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6월 22일 강의
광주 6월 22일 강의
이름 : 우리교회(IP:124.59.85.50)
http://222.231.1.74/~woorich1/study/gwangju/gwangju070622.hwp
우리교회(IP:220.♡.176.168)
07-07-01 13:27
gwangju070622-1
광주 강의(07. 6. 22) 27-1
시간이 되었으므로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요한 3서, 신약성경 396페이지입니다.
“장로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나의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이렇게 시작이 되지요.
편지 내용이 뭐냐? ‘사랑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겠죠. 그러면 편지 내용이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는 말로 쭉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까?
여기서 사랑하는 장로는 사도 요한이지요. 요한이 가이오 라는 사람에게(교회 담당자 혹은 목회자라고 할 수 있는데) 편지하면서 사랑한다고 했는데, 분명히 사랑하면 그 사랑의 내용이 있을 건데 그 내용이 뭐냐?
9절에 보면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게 썼으나 저희 중에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접대하지 아니하니 이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디오드레베를 주의하라고 합니다.
12절에 보면, “데메드리오는 뭇사람에게도, 진리에게도 증거를 받았으매 우리도 증거하노니 너는 우리의 증가가 참된 줄을 아느니라”
결국 이 사람의 문제점을 드러냅니다.
그러니까 ‘사랑한다.’고 해 놓고 ‘나는 네가 좋다.’ 이런 쪽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고 “진리 안에서” 3절에 나오지요. 그냥 사람보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너와 나 사이에 진리 안에서 서로 사랑하자’고 하지요.
이것을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여기 사도 요한이 있고 이쪽에 가이오가 있다면, 우리 둘이 사랑하는 사랑이라는 것은 그냥 인간적인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고 진리라는 공통 영역이 형성된 채 비로소 서로 사랑하자. 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 증거가 어디 있느냐 하면 ‘이런 자는 용납해서는 안 된다. 디오드레베같은 이런 인간을 용납하면 너와 나는 끝장이다.’ 이렇게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술이 좋다면 술이라는 영역 속에서 서로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쪽이 ‘나는 술 끊었다.’고 하면 그 다음부터는 헤어지게 마련이죠.
진리가운데, 사랑가운데 있는 것은 이것이 일종의 지상의 천국이라고 보면 됩니다. 천국은 죽어서 가는 데가 아니고, 천국 가서 살 마음가짐을 가진 사람이 누구냐가 더 중요하죠. 무작정 가게 되면 ‘어, 이건 내 취향이 아닌데’ 이렇게 되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천국은 천국에 모인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진리를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겁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거지요. 보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는 겁니다. 내 죄를 위해서 생긴 그 창 자국이 보고 싶고, 내 죄를 위해서 흘리신 피와 그 못 자국.
그렇게 날 사랑했다는 그분의 얼굴이 보고 싶고 그분을 만나고 싶다는 그러한 사랑이 이 지상에게 같이 천국 가는 사람을 맺어주는 기준점에 되는 겁니다. ‘나는 예수 보고 싶은데 넌 누구 보고 싶노?’ ‘나는 노무현’ 이렇게 나오면 곤란하단 말이지요. 이런 자는 같이 천국 갈 사람이 아니죠.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사랑이 지속될 수 없습니다. 심지어 부부사이도 그렇고 부모 자식 간에도 그렇고 교인들 사이도 그렇고 목사와 교인들 사이도 마찬가지고.
관심사가 천국에 가서 살 내 마음이 어떤 마음이냐? 천국에 가서 주님과 함께 사랑하며 살 마음이냐? 여기에 관심을 가져야 돼요. “예수 믿었으니 가겠지 뭐!” 하면서 딴 짓하고 있어요. 관심사가 천국 가서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혼수 준비, 마음 준비하는 것이 아니고, “아이고, 죽으면 가겠지 뭐. 그것은 죽을 때 일이고 지금은 사는데 신경 쓰야지” 이렇게 나온다면 이 사람은 등불 준비 못한 어리석은 다섯 처녀 꼴 납니다.
오늘 이 강의도 좀 어려운 부분이 나중에 나옵니다. 어려운 부분을 이야기하기 전에 쉬운 것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진리 안에서 과연 진리를 사랑하는지 확인하는 차원에서의 편지. “아직도 진리 사랑해요? 아직도 주님 사랑하십니까?”를 확인하는 차원에서 편지를 주고받고 한단 말이지요.
여기서부터 약간 어려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이게 유명한 말씀인데, 조용기가 이야기해서 유명한 말씀이 되었습니다. 2절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이 꼭 간구할 문제입니까?
이것은 간구할 문제가 아니라 우리 욕망 아닙니까? 인간이라면 다 이렇게 되고 싶잖아요. 간구가 뭡니까? 그냥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간절히 기도하는 것 아닙니까. 이것을 간절히 고대할 사항이 아니잖아요. 이것은 기도하지 말래도 ‘이것은 당신이 말 안 해도 내가 알아서 신경 씁니다.’ 이렇게 나올 사항이잖아요.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함”은 길에 다니는 사람 누구에게 물어봐도 이런 것들을 다 원하잖아요. 이것이 간절히 기도해야만 얻을 수 있는 그런 내용은 아니란 말이지요. 간구할 사항은 아니란 말이지요. ‘그냥 성경대로 세사요.’ 하면 다 통하는 거란 말이지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구약을 다 뒤져야 합니다. 신명기 2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 약속의 땅이 텅텅 비어있었습니까, 꽉 차 있었습니까? 꽉 차 있었지요. ‘어디를 넘봐. 어디를 들어와.’ 한 치의 땅도 그저 주겠다는 족속이 없었지요. 오히려 반대였습니다. 한 치의 땅도 저 애굽에서 건너온 유랑민들이 행여나 침범할까봐 아주 단단히 단도리(점검, 정비)하고 사수했던 땅이 약속의 땅입니다.
약속의 땅이란 것은 일방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만 그렇게 생각했지 정작 가나안 땅에 살았던 열 족속들에게는 약속의 땅이 아니라 자기들의 땅이지요.
지금 오 목사님이 지갑 갖고 있는지, 아니면 사모님이 갖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만약 오 목사님이 지갑을 갖고 있다면, 그 지갑을 ‘약속의 지갑’이라고 하면 얼마나 기분 나쁘겠어요? 이 지갑은 내 것인데 ‘약속의 지갑’이라고 하면 이것은 내 것이 아니라는 뜻이잖아요. 이런 무지막지한 것이 어디 있어요? 말도 안 되는 오버지요.
제가 지금 강조하는 것이 뭐냐 하면, 약속의 땅 먼지 하나라도 전혀 우리의 손톱도 하나 안 들어간단 말이지요. 약속의 땅 자체가. 손톱도 들어가질 않아요. 마치 멕시코 인들이 불법으로 이민가려고 미국 사막 텍사스주로 가면 환영합니까? 24시간 사냥개 풀어서 지키지요. ‘어디를 들어와!’ 지키잖아요.
지금 이 광주 땅에, 대구도 마찬가지고 서울도 마찬가지인데, 예수 안 믿는 사람한테 복음을 전하고 예수 믿게 한다는 게 얼마나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짐작해야 됩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 속에 마음이 텅텅 비어 있습니까? “복음 전해 주세요. 마음껏 전해 주세요. 제가 다 수용하겠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몰라요. 그냥 전해주시면 고스란히 받아들여 구원 받겠습니다.” 이럽니까?
식당에서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인간들이 그런 인간들입니까? 옆에 가서 담배 피우지 말라는 소리만 해도 사냥개처럼 왁 달려들 정도로 완전히 자기 것으로, 손톱도 안 들어가는 사람들이에요.
특히 목사 가정이나 집사 가정에서 자녀 키울 때 복음 전하면 손톱 들어가든가요? 복음 받아들이든가요? 부모 복음 믿는다고 자식도 믿는다면 오히려 수상해요. 저게 용돈 더 얻으려고 책략을 쓰는 건지, 도대체 뭘 노리고 저렇게 이중 인격적인 태도를 취하는지 의심이 간다니까요.
쟤는 주관도 없나? 부모가 믿는다고 등달아 따라 믿는 바보, 병신이 다 있나. 왜 쟤가 10몇 년 20몇 년 살았으면 자기 고집도 있고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을 텐데, ‘너의 모든 행동은 다 죄고, 주님 십자가 피로만 죄 용서 받는다.’ 이것을 부모가 믿는다고 자식이 따라 믿는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어머니나 믿으세요. 나는 그 딴것 안 믿습니다. 나는 바쁜 사람이에요. 난 관심이 딴 데 있어요.” 이렇게 된단 말입니다. “왜 어머니 종교를 일방적으로 강요하십니까? 이것은 폭력입니다.” 이런 식으로.
오늘 본문뿐만 아니라 신명기 자체도 이야기가 안 돼요. 도대체 상식에 맞지를 않습니다. 어디 그 사람들이 바보입니까? 지금도 팔레스타인들이 자기 땅 달라고 그렇게 피 터지는 싸움을 하는데, 자살 폭탄 터트리고 하는데 ---
땅을 잃는다는 것은 자기 발목을 자르는 것입니다. 내 유일한 조그마한 터전마저 날아가 버려요. 안중근이 권총을 왜 쏘고 이봉창이 도시락에 폭탄 숨겨 왜 던졌어요? 잘 먹고 잘 살려고 한 것입니까? 잡힐 줄 알면서. 우리민족 발 딛을 땅 한 조각 유지하려고 자기 몸 희생한 거잖아요.
그렇다면 안중근이나 이봉창의 그런 정신상태가 그 당시 가나안 10족속에게는 없었겠습니까? 가나안 족속들이 전부 바보들입니까? 이들도 하나의 국가를 형성했는데. 국가가 되면 국가 경영에 나서는데, 국가 경영을 어중이떠중이들이 하는 줄 압니까. 천제들이 나서지. 모든 인간들을 통치한다는 것이 얼마나 머리 쓰는 일이고, 특히 법률가들이 그런 일을 많이 하잖아요.
일사분란하게 한 국가를 운영한다는 것이, 외세의 침범과 내세의 치안을 유지해야 하고 세금 걷어야 하고 이것이 보통 일이 아니란 말이지요. 그런데 애굽 나라에서 “우리는 여호와를 믿는다.” 하면서 쳐들어오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땅 여기 있습니다. 가져가세요.” 그럴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애굽에서 건너온 사람들도 가나안 사람들이 그저 그 땅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겠습니까?
그런데 제가 신명기를 왜 거론하는가 하면, 신명기 2장에서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통곡했어요. 왜냐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저쪽 가나안 사람들의 사정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냥 순순히 말로 해서 안 내줄 것이 너무나 명백하고 그렇다고 그들을 칠 수 있는 힘도 없고, 무기가 어디 있습니까? 그들은 거지 떼들인데. 그러니까 답답해서 하는 일이 울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이 이야기하는 것은, 이 세상은 복음으로 꽉 차 있는 것이 아니고 복음 아닌 것으로 꽉 차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신명기 2장을 거론 한 것입니다.
1장 45절을 봅시다. “너희가 돌아와서 여호와 앞에서 통곡하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며”
진퇴양난입니다. 오도가도 못 할 처지입니다. 바로 우리 예수 믿는 성도들이 현실을 볼 때 이렇게 봐야 됩니다. 왜냐하면 이런 마음으로 봐야 우리가 예수 믿게 된 것이 내가 똑똑해서 믿는 것이 아니고 이런 불가능 속에서, 쓰레기통에서 장미 피듯이 불가능 속에서 웬 은혜인지, 아무도 안 믿는 예수를 믿었다는 그 감격이 비소고 그 틈에서 쏟아 나는 겁니다.
‘뭐, 아무나 믿는데’ 이런 마음 같으면 그 기쁨이 없어요.
지금 뭘 설명하려고 하는가 하면,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이것을 설명하려고 이렇게 길게 했어요. 사도요한이 예수님이 자기를 찍어주지 아니하면 자기는 사도도 아니고 천국도 못 가요. 이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안 찍어주면 진퇴양난입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돌아갈 곳도 없고 어찌할 방도가 없어요.
예수님께서 자기를 사도로 인정해서 성령을 주셨기 때문에 사도요한 자신은 영혼이 잘된 거예요. ‘영혼이 잘 됐다’는 이 말 자체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간절히 기도하고 고맙다고 할 문제라는 것입니다. ‘대충 믿자!’ 이게 아니고. 이제 믿게 되었으니까 고맙다고 인사하고 돌아서는 그런 것이 아니에요.
매일같이 영혼에 대해서, 내 것이 아닌 주님이 주신 영혼에 대해서 우리는 감사의 기도를 해야 됩니다. “주여, 참 이 영혼이 장난이 아니군요.”
얼마 전에 대구에서 음주 운전자가 단속 경찰관을 차에 매달고 가다가 경찰이 사망한 사건이 있었어요. 그래서 1계급 특진하고 했는데, 죽고 1계급 특진하면 뭐합니까? 차와 신호등 틈바구니에 끼어 죽었습니다. 흔히 말하기를 터져 죽은 거예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우리 영혼 잘 된 것 빼놓으면 이 땅에서 터져 죽을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꽉 차 있어요. 뭐로? 악마의 생각으로 꽉 차 있습니다. 어디에 가도 마귀의 생각이고 세상 신이 장악해 있어요. 손톱도 안 들어가요. 누구와 이야기해도 십자가 이야기를 끄집어 낼 틈조차 없어요. 허용을 안 합니다. 이 세상 자체가 돌아가는 게. 심지어 설교 시간에도 휴대폰 음이 울어대고 방해를 해요.
이 세상은 그 어디에도 ‘말씀 잘 듣고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에 잘 되세요.’ 이렇게 허용하는 세계가 아닙니다. 기도하다가도 [나쁜 남자 좋은 남자] 하면 보러 가야하고, 성경 읽다가도 [쩐의 전쟁]하면 봐야 되고, 복음 좀 이야기하려고 하면 전화 와서 불러내고, 컴퓨터에서 말씀 좀 들으려고 하면 자식이 사용한다고 문 꽝 닫아버리고 ---
‘복음을 전해 주세요. 복음 듣기 원합니다.’ 하면서 공간 마련하고 시간 마련해서 장을 열어놓은 그런 녹녹한 세상이 아닙니다. 젊은 얘들 말로 ‘그리 안 쉽데이(그렇게 수월하지 않다)’ 세상이 그렇게 쉬운 게 아니거든요.
우리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학교 다닐 때는 일요일 수업 없고 하니까 대충 교회 나옵니다. 그러다가 취직했다 하면 교회 끝입니다. 시집가기 전에는 교회 나옵니다. 혹시 좋은 남자 만날까 싶어서. 시집가면 끝났습니다. 교회 안 나와요.
이게 뭐냐? 이 세상은 텅텅 비어있는 약속의 땅이 아닙니다. 조금 틈만 있으면, 어느 정도인가 하면, 바께쓰(양동이)에 작은 구멍이 하나 나면 구멍사이로 물 다 셉니다. 마귀가 항상 공격해서 구멍을 내고 해요. 책 하나 교정봤다 하면 19곳에 틀린 것이 나오고.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에 19곳 틀린 것 나왔어요. [친절한 오 목사님]이 메일로 보내줘서 제가 대장간에 보냈어요. 내가 찾은 것 2곳 합해서 21곳, 그런데 휴대폰 문자 메시지로 또 1곳 보내와서 22곳. 그런데 22곳은 양호한 편입니다. 보통 50곳 나와요. 아직도 더 있을 거예요.
내 영혼이 가만있으면 잘 되는 줄 아십니까? 턱도 없는 소리요. 사람이 설교 들을 때 뿌듯하게 천당 간 것 같지요. 설교 끝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세상 걱정이 밀려오는데 작은 구멍 같으면 말을 안 해요. 마귀가 구멍을 뻥 뻥 뚫어서 복음이고 뭐고 날아가 버리고 이 구멍 막고 저 구멍 막고 난리예요. 예수도 복음도 관심 없고 구멍 막기 바빠요. 어디 한가하게 24시간 십자가 생각하고 은혜 감사하고 세상이 그런 만만한 세상이 아닙니다.
항상 사건, 사건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가 감당 못할 사건들이 있어요. 진짜 세속적으로 갔다 막아야 될 사건들이 계속 평생 동안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가하게 내 영혼 챙기고 할 새 없어요. ‘아이고 바쁩니다. 주일날 봅시다. 이번 주일은 바빠서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왜 이 세상이 빡빡하냐? 빡빡하단 말이 적당하네요.
세상은 빈틈없이 악마의 정신으로 차 있기에 누구와 대화를 해도 마귀의 소리가 막 나와요. 빈 진공상태가 아니라, 백지가 아니라 빡빡하게 처음부터 마귀 정신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오히려 가끔 가다 복음이 나오면, ‘내가 지금 천사를 만났나!’ 할 정도로 신기하게 여겨야 될 입장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텅 빈 것으로 여기고, 우리가 복음 전하면 마음껏 받아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영혼을 위해서 간구할 하등의 이유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말을 제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혼을 위해서 기도할 필요 없다고 여기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영혼이 잘 된다.’는 것은 기도할 문제지 방치해 놓을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니 그러면 목사님!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가만있어도 주께서 안 도와줍니까?’ 이렇게 반박하고 싶을 건데, 여러분, 특별히 기도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만큼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안 중요하다는 것을 늘 구분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아이고 내 영혼 뭐 어떻게 되겠지.’ 이렇게 방치한다는 것은 관심이 없고 안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게 1차적인 내 목적이 되지 않기 때문에 방치 대상이 되지요. 내 영혼이.
‘내 영혼이 잘 됨.’이 방치 목록에 해당되면 ‘주께서 알아서 하겠지’ 하고 주께 맡긴 것처럼 하지만, 그 사람이 지금 거짓말 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내 영혼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는 것은 이 사람은 빡빡한 세속에 정신이 팔려 있다는 증거입니다. 내 영혼에 관심이 없다는 말은 세상 재미에 잔뜩 빠져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영혼을 위해 기도 안 하는 거예요.
“목사님 주장대로라면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는데 하나님께 맡기지 내가 왜 간구해야 됩니까? 앞뒤가 안 맞습니다. 지금 와서 왜 엉뚱한 소리 합니까?” 이렇게 말할 사람이 있겠지만, 기도한다는 자체가 궁극적인 관심사가 우리 영혼이 우리 것이 아니고 누구의 것입니까? 주님의 것 아닙니까.
제가 아까 말했지요. 사도요한이 주님 안 찾아왔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 사람 영혼 누구의 것이 됩니까? 마귀의 것이지요. 주님이 사도요한을 찾아와서 사도로 선정했기 때문에 자기 영혼이 잘 되었잖아요. 이와 똑같은 심정으로 우리에게 부탁하는 거예요. “너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네 영혼”이란 거지요.
뒤에 ‘강건하고 범사에 잘되고’ 이것은 그 영혼에 따라오기 때문에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조용기가 이것을 중요하게 여겼지. 조용기가 반칙을 한 거예요. “네 영혼이 잘 됨같이”로 끝나는 거예요.
그런데 “영혼이 잘 됨같이”에는 관심이 없고 뒤엣것에 관심이 있어요.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한 것”여기에 관심을 두었다는 말은 앞에 있는 “영혼이 잘 됨같이”의 진면목을 몰랐기 때문에 뒤엣것에 더 관심이 가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엉터리죠.
세상은 만만치 않습니다. 빡빡한 세상인데 여기에 예수 믿는다는 것 하나 더 추가하려고 시도하다가 내 영혼이 날아가 버려요. 내 영혼에 무관심하게 된다 이 말입니다.
자, 그렇다면 “네 영혼이 잘 됨같이”가 어느 정도 레벨이냐? 이것이 오늘 강의의 제일 어려운 대목입니다.
“그럼 목사님! ‘내 영혼이 잘 됨같이’ 라고 하면 내 영혼에 관심 두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하는데, 죄송합니다만 그것은 엉터리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사람은 기준점이 없으면 내가 나에 대해서 어느 정도 중요시 여기는가를 모르게 되어 있어요. 기준점이 없으면.
예를 들면, 여기 [비타 500]이 있는데, 내가 이것을 너무 좋아해서 이것을 항상 곁에 두고 “너는 나에게 의미가 되었다.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줄 때 너는 나의 의미가 되었다.” 이렇게 좋아하는 거예요. 그런데 어느 집에 가니까 나처럼 [비타 500]을 좋아 하는데, 이 사람은 [비타 500]을 줄줄 빨아요. 그리고 막 울어요. 불쌍한 [비타 500] 하면서. 그렇다면 이 두 사람 중 누가 [비타 500]을 더 사랑합니까? 이 사람이 더 사랑하잖아요.
그런데 이 사람을 만나기 전에는 “비타 500아” 하는 그 정도만 이야기해도 [비타 500]을 사랑하는 것일 거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이것은 기준점이 없지요. 내가 [비타 500]을 사랑하는 기준점을 갖지 않은 상태에서 그냥 내가 좋아하니까 좋아하는 것으로 생각했단 말이지요. 그런데 진짜 [비타 500]을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나니까 내가 사랑한 것은 사랑 근처에도 안 갔더란 말이지요. 제 말 이제 아시겠습니까?
네 영혼을 사랑하고 네 영혼을 위해 간구하고 얼마나 귀한가 하는 것은 우리가 최선을 다한다고 해서 그게 사랑이고 중요히 여기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사랑했던 분을 만나야 됩니다. 바울은 어디에서 만났습니까? 다메섹이지요. 다메섹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사울이란 사나이와 예수님이 만났지요. 이 만남이 어떤 만남인지 쉽게 예를 들겠습니다.
길에 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차가 턱이 있는 줄 알면서 돌진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아주 뛰어난 사람입니까,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어리석은 사람이죠. 그러면 누가 손해예요. 자기 차만 고장 날 것 아닙니까.
예수님과 사울의 만남에서 예수님이 사울에게 뭐라고 얘기했습니까? “네가 나에게 돌진하는 것은 나(예수님)한테는 아무 해도 못 입힌다.” 돌진의 강도가 심하면 심할수록 결국 누가 당합니까? 사울 자기만 당하지요.
지금 내 영혼을 사랑한다는 기준점을 만났는데 사울을 자기 딴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충성을 다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예수 믿는 사람을 해치고 다녔지요. 예수님 만나기 전까지는 그것이 무모한 짓인 줄 알았습니까, 몰랐습니까? 몰랐어요.
어느 바보가 턱이 높은데, 턱이라고 하지 말고 콘크리트 벽이라고 합니다. 벽에 갔다 박는 것은 자살 행위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눈이 희미해서 벽인 줄 모르고 돌진했습니다. 벽이 있는 줄 몰랐지요. 누구만 압니까? 예수님만 알지요.
이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자, 예수님이 귀신입니다. 투명 인간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차를 몰고 갑니다. “야, 길이 넓고 좋구나.” 하면서 시속 160Km로 달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안 보이니까, 길 한가운데 콘크리트 벽처럼 서 있는 예수님의 몸체가 있다고 합시다. 예수님이 달려오는 사도바울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이제 스톱해야지. 달리면 너만 다쳐. 봐라. 너만 다쳤잖아!” 이것이 사울이란 사람과 예수님의 만남입니다. 영어로 clash. 충돌이라고 하지요. 충돌로써 만납니다.
사울은 완전히 눈이 멀어버렸습니다. 빛을 보고 눈이 멀었습니다. 세상에 평생을 살면서 이런 충돌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래서 화들짝 놀라면서 하는 말이 “주여, 뉘십니까?” 옆에 있는 사람들은 ‘당신 누구하고 이야기하나?’ 옆 사람은 천둥소리만 들었어요. 사람이 나타난 것이 아니고, 어떤 인물 예수님이 나타난 것이 아니고 우뢰 소리를 들었어요. 그냥 우뢰가 쳤을 뿐이에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몰라요. 그러나 사울은 알아요. 지금 누구와 만났어요. 시속 160Km로 달리다가 벽에 부닥쳤어요. 그것으로 인생 끝났습니다. 죽었어요. 자기 인생은 이미 죽은 인생입니다.
예수님 만나서 “주여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너는 내가 없는 줄 알았지? 만나보니 이제 있는 줄 알겠느냐? 네가 나를 공격한다고 했는데 너만 고생이다.” 이 돌진!
이런 방식으로 비로소 “네 영혼이 잘 됨”의 의미를, 이런 방식 말고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지 않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방식이에요. 이것을 지난 수요일에 했는데, 언약 사건입니다. 언약을 우리를 깨지요.
세상 살다보면 일이 꼬일 때가 있는데 그것이 언약 사건은 아닙니다. 일이 꼬인다고 예수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예수 믿어요. 오랜만에 제가 바른 소리 했지요? 제가 오 목사님을 만나야 만나는 것이지, 대구 있으면서 “왜 일이 잘 안 되지?” 이러고 있으면 오 목사님을 만나는 겁니까? 아니잖아요. 대구에서 내 하는 일이 안 된다고 해서 오 목사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고, 오 목사님을 만나야 만나는 것이지.
예수를 만나야 만나는 것이지 일이 잘 안 된다고 “예수나 믿자.” 이러면 전도연 나오는 [밀양]꼴 나요. 아무 의미 없어요. 나중에 하나님께 복수하려고 달려들 사람이에요. 진짜 예수를 만나게 되면 우리는 빼도 막도 못하고 오도 가도 못하고, 세상 악마의 정신에 완전히 붙잡혀서 자력으로 그 세상 사고방식에서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고, 더욱 무서운 것은 그들이 시키는 대로 움직여야 되는 그런 입장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 믿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어디를 가도 내 나름대로 예수 잘 믿는 공간과 시간은 이 세상이 허용하지 않습니다. 어디 가도 이 복음에 대해서는 꼭 반대합니다. 반대할 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이 여러분 머리에 있다는 것을. 베드로전서 4장에 나옵니다.
복음 아는 것 때문에 방해하거든, 자식이든 아내든 남편이든 누구든지 방해하거든 천만다행으로 여겨라. 그것이 예수 믿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쪽은 비어있는 곳이 아니고 꽉 차있어요. 세상 악마적 사고방식으로 꽉 차있기 때문에 그들과의 관계에서 내 입에서 복음 나오는 것을 그들이 그냥 들어주는 그런 편한 사이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실 때 피로써 사랑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십자가 이외에는 알지 않기로 했다고 하지요.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만나고 헤어졌는데 보니까 내 손에 주님의 피가 묻혀 있더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그때부터는 만났다는 증거가 되는 겁니다. 성령 받은 증거가 뭐냐 하면 예수님의 피가 내 죄를 용서했다는 것이 믿어질 때 이것은 누가 뭐라 해도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고, 그 성령은 영원히 떠나지 않고 그 사람은 천국 가야만 하는 사람입니다.
자력으로 예수님의 피가 믿어지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러면 그 사람이 어떤 일을 하든, 절에서 밥을 해주든 통일교에서 간부로 일하든 그 사람은 천국 갈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통일교에서 밥을 해주고 부처한테 고맙다고 절하는 것은 자력으로 할 수 있는데 내 안에 내 자력으로 안 되는 것이 있어요. 그것이 뭐냐? 예수 피로 용서 받았다는 것. 이것은 씻어 낼 수도 없습니다. 주님 만나서 얻은 것이기 때문에 내 쪽에서 그것을 철거할 수가 없어요. 지워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부목사는 잘해 보려고 잘해 보려고 3개월 동안 잘 해 보려고 온갖 시키는 대로 다 했지만 예수 피를 증거하지 않을 수 없더란 말이지요. 세상은 텅텅 비어있는 것이 아니고 빡빡하다고 했는데, 빡빡한 악마가 눈치를 채고 나가라고 한 겁니다. 그렇게 잘 해 줬는데도. 시키는 대로 다 했는데. 이 세상에 텅텅 비어있는 공간은 없어요. “너 다른 것은 좋은데 그 소리 하지는 마라.” 그런 소리 들었단 말이지요. “십자가 피” 이야기는 하지 말라는 소리를 들었단 말이지요. 그 이야기는 너무 은혜롭기 때문에 교인들이 돈을 안 낸다는 겁니다.
그 목사님은 ‘설마 그럴 줄이야’ 생각했어요. 신명기도 안 읽어봤습니까. 이방 민족이 ‘땅 여기 있습니다.’ 하고 내 놓는 민족이 있어요? 자기 땅인데. 어디에 ‘복음 마음껏 전해주세요.’하는 곳이 있어요? 없지요. 오 목사님도 안산에서 많이 경험했을 겁니다.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피가 나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나를 용납하지 않고 어디 사용하느냐? 나에게 묻힌 피를 증거하는 쪽으로, 나를 억압해서 피만 증거하도록 그렇게 조치합니다. ‘내 피로 말미암아 네 영혼이 잘 되었다.’는 그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요.
내가 나를 자제하거나 절제하거나 말릴 수가 없습니다.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네 영혼이 잘 됐다.’는 거예요. 그 짓이 잘된 짓이라는 거예요. 사울이란 사람이 예수를 만난 것이 예수님 보시기에 잘 한 짓이고, 사도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 사람 낚는 어부가 된 것이 잘 한 짓이라는 거예요.
결국 “영혼이 잘 됨같이”라는 말은 뭐냐 하면, 주님께서 너를 지배하고 통치하고 인도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거기에 관심을 갖기 위해서 늘 관심을 갖고 기도를 해야지요. 왜냐하면 그것이 내가 존재하는 이유기 때문에. 존재의 의미가 거기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저처럼 이렇게 생각하지 않고 그냥 안일하게 ‘영혼이 잘 됨같이’라고 하면, 이 영혼은 누구의 것이 되는가 하면 내 것이 되고, 내 영혼 잘 되는 것은 내 손에 달린 것처럼 그렇게 돼요. ‘내가 내 영혼 관리를 잘 했더니만 내가 구원 받았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기도해서 관리 잘하자.’ 이렇게 돼요.
이미 외부에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차원이 아니라 ‘내 것인데 내가 알아서 잘 하자.’ 이렇게 되면 곤란하단 말이지요. 이것이 잘 못 되었다는 말입니다. 사도요한이 말합니다.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무슨 뜻입니까? 네가 잘나서 네 영혼 잘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럼 누가 잘났는데? 진리 안에서 진리가 증거한단 말입니다. 그 뒤에 나오잖아요.
3절 봅시다.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진리가 힘이 있어요. 진리라는 것은 내가 수용할 때만 진리가 아니라 내가 수용하고 말고와 관계없이 진리가 파워(power)를 가지고 내 허락도 없이 내 속에 들어와 버렸단 말이지요. ‘예수님의 피가 나를 건졌다.’ 그럼 나는 뭔가? 나는 마귀한테 꼼짝 못하고 ‘살려만 주세요.’ 하면서 살았지 뭐. 이게 우리 삶이에요. 마귀가 시키는 대로.
교회 있을 때는 ‘주여,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하지요. 밖에 나가보세요. 마귀가 이것을 허용할 줄 압니까?
오늘 낮에 이곳에 오기 전에 제가 십자가마을 게시판에 댓글을 달았지요. 김영완씨가 설교 하나를 평해달라고 올렸어요. 그런데 그것도 예의에 어긋나요. 설교를 올릴 때는 누구의 설교인가를 밝혀야 해요. 왜냐하면 자칫하면 십자가마을을 부수고 복음을 훼방하기 위해서 십자가마을에 있는 목사 설교 올려서 우리끼리 치고 박고 물고 뜯고 해서 붕괴시키려는 수법으로 그런 장난을 치는 자들이 과거에 있었거든요.
심지어 예전 십자가마을에서 질문하기를 누구의 글인가도 밝히지 않고 여러 설교문 중간 부분을 옮겨 놓고 ‘이 중 잘못된 것은 어느 것입니까?’ 이런 식으로 나왔어요. 나는 그 문장이 어디에 있는 글인지도 몰랐어요. “2번과 8번은 문제가 됩니다.” 라고 하니까, “2번과 8번은 어떤 사람을 글이고 나머지는 목사님 글입니다.” 이렇게 해요. 내가 쓴 것을 내가 모순되게 내가 비평하도록 그렇게 유도한 거예요. 그놈이.
그래서 어떤 목사들은 “이름을 안 밝히면 비평 안 하겠다.” 이렇게 나와요. 그것도 잘못 되었다고 봐요. 출처를 밝히면 하겠다는 것은 목사가 진리보다도 자기 자존심을 먼저 챙기는 것입니다. 자기 자존심을 먼저 챙기면 어떻게 됩니까?
아까 사도요한과 가이오 사이에 뭐로 묶어졌다? 진리로 묶어 져야 되는데, 진리로 묶여졌다면 ‘너도 나도 진리 안에서 책망 받을 것은 책망 받자.’ 이렇게 나오는데 사도의 자존심으로 묶어버리면 ‘네가 감히 나를 나무라다니?’ 이렇게 되지요.
그러니 이름을 밝히지 않으면 나는 평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진리에 관심이 없고 ‘나는 내 위신 추락되는 것은 용납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 밝히시오.’ 그런 소리도 할 필요 없어요.
어떤 설교를 비평해 달라고 할 때 누구의 설교인지 밝히는 게 좋습니다. ‘이것은 어느 누가 언제 한 설교인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하면, 그게 비평하는데 도움이 돼요. 왜냐하면 그 사람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다 알고 무슨 뜻에서 그렇게 썼는가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도움이 되는데, 그냥 올려서 ‘당신은 이 설교를 이렇게 비평했는데, 이 설교는 바로 당신의 설교였습니다.’ 라고 할 때 얼마나 후련하겠습니까? 복음 전하는 자가 망하기를 학수고대하는 사람들이.
영혼이 잘되기를 간구하는 것이 아니고, 망하기를 간구하는 사람이 수없이 많습니다. 아마 오 목사님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도 많을 거예요. 오 목사님이 망하기를. 그런 사람들에게는 복음적인 이야기 아무리 해도 소용없어요. 그건 안 들어요. 그 사람들은 복음 전하는 자들이 망했다는 소식이 그 사람들에게는 복음이에요.
관심이 자기 자존심 지키는데 있어요. 진리 가운데 교제하는 것이 아니고 서로 자존심을 높여주는 조건하에 만나자고 합니다. 진리는 그게 아니에요. 우리는 그 앞에서 까불다가, 시속 160Km로 달리다가 주님께 부닥쳐서 주님의 피가 묻은 인간들입니다. 이게 진리 안의 교제지요. ‘나 알아줘’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네가 뭔데. 너는 십자가 지지도 않았는데 내가 왜 널 알아줘.’
설교를 비평해 달라고 해서 그 설교를 비평을 했습니다. 가능하면 누구의 설교인지 밝혔으면 좋겠어요. 왜냐하면 그 설교자가 가까운 친구일 수도 있고, 왜냐하면 설교 내용이 터무니없이 기도하고 복 받자는 것이 아니고 설교 내용은 이래요. ‘세상 너무 좋아하지 말고 십자가 믿어서 십자가 삶을 살자.’ 성령에 따라 살아야 되지 세상 돈 좋아하고 그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복음 알아도 상황 따라서 그쪽이 강조점에 되어 설교할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비평해 달라고 하니까 질문하는 사람이 얼마나 개념이 없는 사람이에요. 그게. 잘못하면 친구끼리 원수지고 같은 동역자 끼리 멱살 잡도록 유도할 일이 될 수도 있단 말이지요.
그러나 그렇든 저렇든 그것은 하나님 소관이고, 제가 이렇게 비평했어요. 그 설교에 이런 것이 있어요. ‘세상 사람들은 돈을 좋아하는데, 예수님을 먼저 믿으면 그것은 따라오게 되어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잘 걸렸다.’ 이 사람이 우리 노회에 속한 사람인지 내 친군지 관계없이 이것은 비난받아 마땅해요. 예수 믿어서 돈 따라 오면, 예수 믿고 돈 안 따라오면 예수 헛 믿은 거네.
바로 이것이 뭐냐? 관심사가 예수, 예수 말하지만 이것인 빌미에 지나지 않고 결국 관심은 뒤에 돈 따라 오는 것. ‘남들은 힘들여서 돈 버는데 나는 예수 믿어서 수월하게 돈 벌자.’ 그런 얍삽한 수준 낮은 통박 굴리는 것 밖에 더 됩니까.
또 한 가지 그 설교에 뭐가 있는가 하면, ‘성령의 삶을 살면 우리는 철저하게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또 시비를 걸었어요. ‘철저하다는 것이 어느 수순에 가야 철저한 것인가? 설교하는 목사 수준에 이르면 철저한 것인가? 그러면 목사보다 더 뛰어난 사람 나타나면 목사 본인도 철저하지 못하네? 도대체 어느 정도가 철저한 것인가?’
제가 처음부터 만나서 목사님들께 꼭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목사가 설교를 통해서 말씀을 전했는데, 성도가 그 말씀대로 살지 못했을 경우에, 그 때 교인들은 어떠한 대처를 해 나가야 되며, 목사 본인은 말씀대로 안 살 때 어떤 식으로 대처했는지 그 방법을 왜 설교시간에 이야기를 안 하느냔 말이지요.
예를 들면,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입니다. 성령 받으면 이렇게 사셔야 됩니다. 성령 받게 되면 이렇게 살 수 있습니다. 성령 받게 되면 서로 사랑하고 되고, 사랑하게 되면 간음도 안 하고 서로 미워하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설교의 핵심이에요. 그러면 이런 설교를 듣고, 내가 교인이다. 목사님께 이런 설교를 들었다. 그런데 집에 돌아가서 보니까 서로 사랑하는 것이 안 되더란 말이지요. 안 될 경우에 어떻게 대처하면 좋겠습니까? 라는 것을 설교에 미리 담아줘야 되지 않으냔 말이지요.
그리고 목사 당신은, 서로 사랑하자고 전하는 목사 당신은 사랑 안 할 때 당신은 어떻게 대처했는지에 대해서 말 안 해요. 왜? ‘나도 부족해서 그 말씀대로 못 살았습니다.’ 라고 하면 목사 권위가 떨어지니까 그런 말 안 하지요. 그러니까 이게 뭔가 하면 한 마디로 자기 부인이 안 되는 설교. 남을 가르치기만 하고 자기는 빠지지요.
그러면 그 목사의 기쁨은 뭐냐? 자기가 성령 받은 것이 기쁜 것이 아니고, 자기가 가르친 교인들이 말씀 따라서 사는 것을 관람하는 재미로 자기 신앙생활의 기쁨을 대신하려는 심보란 말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지금 누구보고 지적하노?
자기는 신앙생활 어떻게 하는지 말라요. 다만 자기 설교 듣고 신앙생활 잘 하는 권사, 집사가 있으면 ‘저 사람은 내가 가르쳐서 저렇게 되었다. 내가 잘 가르쳤구나!’ 자기 제자가 있다는 그것이 자기 신앙을 대신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교인들이 그렇게 해요. 교인들은 자기는 신앙생활 못하지만 말씀 잘 증거하는 목사가 자기는 못하는데, 돈도 초월하고, 세상도 초월하고 열심히 사는 것을 보면서 ‘우리 목사님 이렇게 훌륭하다.’ 그것 구경하는 재미로 교회 오는 그런 사람과 다를 바가 뭐가 있습니까?
설교 비평해 달라고 올린 그 사람이 주님의 뜻대로 올렸다 싶어요. 그동안 내가 다 못 터뜨린 것을 터뜨리게 해 줘서 속이 시원했어요. 남 신앙생활 아무리 잘 해도 내 것 아닙니다. 내 신앙 따로 있어요. 내 신앙을 어떻게 하는가? 완전한 기준점 되는 예수님과 늘 비교해야 됩니다. 교인들과 비교하지 말고. 자기보다 못난 이단과 비교하지 말고. 내 가는 길을 가로막고 나를 충돌케 하셔서 나를 완전 박살나게 만든 그 예수님과 늘 만날 때 그게 자기의 신앙생활입니다. 그게 자기 영혼이 진짜 잘 된 것입니다.
이미아씨 글 봤지요? 예전 글은 좀 오버한다 싶은데. 이거 이미아씨 들으면 기분 나쁘겠다.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주위 사람들이 그런 말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이번에 올린 글 보니까 그 심리가 ‘날마다 이 세상에서 제일 괴로운 것은, 고문은, 날마다 자기를 인하여 피 흘린 분 얼굴을 늘 맞대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인력으로, 지식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진짜 성령의 인도를 받으니까 자기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 영혼이 잘 되었다는 출처가 어딘지, 내 영혼 잘 됨의 출처가 어디 있는지 그것을 확인하는 편지. 그 확인하는 편지를 그렇게 고백했단 말이지요. 참 대단한 고백이에요. 그 앞에서 누가, 악마의 생각만 빡빡하게 있는 곳에서 ‘내가 가해자며 예수님의 십자가 피는 나 때문에 생긴 피해자입니다.’ 라는 고백이 나왔다는 것. 그 자체가 성령께서 일하고 있다는 기적입니다.
10분간 쉽시다.
(2007. 6. 29. 11:43 녹취 마침)
우리교회(IP:220.♡.176.168)
07-07-18 18:01
광주 강의(07. 6. 22) 두번째 시간 이름 : 서경수
[맛보기]
교인들이 복음을 싫어해서 목사가 복음 전하는 것을 반대한다면 그것 목사 실패 아닙니다. 제 책 [기독교의 허상]에 보면 나와요. “목사가 목회 실패 안 하면 희망이 없다.”고 했습니다. 목사가 목회 실패 안 하면 그리스도를 안 바라봐요. 만날 잘 되고 있는 교회만 바라보지. 그런데 목사가 목회 실패하니까 그때부터 그리스도만 바라보지요. 이게 얼마나 목사에게 다행스런 일입니까.
----------------------------------
광주 강의(07. 6. 22) 27-2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첫째 시간에서는 아직 진리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이야기 안 드렸습니다. 진리 안에서 영혼의 잘 됨이 나온다는 거죠. 이것이 이 세상에서 수월하게 이뤄지는 것이 아니고 사도요한이 예수님 만나야 가능했듯이, 사도바울이 주님을 만나야 가능했듯이 진리 안에서 교제한다는 것은 이런 기적을 받은 사람이 누구냐 하는 식으로 교제하는 거예요.
그러면 진리가 무엇이냐? 그 진리는 바로 요한 1서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지요. 예수님이 진리란 말입니다.
그럼 여기서 예수님이 진리란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를 한 번 적어볼게요. 예수님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했잖아요. 이것이 힘을 발휘합니다. 이 힘이 어떤 힘이냐 하면 이단, 적그리스도, 사단 이것을 밝히는, 까발리는 힘이 작용해요.
어디에 근거해서 이런 주장을 할 수 있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예수님은 진리잖아요. 예수님이 가신 곳마다 숨어있던 적들이 튀어나옵니다. 그런 관점에서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을 보시면 해석이 수월합니다.
예수님이 떴다 하면 적들이 튀어나오게 되어 있어요. 베데스다 못가에서 38년 된 병자가 나았다 하면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와락 달려들지요. 그리고 요한복음 9장에도 나오지요. 실로암 못가에서 소경이 눈을 떴다. 요한복음 8장에서 간음한 여인이 용서 받았다. 그 때 뒤에 누가 붙습니까? 바리새인들과 붙지요. 이것은 요한복음뿐만 아니고 마태, 마가, 누가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끝까지 붙지요. 심지어 십자가 밑에 까지 달려들지요.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 때 모든 것을 차단시켜서 예수님만 달랑 믿는다고 하는데, 예수님과 결부되어 있고 얼기설기 얽혀있는 예수님의 적들을 같이 알려고 생각지 않아요. 왜 그런 잘못된 생각이 있는가 하면, 자기는 진리에 속하지도 않았지만 악마에도 안 속해 있는 중립 지대에 있다고 생각하고, ‘내가 예수님을 믿을 것이냐, 사단을 믿을 것인가는 내가 선택하기 나름’이라고 이렇게 오해를 하고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보지를 않고 우리는 이미 우리 힘으로 벗어날 수 없는 사단의 정신으로 완전 무장되어 있지요.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하나의 부닥침이에요. “나를 따르고자 하는 자는 처나 자식이나 아내를 미워해야 된다. 심지어 너 목숨도 미워하지 않으면 나를 따를 수 없다.” 이렇게 부딪힘이지요.
“아버지를 장사 치러야 되겠습니다.”고 하니까 “죽은 자는 죽은 자에게 맡기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합니다. 모든 것이 이렇게, 예수님은 예수님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적들과 덩어리째로 우리에게 다가와서 예수님과 적들의 차이점을 우리에게 알게 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이나 사단이나 양쪽 다 우리에게 힘으로 들이닥친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이 두 노선밖에 없지요. 거기에 어느 노선도 사람은 주도적으로 들어갈 수 없고, 사람은 다만 그 양쪽 세력에서 당해야하는 피동적인 입장에 놓여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두 번째 시간에는 예수님의 진리를 인하여 밝혀지는 것이 무엇이냐? 이 점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8절을 봅시다.
“이러므로 우리가 이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되게 하려함이니라”
‘진리를 위하여 함께 수고한다.’는 것을 달리 말하면 ‘예수님을 위하여 함께 수고한다.’
제가 왜 ‘진리’를 ‘예수’로 바꾸느냐 하면, 철학하는 사람들, 학문께나 한 사람들은 예수님이 진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가 진리를 이야기한다는 것만 인정해요.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가 전하는 그 진리를 내가 지식으로 받아들이겠다.’ 혹은 ‘이해하겠다.’ 이렇게 나옵니다.
‘나도 인간인데 나라는 인간이 나 아닌 다른 인간에게 굴복한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다. 하지만 당신이 좋은 소리 하는 것은 내가 수용하겠다.’ 이것이 좀 배웠다는 사람들, 물론 마귀의 사고방식이죠.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렇지 않지요? 바울은 그냥 주 예수 자체를 증거하지요.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를 원한다.” 세상의 모든 철학들아 십자가 앞에서 모든 것은 다 굴복해야 된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세상 모든 철학들은 다 헛된 학문들이다. 이렇게 나오지요.
어떤 인물에게 완전히 매이지 그 인물이 전하는 고상한 지식을 내가 ‘아이고 존경합니다.’ 이런 식으로 하지는 않지요.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는 말씀이 있지만, 소녀들을 보면 자기가 좋아하는 연예인들 앞에서는 그가 무슨 짓을 해도 “오빠!” 하고 좋아해요. 무슨 짓을 해도. 그것은 그 인간 자체를 좋아해요. ‘노래가 좋다.’ 별로 안 좋아요. 그 사람 자체가 좋은 거예요.
남자들 입장에서 여자들 이야기하는 가운데 가끔 이해 안되는 게 있어요. 뭐냐 하면, 50대 중년들이 ‘나는 젊은 꽃미남 좋아한다.’고 할 때에 울꺽 부화가 쏟아요. 아니 어른이면 어른답게 지적으로 놀아야지. 감각적으로 예쁘다고 그것을 흠모한다는 것이 성립이 되냐는 것입니다. 울컥 부아가 치밀어 오르지요.
여러분, 인물(외모) 그거 얼마 안 갑니다. 적어도 나이가 무르익으면 사람을 외모로, 감각적으로 보지 않고 품위나 인격이나 세상을 보는 넓은 눈, 배울 것이 있다는 그런 차원에서 봐야 하는데, 젊은 꽃미남한테 배울 것이 뭐 있습니까? 철딱서니 없고 배울 것이 아무것도 없거든요. 그런데 그 자체가 좋다고 하거든요. 까불기만 하지 별 좋은 것도 없는데, ‘아이고 이 철없는 인간아, 너 언제 시건(철)이 날까?’ 이렇게 측은해 보이지.
어떤 사람은 장동건이 좋다고 하는데, 뭐 잘났다고? 사람이 은근한 품위가 있어야지. 장동건이 품위 없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일본 아줌마들 이병헌, 배용준. 마후라 두르고 머리만 더부룩하면 다 좋아해요.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아주 근사한 말씀을 해서 좋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 자체가 좋아지지 아니하면 산상설교고 성경 전체가 다 의미가 없어요. 안 좋아한다는 증거가 지키려고 한다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예수님 당신 훌륭하지만 내가 언젠가는 따라 붙이겠다.’ 이 말이거든요. ‘당신만 훌륭하냐? 나도 훌륭하다.’ 이게 뭐냐 하면, 이현래, 워치만 리 계통, 지방교회.
‘너희들 아직까지 예수 믿나? 이 바보들아!’ 예수는 하나의 모범자고 우리가 예수고 우리가 신인데 왜 자꾸 누구를 좋아하고 누구를 사랑 하냐고 합니다. 내가 나를 사랑해야지.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지. ‘네가 예수다.’
요새 이말 공공연하게 많이 나옵니다. ‘너 자신이 예수다. 너 자신이 예순데 무슨 예수를 믿어? 네가 신인데 무슨 신을 믿나?’ 이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많이 나옵니다. 왜냐하면 그 단체가 무지하게 커졌어요. 수십만이 넘어요. 그 단체가. 그 신도 수가.
한국교회가 워낙 개판이니까 이런 이야기만 해도 사람들이 왁 몰려가서 거기서 못 빠져나옵니다. 그만큼 그 사람들은 예수가 좋은 것이 아니고 내가 좋은 거지요. 내 안에 나밖에 없지요. 예수님과 부닥쳐서 받은 피가 없어요. 예수님의 그 아픔도 없고, 피 흘리심, 살 찢으심이 그 안에 없어요. 예수님이 나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다는 것도 없어요. 다만 예수 이용해서 천당이나 챙기면 ‘나 이익 봤다.’ 그런 심보밖에 없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바로 사도요한이 말한 진리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지요. 제가 왜 이렇게 자꾸 9-10절 이야기하면서 떡을 던지는가 하면, 바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심보를 우리가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잠깐 지난 주일 낮 설교의 예를 들겠습니다. 낮 설교에서 애굽의 홍해바다 성격을 이야기하면서 천국 갈 사람만 살려주고 천국 못갈 사람은 물에 빠뜨려 죽여 버리는 아주 희한한 성질을 홍해바다가 간직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 뒤따라온 애굽 군사들이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뒤따라 왔는가를 우리가 이해를 해야 돼요. 이것을 충분히 이해할 때, 지금 내가 예수님을 따를 때 마음가짐과 애굽 사람의 마음가짐과 어떤 유사점이 있는가가 밝혀집니다.
애굽 군사들은, 자기 앞에 어린애들도 건너가는데 튼튼한 말을 타고 어른이 똑같은 흙인데 못 건널 이유가 없지요. 앞의 사람들은 건넜는데 우리는 못 건넌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입니다.
결국 우리가 애굽 군사 같은 마음 가지면, 본인이 나는 천국에 못 갈 인간이라는 생각은 없고, 남들 가니까 나도 갈 수 있다는 의식만 갖고 있다면 그 사람은 탈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은 무슨 노래를 부르는가? 어린양의 노래를 모르는 사람이에요. 모세의 노래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진짜 구원 받은 사람은 ‘우리 능력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오직 어린양 때문에 구원 받았습니다.’ 하고 힘차게 어린양의 공로만 높이면서 노래 부르고 바다를 건너와서 노래 부르고 했는데, 그 뒤따라 간 사람들은 ‘노래 부를 것 뭐 있나? 어린양 같은 소리하고 있네. 우리 힘으로 건너가는데. 너도 너 힘으로 건너가잖아. 나도 내 힘으로 건너간다. 다를 게 뭐가 있는데? 차이가 없잖아.’ 하면서 건너다가 바닷물이 합류해서 다 죽었어요.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을 의미합니다. 진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으뜸이 되고자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악인지를 본인이 알게 되어 있어요.
자, 으뜸이 되고자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으뜸’은 최고(엄지손가락 들고)라는 말입니다. 으뜸이 된다는 말은, 맨 꼭데기 자리가 두 개가 될 수 없습니다. 둘이 되면 서로 싸워서 으뜸이 아니지요. 으뜸이란 것은 최고의 자리는 이미 내 차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손님이 와서 피자나 치킨을 주문해서 상에 차려놓으면 꼬마들(2~3세쯤)이 제일 가운데 앉아서 제일 살점이 많은 뒷다리를 쳐다봅니다. 이게 으뜸이 되고자 하는 거예요. 제일 좋은 자리는 나에게 적합하다. 왜? 내가 제일 좋아하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내 속에 있는 나의 욕구는 나를 으뜸으로 봉사하는데 내 욕망은 지체 없이 나에게 발휘하더라. 이것을 솔직하게 다 보여주는 것이 어린아이의 행동입니다. 어른들은 안 그런 척 하고 겸양의 미덕을 펴지만 ---
그러니까 으뜸이 되고자 하는 것은 나무랄 것이 아니고, 이것이 예수 안 믿는 애굽 군사들, 보통 사람들, 악마에 속한 모든 사람들의 보편적인 현상이죠. 그러니까 이것은 특별히 나무랄 사항이 아니고 서로서로 인정해야 될 사항이죠.
광주로 오는 고속버스 안에서 TV를 봤는데 뭐가 나오는가 하면 축구선수 ‘앙리’가 나왔어요. 전 세계 축구 선수가 몇 명입니까? 아마 수십만 명이 넘을 거예요. 그런데 이 사람이 영국 프리미어리그 득점 왕을 했어요. 최고 선수죠. 이 사람을 축구의 최고 선수로 인정할 때, 다른 사람은 그것을 인정할까요, 안 할까요? 인정했어요. 그러면 사람들은 다 자존심이 있는데 그 사람을 최고 축구 선수로 인정하느냐?
세상은 서로가 으뜸이 되고자 하는데, 으뜸이 되고자 할 때, 진짜 으뜸 될 만한 사람이 으뜸 될 때는 그 으뜸을 인정해 줍니다. ‘역시 당신은 축구에 대해서는 나보다 낫습니다.’ 인정을 해 준다는 말은 나의 으뜸도 언젠가는 그 수준이 되면 인정해 달라는 서로의 으뜸을 서로 존중한다는 그런 관계 속에 놓여 있습니다.
으뜸을 박살내는 것이 아니고 ‘당신 으뜸이 내 으뜸보다 나은 것을 내가 인정해 드리겠습니다.’ 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자기 으뜸을 포기할 필요는 없지요. 나보다 수가 높으니까. 내가 축구할 줄 압니까? 축구 잘 못하거든요. ‘앙리’가 공을 차니까 스티로폼 9개가 갈라졌어요. 그런데 박명수가 차니까 1개 갈라졌어요. [무한도전]이란 프로에서.
그럼 박명수가 앙리를 붙들고 시기를 해야 됩니까? 아닙니다. ‘역시 당신은 최고입니다.’ 라고 인정한다고요. 그렇다고 박명수가 ‘나는 죽을 놈이야.’ 하고 자살합니까? 그것 아니라니까. ‘앙리’를 존중하는 그 재미로 헤헤거리면서 같이 기뻐하더란 말이지요.
제가 길게 복잡하게 이야기한 것이 뭐냐 하면, 세상에는 으뜸을 모독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역시 으뜸이 될 놈은 으뜸이 되어야 해.’ 라고 상호 인정하는(헤겔이 이야기한) 그러한 분위기 속에 연결되는 거예요. 이게 뭐가 나쁩니까?
서울 법대 시험 쳤다. 나는 수능 200점, 저쪽은 398점. 그래놓고 ‘나는 서울 법대 합격해야 해.’ 이런 것은 자기 양심이 있으면 용납을 안 하지요. ‘네가 들어가라. 나는 자격 안 된다.’ 이렇게 나오는 것이 정상이잖아요. 그런다고 걔가 자살합니까? ‘아 나는 으뜸이 못돼.’ 그게 아니고 ‘나는 다른 학교 가지 뭐.’ 이러고 만단 말이지요.
서로의 으뜸을 마음껏 존중해주는 세계가 이 세상입니다. 이게 뭐가 문제예요? 뭐가 나쁜 거예요? 그래서 교회에서 목사를 교인들이 존중하는 이유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결국은 천국의 집단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그냥 세상의 한 부분을 무작위로 딱 끊어 놓은 거예요. 이것은 세상이지 천국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옛날에, 옛날뿐 아니라 지금도 그렇지만, 나이 70이 넘은 분이, 남편은 만날 노름하고, 술 먹고 와서 폭행하고, 돈도 안 벌어주고. 그런데 여자는 평생 시장에 나가서 노전에서 장사하면서 파출부 노릇하고 하면서 50~60년 살아도 자기 남편이 최고래요. 요새 젊은 사람 같으면 이해가 안 되지만 연세 많은 사람은 이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엄마는 아빠한테 그렇게 당해도 아직도 아빠를 사랑하나?’
‘사랑하지.’
‘왜?’
‘하늘같은 남편을 섬기는 것이 당연하지. 남편이 모자라면 나라도 받쳐주는 것이 당연하지.’
김을수 집사님 주의 깊게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하 하 하.
이게 뭐냐 하면, 옛날 교육이 뭐냐 하면, 여자가 시집가면 남편을 하늘처럼 받들 때 너의 으뜸은 으뜸으로 주위에서 인정받게 되어 있어요. 남편을 나보다 낫다고 받쳐주는 그런 착함, 천사표 아내, 그런 아내가 나 나름대로의 으뜸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였습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 남편이 노름해서 집 다 날리고 계집질 하고 해도 그것을 참아낼 때 그 모든 업적들이 쌓여서 그 아내로 하여금 더욱 더 훌륭한 아내로 으뜸 되게 하는 업적으로 누적이 되는 겁니다. 훌륭한 아내로.
이것이 오래 되면 습관화 되고, 습관화 되면 그것이 진리가 되죠. ‘진리 안에서 교제한다.’는 말은 결국 예수님 안에서 교제하는 것이 아니고 으뜸과 으뜸의 만남 안에서 교제하는 것이 되지요. 으뜸의 만남은 서로 싸운다는 말이 아닙니다. ‘당신은 나보다 더 위대한 으뜸이고 나는 그 밑에서 눌리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으뜸.’
어쨌든 간에, 질서의 격차가 있든 간에, 계층이 있든 간에 내 으뜸을 스스로 부인하기 싫다는 것이 기존 세상의 구조고, 그것이 요한 3서에 보면 교회 안까지 침투한 겁니다.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책 다 읽었지요? 거기에 뭐가 있는가 하면, 제가 불교 이야기했잖아요. 불교의 석가모니는 출가했지요. 집을 나갔잖아요. 그런데 불교를 받아들인 삼국시대 사람들이 다 집을 나갔습니까? 불교를 믿던 삼국시대, 신라시대 사람들이 다 집을 나갔던가요? 안 나갔지요.
석가모니는 출가했잖아요. 출가한 석가모니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출가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출가 안 했어요. 이것을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