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605a 부산강의 : 조지 래드 [신약신학]-종말론(1) 녹취
20070605a 부산강의 : 조지 래드 [신약신학]-종말론(1) 녹취
이름 : 한윤범(IP:59.6.189.212)
20070605a 부산강의 : 조지 래드 [신약신학]-종말론(1)
(강의:이근호 목사)
종말론이란 것을 사람들이 이야기할 때 종말이라 하는 것을 역사 속에 종말로 이렇게 간주하잖아요. 보통. 이 책도 마찬가지고. 종말이라 하는 것은 역사가 기저에 전제로 깔려 있고 그 끝, 끝부분을 종말이라고 이렇게 본다. 이게 잘못이에요. 이 책도 마찬가지에요.
예수님이 생각하는 종말은 그게 아닌데 역사 끝을 가지고 종말이라고 하지 않았는데 사람들의 선입관이 종말이라 하면, 역사 끄트러미에 창조 있으니까 끝도 있을 것이다. 끝을 종말이라고 이렇게 보고 있는 겁니다.
누누이 이야기했지만 예수님은 역사 가지고 인간하고 토론하고 그럴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상대로 해왔지 역사를 상대로 어떻게 설득, 납득하려고 오신 분이 아닙니다. 다만 인간이 갖고 있는 이 역사성, 시간성이라는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걸 지적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죠. 종말이라 하면 역사 끄트러미를 종말이라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주님 보시기에 문제가 있다.
종말이라고 한다면, 그래서 제가 그런 것을 일괄적으로 이미 수백 번도 수천 번도 이야기했겠죠. 뭐냐 하면, 모든 안목을 십자가에서 봐야 된다. 십자가에서 출발해야 된다는 것을 수천 번도 이야기했을 거예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거예요. 십자가에서 출발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모른다고.
사람들은 십자가라 하면 십자가를 역사 위에 시작한다고. 역사라는 것을 알고 그 위에 십자가를 세워 놨다. 이래 생각하는 겁니다. 십자가가 역사를 고발한다는 생각을 못한다 말이죠. 십자가에서 역사 자체를 고발하는 게 이게 종말입니다. 왜냐하면 역사라는 게 허구거든요. 역사라는 게 없어요. 뭐가 있느냐 하면, 아담만 있어요. 그때 그 아담만 있을 뿐이라니까. 그때 그 아담의 새끼죠. 아담의 자식만 있을 뿐이에요.
주님의 십자가에서는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주님의 십자가에는 역사 들어있는 게 아니고, 두 가지 밖에 들어있지 않아요. 하나는 여자의 후손과 하나는 뱀의 후손, 이 둘 밖에 들어있지 않습니다. 이 둘을 합쳐서 약속이라 하죠. 이걸 약속이라 했다고 약속.
예수님께서 십자가지려 이 땅에 오실 때 아무도 예수님 이해 못했어요. 안나라는 여선지자는 나이가 한 구십 안 넘었겠습니까? 과부된 지 팔십오 년 됐으니까. 엄청난. 그 사람에게 자기가 나이가 문제가 아닙니다. 역사는 자기에게 긴긴 살았다는 것은 그거는 예수님 기다리는데 하등에 장애가 될 수 없었어요. 오래 기다렸다고 그만 기다릴래. 라는 의식이 성신을 받은 시므온나 안나한테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천년 기다렸는데 아직 안 오다니 이제는 그만 기다릴래. 라는 말은 성립이 될 수 없어요.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내가 재림하러 온다 할 때 인간은 기다리고 또 기다리죠. 주님께서 생각합니다. 너희 인내성이 어디까지 있느냐 한번 보자. 이걸 가지고 이 책에선 뭐냐 하면, 설명하는 중에 '지연'카지요. 이 책에서. 지연한다 하지요. 지연하긴 뭘 지연해요. 백날 지연한다 하고 계속 더 지연해 봐요. 미루고 미루고 또 미뤄버리죠. 다 떨어질 때까지.
역사 끝을 고대하는 인간들, 다 떨어질 때까지 안 옵니다. 물론 사도 바울은 이미 삼층천에 올라갔지만. 사도 바울이 삼층천에 올라갔고 스데반 집사가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서신 걸 봤을 때 스데반 집사나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 봤을 때 천년이 지났니 이천년 지났니 그거는 아무 의미가 없어요. 왜 지금 함께 있는데 뭐.
아들이 자기 엄마하고 함께 있는데, 엄마 언제 쯤 오는데? 하고 물을 필요가 없잖아요. 예수님의 재림이라 하는 것은 함께 계신 그분이 자기 정체를 드러내는 거예요. 자기 영광성을 세퀴나 영광이라 하지요. 자기 영광성을 진짜 하나님의 영광성을 다 드러내는 겁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그는 누구를 만났습니까? 주님의 영광을 봤지요. 그리고 죽은 자 같이 됐지요. 그때 주님께서 "내가 다시 오리라" 하는 그 말씀할 때 다시 오는 시점을 기다리는 게 아니고, 그동안 뭐 하실 겁니까만 관심이 있을 뿐이에요. 사도 요한은.
함께 계신 분이 작업을 하는데 있어서 사도 요한의 입장에서 자기와 함께 하는 분이 작업을 하는데 있어서 어떤, 어떠한 작업을 하느냐 그게 궁금하지, 날 구원하러 언제 오실 건데요 라는 물음은 도대체 성립이 안 됩니다. 무엇이 궁금하냐 하면, 저 놈의 불신자들 저거 어떻게 작살 낼 건데요. 그것만 관심 있지, 날 구원하러 언제 오실 건데요. 나 편하게 쉬게 하기 위해서 언제 오실 건데요. 그런 것은 관심사도 될 수 없지요.
십자가라 하는 것은 십자가를 다시 설명해 드릴게요. 십자가라 하는 것은 내가 죽는 사건이에요. 그리스도가 자기 택한 백성 함께 죽는 사건이다 말이죠. 로마서 6장 나오지요. 예수님만 죽는 사건이 십자가 아닙니다. 누구와 연합된 성도가 함께 죽는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에요.
그럼 누가 죽었어요? 내가 죽었다 이 말이죠. 내가 죽었으면, 이게 라이프니찌 식으로 이야기한다면, 라이프니찌 식은 뭐냐 하면, 주름이 있어요. 그 주름에서 주름이 한 꺼풀 필 때마다 남들 예상치도 못한 아주 우발적인 그러한 사건들이 그 안에서 툭툭 튀어나오는데 그게 예정조화라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딱 사람한데는 안 가르쳐주고 은밀, 비밀이죠. 주름 돼있는데 앞으로 내일은 무엇을 할 것인지 사람은 모르지만 한 꺼풀, 한 꺼풀 하나님께서 열어 제치니까 아, 내일은 이런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고, 모레는 이런 사건이 나타나도록 돼있구나. 이래 설명하는 겁니다. 라이프니찌의 설명대로 하면, 라이프니찌는 십자가 모르니까 그걸 그냥 약간 차용한다면, 십자가라 하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사건이란 말이죠.
그럼 여기서 내가 죽는다면 그럼 나는 십자가 바깥에 살아 있잖아요. 지금 말하고 있잖아. 살아 있잖아요. 움직이잖아요. 잠자고 있잖아요. 차타고 왔잖아요. 지금 살아 있잖아요. 나는 역사 속에 무슨 인물이다? 살아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십자가에서 나는 뭐다? 죽어 있다.
안 맞지요. 맞질 안지요. 니가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죽으리라 했잖아요. 세상에 선악과 따먹을 때 시체가 따먹을 수 있습니까? 살아있는 아담이 따먹었지요. 그러면 그것은 우리 식대로 하면 뭡니까? 아아, 독약이다. 하고 백설공주처럼 죽든지 뭐든지 해야 되는데 아담아, 니가 어디 있느냐? 찾아왔다 이 말이죠.
그래 이것은 뭐냐 하면, 죽었다, 살았다 하는 이것을 아담 수준에서 알게 된 죽었다, 살았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죽었다 살은 관점은 기준이 뭐냐 하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을 설명하기 위한 죽음과 삶이다 이 말이죠. 하나님은 약속 밖에 몰라요. 하나님은 우리한테 관심 없고, 약속 밖에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에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사이에 여기 인간은 끼어들 자리가 없습니다. 나는요? 하고 끼어들면 안 돼요.
인간은 여기 있다가 여자의 후손 보여줄 사람, 뱀의 후손 보여줄 사람 그 역할만 충실히 하면 돼요 그마. 그래서 욕심내지 말고. 왜냐? 이게 약속이니까. 사도 바울이 사도가 되기 전까지는 창세기의 모든 말씀을 자기가 이룬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것도 율법으로 행함으로. 창세기도 율법에 속하니까. 행함으로.
그런데 자기가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는 뭐냐 하면, 여자의 후손, 약속을 위하여, 새 언약을 위하여 다른 말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위하여 자기는 그냥 부름을 받은 거예요. 부름을 받고 전하는 것뿐이다 이 말이죠.
남은 자의 개념이 그것 아닙니까? 남은 자의 개념이 구원 개념이 아니고, 은혜로 남게 되었음을 은혜를 증거하기 위해서 남게 된 사람 아닙니까? 남은 자의 특징은 뭐냐 하면, 자기가 행함으로 인하여 남게 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남은 자 된 겁니다. 그래서 항상 남은 자, 영어로 레멘트, 남은 자라는 개념이 있으면 이 사람이 해야 될 일이 뭐냐 하면, 어쨌든 간에 내 행함이 아니다 하는 것을 이야기해야 된다.
스얄야숩이 뭐예요? 남은 자는 돌아오리라. 이사야의 아들 아닙니까. 이사야의 아들이 해야 될 일이 뭐예요? 그게 바로 남은 자. 주님의 약속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 약속의 끝이 바로 임마누엘, 남은 자, 이스라엘 약속의 또 다른 이름이 임마누엘 아닙니까. 임마누엘의 속성을 남은 자가 스얄야숩이 먼저 앞당겨서 보여준 겁니다. 리허설이죠. 여기 나온 대로 멋진 표현인 리허설이죠. 하나의 리허설로 보여준 거예요.
임마누엘 되시는 그분은 예수님은 남은 자 모습을 이 땅에서 확연하게 보여주는 겁니다. 역사 속에서. 역사가 있다, 없다. 라는 것은 사실 따져보면, 역사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있죠. 인간이 자기의 생식과 자기의 혈육적인 그런 것을 확산시킬 때 거기에 의미를 두기 위해서 역사란 의미를 둔 겁니다.
이거 여러분 아시지요. 만약에 아브라함이 이스라엘을 낳았잖아요. 이스마엘을 사래가 낳았잖아요. 만약에 이삭이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럼 뭐만 남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은 이스마엘 밖에 없어. 하나님께선 이스마엘 통해서 역사할 거야. 라고 사람들이 굳게 굳게 이 연사는 외칩니다. 하겠지요. 이스마엘 밖에 없겠지요. 이삭이 없다면, 이스마엘 밖에 없잖아요.
지금 불신자들이 바로 그거 아닙니까? 이삭을 인정하지 않잖아요. 왜 인정하지 않습니까?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온 거기 때문에 약속이란 자체를 이거는 비현실적으로 보기 때문에 제쳐놔 버리면 남는 건 뭐가 남아요? 신은 우리 이스마엘을 돕는다. 그것만 남는단 말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스마엘을 도운 거예요. 육이 육대로 그대로 드러나야 되기 때문에 뱀의 후손은 뱀의 후손대로 드러나야 되기 때문에.
이스마엘이 태어났다는 게 여러분 그게 이상한 겁니까? 하나도 안 이상하죠. 하갈을 통해서 태어났잖아요. 하갈은 생식능력이 있고, 아브라함도 아직도 정자가 죽지 않아서 그래서 남녀가 결혼해서 애 낳은 거 이게 뭐 이상해요. 그리고 이스마엘이 살아가는 행적이 있을 거 아닙니까. 그놈이 또 자식 낳을 거 아닙니까? 그게 뭣을 이룬다? 역사를 이룰 거 아닙니까? 뭐가 이상해요.
그런데 만약에 역사 끝에 마지막이 온다면 종말이 온다. 이게 뭐가 이상하냐 말이죠. 하나도 이상할 게 없지요. 이거는 믿습니다. 안 해도 그냥 받아들이는 사실 아닙니까? 믿습니다. 안 해도. 그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행함이 동원되었습니까? 그러니까 이스마엘 혼자 역사를 꾸리고 마지막 때 하나님 오셔서 메시아 오셔서 이스마엘 구원한다. 이렇게 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다 이 말이죠. 사람들에게는.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성경을 보고 싶어 해요. 왜? 그들은 이스마엘이니까 육의 사람이니까.
그런데 똘아이가 있지요. 뭐냐 하면, 사람의 혈육이 없어도 애 태어난다는 희한한 똘아이가 있다 이 말이에요. 시므온, 안나, 마리아, 아브라함, 야곱 이런 사람들. 소위 신앙인들. 완전히 똘아이들, 미친놈이다 이 말이죠. 이스마엘 있잖아. 그거나 잘하고 그 이스마엘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그만이다 이 말이죠. 가인처럼 제사나 드리면 그만 아닙니까?
할 수 있는 걸 놔두고 왜 할 수 있는 것의 의도적으로 부정해 버리고 인간의 행함으로 안 되는 걸 왜 고대하느냐 이 말이죠. 이런 인간이 이상한 인간 아닙니까. 안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이스마엘로 족하잖아요. 이스마엘로 족하단 말이죠. 우리 입장에서 이삭이 개입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사도되기 전에 여호와 잘 믿었어요. 말씀 잘 지켰습니다. 그러면 됐잖아요. 뭘 더 원해? 사도 바울 욕심도 많다. 뭘 더 원해. 지가 훌륭하게 살면 그만이지. 뭘 더 원합니까? 왜 스스로 자기를 부정할 요소를 끄집어 당겨요? 끄집어 당긴 건 아니지만. 지도 아니지만. 주께서 그렇게 했지만.
왜 스스로 자기가 착하게 살면 착하게 사는 것을 착하다 이야기하면 되고, 그 착하게 된 것을 하나님 은혜입니다. 라고 말하면 되지, 왜 은혜라고 이야기한 행함을 스스로 부정해야 되느냐 말이죠. 왜 애써 부정해야 되느냐 말이죠. 다른 걸 봤기 때문에 그래요. 다른 걸. 다른 걸 봤기 때문에.
사람은 역사를 못 버립니다. 왜 그러냐 하면, 사람이라 하는 것은 과거의 산물이에요. 인간은 과거의 산물이에요. 과거 없는 내가 없잖아요. 내 안에 뜯어보면, 과거에 경험했던 것이 추려서 다는 안 들어있지만 취사선택되어 다 들어있어요. 나한테 유리한 것만 다 들어있어요. 나는 과거의 집약이에요.
미래는 왜 안 되느냐? 미래는 안 나타났으니까.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니까. 과거가 다 들어있어요. 과거가 나를 현재로 밀어낸 겁니다. 그게 지금 나에요. 그리고 우리는 과거가 만들어서 현재화 되고 우리는 현재에서 미래를 소망한다. 그게 인간이거든요.
이스마엘에서 이스마엘로 제2 이스마엘, 제3 이스마엘 계속 나가고 있잖아요. 그걸로 우리는 이게 뭐 이상하다든지, 내 인생이 뭐 잘못됐다든지 이래 살면 안 된다든지 그러한 느낌은 우리는 조금도 가져본 적이 없어요. 남들 다 그래 살고 나도 그렇게 살아가고, 플러스 하나 더 나한테 유리한 점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 은혜입니다. 이거 안 보너스까지 얻어 챙겼으니까 이런 나가 문제성이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 이런 나가 문제성이 없다 이 말이죠. 이렇게 된 나를 왜 스스로 부정해. 말이 안 되지요.
거기다가 십자가까지 도움까지 받아서 죄용서 받았으니 세상에 나란 인간은 얼마나 멋있느냐 말이죠. 지난 오년 전에 십자가 믿어서 지금은 그 십자가 믿었다는 과거의 산물이니까 지금은 십자가 산물이 과거로 흐르고 미래의 주님 만나면 그만이다 말이죠. 종말 온다니까 안 믿는 놈 다 때려 부숴서 신난다 해서 부숴라. 이런 역사관만 있어도 하등에 문제될 게 없다 이래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처럼 내가 현재 죽었다는 것은 그거는 도저히 그런 발상은 나올 수가 없어요. 있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래드의 종말론 보고 난 뒤에 이 사람의 문제점을 지적하라 하면 내가 보기에 지적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저희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 다 했기 때문에. 그래서 이 책을 읽어 보셔야 됩니다.
제가 예를 들어서 피아노를 가지고 문제 삼을 때 내가 문제 삼는 피아노에 대해서 사람들은 보지 않고, 왜 괜찮은 피아노 문제 삼느냐? 이래 시비 걸고 이래 합니다. 아주 괜찮은 피아노 문제 삼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앞에서 문제 안 될 게 아무것도 없어요. 다 문젯거리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 믿을 때 예수님 말씀을 지키려고 시작합니다. 그러면 예수님 말씀 가운데 문제될 거 따로 있고 문제 안 되는 게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거는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낸 숙제를 자기가 풀려고 시도해서 예수 계신 나라에 들어가려 하는 거예요. 그래 놓고 하는 말이 예수님 공로로 구원받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앞뒤가 안 맞아요. 거짓말이에요.
예수님의 공로면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받아야 되는데 예수님 말씀 지켜서 자기 성취한 자기 그게 거기 왜 들어갑니까? 예수님께서 공로로 구원받는다 할 말을 그런 식으로 이해한다면 예수님께서 내가 내 은혜로 구원받는다. 공로로 구원받는다. 이런 말씀만 할 뿐이지 십자가 죽을 이유는 하나도 없어요.
예수님께서 이장우 목사님, 내 공로로 구원받는다. 알았지? 알았지? 예. 가자. 이러면 되지 십자가가 죽을 이유는 없다 이 말이죠. 안 그렇습니까? 내 공로로 구원받는다. 고맙습니다. 따라온나. 예. 이러면 되지 십자가 죽을 이유는 없잖아요.
베드로가 의문 들었잖아요. 주님께서 왜 사흘 만에 고난 받습니까? 말도 안 됩니다. 그냥 갑시다. 밀어붙입시다. 이대로 좋습니다. 병까지 고치지 마귀 나가지. 마귀 떠나면 끝나는 이야기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마귀 권세를 이기면 그거 구원 받은 거지, 뭐가 또 남은 게 있어요? 남을 게 없잖아요. 남을 이유가 없잖아요. 우리 마귀 붙어 있었다. 우리 마귀 떠났다. 끝나는 거 아닙니까?
십자가는 왜 지는데? 십자가 질 이유가 없다하니까. 주님께서는 그따위 식으로 생각하는 그것이 바로 그것 때문에 같이 죽자 이 말이에요. 너는 니가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이 이야기했던 거, 선악과 따먹으면 죽으리라 하는 그 죽음이 이제 너도 실감해야 되는 거예요. 같이 동참해야 되는 거예요. 예수의 십자가에서 죽음이 처음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죽음의 의미가 거기서 나오는 거예요. 십자가에서 나오는 거예요.
우리가 약속에서 주인공이 아닙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에요. 우리가 빠져 있어요. 우리가 주인공이 아닙니다. 주인공이 될 수가 없어요.
신학을 하면 할수록 신학을 한다는 자기가 과거가 되거든요. 신학을 하면 할수록 자기는 과거의 산물이니까 자기 안에 못 버려야 될 신학이 가득 더 이상 차 있을 뿐이에요. 내가 죽었다는 생각이 드는 게 아니고 나는 신학을 이만큼 잘 안다는 것만 차곡차곡 쌓이게 되는 겁니다. 그걸 한꺼번에 버리라고 하니까 못 버리는 거예요. 버릴 수가 없는 거예요.
성경해석의 기본을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간단하니까. 성경해석 기본은 뭐냐 하면, 해석은 누가 하신다? 예수님만이 하신다. 첫 번째고. 두 번째는 그 해석대로 누가 실시하신다? 누구 실시하느냐? 예수님이 실시해요. 이게 전부입니다. 그러면 이 1번과 2번, 해석은 예수님만이 해석할 수 있고, 계획된 실시도 실제로 적용시키고 완성하는 것도 예수님만 할 수 있다면, 여기서 누가 배제돼야 됩니까? 우리가 배제돼야 되죠.
그런데 우리는 배제 안 되려고 한다고. 왜? 이스마엘이니까. 지금 건전한데 뭐. 우리가 이 사실을 안다는 자체가 우리가 괜찮은 존재가 아니야 이래 따진다 말이죠. 이걸 안다는 사람이 이걸 안 믿어요. 알기는 아는데 믿지를 않아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 진짜 여기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진짜 죽은 믿음.
죽었다는 것을 알기는 아는 것은 마귀도 안다 말이죠. 그러나 행함이 없다 말이죠. 자기를 부정하는 그 행함이 안 나온다 이 말이죠. 아브라함의 행함이 뭐였습니까? 자기 부정이었잖아요. 기생 라합이 뭡니까? 자기 부정이었잖아요. 나오질 않는 거예요. 예수님만이 홀로 다 한다는 거예요. 실시한다는 거예요.
오늘 강의의 결론을 미리 말씀드릴게요. 종말은 없어요. 그리고 우리가 만든 종말은 가짭니다. 거짓말입니다. 그러면 종말은 어떻게 생기는가? 종말은 십자가에서 새롭게 만들어내요. 어디서? 이 두 약속을 가지고. 약속을 실시할 사람은 예수님 밖에 없어요. 우리가 종말 만드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두 단계를 가지고 여기에 하나님이 종말을 만들어요. 우리가 생각치도 못한 없었던 새로운 종말을 만들어서 집어넣어 버려요.
그래야 그 종말은 종말을 위한 종말, 이해하기 위한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려 주는 종말이란 말이죠. 그래서 모든 성경은 누굴 증거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함이에요. 우리가 종말을 알아서 우리가 구원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종말론 돼야 된다.
그 이야기가 [복음의 회복] 종말론 첫 문장에 나와요. 내 쓸 때 했어요. 이거 이해할 사람 별로 없을 기라. 이래 되어 있어요. 복음의 회복 문장에 첫 부분에 보면 이래 되어 있어요. [성경적 종말론은 기존의 인간의 종말론을 부정하는 종말론이다.] 이래 되어 있어요. 이게 무슨 뜻인지. 인간이 아이디어로 끄집어내는 모든 종말론은 그것을 깨부수기 위해서 낯선 종말론이 새롭게 그 종말론과 마주친 거예요.
예수님의 성경해석에 나오는 종말론과 인간들이 이렇게 래드처럼 생각하는 종말론과 마주치는 가운데서 무슨 사건이 다시 한번 부각됩니까? 십자가 사건이 나와요. 아하, 이래서 나는 주님께서 나를 끌어안고 같이 물귀신 되어 죽으셨구나. 그걸 아는 종말론이에요. 이제 목회자들은 그걸 양쪽을 다 증거해야 될 임무가 있습니다. 교인들에게.
이런 예수님의 종말론에 의하면 모든 인간들은 뭐냐 하면, 어린애 같지만 미안합니다만 한번 따라 해 보세요. 모든 인간은 따라해 보세요. 허깨비. 허깨비입니다. 허깨비가 뭐냐 하면, 분명히 실체가 있는 훅 부니까 이게 먼지가 되어서 분명히 있었는데 그 현장에 보니까 없어요. 가루가 돼서 사라져 버렸어요. 이게 허깨비입니다. 일종의 환상이죠.
나보고 미워하고 나보고 전화 걸고 메일 보내서 저주하던 그거, 막상 가 훅 부니까, 여기 있던 어떤 사람 나한테 저주했는데 그 사람도 없고 저주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멀리서 보면 그걸 뭐로 보입니까? 신기루가 멀리서 보면 실제처럼 보여요. 실제처럼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밤새도록 고민하는 거예요. 걱정하는 거예요.
아, 고민이다. 저 사람의 비위를 어떻게 맞출까? 사람을 좋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 하는데 우리는 저 사람을 어떻게 비위를 맞출까? 어떻게 저걸 기분 좋게 해서 내 교인 만들까? 지금 온 고민이, 내가 행동 말 잘못해사 다른 교회 갔구나. 이 바보야! 내가 목회 그만할까? 혼자 끙끙 앓고 있는 거예요. 주님께서 계속 허깨비를 우리한데 깔아놓고 있는 거예요.
마치 허깨비를 알아야 사사기가 해석됩니다. 사사기는 뭐냐 하면, 암몬, 모압, 블레셋 그리고 전부다 모든 이방인들이 뭐였습니까? 이스라엘에게는 허깨비에요. 그런데 허깨비가 언제 실체로 보이느냐 하면, 오히려 여호와를 허깨비로 여길 때 그들은 실체로 다가와서 억압을 받다가 막상 여호와께서 나타나니까 그야말로 그들은 우상 바알처럼 부숴도 기드온 나오지요. 부숴버려도 아무 상관없는 잠시만 홀연히 나타났다 홀연히 언제 있었느냐 할 정도로 없어지는 허깨비들의 집단이에요.
그것이 역대상, 열왕기상 전쟁할 때 보면, 앗수르의 무려 삼십만 대군이 몰려왔는데 천사가 왔다 가니까 다 죽었잖아요. 그러니까 그 천사의 엘리사의 입장이 아니고 게하시 입장에서 보게 되면, 거기는 아람 군대의 수십만 군대가 있을 것이고, 거기에 부대가 있고, 대대가 있고, 연대가 있고, 중대가 있을 것 아닙니까? 소대가 있고 소대에 보면 거기 누가 있어요? 어떤 장정이 있지요.
그 장정이 있으면 전장에 보냈던 가족들 있을 것이고, 마누라 있고 자식들 있을 것 아닙니까. 우리 눈에는 절대로 허깨비가 아니지요. 왜? 가족들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아무리 저 놈들이 군사훈련 못하고 예수 안 믿는다 해도 칼 한번 휘두르면 나뭇가지라도 쓰러진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삼십만 군대를 무시할 수 있습니까? 못하지요. 벌벌 떨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그것이 여자의 후손, 뱀의 후손 약속의 입장에서 봐서는 뭐냐 하면, 잠시 나타났다가 이제는 퇴장해야 될 뱀의 후손을 보여줄 배역을 잠시 맡은 허깨비인데 그 배역이 뭐냐 하면, 여자의 후손이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잠시 보여주기 위해서 잠시 등장했다가 잠시 삼십만 대군에 섞여서 같이 이 땅에서 하직해야 될 그러한 쓰레기 같은 인간이에요. 이걸 무슨 전쟁? '붙이시매'의 전쟁이에요.
예를 들어서 북한의 인민군들 쳐부수기 위해서 기도하자. 라고 한다는 자체가 이거는 의식하는 거지요. 허깨비로 안 보겠다는 거죠. 그래 되면 그 사람한테 수고 하고 무거운 짐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하나님의 영광 중에 있었던 분이 십자가에서 로마 군인한테 옷 빼기고 뺨 맞을 때 기분 나빴겠어요?
그리고 스데반 집사가 주님이 자기 우편에 서신 걸 보는데 짱돌 들고 자기에게 돌 던진 사람, 하나하나 밟아서 니 내일 밤에 천사 보내서 복수한다. 이렇게 복수심이 있겠습니까? 니 나한테 돌 던졌지? 니는 ( ) 내일 아침 죽고 난 뒤에 귀신 되서 갈 거다. 이런 복수가 있겠습니까? 죽은 귀신의 원한이 있겠습니까?
그거는 무속신앙, 무당들이 하는 짓이에요. 무당들이 죽은 귀신이 되어서 복수하겠다는 것이 무당들이에요. 내 대신 복수 해달라고 점쟁이한테 비는 겁니다. 그런 역할하는 게 무당들이고. 사울이 사무엘 보기 위해서 했던 거 있지요. 엔돌의 무녀들이 하는 짓이 그거에요. 허깨비를 허깨비로 보질 못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거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약속의 능력에서 안 나왔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스마엘 계통이지요.
방금 제가 길게 이야기한 것을 정리해 봅시다. 예수님이 종말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뭐 감람산, 뭐 강화, 뭐 감람산에 대한 종말 예언서 이렇게 여러 가지 있는데. 강화란 말 강의, 설교 이렇게 해야 될 건데 강화라는 어려운 말 했는데. 감람산 설교를 통해서 종말론 설교했는데.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이스마엘처럼 약속이 아무 상관없이 과거의 산물이에요. 내가 여기 있음에 내가 존재함에 날 존재케 해달라는 거예요. 존재의 의미가 뭐냐고 물으면, 존재의 의미는 관심도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고 그런 건 몰라도 되고, 다만 현재 존재한다는 자체가 계속 뭔가 유지해야 된다는 동물적 본성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 말이죠. 거기서 나온 종말이라 하는 것은 어떤 종말이냐 하면, 자기중심의 종말이죠.
그러니까 첫 번째는 뭐냐 하면, 인간 종말론, 개인 종말론이에요. 예수님께서 지적하는 것이 인간 종말론입니다. 그리고 인간들의 군상들이 모임, 군상들의 집합. 이게 뭐가 되겠어요? 하나의 역사가 되겠지요. 이걸 역사적 뭐라 합니까? 종말론. 이 두 가지를 예수님 나오는데 십자가에서 나오신 약속된 종말론에 새로 대신한 종말론에 의해서 둘 다 쳐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래드의 책에 보면 이건 손도 안 댔어요. 이건만 이야기해요. 역사의 종말론만 이야기한단 말이죠. 주님 언제 쯤 오십니까? 이런 거. 무슨 사건 터지면 그 다음 사건에 주님께서 구름 타고 오실 겁니까? 어떤 사건의 시나리오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드라마 내용이 지금 요 사건 다음에 그 사건되지, 이렇게 묻는 거예요. 그렇게 묻는 인간 자체를 문제 삼는다는 생각을 못하는 거예요. 사람들이. 종말론에 관심 있다는 자체가 얼마나 대견스러운데 이게 어때요? 이래 나온다 이 말이죠.
사람들은 놀랍게도 역사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자기를 역사 안에서 빼돌려서 깊숙한 곳에 자기 자신을 숨겨놓기 위한 방편입니다. 역사를 이야기한다는 것이. 사람들이 정치를 이야기한다, 논하다. 노무현이 어떻고, 이명박이 어떻고, 박근혜 어떻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순간에 뭘 감추느냐 하면, 바로 나의 허점을 감추어 놓기 위해서 나보다 더 못난 인간을 세 겹, 네 겹, 삽겹살로 까는 거거든요. 이게 주님한테 통하겠습니까, 안 통하겠습니까? 일절 통하지 않습니다.
인류의 역사가 뭐냐 하면, 인류의 역사라 하는 것은 약속의 전개과정이에요. 약속이란 뭐라 했습니까? 무슨 후손과 무슨 후손? 여자의 후손, 뱀의 후손 이거 전개과정입니다. 약속의 전개과정에서 다시 적어 드릴게요. 여자의 후손, 또 하나는 뭐라고요? 뱀의 후손인데 사람은 중립에 속하는 게 아니고, 이미 선악과 따먹은 순간부터 사람은 어디 속하느냐 하면, 여자의 후손이 아니고, 어디 속합니까? 뱀의 후손에 전량 뱀의 후손 편에 다 서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뱀의 후손 편에 서니까 여기서 무슨 역사가 나옵니까? 인류를 긍정하는 자신의 인간의 있음을 긍정해주는 인간 긍정의 역사가 나오겠지요. 그죠? 인류역사를 주님께서는 어떤 식으로 한다? 여자의 후손의 약속에 준해서 그것을 부정하는 식으로 인물들이 툭툭, 툭툭 여기 하나 나오지요.
대표적인 것이 야곱에서 이름이 뭐로 바뀝니까? 이스라엘로 바뀌죠. 야곱이 이스라엘로. 하나님이 원했던 것은 야곱의 하나님이 아니죠. 이스라엘의 하나님입니다. 왜냐하면 야곱을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라 야곱을 통해서 그 안에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오실 예수님을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들어온 겁니다. 이스라엘은 더 이상 이스라엘이 아니고 그 이스라엘 속에 누가 들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 있어요.
그게 베드로전서 1장 10절에 보면, 이미 그리스도의 영이 이미 선지자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어디다 전량 됐다? 뱀의 후손 속에 전량 됐어요. 모든 인간이 뱀의 후손 속에 속했다는 말은 뭐의 증거냐 하면, 자력으로 뱀의 후손을 벗어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주님께서 점차점차 여자의 후손의 윤곽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들이 철저히 갇혀있다는 것을 보여줄 이유가 필요가 있었지요.
그렇다면 뱀의 후손들이 분투노력하는 것, 인류역사 아닙니까? 역사에다가 뭘 집어넣는가? 430년 후에 뭘 집어넣어요? 율법을 집어넣어 버리지요. 율법을 집어넣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율법에 갇힌 정도가 아니고, 아예 저주에 갇히고 죄에 갇혔음을 확연하게 합니다. 그러면서도 율법과 저주와 상관없는 인물을 거기다가 집어넣어 버려요. 집어넣어 버리면 그 인간은 이 뱀의 후손에서 어떻게 대우받을까요? 춥고 피 흘리고 망하고 추방되고 쫓겨나고 이렇겠지요.
어떤 사람이 실존적으로 인간 종말론 봅시다. 보통 개인주의 종말론. 역사적 종말이라 하는 것은 이 우주가 망하는 게 역사적 종말론이고, 개인 종말론은 뭐겠습니까? 자살이죠. 자, 어떤 사람이 자살한다 합시다. 자살하는 이유는 자기 존재 의미를 몰라서 자살하죠.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고 자살하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누군지를 끝까지 내가 알고 싶은데 살아서는 따분해서 모르겠고. 살아 있어서는 안 되니까 어디까지 파고 들어가겠다? 삶 이후의 세계, 죽음의 세계 가서도 나라는 것을 규정하기 위해서 스스로 자살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자살이라 하는 것은 타인에 의한 자살이 아니고 스스로 한 행동이거든요.
모든 인간이 스스로 한 행동은 전부다 어디에 겨냥하느냐 하면, 내가 누구냐를 내가 파악하기 위한 조치입니다. 모든 행동은 내가 누구냐를 내가 어느 정도 된다는 내 가치가 내 의미가 도대체 나라는 의미가 어느 정도 된다는 걸 알기 위함이에요.
그런데 자아의 의미라 하는 것을 안다는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게 자아는 원래 없는 거예요. 없는 걸 있다고 생각하고 그걸 채우려고 하니까 채워집니까? 안 채워지지, 바보같이. 우리는 뭐냐 하면, 신약 고린도전서에서 확실하게 이야기합니다. 너라는 것은 있을 수 없고, 누구의 종으로 돼버려요. 누구의 종입니다. 내가 누굽니까가 아니라 너는 누구에 소속된 자에요. 이게 그리스도의 몸이라 하지요. 우리는 뭡니까? 우리는 홀로 있는 게 아니고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살아가는 거예요. 내가 누구냐를 따질 수 있는 권한이 없어요. 내가.
그러면 우리가 성도가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면 저쪽에 자살하던 예수 안 믿던 저 사람들은 누구의 것이 됩니까? 뱀의 것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놀랍게도 뱀의 것이 된 사람은, 우리는 예수님의 것입니다. 라고 나오는 것처럼 누구의 것이냐고 말하지 않고, 놀랍게도 뱀의 후손들은 나는 마귀의 것입니다. 라고 말하지 않고 놀랍게도 나는 누구지? 이러고 있다고.
아, 내가 누군지 알까? 예수를 믿어볼까? 백날 예수 믿어봐야 그 예수는 뭡니까? 가짜 예수지요. 왜냐하면, 자아를 포기 못하고 나라는 자아에다가 예수를 집어넣는 예수니까 이 진짜 예수는 폭발해 버리지요. 이 폭발한 사태가 뭐냐? 다메섹 사건 아닙니까? 주여 누구십니까? 물었잖아요. 왜 묻느냐 말이죠. 어디 종이 주인한테 누구십니까 묻습니까? 주여 누구십니까? 그때 주님의 말씀이 대답이 뭡니까? 니 때문에 죽은 내다 말이죠.
그럴 때 비로소 사도 바울은 내가 누구십니까? 물을 잽이 안 된다는 거예요. 왜? 내가 날마다 내가 누구냐고 묻는 그걸로 인하여 지금 고난당하신 분은 창세전부터 사도 바울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십자가 왔다 가신 그분이기 때문에.
그때부터 사도 바울에게는 더 이상 내가 누구냐를 물을 이유가 없지요. 주여, 뭐 할까요? 이것만. 주여 저 뭐 할까요 이거만 묻지, 저는 누굽니까? 사랑 할까요 말까요? 아, 더러워서 못 살겠습니다. 그 다음에 죽으면 어떻게? 이래하고. 뭐 할까요? 니는 복음에 빚진 자다. 알겠습니다. 저 다음에 어디 갈까요? 로마에 가야 돼. 로마에 왜 가는데. 까불고 있어. 알겠습니다.
이거는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더 이상 나는 내 것이 아니고 주의 것이다 이 말이죠. 로마서에 보면 나오죠.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나오잖아요. 사나 죽으나 인생이라 하는 것은 이거 전부 아닙니까? 그 중간에 들어있는 게 이거 아닙니까. 태어날 때도 주의 것, 죽을 때도 주의 것이라면 그 중간에 있는 건 다 주의 것이니까. 끝난 문제에요. 내가 누구냐를 이야기할, 주의 것이라는데 무엇을. 주의 것인데.
이 보성녹차 누구 것이다? 나의 것이다. 하고 있는데 보성녹차가 혼자서 고민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굴러 떨어질까, 말까? 이상한 소리하고. 어이, 깝데기 열고 마셔야지. 끝난. 그러면 주여, 제가 열어 드릴게요. 열어드리고 뭐고 내가 마시겠다는데. 다음에 쓰시겠지. 갖다 버릴까. 본인은 보성녹차 가지고 다음에 쓰시겠지. 그런데 주인인 내가 갖다 버려 버려요. 본인이 다음에 쓰시겠지가 아니라 갖다 버리면 끝나는 거예요.
그걸 이야기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무화과나무를 통해서 종말 이야기했습니다. 무화과나무가 때가 안 됐어요. 예수님도 알아요. 열매 안 맺힐 땝니다. 의도적으로 다가갑니다. 열매 없다고 저주했습니다. 뭔 뜻입니까? 나는 무화과나무의 실력과 상관없이 얼마든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면 저주할 권한이 있다. 뭣 때문에? 약속을 위해서. 여자의 후손, 뱀의 후손을 위해서 무화과나무를 사용할 권한이 나에게만 있다 이 말이죠. 니가 그런 예수를 아냐 이 말이죠.
뿐만 아니죠. 나귀 있죠. 주께서 쓰시겠다 하면 쓰는 거예요. 공출이죠. 이걸 유명한 말로 까라면 까는 거예요. 쓰시겠다면 쓰시겠다는 거예요. 뭘 위해서? 종말이라는 것을 주님이 십자가에서 하는 종말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내가 뭔들 못 하리요.
그런데 인간들은 그것도 모르고 자기 구원, 자기가 종말에 살아남기 위해서 종말의 스케줄과 그걸 알려 달라는 거예요. 종말의 그 시나리오와 스케줄 알려 주면 무슨 꼴 나는 줄 알아요? 어리석은 다섯 처녀 꼴 납니다. 왜? 지금은 기름 준비할 하등의 필요 없으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미처 준비 안 될 시간을 골라서 침투하죠. 그걸 가지고 깨어 있으라. 다른 말로 하면 정신 차려라. 그건 여기 잘 이야기해 놨어요. 종말, 이 책에 보면 나와요. watch 하는 것은 깨어 있으라. 정신 차려라. 그런데 그렇게 해놓고 무슨 뜻인지 몰라요. 정신 차리라는 목적이 없어요. 내용물이 없어. 래드는.
이겁니다. 약속을 위하여. 약속은 다시 하겠습니다. 약속은 해석도 누가 하고? 예수님이 해석하고. 그 다음이 중요한 건 실시를 누가 합니까? 실시를. 예수님이 실시하는 거예요. 지금 예수님께서 부지런히 실시하고 있는 거예요. 도둑놈이 놀질 않아요. 우리 도둑놈 되신 예수님이 놀질 않고 도적 같이 오십니다. 실시를 하고 있으니 정신 차리고 도둑맞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기존의 종말론 버려야 됩니다. 왜 그럴 때 어떻게 버리느냐? 기존의 종말론이 역사와 연루된 종말론입니다. 이거 버려야 됩니다. 역사를 만약에 이렇게 못 버리게 되면, 거기에 신학들이 달려 붙어요. 개혁주의 신학, 성화론, 인간이 끄집어낸 신학은 거기 다 갖다 붙습니다. 계시론, 구원론, 성령론 모든 신학은 거기다 삼위일체론 다 갖다 붙었어요. 그거는 역사의 산물이죠.
지금 내가 주와 함께 죽는다는 생각을 못하게 만들어요. 한 때 죽었는데 지금은 안 죽어도 된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한 때 주께서 보성녹차를 마셨으면 보성녹차는 더 이상 자기가 자기 행세해도 괜찮고, 이젠 주님한테 손떼도 괜찮다고 보는 거예요. 지금 당장 죽으면 보성녹차 기분 나쁘다 이 말이거든요.
한 번 죽었다면 또 죽어도 상관없어야 되는데 한 번 죽었다 살아나면 그걸 권력처럼 여겨서 이제 주님 손대지 마이소. 오년 전에 암에서 기도하고 나앗잖아요. 또 암 걸리면 안 믿어. 이거는 처음에 믿을 때도 안 믿은 거예요. 자기의 소망을 마귀가 들어준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못 벗어나니까. 뱀의 후손을 못 벗어나니까.
진짜 여자의 후손이 침투하면 내가 뭐가 뱀인 걸 알아요. 뭐가 뱀의 장난인 걸 압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내 구원 내 운명을 내가 알아서 한다는 그 자체가 이게 이단이며 나는 태어날 때부터 그런 이단으로 태어났으며 그게 악마의 노림수다. 종교라는 이름의 악마의 노림수다 하는 걸 알아요. 그런 걸 할 때 불트만의 말대로 그게 바로 칼 바르트의 말대로 뭐냐? 그게 실존적 종말이란 겁니다.
조금만 더 하고 쉽시다.
이 불트만의 신학이 기존의 역사를 들추어서 예수님이 말했던 종말에 관한 모든 종말에 대한 예언을 수집해서 그걸 짜깁기해서 아주 통합된 일관된 종말 시나리오와 스케줄을 짜자는 그 작업에 대해서 불트만은 단호하게 반대했습니다. 너거들이 묵시를 모른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쪽의 공격받는 사람들이 뭐냐 하면, 불트만 니는 하이데거의 사상이지 성경적 사상은 아니다. 이래 나오는 겁니다. 불트만이 하이데거의 사상의 영향을 입은 것은 맞아요.
하이데거의 사상은 한 마디로 말해서 뭐냐 하면, 사건 위주의 사상입니다. 사건이라는 것은 즉흥성이에요. 그리고 우발성. 여러분, 즉흥성이라는 의미를 알겠지요. 사전에 계획된 바 없고 사전에 미리 생각한 바 없는데 즉흥적으로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리고 이 사건이 여기서 하이데거의 문제점은 뭐냐 하면, 사건이라고 하이데거의 문제점을 제가 지적합니다. 사건이 되어간다. 그러니까 연못에 어떤 파가 퍼지는 것은 연못의 존재를 연구해서 아는 게 아니고, 연못에 어느 놈이 돌 던졌노? 그 사건을 해야 파가 일어나는 걸 설명할 수 있지, 연못은 옛날부터 존재했다, 연못은 아름답다, 연못은 참 고요하다. 이래서 연못의 실체를 모른다 이 말이거든요.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인간은 뭐냐? 인간은 나는 누구냐? 이래선 모르고. 인간은 난데없는 사건을 들이닥쳐 봐야 인간의 자기 속셈을 드러내요. 착하다, 어질다 이랬는데 누가 지보다 빨리 가니까 씨, 쌍소리 나오고 욕 나오고 우발적인 사건이 터지니까 미처 내가 예상치 못한 욕설이 나한테 튀어나온다는 말은, 그것은 새롭게 자기를 이해하게 되죠. 그러니까 뭐냐? 사건이 들이닥쳐야 이해하게 되지, 사람은 자꾸 사건을 무마해서 과거에 이러니까 통합적으로 내가 이렇다고 정리하지 마란 말이죠.
늘푸른교회 오용익 목사님 강의 도중에 아주 사람들에게 강의를 참 잘했어요. 특히 기억 남는 한 멘트가 있어요. 욕을 해버렸어요. 오용익 목사님 강의 듣는데 보통 인내성이 필요한 겁니다. 왜? 녹음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그런데 죽으라고 듣는 거예요. 끝까지. 녹음상태 듣다가 안 듣는가 보자. 이런 오기로 들어야 됩니다. 편안하게 해서 녹음상태 안 좋으니까 이건 주의 뜻이 아니다 이러면 안 되고. 그런데 이 쒸~ 이러는데. 그게 아마 늘푸른교회 수년 간 가도 잊지 않을 거예요. 은혜 받을 거예요. 아마 그 사건이 은혜 받을 거예요. 그렇지요.
아마 원고설교 했다면 저런 즉흥성이 안 나왔을 거예요. 원고 설교하면 욕을 거기다 의도적으로 넣지 않았을 거예요. 즉흥성과 우발성이 튀어 나온다는 거예요. 문제점이 있어요. 무슨 문제냐 하면, 사건을 어느 것을 사건으로 잡을 것이냐 하고 해석하는 것은 엄연히 나라는 거예요. 자아가 문제에요. 사건이 자아를 만든다는 건 좋은데 사건을 사건으로 인지하는 그 자아는 도대체 어디서 생겼느냐를 해결할 수 없어요.
광주사태 일어나도 강원도 감자 캐는 할머니한테는 자기 아들 배 아파서 가까운 의원에 간 게 더 큰 사건이지, 광주사태는 그 강원도 할머니한테는 아무 의미도 없어요. 그러니까 의미를 줘야 사건 되는데 어느 것을 의미로 잡을 것이냐는 지 마음대로 아니냐 이 말이죠. 지 마음대로. 그렇잖아요.
성경이 창세기 35장, 36장, 이래 있다면, 장은 원래 성경에 없으니까 있다면, 어떤 의미를 성경에서 의미를 끄집어낼 때 35장에서 6장을 끊을 것인가, 36장에서 37장을 끊을 것인가? 37장에서 끊을 것인가? 이건 지 마음대로 아닙니까?
문맥대로 설교한다고요? 끊는 건 지 마음대로고? 예? 무슨 문맥? 문맥 끊는 건 지 마음대로 해놓고 문맥대로 했다고. 어디 그런 우김이 어디 있어요. 그래. 그게 바로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책에 보면 나옵니다. 새로운 게 무지무지하게 가미되어 있어요. 그게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의미를 결정할 때 어디서부터 시작을 잡어서 어디서 끊을 것이냐 하는 것은 각자 자기 마음대로인데 사람들이 간증집회하면서 그걸 지 마음대로 사건을 끄집어 조작해 놓고 주의 은혜다, 사건이다. 이래 하거든. 사건은 누구 사건? 지 사건이야. 이것은 뱀의 후손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건이에요.
결국 그건 뭘 주장합니까? 아까 뱀의 후손의 특징이 뭐라 했어요? 나는 망해도 좋겠다. 이걸 이야기합니까, 뭡니까?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최종적으로 뭔가 관심이 있을 때 그건 아직도 벗어나지 못했다. 뱀의 후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다 이 말이에요.
그걸 바로 불트만은 치고 들어온다. 그걸 깨버린다. 왜? 그게 주께서 원하시는 여자의 후손이 벌이시는 종말이기 때문에. 역사라 하는 건 니가 만든 역사, 내가 용서하지 않으리. 하고 부술 때 십자가의 능력으로 부술 때 부정해 버릴 때 그걸 ‘위기’라 하는데 칼 바르트는. 쳐들어올 때 그때 그 순간을 가지고 불트만은 그걸 믿음이라 합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 그래 이야기합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