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리고 전쟁 전(前)
27 여리고 전쟁 전(前)홍해와 요단강의 차이점은 홍해는 애굽 군사들에게 죽어야 마땅한 자들, 원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원망을 용서의 구원으로 바꾸는, 불뱀에게 물려 마땅히 죽어야할 입장이나 용서로 살길을 열어주시는 그런 세례를(죽음에서 구원, 심판 속에서 생명) 홍해는 보여주지만, 요단강은 광야에서 함께 십자가를 져주신 그 감격으로 이제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며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오로지 주님의 이름만 의지하며 들어가는 겁니다. 이제 주의 이름(언약궤-약속)으로만 들고 들어가서 주를 위해 마땅히 죽어도 좋다는 담대함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즉 홍해는 나를 위해 십자가 지신 유월절 어린양 때문에 세례 받았지만, 요단강은 이제 그 유월절 어린양의 운명이 곧 나의 운명입니다 라고 죽음 속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럼 그 결단과 믿음과 용기 담대함이 나에게서 나오는 겁니까? 내가 어느 정도의 용기에 따라 그 내용도 달라지는 겁니까? 믿음은 몇점, 용기는 몇점, 담대함은 몇점이 되어야 들어가는 겁니까? 그렇기에 내가 하는게 아닙니다. 내 믿음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 여호와의 이름이 함께 하기에 그분의 믿음과 용기와 담대함이 나를 들이미시는 겁니다. 떠밀림을 받아서 알게되는 겁니다. 아 그 이름 때문에 내가 죽음을 통과 했구나 요단강을 통과 했구나. 그래서 그 내용이 뭔고 하니, 법궤를 앞장세우길 그 법궤 속의 원망을 용서로 바꾼 낮아진 이름, 그 이름만이 요단강을 건너게 한 유일한 이름이라는 겁니다. 그 이름을 믿어준 나의 대견스러운 믿음 용기가 아니라, 그 이름의 낮아짐이 아니면 어떤 누구도 죄 속에서 죽음 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기에 , 이제는 그 이름의 운명에 같은 운명이 되는 동참의, 참예의 세례가 요단강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날마다 죽노라 라고 했지요 이것은 믿음의 고차원적 수준을 말하는게 아니라, 예수님의 가신 길이 어린양의 운명이 내 길이요 내 운명이기에 내 안에 그리스도만 남게하도록 하기 위한 주님 쪽에서의 조치다 라는 겁니다. 그냥 막연히 바울처럼 살수 없을까 베드로처럼 그렇게 살 수 없을까 라는 그런 가스펠(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이 아니라, 그 주님의 조치가 지금 우리에게도 실제상황으로 밀어넣으시는 주님의 조치가 똑같은 조치가 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날마다 기대하면서 늘 부서지는 기쁨을 누리는 겁니다.앞서서 미리 일하심으로 기생 라합을 이스라엘이 전도하지도 않았는데 주님이 먼저 라합에게 찾아오심으로 그 찾아오시고 낮아지심으로인해 너무 감격 스러워 그 이름 앞에 자기 모든 것을 걸었듯이, 그 이름의 운명에 같이 동참한 라합에게 취하신 주님의 조치가 똑같이 그다음 타자 이스라엘에게 요단강을 통해 세례로 같은 운명에 참예케 하시고 또 똑같이 그다음 타자 우리에게도 지금 이순간에도 찾아오셔서 주님의 그 운명에 유월절 어린양의 운명에 똑같이 참예케 하심이 그 이름의 열심 하나님의 열심 때문이라는 겁니다.그럼 내가 할 일은 뭔가요? 없습니다. 없으면 보답은 우에 합니까? 주님 홀로 하시기 때문에, 또 하나님의 일이란 하나님 본인이 하시지 절대로 인간의 손에 안 맞기십니다. 언약을 성취하시고 다 이루시는 분은 주님 뿐입니다. 우리는 그저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이 바라보기 정신. 이것이 바로 출애굽의 홍해 정신이요. 요단강 정신입니다. (출 14: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출 14: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자꾸 우리가 할려고 달려드는 그런 생각은 바로 불뱀 물린 처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뱀에게 물린자는 그저 처다보기만 하면 됩니다. 다른 것 없습니다. 죄의 심각성을 모르기에 자꾸 뭔가를 할려고 달려드는 겁니다. 그럼 가만히 앉아서 사과나무 떨어지기만 기다려야 한다는 말이냐? 네 바로 그겁니다.(요 6:29) 언젠가는 떨어집니다. 문제는 우리가 떨어질때까지 못 기다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직접 사과나무를 따먹으러 올라가는 겁니다. 그만큼 우리는 믿음이랑 전혀 상관 없는 자들입니다. 죄 아래 갇혀 있기에 죄도 뭔지도 모르고(믿음도 모릅니다), 자기 기준의 죄만(자기 기준의 믿음만) 해결 하면 되니까, 여전히 주님도 나의 일함에 도구이지, 내가 죄 때문에 못한 일을 주님이 죄 해결 해주면 이제는 뭐든지 할 수가 있다고 나머진 내가 다 알아서 하겠다는 그런 생각으로 일관합니다. 내가 주체자 이지 주님이 주체가 되면 난 쪼다 바보 병신이 되기에 주님은 내가 바보 병신 쪼다가 되는 것을 싫어하니까 머리는 될지언정 꼬리는 되지 말라고 하시니까 주님은 그저 내가 하는 일에만 열심히 응원해 주시고 힘들 때 용기 주시고 낙심할 때 일어설수 있는 담대함을 주시고 병들었을 때 건강을 주시고 재수 없는 일이 연거푸 닥칠 때 복을 빌어서 축복이 넘치게 해주는 일만 해주시면 된다는 겁니다. 주님은 그런 우리에게 한 두 번 속으신 것도 아닌데 말이지요. 그래서 기대 안하시고 직접 일하십니다. 우리는 늘 그런거 기대 하는데 말이지요 주님은 용납지 않으시니 얼마나 감사한지요.그 직접 일하심이 우리는 싫은 겁니다. 왜냐 그 일하심의 내용이 우리의 예상과 전혀 일치하는 것이 없고, 늘 당황스럽고 극적으로 몰아가시니 차라리 우리가 하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의 직접 일하심의 의미에 늘 거부하는 자세입니다. 불뱀에게 물리게 해 놓구선 장대 높이 달린 구리 놋뱀을 쳐다보기만 하면 낫는다? 늘 이렇게 당황스럽게 고수준의 고차원적인 문제로 접근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늘 주님은 스스로 무시받는, 너무 유치 찬란해서 아무도 처다보도 않는 일만 골라 하십니다. 진짜 보기가 힘들어서 인가요? 아닙니다. 긍휼을 안 베풀어서 망한게 아니라 긍휼을 거부해서 망했습니다. 은혜를 스스로가 거부하기를 그런 믿음은 싫타, 내가 원하는 믿음은 뭔가 영웅스럽고 뭔가 화려하며 진짜 대대에 기록될만한 진짜배기 고차원적인 믿음을 원하는데, 믿을만한 믿음 달라고 하는데, 이 구리 놋뱀 처다보기는 우리를 너무 깔보아도 너무 깔본, 그런 믿음은 왠지 싫은, 우리 믿음을 너무 호구로 취급하는 그래서 자존심 상해서 못믿어주겠다 라는 아니 도저히 못믿겠다라는 스스로 발걸음을 돌리도록 하신다는 겁니다.(마치 구원받은 강도의 구원을 부끄러운 구원처럼 여기게끔 말이지요) 스스로 스스로(마 27:3 가룟 유다)뭔가 내 쪽에서 이 정도면 신앙의 성숙과 성화로움에 어느 정도 위기관리에 적극적인 대처를 할 정도의 믿음을 쌓았다 싶으면, 어느새 생각도 못한 일이 사건이 닥쳐 그렇게 공들여서 쌓은 믿음 홀라당 날라가고, 그저 내 하나 챙기기 바쁜, 내가 바라고 원했던 고상한 믿음이 아닌 진짜 처참하기 짝이 없는 몰골로 주 앞에 나오는 그런 원치도 않은 믿음을 주셔서 이끄시니, 참는것도 어느 정도이지 도저히 이런 믿음 싫타 라는 분들 너무 많이 만나 봤습니다.자 여기에 오늘 여리고성을 칠려고 이스라엘이 등장합니다. 가만히 있는 민족 왜 칩니까?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여호와의 전쟁이 시작 됩니다. 가나안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약속의 땅은 우리 인간이 원해서 치러가는 전쟁이 아니라, 주님 쪽에서 계획하신 전쟁입니다. 노아가 받은 은혜를 못 알아 본 이유로 함 땅 함 자녀 가나안의 죄악을 심판 하실려고 치시는 겁니다. 어떤 분은 노아 자기가 술먹고 취해서 자기가 잘못 해 놓구선, 왠 뚱딴지 같이 함에게 죄를 디집어 씌우느냐, 그럼 함의 실수이면 함만 벌주지 왜 죄 없는 손자 가나안은 왜 얼떨결에 죄인 취급하여 디집어 씌우느냐, 잘못은 자기가 해놓구선!!!(무지 이 부분을 강조하면서 흥분 하시더군요) 얼마나 솔직하게 말을 하던지, 우리는 늘 속내를 감추며 믿는 연기에 주력하는데 말이지요. 이것은 똑같은 왜 선악과를 만들었느냐 라는 질문과 같습니다. 왜 주님은 가인의 제사는 안 받고 아벨의 제사는 받았느냐, 아담이 못 먹도록 조치를 왜 안했느냐, 왜 하필이면 아기 예수님 때문에 2살 밑으로 다 죽어야 하느냐? 등등의 의문은 결국 우리의 선악과 사고방식을 자극 합니다. 주님의 일하심은 늘 이런 선악과의 생각을 끄집어 내어서 들추어 내어서 주님이 주시는 은혜로 채우실려고 합니다. 즉 우리를 불뱀 물린자로 다 만드셔서, 새 창조 작업인 장대 높이 달린 구리 놋뱀 처다보기 정신만 집어 넣겠다는 겁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원래 주님이 넣었던 생각이 원래 창조된 아니라 마귀가 집어 넣은 생각이다 라는 겁니다.(선악과) 알 필요 없는 것(선악과)을 알게 됨으로, 육체가 된 주님의 싫어버린바가 된 생각으로만 살아가고 아니 죽어가고 있기에, 죽음과 전혀 상관 없는 선악과 사고방식을 완전 박살 내기 위해 그 속내를 들추어 내기 위해 그런 상황을 선악과 생각 들추어 내는 작업을 노아라는 미끼를 통해 하신 겁니다. 즉 우리는 인간 끼리의 윤리적인 상황이나 삶의 상황으로 봅니다만, 주님은 노아 미끼를 통해, 아벨 미끼를 통해 죄악을 들추어 내시는 겁니다.(창 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여기에 더 황당한 것은 우리에게 물어보고 너는 이 역할 너는 진노의 그릇 역할 너는 긍휼의 그릇 역할 묻지도 않고, 오로지 우리 인간은 그런 권한 밖이고, 주님 혼자 악의 세력과의 싸움을 벌리시는 겁니다. 거기에 우리는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식으로 악한 영과 주님의 싸움에 끼여인 상태라는 겁니다. 거기서 누구는 진노의 그릇으로 누구는 긍휼의 그릇으로 놓인 겁니다. 거기에 힐문할 만한 권한을 가진 피조물은 없습니다.(롬 9:21)자 그럼 우리는 남몰라라 하는 나와 상관 없는 일이 아니라, 미끼가 되어 죄악의 실체를 들추어 내는 미끼 역할이냐, 아니면 그 은혜 받은 미끼를 훼방하는 핍박하는 삼키는 진노의 그릇 역할이냐, 딱 이 두 운명 뿐이다 라는 겁니다. 이런 설정 자체가 싫고, 짜증 나고 그러니까 성경을 순 엉터리로 해석한다고 몰아 세우면서 이단시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그만큼 우리는 은혜를 알기 싫어하고, 죄악의 실체와 싸우기를 거부합니다. 네 맞습니다. 다 싫어합니다. 우찌 내 자신이 죄악인데 죄악인 나와 싸우겠습니까? 싸울려면 나에게 벗어나 외부에서 나 자신과 싸워야 하는데 무슨 수로 싸웁니까? 나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는데 말이지요. 그렇지만 주님 앞에 붙잡힌 바 된 자들이 있습니다. 있고요. 그들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요 1:11-13)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외부에서 찾아와서 낮아지시고 그 낮아진 분의 붙잡힌바 된 운명에 그들이 이끌림 받는 것은 죄악의 실체가 무엇인지, 또 은혜가 진짜로 무엇인지 새로 지음받음을 통해 알아가도록 인도함을 받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이 원하지도 않는 이 가나안 전쟁에 참여케 됩니다. 저 가나안 민족을 치는 계획은 주님의 계획이지만, 실상 이스라엘은 저들을 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치기 위함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낮추시기 위함이듯 일관되게 낮아진 마음을 심기 위함입니다.그래서 여리고성 점령 전에 희안한 일이 있는겁니다. 바로 요단강을 건넌 자들 앞에서 칼을 들고 나타난 자가 가로막고 있는 겁니다. 자 이제 요단강도 건넜고, 수치를 제거하는 할례도 행했고 유월절도 지켰겠다 이젠 천국에 들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서론 부분의 설명처럼 이제 들이미시고 떠밀어 넣으셨으니 들어가 주기만 하면 됩니다. 가나안 땅(천국) 내 꼬야! 사랑해 ! 아이 러브 유! 그런데 가로 막는 분이 있습니다. 집어 넣으실려고 하실 때는 언제고 또 이젠 가로 막습니다.(창 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마 11:6)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역시 진짜 주님은 우리가 천국 갈려는 생각을 다 막으시는 분이다는 겁니다.(수 5:13) 『여호수아는 여리고에 가까이 갔을 때 갑자기 한 사람이 칼을 빼들고 자기 앞에 나타난 것을 보았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그에게 다가가서 `너는 우군이냐, 적군이냐?' 하고 물었다.』(수 5:14) 『그러자 그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우군도 아니고 적군도 아니다. 나는 여호와의 군대 총사령관으로 이 곳에 왔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땅에 엎드려 그에게 절하며 `주의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고 하십니까?' 하고 물었다.』(수 5:15) 『그때 여호와 군대의 총사령관이 여호수아에게 `너는 신을 벗어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다.' 하고 말하였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그대로 하였다.』창 3장의 상황을 똑같이 재현하심으로 인해 주님이 주시는 생명이 뭔가를 다시금 세세히 간섭 하시는 겁니다. 생명나무는 너의 힘으로 발걸음으로 너의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다. 이 천국은 너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너가 주를 위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신발 벗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겁니다. 여기까지 내가 내 발로 와주었잖아 ! 라는 의식을 잘라 버리는 겁니다. 벗어버리라는 겁니다.(삼상 17: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나의 능과 힘으로 구원 받은게 아니것은 강조함입니다. 오직 구원은 여호와께로 인한 것임을 강조 하십니다.(욘 2:9 요나의 표적 외에는 사랑이 없습니다)(요 13:1-38)(요 13: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요 13:5)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요 13: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요 13: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요 13:8)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요 13:9)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요 13: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요 13:11)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 하시니라』즉 깨끗한 자가 아니면 가나안 땅은 견디기 힘든 곳입니다. 햇빛보다 더 밝은 곳에서 우에 견딥니까? 생지옥이지요. 그러나 주님이 발을 씻겨 주심으로 인해 깨끗함을 입은 자는 주님의 그 공로만을 증거할 겁니다. 그래서 마치 두루도는 화염겸이 생명 나무를 아무나 못 따먹도록 막듯이 지금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칼을 들고 여호수아 무리를 가로 막고 있는 겁니다. 철저하게 가려내겠다는 겁니다. 거룩하지 못하면 못들어가는 천국, 약속의 땅임을 분명히 인식시킵니다.(마 22:1)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마 22: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마 22: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마 22: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마 22:5)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마 22: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마 22: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마 22: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마 22:9)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마 22: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마 22:11)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마 22:12)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마 22: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마 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주님! 홍해를 건넌 60만명의 장정들이 광야에서 주님의 낮추심(신 8장)을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옷을(갈 3:27) 입지 못하여 광야에서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주님이 끝까지 우리를 낮추시고자 하심은 그리스도의 형상(갈 4:19)을 닮게 하실려고 아들의 형상을(롬 8:29) 미리 예정 해주신 줄 압니다. 주님 그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빌 2:5)을 품을수 있도록 늘 세밀하게 간섭하여 주소서. 주님의 간섭 아니면 아무도 주님 곁에 갈자 없으니 끝까지 사랑해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소나무: 우째 이런 글이 있습니까. 그분의 의만 드러나네요. [09/07-23: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