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에 대해..
응답에 대해..
이름 : 고관규(IP:218.51.45.52)
신앙이란 내 기분 풀기나. 내 종교 즐기기는 아니라고 한단다. 내 자아의 회복이라든가 나를 찾는 회복정도의 모임은 아니라고 한단다.정 한수 떠놓고 드리는 내 소원 풀어 달라기는 아니라고 한단다.
신은 개인의 소원이나 풀어주는 고대의 신개념이 아니다. 더우기 같은 종교인들의 계모임이나, 동호회정도로 치부되고, 예배후에 연합하여 레저를 즐기는 모임정도는 아니라고 한단다, 같은 상처를 가지고 잇는 회원끼리 눈물을 주고 받으라고 신앙이 열려진건 아니라고 한단다. 반찬을 나눠먹거나, 돈을 위태로울 때에 꿔주며 나중에 배반당하라고 장이 열려 잇있는 건 아니란다. 인간의 변할 우애와 정이나 의지하라고 예배가 열려 잇는 건 아니다.
기도의 응답이란 내 아픔을 풀어 달라고 해서 금방 오는 것은 아니다. 기도 응답은 거의가 더디다.
무응답도 진한 응답이 된다. 무응답때문에 실망하거나, 원망하거나하면 본인이 손해이다.
무응답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때로는 깜깜한 상태의 무감각한 영성을 채험해야 한다.
지금 바라는 확실한 응답이 없어서 불평하는 것은, 내 욕심이다. 내 육이다,
신의 응답은 육이 아니라, 나의 영에 잇기에 때로는 응답을 한참을 보류시키신다.
이단들의 특색은 섣부르고 급한 응답을 약속하며, 만사형통을 사기친다. 이건 기독교의 진리를 천박하게 만들며, 싸구려로 만들며, 고대의 이방 종교의 특징의 현실의 부활이며, 나로부터 시작하는 형태의 바벨탑쌓기이다.
분명 무응답이라는 거부의 응답과 함께 진정한 응답은 온다. 그러나 정한 시기가 되어야 허락이 된다, 그냥은 안오며 고난을 통과치 못하는 응답은 전부 거짓이며, 인간과 악한 것들이 서로가 조작하여 만들어 낸 가짜 응답이 된다.
가짜 훈화와, 거짓 교훈과, 고난없는 승리를 증거하는 설파는 현대의 메스컴의 홍보전략과 그 맥을 같이 한다. 여성 모델과 가족으로 분장한 탈렌트들이 선전하는 아파트광고는 말 그대로 유토피아와, 더 낳은 세상과 행복의 삶을 빌미로 서민들을 현혹하지만, 서민들은 더 행복과는 멀어진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매스컴의 홍보는 모두가 조작이며, 환상의 드라마가 된다. 유토피아와, 행복한 가정은 노토피아가 되면서, 미궁의 가정이 된다. 그들은 인간의 죄악을 모르며, 외면하고, 돈과 모든 것을 바꾼다, 냉정하고 무정한,,말 그대로의 무자비한 사업의 연장화이며, 연장되는 무정함의 잔치가 된다.
기도의 응답을 말하면서, 이것을 말함은 우리의 많은 기도가 거의 이런 기도가 될 가능성이 농후해.
나부터 기도에 자아가 무너져야, 다른 것에 기도가 가짜응답으로 서게 되질 않는다.
내가 잘못된 기도에 서게 된다면, 다른 것이 나를 세운다.
그러나 내가 잘 된 기도로 무너진다면, 다른 가짜가 나를 세우지를 못한다.
그것들이 나를 세운다면, 마지막은 사상누각이 된다.
기도할 것이 없는 자들은, 다른 것들을 기도한다. 그러기에 다이나믹이 없고, 신앙이 감상적이며,
전쟁이 없고, 투쟁이 없게 된다. 신앙을 잘못 배우고, 선배들에게 속아서 그런다,
날마다 귀에 좋은 말, 좋은 응답, 좋은 약속만을 듣기를 기뻐한다. 티브이에서 보여지는 유토피아와, 그것들의 홍보가 인생의 최고인 줄을 아는 서민들처럼, 그들도 신앙을 그정도로 패대기 쳐버리니.....그러니 예언자들의 옛말들은 허당이 되며, 예언자의 고통을 모른다. 왜냐면, 선배와 스승들이 전혀 그런걸 배우거나 듣지를 못하기에 그런것이다. 그러니 심지어,,마지막 예언자이신 그분도 당연히 모를 것이다.
기도의 응답은, 현재로서는 불확실하나 불확실하게 느낀다 해서 그가 믿음이 약한 것은 아니다.
과정의 여로에서 그 진가가 나타나지. 내 소원이 다 응답이 되어야 한다는 내 착각과,내 욕심과는 다르기에 과정이 진짜이다. 그후에 응답이 응답이든지,무응답이든지는 순서로 나타난다.
그러나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기도햇기에 응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신의 불쌍히 여기시는 언약적인 긍휼로서 주어지는 것이다.
이게
다른 것과, 긍휼의 근본 차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