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36:21-22 (잠잠하라)
사 36:21-22 (잠잠하라)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68)
본문: 이사야 36장 21-22절
제목: 잠잠하라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이사야-2005/094강-사36장,21-22,(잠잠하라)-isa070627.hwp
이근호
07-06-27 21:04
잠잠하라
2007년 6월 27일 본문 말씀: 이사야 36:21-22
(사 36:21) 『그러나 그들이 잠잠하여 한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왕이 그들에게 명령하여 대답하지 말라 하였음이었더라』
(사 36:22) 『그 때에 힐기야의 아들 왕궁 맡은 자 엘리아김과 서기관 셉나와 아삽의 아들 사관 요22아 자기의 옷을 찢고 히스기야에게 나아가서 랍사게의 말을 그에게 전하니라』
복음이란 기쁜소식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기쁨’이란 우리가 평소에 기대한 그 ‘기쁨’이 아닙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자신의 ‘소식’을 전하기 위한 기쁨입니다. 즉 하나님의 기쁨은 우리들이 기대한 그 기쁨을 부수지 않고서는 접근하지 않는 법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기쁨을 붕괴시키지 않고서는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지는 기쁨은 주어지지 않는 법입니다.
우리가 흔히 대하는 십자가라는 기쁜 소식은 실은 죽음에 관한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의 죽음만이 기쁜 소식이 아니라 우리의 죽음도 기쁜 소식으로 다가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평소에 우리는 살 궁리만하고 자신의 몸이 계속 살아있기를 원하는 그런 기쁜 소식만 고대하다보니 정말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허구적 용어의 일종에 해당될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건을 일으키고 사태를 일으킵니다. 하나님의 자기 백성이라는 유다 나라에 난데없이 사태가 들이닥칩니다. 가만있는데 험상궂은 적대세력이 막강한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 성을 꽁꽁 포위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앗수르라는 나라에 시비걸지 않았다는 점에 유념해야 합니다.
막강한 군대를 가진 적에게 대들다가 보복으로 된통으로 당하는 상황이 아니라 연약한 유다는 그냥 가만 있을 뿐인데 참으로 어처구니없이 앗수르 대군이 유다나라를 침공한 겁니다. 참으로 억울하고 또 억울한 일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토록 억울한 사태를 하나님의 백성이 처참하게 당하도록 일을 꾸미시는 겁니까?
그것은 유다나라에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속마음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사람들은 평소에 하나님은 운운하지만 정작 자신이 신봉하는 것은 오로지 자기 몸 뿐임을 잘 모르고 삽니다. 그러다가 자기 몸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면, 대번에 자기 몸 위주로 돌아서고 맙니다.
즉 무엇이 생생한 현실이냐를 놓고서는 사람들은 자기 몸만이 현실이다는 현실감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자기 몸에 아무런 이상이 없을 때에는 마음껏 목청높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표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참된 현실인 ‘내 몸’이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나 나올 허구같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랍사게는 이렇게 외칩니다. “어리석은 유다 백성들아. 너희들은 지금 성 밖에 내다보면서 무엇이 생생한 현실인지를 목격하라”는 겁니다. 즉 “너희들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하고 이 생생하고 처참한 현실하고 무슨 관계가 있느냐?”라는 겁니다.
우리가 이 본문이 말하는 그 현장에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리고 앞일이 어떻게 되는지 깜깜하게 전혀 모른다고 칩시다. 과연 그런 처참한 현실 속에서도 이 생생한 현실을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도저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똥, 오줌으로 연명하는 백성들의 울부짖음을 듣고서는 여호와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느냐 말입니다.
이것은 곧 ‘죽음의 경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찾아오실 때에는 죽음의 경험을 가지고서만 찾아오십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여전히 우리는 우리 몸만을 생생한 현실로 간주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우리는 기다리고 있다는 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세상에, 이것보다 더 생생한 현실이 또 있단 말입니까?
깜깜한 영화관 안에 들어가면 바깥에 폭우가 쏟아져도 알지 못하듯이, 마술사의 검은 보자기 같은 죽음 안에 우리가 들어가면 세상에 그 어떤 현실도 죽음이라는 이 현실에 비해서는 다 비현실적인 것이 됩니다. 결국 진리란 우리가 소멸하고 우리가 사라지는 죽음 안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이냐 하는 겁니다.
이 참된 진리와 생생한 현실을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는 앞당겨 마주보게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마치 자기 몸이 살아있는 것만이 현실로 보는 잘못된 현실관에서 벗어나게 해주십니다.
창세기 32장에서 야곱은 하나님을 만납니다. 거기서 그는 자신의 죽음을 맛보게 됩니다. 그전까지는 야곱은 철저하게 자기 몸 위주로 살아갔습니다. 하나님이란 그저 용어에 불과했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믿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에 대해서 외우고 다녀도 실제 관심사는 자기 몸 뿐입니다. 즉 ‘내 몸은 내가 살린다’주의였습니다. 자신은 타인의 몸으로부터 이용당했고, 그 보복으로 자신도 자기 몸을 위하여 타인의 몸을 이용했습니다.
삼촌 라반에게 속아서 사랑하지도 않는 언니 레아까지 아내로 맞이해야 했습니다. 21년동안 밤낮으로 일했지만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삼촌의 조차 야곱 이용해 먹기가 얼마나 악랄했든지 라헬까지 거침없이 아버지의 신상을 훔쳐나올 정도였습니다.
야곱의 세상 살이에는 그가 터득한 것은 오직 하나 뿐이다. “내 몸은 내가 살린다. 이 나의 몸 만이 나에게 유일한 현실이다. 나는 내 몸에게 지사충성할 뿐이다. 나는 오직 내 몸에게 봉사한다”입니다.
야곱은 이것만이 생생한 현실의 전부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 만나고 난 뒤 그는 이미 하나님 앞에서 죽을 몸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에게 살려달라고 간절히 붙들고 애원합니다. 그만큼 그는 하나님 앞에서 의미없고 무가치한 존재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았는데, 그는 다시 자기 몸을 위해서 살아갈 그런 사람으로 살아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완성하기 위한 하나님의 기능을 담당한 역할로서의 몸일 뿐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잠잠해야 했습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모든 일은 우리 성도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방식으로 찾아듭니다. 마리다,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자기 몸을 포기 못할 정도로 희망을 안겨다주는 그 오빠를 졸지에 죽게 하므로서, 그동안 마리다, 마리아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실은 자기 몸을 살리기 위해 예수님을 이용한 것임을 들통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십자가만 앞장세워서 자기 백성을 찾아오십니다. 더 이상 우리의 몸이 우리 것이 아님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죽었다고 살아난 능력으로 인해 사는 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죽음이 우리를 기다린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