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7월 6일 강의
울산 7월 6일 강의
이름 : 우리교회(IP:125.190.2.22)
울산 7월 6일 강의 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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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교회(IP:125.♡.2.22)
07-07-07 10:58
우리교회(IP:125.♡.2.22)
07-07-07 22:42
울산 070706 강의 듣고
안 지킨것이 아니라
반드시 지켜놓고 그 지킨것을 누락하는 것이 언약이다.
즉 자신이 지킨것이 얼마나 언약과 비교해서 죄인지 곧 비언약인지 보게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회개이다. 새언약이 덮쳐서 신약에서는 믿음으로 행했다고 일방적으로 성공했다고
믿음으로 했다고 무조건 예 라고 일방적으로 선언한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믿음이다.
여기에 명령법을 인간들은 자신의 숙제로 보고
그렇게 자기 숙제로 보는 인간을 다루시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숙제이다.
베드로는 반대로 행한다. 부자청년의 반대 행동을 하면 의가 된다고 여긴 것이다.
무조건 육에서의 출발을 다 거부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믿음이다.
즉 십자가는 누락사상이다. 부인이다. 자기 부정이다. 육의 부정이다.
육의 후패이다.
인간의 구원이 얼마나 헛됨을 증거하는 그 십자가의 믿음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나타난다.
자 그리고 할례언약이라는 의미가 십자가 곧 육의 단절(성령의 활동)이 아니면
새피조물이 이전 것이 지난간 의미에서 곧 부인 역사단절의 의미에서 새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이전 것의 연장선상의 새것이다.
놀랍게도 새생명의 삶이라는 운동도 이런 부류이다.
그런 운동의 지도자들이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늘 그런 새생명의 삶을 운동하기에
알아달라는 식이다.
또 특징이 단절이 없다.
날마다 새로움이란 주님 쪽에서의 새로움이다.
곧 날마다 죽노라 날마다 육의 후패이다. 죄를 지적 당하는 기쁨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날마다 살지 왜 죽냐 라는 죽음에 대한 아주 민감한 반응을 나타내었다.
즉 그들의 활동이 인간 구원 인간 생명부여인데 그런 자기들의 활동에
걸림돌이 되어버리는 것이 십자가요 할례이다.
자신들이 할례를 스스로 잘 하고 있는데
십자가가 왜 필요하냐 라는 주장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십자가는 필요 없다. 십자가 빼고도 충분히 성경에서 인간의 구원을 위한 신학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킴과 행함에 교인들을 다루고 싶어 한다.
정작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것을 목회자 자신들이 가장 거부하는 말씀이 된 것이다.
바로 이런 예수님의 믿음과 인간 목회자의 믿음이 충돌되는 과정을 우리는 목격해야 할 것이다.
누가 누락이 될까?
놀랍게도 예수님의 믿음만 누락 된다. 이것이 십자가의 지혜 이다.
우리교회(IP:220.♡.176.169)
07-07-22 13:42
20070706a, b 울산강의-창세기 17장(1)
(강의:이근호 목사)
시간이 되었음으로 지금부터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강의는 창세기 17장 볼 차례입니다. 지난 15장 18절에 보면,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렇게 돼있지요. 15장 18절, 그죠? 그리고 창세기 6장 18절에 보면, 18절 잠깐 봅시다. 노아이야기인데요. 거기에 보면,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이렇게 돼있지요.
창세기 15장 18절에도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지요. 그러면 건물하나 세울 때도 건물주가 있고 자금대고 터 잡고 콘크리트치고 철근구조하고 건물 하나 세우잖아요. 그처럼 하나님께서 노아나 아브라함을 통해 뭘 세우고자 합니까? 언약을 세우고자 하지요. 언약을 세우고자 한다 이 말입니다.
언약을 세우는 이유가 창세기 12장에 보면, 여러분 다 아시다시피,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워서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로 오지요. 근데 그 중심센타가 뭐가 뭡니까? 중심센타가 하나님이 세우진 언약이 중심센타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노아방주 들어가면 살고, 노아방주 안 타면 물에 빠져 죽지요. 제 말 거짓말하는 겁니까? 맞지요. 노아방주 들어가면 살고, 안 들어가면 죽지요. 이게 노아방주를 제가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언약을 세웠다 했지요. 그러면 아브라함하고 지금 언약을 세웠잖아요. 아브라함 언약을 인정하면 세움 속에 건물이라면 빌딩이라면, 그 빌딩 안에 들어가면 살고 그 빌딩 바깥에 나오면 죽지요.
결국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세운다는 말은 뭐를 의미하느냐 하면, 안과 밖을 뚜렷이 구분하는 기준점을 하나님 쪽에서 착착 세워나가는 겁니다. 안에 있나, 밖에 있나를 묻는 겁니다. 너 안에 살아, 지금 바깥에서 사는 거야. 라를 묻는 거예요. 너 언약 안에 있는 거야, 아니면 언약 바깥에 있는 거야. 묻는다 말이죠. 니가 노아방주 안에 있는 거야, 아니면 노아방주 바깥에 있는 거야를 묻고 있다 이 말입니다.
이것은 안이냐 바깥이냐를 묻는 것은 사적인 거, 개인이나 개인의 역량, 개인의 행함, 이거 안 묻지요. 그죠?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창세기 17장하고 있는데, 창세기 15장 18절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하고 언약을 세웠지요. 세운다. 곧추세웠다고 빌딩 세우듯이 세웠다는 말이 의미를 알기 위해서 창세기 6장을 봤습니다.
창세기 6장을 보니까 노아하고 언약을 세우지요. 언약을 빌딩을 세우는데 결국 빌딩이 노아한테는 방주였지요. 노아한테는 방주였는데 지금 문제가 아브라함한테는 뭐였습니까? 일번, 방주였다. 이번, 32층 빌딩이었다. 삼번, 유조선이었다. 그 뭐고? 잠수함이었다. 사번, 탱크였다. 오번, 이도저도 아니다. 뭡니까? 아무것도 아니죠.
지금 우리가 제 말에 여러분들이 힘들어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언약을 세웠다고 하는 방주를 줬으면 방주는 안과 밖이 분명하잖아요. 제 말 뜻을 이해하시겠습니까? 방주 안에 들어오면 살고, 방주 밖에 그냥 머물러 있으면 죽잖아요.
그런데 아브라함하고 언약을 세웠잖아요. 우리가 아브라함 시체해부해서 아브라함 배 자르고 아브라함 위장이라든지 간이라드지 창자 거기에 들어가면 삽니까? 이게 지금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제일 어려운 부분이 이거잖아요. 아니 방주 달라. 방주 주면 들어갈게. 문 열고 들어갈게.
근데 언약을 세웠을 때 방주라는 것은 안과 밖이 분명한데, 아브라함하고 언약을 세울 때는 안과 밖이 분명치 않느냐 이 말이죠. 왜? 우리 보고 어쩌란 말이냐? 이게 참, 힘들어요. 참, 보통 힘든 게 아닙니다. 공간적으로 어떤 구획을 정해놓으면 그 안에 들어가면 살고, 밖에 나오면 죽고. 이건 충분히 이해되는데.
어떤 특정 공간이 없는 특정 인간에게 아브라함에게 니가 언약을 세우리니. 언약을 딱 세워버리면, 그 아브라함 언약 가지고 무슨 안이 생기며 이게 바깥이 나오느냐 말이죠. 그런데 신약성경에는 이것 가지고 결정지어 버려요.
신약성경은 뭐냐 하면, 새 언약 아닙니까. 새 언약이니까, 새 언약은 뭐냐 하면, 예수 안이냐, 예수 밖이냐를 가지고 천국 가냐, 지옥 가냐 이래 결정 나거든요. 그런데 예수 안에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이며, 예수 밖에 있다는 뭔 뜻입니까? 예수님 가슴둘레 얼만지 모르겠어요. 하여튼 가슴팍 재보면 몇 센티 안 되는데 그 쪽에 어떻게 안에 파고 들어가느냐 말이죠. 해부해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우리 보고 어떻게 처신하라는 말이며 바깥에 있다는 말은 지금 예수님하고 노끈으로 묶어서 다니라는 말인지, 도대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믿기가 힘들어요. 공간과 시간 개념 가지고 따지기에 믿기가 정말 힘든 거예요. 오늘 본문이 창세기 17장 하는데 창세기 17장 2절에 보면,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또 이렇게 나옵니다. 또 언약을 세우겠다고 나옵니다.
창세기 15장 18절에도 여호와께서 아브라함하고 언약을 세우고, 17장 2절에도 내가 너와 언약을 세우고. 만약에 언약을 세웠다 하는 이 말은 제가 처음에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언약을 하나님께서 빌딩 세우듯이 여기 한 채, 여기 한 채 자꾸 언약을 세웠단 이 말은 이거는 새삼스럽게 니, 천당 갈래, 지옥 갈래. 천당 갈래, 지옥 갈래를 우리한테 들이밀면서 묻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축복하는 자에게는 복을 내리고 아브라함에게 저주하는 자를 저주받는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세웠기 때문에. 언약을 안 세웠으면 축복받고, 저주받고 기준점이 없어요. 처음부터 애초에 없는 거예요. 그냥 빈 공간이에요.
그런데 이 빈 공간에 아브라함 하나 턱 등장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하기를 너는 나하고 언약을 세운 관계라. 지목하는 그 순간부터 그 아브라함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건 지옥 가고, 아브라함을 인정하면 천국 가는 새로운 기준점이 자꾸 툭툭툭툭 이렇게 나온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무관심할 수가 없어요. 왜? 내 구원문제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 지옥 가느냐, 천당 가는 문제와 관련돼 있기 때문에 그것과 내가 무관심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 언약에 대해서, 하나님이 일을 벌이는데 대해서 무관심할 수 없어요.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벌판이 있는데 벌판입니다. 벌판에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대지에요. 넓은 운동장 같은 대지입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 갑자기 영점 일초 만에 홀연히 어떤 인간이 툭 등장했어요. 아브라함이 딱 등장했습니다.
등장하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에게는 복 받고 아브라함을 축복하지 않는 자는 저주받는다 하니까 아브라함 주위에 몰려드는 이것은 뭘 형성하느냐 하면, 아브라함 안이 되고 아브라함 언약 안이 되고, 아브라함을 외면해서 등지는 사람은 자동적으로 뭐가 됩니까? 아브라함 밖이 되는 거예요. 아브라함 밖이 되면 이거는 뭐녀? 저주로 구분되고 이 사람만이 뭐냐 하면 축복, 천국으로 구원으로 구분된다 이 말입니다.
아예 처음부터 이게 없었으면 구획되는 게 구분되는 게 없을 텐데 돌연히 툭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니하고 언약을 세운다. 라는 그 말하는 순간부터 축복과 저주가 구획이 확연하게 이렇게 딱 정해져버린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 따라 공부하는데 언약 하나 톡톡 던지고 주어질 때마다 우리는 놓치면 안 돼요. 아브라함 A라 했는데 갑자기 아브라함을 A라는 지점에서 B라는 지점에 옮겨서 너와 언약을 세우리니. 이래 됐다 이 말이죠. 그러면 여기 있는 사람은 어딜 따라가야 갑니까? 새로운 언약이 시작된 B에 조르륵 같이 따라 가야 되는 거예요.
어릴 때 제가 제 어머니하고 시장에 놀이삼아 갔는데 어린아이한테 제일 힘든 게 뭐냐 하면, 엄마가 장보고 가는데 따라가야 된다는 거예요. 엄마의 마음을 알 수가 없어요. 분명히 저 상점에서는 오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빨리 일어나고, 이 가게는 아마 금방 떠날 법했는데 되게 오래 있고.
그래서 남편하고 아내하고 쇼핑 갔다 하면 둘이 나중에 집에 오면 싸웁니다. 두 번 다시 니하고 장에 안 간다. 뭐 하러 그렇게 고르느냐? 그럼 아내가 하죠. 귀찮아서 따라 오지 마. 나도 당신보고 무거운 것 들라고 했는데 귀찮아서 툴툴거려서 안 되겠다. 따라 오지 마라. 나 혼자가 편하다.
엄마는 엄마 마음대로 있는데 얘는 엄마 마음대로 따라가고 쫓아가고 힘들어 안 되는 거예요. 자기 사고 싶은 거 그냥 스쳐지나가고. 별로 안 좋아 하는 건데 오래 머물고. 빨리 가자고 낚아채고. 영 월남치마 잡아당기고 해도, 오래 이거 얼만데? 계속 묻고.
그렇게 어쩔 수 없이 언약 따라 졸졸졸 가는 곳마다 따라가는 거예요. 이게 창세기 15장이라면 이건 몇 장이냐? 창세기 17장이에요. 15장에 머물다간 큰 코 다쳐요. 17장 따라가야 되는 거예요. 언약을 또 세웠어. 또 세운다 이 말이죠. 나중에 또 나와요. 아브라함 또 나온다고. 또 따라가야 돼요. 나중에 이삭에 보면 또 나옵니다. 야곱에 또 나와요. 결국은 마지막으로 뭐냐 하면, 새 언약 여기에서 마무리됩니다. 이게 마무리 돼요.
지금 이렇게 혼자 설명하니까 너무 혼잡스러우니까 이 모든 것은 단 하나의 그림으로 이걸 다 표현하겠습니다. 이 모든 복잡한 그림을 단 하나의 그림으로 표시하면 이렇습니다. 이거 녹음으로 듣는 사람은 이 그림이 안 보일 텐데. 그냥 상상해서 할 수 있도록
여러분들이 석유나 유전지대에 갔다고 합시다. 그럼 여기에 사람들이 있겠지요.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고 있다 말이죠. 이게 지표고 쭉 땅 밑으로 계속 몇 수키로 뚫고 와요. 요 밑에 보면 마그마라 해서 맨틀이라 맨틀이 있어요. 지구의 가장 중심부에 가장 무거운 금속이 있는데 지구 중심부다 말이죠.
그럼 여기 지열이 따뜻한 것은 위에서 올라오는 어떤 뜨거운 기운이 올라와서 지금 여기까지 올라온 겁니다. 제가 이 그림을 그린 이유는, 현재 우리가 여기에 살고 있잖아요. 이걸 철학에서 존재라고 하는데. 우리가 지금 살고 있다. 존재하고 있잖아요. 존재하는 제일 중심부에 뭣 때문에 존재하느냐 하면, 새 언약 때문에 우리가 존재합니다.
이번에 십자가마을 수련회 하는데 욥기를 하는데 욥기의 주제가 뭐냐 하면, 이거에요. ‘까라’입니다. 까라인데 앞에 뭐가 붙어요. ‘패 까라’에요. 패 까라 어디에 나오는 용어입니까? 화투 칠 때 용어죠. 욥기 내용이 딴 게 아니고, 하늘나라에서 내기를 해요. 이 내기가 어디까지 번지느냐 하면, 땅의 욥과 욥의 친구 사이에 내기를 해요. 젊을 때는 내기로 하려 하다가 이게 또 타짜와 비슷한 거 같아서 그냥 [사막에서의 대화]라고 해서 고상하게 고쳤는데.
하늘나라에서 내기를 하고 지상에서 내기하는 주제가 욥기입니다. 뭐 갖고 내기하느냐 하면, 하늘나라에서는 누구하고 내기합니까? 마귀하고 내기합니다. 뭣 가지고 내기하느냐 하면, 믿음이라 하는 것은 사람이 자기가 만들어낸 것이 믿음이다. 이거 마귀가 주장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믿음을 줬다. 이래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에서 마귀가 화가 나서 그러니까 잘 먹고 잘 살고 몸이 건강하니까 믿는 척 하지, 사실은 그런 거 몽땅 빼앗아 가면 안 믿습니다. 왜? 믿음은 내가 만들어냈기 때문에. 욥, 본인이 만들어낸 겁니다. 하나님이 하는 말이 다 가져가 봐라. 건강이고 재산, 다 가져 봐라. 그래도 날 믿을 걸. 믿음은 선물이기 때문에. 에베소서에 나오죠. 2장 8절에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마귀는 자신 만만해요. 왜? 모든 인간이 자기 수하니까 자신만만한 거예요. 내가 돌아보니까 모든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게 아니고, 인간이 약간 살만 하니까 하나님 믿는 겁니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겁니다. 그뿐이에요. 다 뺏어 가면 하나님 어디 있느냐 하고 도망 다 칩니다.
하나님 저주하고 죽어라! 누가 이야기했습니까? 욥의 부인이 이야기했죠. 다 인간이 그렇고 그런 거예요. 뭐, 별난 인간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별난 인간 있다. 없다, 있다. 없다, 있다. 이 싸움이 하늘의 이 내기가. 좋다 내기해 보자. 내기합시다. 내기가 지상에 퍼져요.
욥의 친구가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너가 지금 분명히 잘 먹고 잘 살 때는 하나님 믿었는데 니가 지금 못 사는 것 보니까 니가 하나님 인정 안하고 나쁜 짓했기 때문에 못 사는 거다. 이래 되는 거예요. 나, 억울해 죽겠다. 그게 아니고 나 하나님 믿는다. 아니다. 너 벌 받았다. 이 내기가 번지는 거예요. 하나님 믿음이 선물이냐 이 말입니다.
욥은 몰라요. 욥도 모르고, 욥의 친구도 모르고 계속 하나님만 알고 마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여기가 다섯 명 가운데서 여섯 번째 사람이 이걸 욥이라고 보고. 그럼 욥의 믿음은 뭡니까? 믿음은 하나님 선물로 받았지요. 문제는 이 선물이 어디서 오는 걸 모르는 거예요. 그걸 파고들어가는 거예요. 이걸 파고들어가는 겁니다. 욥기는 패 까라. 패를 까야 돼요. 니가 오월달인지, 유월달인지 패를 까라 이 말이죠. 다 받은 거니까.
욥은 중간 쯤 밖에 안 와요. 구약이니까. 그런데 하박국 가면 더 밑에 내려가고. 마태복음보다 더 밑에 내려가고. 에베소서 오면 뭡니까? 믿음은 하나님 선물인데 그 하나님이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새 언약으로 다 이루었다는 그것을 근거로 해서 장차 올 선지자 된 욥에게 믿음을 미리 댕겨 준 거예요.
그러니까 아까 제가 그림을 이렇게 언약 그림을 그렸지만 사실은 그림 하나로 다 끝나버립니다. 앞부분이 창세기 1장이라면 창세기 2장이고 갈수록 점점 깊이 들어가서 어디까지? 새 언약까지. 마지막 요한계시록까지 이게 내보면, 결국 모든 지상에 있는 인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십자가 안 믿으면 저주요, 믿으면 천국이다. 그걸 증거하기 위해서 배치된 태어나야만 할 사람들로 이렇게 지표 위에 서있는 겁니다. 그 밑에 파고 들어가면 저 밑바닥엔 새 언약이 있지요.
하나님의 형상이라 하는 것이 창세기 1장에서는 가까운 인간을 두고 이야기한 것처럼 생각되지만 신학자들은 그렇게 주장하지만, 더 파고 들어가면 하나님의 형상은 누구냐? 골로새서 1장에 보면, 그 형상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형상이에요. 이걸 파고 들어가면 알아요. 파고 들어가면 아는데 파고 들어가는 그 방법이 뭐냐? 언약 따라서 더더더더더더더더더 깊이 돼요. 계속 깊이.
노아 때는 이만큼, 아브라함은 이만큼, 이삭 때는 이만큼, 야곱 때는 이만큼 더더더 내려가야 돼요. 아까 식사하다가 여담으로 이야기했는데 오 목사님 따님이 아직 자기는 복음에 동의 안 된다는 거예요. 근데 우린 이해하지요. 왜냐하면, 오 목사님 들으면 기분 나쁘겠지만, 기분 나쁠 분은 아니고. 하여튼 오 목사님 따님이 있다. 여기 존재하잖아요. 자기 존재하는 것이 내가 왜 존재할까를 두리번두리번 둘러보는 거예요.
오 목사님 따님 옆에 누가 있어요? 오 목사님 계시고, 그 옆에 사모님도 계시잖아요. 그러니까 목사님, 사모님 이래 봐서는 내가 왜 존재하는가가 나옵니까? 잘 안 나오지요. 우리 아빠하고 엄마하고 잠자리에서 내가 태어났구나. 그런데 그게 왜 하필 내지? 아빠, 엄마 아무리 이야기 들어봤자 그렇다면 아빠, 엄마 말 대로 하면 그럼 다른 사람은 왜 그럼 목사 딸 아니냐, 다른 사람은 왜 교회 안 다니냐? 이 문제도 안 풀린다 말이죠.
결국 오 목사님 따님은 자기가 관찰할 수 있는 것, 학교에서 배운 것, 주위에 눈에 보이는 것, 눈에 보이는 것들을 수집해서 그걸 정리해서 자신의 존재의 근원을 하다보니까 자기 밑바닥에 기껏 한 오 센티, 한 십 센티 정도 파고 들어가서 아이고, 아버지 말은 이해되는데 아직 납득이 충분이 안 됩니다.
이게 언약까지 내려가야 되는데 이게 안 내려갔어. 안 내려가서 기독교는 종교의 일종이며 뭐, 예수님도 훌륭하지만 소크라테스도 훌륭하고 부처는 그거 인간도 아니고 부처도 우리하고 똑같은 사람인데 자꾸 왜 부처는 안 되고 예수 믿어라. 그거 이해가 잘 안 돼.
이런 식으로 주변 사람들만 그러니까 수평적이죠. 눈에 보이는 사람들만 두리번거리다 보니까 이런 것들 철학을 공부하고 학문을 공부하고 과학을 공부해봤자 진화론도 배우고 해봤자 나는 왜 존재하는가가 안 나타나는 거예요. 이거는 욥의 친구도 마찬가지고 욥도 마찬가지에요.
저 새 언약에서 밀고 뜨겁고 밀고 올라오는 이 십자가의 다 이루었다 하심을 아직까지 도착을 안 하다 보니까 그저 본인이 보는 것을 연구해서 정보를 수집해서 나는 누구지, 나는 어떤 인간되고 싶어. 뭐 그 정도 선에서 나는 이렇게 될래. 나는 이 정도 인간이겠지. 흐릿하나마 이렇게 자기를 자아를 구축하는 겁니다.
그런데 언약을 뚫어보면, 오늘 이제 창세기 17장하겠습니다만 하기 전에 이것부터 먼저 해야 돼요. 창세기 17장하기 전에 쭉 읽어보면 한 15장만 돼도 아하, 나라는 인간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브라함 언약의 위력을 얼마나 놀라운 위력을 갖고 있느냐? 나 같은 인간이 구원받다니, 창세기 15장 수준에서 나를 설명하기 위해서 아하, 나라 하는 것은 언약을 드러내기 위해서 있구나. 그런데 그 언약이 뭐지? 잘 몰라. 그럼 더 깊이 내려가죠.
나중에 되면 아하, 예수님의 새 언약. 이 잔과 이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영원한 용서해 준다는 그 새 언약을 증거하기 위해서 나는 이 곳에 이 땅에 태어나야 됩니다. 여기까지 이게 연결되려면 성경의 폭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이 폭에 의해서 꽉 차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언약으로, 언약으로, 밑으로~ 밑으로~ 밑~으로 밑으로. 계속 밑으로 파고 들어가면 여기에 지금 우리가 존재하는 힘이 십자가에서 터져 나오는 옮긴다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말이죠. 이 그림 하나.
매주 새순교회 올 때마다 그림 하나 그려 드리는데 이거 한 몇 시간 갈까? 아마 한 사흘 가면 많이 갈 거 싶은데 좀 더 오래 가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계속 하겠어요. 그리고 지표에 우리가 살아 움직여도 다 밑에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 따로 있다 이 말이죠. 자, 이렇게 생각해 보시고.
그러면 창세기 15장 18절에 했던 아브라함 언약, 그 언약을 제가 충분히 설명해 드렸다고 생각하는데. 그 창세기 15장 18절에 아브라함의 언약의 그 내용을 잠시 먼저 설명해 드리고 오늘 17장 언약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더 깊이 내려간다는 말은 그만큼 십자가에 담기는 내용이 풍부하게 새 언약과 가까우니까 다 풍부하게 담긴다. 그걸 계시의 점진성이라고 이렇게 조직신학에서 이야기합니다. 담긴다는 것을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창세기 15장 18절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거기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는데 뭐가 나오느냐 하면, “죄가 관영함이라” 야, 이거 참, 상상도 못할 겁니다. 이건 세상에 철학을 공부 좀 했다고 하지만 어느 철학이 이런 철학은 없습니다.
창세기 15장 16절.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죄가 여러분 속에 죄가 몰려와야 돼요. 그리고 여러분 속에 죄가 더 성숙해야 됩니다. 이 성화론 들은 사람들 기절할 거예요. 죄가 성숙해야 되다니, 의가 성숙해야지. 죄가 더 많이 모아져야 돼요. 죄가 우리가 하나님 은혜를 적게 느끼는 것은 아직 죄가 덜 모아져서 그래요.
세상의 철학은 윤리와 통합니다. 윤리라 하는 것은 뭐냐? 날이 갈수록 나에게 나쁜 것은 줄어들고 착한 일은 늘어나고. 그것이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동물이라 하거든요. 사람이 짐승과 차이점은, 사람은 점점 더 보이지 않는 완전 된 세계를 향하여 선한 세계, 진선미 세계, 아름답고 참되고 선한 세계를 달려가는 그것이 짐승과 차이 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인간답게 못 살면 짐승 같고, 사람이 점점 천사를 닮아 가면 그것은 인간의 본분이다.
이것이 모든 철학의 기초철학입니다. 이게 플라톤 철학에 나오거든요. 모든 동양철학이든 모든 철학이 이겁니다. 날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달려가는 겁니다. 그런데 언약은 높은 곳을 향하여 달려가는 것이 아니고 내려가야 돼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표에 그 밑바닥에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제일 밑바닥에. 새 언약이 있지요. 새 언약에 가면 거기는 뭐가 기다리고 있느냐? 하나님의 저주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저주는 죄에 대해서 죄와 하나님과 딱 맞닥뜨릴 때 하나님은 이 죄에 대해서 어떤 조치를 내리느냐 하는 것을 십자가에서 최종적으로 다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직 맛을 못 봤어. 우리는 아직 그 죄 맛을 못 봤어요.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이 이 새 언약, 십자가 죄 맛을 저주의 맛을 ‘니들이 게 맛을 알아!’ 하는 니가 죄 맛을 모르기 때문에 어떤 오해를 하느냐 하면, 내가 착하기 때문에 산다. 이래 보는 거예요. 나는 착한 만큼 산다. 잘 산다. 못 되면 나쁜 짓 하면 못 살고, 착하게 하면 잘 산다.
이거 십자가마을 욥기 할 때 욥의 친구들이 이렇게 오해해서 하나님 뿔다구나서 막 하나님 심한 말을 했는데 욥의 친구들에게 이것들 모르는 게 내 이름 도용해서 함부로 말한다 하는데. 사람이 뭔가 존재한다는 것은 착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이래 보는 겁니다.
이거는 철학과 윤리, 심지어 초등학교 안 나와도 일자무식꾼이라도 마음속에 쫙 잘라보면 이게 들어있어요. 내가 왜 사는가? 그럴 가치 있으니까. 착하니까 산다. 그런데 이 착각이 나중에 새 언약을 만나면, 내가 사는 이유는 내가 착한 게 있기 때문이 아니라 나는 살 수 있는 존재인 것을 알아요. 나는 안 살아도 될 존재인 것을 알아요. 내가 이 땅에 없어도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새 언약은 뭐냐 하면, 크게 쓰겠습니다. 새 언약의 의의는 뭐냐? 죄가 관영한 것이 뭐냐 하면, 크게 쓰겠습니다. 한번 따라 해보세요. 이게 뭡니까? 새로 시작하는 것. 언약은 한번 주실 때마다 새로 시작해. 모든 걸 새로 시작하는 거예요. 사람이 교만한 게 새로 시작 안 해서 그래요.
목사가 목사 값 한다고 까부는 것도 새로 시작 안 해서 그래요. 내가 목산데 내가 교인 얼마나 불어놨는데. 내 이 교회 얼마나 안정되게 했는데. 내가 와서 얼마나 부흥 됐는데. 이거는 자기가 새로 시작 안 해서 그래요.
고린도후서에 보면 우리는 날마다 새로 시작해야 돼요. 마치 없었던 것처럼. 어제는 마치 내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지금 주께서 나를 새로 세운 것처럼. 어제로 나는 이미 죽어야 마땅했는데 지금 보너스로 새로 산다는 생각. 뭐든지 새로 시작해야 돼요. 부부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로 시작하면 부부싸움 할 턱이 없습니다. 첫 결혼식 할 때 그 마음가짐으로 새로 시작해야 돼요.
그게 요한계시록에 보면 항상 첫사랑을 잊지 마라 합니다. 첫사랑을 여러분이 생각한다면 그 사랑 하는 대상 앞에 나는 없어져도 좋다. 나는 아주 작아져. 아주 작죠. ‘그대 앞에 서면 나는 왜 이렇게 작아지는가’ 하는 유명한 노래 있잖아요. 그대~. 그대 앞에 서면 왜 작아지는가. 그게 첫사랑이에요. 사랑은 상대방이 크게 보이고 나는 흔적도 없이 의식도 안 되는 상태가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나는 크게 보이고 상대방은 의식도 안 되는 상태인데. 그게
첫사랑은 뭐냐? 뭐든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새 언약 속에 십자가 앞에 세워서 너는 항상 새 언약을 위하여 새로 시작해야 될 인물이다. 새로 시작 않는다면 항상 여기는 사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너, 과거에 잘 나갔잖아요. 근데 너 왜 이 모양이야. 어제보다 더 나아야지. 어제보다 훌륭해야지. 새로 시작할 거 없어. 이만한 것도 니 대단해. 거기서 조금만 더 플러스알파, 조금 더 키우면 너 훌륭하게 될 수 있어.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이 될 수 있어. 이게 사탄의 시험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뭉개버립니다. 새로 시작해야 돼. 새로 시작하면 모든 게 은혜고, 모든 게 사랑이고, 모든 게 부족함이 없고, 모든 것이 넉넉하고, 모든 것이 만족스럽고, 행복은 내가 있음 자체가 행복이고, 내가 여기서 말하고 있고 여러분 앉아 있다는 자체가 이건 감동이고, 놀라운 기적이고 내가 여기 있다는 게 기적이고, 감사, 감사, 감사 하고 있어. 아주 문신을 새겨라. 감사로 도배를 해도 모자랄 정도로 감사의 모습입니다. 현재 있다는 자체가.
왜냐? 왜냐하면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반드시 전제가 뭐냐? ‘없다’를 전제로 합니다. 너, 없어. 없는데 있잖아요. 그러니까 기적이지.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이 ‘없다’가 두 가지 개념이 있는데 이게 어려워요. 없다는 개념은 사실은 없다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개념도 있지만 죽음이라는 개념이 따로 있어요. 너는 죽어야 돼. 살 필요 없어. 하는 그런 개념도 있고 너는 애초부터 없다는 두 가지 다 있어요. 하여튼. 없는 거예요.
이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지금 창세기 17장 언약을 이야기할 때 이걸 이야기해야 됩니다. 이거 17장, 이거 이야기 안 하면 오늘 강의 안 돼요. 다시 합니다. 새로 시작이 두 자로 말하면 뭐라고요? 언약의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세울 때는 언약을 바라볼 때 나, 언약 믿어야지. 오면 너 새로 시작해. 너 처음부터 없는 사람인데 언약을 위하여 너가 믿는 나라가 믿는 언약을 위해서 너는 이 땅에 오늘 처음 새로 태어난 인간이야. 너는 언약의 사람이야. 이젠 니 아브람 하지 마. 아브라함이야. 이게 오늘 본문 내용입니다. 너는 아브라함이야. 너는 사래가 아니야. 사라야. 왜? 언약을 그렇게 새로 시작하는 거예요.
자, 너무나 어려운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진도 나가면 무리입니다. 무리기 때문에 다시 쉬운 이야기로 돌아가서 이 어려운 이야기를 여러분 소화했는지 제가 한번 테스트해보겠습니다. 창세기 6장 18절에서 하나님이 언약을 세웠는데 언약을 세울 때 나온 건 뭐였습니까? 방주였지요. 노아하고. 그죠?
방주에서는 뭣이 수월했습니까? 안과 밖에 굉장히 수월했습니다. 방주 문 열고 들어가면 안이고, 방주 안 들어가면 밖이었어요. 안에 있으면 구원이고 밖에 있으면 멸망이에요. 굉장히 쉬웠습니다. 왜? 방주가 하나의 공간으로 찾아오기 때문에.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라함하고 언약을 세웠다 하잖아요. 아브라함 뱃속에 들어갈 수 없어요. 지 몸이나 내 몸이나 둘 다 그런 몸이니까 들어갈 수 없어요. 그땐 어떡하느냐? 어떤 공간을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안에 들어가면 사람이 달라져요. 사람이 달라지면 어떤 언약 안에 있다 보고, 이건 새로 시작이고. 바깥에 있는 사람은 옛날 구닥다리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요. 이것이 안에 있기 때문에 어떤 능력을 못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언약 안에 들어오면 너, 새로 시작해. 이래 되거든요. 그러면 안에 들어왔을까 밖에 들어왔을까 잘 몰랐는데 딱 들어가 어떤 상태가 되니까 너, 뭐든지 새로 시작해. 그게 감사야. 아하, 안에 들어왔구나. 내가 어떤 언약 안에 축복 안에 들어왔구나. 이래 되고.
언약 안 들어온 사람은 나, 어제 괜찮았으니까 오늘 더 낫게 하자. 어제 참 좋았지. 오늘 더 플러스해서 오늘 더 나은 사람 돼야지. 계속 자기 자신이 새로 시작할 의사가 전혀 없을 때 그 사람은 새로 시작하는 지시가 없는 능력 바깥에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은 바깥이 되는 겁니다.
노아 방주는 어떤 공간에 들어가면 안이고, 나오면 밖이지만 그 다음 아브라함부터는 새 인간 됐느냐, 아니면 옛 인간 그대로냐? 그것 가지고 안이냐, 바깥이냐가 결정 나는 겁니다. 참, 무지무지하게 어렵지요. 예수를 믿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달라진 게 없는데 성형수술도 하지 않았어요. 맨 쌍꺼풀 그대로 있고 전혀 방구도 빵빵 뀌고 전혀 달라진 게 없는데 예수를 믿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 피조물 된 어떤 증거가 없는데 나보고 피조물이다.
그러면 그 말은 뭐냐? 나는 이제 너를 새로운 피조물로 규정하는 어떤 보이지 않는 능력 안에 들어왔다. 들어왔기 때문에 새로운 피조물이라 하는 것을 이게 믿어지고, 그렇지 않고 어떤 언약 바깥에 있는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해도 난 그딴 거 난 수용 안 합니다. 하고 거부할 때는 언약 바깥에 있다고 이렇게 볼 수밖에 없어요.
사람 자체가 아브라함 언약부터는 사람 자체가 달라지는 그런 변화가 생깁니다. 달라지는 거예요. 달라진다는 말이 뭔 뜻이냐? 그걸 설명해야 돼요. 달라진다는 말이 행동이 달라지는가, 태도가 달라지는가, 그게 아닙니다. 달라지는데 어떻게 달라지는가? 그걸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새로 시작한다는데 새로 시작하는 게 뭐냐? 새로 시작하는 게 뭐가 바뀌느냐? 바뀌는 거 없어요. 그냥 그대로에요. 그럼 새로 시작한다는 게 무슨 의미냐? 오병이어 알지요. 오병이어 뭡니까? 보리떡 몇 개지요? 다섯 개. 물고기, 물고기 이상한 물고기다. 물고기 두 마리죠. 보리떡 원, 투, 쓰리, 포, 화이브.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잖아요. 누가 봐도 보리떡 다섯 개고 물고기 두 마리입니다.
누가 봐도 이거 가지고 오천 명 먹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아무 과정은 모르고 결과적으로 오천 명이 배불리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고 할 때 이것은 이 오병이어,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는 이건 가만있었지요. 가만있었는데 외부에서 누가 손을 댔지요. 손을 대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했잖아요. 외부에서 손을 댔지요. 여기.
엘리야 때 병에 참기름이 없습니다. 병에 참기름이 하나도 없어요. 참기름. 참기름 상표만 붙어있고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부어도, 부어도 계속 나왔지요. 참기름이. 거기다가 대접, 사발 온갖 것 다 가져왔는데 갖다 할 때마다 계속 나왔지요. 밀가루 통에 밀가루 하나도 없었는데 푸니까 또 나오고 푸니까 또 나오지요. 이거는 결국 뭡니까? 외부에서 손 탔다. 외부에서 손 탄 거지요. 분명히. 뭐 있어야 하지요.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의 특징이 뭐냐? 내가 나 된 것은 외부에서 손 타서 그렇지 내 능력이 아닙니다. 하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거. 헌금을 했다. 아이고, 집사님. 돈 아까운 줄 알면서 이래 했구나. 집사님이 참 대~단하십니다. 주님이 또 훔쳐 갔구나. 주님이 어젯밤 또 내 마음 훔쳐가서 돈 내라 한 모양이구나. 하여튼 주님은 나를 안 건드리는 날이 없어. 이게 뭐예요? 이게 새로운 피조물이죠. 이렇게 헌금하는 사람 아무도 없는 모양이죠. 아무 답변이 없는 거 보니까. 외부에서 손을 타야 돼요. 외부에서.
나아만 장군이 어느 강에 들어가서 나았습니까? 요단강 물기에 들어갔지요. 요단 물기가 아미노산이 있습니까, 비타민이 녹아져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 나아만 장군이 나았잖아요. 외부에서 손을 탔지요. 나아만 장군이 뭐라 합니까? 내가 나은 것은 내가 내 발로 요단강 들어가서 나았다 이래 주장합니까? 아니죠. 엘리사의 하나님이 날 낫게 했다 이 말 아닙니까.
그게 뭐냐? 예수 믿음으로 난 구원받았다 하는 사람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게 기적 받아야 돼요. 이게 기적 받아야 되지, 내가 구원 받는 것은 내 윤리도 봉사도 아니고, 교회 충성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손 탔어, 손 탔어. 왜 날 건드려. 가만있는데 왜 날 예수 믿게 해. 왜 날 오병이어처럼 사용해.
내가 사용했다. 당신 누구? 나, 새 언약이거든. 니 밑바닥. 니 존재의 근거, 근원, 존재의 원형, 아르케. 니 존재의 뿌리 밑에 깊이 들어가면 새 언약, 내가 새 언약 아니가? 아이고, 난 천상 천당 가야 되겠네. 가야지. 만나야지. 빼도 박도 못해.
외부에서 손 타겠다는데 무슨 재주로 그걸 막습니까? 사용하겠다는데 주님이. 믿음, 소망, 사랑 전부다 뭐예요? 외부에서 주어진 은사라. 믿음도 그렇고, 소망도 그렇고, 사랑도 그렇고. 나에게서 안 나와요. 나올 수가 없어요. 나는 나밖에 몰라. 아무것도 안 나와요. 내 욕망 밖에 안 나와요.
그런데 이러한 오병이어와 같은 바싹 마른 보리떡과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인다. 오천 명을 먹이든 만 명을 먹이든 우리는 심술만 낼 뿐입니다. 왜냐하면, 만 명을 먹여도 내가 좀 더 용 썼더니만 만 명 됐다. 이런 일이 없거든요. 또 주님께서 가지고 놀았구먼.
어느 사람이 말하기를 당신 때문에 이만 명 은혜 받았습니다. 나는 주님이 또 가지고 놀았구나. 아, 참 가만 놔두지 왜 자꾸 가지고 노는지 몰라. 모든 공로 누구한테 가야 돼요? 주님한테 공로가 돌아가는 사람은 이거는 새로운 피조물만 나타나는 기이한 현상입니다. 다른 사람은 모든 걸 자기가 다 했어요.
목사가 목회하고 난 뒤에 퇴직금 내놓고 나 고생했다. 돈 더 내라. 이거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지가 한 게 뭐 있다고? 지는 죽어야 마땅한데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고 살려준 것만 해도 엄청난 은혜인데. 뭐 했는데? 사업을 했어요? 목회, 사업은 아니잖아요. 그건 세상 사업이 아니고.
성도는 새로운 피조물이란 어떤 안에 들어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나를 놓치지 아니하시고 버리지 아니하시고 자꾸 날 가지고 사용한다는 겁니다. 자꾸 사용해요. 그런데 이게 내 능력 같으면 한계가 있어요. 아이고, 빼 먹을 거 다 빼었는데 별 거 없지. 내 능력 같으면 한계 있는데 이게 모세가 떨기나무 만날 때 성도의 모델처럼 하나님의 모델처럼 드러난 게 모세 여기 있고 모세 앞에 누가 있습니까? 떨기나무가 있지요. 모세가 뭐가 돼요? 모세가 마주보고 있는 떨기나무처럼 사용하겠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떨기나무가 불에 타는데 떨기나무가 불에는 타는데 타질 않아. 불꽃은 있는데 전혀 타질 않아요.
세상에 이런 기름이 있으면 사우디아라비아 망합니다. 이거는 기름 한 되만 하면 평생, 백 년 동안 기름 주유 한번 하고 난 뒤에는 영원토록 계속 샘솟듯 나오는 휘발유가 계속 나와서 더 이상 주유소 찾을 필요가 없어요. 그래 되는 거죠. 희한한 일.
여러분 성경에서 그 희한한 일 왜 안 찾습니까? 도망가는 베드로, 배반하는 베드로, 저주하는 베드로 잡아다가 또 사용하는 거예요. 니가 백날 해봐라. 내 손에서 벗어나는가. 그게 왜 성경에 그게 안 보이는지 몰라요. 열두 제자가 다 그렇습니다. 외부에서 손을 타는 거예요.
오늘 본문이 17장에서 이야기가 뭐냐 하면, 아브라함은 가만있어요. 이제부터 너하고 언약을 세워서 너 자손이 하늘의 별같이 새끼를 깔 것이다. 새끼를 낳을 것이다. 뭐 우엣다고? 내 언제 새끼 나 달라고 했느냐? 이름도 하나님 지 마음대로 지어요. 아브라함, 만국의 아비다. 많은 민족 또는 많은 사람의 아비라.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뀌었습니다.
자기가 원한 이름이 아닙니다. 호적 정정하려고 한 적 없어요. 아브라함은. 그냥 손 타는 거예요. 외부에서 손 탄다는 말은 방주 안에 놓여 있는 것처럼 지금 하나님 품 안에 놓여 있어서 하나님 마음대로 들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언약 안이에요.
그런데 제가 이래 이야기하면 목사님, 아무리 목사님이 좋게 이야기해도 역시 저는 방주가 편하게 느껴집니다. 문 열고 들어가면 구원이니까. 그게 더 편한 거 같은데요. 이런 생각 들지요. 방주 안에 들어가 봤자 인간 안 되면 천당 못 갑니다. 천국은 공간이 아니고, 사람 돼야 갈 수 있거든요.
결국 노아가 방주만 들어갔다가 그걸로 끝나면 되는데 노아도 죽고 천국 가야 안 되겠습니까? 그러면 천국가려면 떨기나무처럼 돼야 되거든요. 사람 자체가 달라져야 돼요. 어차피 달라질 거 사람이라면 백날 방주 천 번 왔다갔다해도 소용없다면, 우리는 다행스럽게도 소용없는 짓을 한 번도 안 하고 그냥 처음부터 애초부터 인간 달라져서 천당 가는 그게 오히려 낫다고 여기시기 바랍니다.
어떤 애들 보면 모의고사 1등, 저거 반에서 1등. 시험 치면 떨어져 버렸어. 모의고사 백날 1등하면 뭐해요. 본시험은 못 치는데. 우리 딸애가 피아노 전공인데 딸애 친구 가운데 이런 애 있어요. 연습할 때 보면 너무너무 잘 쳐요. 그런데 실제 피아노 치라 하면 다 틀려요. 피아노 치라 하면 벌벌 떨어서 못해.
제가 아는 어떤 소프라노 여자 가수가 있어요. 소프라노 성악가인데 그 소프라노 성악가는 연습할 때 보면 교수가 감탄합니다. 계대대학원 나온 사람인데 야, 참. 야, 이거는 기존의 한국 ( ). 그런데 막상 무대 서려 하면 벌벌 떨어서 목소리가 안 나와요. 무슨 소용 있어요. 아무 소용없잖아요.
지금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이 내 허락도 없이 다룬 다는 것은 끝까지 책임진다는 겁니다. 천국 가는 것도 그 분에 의해서 천국 가는 거예요. 이 땅에서 내 힘으로 신앙 생활한다? 이미 글렀습니다. 참 죄송한 말이지만 안 됐습니다.
언젠가 한계 이르면 믿음, 그 에너지 다 소진하면 툭툭 털고 교회여 안녕. 성경 덮어버리고, 역시 나는 교회보다 돈이 최고더라. 돈 따라 가는 목사들 많습니다. 복음 증거하다 돈 증거하는 목사들 거의 99.99%입니다. 복음 증거하다 성경 증거하다 나중에 손 털어버리고 돈 증거하고 이래서 부자 됐다. 그 증거하며 지도 돈 벌이에 나서는 사람 많습니다.
열심히 해봤자 자기가 배웠던 신학, 그게 십자가 신학이든 언약신학 그거 해봐야 자기 배운 누적된 거 그거 소진하면 그 마일리지 금방 다 닳습니다. 오병이어 그냥 사용하면 오병이어하면 한 두 개 주고 나면 세 개 밖에 안 남아요. 세 개 주고 나면 지꺼 없습니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신앙생활하면 이 바깥에 있는 사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신자임을 주님께서 우리가 얼마나 대단하게 우리를 사용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 곁에 죄란 죄는 다 오게 만듭니다. 죄가 관영하게 만들죠.
그럼 이걸 그림으로 그리면, 이 그림은 외울 필요 없습니다만 이거는 아무렇게나 생각한 겁니다. 우리가 여기 있다면 우리 주위에 죄가 한 층, 두 층, 삼 층 계속 죄가 죄에 또 죄에 또 죄에 자꾸 덮치죠. 결국 하나님이 이렇게 한 것은 이 죄에서 우리의 윤리와 우리의 선함으로 이걸 돌파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한다는 것을 분명하기 위해서 죄를 자꾸 쌓고 쌓는 거예요. 계속 쌓게 하는 거예요. 우리 힘으로 도저히 못 빠져 나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이게 창세기 15장에 있는 죄가 관영함이에요. 아브라함 자손이 아모리 족속이 죄가 관영하게 될 때 그때 약속의 땅에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자칭 하나님 백성이라고 여겼던 그들이 그 죄가 관영된 그 땅에 가서 어떻게 돼요? 똑같은 놈 됐습니다. 똑같이. 세상에 이런 멋진 일이.
그만 거기에 그 땅의 신을 섬기고 그 땅의 종교를 좋아하고 선호하고 그 사람들과 짝짝궁 돼서 신나게 살았어요. 그래서 첫 번째 강의의 주제가 뭐냐? [신나게 살자.] 신나게 살았어요. 과연 자신이 언약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 한번 측정해 보는 거예요. 신나게 살자. 묻지 마 관광, 예를 들어서. 원 없이 한 번 살아봐. 죄가 아마 찾아올 겁니다. 죄를 뒤집어 써 보세요.
그런데 뭘 느끼느냐? 도저히 내 윤리와 내 신앙심으로 뚫을 수 없는 것이 외부에서 손을 타니까 세상에 이 속에서도 오직 주님의 피로 말미암아 한꺼번에 이것이 다 백층, 층층이, 삼겹살, 오겹살, 칠겹살 아무리 층이 있어도 그것이 이 피에 언제 봄날에 눈같이 눈 쌓였다가 날씨 따뜻하면 싹없어지는 것처럼 이것이 없어지면서, 그 다음에 제일 중요해요. 없어지면서 아하, 적으세요. [아하, 이것이 죄이구나.] 이게 오늘 첫째 시간 핵심입니다. 아하, 이것이 죄 이었구나.
돈 많이 벌어서 십일조 해서 하나님 영광 돌린다 할 때 내 성깔에 맞기 때문에 하나님 좋고, 나 좋고 신난다, 돈 벌자 했는데 나중에 주님이 용서하고 보니까 아하, 그 생각이 죄이었구나. 안 한다가 아니라 마찬가지로 다음에 또 해요. 그 다음부터는 죄인 줄 알면서 해요. 죄이었구나. 라는 걸 아는 겁니다.
십일조해서 하나님하면, 목사님 복음 전하면 하나님 좋고, 나 좋고 나도 부자 돼서 좋고. 다 좋은데 뭐가 문제냐? 아하, 그것이 죄이었구나. 그 안에다 살포해 주는 거, 그것이 죄이었구나. 신난다고 찬송 하니 열댓 번 부르는 거 그것도 죄이었구나. 남보다 일찍 예배 참석하려고 열시 반에 오는 거, 그것도 죄이었구나. 농땡이 부려서 열시 반에 안 와도 구원받았는데 열한 시 이십분에 온 그것도 죄이었구나. 도대체 죄 아닌 게 없어요.
그러니까 죄 아닌 게 없으니까 뭔가 항상 뭡니까? 새로 시작하죠. 항상 주님의 은혜로. 내가 사는 것은 주의 은혜입니다. 항상 새로 시작하는 거예요. 욕심이 없이 항상 새로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신나게 사는 거예요. 새로 시작하면서 신나게 사는 겁니다. 이것이 언약 안에 있는 사람의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주께서 십자가의 피의 증인되라고 나에게 이만한 죄를 일곱, 천 층, 만 층을 쌓아났다는 것, 그런데 그게 하나도 겁 안 난다는 거. 어떤 죄를 져도 겁이 안 난다는 거예요. 그게 무겁지도 않고 무섭지도 안다는 거예요. 그게. 이미 그 안에서 구원받았으니까. 다만 남보다 더 세밀하게 그것도 죄라는 걸 깨닫게 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20070706b
집사님 질문 하신 게 왜 오병이어 같으면 오병이어로 끝나야지 열두 광주리로 끝나느냐? 이 말 아닙니까? 열두 광주리로 끝나느냐? 열두 할 때는 반드시 언약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실 때 야곱 언약이 열두 아들에게 퍼지거든요. 이것은 언약적인 행위이다 말이죠. 이것은 우연히 하는 행위가 아니라 무의미한 행위가 아니라 다 하나님께서 옛날 야곱에게 열두 아들에게 축복을 준 그 축복이 지금 오병이어에 담겨져 이런 놀라운 현상이 일어났다.
그러니까 받아 챙기는 것만 배부른 것만 좋아하지 말고, 무슨 연유로 이런 축복이 왔고 이 축복은 무엇과 연관되어 있는지 알란 말이죠. 열둘과 연관된 축복, 그러니까 언약과 연관된 축복이죠. 그 언약과 연관된 축복이 나중에 새 언약과 연결되는데 오병이어 떡 먹은 사람이 떡은 연관되었는데 새 언약, 그러니까 피와 살과 연관이 안 되어서 나중에 주님한테 얻어먹으러 왔다가 주님께서 내 피와 내 살을 마시지 않으면(?) 영생으로 들어가고. 도망 다 가버렸죠.
배부른 까닭으로 왔는데 새 언약까지 이어지지 못한 거예요. 아까 지표 같으면 지표면에 더 밑에 파고 들어가야 되는데 파고 들어가지 못하고 그 위에서 오병이어 먹고 내 존재가 주께 주신 떡으로 내 존재되었구나. 존재를 더 깊은 곳과 연관시켜야 되는데 오병이어 그 자체로만 자기 존재와 연관시켜 버리니까 떡 안 준다 하니까 도망가고 삐져서 가버렸어요. 많은 사람들이 제자들이.
-그러면 그 열두 광주리가 열두 지파에게 주신 주님의 은혜
예. 언약이에요. 동일한 언약적인 과업이죠.
-그럼 다른데 보면 또 일곱 광주리라고 나와 있거든요.
예. 고거 누가복음 그래 돼있죠.
-그건 어떻게?
그래서 학자들은 두 사건은 같은 사건이 아니고, 또 다른데 일곱 광주리 그렇게 했다 이래 보는 겁니다. 일곱 광주리라 하는 것은 그거는 언약과 관계없고, 창조와 관련 있죠. 창조와 관련 있다는 것은 모든 것을 무로 새로 시작해요. 없었는데 너희들에게 떡을 먹이는 것은 처음 창조할 때 ‘빛이 있으라’ 하는 것처럼 그 ‘있으라’ 할 때는 없는 빛이 생겼잖아요. 그처럼 너희들을 새롭게 만들어낸다는 의미에서 칠을 그렇게 되는 겁니다. 열둘은 야곱의 언약, 열두 제자들에게 포섭됩니다. 그게 요한계시록에도 나와 있지요.
우리교회(IP:220.♡.176.169)
07-07-22 13:44
20070706c 울산강의-창세기 17장(2)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죄가 관영, 죄가 몰려오는 것은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에 몰려옵니다. 죄가 오는 것에 대해서 이상히 여기지 말고 정상이라고 봐야 됩니다. 죄가 몰려온다 하니까 어떤 사람은 오해해서 죄 진다는 말이 아니고, 불신자는 죄 속에 있으면서 자꾸 자기 잘난 것에만 신경을 쓰다 보니까 자기변명만 늘어놔요.
나도 최선을 다하려 그랬습니다. 뭐 못 사니까 강도질했습니다. 뭐 어쩌라고? 사회가 나빠서 그런데 나보고 탓합니까? 나 부모 잘못 만나서 그랬어요. 나 원래 그런 인간이에요. 모든 것을 자기 정당성, 자기 잘남에다 이렇게 쭉 하는데 신자는 그 반대지요. 아이고, 나란 인간이 살아있다는 게 기적입니다. 아이고, 뭐 모든 게 고맙지요. 이런 식으로 범사에 감사하고.
이게 뭐냐 하면, 당신은 당신 잘난 것도 있는데 왜 그래 겸손해 하느냐? 잘난 것에 대해서 내 주변에 있는 죄의 관영함이죠. 나는 죄 용서해주신 주님의 예수님 그걸 믿지, 내 착한 행위를 믿지 않습니다. 주님의 새 언약을 믿습니다. 이것이 새로운 피조물이 아니면 이런 말이 나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죄를 보고 겁낸다 하는 것은 난 신자라고 볼 수 없어요. 죄를 겁낼 것 같으면 어디 가서 숨습니까? 도대체 내가 가는 곳에 죄가 몰고 다니는데. 몰고 다니는 게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하시는데. 죄 없는 곳에 피한다? 세상에 머리 깎고 절에 가보세요. 되는가? 안 되지요. 죄 없는 곳이 어디 있습니까.
주님께서 벌통에서 설탕물 찍어서 해 놓고 이거 왜 벌이 이렇게 많은가? 자기 몸에 설탕물 있는 것도 모르고 이상하게 벌이 왜 그렇게 달려들지? 벌 쫓아낸다고. 여름에 왜 모기가 많지? 여름이니까 모기가 많지. 겨울 되면 모기 있습니까. 우리가 그 아래 있기 때문에 그렇지요.
새 언약 아래 있다. 언약 아래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죄로 보이고 그 안에서 주님의 의로 말미암아 용서받는 그게 같이 겸하여 보이는 겁니다. 제 이 말은 아브라함이 언약을 받아놓고 아브라함이 죄 안 진다는 말이 아니에요. 아브라함은 뭘 해도 아브라함도 역시 죄인이기 때문에 자기 본성을 드러냅니다만 우리의 관심사는 그러한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어떻게 손을 타시고 계속해서 외부에서 개입하느냐? 그걸 증거하는 그것이 바로 우리 언약의 할 일입니다.
17장에 보면 3절에. “내 너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누가 돼 달라고 했습니까? 일방적으로 해놓고 이름도 바꾸죠. “너는 이제부터 아브람이 아니고 아브라함” 일개 가정이 아니라 이제는 열국의 많은 사람의 아비가 될 것이라. 그리고 6절에 보면, “번성케 하고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나리라” 이거 전부다 아브라함이 원했던 게 아닙니다. “너와 대대로 언약을 세우고 너희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결국 하나님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은 어디 나타나리라? 결국은 하나님 아브라함하고 언약을 세우면서, 이게 하나님이죠. 키가 큰 분은 하나님이고 키가 작은 사람은 아브라함하면, 아브라함하고 하나님하고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찾아와서 아브라함을 이렇게 묶어서 어디까지 데려갑니까? 결국은 나의 하나님은 어디서 기다린다? 결국은 새 언약에서 진짜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래 보는 거예요.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뭐라고 합니까? 내가 예수님 보기를 기다리다가 난 봤다. 아브라함이 예수님 봤대요. 여기 있는 하나님께서 같이 아브라함 껴안고 계속 밑으로, 밑으로 해서 결국은 새 언약까지 다 보게 한다. 예수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까지 보게 하신 거예요.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 입장입니다. 물귀신 작전이죠. 끌어안고 하시는 거예요. 해놓고 여기서 바깥으로 팍팍 이리 나오는 것은 전부다 누구 공로입니까? 다 하나님의 공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사용하셔서 이런 하나님 됨을 드러내는데 우리를 이렇게 호출한 겁니다. 그러니까 당첨된 거죠. 우리를 사용하셔서 드러내십니다. 우리는 그 과정 속에서 나는 전적으로 내가 한 게 없는 죄인에 불과한 것을 더욱 깊이, 깊이 알고 나중에 십자가 앞에 까지 가면 나는 설 수 없습니다. 하고 그렇게 탄식하죠.
예수님 앞에는 아니 하나님 앞에 서면 영광이지만 하나님의 뒤편에는 십자가에요. 모세가 본 것은 하나님 뒤편이죠. 그래서 어떤 제가 책을 낼 때 제목을 [하나님 뒤편]이란 책이 어떻겠냐? 하나님 뒤편. 하나님의 뒤편에는 이게 독생자의 영광이죠. 아주 수척한, 비참한 영광이 있어요. 하나님 뒤편에는.
하나님 앞뒤가 있어요. 앞에는 하나님의 무서움이고 설 자가 없고, 뒤편에 십자가에는 우리보다 더 낮아진 모습으로 우리를 반기고 있고. 오라 이거에요. 네 죄를 용서받았으니까 오라 이거에요. 뒤로 가서 앞으로 나오는 거다 이 말이죠. 십자가를 가지고 부활에 이른다. 우리 영광에 이르자. 그런 방식이에요.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은 오해했죠. 영광스러운 구름타고 오는 인자를 원했건만 그들에 나타난 인자는 십자가에 죽는 인자로 나타났죠. 그러니까 그들은 아무도 믿질 않은 겁니다. 하나님이 십자가로 독생자의 영광을 갖고 올 줄 아무도 몰랐지요. 비참하게 올 줄 몰랐다 이 말이에요.
그 비참함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가난하게 되면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고, 내 죄 때문에 저렇게 고생을 해야 된다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우리의 진면목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가 이렇게 저주받은 사람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몸소 저주받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게 아브라함에게 어떻게 나타나는가? 그게 곧 나오지요. 이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17장 10절 다같이 읽어보죠. 시작.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