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16:17-21 (하나님께 비방)
계 16:17-21 (하나님께 비방)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69)
본문:요한계시록16장17-21절
제목: 하나님께 비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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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222.231.1.74/~woorich1/성경강해/요한계시록-2006/071강-계16장,17-21,(하나님께,비방)-rev070722.hwp
이근호
07-07-22 13:18
하나님께 비방
2007년 7월 22일 본문 말씀: 요한계시록 16:17-21
(계 16:17) 『일곱째 천사가 그 대접을 공중에 쏟으매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서 이르되 되었다 하시니』
(계 16:18)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이 있고 또 큰 지진이 있어 얼마나 큰지 사람이 땅에 있어 온 이래로 이같이 큰 지진이 없었더라』
(계 16:19)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계 16:20) 『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 데 없더라』
(계 16:21) 『또 무게가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로부터 사람들에게 내리매 사람들이 그 우박의 재앙 때문에 하나님을 비방하니 그 재앙 심히 큼이러라』
기적적인 일과 기적이 아닌 일, 둘로 나뉘어집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행하여 낼 수 있는 일은 기적이 아니라고 여깁니다. 자기 열심히 노력한 결과라면 구태어 기적이라는 말을 붙일 수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24시간 온종일 이처럼 자기 행함의 결실을 얻기 위하여 분투노력합니다. 기적을 원치 않습니다. 자기 행함의 열매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적으로 자기 행함이 없이 이루어지는 일에 대해서는 관심이 소홀해져 버리는 겁니다. 자기 행함이나 열심없이 얻어지는 일에 대해서는 별 의미도 없다고 간주해버리고 천시해 버립니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의 행함없이 얻어지는 그런 기적은 어디있습니까?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 같은 것이 그런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벌어지는 일들은 인간들이 평소에 행하고 싶어 환장한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전혀 기대하지도 않는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성경 말씀대로 일하십니다. 비록 인간들이 자기 행함에 열중하고 있음을 잘 알지만 거기에 신경쓰시지 않고 이 말씀대로 밀어붙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적에 속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하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는 목적은 어디있습니까? 태초로 돌아가는 겁니다. 태초에 혼돈이 있었습니다. 태초에 무질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란 바로 혼돈의 상태로 되돌려놓는 작업입니다. 혼돈이란 어두움입니다. 어두움 앞에서는 그 어떤 각양 오색 빛깔도 소용없습니다. 구별되지 않습니다. 무시당합니다.
오직 어두움만 짙을 뿐입니다. 다같이 어둡다는 점에서 그 어떤 차별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명령이 떨어집니다. “빛이 있으라!”입니다. 태초에 명령이 있었습니다. 이 명령으로 이 혼돈의 세계에 질서가 갖추어졌습니다. 차이가 생기고 차별이 생기고 개성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의 어두움이 아니라 빛이 아니기에 어두움이 되어야 하는 어두움이 발생됩니다. 이처럼 명령을 전 후로 인하여 질서 잡히기 시작했습니다. 인간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리다 아리아의 오빠인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시체가 안치되는 있는 무덤을 향하여 명령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그랬더니만 이 명령에 거역한 시신은 없었습니다. 나사로는 베로 동인채 걸어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평소에 우리가 24시간에 몸바쳐 시도한 행함으로 생긴 일이 아닙니다. 주님의 명령이 새로운 질서를 세우고 만들어낸 결실입니다. 기적입니다. 우리는 일상의 일에 바쁘다는 이유는 이런 기적을 배척하지 아니됩니다.
그렇다면 이런 새로운 질서는 어떤 바탕 위에서 전개될까요? 기적이 기적다울려면 현 세계가 혼돈임을 드러내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은 인간들의 인위적이고 인공적인 문명으로 도배가 되다시피 했습니다. 과학과 경제와 기술과 모든 재주와 재능들이 이 땅을 나름대로 호사 찬란하게 단장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다고 혼돈의 원칙이 무너지거나 뒤로 물러갈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거대한 지진을 일으키십니다. 지진이란 땅 위에 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라는 인식을 깨게 만듭니다. 이 인류의 문명은 땅 밑과 통으로 통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밑둥치가 갈라지면 아무리 위 부분이 화려해도 다 땅 속으로 허무하게 파묻힐 운명이 됩니다. 땅 위에서 펼쳐지는 인위적 행위가 전부가 아닙니다.
단팥빵의 앙꼬는 단팥빵을 갈라지게 해야 삐져나오는 법입니다. 하나님께서 큰 성 바벨론을 세 동강이를 내므로서 혼돈의 원칙을 고수하고 계심을 알리십니다. 이처럼 혼돈의 법칙이 유지되어야 명령에 의한 새창조 원칙도 의미가 있습니다. 즉 인간의 행함의 원칙이 깨어져야 그것이 곧 하나님이 명령의 위력입니다. 죽음을 느끼지 아니하면 생명의 귀함을 모릅니다.
깨어지지 아니하면 그 속에 담겨있는 혼돈과 명령의 기적적 원칙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사람에게 있어 죄란 혼돈의 원칙을 무기하고 나름대로 목적을 만들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야고보서 4:13-14에 보면,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안개 주제에 왜 목표를 만드느냐 하는 겁니다. 사람의 죄악이란 뭔가 목적과 목표를 구상해내는데 달려붙어있습니다. 예를 들어 목사가 선교를 목적을 하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죄악된 짓입니다. 혼돈에서의 목적이란 오로지 하나님만이 정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교라는 것도 하나님의 일이 우리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기의 목적을 포기하지 않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온갖 선행과 종교적 기능을 이 목적 달성에 위해 쏟아붓습니다. 선교는 성사는 주님의 기적으로 이루어지지 결코 인간의 행함의 결실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선교 목적이 깨어지지 아니하면 그 목적 달성에 온갖 비리와 죄악들은 다 달라붙게 됩니다. 결국은 “돈 내라”는 이야기로 귀결됩니다. 사실 큰 성 바벨론이란 각양 좋은 것들은 다 몰려드는 곳입니다. 오직 했으면 ‘큰 성’이겠습니까. 이 큰 성 안에서 이야기되는 것은 오직 돈과 사랑과 우정 같은 것들입니다.
일본 영화를 보면 철저하게 종교나 ‘신’ 이야기는 배제됩니다. 즉 종교나 신이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무엇을 위하여 살 것인가를 말해줍니다. 사실 신이라는 용어란 돈과 우정과 사랑을 보충하는 보철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은 정(情)으로 삽니다. 동기간의 정, 부부간의 정, 부모 자식 간의 정, 이 정으로 삽니다.
정 떨어져나가면 울고, 정이 다가오면 행복합니다. TV 드라마의 모든 내용이 이것입니다.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결속을 다지고 또 다지는 것이 정입니다. 시골에서 서울로 상경하고, 서울에서 강남에 자리잡고, 강남에서 미국으로 튑니다. 미국 가서는, 자신이 어떻게 성공적으로 지긋지긋한 한국에서 탈출에 성공했는지를 되씹는 재미로 살아갑니다.
이 모두가 인간의 행함입니다. 인간의 행함으로 불가능한 일들이 아닙니다. 가능한 일들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야기는 인간의 행함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일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원초적 혼돈의 세계로 되돌리려는 작업입니다. 혼돈의 세계로 돌아가지 아니하면 하나님 명령의 가치가 살아나지를 않게 되어 있습니다.
밑에서 지진이요 하늘에서는 우박입니다. 이런 혼돈 속에서도 보배함 열면 뿜어져나오는 광채처럼 하나님의 빛된 명령이 발휘됩니다. 시편 5:8에 보면,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해 달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동안 우리는 자신의 행함의 성과에 대해 보상해 달라는 식으로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나의 의가 아닌 십자가에서 이루어신 주의 의가 우리를 인도하는 삶, 이것이 기적적 삶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원래 이 세상이 혼돈이었음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