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자의 자세
Re..마 10:24-28 (전도자의 자세)
이름 : 이근호(IP:)
전도자의 자세
2003년 8월 24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10:24-28
10:24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10:25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10:26 그런즉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10:27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신자가 된다는 것은 흔히 아는 다른 방식으로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령의 오심'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육에서 태어난 육만 가지고, 육적으로 사는 것이 전부라고 알고 있는 우리에게 '성령'이라는 존재 자체가 참으로 낯설게 여겨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단호하십니다. 성령이 아닙니다. 신자라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2:13-16에 보면,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성경이 요구하는 싸움도 육적인 싸움이 아니라 영적인 싸움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역시 육적인 공격을 무시못합니다. 육은 성령을 모릅니다. 거부하고자 하는 속성입니다. 육은 육에 속해서 육만 편듭니다. 세상이 육적인 욕구를 위하여 움직여지기를 간곡히 고대하는 있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가끔 다가보면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동네 축구 시합에서 한참 아마츄어 선수들이 축구를 하다말고 갈증이 일어난다고 경기장 밖에서 음료수를 찾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사소한 시비가 붙습니다. "나 콜라 먹을래" "아니야 사이다 먹자"라고 서로 우기는 싸움 말입니다. 정작 싸워야 될 대상은 운동장 안에 있는데 자기들 끼리 정말 말도 안되는 것 가지고 서로 싸우게 됩니다.
또 같은 예로서, 거대한 우주선을 만드는 과학자들이 한데 모여 열심히 우주선을 제작하고 있는데, 막 점심시간이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장면을 시키자는 과학자가 있고, 또 다른 과학자는 짬뽕을 먹자는 과학자가 있습니다. 나중에 그 집단 가운데 큰 감정 싸움으로 번져서 어떤 사람이 총으로 이제까지 만든 우주선을 다 부수고 말았습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예수님의 12제자가 가는 길에는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지만 나름대로 참으로 생존에 치명적으로 심각한 사태가 계속 마주치게 되어 있습니다. "나 콜라 마실까 사이다 먹을까?" "나 자장면 시켜 먹을까 아니면 짬뽕 시켜 먹을까? 어느 것이 내 몸이 이로울까?"을 놓고서 심각한 고민과 걱정에 사로잡히는 일들이 발생됩니다.
그런데 그런 철없는 제자들을 예수님은 데리시고 어디로 가십니까? 중국집으로 데려가십니까? 아닙니다. 십자가의 길로 접어들게 하십니다. 그 누구도 예측못한 일입니다. 왜 십자가로 데려가셔야만 하는 겁니까? 그것은 부활의 세계는 십자가라는 문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3:10-11에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로 데려가지 않으시는 주님은 가짜 주님이십니다.
마치 우리들이 어릴 때 경험을 해 본 것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어린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에 갑니다. 어린 아들은 뜨거운 땅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마구 웁니다. 혼신의 힘을 다하여 지옥불과 같은 그 뜨거운 탕 속에는 안 들어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막무가내 웃으시면서 그 어린 아들을 품에 안고 같이 뜨거운 땅 속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뜨거운 탕 속의 세계를 맛보아주십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교회 나오는 모습도 마치 이와같습니다. 뜨거운 탕 속이 곳 천국의 출입처인데 그만 그곳에서 머뭇거리다가 다시 세상으로 뒤돌아서고 맙니다. 혼신을 힘을 다해 그 뜨거운 탕속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저 자기 원대로, 자기 뜻대로 놀고 즐거운 것만 찾고자 합니다.
심지어 교회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박하사탕'이라는 영화가 있는데, 젊은 날의 주인공은 그저 순진하고 착하고, 예의바르고, 이 세상에 나가서도 양심적으로 살 것을 어리짐작으로 다짐합니다. 세상에 대한 출세욕이나 성공욕도 없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가고 세상에 나갈 때, 세상은 그를 가만 두지 않았습니다. 점잖고 착하게 사는 것으로 수입이 보장받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에는 사회에 요구하는 그런 악독한 사람으로 변했고 남을 죽이고 자기가 사는 생존 법칙이 충실했습니다. 하지만 사회는 또한 그를 이용할대로 이용하고 차버렸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은 옛날 정말 순박하기 그지없이 젊은 날에 직장에서 야유회하면 놀면서 마음에 드는 아가씨를 순수하고 짝사랑했던 그 지점으로 갔습니다. 그것은 철교가 있던 어느 계곡이었습니다. 그 철로에서 주인공은 두 팔을 벌리며 세상에 대해 온 힘으로 저항하듯이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나 돌아갈래!" 그 때 뒤에서는 무지막지한 기차가 막 터널을 통과해서 그를 치기 위해서 달려 들고 있었습니다.
바로 오늘날 복음을 안다는 목사들이나 복음을 안다고 자처한 교인들의 모습이 이 모습입니다. 십자가 통과 지점을 앞두고 다음과 같이 외쳐봅니다. "나 돌아갈래!" 도대체 어디로 돌아가겠다는 말입니까? 분명히 교회든 세상이든 정상이 아닌데 하나님께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찾아오신 이유도 다 이런 목적을 염두에 두신 일입니다.
사도는 단지 옳은 것은 "옳습니다", 아닌 것은 "아닙니다!"라고 외쳤습니다. 지금 우리가 정신을 어디가 팔고 있습니까? 무슨 낙을 보겠다고 말입니다. 왜 바르게 살기를 포기하시려 합니까?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20에서 이렇게 자기거 처해 있는 입장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자 여러분, 이 고백 안에 어디에 "나 돌아갈래!"는 의식이 있단 말입니까?
여러분, 성도란 특수한 신분입니다. 목욕탕 뜨거운 탕에 들어가기 위해 지음을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십자가 운명과 제자들의 운명을 일치시킵니다. 흔히 '대속'이라는 말을 쉽게 합니다. '대속'이란 '대신 죽으심'입니다. 이 '대신' 죽음과 함께 있는 자에게는 더 이상 저주도 없고 징벌이나 지옥행도 없습니다. 보통 큰 행운이 아닙니다.
예수님 바로 큰 복을 복으로 알리기 위하여 자기 사람을 예수님이 당한 수모에 집어넣어주시는 겁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은 것보다 더 큰 것을 얻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자신이 당연히 저주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입니다.
창세기 3:17-19에 보면,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네 본질입니다. 더 이상 욕심내면 안됩니다. 물론 우리는 날마다 꿈을 꿉니다. 하지만 그 꿈은 세상이 갖는 저주성으로 인해 여지없이 깨어지기 마련입니다. 24-25절에 보면,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이 세상이 주는 축복에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그 예가 요한복음 6장에 보면 나옵니다. 11절에 보면,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무려 남자 5000명이나 예수님의 축복의 혜택을 입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축복 베픔으로 인해 이 땅에서는 축복와 저주가 극명하게 구분되게 되었습니다. 즉 예수님이 주시는 축복의 떡을 먹어보지 못한 자는 여전히 저주 아래에 그대로 놓여 있는 신세입니다.
그런데 왜 축복을 줄 수 있는 분이 하필이면 거꾸로 이 땅에서는 왜 고난을 받아야 하는 겁니까? 그것이 이 땅에 '축복없음'을 분명히 하자는 겁니다. 전혀 축복이라는 것이 없는 세상임을 예수님을 드러내겠다는 겁니다. 만약에 이 세상에 여전히 약간의 축복이라고 남아 있다면 구태어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개입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상주해 있는 축복을 가지고 끝까지 버티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축복이란 전혀 없었습니다. 스승되시는 예수님은 인간의 취약점을 너무나도 잘 아시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 세상 형편을 미리 알려 주십니다. 이 세상은 그 어디에도 숨을 곳이 없고,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지를 백일하에 다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26-27절에 보니 "그런즉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무엇이 다 드러난다는 말입니까?
28절에 보니,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진짜 예수님의 제자는 제대로된 현실감을 지니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미 생명되시는 분이 와 계신 이상, 더 이상 '저주의 힘'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인생을 정리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 힘으로 실천에 옮길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반드시 이런 식으로 자기 사람을 데리고 다닌다는 점은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알고 있는 좁은 현실감을 버리고 예수님이 보고 계시는 현실관으로 바뀌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