구원을 소지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하나님의 복음이나 의로움이나 구원에 의해 소유되어야 참으로 성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자신이 구원받기 위해서 뭔가 성경에 있는 내용을 소지한다고 해서 그 소유된 것이 자신을 구원해주는 않습니다. 마치 폐차장의 큰 크레인이 사정없이 큰 차나 작은 차가 분쇄해서 납작하게 만들어버리듯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살아계신 말씀이 우리 성도들은 사정없이 때려서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자신을 자책하거나 우쭐될 입장조차 허락하지 않는 자리로 밀어넣어버리는 겁니다.
우리 스스로가 우리를 살리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것으로 가져올 수는 없는 겁니다. 우리 인간들은 늘 자기를 살핍니다. 자기 욕망이 원하는 수준에 자신을 도달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되었든 인간의 말이 되었든 가리지 않고 다 이용합니다. 이것은 바로 ‘소유’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 이런 신앙생활을 후려쳐서 부셔버립니다. 마치 큰 크레인이 작은 차 티코를 사정없이 짓뭉개버리듯이 말입니다. 이렇게 만들어 놓고서는 하나님의 품 안에서 완벽하게 보호해주시고 돌봐주십니다. 마치 은행 금고에 사설 금고가 따로 개설되어 있어 개인들의 귀중품은 개인들마다 서랍이 따로 있어 보관하듯이 말입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잘났다, 못났다 평가할 그런 입장에 처해있지 않습니다. 자신을 보고 스스로 악하다고 하는 것조차 악한 일입니다. 물론 자신을 보고 스스로 대단하다고 여기는 것도 악한 자입니다. 우리는 이미 풀입니다. 말라 비틀어질 풀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평가에 미친 듯이 매달아고 우리의 전부를 던져 넣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양으로 간주하셔서 보호해주시고 인도해주신답니다. 바로 이러한 기준이 우리를 쳐서 그 기준 앞에 우리가 복종되어야 합니다. 참으로 우리가 회개할 것은 우리의 본래의 자리가 하늘 나라 금고 서랍 같은 곳에 들어있음을 잊어버리고 스스로 자기를 자책하거나 독자적으로 평가하는데 있습니다. 늘 본래의 우리 자리를 생각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스스로 평가하는 죄를 범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