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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대구 7월 16일 성화론의 허구성 2강의[신학]

대구 7월 16일 성화론의 허구성 2

이름 : 우리교회(IP:124.59.87.70)

대구 7월 16일 강의

첨부파일 : 성화론의 허구성.hwp (81.5K), Down:9

우리교회(IP:220.♡.176.141)

08-03-19 17:33

대구070716성화론의허구성2

07 대구강의 10 - 성화론의 허구성2
07,07,16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하나님의 성화론과 인간의 성화론 !!

이제 시작을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성화론을 하면서 두 가지로 나누었는데, 하나님께서 개입하는 성화론과 개입하지 않는 성화론으로 말이다. 흔히 말하는 기존의 성화론에서는 하나님의 개입을 인정하지 않는데,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성화론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인간의 성화론이 아니라 말이다.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인간 성화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미 우리는 구원을 받았으니 하나님은 손을 뗐고, 그러니 인간들이 해야할 몫만 남아있다는 것이다. 즉 거듭남까지는 하나님이 하셨고, 그 다음부터는 그 수레는 자기가 끌고 골인지점까지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인간이 주도권을 가지게 되면, 인간은 자기를 피해자로 보는데, 이것이 욥기의 주제이기도 한데, 인간은 자기를 피해자로 보는 의식이 강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우주에 대해서 뭔가 고통을 느끼는데, 그것이 창세기 3장인데, 이 우주만물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 뭔가 노력은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성화론에 빗대어서 이야기하자면 자기가 거룩해지려고 애를 쓴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노력을 해도 잘 안 되니 문제인데, 하지만 자기가 노력한 가치만큼은 인정을 받아야만 하고 말이다. 그러니 그 결과에 대해서는 "내 탓이 아닙니다" 라고 정리하고 싶다는 것이다.

◈ 인간은 자기를 피해자로 !!

결론적으로 말해서, 그렇게 애를 쓰는데도 결과가 제대로 안 나온다면 어떻게 되는가? 피해에 대한 보상은 받아야 하는데, 자기가 피해를 보니 피해자가 아니냐는 말이다. 사실상 인간은 매일같이 이런 마음가짐으로서 살아가는데, 자기를 피해자로 간주해서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를 피해자로 보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까, 하나님이 개입할 때는 반드시 십자가를 앞장세운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그들에게 추상적인 존재인데, 하지만 하나님이 개입할 때, 모세언약과 같은 경우에는 '고엘'로 개입한다는 것이다.

◈ '고엘사상'에 대해서 !!

이 '고엘사상'에 대해서 좀 알아야 하는데, 고엘은 '구속자' 라는 뜻인데, 지금 모세언약에서 '고엘사상'을 공부해보면, '가난한 자'가 이 고엘에서 나왔는데, 문자적 의미는 '후견자' 이고 말이다. 더 포괄적 의미는 구속자이고 말이다. 좀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대신해서 복수해주는 자' 라는 의미이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힘이 없는 자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대신해서 나서서 그 억울한 자의 사연을 들어서 보상해주고 상대방을 공격해주는 자가 바로 '고엘' 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고엘에 있어서, 사람들이 취하는 방법은 자기가 당한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보복을 하는 것이고, 그래서 모세언약에 보면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이라고 해서 복수를 어느 정도까지는 인정해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한계를 넘어서면, 상대방에게 또다시 고엘을 요청하는 계기를 만들어버린다는 말이다. 상대측에서 "이거 너무 심한 것 아이가" 라고 해서 다시 복수를 벌이게 된다는 것이다.

◈ 정의 - 거룩함인가, 공평함인가?

아무튼 이렇게 구약에서 고엘사상, 즉 보복해주는 사상이 있다는 것은, 그것을 '정의' 라고 말하는데, 그 정의를 이 세상에서는 '거룩' 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공평' 이란 의미로서 사용하는데, 이 세상에는 거룩한 놈은 없으니 말이다. 하나님만 거룩하지 말이다. 다시 말해서, 고만고만한 인간끼리 공평하게 하면서 살아보자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급식을 할 때 그 기준이 무엇인가? 부잣집 아이라고 두 개를 더 주고 하면 정의가 깨어진다는 것이다. 가난하든 부자이든 빵을 하나씩 줄 때 그때 그 학급은 정의가 살아있다고 한다는 말이다. 즉 공평이 살아있다는 것인데, 이렇게 공평함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나타나는 인물이 '고엘' 이라는 것이다.

◈ 야고보서 5장 - 고엘은 심판주 !!

이제 고엘사상을 좀 알겠습니까? 그러니 고엘은 반드시 억울한 일이 발생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야고보서 5장에 나오는데, 품삯을 받지 못한 자가 마지막에 무엇을 기다리는고 하니, 자기는 품삯을 받으려고 하는데 문밖에 서 있는 사람은 '심판주' 라는 것이다. 즉 고엘이 개인적인 보디가드로 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게 심판주로 와서는, "글세, 니가 억울한 것은 아는데 너무 조급해하지 마라. 문 앞에 심판주로 와있으니 너무 염려하지 마라. 농부처럼 늦은 비와 이른 비를 기다려라. 내가 다시 온다고 하지 않더냐. 봐라, 공평한 자가 심판자로 오기 때문에 이 땅에서 당한 것을 가지고서 너무 억울하게 여기지 마라. 니가 당한 것을 내가 다 아니까 공평하게 해줄 게" 라고 말이다.

(약 5:6) 너희가 옳은 자를 정죄하였도다 또 죽였도다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약 5:7)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약 5:8)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약 5:9)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그러나 사실은 사람은 공평한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모세언약에서는 공평함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람들이 또 그런 것을 주장하지만, 그러나 사람은 공평한 사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편을 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율법에 보면 "가난한 자라고 해서 두둔하지 마라" 라는 것이 나오는데, 물론 이것을 가난한 사람이 들으면 섭섭해하겠지만, 하나님은 공평한 분이기에 가난하다고 해서 더 봐주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 그대는 정말 공평한 고엘을 원하는가?

그러면 왜 그렇게 하시는가? 점점 이야기가 더 어렵고 깊어지는데, 다시 정리하면, 하나님께서 개입할 때는 고엘로 개입을 하시는데, '후견자', '보복자', '복수자' 그리고 '구속자' 라는 의미로 말이다. 그런데 이것이 언제 감이 오는고 하니, 본인이 뭔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는 후견자가 등장하는데, 그때에 억울하다는 것은 무엇의 균형이 깨어졌는고 하니까, 공평의 균형이 깨어졌을 때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래서 억울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모세언약에 있어서 정의는 거룩이 아니라 공평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룩이라고 말해버리면, 그 어떤 인간도 거룩하지 못하기에 때문에 말이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 모든 인간은 다 깨어지고 보복을 당해야하니까 안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서 다 죽여버리면 이 사회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야 공평하니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공평을 요구한다는 것은 정의로움이, 진짜 공평함이 아니라, 공평하게 차별이 없는 상태에서 은혜를 내려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정의가 먹히지 않는 이유가, 사람들이 진짜 공평을 원해서 공평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따지고 보면 누구 입장인고 하니, 자기의 '이기주의', 즉 자기편에 서 달라는 것이다. 이런 이기주의가 공평보다 더 앞선다는 말이다.

그래서 목사가 설교를 할 때, 공평한 진리를 이야기해도 교인들이 졸고 있다든지 하면서 그것을 기피하는 이유는, 물론 공평한 것은 좋은데 그런 이야기가 자기에게 이익이 되지 않기 때문에 별로 듣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 목사님, 설교가 넘 식상해요 !!

그래서 종종 목사님들이 저에게 이야기하기를, "목사님, 성경말씀대로 설교를 했는데 교인들의 갈수록 식상하다는 느낌을 가지는 것 같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교인들이 그런 반응을 보이는데, 소위 복음을 안다고 하는 목사가 설교시간에 처음 한국교회를 비판할 때는 짜릿하게 여기다가, 얼마 가지 않아서 식상하고, 권태롭고, 지루하고, 그리고는 설교를 빨리 끝내달라는 강력한 요청이 마구 들어온다는 것이다. 교인들의 몸과 마음으로 말이다.

이러한 반응의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목사님의 말씀은 맞지만, 그러나 그것은 이미 6개월 전에 모두 뗀 것인데, 그러니 이제는 제게 이익이 되는 것을 좀 말씀해주세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공평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무슨 짓을 해도 "하나님은 내 편이다" 라는 것을 좀 설교해달라는 것이다. 그런 증거물을 함께 제시하면서 말이다.

이럴 때 복음을 전하는 목회자는 엄청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데, 만약에 그들의 요구조건에 부응하게 되면 그 교회는 주님의 교회가 아니고 사람의 교회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기존 교회의 문턱으로 내려가는 것이고, 이단교회로 말이다. 진리가 떠나고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교회가 되니까, 그런 목회자나 목회는 하나마나 한 것이 되고, 물론 교회도 있으나 마나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교회는 다녀도 지옥에 가고 안 다녀도 지옥에 가고 말이다.

◈ 목회자는 선지자의 외로움을 잊지 말아야 !!

바로 그런 순간에 목사는 선지자의 외로움을 잊어버리게 되는데, 즉 그리스도의 좁은 길로 가는 것을 말이다. 이 좁은 길의 특징이 찾는 이가 적다는 것인데, 넓은 길은 많은 사람들이 찾는데 있고 말이다. 주님께서 이런 것을 모르겠는가? 이 방면에는 도사인데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다 알면서도 그것을 피해가도록 우리를 성령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 살펴볼 것이 무엇인고 하니, 이 고엘이, 즉 후견자이고, 복수자이고, 구속자가 나중에 희생자로 바뀐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급작스럽게 바뀌는고 하니까, 후견자이고, 복수자이고, 구속자를 원했던 당사자가 공평을 말하는 것처럼 하지만, 사실은 공평이 아니라 자기편이 되어달라는 것이다. 마치 같은 기독교 팀끼리 축구를 할 때 전부가 자기편이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처럼 말이다. 자기편이 승리하도록 말이다.

◈ 미가 집안의 사설 제사장 !!

그렇다면 만약에 가짜 후견자 같으면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니 편이 되어줄게"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박영선 목사의 설교로 잘 알려진 사사기 17장에 나오는 장로인 '미가' 인데, 이런 미가집안의 여호와는 어떤 의미인가? 왜 레위소년을 하나 잡아서 자기 집안의 제사장으로 세우는가? 하나님의 뜻인가? 고엘인가? 정의인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 집안의 사설 축복자(?) 라는 말이다. 자기 집안을 개인적으로 좀 축복해달라는 것이다.

(삿 17:1)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더니

그러니 지금 한국교회와 너무나 똑같다는 것이다. 박영선 목사님이 이것을 잘 지적했는데, 여호와를 모셔다놓고 우상숭배를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니 껍데기만 여호와인지 그 속은 바알인 것이다. 그런데 그 뒤에 레위소년을 단 지파에서 납치를 하는데, "니가 한 집안의 제사장이 되는 것이 나은가? 아니면 한 지파의 제사장이 되는 것이 나은가?" 라고 말이다. 이런 시골보다는 큰물에서 놀아보라는 것이다. 그러니 미가집안에서 하는 말이, 그동안 레위 소년에게 들었던 밑천을 내어놓으라는 것이다. 그러자 이 깡패 같은 단지파가 "어디서 까부노" 라고 하니, 꼬랑지를 내리고 도망을 갔다는 말이다.

◈ 모세언약의 고엘은 결국 희생자 !!

이런 사건이 무엇을 보여주는고 하니, 레위지파는 하나님의 정의를 선포해주어야 하는데, 그런데 재정적인 보상을 해준다고 하니 그 미가집안에 붙어버리니까, 그렇게 되면 진짜 하나님은 도움을 요청한 그 사람에 의해서 버림받은 고엘이 되고 마는데, 그래서 이 고엘은 나중에 '희생자'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모세언약의 고엘사상인데, 백성들이 메시야를 찾아놓고서 그 메시야를 때려죽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엘사상의 변천과정은, 인간들이 자기 자신의 잘못을 제대로 몰랐던 그 죄가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하나 둘 끄집어 나올 때마다, 이 고엘의 안색이 변해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메시야라고 하는 것은, 백성들이 그 어떤 메시야를 원하든지 간에 피해 당사자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 과연 누가 피해자이고, 가해자인가?

그러므로 처음에 이 고엘사상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억울한 피해자로 보았는데, 이렇게 우리는 피해자로 시작하지만, 그러나 결국은 누가 피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되는가? 자칭 피해자라고 여기는 우리 인간들이 가해자가 되고, 우리를 도와주려고 오시는 그분이 인간들의 욕심으로 인해서 피해자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 고엘사상과 성화론 !!

그것이 바로 성화과정에서 그대로 나타나는데, 즉 인간은 성화가 되려고, 그렇게 바르게 살려고 하면 할수록 인간은 어떤 보상을 기대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보상에 제대로 되지 않을 때 인간은 자기를 피해자로 간주하게 되는데, 즉 자기는 열심히 성화가 되려고 그렇게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바쳐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책임을 져야한다고 요구하고 말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한(限)이 맺히게 되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는 매일같이 교회에 와서 그렇게 열심히 기도를 했는데, 그런데 그 기도가 응답되지 않으니 자기 자신을 그만 피해자로 본다는 것이다. 자기는 할 일을 다 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말도 안 되는 피해자가 등장하니, 진짜 하나님의 하신 모든 축복과 영생과 예수님의 보혈의 피가 전부가 다 쓸데없는 말장난으로 전락하면서, "그 피 말고 돈을 달란 말이야, 돈!" 이라고 설교가 나갈 때, 목사가 그 문턱을 넘어버리면 멸망으로 가는 넓은 길이 나온다는 것이다. 양무리를 그곳으로 몰고 가는 거짓 선지자가 되고 말이다.

◈ 열매로 알리라 - 생명인가, 멸망인가?

그래서 예수님은 좁은 문을 이야기하고 난 다음에 거짓 선지자에 대해서 언급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 사람의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안다는 것인데, 그러니 열매는 바로 좁은 길로 제대로 인도하지 않는 나무이고, 그러한 나무는 찍혀서 멸망이란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은 "생명인가, 멸망인가?" 라는 양단의 결단을 이야기하는데, 그러니 거짓 선지자는 사람들을 좋게 해서 넓은 길로 인도하고 말이다. 기적을 행하면서 말이다.

(마 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마 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마 7: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마 7:16)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마 7: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마 7: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마 7: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니라
(마 7:20)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어제 오전예배시간에도 그런 설교했지만, 이러한 기적을 누가 판단하는고 하니까, 한 맺힌 사람들이 판단한다는 것이다. 즉 "역시 하나님은 살아있어. 내 소원을 들어주니 말이야. 역시 내 기도는 효과가 있단 말이야" 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자기가 기적을 임의적으로 선택하게 되면, 진짜 제대로 된 기적은 2차로, 3차로 자꾸 자꾸 밀리게 된다는 것이다.

◈ 진짜 기적은, 자기 마음을 낮추는 것 !!

깨놓고 솔직히 말해서, 진짜 하나님의 기적은 무엇인고 하니까, "내 마음을 낮추는 것", 바로 그것이 기적이라는 말이다. 새로 시작하는 것 말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에게 있어서 진정한 행복인데, 새로 시작하는 것만큼 큰 행복이 없다는 것이다. "이 정도면 어느 정도 되었다" 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것은 맛이 간 인간이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한국축구를 보면 원래 상대방인 바레인이 지도록 되어있는데, 우쭐거리다가 한국이 그만 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은 그것을 희망으로 보고 새로 시작하면 되는데, 우리는 아시아에서 50위 정도를 한다고 마음을 먹고서 한 발짝이라도 더 뛰면 다 되는데, 그런데 아시아에서 맹주라고 폼을 잡다가는 종이 호랑이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이다.

◈ 예수님이 피해자이고, 인간들이 가해자 !!

인간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십자가에서 매일같이 새로 시작하면 되는데, "십자가에서 저는 죄인입니다. 이미 망한 놈입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되면 누가 피해자이고 가해자인고 하니, 예수님이 피해자이고 우리 인간들이 가해자라는 것이다. 만약 그것을 안다면, 그 어떤 사건이 벌어져도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그 어떤 경우에라도 감사가 나오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는 참된 성도의 삶이란 말이다. 만약에 성화가 있다고 한다면 이것이 진정한 성화라는 것이다. 물론 이런 감사가 터져 나오려면, 철저하게 주님과 십자가에서 미팅(?)이 이루어져야 하고 말이다.

◈ 지표면에서 인간들끼리 왜 두리번거리는가?

제가 지난번에 울산과 서울강의를 하면서 그림을 그린 것이 있는데, 여기서 다시 그려보면, 이 둥근 것이 지구라면 이 지구의 지표면에 인간들이 살고 있는데, 이 지표면을 뚫으면 지구 껍데기인 지각이 나오고, 그 다음에 맨틀이 있고, 제일 중앙에 무거운 핵이 있는데, 이 핵에서 열기가 올라와서 맨틀을 통하고 지각을 뚫고 마그마가 나오면 화산폭발이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지구 지표면에 사는 것을 두고, 자기들끼리 두리번두리번 거리면서 산다고 하는데, 소위 이것이 철학이고 과학이고, 윤리이고 사회학이라고 하는데, 인간들끼리 모여서 두리번거리면서 어느 것이 최선의 길인가를 찾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형태는 이미 저주받기로 되어있고 구원받기로 되어있는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고, 인간들끼리 어떤 아이디어를 끄집어내면 최상의 국가가 된다고, 즉 최상의 성화가 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 요한복음과 지구 핵 !!

그런데 주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성령을 통해서 깨어버리는데, 그렇게 되면 결국 십자가의 의미와 만나게 되는데, 그런데 이 십자가는 두 사람 사이에 예수님을 가운데 놓고 있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는 의도적으로 이렇게 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둘 다 강도이니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자들인데, 이 중간에 있는 예수님 때문에 한쪽은 일방적으로 구원을 받고, 다른 한쪽은 일방적으로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핵이라고 여기고서, 이 핵을 그대로 엘리베이터에 실어서 지표면으로 가지고 올라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지표면에서 인간들이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소용없고, 운명은 이미 예수님 때문에 결정이 났는데, 즉 성령님이 이 핵을, 즉 십자가 사건을 그대로 지표면에 터트려 버리면, 이유 없이 "나는 왜 용서를 받았지?" 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나는 잘났는데 왜 지옥에 보내지" 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 자기 인생에서 해방되는 축복이 !!

아무튼 인간들은 두리번 두리번거리는데, 그 내막을 모르고서 말이다. 그러면 성령께서는 그 말씀을 통해서 깨어지게 하는데, 그렇게 깨어지는 그 방향성을 가지고 '축복'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만나게 해주니 축복이라는 말이다. "아하, 내 운명은 이미 결정이 났구나" 라고 아는 것으로, "더 이상 나를 위해서 내가 살 필요가 없구나" 라고 하는 그 편안함,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질 필요가 없구나" 라고 하는 행복감 말이다.

그렇다면 왜 사는가? 그것은 바로 '감사' 라는 것이다. 그럼 무엇을 보고 감사하는가? 자기가 기도한 것이 아니고, 그 '핵'을 바라보고서 감사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고 하니까, 십자가의 양쪽에 있는 강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죄인 중에 괴수가 되어 있어야만, 예수님의 은혜가 더욱더 드러난다는 것이다.

◈ 그 그림이 보고 싶다 !!

제가 그런 것이지만, 사실 이 그림 하나가 끝내주는 그림인데, 이 그림은 제가 책에서 보고 배운 것이 아니고, 이런 그림이 있는 책은 없다는 것이다. 십자가를 위하기 위해서 그냥 한번 생각해본 그림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고 '감사합니다' 라고 하고 도망치면 안 되고 교회에 와서 자꾸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목사가 그렇게 말씀과 십자가를 연관시켜주게 되면, 진짜 구원을 받은 사람은 평소에 감사하지 못한 것도 감사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성도에는 평소에 잘 몰랐던 행복이 무엇이지를, 그야말로 참된 행복을 누리게 되는 평안함을 제공하게 된다는 것이다. 너무 평안해서 가끔 잠을 자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더 이상 자기에게 스스로 부담을 느끼지 않고, 이제 자기는 가해자라고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만 그 생각이 바뀌어서 피해자라고 여겨버리면, 복수심에 불타서 본인이 살아가는 것 자체가 엄청나게 피곤해진다는 말이다.

◈ 인생의 최대 훼방꾼은 '나' 자신 !!

어제 설교시간에 말하기를, 자기 인생을 가장 방해하는 자가 누구라고 했는고 하니, 집사님 제가 누구라고 했지요?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다. 자기가 자기 인생의 가장 큰 훼방꾼이라는 말이다. 남이 아닌 자기 욕심이 자기를 힘들게 한다는 것이다. 한국축구 실력이 뻔한데 너무 기대를 많이 하니까 문제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박세리도 최근에 헤매다가 우승하니까, 사람들은 잘한다고 하면서 희망을 준다고 좋아한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단순히 말장난이나 인간의 게임수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원래 십자가의 진리가 그렇다는 말이다. 우리가 이 진리에 어긋나버렸으니, 그렇게 이탈했으니 문제이라는 것이다. 진리는 이것 하나밖에 없는데, 매일같이 말씀에 얻어맞아서 불평하는 것도 감사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는 것이 제대로 된 원리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여기서 자아가 말씀으로 깨어지게 되는데, 맨틀을 지나서 핵까지 이르러 깨지게 만드는 작업이 되고, 그렇게 해서 성도의 남은 생애가 깨어지고 박살난다는 것이다.

◈ Oh, Secret Garden !!

소공자와 소공녀로 유명한 19세기 미국작가 버넷의 '시크릿 가든(Secret Garden, 비밀의 화원)' 이란 유명한 소설이 있는데, 자기만의 은밀한 폐쇄된 비밀공간인데, 그런데 왜 정원인고 하니, 거기에 자기만 즐기기 위해서 온갖 꽃들을 다 심어놓고 새들도 있는 연못을 만든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밀정원은 모든 인간들이 다 가지고 있는데, 다른 것은 사람들에게 다 허용하지만, 이 가든의 입구만큼은 봉쇄한다는 것이다. 오직 자기만의 공간 말이다. (시크릿 가든은 피자이름인데, 쩝쩝)

그러나 바로 이것이 와장창 박살나야하는데, 물론 남의 그런 비밀공간을 자기가 박살낼 필요까지는 없고, 자기의 그런 공간이 주님에게 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공간에 다른 사람은 몰라도 주님은 입장을 하셔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깨지지 않으면 정말 신앙생활이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 욥기 - 신앙이 아닌 것은 무엇인가?

이번 수련회에서 욥기를 하는데, 욥기를 어떻게 해석을 하려는고 하니, 그것을 미리 조금 알려드리면, "그것이 신앙인가?" 라고 물으면서, 즉 "신앙생활을 꼭 해야만 하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즉 신앙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 신앙이 아닌 것이 무엇인지, 낱낱이 그 증빙자료를 모두 내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의도적으로 그것을 모두 가지고 와야 하는데, 그렇게 해서 그런 것을 모두 박살을 내야하는데, 뭇매를, 마구 두들겨 팬다는 말이다.

그것을 욥의 세 친구가 도와주는데, "신앙 같은 소리하고 있네" 라고 하면서, 의도적으로 스스로 신앙이 있다고 하는 자들을 다 불러모아서, "그것은 신앙이 아니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사단까지라도 불러서 말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사단을 불러서 저와 여러분을 치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욥기이고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여기서 도망을 치면 안 되는데, 그렇게 도망을 치면 시크릿 가든이 되어버리는데, 자기가 자기 정원을 꾸며서 주님에게 심판을 피해보겠다는 것으로, 즉 욥기로부터 검정을 받지 않겠다는 것인데, 자기만의 비밀공간으로서 말이다. 이것은 마치 북핵처럼 사찰을 하지 못하겠다는 것인데, 즉 미국이든 어디든 그 누구라도 검정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어버리면 안 되는데, 진짜로 자신이 있다고 한다면, 신앙이 아니라고 하는 모든 것들을 다 불러모아서, 그렇게 해서 모두가 다 때리도록 자기를 내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도마 위의 생선처럼, 그렇게 난도질을 당해야 한다는 말이다.

◈ 욥은, 도마 위의 생선신세 !!

바로 욥이 그렇게 난도질을 당해서, 재산을 빼앗기고, 몸에 악창이 나고, 자식들이 다 죽고, 마누라는 저주하고 도망을 가버리고 말이다. 친구들은 위로하려고 와서는 나중에는 원수가 되어버리고 말이다. 즉 친구가, 위로자가 위로는커녕 적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도도 마찬가지인데, 친구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친구가 적이 되어서 도리어 다시 공격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도라면 이 욥이 당한 고난을 필수코스로 거쳐야만 하는데, 비로소 그렇게 욥처럼 당할 때, 그때 결국 자기 속에 남는 것은 '나' 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 인생은 친구나 마누라가 문제가 아니고, 사단도 문제가 아니고, 결국은 자기가 바로 문제라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점을 하나님께서 알려주신다는 말이다.

그 문제는 이번 우리교회 여름수련회 때 '하나님의 창조'를 할 때 좀 강의하고 싶은데, 즉 창조주와 창조물이 다시 만나는 기회를 만들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것을 한번 이야기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사실 욥기가 무척 어려운데, 그래서 대충하고 넘어가는데, 이번에 깊이 다루어 볼 기회를 가지겠다는 말이다.

이제 교재의 '본론' 부분을 살펴보겠는데, 지금까지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고엘을 이야기했는데, 그 고엘이 우리 때문에 피해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와 그 지구 핵이 있는 그림을 기억하고 교재를 살펴보자는 말이다.

** 십계명 제 1계명에 보면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라고 나온다. 이는 이 인간 세계에서는 하나의 신만 유통하고 있지 않음을 이미 참 하나님께서 알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참 하나님과 거짓 하나님과의 차이를 아는 안목이 갖추지 아니한 사람들에게 십계명 1 계명조차도 무의미해진다.

◈ 왜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인가?

여기에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라고 되어있는데, 그런데 이것을 바꾸어서 "나만을 섬겨라" 라고 하면 곤란해진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라고 하면 신이 두 종류가 나오는데, '여호와'와 다른 신이 말이다. 그런데 "나만을 섬겨라" 라고 하면, 다른 신이 개입하지 않게 되는데, 자기가 여호와를 판단해서 섬기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신을 섬겨라" 라고 하면, 우리는 "예, 알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섬기면 되는데, 그렇게 되면 신을 섬겨야 될 주체자인 '나'는 부정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자기가 없으면 도대체 누가 신을 섬기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라고 하면서, 그렇게 신을 두 가지로 들이대어 버리면,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어떤 질문을 하게 되는고 하니까, "그렇다면 다른 신은 무엇인가?" 라고 말이다.

◈ 여호와와 다른 신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다시 말해서, 여호와와 다른 신의 차이점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말이다. 바로 그렇게 다른 신과의 차이점을 분리하는 가운데서, 평소에 자기가 품고있던 신 관념이 개방되면서 그만 노출되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말씀에 의해서 말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요?

예를 들어서, 어떤 노처녀에게 맞선을 보라고 하는데, 선을 보지 않으면 얻어맞는다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 "예, 알겠습니다" 라고 하면 되는데, 그런데 남자를 두 명으로 해서 "니가 알아서 골라봐라" 라고 하면, 그때부터는 평소에 "나는 아버지가 정해주는 데로 갑니다" 라고 하다가, "저에게도 남자를 보는 눈이, 저도 모르게 어느 정도는 자리잡고 있었군요" 라고 하면서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선택의 기회를 주니 말이다.

그러니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라고 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정체를 끄집어내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율법의 기능인데,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죄로 까밝히도록 한다는 것이다. 갈라디아서에 의하면 말이다.

◈ 율법은 일종의 보조계약 !!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줄 때, 즉 계약을 줄 때 사실은 그 이전에 이미 계약이 있었는데, 성부와 성자 사이에 맺은 계약이 말이다. 그러니 율법은 보조계약인데, 그것을 백성들이 눈치를 채지 못했는데, "아하, 이것을 지키면 구원을 받는구나" 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 십계명을 줄 때, 원래 숨어있는 진짜 계약을 하는 그 시발점으로서 우리의 죄로부터 출발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미쳐 몰랐다는 말이다.

◈ 법이 아닌 사랑으로 !!

그래서 갈라디아서 5장 1절에 보면, 다시는 율법에 매이지 않는다고 하는데, 즉 이제는 율법에서 분리시켜서 율법에 관계가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놓았다는 것이다. 생명과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을 대체했다는 말이다. 그렇게 율법과 상관이 없는, 죄와 상관없는 사람으로 말이다. 그렇게 되려면 항상 죄와 상관이 없는 사람들 속에 있어야 하는데, 자기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으니 말이다. 보조적인 계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법이 아닌 '사랑' 이라고 하고 말이다.

(갈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참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안목을 갖지 않는 인간에게는, 이 십계명의 1계명을 평생 들여다본다고 할지라도 참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에게는 영원히 '다른 신'들만 배회하다가 평생을 끝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와 '다른 신'을 구별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식으로 구별하면 되는가? 그것은 그때그때 다르다는 것이다. "야, 참신이다" 라고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면 다른 신이고 말이다. 예를 들어서, 진짜 신은 "내가 기도만 하면 낫는 신이다" 라고 했는데, 그런데 나중에 기도를 하는데 그만 감기가 낫지 않는다는 말이다.

◈ 우리 내부에 이미 자리를 잡고 있는 다른 신 !!

그러면 자기는 무엇인가? 다른 신을 섬긴 것인데, 그래서 다른 신이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내부에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사단이지만 말이다. 그렇게 마귀가 있음을 깨닫게 하는 방식으로 계속해서 율법은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여기에 성화론 이야기를 좀더 하면 이러한데, 자기는 "이만하면 되었겠지" 라고 했는데, 다른 계기가 오니까, "아하, 그것은 착한 일이 아니었구나. 그때는 그것이 착한 줄로 알았는데, 이런 깊이도 전혀 모르면서 까불었구나" 라고 하는데, 그런데 더욱 더 깊이 들어가면, "아하, 그것마저도 착하다고 이야기할 수 없구나. 그것은 그냥 내 성깔이구나" 라고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러한 사람은 가면 갈수록 자기는 점점 더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게 되는데, 그러니 그런 사람은 항상 그 범위만큼 모든 것을 감사하게 되고, 또한 은혜로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은혜의 왕노릇' 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은혜가 왕 노릇을 하면 할수록 우리의 죄가 더욱더 풍성해진다는 것이다.

◈ 여러분, 죄가 많아야 됩니다 ??

그런데 이것을 제가 반대로 이야기하니까 사람들이 알아듣지를 못하는데, "죄가 많아야 됩니다" 라고 말이다. 사람들은 "그렇다면 내가 죄를 더 지으면 되겠네" 라고 로마서 5장을 되풀이하는데, 즉 죄를 더 지으면 은혜를 더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반대로 이야기한 것인데, 이미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그런 죄와는 더 이상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했는데 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죄가 적어야만 성화가 되는 줄로만 아니 그런 반응이 나온다는 것이다.

(롬 5: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롬 5: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 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롬 5: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로마서 5장에서 '아담 안'이라고 묘사된 경우가 이런 경우에 해당되는데, '아담 안'에 놓여 있다는 말은 곧 '죄 아래' 놓여있다는 말이고, 죄 아래 놓여 있다는 말은, 참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죄 아래 놓여 있는 인간이 아무리 부지런히 성경 말씀을 묵상해도 거기서 그 어떤 진리는 도출될 수 없다.

◈ 우리는 어떤 식으로 다른 신을 만드는가?

우리는 이렇게 죄 아래에 놓여있기에 하나님을 알 수 없는데,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가 무엇인가? 그 다른 신이 우리 속에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내가 다른 신을 만들 때, 어떤 식으로 만들어냅니까?" 라고 하는 것이 그 뒤에 계속해서 나온다는 것이다. "아,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라고 하는데 말이다.

우리 장로님이 지난번에 수고하신 제2동부교회 교인들이 어떤 신을 믿는지 모르겠는데, 어저께 장로님이 그 교회에서 복음을 전하셨는데,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 아직은 소식이 없는데 말이다. 도대체 어떤 하나님을 믿는지 말이다. 그런데 그들이 주장하기를, 자기들은 참된 신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참으로 이상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복음은 아닌데도 참 신이 있다고 하는 것이 말이다. 그러니 그렇게 복음과 관계가 없는데 참된 신이라고 하는 우김, 그렇게 우기는 속성, 즉 그러한 마음가짐은 제대로 분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또한 우리의 모습이기에 말이다.

◈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이 과연 하나님인가?

제가 여기서 한번 물어보겠는데, 사도바울이 전한 것이 복음인가? 아니면 하나님인가? 하나님이 아닌 분명한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것조차도 모르는데, 그들은 당연히 사도바울이 하나님을 전한 줄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들 기준에 맞추어서 말이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하나님을 열심히 믿다가 예수님을 핍박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여호와를 전하는 것이 예수님 핍박이다" 라고 하는 것이 우리내부에, 즉 아담의 내부에 공통적으로 담겨있다는 것을 기존의 교인들은 모른다는 것이다. "목사님, 저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도 믿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복음은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끝까지 우기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다. 물론 말로는 예수님도 믿는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어디까지니 입에 발린 소리이고,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복음을 배척하니 말이다.

◈ 만약에 평양부흥운동집회에 사도바울이 나타난다면?

얼마 전에 평양부흥운동기념집회인가 뭔가 있었는데, 소위 1907년 평양부흥운동을 다시 살려야 한다면서 말이다. 그렇게 보여서 회개운동을 벌이고 했는데, 저는 그것을 보면서 참 기가 찬 것이, "만약에 그 자리에 십자가의 복음을 전해버리면 어떻게 될까?" 라고 생각해보니, 아마도 수십 명도 남지 않고 다 자리를 떠난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복음이 아닌 하나님을 전하니, 울고불고 난리를 피우지 말이다.

◈ 사랑의 교회에서 복음을 전하면?

서울에 있는 사랑의 교회에 가서 십자가 복음을 전하면 몇 명이나 그 자리에 남겠는가? 10명이 되겠는가? 그러니 소돔과 고모라가 아닌가? "저는 부족합니다" 라고 해야, 그렇게 해야만 비로소 자리에 있지 말이다. 그런 자기의 부족함을 말하는 그런 자기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데 말이다. 하지만 복음을 전하면 상황은 전혀 달라진다는 것이다.

어떤 목사가 40년 목회에서 4000명을 모았는데, 그런데 어느 날 성령께서 역사해서 그 목사가 복음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 주일날 지금까지 한 것은 다 엉터리라고 하면서 복음을 증거했더니만, 그 다음날 당장에 장로가 교회에서 나가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목사는 자기가 나가면 10%정도는 따라오지 않겠나 해서 과감해서 나가서 개척교회를 했는데, 7명이 따라나왔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7명도 대단한 것이지만 말이다. 지금 동부교회하고 똑같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남아있는 3993명은 무엇인가? 아까 한 표현대로 하자면 그들은 자기가 '피해자' 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가해자'가 아니고 말이다. 그러니 당연히 자기들은 억울하다는 것인데, 그래서 목사가 나가도 따라나오지 않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들은 모두가 다 피해자이고 그래서 억울하다고 여기는데, 목사가 강단에서 "당신들은 전부 가해자입니다" 라고 누가 좋아야겠느냐는 것이다. 모두가 등을 돌리고 말지 말이다.

◈ 도대체 다른 신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그래서 지금 우리가 하는 이 성화론 공부가 중요한데, "다른 신은 도대체 어떻게 해서 만들어지는가?" 라고 하는, 그 만들어지는 포인트를, 그 메카니즘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까지도 알아서 설교할 때 제대로 포함시켜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그들이라고 결코 완악하지 않거나 교만하지 않거나 목이 곧지 않는 백성이 아니거나 강퍅하지 않거나, 자기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은 그런 자들이 아니었다. 도리어 그들은 자기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하게 저주받고 징벌을 받는다. 옳게 살았다면, 그리고 그들이 제대로 하나님을 알았다면 과연 징벌과 저주와 심판을 받았겠는가?

여기서 신명기 31장 27절을 보자.

(신 31:27) 내가 너희의 패역함과 목이 곧은 것을 아나니 오늘날 내가 생존하여 너희와 함께 하여도 너희가 여호와를 거역하였거든 하물며 내가 죽은 후의 일이랴

그러니 모세는 배반자들을 알면서도 그렇게 함께 데리고 다녔다는 것이다. 모세는 지금 자기가 이렇게 살아있어도 백성들이 이렇게 하나님을 거역하고 난리를 피우는데, 자기가 죽고 난 다음에는 그야말로 두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신명기를 보자.

(신 32:5) 그들이 여호와를 향하여 악을 행하니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흠이 있는 사곡한 종류로다
(신 32:6) 우매무지한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너를 얻으신 너의 아버지가 아니시냐 너를 지으시고 세우셨도다
(신 32:7)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이처럼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라는 이 계명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잘 지킬 수 있다는 가능성은 전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 계명을 철회할 의사가 없으시다. 이것은 결국 무엇을 뜻하는가? 이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의 계획만이 이 어두운 세계 속에서 빛의 세계를 따로 창설하고 건설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라고 했을 때, 그것을 통해서 인간들은 자꾸만 자기 속에서 다른 신이 왜 솟구쳐 나오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반드시 알아야 하는데, 지금부터 바로 그 이유를 한번 알아보자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이 말씀이 직설법적이 되었든 명령법적이 되었든, 그리고 그 어떠한 양식의 말씀이든 간에 인간들은 그 말씀 앞에서 죄인으로 끌려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 말씀에 의해서 이미 자신들이 속해 있는 그 죄악의 구조를 마음껏 외부로 방출하는 해석을 쏟아내게 된다. 그 해석이 바로 성화론을 품고 있는 모태로서의 '인간이 주체가 되는 구원론'이다.

◈ 직설법과 명령법 !!

여기에 직설법이 나오고 명령법이 나오는데,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다" 라고 하면 직설법이고, "무엇 무엇을 하라" 라고 하면 명령법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직설법의 경우에도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다" 라고 하면, 그 뒤에 "그러니 알아서 해라" 라고 하는 것이 생략되었으니, 사실 따지고 보면 그 의미가 같다는 것이다. 명령을 하는 분이나 직설적으로 말하는 분이나 모두가 다 순종하라는 뜻이기 때문에, 그렇게 나누는 것 자체가 크게 의미는 없는데, 왜냐하면 말씀하시는 분이 중요하기 때문에 말이다.

야고보서 2장에서, "온 율법을 지키더라도 하나를 어기면 모두 어기게 된다" 라고 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명령하신 분이 동일하신 분이기에, 이 말은 듣고 저 말은 듣지 않는다면, 그렇게 말씀하신 분을 무시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는 몇 개를 지켰습니다" 라는 것이 별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약 2: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예를 들어서, 엄마나 아들에게 꼬지오뎅 10개를 사서 주었는데, 그런데 그 자식놈이 2개는 먹었는데 나머지 8개는 싫다고 하면서 먹지 않는다면, 엄마가 열을 받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식은 2개나 먹었다고 우길지 몰라도, 그러나 엄마의 입장에서는 왜 8개는 먹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건방지게 말이다. (그래도 꼬지오뎅 10개도 좀 많은데, ㅋㅋ)

여기서 이 오뎅을 율법으로 보면 되는데, 성경해석이 갑자기 쉬워지는 느낌이 오지요? 그러니 중요한 것은 사실은 율법자체가 아니라, 도대체 누가 그것을 주었느냐는 것이다. 여기서 율법에 대해서 하나 집고 넘어가자면, 이것은 약간 어려운 부분이지만 말이다.

◈ 참된 사랑에 대해서 !!

마태복음 22장에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제일 큰 율법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라는 것인데, 여기서 '이웃'과 '자기 몸'이 나오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는고 하니까, 이 율법사의 경우에 자기를 밖에다 세워놓고는, "내가 내 몸을 사랑하는 것같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하는구나" 라고 말이다.

(마 22:35)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마 22:36)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마 22: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마 22: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그런데 이것이 잘못된 해석이란 것인데, "하나님이 너를 사랑한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라" 라고 나와야 하는데 말이다. 즉 사랑이 우선이고, 그 사랑으로서 이웃과 자기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자기 이웃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 이근호 목사의 애절한 사모곡(師母曲) !!

이 말도 하고 보니 어려운데, 도대체 무슨 말인고 하니, 사랑으로 인하여 남편과 아내가 발생된다는 것이다. 남편이 있고 아내가 있어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하나의 사랑이 있어서 둘로 분리가 되니, 그래서 그 중에 하나는 남편이 되고 다른 하나는 아내가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지 정말로 '따봉부부(?)'가 되는데, 즉 "당신이 나에게 있는 것은 나를 위함이 아니고, 사랑으로 인하여서 당신이 있다" 라고 말이다.

이 얼마나 좋은 말인가? 사랑이 우선이지, '나와 나'가 우선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만남은 무엇인고 하니, "내 사랑이 너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나로 하여금 남편이 되게 하는 사랑이 너로 하여금 아내가 되게 했기 때문에, 아내에 대한 내 사랑을 그리워할 수밖에는 없다" 라는 것이다. 물론 그런 남편은 없지만 말이다. (누구 사모님은 좋겠네. ㅋㅋ)

아무튼 사랑이 먼저이고 그 사랑이 남편과 아내를 만든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가서의 내용이고 주제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무조건 자기를 꼬불쳐놓고, 그렇게 비밀금고를 만들어놓고서는, 그 비밀금고는 무조건 손대지 말라는 것이다. 자기는 자기가 알아서 사랑한다고 말이다.

◈ 율법사의 무지한 점은?

그래서 엉터리 율법사가 말하기를, "제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고 하는데, 얼마나 그 머리가 돌대가리인지, 그 이웃을 자기가 정하는 것이 아닌데 말이다. 오히려 이웃이 자기를, 즉 자기 몸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 말이 또한 어려운데, "이웃이 내 몸을 결정한다" 라는 것이다. 즉 이웃이 자기에게 사랑을 가져다준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경우에도, 자기를 찾아온 그 이웃이 자기에게 사랑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자기가 미쳐 경험하지 못한 그 진짜 사랑을 그 이웃이 맛보도록 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랑을 베풀어주신다는 것이다.

◈ '서로 사랑하라' 라는 의미는?

이것을 가지고 요한복음에서는 "서로 사랑하라" 라고 하는데, 이것을 조금 더 풀어서 이야기하자면, "니 사랑으로 사랑하지 말고, 서로를 있게 하는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 라는 것이다. 이것이 곧 요한복음과 요한123서의 핵심이란 것이다. 그러니 사랑이 먼저이고 그 사랑 때문에 '우리' 라는 것이 형성되었고, 그래서 우리는 자기 사랑으로 만든 공을 가지고 놀면 안 되고, 그 공은 따로 있는데, 즉 하나님께서 그 공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가 그것을 가지고 사랑놀이를 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고린도전서 12장과 13장에서 이야기하는, 한 성령을 마셨기 때문에 몸이 한 지체뿐이 아니라 여럿이고, 그래서 손이 발더러 필요 없다고 하지 못하고, 그리고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선물이기 때문에 말이다.

(고전 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그런데 이런 말씀을 어떻게 개혁주의 성화론으로 풀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 개혁주의 성화론에는 '내'가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사랑을 해도 누가 하는가? 구원을 받은 자기가 사랑을 하는 것이고 말이다. 그렇게 되니 줄줄이 개혁주의 구원론과 사랑론 등이 다 엉터리라는 것이다. 사랑이 먼저 있고 그 사랑이 자기를 만들어 가는데 말이다.

◈ 이웃사랑에 대해서 !!

아무튼 우리는 사랑을 할 줄 모르는데, 그런데 그 사랑이 찾아오면 그 사랑이 우리를 매개물로 사용해서 이웃에게 넘어가는데, 그 이웃도 자기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웃은 자기가 죽을 때, 즉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할 때, 불쑥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웃을 골라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 빠지면 모든 것이 다 이웃이 된다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나'를 이용하셨다는 것이다. 자기는 이웃을 몰랐는데, 이웃이 찾아와서 "내가 당신의 이웃입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해줄게" 라고 말이다. 그러니 그런 사랑이란 관계가 우리에게 덮쳐왔다는 것이다. 마치 천장이 내려앉듯이 말이다. 그렇게 이웃사랑이 우리를 덮쳐버리면, 우리는 이웃사랑을 "아하, 내가 사랑한 것이 아니라, 주께서 그렇게 하셨구나" 라고 고백할 때, 우리는 이미 그 이웃사랑의 범주에 포함되어있다는 것이다.

◈ 나만의 비밀금고 !!

그래서 율법은 지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은 그 완성을 느끼는 것인데, 그렇게 율법의 완성인 사랑을 느끼게 되면 율법을 제대로 지킨다는 것이다. 그렇게 아무런 이유 없이 사랑을 느끼게 되면 율법을 지키는 것인데, 그런데 우리는 왜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가? 우리는 항상 우리가 꼭꼭 숨겨놓은 자기의 꼬불쳐놓은 자기 자신만을, 그렇게 자기의 비밀금고만을 느낄 뿐이고 유지하려고 하지, 외부에서 주어지는 사랑은 무시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자꾸만 자기를 피해자로 보아서, "주여, 어떻게 이런 일이" 라고 하면서, 매일같이 억울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왜 이렇게 개척교회 신세입니까?" 라고 부르짖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개척교회에서 성공한다고 천국에 가는가? 천국이 그런 곳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사랑으로 가지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즉 인간 긍정에 기초해서 구원이 성사되는 그런 죄악된 신학을 의로움과 거룩함으로 위장되어 배태하게 되어 있다. 여기서 기존의 인간 세계의 죄악 구조와 하나님이 주신 언약 구조와 정면 충돌을 빚게 된다.

그러므로 명령인 이 말씀은 하나님의 원수를 배태하게 되는데, 즉 새로운 하나님의 적들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 지상의 공격자들을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그런데 하나님은 이 희생자를 근간으로 '대신 죽으심' 형태의 '언약 완성'으로 약속하셨다. 이렇게 되면 장차 '메시야 안' 즉 '예수님 안'에 놓여 있게 되는 자들은 거룩이든, 의로움이든, 구원이든 그 어떤 경우라도 자신을 긍정적으로 거론할 수 없는 입장이 된다. 바로 이런 자들의 안목에만 '나 외에 다른 신'라는 의미를 제대로 알게 된다. 즉 참 신과 거짓 신의 차이점은, '인간을 긍정하는 신이냐 아니면 인간을 부정하면서 다가오시는 신이냐'로 구분되는 것이다.

◈ 우상 - 자기가 살아있는 한 계속해서 솟아나는 신 !!

이런 입장에서 볼 때, '나 외에 다른 신' 이라고 할 때는, 그 다른 신은 바로 자기와 결부된 다른 신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상의 특징은 반드시 앞에 무엇이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고 하니, '나를 위하여' 라는 것이 붙는데, 자기와 결부된 신이 들어간다는 말이다. 그래서 "아하,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머리를 썼구나. 우상, 우상, 다른 신, 다른 신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 신에 매여있는 나를 보고서 하는 일이구나. 그러니 내가 만든 신이 바로 우상이구나"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가 만든 신이니, 당연히 자기를 부정하기 않고,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지 않고 자기가 펄펄 살아있는 한 계속해서 솟아나는 신이라는 말이다. 그러한 신이 바로 다른 신, 즉 우상이고, 그리고 그 다른 신을 다른 신이라고 지적하면서 찾아오시는 분이 참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피해자로 오시는 분이 말이다. 그렇게 함으로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마라" 라는 말씀이 완성되는데,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해서 벌리는 사건에는 반드시 사람의 이름을 부정하게 된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그렇다면 '예수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예수님 안에서는 옛날 '언약 안'에 이루어지는 일이 그대로 벌어진다. 일시적이 아니라 그 안에서는 영원토록 동일한 작용이 벌어진다. 그 일은 곧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의 이름'을 부정하는 일이다.

웃시야 왕의 경우에, 그는 참으로 대단한 사람으로 16세에 왕이 되었는데, 그 모친 이름이 '여골리아' 인데, 이 엄마가 어릴 때부터 교육을 잘 시켰는데, 그래서 그는 나라전체를 말씀대로 하겠다고 다짐을 한 왕이라는 것이다. 그 이전이 왕들이 잘못해서 빼앗긴 영토를 이 웃시야가 거의 회복을 다 했는데, 얼마나 전쟁을 잘 했는지 블레셋을 비롯한 적들이 알아서 조공을 바쳤고 말이다.

그랬던 웃시야 왕이, 나라가 광대해지고 자기가 말씀대로 사는 왕이라고 소문이 나고 했는데, 그런데 그 말년에 가서 "이 정도 했으면 되었겠지" 라고 하다가, 제사장이 제사를 지내는 것을 보고 "어이, 비켜라. 누구 덕분에 먹고사는데, 모두 내 덕이다. 그래서 오늘부터 내가 제사를 드린다" 라고 하자, 그러자 "왕이여, 그러시면 안 됩니다" 라고 제사장이 말리니, "어허, 내 때문에 나라가 잘 되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데" 라면서 자기 본색을 드러내게 되었는데, 그만 문둥병에 걸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 우리는 모두가 문둥병자 !!

그리고 모세가 자기 손을 자기 품에다 넣었다가 빼니까 어떻게 되었는가? 그만 문둥병에 걸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모두가 다 문둥병자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10명의 문둥병자를 고쳐주셨는데, 9명은 가버리고 1명만이 돌아왔는데, 왜 돌아왔는가? 자기는 고침을 받을 이유가 없는데, 왜 고침을 받았느냐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질문이어야 하는데, 우리는 매일같이 그런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저는 문둥병자로 살아도 너무나 당연한데 왜 고쳐주셨습니까?" 라고 말이다. 이 웃시야 왕이 문둥병이 걸려서 죽고 난 다음에 그 시체도 열조의 무덤에 묻히지 못하고 따로 묻혔다는 것이다.

(대하 26:23) 웃시야가 그 열조와 함께 자매 저는 문둥이라 하여 열왕의 묘실에 접한 땅 곧 그 열조의 곁에 장사하니라 그 아들 요담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그러니 잘 나갈 때 주의해야 하는데, 물론 우리는 잘 나간 적이 없어서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지 싶은데, 아무튼 사람이란 교인이 10명이 되면 20명을 만들고 싶고, 20명이 되면 50명을 만들고 싶고, 100명이 되고 싶고, 그리고는 천 명, 만 명의 교인을 만들고 싶다는 것이다.

◈ 우상은 오직 주의 이름으로 부수어야 !!

그러니 그 어떤 경우에도 인간은 자기 만족함이 없는데, 그것이 바로 자기가 만든 우상이고 말이다. 그러한 우상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이름으로 인간의 이름을 부정하고 깨부술 때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사람의 이름은 계속해서 부정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계속 계속해서 말이다.

사실 웃시야 왕의 경우에도 자기가 승리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이름으로 승리했다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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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625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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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