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7월 2일 지옥의 하나님 68p 핍박받는 선지자 1
대구 7월 2일 지옥의 하나님 68p 핍박받는 선지자 1
이름 : 우리교회(IP:125.190.2.8)
대구 7월 2일 강의
우리교회(IP:220.♡.176.141)
08-03-16 19:31
대구070702지옥의하나님p068
07 대구강의 9 - 지옥의 하나님 20 -핍박받는선지자1
07,07,02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핍박받는 선지자 !!
이제 강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교재 68페이지에 나오는 '핍박받는 선지자' 인데,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푸신다" 라고 할 때, 만약에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이 기적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뭐라고 하겠는가? 자연법칙을 어기는 것이 기적이라고 대답하지 싶은데, 물론 선생님들에게 그렇게 배웠으니 그렇게 답변을 하겠지만 말이다.
◈ 자연현상에 어긋나면 '기적'인가?
이렇게 자연법칙에 어긋나는 것이 기적이 되어버리면,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풀면 자연법칙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무능한(?) 하나님이 되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 법칙을 위반하는 셈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사람들은 이 자연 속에서 기적인 것과 아닌 것을 골라내게 되는 나쁜 버릇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연적인 것과 기적을 구분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자연적인 것은 자기에게 할당하게 되고, 기적은 신에게 할당을 하게 되는데, 즉 신의 영역으로 말이다. 예를 들어서, 미션계통학교의 고3 학생에게 교사가 상담하면서 하는 이야기가 "니가 할 수 있는 것은 열심히 하고 나머지는 하나님께 모두 맡겨라" 라고 말이다.
이렇게 구별을 해버리면, 사실 하나님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는 유치한 수준의 상담이지만, 물론 그렇게 가르치려는 그 마음은 좋은 면도 있는데, 그러나 "내가 하는 것이 하나님이 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고정적으로 여겨버리면 참으로 골치 아파진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제가 지금 말하려는 것은, 꽃이 피는 것을 왜 기적으로 보지 않고, 자기가 두 발로 걷는 것을 왜 기적으로 보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에게 익숙해진 것은 기적이 아니고, 돌발적이고 덜 익숙한 것은 기적이라는 말인가? 이런 태도는 너무나도 자기 위주로 안일하게 생각하는 경우라는 것이다. 자기 위주로 말이다.
◈ 인내 - 뭘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
그래서 성경에서는 '인내하라' 라는 말이 나오는데, 왜 이렇게 인내하라는 말이 나오는고 하니, 사람이 사태를 다 파악하지 못하는데,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자살하는 사람이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자살을 하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무슨 일들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말이다. 모르면서도 지레짐작을 해서 "이젠 끝장이야. 나는 더 이상 살 의의가 없어" 라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성경은 지적하기를, 자기가 뭔데 살 의의가 있는지 없는지를 이야기하느냐는 것이다. 자기가 살아온 것을 백 날을 축적해도, 그것으로 자기가 다 알았다고 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 말이다. 앞으로 하나님께서 어떤 사건과 의미를 또 줄지 모르고 말이다. 그래서 '인내하라' 라는 말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너는 잘 모른다" 라는 의미인데, 그렇게 잘 모르니 계속해서 소망 가운데서 말씀만을 붙들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 욥기가 보여주는 것은?
이번에 십자가 마을의 여름수련회에서 욥기를 강의하는데, 이 욥기를 통해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이 욥에 관한 내용들이 신약에도 몇 번 나오는데, 아마 베드로전서와 야고보서에 나오지 싶은데, 즉 "욥의 인내를 본받으라" 라는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이 심령이 상했다는 말이 있는데(어디?), 심령이 상하지 말고 그냥 팍 죽어버리면 되는데 왜 심령이 상해야만 하는가? 그러니 그것을 두고 '인내' 라고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전체 사태를 다 모르니 '인내하라' 라는 것이다. 흔히들 기적을 자기가 경험하지 새로운 것이라고 해서 신기하게 생각하는데, 그러나 자기에게 새로운 것이고 기적이지,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자연현상에 다 포함이 된다는 것이다.
(약 5:10)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약 5: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 성경에서의 기적은? - 오직 메시야를 이야기할 때만 !!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무엇을 기적이라고 하는가? 이것을 결코 빠트리면 안 되는데, 하나님의 언약의 인물, 즉 새언약의 인물인데, 오직 메시야를 지칭할 때만 기적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어떤 일이 어떤 일로만 끝나면 안 되는데, 즉 신기하다고 끝이 나면 안 되고, "야, 예수님이 하셨구나" 라고, 보이지는 않지만 현존한다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보이지는 않지만 지금 여기에 계신다고 하는 것이 분명히 느껴질 때, 그것이 바로 기적이라는 말이다. 마치 지금 천 목사님이 여기에 이렇게 폼을 잡고 앉아있는 것처럼, 그렇게 예수님의 현존하심이 온 몸으로 느끼는 것, 그것이 곧 기적이라는 말이다.
평소에는 우리가 바빠서 그런 것을 느끼지 못하는데, 그런데 어떤 어려움에 처하든지 성령의 역사가 있으면 섬뜩하게, 마치 투명인간이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처럼 느낀다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이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 그것이 기적이라는 말이다.
물론 그런 것은 자연법과 어긋나지 않느냐고 의구심을 가질지 모르겠는데, 그러나 믿음이라는 것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자연현상에 익숙해져있는 사람들이 익히 아는 것과는 달리 특별선물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특별한 선물을 말이다.
◈ 부처님은 부처님일 뿐 !!
절의 중들에게도 "야, 이것은 기적이다" 라고 하는 현상들이 많이 일어나는데, 그것을 두고서 중들은 "부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는 나사렛 예수님이 아닌 부처님이 나오기에 기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심지어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고 바다가 갈라진다고 해도 말이다. 그것은 아직까지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그냥 자기가 믿는 종교의 교주를 차용해서 일방적으로 해석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 선지자 - 그리스도의 영이 들어있는 자 !!
우리가 선지자를 공부할 때 베드로전서 1장 11절의 말씀을 잊어버리면 안 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이미 그 속에 들어가 있다" 라는 말씀을 말이다. 그렇다면 선지자의 모든 활동에서 무엇을 끄집어내어야 하는가? 장차 오실 메시야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와야만, 그렇게 해야지 선지자에 대한 해석이 제대로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벧전 1: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벧전 1: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그런 선지자들이 바로 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 에스겔, 미가, 나훔, 학개 등등 많다는 것이다. 그들 전체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그런 해석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기적인데, 이런 기적을 받은 사람만이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 빌립 집사와 에디오피아 내시가 받은 기적 !!
이것은 제 이야기가 아니고 사도행전 8장에 나오는 것인데, 거기에 빌립 집사가 에디오피아 내시가 나오는데 얼마나 신기한지 말이다. 빌립이 내시와 같이 수레를 타고서 성경공부를 했는데, 그가 "이분이 누구입니까?" 라고 질문을 했다는 것이다. 이디오피아 내시가 학문이 짧아서 문자를 모르겠는가? 아니면 그 성경의 구조를 모르겠는가? 언어학이든 뭐든 다 안다고 해도, 하지만 거기서는 그리스도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에디오피아 내시의 그런 질문에 빌립 집사가 대답하기를, "예,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라고 말했을 때, 이 내시가 거기에 동의했다는 것이 바로 기적이란 것이다. 기적을 받지 않으면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행 8:34) 내시가 빌립더러 말하되 청컨대 묻노니 선지자가 이말 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뇨 자기를 가리킴이뇨 타인을 가리킴이뇨
(행 8:35)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행 8:36)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
◈ 전도 - 하나님이 아닌 예수님을 증거해야 !!
제가 여러 번 이야기합니다만, 이 전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전도가 되어야, 전도하는 사람도 기적이고 그 말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똑같이 성령님이 임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고넬료와 베드로처럼 말이다. 이렇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능력으로, 즉 믿음으로 구원을 받음을 고백할 때, 그것이 바로 기적이라는 것이다.
◈ 목사님, 목회성공이 뭐예요?
그런 의미에서 목회성공이라는 것은 말이 안 되는데, 왜냐하면 기적을 목회자가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말이다. 물론 인간인지라 은근히 그런 성공을 기대하는데, 백날 전해도 안 믿으면 끝이라는 말이다. 사도행전 마지막에 무엇이 나오는가? 사도바울이 전하니 유대인들이 놀렸다는 것이다.
(행 28:26)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행 28:27)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
(행 28:28)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줄 알라 저희는 또한 들으리라 하더라
◈ 욥의 인내와 롯의 상한심령 !!
그것이 바로 욥의 인내이고, 롯의 심령이 상한 모습인데, 롯의 경우에, 롯이 어디 자기가 살던 성이 멸망당하는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하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사위도 농담으로 여겼는데 누가 자기 말을 들어주겠느냐는 것이다. 그게 무슨 뜻인고 하니, 그렇게 되도록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것이다.
저의 악취미인지는 몰라도 저는 이 대목에 오면 참으로 행복한데, 롯이 아무리 전도를 하려고 해도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말리는데 무슨 재주로 하겠느냐는 것이다. 롯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뜻을 거슬릴 수는 없다는 말이다. 물론 그 당사자도 그렇고, 아무리 믿으려고 해도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목회성공이라는 것이 얼마나 가증스런 말인지, 설령 목회에 성공했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하나님께서 붙여준 사람만이 봉사하다가 그냥 천당에 가는 것이지 말이다. 목회성공은 처음부터 없는데, 그런데 그것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는 독사 같은 우리 마음이 문제이고 말이다. 소위 '스타의식' 말이다.
◈ 열왕기상 13장의 선지자 연구 !!
오늘본문인 '핍박받는 선지자' 부분을 하기 전에 먼저 열왕기상 13장을 보겠는데, 이 부분은 구약성경신학을 하는 사람들이 논문을 많이 쓰는 대목인데, 이 13장은 선지자의 특징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가장 기초가 되는 대목이고, 어느 정도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일단 여기서 열왕기상 13장을 한번 보자.
(왕상 13:1)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하여 유다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니 마침 여로보암이 단 곁에 서서 분향하는지라
(왕상 13:2) 하나님의 사람이 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가로되 단아 단아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저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 제사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고
(왕상 13:3) 그 날에 저가 예조를 들어 가로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예조라 단이 갈라지며 그 위에 있는 재가 쏟아지리라 하매
(왕상 13:4) 여로보암 왕이 하나님의 사람의 벧엘에 있는 단을 향하여 외쳐 말함을 들을 때에 단에서 손을 펴며 저를 잡으라 하더라 저를 향하여 편 손이 말라 다시 거두지 못하며
(왕상 13:5) 하나님의 사람의 여호와의 말씀으로 보인 예조대로 단이 갈라지며 재가 단에서 쏟아진지라
(왕상 13:6) 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말하여 가로되 청컨대 너는 나를 위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여 내 손으로 다시 성하게 기도하라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니 왕의 손이 다시 성하여 전과 같이 되니라
(왕상 13:7) 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이르되 나와 함께 집에 가서 몸을 쉬라 내가 네게 예물을 주리라
(왕상 13:8) 하나님의 사람이 왕께 대답하되 왕께서 왕의 집 절반으로 내게 준다 할지라도 나는 왕과 함께 들어가지도 아니하고 이곳에서는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왕상 13:9) 이는 곧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명하여 이르시기를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도로 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왕상 13:10) 이에 다른 길로 가고 자기가 벧엘에 오던 길로 좇아 돌아가지 아니하니라
여기에 나오는 선지자는 남쪽 유다 쪽의 사람인데, 북쪽 이스라엘의 벧엘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때 마침 여로보암 왕이 분향을 하고 있었는데, 2절에 나오듯이, '요시야' 라고 하는 아들을 낳게 되는데, 그 징조로 또 단이 갈라지고 그 위의 재가 쏟아진다고 하는 것이다.
◈ 영조전하, 대구 지묘동에 우리교회가 !!
그런데 요시아가 태어난다는 예언이 300년 뒤에 이루어지는데, 이것은 실로 엄청난 시간의 갭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로 보면, 지금부터 300년 전으로 올라가면 올해가 2007년이니 1707년 같으면 아마도 조선시대의 영조와 정조 때이니 싶은데, 그때 어떤 예언자가 나타나서 앞으로 대구광역시 지묘동에 우리교회가 세워진다고 이야기를 했다면 참으로 황당하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 선지자도 십자가의 과정을 밟아서 !!
그런데 예언케 하는 힘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있지 않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까, 여기서 논리가 비약되기는 한데, 틀린 말은 아니니 한번 들어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지자 속에서 미리 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십자가라는 절차를 밟게 되어있는데, 그러면 이 십자가 무엇인가? 선지자를 죽이고 그리스도가 선지자임을 대언해서 말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그런 게 아니라면 선지자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물론 선지자의 자기 솜씨, 자기의 신학적인 기술, 그런 것들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러나 그런 것들도 부정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아는 데도 모른다고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아는 데로 하면서도 자기가 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공부를 하지 말라" 라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공부를 해도 그것을 사용하고 말고 하는 것은, 즉 그런 것을 기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예수님 몫이지 목회자의 몫은 아니라는 것이다.
◈ 오늘도 걷는다 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
그런데 이 선지자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선지자도 인간인지라 어떤 오류(?)를 범하는고 하니, 그렇게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일을 하면서도,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뜻을 자꾸만 자기가 하는 몫으로 이전(移轉)시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자기 몫으로 말이다.
목회를 해보지 않은 사람은 이런 부분이 실감나지 않지 싶은데, 정말 죽을 때까지도 목사로서 이런 부분을 극복하기 어려운데, 목사는 일반 교인들이 모르는 싸움을 해야 하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도 스스로도 기쁘게 은혜를 받고 새롭다고 느낀 것을, 그것을 자기 고유의 자질로서 이전시키는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목사의 경우에 "나는 이렇게 은혜를 주는 사람이니까, 나는 더 살아야만 되. 그러니 목사 짓을 더 해야 되" 라는 생각이 꿀떡 꿀떡 든다는 것이다. 이렇게 목사부터 이런 것이 해결이 안 되니, 교인들에게 말하기가 참으로 곤란하고 말이다.
◈ 하나님은 선지자를 개를 몰 듯이 !!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에게 계시를 전하면서 무엇까지 방지하는고 하니, "네가 전하는 예언의 말씀은 예언을 전하는 너 조차도 철저히 복종을 해야 한다" 라는 요건까지도 포함해서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그야말로 개를 몰듯이 몰고 다닌다는 것이다.
제가 이 부분의 논문들을 여러 권 보았는데, 그들이 구조주의나 내러티브로 풀어내기도 하는데, 하지만 제가 보기에 참으로 답답한 것이 제 아무리 이 본문을 분석해도 예수 그리스도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지찬도 그렇고 말이다. 이 본문에서 박사학위 논문도 제법 있는데, 중요한 구절이고, 또한 스토리 전개가 재미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9절을 한번 보자.
(왕상 13:9) 이는 곧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명하여 이르시기를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도로 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여기 "왔던 길로 도로 가지도 말라" 라는 것은 마태복음 2장에서 천사들이 동방박사들에게 한 이야기이기도 한데, 아무튼 여기에 있는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도로 가지도 말라" 라는 대목은 어떻게 보면 사적인 것인데, 선지자의 개인적인 문제라는 말이다. 이렇게 개인적인 것이기에 선지자가 구태여 이야기할 필요도 없는데, 그런데 이 여로보암이란 왕이 물으니 하나님이 시키는 데로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 최초의 선지자는 아담 ??
그런 의미에서 최초의 선지자는 아담인데,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라고 했는데, 그러니 이미 말씀을 받았다고 볼 수 있는데, 그러니 아담은 선지자 역할을 하는 것인데, 그런데 그 뒤에 보면 "니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라고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죽는다' 라고 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아담의 사적인 것인데, 그 당시는 하나님과 아담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아담은 자기가 선지자로서 말씀을 전해야 하고, 또 자기가 그 대상자로서 말씀을 받아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 선악과 말씀에 왜 사적인 죽음이?
그렇다면 왜 그렇게 '죽는다' 라고, 즉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라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어, 니 따먹었나. 그러면 이제 니는 죽었다" 라고 해도 되는데, 즉 그렇게 죽는 것을 나중에 처리해도 되는데, 그런데 왜 이렇게 개인적인 운명과 같은 죽음을, 왜 '따먹지 마라' 라는 선악과의 가치와 결합시켜서 미리 이야기하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해놓고는 실제로 죽지도 않고 900살까지 장수를 했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하시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전한 모든 말씀은 장차 오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담겨있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이 십자가의 복음은 무엇인고 하니, "말씀 덕분에 니가 산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가진 너는 이 땅에서 말씀이 움직이는 대로 똑같은 운명을 가야만 한다" 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이 말씀이 누구인가?
◈ 선지자는 예수님의 바이브레이션 !!
말씀이 바로 예수님인데, 그렇다면 선지자는 무엇인가? 아직 나타나지 않은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에 대해서 일종의 '바이브레이션', 즉 다같이 조절을 당하는 입장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죽으면 죽고 살면 살아야 하는 동일한 운명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선지자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죽음을 통해서 부활의 경험에 동참한 사람, 즉 이미 초청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아담이 지옥에 갔는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는 저주를 받아서 죽고, 그리고는 다시 살아나는 행복을 누려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사는 말이다.
◈ 아담은 그리스도의 표상 !!
그러니 "아담이 무엇을 잘했는가, 잘못했는가? 라는 것이 아니라, "아담은 그리스도의 표상이다" 라는 것이다. 그 한마디로서 모든 것이 다 끝난다는 말이다. 굳이 다른 말로 하면, 아담은 약속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매개물' 이라는 것이다. 아담은 창세 전부터 이미 그렇게 택정함을 받았는데, 그것으로 끝이라는 말이다.
◈ 성도에게 고민과 근심은 일종의 사치 !!
어제 그런 설교를 했는데,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서 살게 되어있는데, 그런데 인간들은 그것도 모르고, "나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그렇게 24시간을 자기를 위해서만 산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죄를 짓고 난 뒤의 인간의 본성이지, 원래의 모습은 아니라는 것이다. 원래는 하나님을 위해서 살도록 되어있으니, 더 이상 고민을 한다든지, 근심을 한다든지 하는 것은 일종의 사치(?)라는 것이다.
그래서 거지 나사로를 설교하면서, 그의 자신감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앞집에 사는 부자는 말하기를, "사람은 돈이 있어야 사람이다" 라고 하니, 거지 나사로는 "나는 돈이 없어도 벌써 사람이 되었는데" 라고 한다는 것이다. 자기는 헌데를 핥고 거지가 되어도 벌써 사람이 되었다는 말이다. 성경에 거지 나사로 이야기가 왜 나오는고 하니, 그 앞에 무슨 이야기가 나오는고 하니, 바리새인들이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한 대목이 나오고 나서 거지 나사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 개인적인 구원은 마귀의 함정 !!
아무튼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지 못하면 개인적인 구원은 어림도 없는데, 어떤 면에서 개인적으로 구원을 받겠다고 하는 것은 일종의 마귀의 함정이라는 것이다. 마귀가 파놓은 종교적인 함정 말이다. 지금 한국교회는 여기에 다 빠져있는데, 성경말씀을 보면서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자기가 무슨 일을 해야 저주가 아닌 복을 받는지, 그것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자기를 위해서 말이다.
그렇다면 선지자의 말은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여기서 '달라야 한다' 라는 것은 "나는 그리스도만을 위해서 산다" 라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도 똑같이 아담의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현재 우리들이 빠지는 함정에 동일하게 빠져야 한다는 것이다.
◈ 선지자가 보여주어야만 하는 두 얼굴 !!
그렇다고 해서 선지자가 지옥으로 간다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선지자는 죄인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담이 그 짓을 했듯이, 그런 아담의 속성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다윗이 왕이면서도 바세바를 범했듯이 말이다. 선지자는 이런 자기의 사명을 분명히 아는데, 여기서 11절 말씀을 보자.
(왕상 13:11) 벧엘에 한 늙은 선지자가 살더니 그 아들들이 와서 이 날에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에서 행한 모든 일을 저에게 고하고 또 그가 왕에게 고한 말씀도 저희가 그 아비에게 고한지라
◈ 기존 신학자들 - 북 이스라엘의 속성을 미리 보여준 사건 !!
여기에 보면 북쪽 이스라엘의 벧엘에 사는 한 늙은 선지자가 등장하는데, 이 부분을 기존 신학자들은 어떻게 해석하는고 하니, 벧엘이란 동네에 문제가 있는데, 그래서 그 동네의 늙은 선지자가 유다에서 올라온 참된 선지자를 죽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장차 북 이스라엘이 얼마나 속성이 더러운 나라인가를 미리 선지자들끼리 만나서 미리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그런 주장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앞으로 이 선지자 계열이 갈라지는데, 거짓 선지지와 참된 선지자로서 말이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은 왕 계열이 따로 있고 선지자 계열이 따로 있는데, 그 따로 있는 선지자 계열을 해석할 때 둘로 나누어서, 즉 정(正)과 반(反)으로 분리해서 해석을 해야 의미가 있고, 깊이가 있어 보인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참된 선지자의 원형을 이 13장에 나오는 선지자로 보고, 거짓 선지자의 원형을 그 참된 선지자를 꼬드기는 벧엘의 늙은 선지자로 본다는 것이다. "아이쿠, 괜찮아요. 뭐 훌륭한 선지자인데, 무슨 걱정을 하세요. 나도 하나님의 사명을 받았다니깐요" 라고 말이다. 사실은 거짓말하면서 말이다. 16절 이하에 그 대목이 나오는데, 한번 봅시다.
(왕상 13:16) 대답하되 나는 그대와 함께 돌아가지도 못하겠고 그대와 함께 들어가지도 못하겠으며 내가 이곳에서 그대와 함께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왕상 13:17)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이르시기를 네가 거기서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며 또 네가 오던 길로 돌아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로라
(왕상 13:18) 저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우라 하였느니라 하니 이는 그 사람을 속임이라
◈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몰라 !!
여기 18절에 보면,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우라 하였느니라" 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이 거짓말인가, 아니면 참말인가? 저는 느낌에 거짓이 아닌 것 같은데, 좀 애매 모호한데, 왜냐하면 뒤에 가면 이 선지자가 죽었을 때 참으로 애통해하면서, "오호라 나의 형제여" 라고 한다는 것이다.
만약에 이 늙은 선지자가 사기를 쳤다고 한다면, "아이쿠, 잘됐네. 어디서 함부로 남쪽 선지자가 감히 대(大) 북쪽 이스라엘을 넘보고 말이다" 라고 하면서 기뻐하지 않았겠느냐는 말이다. 굳이 요즘 말로 하자면, "어디 목사면 다같은 목사인 줄 알아. 어디, 니 같은 놈에게 감히 누가 속아넘어갈 줄 알아"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늙은 선지자는 회개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는 늙은 선지자가 거짓말을 했는지 아닌지 여기에서 결론을 내리지 못하겠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 18절 마지막에 "이는 그 사람을 속임이라" 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는데, 그러면 거짓말이 아닌가? 남쪽 선지자가 제대로 먹지도 마시지도 못해 불쌍해서 그렇게 한 것 같은데, 자기 구역에 왔다고 괘씸해서 했다기보다는 말이다. - 녹취자)
◈ 내가 만약 유다 선지자라면? 헉, 현실로 !!
아무튼 여러분 각자가 유다에서 온 선지자라고 여기고 한번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사실 인간이라면 이러한 유혹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너무 독선적이고 독단적으로 하면 안 돼. 남의 의견을 들을 줄도 알아야지. 그것이 겸손이야" 라고 하는 기본적인 도덕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참된 복음을 알고, 그렇게 독선적으로 나가면 마귀의 시험에 빠집니다. 하나님 뜻은 다른 사람에게도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 의견을 종합해서 최종적인 판단을 하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던 사람이 하나님의 지시를 받았는데, 즉 그 사람이 "나도 같은 선지자로서 천사를 통해 지시를 받았는데, 떡을 먹고 물을 마시라고 했습니다" 라고 했을 때, "감히 어디서 마귀가 까부는가?" 라는 말이 나오겠는가?
◈ 선지자는 그 시험을 미리 당하는 입장 !!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느껴야 하는고 하니, 또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해야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했던 그 시험을 지금 이 선지자는 미리 앞당겨서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을 당할 때 사단이 와서 유혹할 때, 결국은 이 일을 누가 해야하는고 하니, 예수님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홀로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많은 제자들이 있었지만, 모두 다 떠나가고 결국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혼자였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깨어서 기도하라고 말해도 다들 잠이나 자고 말이다. 그러니 제자들은 일평생 예수님께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수제자(?) 베드로도 물위를 걷기까지 했으면서도, 그러다가 예수님이 빠진 것을 건져준 것도 다 잊어버리고, 변화산에서 '여기가 좋사오니' 라고 하면서 까불거리다가, 마지막 십자가에 가니까 36계 줄행랑을 친다는 것이다.
◈ 결국 독생자 혼자만의 몫
그러니 인간은 어디에 개입을 하지 못하는고 하니까, 결국 이것인데, 독생자의 영광은 누구의 몫인고 하니 독생자의 몫이고, 독생자의 공로로만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받을 능력을 준 적이 없으니 말이다. 그분의 이름 자체가 능력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이외에는 다른 능력으로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냥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능력이 임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분의 능력이 임해야 이름을 부를 수가 있는 것이고 말이다. 그러니 그분의 능력과 우리의 이름 부르기는 서로 협조가 되지 않는데, 우리는 계속해서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구원의 능력에 포함이 되면 안 되고 밀려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성도이고 선지자라면, 강의 처음에도 이야기했지만, 우리는 자꾸만 뭔가를 이전(移轉)시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내가 이 정도 했으니 이렇게 되겠네" 라고 말이다. 이렇게 주님의 능력에 자기 능력이 가미될 수 있다고 오해를 한다는 것이다.
◈ 기존 신학자들은 왜 그리스도를 놓치는가?
그런데 기존 신학자들은 이 열왕기상 13장을 해석하면서 어떻게 하는고 하니, 그만 예수 그리스도를 놓쳐버리고서는,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을 대비한다는 것이다. "늙은 선지자를 보니까, 북쪽은 그야말로 왕창 썩었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아니, 그렇게 썩었으면 이 늙은 선지자가 회개는 왜 하느냐는 것이다.
◈ '내'가 아닌 복음이 우선되어야 !!
우리가 이 13장 18절을 해석함에 있어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이런 경우를 우리는 매일같이 당한다는 것이다. 성도라면 말이다. 자기가 설교시간에 듣고서 나름대로 정립하기를, "아하, 이렇게 하는 것이 옳다" 라고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한 주간을 살면서 온갖 소리를 다 듣게 되는데, 그러면서 수정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런 수정이 일어나는 이유가, 설교시간에 복음을 들었을 때는, "주의 은혜로 내가 산다" 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한 주간을 살면서 문장이 바뀌어서, "내가 살면서 무엇을 하면 되지?" 라고 된다는 말이다.
◈ 복음에는 '내 살기'가 제거되어야 !!
성도는 당연히 주님의 은혜라면 살기도 죽기도 하는데, 즉 자기가 살아야만 한다는 것이 제거된 것이 복음적인데, 그런데 그 복음을 듣고 난 뒤에는 "내가 살기 위해서 복음을 받았다" 라고 주객이 전도된다는 것이다. 순서가 뒤바뀐다는 말이다. 마치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서 복음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설교시간에 복음 안으로 들어가면, 자기가 살고 죽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주께서 살려주시니 산다고, 그렇게 주님 위주로 나갔던 것이, 그런데 교회당 밖으로만 나가기만 하면 그만 자기 위주로 바뀌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한 주간을 바빠서 교회에 나가지 못하면 마일리지처럼 누적이 되어서, "뭐 이근호 목사는 한 달을 땡땡이 쳐도 예수만 믿으면 된다고 하든데" 라고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점점 더 자기 집착에 무게를 두게 된다는 말이다.
이러한 유혹을 선지자만이 당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성도에게 다가오는 것인데, 마귀가 바보가 아닌 이상 성도를 알고 매일같이 덤벼든다는 것이다. 우리는 몰라도 마귀는 다 알기에, 즉 성도이기 때문에 그런 유혹이 항상 다가온다는 것이다.
◈ 예수님의 한 발짝 한 발짝마다 유혹이 !!
이것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제가 강조하고 싶은 말이 바로 이것인데, 선지자 속에 예수님이 계시는데,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안다면 모두가 끝이라는 말이다. 예수님의 한 발짝 한 발짝 떼는 그 발걸음마다 무엇이 달라붙는고 하니, 그것이 바로 '유혹' 인데, 꼭 광야뿐만이 아니라 평생을 가는 곳마다 유혹이 달라붙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열왕기상 13장에서 미리 보여준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것을 보면서 "우리는 이렇게 하면 안 되겠다" 라는 것이 아니라, "정말이지 예수님은 엄청난 유혹과 고난을 받으셨구나" 라고 해야, 그렇게 예수님을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다. "야, 주님은 메시야이면서도 이런 수모를 당했는데, 놀랍게도 흠이 없고 완전하게 극복해내셨구나" 라고 말이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가 그 다음 차례가 되고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해놓고는, 그 다음부터는 주객이 전도되어서 "내가 살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되지" 라는 식으로, 그 사고방식이 그만 바뀐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감당하기 힘든 유혹이라는 말이다.
◈ 남쪽 선지자가 깜빡한 점은?
그렇다면 이 18절에서 남쪽 선지자는 무엇을 놓친 것인가? 순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관심사에서 얼굴이 '획' 하고 돌아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쳐다보아야 될 선지자가, 즉 말씀이 자기 안에 있어야 될 선지자가, 아무튼 자기는 그런 말씀을 운송만 하면 되는 매개체의 역할만 감당하면 되는데, 자기는 화물을 싣는 화차이고 말씀이 화물이란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화물을 쏟아내고 다른 화물을 실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즉 관심사가 바뀌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제가 보기에는, 물론 저 혼자 해보는 생각이지만, 아마 그 남쪽 선지자는 떡도 먹고 싶고 물도 마시고 싶었을 것인데, 즉 자기 할 일을 다 했으니, 이제 좀 편히 쉬면서 대접을 받고 싶었을 것인데, 그래서 그 늙은 동역자(?)가 먹으라고 하니 먹었을 것이고 말이다. 여기서 20절 말씀 이하를 보자.
(왕상 13:20) 저희가 상 앞에 앉았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 사람을 데려온 선지자에게 임하니
(왕상 13:21) 저가 유다에서부터 온 하나님의 사람을 향하여 외쳐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며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한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고
(왕상 13:22) 돌아와서 여호와가 너더러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 한 곳에서 떡을 먹고 물을 마셨으니 네 시체가 네 열조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이 얼마나 황당한 이야기인지, 이 부분을 지금 연극으로 한번 해보았으면 좋겠는데, 천 목사님이 유다 선지자를 하고 제가 늙은 선지자를 하고, 어떻게 한번 해볼까요? 다음 성탄절 특집극으로 하자구요? 그러지 말고 지금 한번 해봅시다.
* 천 목사 : 이 목사님, 여기 풀무원 쥬스 좀 마시지요?
* 이 목사 : 아이쿠, 감사합니다. 같이 마시죠.
* 천 목사 : (갑자기 입이 열리면서) 니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왜 쥬스를 마시는가?
* 이 목사 : ? ? ?
◈ 슬픔이 기쁨으로 !!
그러니까 이것은 마태복음 25장에도 나오지만, 오늘날 우리가 성도로 살아가면서 고아원에다 쌀을 한 포대 갖다주어도, 그것을 줄 때는 "주여, 주께서 주셨으니 제가 줍니다" 라고 하다가, 그렇게 하다가 고아원 원장에 나와서 "아이고, 고맙습니다. 백골난망 무지로소이다" 라고 하면, 순간적으로나마 우쭐거린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때 고아원 원장이 갑자기 안색이 바뀌면서 하는 말이, "아니, 도대체 이게 짓입니까? 그것 좀 주었다고 해서 오만하게 우쭐거리고 말입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 성도에게는 얼마나 큰 기쁨(?)이겠느냐는 것이다. "정말 주님이 살아계시는구나" 라는 것을 알게 하시니 말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사람은 맞아야 인간이 되는데, 물론 여자를 함부로 하는 엉터리 신랑인 남편이 아닌 주님에게 말이다. 이렇게 성도가 교만하게 까불면 항상 사건이 터지도록 되어있는데, 그렇게 해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자기 공로로 전환되는 짓을 했음을 느끼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독특하게 욥기는 그 반대인데, 뭔가 착한 일을 하고서 우쭐거리는, 즉 교만했을 때 당한 것이 아니라, 실컷 다 빼앗겼다고 화를 내니까 당한다는 것이다. 아무튼지 '하나님을 위해서' 라고 하다가 '자기를 위해서' 라고 바뀐 것에 대해서, 거기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그냥 가만히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23절 이하를 보자.
(왕상 13:23) 자기가 데리고 온 선지자가 떡을 먹고 물을 마신 후에 그를 위하여 나귀에 안장을 지우니라
(왕상 13:24) 이에 그 사람이 가더니 사자가 길에서 저를 만나 죽이매 그 시체가 길에 버린 바 되니 나귀는 그 곁에 섰고 사자도 그 시체 곁에 섰더라
◈ 남쪽 선지자의 억울한 죽음이 보여주는 것은?
여기에서 그 남쪽 선지자의 시체 곁에 나귀도 서고 사자도 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까, 그렇게 남쪽 유다로부터 올라와서 다시 남쪽 유다로 되돌아가야 될 선지자가, 가지를 못하고 도중에 북쪽 나라의 죄악으로 인하여서 죽었다고 하는 것은, 그 북쪽 나라가 비록 죄는 지었지만 그 안에다 무슨 흔적을 남겼는가?
그것은 바로 죽지 않아야 될 선지자가 죽어버리는 그러한 억울한 십자가의 흔적이 남아있게 되는데, 그 남쪽 선지자는 그런 업적(?)을 남기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의 온 몸을, 즉 시체로서 말이다. 그리고 나귀도 남쪽 나라의 나귀이고, 또 사자와 함께 그 곁에 섰다는 것은 다윗언약의 은총을, 그런 흔적을 남긴다는 것이다.
◈ 열왕기상 13장을 다시 정리해보면 !!
이 열왕기상 13장을 다시 정리해보면, 시커먼 죄악밖에 없는 북쪽나라에 말씀의 참된 선지자가 가서 완전히 쪼다(?)가 되었는데, 그야말로 시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선지자의 역할이 무엇인고 하니,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인데,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도대체 어떻게 나타나는가? 시커먼 죄악된 세상에 흔적을 남기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시체가 되어버린 흔적이라는 것이다. 즉 십자가를 남기는 흔적 말이다.
그렇다면 구약의 이사야, 예례미야, 이사야 등등 모든 선지자들의 갈 길은 이미 정해졌는데,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갈 길을 미리 앞당겨서 그들이 보여주면 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해야 제대로 된 성경해석인데, 그렇다면 어디로 가야만 하는가? 깨끗한 곳이 아니라 시커멓고 더러운 곳에 가야 한다는 것이다.
◈ 요나의 기적에 요나는 뻥 !!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자연법적인 기적을 원하면서, 요즘말로 하면 요술 정도 되는데, 즉 "어이 예수, 요술을 좀 부려보시지" 라고 했을 때, 그때 예수님의 대답은 "내가 너희들에게 보여줄 기적은 요나의 기적이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요나의 기적은 무엇인가? 이 요나가 선지자인데, 그것은 요나가 착하다는 말이 아니라, 삐쳐서 자살까지 시도했는데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요나에 대해서 해석을 할 때, 요나의 얼마나 착한지, 그러한 인간 됨됨이나 인격을 본 것이 아니라, 요나가 큰물고기 배속에서 3일만에 다시 살아난(?), 바로 그 대목을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한 것에다 결부를 시킨다는 것이다.
(마 12:38)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마 12:3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마 12:40)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 저 양반, 예수 하나는 잘 믿지 !!
우리가 살아가면서, 주께서 우리 인생의 어느 대목을 차용하는고 하니, "저는 십일조를 많이 했습니다. 착한 일을 많이 했습니다. 혹은 술을 마시고, 바람을 피웠습니다" 라는 대목을 사용하는 게 아니라, "저 김 집사는 그렇게 동네 사람들에게 욕을 먹으면서 살았지만, 자기 죄 때문에 십자가에 피 흘려 돌아가셨다고 하는 주님의 사랑, 그거 하나 계속해서 믿었다" 라는 것을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욥기의 주제인데, 그런 것도 모르면서 무슨 완벽을 기한다면서 설치고 말이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주님이 사랑하는 것이 아닌데, 주님은 오늘 아침에 우리가 무엇을 먹었는지를 따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님은 자기 약속에만 관심이 있지, 우리의 심리상태에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 치매에 걸려서 "나는 예수 모른다" 라고 하면서 돌아다닐지 모르는데 말이다.
그런 것이 아니라, 평소에 주께서 그 사람을 어떻게 사용했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평소에 누구를 바라보면서, 누구를 의지하면서, 도대체 무슨 사고방식으로 살았느냐는 말이다. 그래야만 성도이지 그렇지 않으면 성도가 아니라는 말이다. 설교시간에 제 아무리 예수님을 전해봐야, 백날 교회에 나와도 성도가 아닌 사람들이 수두룩하다는 것이다.
◈ 선지자는 핍박을 받아야 !!
주께서 자기 잘남을 사용한다고 여기면 성도가 아닌데, 주께서 자기를 그렇게 못나게 만들어서, 즉 "나 같은 인간이 천당에 간다면 천당에 가지 못할 인간은 아무도 없겠다" 라는 데까지 몰아넣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피의 공로로 이긴다고 하는 믿음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도의 모습이고, 선지자에 대한 해석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정리되어야하는데, 그래서 제목이 '핍박받는 선지자' 라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핍박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사실 우리가 이렇게 성경공부를 할 때는 "당연히 핍박을 받아야지요" 라고 하지만, 막상 자기 손톱에 가시만 박혀도 "주여, 이럴 수가 있습니까?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나는 너를 그런 가시가 없는 인간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너에게 가시가 박혀있던 전봇대가 박혀있던 그것과는 상관없이, 물론 건강해도 좋은데, 평소에 너는 누구를 바라보고 사는가?" 라는 것을 묻는다는 말이다.
◈ 내 인생은 그분의 것 !!
그러니 우리가 선지자를 공부하면서, 이렇게 "선지자를 바라본다" 라는 것은, 그야말로 자기 스스로 자기 인생에 대해서 책임질 생각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은 마귀의 시험인데, 자기 일에 자기가 알아서 책임지려고 하는 것만큼 큰 시험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책임자가 따로 있으니 말이다. 그런 책임 하나하나 다 따진다면 피곤해서 못 산다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열왕기상 13장 29절을 계속해서 보자.
(왕상 13:29)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의 시체를 떠들어 나귀에 실어 가지고 돌아와 자기 성읍으로 들어가서 슬피 울며 장사하되
(왕상 13:30) 곧 그 시체를 자기의 묘실에 두고 그를 위하여 슬피 울며 가로되 오호라 나의 형제여 하니라
(왕상 13:31) 그 사람을 장사한 후에 저가 그 아들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가 죽거든 하나님의 사람을 장사한 묘실에 나를 장사하되 내 뼈를 그의 뼈 곁에 두라
◈ 성도는, 못난이 삼 형제 !!
이렇게 되니, 결국 남쪽 선지자는 죽어서 전도한 꼴이 되는데, 그런데 그 전도한 사람이 완벽했는가? 완벽은커녕 오히려 못났다는 것이다. 못났기 때문에 북쪽 선지자가 회개했다는 말이다. 못난 인간과 못난 인간을 붙여서 그리스도만을 높인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왕 같은 제사장인 성도들의 갈 길이라는 말이다.
만약에 세상 사람들이 들으면 "참으로 안 됐다" 라는 소리를 들을 이야기인데, 그런 슬픈 운명을 미리 알다니 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으로 사용된다는 것은, 이것보다 더 큰 행복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걱정 근심이 몰아칠 때는 사명이 떠났다고 보면 되는데, 사명감이 충만할 때는 자기가 지금 무슨 옷을 입었는지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성령이 충만하면 말이다.
◈ 사명이 떠나면 자기 챙기기에 급급 !!
이렇게 사명감이 충만할 때는 사명만이 생각나는데, 그런데 그 사명감이 떠나버리면 '자기 챙기기'에 급급하다는 것이다. "내 행동은 완벽했을까? 오히려 남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았을까? 바보같이 그런 소리를 해서 상처를 주면 안 되는데, 그때는 좀더 도와주었어야 하는데" 라고 하면서 자기를 챙긴다는 말이다. 이런 것은 당사자를 잠도 제대로 못 이루게 하는데, 이렇게 인간은 사명이 떠나가 버리면 자기 챙기기에 급급하다는 것이다.
대략적으로 이렇게 선지자에 대해서 설명했는데, 이제 우리 교재 68페이지를 보도록 하자.
** [핍박받는 선지자] - 하나님은 왕이지만 자기 백성들이 왕 되심을 제대로 이해하자면 그 왕께서 오셔서 이 땅에서 자기 백성의 죄 때문에 억울하게 희생된 모습을 보여줘야 할 운명을 지니게 된다. 이것이 바로 다윗언약의 틀에 맞는 메시야의 모습이다.
◈ 왕이 아닌 선지자 노선으로 !!
물론 여기서 선지자가 완벽하다는 것이 아니라,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선지자도 못났기는 역시 마찬가지인데, 그런데 왕은 그런 선지자를 핍박하는 세상 권력의 수장으로서 이 땅에 서게 된다는 것이다. 때로는 왕도 회개를 할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는 반드시 그 옆에 괜찮은 선지자가 있었다는 말이다. 즉 왕은 자립성을 상실했다는 말이다.
히스기야 왕의 경우에, 그는 기도해서 15년을 더 살았는데, 사실은 그야말로 바보 같은 짓을 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를 위한 하나님이 아니었는데, 하나님은 자기 노선이 아니라 선지자 노선인데, 즉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서 나아간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번 주 수요설교 내용인데, 그것을 미리 좀 맛을 보자면, 하나님은 이사야의 노선으로 가는데 그래서 이 히스기야는 이사야의 덕을 본다는 것이다. 자기 나라가 이사야 덕분에 살아있는데, 그런데 히스기야 왕은 착각하기를, 창고에 보물이 많이 있다고, 즉 자기 때문에 유다라는 나라가 존재한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 나아만 장군의 경우에도 !!
열왕기하 5장에 나오는, 문둥병에 걸린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도 그런 경우인데, 그가 걸린 문둥병은 누가 한 일인가? 하나님께서 걸리게 했는데, 그렇다면 나아만 장군과 누가 연결이 되어있는가? 그의 문둥병을 낫게 한 것은 엘리사인데, 그 엘리사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말이다.
(왕하 5:1)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저로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저는 큰 용사나 문둥병자더라
그러니 나아만 장군과 엘리사의 관계에 의해서, 즉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문둥병에 걸렸는데, 그렇게 문둥병에 걸렸으니 엘리사를 찾아왔지, 그렇지 않으면 골프나 치러 다니지 왜 엘리사를 찾아오겠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찾아와서 엘리사가 믿는 하나님의 덕을 입고 갔다는 것이다.
◈ 엘리사의 존재함이 시비를 거는 이스라엘 왕 !!
그런데 여기서 제3의 인물을 보면, 그 인물이 바로 이스라엘의 왕인데, 그런데 이 왕은 결국 누구를 핍박하는고 하니, 선지자 엘리사를 핍박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을 고치는 선지가 있느냐고 물으니, 대답하는 왕의 반응을 보면 재미있다는 것이다.
아니 제대로 잘못을 지적하고 야단을 치려면 나아만 장군에게 하든지 않고, 괜히 자기 나라에 있는 '엘리사' 라는 선지자가 있어서 헛소문을 내서, 즉 자기가 고치지도 못하는 문둥병을 고친다고 하는 바람에 이 아람나라 장군이 자기가 걸린 문둥병을 고치라고 해서, 그러니 제대로 고치지 못하면 자기 나라를 공격하려는 시비의 근거를 제공한 엘리사 선지자에게 잘못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엘리사의 존재함 자체에 시비를 건다는 말이다.
(왕하 5:6) 이스라엘 왕에게 그 글을 전하니 일렀으되 내가 내 신하 나아만을 당신에게 보내오니 이 글이 당신에게 이르거든 당신은 그 문둥병을 고쳐 주소서 하였더라
(왕하 5:7) 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내가 어찌 하나님이관대 능히 사람을 죽이며 살릴 수 있으랴 저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 보내어 그 문둥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로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줄 알라 하니라
◈ 바로 누구? 저와 여러분 !!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니 마을 사람들은 누구를 쫓아내는고 하니, 그 귀신을 쫓아낸 예수님을 쫓아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은 마을 사람들에게 핍박을 받은 것인데, 이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모습이 예수님이 가야할 길이라면, 그 모습을 이제는 누가 보여주어야 하는고 하니, 바로 저와 여러분이라는 것이다. '저와 여러분' 이라고 하니 참으로 감격스러운데, 우리는 그런 팔자를 타고났다는 말이다.
(막 5:15)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막 5:16) 이에 귀신 들렸던 자의 당한 것과 돼지의 일을 본 자들이 저희에게 고하매
(막 5:17) 저희가 예수께 그 지경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목사가 실컷 복음을 전하고 나니 들리는 이야기들이, "나는 이 복음밖에 모는 교회에 오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라고 하니, 그때 얼마나 억울하냐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천국을 보여주는 타이밍이 참으로 기막히는데, 아주 힘든 가운데서 보여준다는 말이다. 힘들 때 잠깐 보여주고서는 곧장 닫아버리고 말이다. 그래서 성도에게는 인내 가운데 환난을, 환난 속에서 소망을 맛보게 하신다는 것이다.
(롬 5: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롬 5: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다윗 왕은 우리아의 죽음을 통해서 그 모습을 엿보았다. 그러나 다윗 이후에는 숱한 선지자들이 이 우리아의 슬픈 운명을 지니고 이 땅에 나타났다가 사라져간다. 이 모두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몰이해에서 발생되고, 무엇보다 자신의 죄악에 대한 무지가 가장 큰 원인이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마 5: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 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여기 12절 말미에서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라고 말씀할 때, 선지자의 개념, 즉 선지자의 특징이, 선지자의 공통점이 과연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분을 위해서 미리 앞당겨서 핍박받은 자만이 선지자라는 것이다. 그래야 만이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선지자이고, 그렇게 않고 그렇게 되려고 흉내를 내고 애를 쓰는 자라면, 오히려 가해자라는 것이다.
** 참 선지자들은 전혀 백성들에게 호응을 받지 못한 채 미움의 대상으로 살았지만, 반면에 그 당시 거짓 선지자들은 대중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으면서 칭찬 속에 살았다.
이렇게 참된 선지자들은 미움의 대상이었는데, 물론 거짓 선지자는 그 반대이고 말이다. 엘리야 때에 아합왕이 엘리야를 찾기 위해서 현상금까지 걸었는데, 그때 엘리야를 숨겨준 '오바댜' 라는 아합왕의 궁내대신이 있었는데, 사실은 그도 겁을 내어서 엘리야에게 다른 곳에 가서는 자기를 만났다고 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러면 자기 목이 날아간다고 하면서 말이다.
아무튼 엘리야가 아합왕을 만나게 되는데, 그래서 아합이 엘리야에게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가 바로 너냐?" 라고 하니까, 엘리야가 하는 말이, "천만에 말씀이다. 오히려 당신이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이다. 그러면 어디 우리 한번 붙어볼까?" 라고 해서 서로가 갈멜산에서 목숨을 담보로 해서 한바탕 붙는다는 것이다.
(왕상 18:16) 오바댜가 가서 아합을 만나 고하매 아합이 엘리야를 만나려 하여 가다가
(왕상 18:17) 엘리야를 볼 때에 저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네냐
(왕상 18:18) 저가 대답하되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좇았음이라
(왕상 18:19) 그런즉 보내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 오십인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인을 갈멜 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오게 하소서
(왕상 18:20) 아합이 이에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로 보내어 선지자들을 갈멜 산으로 모으니라
어떤 분이 질문하기를, "목사님, 옛날에는 이런 일이 빈번했는데 요즘은 왜 없습니까?" 라고 하는데, 사실은 없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그런 복음은 전하지 않으니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도 이런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다들 공감을 하시죠? 복음을 전하면 다른 사람들이 눈치를 채고 시비를 걸어오는데,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서 누가복음 6장 26절을 보자.
(눅 6: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이 말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이런 수모를 당하면서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것을 선지자들이 미리 앞당겨서 보여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칭찬 대신 미움을 받으면서 십자가로 사라진다" 라는 것을 말이다.
여기서 미가서 6장 6절에서 8절을 보자.
(미 6:6)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미 6:7)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미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여기에 보자면,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이 나오는데, 천천이면 일천번제, 만만이면 일만번제인데, 다윗이 일천번제를 먼저 드렸고 솔로몬을 그 흉내를 내었다는 것이다. 다윗이 번제를 드리면서 일천 마리의 양을 바쳤다는 것이다. 천 번을 반복해서 드린 것이 아니고 천 마리의 제물을 바쳤다는 말이다. 요즘 말로 하면, 아무튼 엄청나게 큰 예배를 드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8절 말씀에서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라고 하는 것은, 결국 선지자들이 과연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보라는 것이다. 그러면 선지자는 어떻게 살아가는가?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기름을 하나님께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선지자는 자기 쪽에서 하나님에게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나님에 의해서 성신이 임해서 일을 한다는 것이다.
◈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기름이 극복되어야 !!
이렇게 인간은 하나님의 의와 사랑이 아니면 하나님께 나갈 수 없는데,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기름이 인간의 한계인데, 그러한 한계조차도 극복이 되지 않는다면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