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17: 1- 4 (음녀가 가진 것)
계 17: 1- 4 (음녀가 가진 것)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69)
본문: 요한계시록 17장 1- 4절
제목: 음녀가 가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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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교회
07-07-29 15:09
음녀가 가진 것
2007년 7월 29일 본문 말씀: 요한계시록 17:1-4
(계 17:1)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로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계 17:2) 『땅의 임금들도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사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
(계 17:3)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계 17:4)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 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우리들이 세상을 이해하는데 있어 TV 뉴스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거기서 각종 정보가 홍수가 되어 쏟아지고 있습니다. 그런 뉴스들은 수집하여 정리하면 그것이 곧 세상에 대한 옳은 해석이 된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음녀’라든지, ‘큰 성 바벨론’이라는 용어가 나오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펼칠 때만 나오는 용어가 ‘음녀’ 혹은 ‘큰 성 바벨론’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이 세상을 이해하는데 있어 이런 장치들을 들이대면서 이해하기를 원하실까요? 그것은 흔히 인간들의 정보 수집에 의해서 정리되는 세상 읽기에는 뭔가 빠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뭐가 빠질까요? 성경 이사야 1:18에 보면, “너희 죄가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어진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 13:23에 보면, “표범이 어떻게 반점을 없을 수 있으며 흑인의 피부가 어떻게 희어질 수 있느냐”라고 나옵니다. 바로 이런 놀라운 결과는 흔히 세상 사람들의 세상 읽기로는 도저히 나올 수가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통용되는 사상으로는 성경의 복음을 이해할 수가 없고 이는 곧 참으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하시고자 하는 일에 동의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장치를 수용해서 세상을 ‘음녀’와 ‘큰 성 바벨론’의 입장에서 다시 봐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일상적인 세상관에서는 다른 질문이 나오게 됩니다. 일상적인 세상관에서는 질문이 “당신은 이 세상에서 얼마나 대단한 사람입니까?”라는 뉘앙스로 묻게 되지만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것으로는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라는 질문만 유효합니다. 예를 들면, 스키장에 폭설이 내릴 때에, 출구하는 사람들마다 다음과 같이 물어봅니다.
“당신은 무엇을 받았습니까?” 여기에 대한 대답은 한결 같아야 합니다. “폭설을 받았습니다”입니다. 그런데 다음과 같이 답변하는 사람은 엉뚱한 사람입니다. “나 국회의원이요”라고 말입니다. 스키장에 내리는 함박눈 안에서 ‘나’의 특수성을 사라져버리는 겁니다. 내가 위대해지는 것이 세상을 바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세상을 보게 되면, ‘과연 나는 음녀인가?’라는 식으로 봐야 하는 겁니다. ‘왜 세상은 큰 성 바벨론인가’하는 관점으로 봐야 하는 겁니다. 음녀라는 것은 이 세상을 ‘큰 성 바벨론’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 속성을 내부적으로 계속 만들어내는 자를 뜻합니다. 음녀가 활동하지 아니하면 이 세상은 결코 큰 성 바벨론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이면 ‘음탕한 여인’이라는 취지에서 활동해야만 합니까? 그것은 ‘큰 성 바벨론’이 이 세상에게는 천국의 대체물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즉 천국은 거룩한 세계입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거룩한 그 천국을 거부하고 이 세상 자체를 자기네들이 즐길만한 유사 천국으로 만들고자 시도합니다.
하지만 이런 시도가 하나님 보시기에 더럽기 한량없습니다. 그래서 ‘더러움’을 여기저기 전파하고 돌아다닌다고 해서 ‘음녀’입니다. 아무리 근엄하고 진지한 회의를 하는 중역들의 자리에서도 껌 질근질근 씹고, 빨간 하이힐 또박또박 소리대면서 대범하게 회의장 문열고 들어서는 다방 종업원의 당돌함 외침, “여기 커피 시키신 분은요?” 한 마디로 회의장의 근엄함을 다 깨어집니다.
이처럼 음녀의 힘은 인간들의 근엄함과 진지함의 뿌리를 치고 들어서 충분히 모독할 수 있다는데 있습니다. 위선적인 진지함에 뒤에 숨겨진 욕망의 꿈틀거림이 모든 인간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 힘은 바로 유사 천국이 진짜 천국을 꺾어서 이겼다는데 있습니다.
인간적인 세상 이해는, 인간이 의도적 성과를 기대하면서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 음녀’라는 용어나 ‘큰 성 바벨론’이라는 성경적 용어는 그 배후에 하나님의 예언이 바쳐져 있습니다. 즉 모든 일상사가 다 예언 없이 이루어지는 법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음녀’라든지 ‘큰 성 바벨론’이라는 용어를 앞장 세우면서 묻는 물음은 바로 “믿느냐?”입니다.
신앙과 불신앙의 차이점은 하나님의 예언을 믿으면 신앙이요 하나님의 예언을 불신하면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예언대로 말씀대로 약속대로 움직이십니다. 결코 인간 위주로 움직이는 분이 아니라는 겁니다. 예를 들면, 저가 물을 마셔도, 하나님은 내 걱정하시는 분이 아니라 물 걱정하시는 분이십니다.
물이든 저든 모두 하나님의 손에 붙어있는 손가락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손가락이 손을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하지만 손가락이 퉁퉁 불어서 손인체 하는 것이 바로 음녀가 하는 짓거리입니다. 음녀는 붉은 짐승을 타고 등장합니다. 그 짐승의 색깔이 붉은 것은, 음녀의 불신앙적인 것고 세속적인 발상으로 인해 복음을 아는 자들을 닥치는대로 짓밟았기에 거기서 터져나온 피들이 묻혀서 짐승이 붉은 색이 된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나라를 쳐다보는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소통한 전적으로 인해 짐승이 붉은 색을 띠고 있으니 음녀가 이 짐승을 타고 온 천지에 돌아다닌다는 것은 세상의 국가 권세들에게 더 이상 복음의 위세에 눌려 필요없다는 승리감의 표출 같은 것입니다. 사실 세상 권세자들에게 있어 복음이나 신앙은 골칫거리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민중들의 신 섬김을 인정해주되 어디까지는 국가 권세를 더 우월한 것으로 인정해주는 조건하에 풀어주는 겁니다. 즉 종교 문제를 다룰 때에 신을 믿는 자를 잔인하게 핍박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들의 종교 생활을 충분히 인정해주는 것으로 이미 국가 권세가 종교 보다 한 수 위에 있음을 확인되는 것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렇다면 진정 바벨론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언대로 바벨론은 반드시 유다 나라를 굴복시키고 점령하고 멸망시켜야 될 역할을 수행해야만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바벨론이 바벨론 답습니다. 신앙이 이 세상에서 비신앙을 상대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비신앙이 신앙을 이기도록 되어 있는 이 세상의 생리요 운명입니다.
왜 하나님은 일을 이렇게 하실까요? 그래야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만으로 천국에 들어가고 우리 죄가 씻어짐을 확인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자력으로 음녀의 유혹을 뿌릴 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나 세상이나 한시라고 세상 영광을 잊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 성령을 받는 자라면 반석위의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의 차이를 아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눈으로 세상을 보시렵니까?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다 이루심이 즉흥적인 일이 아니라 예언대로 된 사실임을 우리가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