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706c 울산강의-창세기 17장(2) 녹취
20070706c 울산강의-창세기 17장(2) 녹취
이름 : 한윤범(IP:59.6.189.176)
20070706c 울산강의-창세기 17장(2)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죄가 관영, 죄가 몰려오는 것은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에 몰려옵니다. 죄가 오는 것에 대해서 이상히 여기지 말고 정상이라고 봐야 됩니다. 죄가 몰려온다 하니까 어떤 사람은 오해해서 죄 진다는 말이 아니고, 불신자는 죄 속에 있으면서 자꾸 자기 잘난 것에만 신경을 쓰다 보니까 자기변명만 늘어놔요.
나도 최선을 다하려 그랬습니다. 뭐 못 사니까 강도질했습니다. 뭐 어쩌라고? 사회가 나빠서 그런데 나보고 탓합니까? 나 부모 잘못 만나서 그랬어요. 나 원래 그런 인간이에요. 모든 것을 자기 정당성, 자기 잘남에다 이렇게 쭉 하는데 신자는 그 반대지요. 아이고, 나란 인간이 살아있다는 게 기적입니다. 아이고, 뭐 모든 게 고맙지요. 이런 식으로 범사에 감사하고.
이게 뭐냐 하면, 당신은 당신 잘난 것도 있는데 왜 그래 겸손해 하느냐? 잘난 것에 대해서 내 주변에 있는 죄의 관영함이죠. 나는 죄 용서해주신 주님의 예수님 그걸 믿지, 내 착한 행위를 믿지 않습니다. 주님의 새 언약을 믿습니다. 이것이 새로운 피조물이 아니면 이런 말이 나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죄를 보고 겁낸다 하는 것은 난 신자라고 볼 수 없어요. 죄를 겁낼 것 같으면 어디 가서 숨습니까? 도대체 내가 가는 곳에 죄가 몰고 다니는데. 몰고 다니는 게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하시는데. 죄 없는 곳에 피한다? 세상에 머리 깎고 절에 가보세요. 되는가? 안 되지요. 죄 없는 곳이 어디 있습니까.
주님께서 벌통에서 설탕물 찍어서 해 놓고 이거 왜 벌이 이렇게 많은가? 자기 몸에 설탕물 있는 것도 모르고 이상하게 벌이 왜 그렇게 달려들지? 벌 쫓아낸다고. 여름에 왜 모기가 많지? 여름이니까 모기가 많지. 겨울 되면 모기 있습니까. 우리가 그 아래 있기 때문에 그렇지요.
새 언약 아래 있다. 언약 아래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죄로 보이고 그 안에서 주님의 의로 말미암아 용서받는 그게 같이 겸하여 보이는 겁니다. 제 이 말은 아브라함이 언약을 받아놓고 아브라함이 죄 안 진다는 말이 아니에요. 아브라함은 뭘 해도 아브라함도 역시 죄인이기 때문에 자기 본성을 드러냅니다만 우리의 관심사는 그러한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어떻게 손을 타시고 계속해서 외부에서 개입하느냐? 그걸 증거하는 그것이 바로 우리 언약의 할 일입니다.
17장에 보면 3절에. “내 너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누가 돼 달라고 했습니까? 일방적으로 해놓고 이름도 바꾸죠. “너는 이제부터 아브람이 아니고 아브라함” 일개 가정이 아니라 이제는 열국의 많은 사람의 아비가 될 것이라. 그리고 6절에 보면, “번성케 하고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나리라” 이거 전부다 아브라함이 원했던 게 아닙니다. “너와 대대로 언약을 세우고 너희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결국 하나님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은 어디 나타나리라? 결국은 하나님 아브라함하고 언약을 세우면서, 이게 하나님이죠. 키가 큰 분은 하나님이고 키가 작은 사람은 아브라함하면, 아브라함하고 하나님하고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찾아와서 아브라함을 이렇게 묶어서 어디까지 데려갑니까? 결국은 나의 하나님은 어디서 기다린다? 결국은 새 언약에서 진짜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래 보는 거예요.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뭐라고 합니까? 내가 예수님 보기를 기다리다가 난 봤다. 아브라함이 예수님 봤대요. 여기 있는 하나님께서 같이 아브라함 껴안고 계속 밑으로, 밑으로 해서 결국은 새 언약까지 다 보게 한다. 예수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까지 보게 하신 거예요.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 입장입니다. 물귀신 작전이죠. 끌어안고 하시는 거예요. 해놓고 여기서 바깥으로 팍팍 이리 나오는 것은 전부다 누구 공로입니까? 다 하나님의 공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사용하셔서 이런 하나님 됨을 드러내는데 우리를 이렇게 호출한 겁니다. 그러니까 당첨된 거죠. 우리를 사용하셔서 드러내십니다. 우리는 그 과정 속에서 나는 전적으로 내가 한 게 없는 죄인에 불과한 것을 더욱 깊이, 깊이 알고 나중에 십자가 앞에 까지 가면 나는 설 수 없습니다. 하고 그렇게 탄식하죠.
예수님 앞에는 아니 하나님 앞에 서면 영광이지만 하나님의 뒤편에는 십자가에요. 모세가 본 것은 하나님 뒤편이죠. 그래서 어떤 제가 책을 낼 때 제목을 [하나님 뒤편]이란 책이 어떻겠냐? 하나님 뒤편. 하나님의 뒤편에는 이게 독생자의 영광이죠. 아주 수척한, 비참한 영광이 있어요. 하나님 뒤편에는.
하나님 앞뒤가 있어요. 앞에는 하나님의 무서움이고 설 자가 없고, 뒤편에 십자가에는 우리보다 더 낮아진 모습으로 우리를 반기고 있고. 오라 이거에요. 네 죄를 용서받았으니까 오라 이거에요. 뒤로 가서 앞으로 나오는 거다 이 말이죠. 십자가를 가지고 부활에 이른다. 우리 영광에 이르자. 그런 방식이에요.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은 오해했죠. 영광스러운 구름타고 오는 인자를 원했건만 그들에 나타난 인자는 십자가에 죽는 인자로 나타났죠. 그러니까 그들은 아무도 믿질 않은 겁니다. 하나님이 십자가로 독생자의 영광을 갖고 올 줄 아무도 몰랐지요. 비참하게 올 줄 몰랐다 이 말이에요.
그 비참함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가난하게 되면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고, 내 죄 때문에 저렇게 고생을 해야 된다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우리의 진면목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가 이렇게 저주받은 사람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몸소 저주받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게 아브라함에게 어떻게 나타나는가? 그게 곧 나오지요. 이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17장 10절 다같이 읽어보죠. 시작.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됐습니다.
이 그림으로 할례를 받으라. 이 그림으로 하겠습니다. 골로새서 2장에 보면, 할례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라 했습니다. 골로새서 2장에 나옵니다. 골로새서 2장에 십자가거든요. 이 십자가가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에서는 이 십자가가 어떤 흔적을 나타나는데 이게 뭐냐 하면, 이게 할례로 나타나요. 내 몸에 십자가가 미리 새겨지는 거예요. 문신처럼.
문신하나 새기는데 그게 뭐냐? 십자가 형식의 문신이 뭐냐? 할례라는 흔적을 어디다? 몸에 지니고 있어야 돼요. 방주처럼 어떤 배를 만들어서 그 안에 나는 변화 없이 어떤 공간에 들어갔다 나왔다, 안과 밖이 되는 게 아니고, 아예 내 몸에 십자가의 흔적을 지녀야 되는데 그게 아브라함한테는 뭐라고 했습니까? 아브라함한테는 할례가 되는 거예요. 딱 고추 잘랐다.
장차 오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흔적을 앞당겨서 지는 거예요. 아브라함의 할례와 예수님의 십자가 사이에 이런 연관이 있다는 것을 어떤 절차를 통해서 이어지는가? 주어지는 계속적인 언약, 언약, 언약, 언약을 통해서 결국은 새 언약까지 사다리처럼 이어지는 겁니다. 천사들이 걸로 몰아넣고 성령께서 몰아넣고 계속해서.
그래서 사도 바울이 하죠. 나도 내 안에 뭐가 있다? 십자가의 흔적이 있다. 자랑하라 하니까 나는 학력이 대단하다. 그걸 자랑하는 게 아니고, 니 자랑해봐라. 내 안에 십자가의 흔적이 있거든. 그러니까 거짓 사도들이 악마 종들이 ‘됐거든’ 이카는 거예요. 자랑해봐라 하니까 내 안에 십자가 흔적 있다. 그게 무슨 자랑이냐 말이죠.
천국에서 문을 빼꼼이 열어줄 때 십자가 보고 열어줍니다. 여러분 하나 적어놓으세요. 길지만 적어놓으세요. [언약은 모든 개성을 뭉개버린다.] 적었습니까? 언약은 다른 말로 십자가 앞에서 모든 개성, 나 성질 나빠요. 나 성질 너무 급해요. 나 느려 터졌어요. 나는 여자에요. 나는 남자에요. 나는 목사에요. 나는 집사에요. 모든 개성이 의미가 없어요. 나는 부자에요. 가난해요. 언약은 모든 개성을 뭉개버립니다.
왜 그러냐 하면, 나 오병이어인데 떡 모양이 좀 찌그러졌어요. 참기름 병이 맥주병이에요. 그거 상관없어요. 외부에서 손대기 나름이기 때문에 그게 참기름 병이 세모니 네모니 뭐 오병이어 할 때 째져 있니 뭐 크나 작니, 물고기가 말라 비틀어졌니 생생하니 아무 관계없이 외부에서 개입해서 오천 명 먹입니다. 언약은 일체 개성을 존중하지 않습니다.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이미지 관리에 속아 넘어가지 않습니다.
아까 여담으로 이야기했지만 식사 중에. 저는 아주 심각한 문제로 보는데 글을 쓸 때 공적인 글 따로 있고 사적인 글 따로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 라고 누가 이렇게 했을 때 그분이 뭐 불만이 있어서 복음을 거부해서 있어 그런 게 아니고, 하나의 공적인 거니까 해야 되지 않느냐?
제가 거기에 대해서 반대의견을 냈지요. 공적인 거, 사적인 거 구분하겠다는 그 의도가 뭐냐? 결국 이것은 뭐냐? 이미지 관리에요. 남한테 수치스런 것은 안 들키고, 남한테 은혜롭게 뭐 은혜를 드러내겠다. 이거 개성입니다. 이건 계속 자기 우수함을 유지하겠다고 하거든요. 유지하겠다는 그런 생각이거든요.
사람이 혼자 있어도 주님 앞에 있는 것처럼 살아야 되고, 사람들 앞에서도 사람이 눈에 안 보여야 됩니다. 주님만 보여야 돼요. 주님만 의뢰해야 돼요. 주님 이 설교 어떻습니까? 목사는 주님하고 의논해야 돼요. 주님 이 설교 어때요? 사람들 반응 볼게 아니라. 언약은 모든 개성을 뭉개버려요.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게 얼마나 우리 마음을 편하게 하는지 몰라요. 참 편하게 합니다.
할례라는 것을 우리 몸에 새긴다는 거. 우리 몸에 새기는데 왜 이 할례를 새길 때 왜 하필이면 남성 고추에다 생식기에다 새기느냐? 이게 또 담긴 의미가 놀라워요. 담긴 의미가. 왜 여기 무릎에다 안 하고 팔뚝에다 십자가 그려 넣으면 멋있데 왜 하필 다른 신체 머리 뒤통수에다 안 하고 하필이면 남성의 생식기, 자식을 생산하는 기구에다가 그 끝을 잘라버리느냐 말이죠.
어떤 목사가 말하기를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남자의 생식기 끝은 더럽답니다. 그걸 그 사람도 진지하게 이야기해요. 목사가. 아이고, 고추 없는 여자는 자동적으로 거룩하겠네. 참 기가 찰 노릇이에요. 생식기 끝을 자른다 이 말이죠. 자른다는 게 뭐라고? 언약을 세우는 거예요. 아, 이거 의미 모른다. 노아 때 언약 세우기가 뭐냐? 뭐뭐 만들기였죠. 뭐 만들기? 방주 만들기였잖아요.
그런데 언약 세우는 게 내 바깥에 방주란 덩어리, 덩치를 물체를 만들었잖아요. 그런데 점점 더 뭐에 가까이 간다? 새 언약. 새 언약이 다른 말로 뭡니까? 십자가 아닙니까. 십자가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이 언약이 내 바깥에 세워 둘 수 있는 물체가 아니라 내 몸 안에 들어옵니다. 내 몸 안에 언약으로 이게 새겨져요. 몸 안에 언약으로 새겨지면 이건 뭘 뜻하느냐 하면, 생식기 끝을 자른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단절이죠. 단절 뜻 자체가 잘라서 끊어내 버리는 거예요.
방주 안과 방주 바깥의 차이점은, 방주 바깥은 저주고 안에서는 구원입니다. 그것은 방주 안에 있는 어린양을 잡아서 새를 잡아서 정결한 짐승을 잡아서 받는데. 예수님 안에 오면 뭔가 바깥에 끊어버려야 돼요. 뭘 끊어버리느냐 하면, 생식기 끝부분을 잘라서 에이, 저리가라! 하고 대대로 내려오는 나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하는 흐름, 그 강줄기 같은 흐름, 리프팅, 동강, 뭔가 위에서부터 강줄기를 잘라서 그걸 언약, 예수님 십자가 바깥에다 버려야 되는 거예요. 잘라서 버려야 돼요.
그래서 이 안에 오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 오느냐? 나 버렸는데요. 뭘 버렸는데? 저 생식기 버렸는데요. 다시 말해서 육을 버렸습니다. 그럼 니 지금 갖고 있는 육은 뭐고? 이 육은 더 이상 우리 부모 것이 아니고, 내 것도 아니고, 사람의 혈통으로나 육으로나 뜻으로 난 게 아니고, 내가 이 안에 있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뜻 때문에 이 안에 지금 사로잡혀 와 있습니다. 소속되어 있습니다. 이래 보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할례 한다는 의미는 뭐냐? 이제 아브라함에 속한 자식들은 지가 좋든 싫든 언약이 다루어지는 하나의 대상체가 됐다. 하나님의 언약을 그들 가지고 마지막 새 언약을 드러낼 때까지 주무르고 주무를 수 있는 하나의 대상체, 대상으로 세워졌다. 뭐가 끊어진 채? 이제는 육적인 흐름이 끊어진 채. 새로운 피조물이죠.
그렇게 설명해야 골로새서 2장에 나오는 할례가 십자가에 죽고 다시 부활하는 게 뭐라 했습니까? 그거와 같은 겁니다. 육은 죽고 주님의 몸으로 사는 거예요. 영으로 사는 거, 이게 할례의 뜻이라면, 그 할례의 뜻을 미리 나중에 소급해서 여기다가 적용을 시켜 보면 그 해석이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거기서 좀더 한 마디 더 이야기한다면, 할례 안에 예수님 안에는 육을 잘라서 끊어버렸다고 했는데 좀더 깊이 들어가 보면, 이 예수님이 누굽니까? 육으로부터 육 때문에 저주받아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이잖아요. 그러니까 예수 안에는 누구와 누구의 만남이에요? 대신 죽어야만 했던 분과 그 분 덕분에 죽었던 사람들의 집합이죠.
그러니까 이 안에는 뭐냐 하면, 전부다 할례 안에는 전부다 죽은 자들의 모임이죠. 대신 죽었던 분과 그분에 의해서 죽고 다시 살아야 될 사람들끼리 모임. 이걸 로마서 6장에서는 그걸 세례, 연합이라. 우리는 예수님과 더불어 함께 죽고 함께 살았다는 뜻이 여기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언약 세운다 하는 할례를 몸에 새겼다 하는 이 말은 뭐냐 하면, 이젠 좋든 싫든 주님 책임 지이소? 주님 책임 지이소. 하니까 그런 생각나네. 영화나 실제론 많습니다만 어떤 아가씨가 시집을 안 간 아가씨인데 자기가, 보통 여자들이 어떤 남자들을 좋아하느냐 하면 자기가 존경하는 남자를 좋아하는 거예요. 자기가 존경하고 싶은 남자가 와서 이렇게 우리 커피나 한 잔 할까요? 커피 한 잔 하고 이야기했는데 그 다음에 나가는 사람 붙들고 ‘책임 지이소!’ 뭐, 방금 커피 한 잔 마셨는데 책임 지이소. 붙드는 것처럼.
예가 이상합니다만 하여튼 그것보다 진하지요. 할례 행했으니까 책임지라는 거예요. 내 인생 책임지라는 거예요. 주님께서. 주님 보고 내 인생 책임지라는 거예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 이 말이죠. 이제 사나 죽으나. 죽어도 주의 것이고 살아도 주의 것이고. 내가 개고기 돼도 주님이 개고기고. 뭐 가라 하면 가고, 까라면 까고. 책임 지이소.
성경에 보면 현대인들의 사고방식하고 너무 달라요. 가라 하면 가고 오면 오나이다.
자, 어느 정도로 책임지는가? 놀라운 책임지는 거 한번 보여드리겠습니다. 요한복음 2장 한번 봅시다. 여기 보면 놀라운 책임짐이 깜짝 놀랄, 요한복음 2장이 아니고요. 요한복음 4장 53절에 보면,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온 집이 다 믿으니라”
이게 뭐냐 하면 무슨 이야기냐 하면, 아들이 죽으니까 예수님 보고 내 아들 살려달라고 주님 앞에 부탁하려고 왔거든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미 살았다. 50절에 이야기했잖아요. 그때가 언젠가 보니까 주님이 가시지 않고 니 아들은 살았다고 말씀한 그 시점에 이미 집에 가 보니까 애가 살았어요.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주님께서는 우리보고 협의해서 고치는 게 아니고, 주님은 말씀 자체가 곧 완성이에요. 그러면 우리는 왜 있느냐? 주의 말씀이 곧 완성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증거물 되기 위해서 매개체가 되기 위해서 우린 이 땅에 존재하는 겁니다. 실컷 죄 지었는데 니 용서했다. 그 즉시로 우린 용서받은 거예요. 내가 요청한 게 아니고.
간음한 여인이 부탁합니다. 내 책임지이소? 이런 게 아니고, 일방적으로 너 보고 너 용서해준 사람 없지. 없습니다. 다 돌 들고 날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럼 내가 용서해줄게. 그 시로 그 여인은 이미 용서받은 거예요. 그럼 그 여자는 무슨 혜택을 입었느냐? 여자가 어떤 혜택을 입었느냐는 것보다도 주님이 그만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여자를 하나의 인화지 또는 도화지로 사용한 겁니다.
예수님이 나는 심판주며 내가 곧 구원자면, 내 말이 구원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서 간음한 여인 하나 채택한 겁니다. 이게 연합이에요. 이게 할례 안의 세계, 언약 안의 세계입니다. 그래 우리가 걱정한다는 것은 마귀에 시험든 거예요. 주님의 능력을 안 믿기 때문에 걱정하고 있는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여러분.
제가 지난주일 아침에 설교했는가. 나사로가 약을 살살 올리죠. 부자보고. 부자는 뭐라 합니까? 사람은 돈 있어야 인간이다. 이렇게 하니까 나사로는 말하기를 나 돈 없어도 벌써 인간됐다. 이래 약 올리고 있는 거예요. 너는 인간 되려고 부자 됐지만 나는 돈 없어도 헌데를 핥아도 나 이미 인간 됐거든. 그렇게 하고 천당 가버렸다 말이죠. 지는 지옥 가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나사로를 왜 그렇게 도화지로 사용했느냐 하면, 주님의 능력으로 구원받지, 사람의 갖고 있는 선입관으로 구원받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사로로 하여금 거지 되어야 해요. 나사로는 거지 되고 난 뒤에 배부른 양 하고 있고. 왜? 거지하고 구원하고 아무 상관없기 때문에.
적어보면, 돈과 구원은 상관없다. 이거 내 바른 소리 한 거 아닙니까? 인간의 많은 재산이 사람의 죄를 속할 수 없다 하는 시편에 나오지요. 돈과 구원이 상관없다 말이죠. 돈과 구원이 상관없다는 식대로 살아가는 사람 누굽니까? 이 땅에서. 우립니까? 우리는 상관있다고 보거든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걸 날마다 우리 죄라고 이야기하고, 니가 무슨 짓을 해도 상관이 없거든. 그렇거든. 하고 우릴 다시 한번 십자가로 안내한다 말이죠. 우리로 하여금 돈에 신경 쓰게 좋아하게 만들어놓고 그런데도 관계없거든. 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우린 고백이 뭡니까? 난 돈 되게 좋아하는데 실은 관계없거든. 라고 남한테 증거할 수 있다 이 말이에요. 맨 돈만 생각하면서도 구원하고 상관없거든 하며 산다 이 말이죠.
그러다 때로는 돈 때문에 가슴 아파하고 돈 때문에 울고불고 하다가 성령이 오게 되면, 내가 미쳤구나. 내가 거지 나사로보다 더 못 하네. 그런 생각 가끔 들기도 하고. 그것이 주께서 우리를 손 탄다. 계속해서 주께서 우리를 가지고 노는 겁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 4장에 보면 놀랍지요. 주께서는 말씀 자체가 곧 완료가 돼요. 얼마나 이게 아주 희한하고 우스운 이야기냐 하면 이게 정말 신기한 이야기냐 하면, 선생님이 있다가 이제부터 시험 친다! 시험지도 안 줘. 하고 그냥 나가요. 선생님 어디 나가십니까? 너희들 다 백점이거든. 왜 그렇습니까? 내가 채점 다 했잖아. 이름 쓸 시간도 없고, 시험지 받아 본 적도 없는데 벌써 백점이야. 주님 나가버렸어요. 자기가 내 본 말씀이 곧 완성이에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마음 턱 놓고 예수님 오기를 기다린 겁니다. 이미 구원받은 상태에서 누가 이런 혜택을 나한테 베푸는가? 예수를 만나고 기뻐했다 하지요. 진짜 기뻐한 거예요. 아, 예수님이 대신 다 값을 치렀구나.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 감사가 이제 아직까지도 지표면에서 깊이가 얇다 보니까 아브라함은 우왕좌왕하고 이렇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걸 다 알지요. 아니까 구약의 어떤 사람보다 천국에 있는 어린아이가 구약보다 더 안다는 뜻이 그 뜻이에요. 다 아니까.
어쨌든 간에 창세기 17장 12절에 보면,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지 팔일 만에” 그 다음에 뭐 하라 했습니까? 할례를 행하라. ‘팔일 만에 할례를 행하라’ 이 말은 예수님께서 팔일 만에 할례 행했습니다. 결국은 뭐냐 하면, 그들은 본인이 원하던 원치 않던 간에 예수님을 보여주는 그런 삶을 사는데 당첨되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노아는 노아 식대로 믿음을 보여주고 증거가 되고, 에녹은 에녹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증인되듯이, 아브라함은 아브라함대로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증인되고, 오늘날 우리는 뭐 현대중공업에 있든 어디 있든 간에 이 울산 땅에 살면서 나름대로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이 된 거예요. 외부에서 그렇게 개입한 겁니다. 우리는 바싹 마른 오병이어 밖에 안 돼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거는. 주께서 어떻게 사용하던지 간에 그건 주의 몫이지, 우리 몫이 아닙니다.
그래서 ‘패 까라’ 말은 뭐냐 하면, 패를 까라 이 말은 내가 일월 공산이든 이월 달 하여튼 모른다. 삼월 달 벚꽃이든 뭐가 되던 뭘 까 봐도 뒷면에는 동일하게 벌겋잖아요. 화투 뒷면. 아무것도 단풍이 들었든 공산이든 뒤에 똥이 되던 우산 쓴 노인네가 되던. 전부다 여긴 똑같잖아요.
그러니까 언약은 개성을 전부다 묵살해 버린다. 오월 달이 유월 달 될 필요 없고, 칠월 달이 시월 달 될 필요 없어요. 거지 나사로, 다 거지될 이유는 없고. 그는 그 나름대로 사용하는 거예요. 왜? 전부다 우리 몸에 십자가의 흔적을 가졌기 때문에. 할례를 행했기 때문에. 그래서 사도 바울이 육적인 표면적인 할례 행하지 말고 마음으로 할례를 행하라.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거예요. 마음으로 할례를 행하라.
마음으로 할례가 무슨 뜻입니까? 이미 우리는 단절되었다. 자, 그러면 이 단절되었다는 말을 기존의 사람들은 또 여기에 오해합니다. 그러면 목사님, 단절되었다는 말은 이젠 예수 믿고 난 뒤에 나쁜 짓 안하는 죄 한 번도 안 진다 이 말이죠. 우리는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나쁜 짓 절대 안 하고 절대로 나쁜 생각, 어떤 음란한 생각 없는 그 말이죠.
아닙니다. 단절되었다는 이 말은 무엇이 단절되었는가? 어떠어떠한 것이 나와 상관없는 나와 또는 나의 운명과 상관없는 죄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것이 우리 몸에 함께 있는 거죠. 내가 죄를 지으면서도 그것과 내 운명과 전혀 상관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런이런 죄들이 우리와 함께 있다 이 말이죠. 단절된 채 함께 있는 거예요.
그게 나옵니다. 내가 이래 관념적으로 설명한 것 같은데 실제로 해봅시다. 17장 16절.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이렇게 하니까 아브라함이 엎드려 뭐 했습니까? 그 다음에 뭐하죠? 웃었지요.
“심중에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17절) 보세요. 할례 의미도 모르고 단절된 의미도 모르고 그냥 자기가 평소가 살아간 식대로 그대로 다 나와요. 바싹 마른 멸치죠. 바싹 마른 보리떡 다섯 개입니다. 여기에 어떤 가치 없어요. 그냥 성깔대로 사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주목한 것은 아브라함이 얼마나 인간 됐느냐가 아닙니다. 웃고 싶은데 어떻게 하겠어요. 웃어야지.
전에 언젠가 그런 이야기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옛날이야기입니다. 그게 일요일 날 돌아갔는데 일요일 날 옛날에 뭘 했느냐 하면 [웃으면 복이 와요]했다고요. 아버지 돌아가시고 장례 치루는 그 날에 웃음꽃이 만발했습니다. 온 집안이. 그때 구봉서, 배삼룡 얼마나 배꼽을 잡고 웃기는지.
이거는 장례식, 옛날에는 장례를 또 병원에 한 게 아니고 집에서 했다고. 집에서 해서 전부 손님들 오고했는데 손님부터 해서 다 웃음꽃이 만발해서 아아~ 좋다고 웃어댔는데. 물론 그때 나도 웃었지요. 내 친구하고 같이 웃고 티비 보고 다 웃고 했어요. 옛날 티비도 드물 때인데 온 마을 사람들이 그 웃으면 복이 와요 보려고 다 덤벼들었는데 이게 장례식인지 결혼식인지. 웃어서 웃는 걸 어떻게 할까요? 지금.
웃음의 의미가 여기 나오는데 사람이 웃음이란 반드시 예상치 못한 일, 이걸 우발성이라 하는데. 우발성 때문에 웃음이 나요. 사람이 기대한 것은 하나도 우습지 않아요. 항상 개그라든지 이런 것은 예상치 못할 때 탁 터뜨려줘야 웃음이 탁 튀어나오는 거예요.
범인을 풀어줘라. 돈을 줘라. 인질을 풀어주겠다. 이래 나오면, 안 하면 뭐 하는데. 이렇게 할 때 이게 팍 웃는 거예요. 협박하는데 협박이 안 통할 때 우습잖아요. 너, 내일 만나서 협상하자. 내일 바쁜데. 이래 하면 그게 예상치도 못한.
항상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하긴 하지만 지 밖에 몰라요. 꼭 우리하고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가 지금 엄청난 도구며 주님의 종이며 이런 것은 건성으로 들어와서 바람처럼 왔다가 그냥 가버리지, 역시 남는 것은 제일 중요한 것은 내 몸뚱아리 밖에 내가 배고프다 이것 밖에 중요하지 않아요. 아니면 돈이 있느냐 없느냐 그게 제일 중요한 문제지, 하나님이 날 어떻게 사용하느냐 그건 별 나한테 중요한 문제 아니에요.
이건 신앙생활 백년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천년해도 마찬가지에요. 주께서 우발성 있게 너는 보통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순간순간 깨닫게 하는 그 순간 우리는 하나님께 다시 한번 십자가를 알고 엎드리죠. 아, 내 몸이 내 몸이 아니구나. 돌아서선 마차가지입니다만.
이러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언약을 해서 할례를 행하고 이렇게 하지만 아브라함은 백날해도 지 성질 요만큼도 고치지 않습니다. 이번에 이걸 통해서 또 하나 진리를 압시다. [성도는 고치지 않는다.] 자기의 성질 안 고친다. 이게 특징이에요.
왜? 왜 안 고치는가? 고칠 필요 없이 구원받았는데. 안 고쳐도 구원받는데 베드로가 성질 고쳤습니까? 사도 요한이 성질 고쳤어요? 안 고쳤습니다. 끝까지 갑니다. 우리가 끝까지 갑시다. 구월 달 계속 가는 거예요. 시월 단풍 계속 가는 거예요. 까 봤자 뒷면은 같은 색갈인데 뭘. 끝까지 고집 세워서 끝까지 가는 거예요.
고치면 이미지 관리죠. 자기 의로운 걸 과시하죠. 그거는 위선자 되는 겁니다. 이단 되죠. 그 이단들의 특징은 뭐냐? 위선자입니다. 자기 속 따로 겉 따로, 따로 놀아요. 그럼 정말 본인도 괴로워요.
목사님 사모님들이 제일 괴로운 게 뭐냐 하면, 집구석에서 하는 행동과 교회에서 하는 행동과 달라요. 정말 그거는 정신병 걸릴 수 없다 이 말이죠. 그게. 개코도 믿음 없으면서 믿음 있는 체 하니 참 골치 아프고. 그럼 교인들이 더 약 올린다고. 사모님 해 보세요. 없는 줄 뻔히 아는데.
감사한 것은 제 아내는 어디가도 집에서 새는 바가지. 감사한 것은 제 아내의 바가지는 어디서곤 계속 샌다는 거예요.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얼마나 장구치고 싶었으면 크리스마스 때 사모님이 사물놀이를 하겠어요? 교회에서. 봤지요. 동영상 봤지요. 성탄기념 사물놀이. 하나님도 땅을 보면 되지. 하나님께 영광, 이것만 집어넣으면 되거든. 뭘 붙이든 간에.
성격 그냥 갑니다. 그냥 가고 오병이어처럼 마른 보리떡, 마른 멸치 그냥 가는 갑니다. 본인이 놀라야 돼요. 나 같은 인간이 구원될 수는 없다. 그런데 이미 되었다. 이거는 주님의 솜씨다. 절대로 이건 나한테는 안 나와. 누가 뭐래도 겸손하십니다. 성화되었습니다. 아이고, 온유하십니다. 누가 뭐라고 나를 이렇게 곡해해서 표현하더라도 절대로 그건 나한테 해당되지 않고 모든 것은 주님의 공로. 그걸 가지고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사랑이라 합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거기서 나옵니다. 주님의 공로입니다. 뭐든지 저는 날마다 새로 시작해도 그것도 다행스럽습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좀더 어려운 걸 해야 되겠는데. 자, 어려운 거 하기 전에 질문해야 돼요. 왜 태가 죽은 구십 세에 낳게 하느냐 말이죠. 여러분 아시는 분도 있는데 아시지만 다시 한번 확인하고자 해요. 이미 사라가 구십 세에 아기를 낳는다. 왜 태가 죽었는데 왜 사라가 태가 죽기를 기다려서 왜 낳아야 되는가? 그래서 아브라함이 웃었던 거예요.
아브라함은 나중에 알지 지금은 몰라요. 뭐냐 하면, 자기 몸에 흔적이 있지요. 무슨 흔적? 할례. 이 할례와 자기 아내의 태가 죽은 것과 관련성이 있다는 걸 모르는 거예요. 요새 같으면 할례 행했습니다, 하나님. 천당 보내 주세요. 고추 볼래요. 봤지요. 천당 내꺼다. 어떤 행위를 내가 나에게 어떤 행위를 가하고 행위를 가한 것 때문에 그 덕분에 내가 구원받았다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나한테 내가 어떤 행위를 했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구원이 안 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겁니다. 이 말이 더 어렵다. 성경에 보면, 예수를 믿으라. 구원할 것이라. 그럼 우리는 뭡니까? 예수를 믿어야 구원받는다. 됐다. 쉽다. 예수를 믿습니다. 자, 구원해 주세요. 내가 예수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는 내가 구원받는다고 여기는 거예요. 이게 곡해에요. 이게 말이 안 돼요.
구원이 믿는 건 내가 믿더라도 구원은 외부에서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안 믿어지는 거예요. 믿는 건 내가 믿더라도 구원은 주님의 몫이라 하는 것을 우리가 안 믿는 거예요. 내가 믿잖아. 내가, 내가, 내가 저 사람은 안 믿고 내가 믿잖아. 저 사람은 지옥 가야 돼. 자꾸 내가 나한테 행한 것에 대해서 우린 미련을 못 버리고 있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믿는데 그 할례가 나에게 어떤 일을 만들 줄은 미처 예상치를 못한 겁니다. 내 안에 마치 내가 대중목욕탕에 갔는데 그냥 저울에 올라타서 몸무게 쟀을 뿐인데 집에 와서 보니 무좀이 퍼졌더라. 흉한 예지만 흉한 예일수록 기억되잖아요. 나는 그냥 쉽게 몸무게 잴 뿐인데 일주일 뒤에 온 발에 무좀이 퍼졌더라.
이거는 내가 요청한 게 아니듯이 시키는 대로 할례를 행했더니만 그 할례가 장차 알아서 새 언약과 관련성을 맺더라. 이거는 아브라함이고 사라고 상상도 못한 겁니다. 아브라함은 뭡니까? 할례 행했어요. 할례 행했어요. 됐어요? 시키는 대로 다 했습니다. 그러면 됐지 뭐가 문젭니까? 자기가 행한 것에 대해서 계속 집착을 갖고 있는 겁니다. 미련을 갖고 있는 거예요.
부흥사가 와서 여러분, 여러분들이 목사를 잘 섬겨야 된다. 뭐 예배당, 교육관 짓는데 한 10억을 내세요. 10억 내서 복 안 받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10억을 냈더니만 한 달 뒤에 부도났습니다. 왜 10억을 냈는데 부도나게 하십니까? 그 사람은 자기가 10억, 내 돈 내가 냈다는 것에만 집착하였지 주께서 어떻게 나를 다룬다는 것을 생각도 못한 거예요. 10억 다음에 백배나 갚아주면 1000억이죠. 열 배만 갚아줘도 100억이죠. 10억 태우고 100억 따내는 거 그것만 생각했지 10억 태워놓고 부도나는 것 그건 생각도 못한 겁니다.
아브라함은 할례를 행했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웃은 거예요. 할례 행했다. 이제 우리는 언약의 백성이다. 됐습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구원해 주시니 백성이 됐으니까 하나님 약속대로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릴 구원해 주시니. 했는데 이미 태가 죽은 상태에서 아기 낳는다 하니까 이거는 자기 예상을 빗나가니까 웃을 수밖에 없지요.
그 웃고 난 뒤에 그 다음에 19절에 보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이름을” 그 다음에 뭡니까? 이삭, 웃음이죠.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하지 말고, 웃음을 집어넣어봅시다. “네 아내 사라가 정녕 사라라 하지 말고 여자주인, 만국의 어미, 네 아내 만국의 어미가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웃음이라 하라” 무슨 뉘앙스가 나옵니까?
여자주인이라고 이름은 붙여 놓았는데 자식을 낳는다고 하니까 누가 비웃었습니까? 여자주인 당사자가 지 자식을 비웃지요. 그러면 이삭 낳는데 대해서 여자주인이 어떤 기여를 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조금도 한 게 없지요. 내가 예수 믿습니다. 해놓고 예수님께서 죽었다 하니까 왜 죽습니까? 하는 소리죠.
그러면 예수 믿습니다. 해놓고 예수님 죽으니까 그러면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내가 기여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기여 안 했어요. 우리는 죽은 예수, 망한 예수는 싫어요. 나 잘되라는 예수만 찾아다녔어요. 그럼에도 구원받았어요. 이거는 뭐냐? 모든 몫은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구원한 겁니다. 결국 우리는 빼도 박도 못해요. 원하든 원치 않던 우리는 언약 안에서 주께서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증거로 살아가는 겁니다.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내가 그와 언약을 세우리니” 어, 지금까지 언약을 누구하고 세운다 했습니까? 아브라함하고 언약을 세운다 하는데 여기 와서는 언약은 누구와 세웁니까? 이삭과 세우지요.
자, 여기 한번 봅시다. 여러분 조금만 더 해봅시다. 여러분 피곤한 줄 아는데 조금만 더 참읍시다. 머리를 집중해야 돼요. 아브라함하고 언약을 맺었다 이 말이죠. 아브라함은 생각하기를 자기는 언약 안에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언약 안에 내가 들어있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언약 안에 아브라함 들어있다. 아브라함 언약 안에서 이삭이 나왔다 이래 보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수정시킵니다. 아브라함 언약 안에서 이삭이 나온 게 아니고, 이삭 언약 안에서 아브라함 언약이 나왔다 이래 봐라 이 말이죠. 이것은 왜 중요하냐 하면, 나중에 새 언약 안에서 새 언약을 증거하기 위해서 옛날에 아브라함을 한 거예요. 엘리야도 모세도 변화산에서 예수님 만나서 이야기했잖아요.
마찬가지로 예수 믿는다 하는 것은 앞당겨서 자기의 성령을 미리 보여줬어. 엘리야나 모세에게. 나중 올 자기를 증거케 하는 겁니다. 항상 완료는 새 언약에 있어요. 다 이루었다.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로 원한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어요. 십자가를 보여줘서 하는데
이 논리로 보면, 이삭으로 하여금 아까 아브라함의 공로는 없습니다. 개입해서 끄트머리에서 나왔습니다. 이삭이 태어난 것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 사람과 언약을 맺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이 누굴 덕을 보느냐 하면, 자기와 상관없이 자기와 노력 없이 얻었던 그 사람에 의해서 자기가 산다. 라는 이 관계를 로마서 4장에서 이걸 가지고 뭐냐 하면, 이걸 가지고 두 자로 아브라함은 하나님 뜻을 믿었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예수 믿는다는 의미가 뭡니까? 내가 믿어줬으니까 내가 구원받잖아. 이건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내가 믿도록 하셨다. 라는 것이 믿어질 때 이게 믿음입니다. 도저히 안 믿는 나, 도저히 때려죽여도 안 믿는 나, 예수를 믿다니 내 주먹을 믿는다. 이럴 수밖에 없는 나를 보이지 않는 주님께서 자기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나를 믿게 했다. 라는 식으로 예수를 믿을 때 그게 진짜 모든 공로를 주께 돌리는 주님만 자랑하는 신앙인입니다.
이거요 일반교인들은 혹시 믿는데 목사들은 잘 안 믿어요. 내가 얼마나 개척교회 고생했는데. 우리 아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새벽기도 아무도 안 나올 때 나하고 우리 마누라만 나와서 새벽기도해서 부흥했다. 이 이야기를 흔하게 듣습니다. 새벽기도한 건 사실이지만 그게 결국은 뭐냐? 그게 죄였다는 고백으로써 나와야 되죠.
여러분, 제 아내하고 저 새벽기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십자가 앞에 그것도 죄였습니다. 라고 할 때 교인들은 아, 십자가 때문에 구원받았구나. 이걸 증거할 수 있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목사님들 새벽기도 나와야 돼요. 죄가 관영해야 되니까. 죄는 계속 관영해야 되니까.
그렇다면 문제 나갑니다. 그렇다면 목사님, 그럼 야곱은 어떻게 됩니까? 똑같지요. 이삭으로 하여금 실수하게 만들어서 이삭은 누굴 좋아하느냐 하면, 에서를 좋아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에서 제쳐 놓고 누굴 좋아합니까? 이삭이 별로 안 좋아하는 야곱을 따로 해서 언약을 누구하고 맺어요? 야곱과 언약을 맺어서 이삭이 야곱에게 복을 준 게 아니고, 야곱의 하나님으로부터 이삭이 나왔다는 것을 이삭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겁니다.
이로써 하나님은 계속해서 유도하지요. 어디로? 계속해서 그 마지막 때. 하나님이 직접 오셔서 직접 언약을 완성할 때가 되매 아들을 보내신 그 보내신 아들에게 모든 것을 다 몰아줘서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되도록 그걸 예수 믿음으로 구원되도록 자기 행함이 아니고. 그것으로 계속 몰아가는 식으로 구약 전체가 쭉 나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은 누굴 증거하는 것이다? 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다.
여기 인간은 열심히 행해요. 행하지만 그것은 계속 제거당할 행함이에요. 계속 배제될 행함입니다. 그래서 이걸 우리는 알지만 이삭도 몰랐고 아브라함도 모르지요. 나중에 이삭을 바칠 때 알지요. 이삭 니 때문에 내가 산다는 것을 모리아 산에 갖다 바칠 때 비로소 알고, 그전까지는 사실 알았지만 뚜렷한 행동으로 나타나진 않았습니다. 하여튼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걸 그림 다시 그리면, 지금 지표면에 이삭하고 아브라함 있지만 새 언약은 저 깊숙한 곳에 있기 때문에 언약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언약이 하나씩 진척될 때마다 점점 더 인간의 행함보다도 십자가에 가까이 가니까 예수님의 공로 쪽으로 언약이 더 확대 되가는 거예요
왕이 달라할 때 왕 줘도 왕이 배반하고. 모든 것, 하여튼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차단하고 예수님께서 홀로 하신 그 덕분으로 그 덕을 입어서 너희들이 구원받았다는 쪽으로 계속 나가는 겁니다.
2분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피곤하시겠습니까? 참 죄 짓기도 힘들어요. 성경공부라는 죄를 지어야 되니까. 죄가 관영하라고 주께서 인도하시니까.
23절부터 보면, 아브라함과 모든 사람들이 다 양피를 베었지요. 양피 벤 것 다시 한번 설명 드리면, 남자의 생식기를 흔적을 왜 내느냐? 그것은 생산이란 자체를 할례란 의미가 인간의 혈통으로 난 것과는 상관없이 그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구원은 된다. 네가 구원받은 것은 너의 혈통과 무관한 것이다. 오히려 단절돼야 된다.
그래서 사라가 몸이 죽어서 아기를 못 낳는 상태를 만들어 놓고 만약에 아기가 태어나거든 그것은 너의 원했던 바도 아니고, 니 속에 이미 잠입했던 개입했던 침입했던 할례언약 덕분으로 이삭이 태어난 줄 알아라. 그러니까 언약은 언약 때문에 니가 산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그런 식으로 모든 사건들이 몰아가는 겁니다.
그걸 여러분들에게 경험하면, 분명히 내가 이만큼 헌신했기 때문에 이만큼 심방했기 때문에 다음 주 그 사람 교회 나올 거다. 근데 보니 교회 안 나왔어. 그래서 에이, 때려 쳐 버려라. 구원하는 것은 하나님 마음대로다. 내 마음대로 안 된다. 했더니만 두 달 뒤에 나왔어. 붙들려고 심방 갔더니 또 안 나왔어. 에이, 치워버려라. 하니 또 나왔어. 완전히 숨바꼭질 하는 거예요.
그렇게 작용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하나님이 일하시는 도화지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화지다. 목회성공 안 해도 구원받는다는 것을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돼요.
18장 봅시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참, 이게 어려워요. 여호와께서 나타나셨지요. 그런데 보니까 누가 봐도 사람 셋이 나타났지요. 그래서 신학자들은 헷갈리는 거예요. 여호와 나타난 거야. 천사 세 명이야. 확실하게 해, 확실히. 여호와 한 분에 수행자, 보디가드 두 명이야. 뭐 어떻게 된 거야. 어떤 사람은 삼위일체가 성부, 성자, 성령이 다 나타난 거예요.
여기에 초점은 삼위일체에 초점이 있는 게 아니고, 언약의 완성자는 수행자, 작업자는 일꾼이 따로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세 명의 천사가 나타난 것은 지금 사라의 태가, 이것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사라의 태가 죽었잖아요. 죽었다 이 말이죠. 죽었으면 자, 사라의 태가 죽었습니다. 그럼 사라의 태가 지표면을 뚫고 나오면 제일 끝에 뭐와 만납니까? 십자가와 만나지요. 새 언약. 십자가에 누가 죽었지요. 사라의 태가 죽었다 하는 것은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죽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십자가에서 죽은 우리가 어떻게 삽니까? 그거는 예수님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살잖아요. 그러면 예수님 부활하심은 어디서 만납니까? 사라 앞에 등장한 여호와와 해후하죠. 없는 애가 이삭이란 이름으로 태어났다는 말은 미리 앞당겨 본 십자가와 부활이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천사 세 명이 죽은 태를 살리겠지요. 죽은 태를 살려서 아기가 태어나게 한다니까. 그죠?
죽은 태를 살렸다는 증거가 이삭이란 아기가 태어났는데 이 아기는 인간의 혈통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약속에 뭐에 의해서? 약속에 의해서 태어났다. 그럼 이삭 안에 뜯어보면 뭐가 들어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담겨 있어요.
그렇다면 이 본문은 뭐냐 하면, 아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하고 이삭이 약속을 하기는 하지만 결국 그 약속을 이루는 당사자, 주체는 누구다? 약속 받은 우리가 아니고, 누구냐 말이죠. 우리를 그냥 사용해서 매개물로 사용해서 약속은 누가 한다? 여호와 쪽에서 하시는 거예요. 천사 세 명은 여호와께서 하신다를 보여주는 본부 직원들이죠. 파견된 직원들.
지점에서 못 하니까 본점에서 본부에서 파견시킨 군인들이에요. 그러니까 이 주자들은 하나하나 누구 명 따라? 여호와 명 따라 하는 거예요. 아브라함도 그렇게 생각했고 우린 그렇게 생각해야 됩니다. 삼위일체 다 동원시킬 수는 없어요. 그냥 아, 천사가 왔는데 세 명다 자기 이름이 아니고, 여호와 이름으로 일하시는 분이구나.
그러면 끝으로 그럼 목사님, 궁금합니다. 우리가 못하고 여호와께서 천사를 통해서 한다 하는데 어떻게 하십니까? 여기에 이 대리점에 보니까 에어컨이 없는데 에어컨 할 능력 있습니까? 돈 있습니까? 없습니다. 기술 있어요? 없습니다. 그거 우리 본부에서 해 드릴게요. 하고 본부에서 와서 유니폼 입고 와서 에어컨 들고 와서, 가만있으세요. 우리가 할 테니까. 하고 전기 코드 꼽고 다 해서 손 털고 에어컨 설치. 저, 사장님. 에어컨 설치했습니다. 대리점에. 그럼 우리는 어어, 저거 에어컨 설치됐구나. 되잖아요.
마찬가지로 천사 세 명이 일을 할 때 어떻게 합니까? 해답은? 우리를 죽은 자로 간주합니다. 우리를 수갑 채워버려요.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 말씀 들으면 뭘 하려고 난리라. 뭐 하고 싶어 난리라. 해 놓고 생색내. 그런데 우리는 기도하고 헌금하는데 하는 쪽마다 성과가 없어. 헌금 했으면 백배나 들어와야 되는데 해 놓고 백배나 날아가 버리고. 기도 해놓고 기도 응답이 있어야 되는데 보니까 응답은커녕 애 성적 내려가고. 우리는 하는 쪽쪽 일을 저질러 놔요. 그런데 나중에 보면 일 돼. 일 되게 돼있어.
무슨 말이냐 하면, 에어컨 한다 하니까 우리가 선풍기 갖다 놓고 에어컨 대용으로 에어컨 그림 그려놓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본점에서 와서 에어컨 뜯어내고, 우리 한 거 다 치우고, 그림 그린 거 불태워 버리고, 우리 저질러 놓은 거 치워 다 해놓고 에어컨 설치해 놔 버렸다. 그리고 하는 말이 누가 했어요? 위에서 했어요. 아멘. 가버린 거예요. 우리가 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의미 없게 만드는 그 작업을 지금도 천사는 부지런 떨면서 하고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열심히 합니다. 말씀 들으면 실행에 옮깁니다. 실천합니다. 우쭐댑니다. 우리가 남보다 더 우수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때그때마다 우리로 하여금 실망과 낙심하고 실패자 같은 느낌을 들게 만들어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공로가 오직 주님에게만 있음을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이로써 이미 구원받은 자요 하나님의 개입 속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마치겠습니다.
그리고 다음달 없습니다. 없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