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37:30-35 (다윗을 위하여)
사 37:30-35 (다윗을 위하여)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69)
본문: 이사야 37장 30-35절
제목: 다윗을 위하여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이사야-2005/098강-사37장,30-35,(다윗을,위하여)-isa070725.hwp
이근호
07-07-25 21:05
다윗을 위하여
2007년 7월 25일 본문 말씀: 이사야 37:30-35
(사 37:30) 『왕이여 이것이 왕에게 징조가 되리니 올해는 스스로 난 것을 먹을 것이요 둘째 해에는 또 거기에서 난 것을 먹을 것이요 셋째 해에는 심고 거두며 포도나무를 심고 그의 열매를 먹을 것이니이다』
(사 37:31) 『유다 족속 중에 피하여 남는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히리니』
(사 37:32) 『이는 남은 자가 예루살렘에서 나오며 피하는 자가 시온 산에서 나올 것임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이다』
(사 37:33)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에 대하여 이같이 이르시되 그가 이 성에 이르지 못하며 화살 하나도 이리로 쏘지 못하며 방패를 가지고 성에 가까이 오지도 못하며 흉벽을 쌓고 치지도 못할 것이요』
(사 37:34) 『그가 오던 길 곧 그 길로 돌아가고 이 성에 이르지 못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 37:35) 『대저 내가 나를 위하며 내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며 구원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지난 시간에 하나님께서 애써 지키고자 하는 것은 우리들이 아니라 따로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그리고 유다입니다. 비록 우리 성도가 이 예루살렘에, 그리고 유다에 속해 있다 하더라도 그 예루살렘성이나 유다 나라가 우리 소유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우리 인간들을 배제하고 전쟁을 벌리시는 적이 따로 있습니다. 그 적은 우리 인간들의 사적인 적이나 원수들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일을 하는지 아니하는지를 사적인 기대치를 가지고 측정하려는 유혹을 받게 됩니다. 즉 “과연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원만한지 아니면 하나님이 싫어하는지를 내가 기대하고 있는 일이 성취되는지 아니되는지로 측정하겠다‘라는 식으로 나오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측정 유혹은 결국 우리들로 하여금 좌절을 안겨주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진리대로 일하시는 분이지 결코 우리 원대로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점을 우리가 잊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마치 도장을 파는 자가 인장 윗 표면을 매끄럽게 다듬은 난 후에 거기에다가 이름을 새기는 것처럼, 우리 주님도 우리 자신의 사적인 욕망을 매끄럽게 지워버리고 거기에다 오로지 자신의 뜻만 새겨넣습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벌리시는 일은 우리가 개인적으로 원하는 일과 전혀 무관하게 움직입니다. 하나님은 사적인 원한이나 분통을 해결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 적이 따로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진리대로 살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원수가 누군지, 무엇을 상대로 전쟁을 벌리시는지 그 안목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다윗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일하신다고 나옵니다. 다윗이라면 이미 수 백년 전에 죽은 과거 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하여’ 일하신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결코 다윗이 위대하고 훌륭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뭔가 남기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약속’입니다.
하나님에게 있어 다윗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윗에 실어놓으신 ‘약속’이 중요한 겁니다. 우리가 이점을 간파한다면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하나님께서 동일하게 일하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네 인생에서 우리 자신을 아예 빼버리고 그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를 넣습니다.
마치 아이들이 갖고 노는 작은북 인형을 계속 돌아가게 하려면 뒷부분에 생생한 건전지를 넣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네 인생을 우리 손에 맡겨놓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우리를 하나님께 영광으로 돌려놓을 능력이 나오지 않습니다. 걸핏하면 우리는 욕망의 화신이 되어 자신의 포부 달성 여부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있느니 없느니를 측정하는데 급급합니다.
이래가지고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작은북을 계속 쳐드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라는 건전지를 빼버리고 그 자리에 ‘예수님’이라는 건전지를 박아넣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인생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시비걸 입장에 있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살이가 아니라 주님의 인생살이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위하여’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원리입니다. 즉 우리 자신을 위하여 예수님이 오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뜻을 달성하기 위하여 우리를 찾아오시는 겁니다. 사적인 모든 것을 싹둑싹둑 달라버리고 기 매끄러운 표면에다 예수님의 자신의 속성을 새겨 박아넣습니다.
예루살렘이나 유다 나라는 그야말로 약속의 땅입니다. 우리 이름으로 등기된 땅이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들은 뭡니까? 레위기 25:55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종들이 됨이라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내 종이요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이름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영원히 둘 세계로 염두에 두시고 애굽 나라에 살던 자기 백성을 오직 주님의 능력과 희생과 공로만으로 구출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더불어 동행하시면서 약속의 땅에 진입하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작업은 어디까지나 주님의 의사요 계획이지 결코 따라오는 인간들의 계혹이나 의사가 아닙니다.
따라서 전쟁하는 방식도 인간들의 방식과 전혀 다릅니다. 히스기야왕의 안목으로 볼 때, 예루살렘 성을 포위한 앗수르 군대는 마치 히스기야왕 자신의 적으로만 보이겠지만 실은 하나님의 약속을 거역하기 위해 공격하는 하나님의 원수인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 앗수르 군대를 질적으로 평가합니다.
하지만 히스기야를 양적으로 평가해서 주눅이 들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18만 5천명이라는 앗수르 군인을 오직 한 사람처럼 취급한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즉 아무리 적들의 군사가 다수라 할지라도 그들이 지향하고 목적하는 바가 하나님의 적들이 지향하는 바와 동일하다면 그 많은 숫자도 한 사람의 운명처럼 취급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쉽게 말해서 컨베이어 벨트 위에 나란히 서서 출고장으로 움직여나가는 제품들은 아무리 숫자가 많다할지라도 그 컨베이어 벨트 위치에서 벗어날 수 없이 같은 운명이 되는 것처럼, 원수들의 숫자가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에 이를 수 없는 자라면 한 사람처럼 취급당해서 동일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겁니다.
이처럼 우리 성도들도 이런 하나님의 안목으로 바뀌어야 하는 겁니다. 양적으로 세계를 보지 말고 질적으로 봐야 합니다. 사람이 질적으로 세계를 보지 못하면 항상 자력으로 상대를 이기고 처리하려고 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 전쟁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전쟁이 아니라 사람의 전쟁이 되고 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벌리시는 모든 일은, 인간의 양적인 안목이 아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양적인 안목을 지닌 자들이 질리게 되는 상황을 만들어 버려서 들이닥치게 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들은 어쩔 줄을 모르고 다수의 힘 앞에서 주눅들어서 하나님에게 하소연하게 됩니다. “저에게 어찌 이런 재앙을 내리십니까?”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런 하소연은 하나님의 안목을 갖지 못해서 생긴 현상입니다.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모아져 있어도 질적으로 볼 때 그저 쓰레기일 뿐이다 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는 벨트 위에 몸을 실었습니까?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인생이 더 이상 우리 인생이 아니라 주님의 인생인 것을 인정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