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6월 18일 성화론의 허구성 1
대구 6월 18일 성화론의 허구성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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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6월 18일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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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3-16 19:25
대구070618성화론의허구성1
07대구강의08-성화론1 이름 : 구득영 2008-03-08 21:25:32
07,06,18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성화론에 웬 죽음?
이제 시작을 하겠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할 강의는 '성화론의 허구성' 인데, 저도 대학원 세미나처럼 읽어보면서 하고 싶은데, 물론 읽다가 성질이 나면 또 열을 받아서 엉뚱한(?) 데로 가겠지만 말이다. 왜 세미나를 할 때 보면 강사가 주로 원고를 읽는데, 우리도 일단 교재를 먼저 보자.
** [서론] - 우리는 경험상 두 번 죽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의 신체는 사실 두 번 죽음을 겪도록 되어 있다. 그래야만 우리 신체에 담긴 하나님의 창조성에 내용이 드러난다.
여기에 "우리는 경험상 두 번 죽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라고 되어있는데, 왜 이렇게 두 번 죽을 수 없다고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여기 교재에 요한계시록 20장의 이야기도 나와있지만, 거기에 보면 한번 죽음과 두번 죽음이 있고, 부활의 경우에도 첫째 부활이 있고 둘째 부활이 있다는 것이다.
◈ 두 가지 죽음과 두 가지 부활 !!
그러니 적어도 성화론이 수립되려면, 이 두 가지의 죽음과 두 가지의 부활을 모두 다 소화를 시켜야 하는데, 즉 두 가지가 다 설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이러한 죽음과 부활을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다면, 그런 성화론은 당연히 폐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신학이든 뭐든 간에 거기에서 반드시 구원의 능력이 나와야 하는데, 그런데 이 구원의 능력은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다 나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화론이 죽음이 한번 죽음이 아니고 두번 죽음이고, 부활도 한번 부활이 아니라 두번 부활이란 것을 모두 설명할 수 있을 경우에만, 비로소 이 성화론이 구원의 능력을 묘사할 수 있다고 확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흔히들 말하는 성화론의 경우에, 기독론 따로, 구원론 따로, 성화론 따로, 그렇게 되어있는데,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안 되고, 죽음이 한번 죽음이 아니고 두번 죽음이고, 부활도 한번 부활이 아니라 두번 부활이란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성화론이 될 때, 비로소 구원의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성화론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론부분에 이런 글을 써놓았고 말이다.
만약에 한번 죽고 한번 부활이라고 하면 성화론과 연결성을 가지고 있는데, 즉 '태어남과 자람과 죽음과 부활'의 이러한 단순구조 같으면 말이다. 이렇게 태어나고, 자라고, 즉 성장, 성숙하고, 마치 씨앗이 자라듯이 말이다. 이런 것들이 모두 성화론에 동원되는 개념들인데, 성경에 있다고 하면서, 즉 "씨앗이 점차 점차 자라난다", 혹은 "그리스도의 몸까지 자라나느니라"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죽어도 그 껍데기는 벗어버리고, 알맹이는 자라났으니 부활이 된다" 라고 하면서, 한번 죽음과 한번 부활이 대충은 뭔가 성경과 맞아떨어지는 것 같은데, 그런데 죽음이 두 개가 되어버리면 곤란해진다는 것이다. 기존의 성화론에서는 그러한 두 개의 죽음이 나올 수가 없으니 말이다. 부활도 역시 그렇고 말이다.
◈ 미래에 이미 완료된 것으로 소급해야 !!
이것을 더 깊이 이야기하면, 성화론이 제대로 되려면 과거에서 현재로, 그리고 미래로 가면 안 되고, 성경에 있는 바와 같이, 미래에 이미 완료된 것을 가지고 소급하는 식으로, 즉 미래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과거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화론은 두 가지 죽음과 두 가지 부활이 모두 어떻게 담을 것인가에 대해서, 거기에 대해서 성화론을 이야기를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에서 현재로, 미래로 그냥 밀어 부치는 식으로 하지 말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성화론이 제대로 되려면, 성화론이 두 개의 죽음과 두 개의 부활을 제대로 수용해서, 성도의 삶에 대한 논리를 합당하게 담아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 왜 한번이 아닌 두번 죽음인가?
여러분들이 여기에 대해서 궁금해하니까 미리 말씀을 드리면, 그렇다면 왜 한번 죽음이 아니라 두번 죽음인가? 그리고 왜 부활이 한번 부활이 아니라 두번 부활인가? 여기에는 또 다른 힘이 개입되는데, 그것이 바로 구원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지금 말하고자 하는 논리가 어려운데, 이렇게 다른 힘이 개입된다는 것은, 첫째로 기존의 인간이 알고 있는 힘이 있어야 하고, 이것이 '1'이고, 둘째로 기존의 힘과는 전혀 섞이지 않는 두 번째 힘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2'인데, 그렇게 되면 이 2가 개입해서 두 번째 죽음과 두 번째 부활을 양상해내었다는 논리가 가능한 것이다. 만약 이것이 섞여버리면 2가 필요 없는데, '1'이 흡수해버리면 되니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들이 알고 있는 첫째 죽음과 첫째 부활이 먼저 있다고 하면, "그것이 아니야" 라고 하는 식으로 하나님의 개입이 침투해서, 둘째 죽음과 둘째 부활이란 개념을 만들어내는 것이 구원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성화론에서도 이런 하나님의 개입이 들어가야 마땅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렇게 "자라난다, 성장한다, 성숙한다" 라고 하는, '어떻게 어떻게 한다' 라는 것이 1번에 해당된다고 하면, 2번에 대한 결론이, 즉 구원의 능력이 1번에 대해서 밑바탕부터 침투해서 들어가야지, 그렇게 해야만 그 논리가 성경적 결론에 도달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2번이 1번에 어떻게 개입하는가? 그것은 바로 '부정(not)'인데, "실컷 신학을 했냐? 하지만 그것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 그렇지? 부수어져야지" 라고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실컷 다듬었냐? 응, 잘했어. 그런데 그게 구원의 능력이 아니라 너에게서 나온 능력이지" 라고 하면서 말이다. 이렇게 제2의 능력이, 즉 외부에서 온 그 능력이 앞의 모든 것을 다 부정하고 깨면서 다가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성화론의 허구성이 밝혀져야 한다는 말이다.
◈ 단선이 아닌 복선 !!
하지만 이런 복선이 아닌 단선을 가지고서 논리싸움이나 말싸움을 해버리면, "이리 봐도 되겠네. 저리 봐도 되겠네" 라고 하면서 핑계거리가 생겨버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결론이 이런 식으로, 즉 부정하는 것으로 나오지 않는다면 앞의 것들은 다 엉터리라는 말이다. "정답은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니, 서로 찾아가자" 라고 한다면, 물론 기존의 학문에서는 가능하겠지만, 성경에서는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학문이라는 것은 "정답은 우리 둘 다 모른다고 치자. 그러면 정답에 어떻게 접근해갈 것인가? 다양한 의견을 끄집어내어서 서로 좁혀가자" 라는 것이란 말이다. 정답은 없고 그냥 진리를 향해서 좁혀가는 것인데, 그런데 성경은 이미 진리가 나와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미 나와있는 것을 소급해 엎치면서 인간에게 접근해서 부수는 방법으로 개입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이 결론에 대해서 좀더 진도를 나가보면, 첫 번째 죽음과 첫 번째 부활은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의 삶을 토대로 해서 발생할 수 있는, 즉 우리의 연장선에서 생각할 수 있는 논리라면, 두 번째 죽음과 두 번째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능력이 아니라면, 이러한 두 번째 죽음과 두 번째 부활이란 아이디어가 나올 근거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 목 베임을 부활로 보아야 !!
좀더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게 두 번째 죽음과 두 번째 부활에 있어서, 사실 이것은 서로 반대말인데, 이 이론에 의하면, 즉 십자가 이론에 의하면, 우리가 죽었다고 하지만 사실은 죽은 게 아니라, '살았다' 라는 이야기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는 목이 베었으니 죽은 것으로 보는데, 그러나 둘째 부활의 입장에서는 산 것으로 보는데, 즉 이것을 요한계시록 20장에서는 첫 번째 부활로 본다는 말이다.
(계 20: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 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하니
(계 20: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것을 어떤 의미에서 우리 삶 속에서의 '성화론' 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것을 우리 삶에다 집어넣으면, 우리가 죄를 짓고 또 죄를 짓는다고 해도, 두 번째 부활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죄로 이해될 수도 있고, 또한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과정으로서 그 토대를 이룰 수도 있다는 것이다.
쉽게 한다고 해놓고 더 어렵게 되어버렸는데, 제가 말하는 취지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것 같은데, 아무튼 두 번째 부활에서는 목이 베었다는 것이 첫째 부활인데, 이렇게 목 베인 영혼이라고 했으니 목이 사형선고를 받아서 날아가고 없는데, 어느 미친놈이 그것을 보고서 "야, 부활했다" 라고 하면서 좋아하겠느냐는 것이다. "아이쿠, 안 됐다. 순교를 당했구나. 그래도 장차 부활을 했으면 정말 좋겠네" 이라고 하지 말이다.
◈ 목 베임 가운데 환희를 !!
그런데 둘째 부활의 입장에서 보면 어떠한가? 너무나도 당연해 보이는 그것이 부정당하고, "아이쿠, 부활했네" 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비참한 목 베인 죽음을 보고 말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당신, 성도 맞네" 라는 것이고 말이다.
그러니 이러한 발상에 기존의 성화론을 집어넣으면 성화론이 전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완전히 또라이 같은 획기적인 발상인데, 그런데 복음을 위해서 핍박을 받으면, 그것이 "아이쿠, 성도가 맞네" 라고 하면서 반가워하고 즐거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요한계시록을 보지 못하겠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너무나도 참혹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참혹 그 자체가 즐거움임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냥 조용하게 살다가 조용하게 죽고, 또 조용하게 부활하겠다는 것인데, 그러나 그것은 첫째 부활에 속한 모습인데, 그런 비참한 죽음은 너무 심하고, 그냥 조용조용하게 그렇게 성화하면서 한번 살아보겠다는 것이다.
◈ 죄와 더불어 성도를 만나는 기쁨이 !!
첫 번째 단선에서는 그런 것이 가능하겠지만, 그러나 이것이 두 번째 부활의 관점으로 와버리면, 이런 삶 속에서 우리 죄가 발각될 때마다 "아, 성도가 맞구나" 라고 확인하는 또 확인하는 환희와 기쁨이 가미된 삶의 논리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엄청난 인식의 전환을 요구한다는 말이다.
* 질문 - 두 번째 부활에서의 성화론은 없나요?
* 답변 - 아까 언급했는데, 두 번째 부활은 두 번째 죽음과 같이 한 세트가 되지 않으면 설명이 되지 않는데, 두 번째 죽음이 있어야 두 번째 부활이 있다는 것이다. 마치 바둑에서 흑과 백이 서로 만나야 하듯이 말이다. 이렇게 두 번째 죽음이 두 번째 부활과 만날 때 성립되는데, 바로 이 두 번째 부활에 해당되는 것이 기존의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성화론이란 것이다. (둘째 부활이 기존의 성화론??)
바로 이러한 성화론이 있다는 자체가, 이것을 부정하는 입장에서 두 번째로 포섭(包攝)하는 성화론이 있을 수가 있는데, 기존의 성화론을 부정하는 입장에서 말이다. 그것이 바로 두 번째 부활에 포함된 성화론이라는 것이다.
* 이런 성경적인 성화론을 어느 놈이 깨노?
* 두 번째 부활이다. 왜, 꼽나?
* 아닙니다. 알았습니다.
*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
이렇게 항상 음과 양이 만나게 되어있는데, 악이 없으면 선이 표시가 나지 않는데, 악을 만날 때 선이 된다는 것이다. 빛은 어둠과 짝을 이루어야 빛이 빛으로 되고 말이다. 그러니 '양쪽 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지런히 철학을 공부해야 하는데, 복음적 입장에서 부수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므로 이 성화론이 허구인데 왜 공부를 하느냐고 물으면, '천만의 말씀' 이라는 것이다. 성화론의 허구성을 당연히 이야기해야 그것이 복음이라는 말이다. 즉 어둠을 포섭해야 빛의 빛다움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러니 산 속에 묻혀서 살면 안 되고, 인천이고 서울이고 돌아다니면서 부딪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부딪칠 때마다 자기도 미처 모르는 것들이 드러나고, 그렇게 해야 복음적인 내용도 함께 깊어진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보시고, 우리 교재 서론부분은 그냥 넘어가고 그 다음을 보자.
** 그런데 이 진리에 대해서 반대하고 나서는 측이 있다. 진리란 이 우주 안에서 꼭 반(反)-진리를 불러내게 한다. 아무리 꼭꼭 숨어도 진리가 등장하면 맞은편에 반-진리가 그냥 숨어있지 않고 얼굴을 내밀게 되어 있다. 진리에 대한 반대하는 반-진리의 특색은 특히 신학 내에서 '성화론'이라는 이름으로 구체화된다.
여기서도 나오는데, 이렇게 진리는 반진리를 불러내게 되어있는데, 연극에서 악한 역할을 불러내어야 선한 역할이 표시가 나는 것처럼 말이다. 제 아무리 꼭꼭 숨어도 진리가 등장하면 맞은편에 반진리가 얼굴을 내밀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이라는 것이다.
◈ 인간은 왜 지옥에 가야 하는가?
이 요한계시록에 보면, 복음을 전하면 바다에서 짐승이 숨어있지를 못하고 기어이 불러내게 되는데, 그렇게 짐승을 불러내는 순서를 두고서 3가지 재앙이라고 하는데, 첫째 재앙이 7인이고, 둘째 재앙이 7나팔이고, 그리고 셋째 재앙이 7대접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인, 나팔, 대접의 3가지 7재앙을 통해서 꼭꼭 숨어있던 그 짐승이 자기의 정체를 드러내는데, 이렇게 짐승의 정체가 폭로되면 이 세상의 정체도 함께 모두 다 드러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인간이 왜 지옥에 가야 하는가?" 라는, 그 이유도 명명백백히 밝혀진다는 것이다.
◈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사이에, 인간의 역할 NO !!
지금 우리가 그러한 와중에 있는데, 제가 이것을 수천 수백 번을 이야기했지 싶은데,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사이에는 인간의 역할이 빠진다" 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 어디까지나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사이의 싸움이고 전쟁이지, 인간이 그 중간에서 주체적으로 그 어떤 역할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은 어디로 가는가? 인간은 뱀의 후손이 아니면 여자의 후손, 그 둘 중에 하나로 포함되어 버린다는 말이다.
이렇게 주도권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쥐고 있는데, 그런데 역설적으로 보면 그 모든 주도권을 인간이 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인간이 역사의 주인공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헤겔이 주장하는 변증법이고, 이러한 헤겔의 주장을 물질로 본 것이 칼 마르크스의 사적(史的) 유물론, 혹은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것이다. 역사는 계속해서 움직인다는 것인데, 그 원동력이자 주체는 인간이고 말이다. 이런 점에서 헤겔이 논리적 문제점을 지니고 있고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성화론의 초점은 이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살 수 있는가?'이다. 여기서 '우리가'에 해당되는 항목은 강렬한 '주체의식'으로 대변된다.
◈ 과연 누가 주체자인가?
성화론의 초점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살 수 있는가?" 라는 것이지만, 성경의 주장은 "주님이 어떻게 하시는가?" 라는 것이니,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즉 "오늘은 주님께서 무슨 일을 하실 것인가?" 라는 것과 "오늘은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 라는 것은 서로 진리와 반진리의 관계라는 것이다. 마치 빛과 어둠이 다르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목사님, 저는 어디에 속합니까?" 라고 하는데,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나' 라고 하는 인간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사이에 주체적으로 개입을 하지 않는데, 그러니 제3의 자리를 만들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둘 중에서 하나에 속하는데, 이렇게 어디에 속했다는 것은, 자기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주도적인 분이 어떤 분이면, 누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분인지, 그것만 살피면 되지 제3의 것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 이근호 목사님이 아니면 그런 설교를 누가?
예를 들어서, 우리교회의 담임목사가 설교를 했는데, 그 교회의 성도가 복음적이라면 목사의 설교에 대한 평가가 복음적이라고 하든지 아니면 이단적 요소가 있다고 하는 평가와 반응이 나와야하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아이쿠, 우리교회 목사님이 아니면 그런 설교를 누가 하겠는가?" 라고 한다면, 그렇게 제3의 영역을 만들어버리게 되면, 그 목사가 전한 설교본문이 이야기하는 차원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에도 있는데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라고 말이다. 예수님이 설교를 너무 잘하니까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뿔다구가 나서 "누가 내 가족이고 모친이냐?" 라고 하셨는데, 왜 자꾸 그런 식으로 자기를 보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을 수용하는 자가 바로 예수님의 한 식구이라는 것이다. (어찌 좀 이상한데??) 그러니 말씀의 내용자체가 지배를 해야지, 자꾸만 사람에 관심을 두어서 제3의 영역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눅 11:27) 이 말씀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가로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도소이다 하니
(눅 11:28) 예수께서 가라사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내가', 혹은 '우리가' 혹은 '자아가' 라는 의식으로부터 출발하겠다는 것은, '우리'를 살리지 못할 진리는 애초에 거부하겠다는 의사를 드러내는 것이다.
◈ '나'와 '자아'는 달라요 !!
여기서 '자아' 라는 것은 '나'와는 그 개념이 철학에서는 확연히 구별이 되는데, 그것이 상당히 어려운 내용인데, 여기서 그것까지 설명하지는 못하겠는데, 그래도 그냥 지나가려니 찜찜하니 조금만 설명을 해보면, 물론 '나'와 '자아'는 풀이를 하자면 같은 의미가 되겠지만, 데카르트 이후에 철학에서는 달리 쓰인다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나' 라고 하는 것은 주체와는 다르다고 했는데, 물론 '나'와 '자아'를 같이 보고 주체와는 다르다고 볼 수도 있는데, 이렇게 신이 자아를 형성해서 신이 만든 것은 '나'가 되고, '나'와 자아에서 나와서 '내'가 느끼는 것을 '주체'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세분화하면 구분이 되기도 하지만, 그냥 같이 봐도 무방하고 말이다. ('나'와 '자아'보다는, 이 '주체'가 의미가 다른 것 같음)
◈ 스데반 집사님이 주님과 함께 천국에 갔단다 !!
여기에 '우리'를 살리지 못할 진리는 애초에 거부하겠고 하는데, 여기에 왜 '우리' 라는 말이 나오는고 하니, 남이 구원받는 것은 자기는 관심이 없는데, 즉 "스데반 집사님이 주님과 함께 천국에 갔단다" 라는 것은 싫다는 말이다.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에 갔단다" 라는 것도 별로 이고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나' 라는 것이 너무 강렬하니 말이다.
하지만 진짜 복음적인 사람이라면,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나라에 갔단다" 라는 말을 들으면, "아이쿠, 너무 좋아요. 에녹과 같은 분을 하나님께서 그렇게 동행하시는 분을 데리고 가니 말입니다" 라고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 입장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을 이렇게 하시는구나" 라고 하기에 말이다. 그런 사람이 바로 복음적인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에녹은 천국에 갔지만, 나를 보내주지 않는다면 나는 싫어요" 라고 나온다면, 그런 사람은 성화론의 요소가 다분히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에녹은 어떻게 해서 천국에 갔지요? 아, 그렇게 했군요. 나도 그렇게 해야지" 라고 한다면 말이다.
이것은 두 번째 부활에서 자아를 모두 죽인다고 하는 것을 모르고, 즉 두 번째 부활이 자아와 관련 없이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능력이 임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자아가 어떻게 하면 되는가?" 라는 문제에 집착하는데, 이것은 두 번째 부활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람이 죄를 지어서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두 번째 죽음, 즉 십자가에서 나오는 저주로 말미암아 지옥에 간다는 것이다. 이 둘째 죽음에서는 지옥에 가도록 프로그램이 확정되어있다는 말이다.
◈ 지옥도 예수님의 기도 덕분에 !!
사람이 자기 인력으로는 지옥에 갈 수 없는데, 예수님의 소원이 있어야지, 예수님께서 간절히 기도한 그 기도 덕분에 지옥에 간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함부로 지옥에 가지 못합니다. 주님의 기도가 있어야만 갑니다" 라는 것을 ##교회에서 한번 설교했으면 좋겠는데, 교인들의 반응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단선이 아닌 두 번째 노선이라는 것이다.
◈ 도대체 미친 사람들이 아니라면 !!
이렇게 비참하게 목 베임을 당한 것을 보고, "축하합니다. 이제 부활하셨군요" 라고 하는 발상자체가, 도대체 어떤 체제 속에 있기에 예수님을 믿고 목 베인 것을 두고서 어떻게 부활의 기쁨에 동참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할 수 없다. 더 살고 싶지만 죽이면 죽어야지 뭐" 라고 하지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두고서 부활의 기쁨에 동참하는 것으로 여긴다고 하니, 도대체 미친 사람들이 아니냐는 말이다.
너무 고난을 많이 받아서 정신이 좀 어떻게 된 느낌, 그런 것이 바로 이 두 번째 부활이 우리 소관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일방적인 은총의 폭포수임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러한 복음의 광채에 당하지 않으면 자기 죽는 것을 기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신학이라는 것은 백 날을 연구해도 단선, 즉 "성화되었다, 죽었다, 부활했다" 라는 종교적인 노선을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오늘은 좀 찬찬히 하려고 했는데 또 성질대로 속도가 나는데, 아무튼 교재를 보자.
** 이렇게 되면 인간을 살려내지 못하는 거룩은 거룩으로 간주하지 않고, 인간을 살려내지 못할 진리는 진리가 아니며, 인간을 살려내지 못할 복음은 복음이 아니며, 인간을 살려내지 못할 메시야는 메시야로 간주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 외부에서 주어지는 거룩 !!
이것을 한 마디로 말하면, 인간이 사는 것은 내부적인 자기 능력이 아니라, 외부에서 개입된 능력으로 산다는 것이다. 거룩도 외부에서 주어질 때 가능한 것이고, 진리도 외부에서 날아오는 것이고, 복음도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고 말이다.
그러면 그 다음 질문은 당연히, "왜 외부에서 들어와야 합니까?" 라고 나오게 되는데, 왜 자꾸만 자기들이 가진 능력을 무시하느냐는 것이다. 무엇이 그렇게 못나고 부족하기에 말이다. 왜 그렇게 자꾸만 외부에서 주어지느냐는 말이다. 그런 반발 내지는 의문점, 호기심과 같은 것들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에게 다시 되묻기를, "당신, 성화론을 한번 연구해볼래" 라고 하면, 그 사람은 대답하기를, "내가 미쳤다고 그런 짓을 하는가? 아무리 연구해도 끝에 가서는 외부에서 다 주어지게 되면, 지금까지 내가 한 것이 무엇이 되는가?"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 것이 이미 의미 없음이 다 드러났는데 미쳤다고 그 성화론을 붙들고 있겠느냐는 말이다.
◈ 왜 성화론에 목숨을 거는가?
그런데 성화론에 목숨을 건 사람들은 무엇인가? "나는 하나님의 외부개입을 일체 믿지를 못하겠다" 라고 하는 것인데, 한 마디로 믿음이 없는 것인데, 즉 "저는 수십 년을 교회에 다녔지만, 하나님께서 일방적이고 강제로 도와주셨다는 체험을 저는 해 본적이 없습니다" 라고 하는 고백을 내뱉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 물론 초짜 때는 그렇지요 !!
목사가 목회를 하는데 새로 나온 교인이 설교에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 "이것은 주님의 선물이군요" 라고 하면, 그 목사는 빙긋이 웃으면서 속으로 하는 말이, "초짜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당신도 교회생활을 오래하다 보면, 하나님의 도움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하기 나름임을 알 것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목사가 이렇게 돌아다니면서 사람을 만나면서 쑤시고 정치력을 발휘하고, 그렇게 해서 이렇게 수백 평의 예배당이 건축된 것이지, 그냥 가만히 있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개입이 전부가 아니고, 그것은 처음 시동걸 때 필요한 것이고, 그 다음부터는 인간이 죽으라고 열심히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초짜가 하는 말이, "그러면 고명하신 목사님, 인간이 어떻게 노력해야 합니까?" 라고 하면, 그것은 바로 "이렇게 노력하시면 당신은 구원을 받습니다" 라고 하는데, "제가 이렇게 이렇게 해보니 그렇게 됩디다. 제가 이미 다 체험한 것입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것이 바로 소위 '성화론' 이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어떻게 하든지 우리 인간들의 존재성을 확보해주는 식으로 모든 진리적 규정들은 움직여야만 한다는 전제를 주장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그 사람의 행동에 따라 거룩해 질 수도 있고 안 거룩해질 수도 있다. 이런 입장에 서서 '거룩하게 사는' 이론을 제시한 것이 성화론이다.
◈ 소위 '산 타기'에 대해서 !!
여기에서 "안 거룩해질 수도 있다" 라는 것은, 거룩에서 탈락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거룩 쪽으로 향하다가 미끄러진다는 것인데, 예를 들어서, 높은 바위산에 등산을 하는데 처음에는 잘 올라가다가 물기가 있어서 그만 1m정도 미끄러졌는데, 저기 산밑으로 완전히 내려가 버린 것이 아니라 말이다. 1m가 많으면 10cm라고 해도 좋고 말이다.
그러니 이 사람들의 생각은 무엇인고 하니, 여기가 이 높은 바위산의 거룩의 정점이라면, "거룩, 거룩, 필승, 필승" 이라고 외치다가, 죄를 지으면 10cm가 미끄러졌기 때문에 힘을 약간 더 주어서 15cm를 올라가면 5cm를 더 진보한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니 신앙의 진보를 드러내라" 라고 했으니 말이다. 그만큼 진보하고, 성장하고, 성숙한 것이 된다는 말이다. - 아픈 만큼 성숙해지고 !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구조가 어디서 생겼으며 과연 성경적인가? 이런 구조가 인간본성에서 나왔다는 것은 맞는데, 그런 구조의 발상에 대해서 교재 본론부분에서 다루어보자는 말이다. 즉 왜 인간 머리 속에는 그런 산이 있느냐는 것이다. 사실상 이런 뾰족한 바위산이 누구에게나 다 있는데, 크든 작든 간에 말이다. 사업을 하는 사람은 매출량 증가를 위해서 매진하고 말이다.
물론 실제로 산은 올라가면 그만큼 내려오는 것이 있지만, 그러나 인간들의 머리 속에 들어있는 산은 올라가는 것만 있고 내려오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내려와도 올라가는 도중에 10cm 정도 미끄러지는 정도만 있고 말이다. 계속해서 올라가야 한다는 말이다.
◈ 아멘, 할렐루야 !!
그런데 이러한 사상들이 교회에서 먹혀들고 환영을 받는다는 것은, 모든 교인들이나 인간들이 이런 구조를 이미 틀을 짜서 가지고 있다는 의미인데,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하면 납득이 안 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즉 "아! 목사님, 이해가 안 되는데요. 무슨 말인지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라고 하는 인간들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가 "여러분, 우리는 7번을 오르다가 1번을 삐꺽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올라가면 됩니다. 더욱 더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라고 외치면, 그것이 어떻게 이해가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평소에 이런 사고방식으로 다 살아가는데 말이다. 그래서 "아멘, 할렐루야" 라고 하면서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것이다.
◈ 설교시간에 왜 졸음이 오는가?
사람들이 설교시간에 언제 졸음이 오는고 하니, 목사를 따라서 논리를 이어가다가 목사가 다른 한쪽으로 빠져서 따라가기가 힘들 때, "어 이상한데, 어떻게 저리로 가는 거지?" 라고 하면서, 즉 자기가 예상한 것과 다른 방향으로 갈 때, 그래서 지금까지 들은 것을 다시 정리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목사와는 그만 거리가 멀어지니까 잠이 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오늘은 설교를 따라잡지 못하겠네. 에이, 나는 나대로 가면 되지 뭐" 라고 하면서 포기하는 차원에서 말이다. 그러니 목사도 어렵지만 사실 속도조절을 좀 해주어야 하는데, 교인들과 그런 갭이 생기지 않도록 말이다. 교인들이 꾸벅거린다고 강대상만 치지 말고 말이다. (그런데 방향이 너무 같아도 잠이 오지 않는가? ㅋㅋ)
◈ 인간의 출발점은, 나는 살아있다 !!
그렇다면 복음적인 설교를 할 때 왜 조는가? 인간들의 출발점이 무엇인고 하니, "나는 살아있다" 라는 것인데, "살아있다, 살아있다, 더 살아있다, 더 살아있다, 거룩하다" 라고 되는데, 그런데 만약에 거기에서 "당신은 죽었다" 라는 것이 들어가 버리면, 이 죽음의 노선은 살았다고 하는 노선과 맞지 않기 때문에, 교인들이 그만 기피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아니 목사님, 살아있는 것만을 이야기해도 시간이 빠듯한데, 왜 죽은 것을 이야기합니까?" 라고 하면서 불만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런 '산 타기' 라는 것이 인간에게는 모두 기본적으로 들어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모두에게 다 들어있으니 마치 진리처럼 여기려고 하는데, 그러나 이런 것이 바로 바리새인들의 모습이고 비복음적인 것이란 말이다. 사도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고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따라서 성화론을 인정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첫째, 인간의 행위가 추가로 바르게 실천되지 아니하면 결코 거룩이라는 것이 이어질 수 없음.
◈ 행위가 없으면 거룩에 이어질 수 없음 !!
여기에 보면 '이어질 수 없음' 이라고 완곡하게 표현되어있는데, 이 말은 거룩과 연결이 되지 않으니 구원에서 탈락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탈락을 하니 용서가 되지 않고 말이다. 그러니 좀 늦더라도 계속해서 거룩과 이어지게 되려면, 사람들은 성화론을 하더라도 자기만의 변명을 담은 성화론을 구축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어지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지금은 아주 쉬운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나중에는 엄청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전부가 4시간 정도의 분량은 족히 되지 싶은데, 전체 철학자들과 관련이 되면서 말이다. 이렇게 '이어진다' 라는 말을 해야 하는고 하니, 사람에게는 시간이 있는데 이 시간은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시간은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는데, 하지만 철학자들은 시간이 목적이 있다는 것을 거부하는데, 특별히 현상학(現象學)을 연구한 사람들은 말이다. 심지어 어거스틴도 거부하고 말이다. 시간이라는 것은 그냥 인간에게서 나오는 직관적인 이 세상을 바라보는 틀에 불과한 것이지, 시간 자체가 목적이 있다는 것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는 분명하게 시간이 목적이 있다고 보는데, 인간은 존재와 존재가 이어지기 위해서 시간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나' 라고 하는 주체성, 즉 "내가 누구인가?" 라고 하는 자아 정체성의 영원성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즉 그렇게 이어지고 연결이 되기 위해서는, 이것을 '계기(繼起)' 라고 하는데, 이게 참으로 어려운 말인데, 앞의 것이 있기 때문에 뒤의 것은 필연적으로 따라온다는 것이다.
◈ 지평이론 - 공간은 끊어진다 !!
그런데 이 시간은 계기이기 때문에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끊어지지 않는 것이 있을 때 사람은 기쁘고 말이다. 그런데 시간이 아닌 공간은 끊어지는데, 공간은 연장된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공간은 끊어진다는 개념이 최근철학에서 등장했는데, 그것이 '지평이론(?)' 이라고 해서, 끊어지지 않는다고 하니 갈 때까지 한번 가보자는 것이다. 지구는 둥그니 앞으로 가면 갈수록 지평이 더 넓어진다는 것이다. 저 너머는 또 모르고 말이다.
◈ 성화론자들, 시간에 희망을 걸고 !!
하지만 여기에 방해서 시간은 어떠한가? 영원토록 그 자체가 이어진다는 것이다. 시간은 그렇게 계속해서 이어지기 때문에, 성화론자들은 이 시간에 그만 구원을 걸어버린다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것이, 육체는 공간적으로 제한되어서 늙어서 죽어버리더라도, 자기 영혼만큼은 영원한 시간을 타고 천국에 갈 수 있도록, 그렇게 시간에다가 건다는 말이다.
그래서 성화론의 경우에는 "인간은 얼마나 착한가?" 라는 것이 아니라, 끊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시간에다 희망을 걸고 성화론을 구축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을 안다는 사람들이 성화론자들에게 얄굿게 다음과 같이 질문하기도 하고 말이다.
◈ 당신은 돈을 사랑하지 않는가요?
* 그러면 당신은 돈을 사랑하지 않는가요? 당신은 완전합니까?
* 아니, 언제 돈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나요? 무슨 그런 소리를 합니까?
* 그런데 왜 성화론을 주장합니까?
* 지금은 이런 수준에 불과하지만, 점차 이어져서 나아가고 거룩을 향하여 진보하고 있다는 자체가 구원받은 것이 맞지 않나요?
다시 말해서, 시간에 따라서 이전보다 더욱 나아지도록 진보를 이루게 해준다는 것이다. 지금은 비록 못났지만 점차 나아진다고 하는 목적의식이 대견스럽고 훌륭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사람의 정체성은 영원성이 없으면 보장이 안 되니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첫 번째처럼, 인간의 행위가 추가로 바르게 실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 거룩에 이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성화론자들이 어떤 점에서 무지막지하냐 하면, "당신이 마누라나 자식보다도 주님을 더 사랑합니까?" 라고 하면, 성화론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사람들 같으면, "아이쿠, 제가 그 정도는 안 됩니다" 라고 하지만, 그러나 성화론에 자신이 있다 싶으면, "예, 주님의 능력이 오면 제가 주님을 더 사랑할 수 있습니다" 라고 말이다.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아십니까?" 라고 하면, "예, 그것으로 족합니다" 라고 하고 말이다.
* 당신은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아십니까?
* 예,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합니다.
* 당신은 항상 기뻐하십니까?
* 그럼요. 항상 기뻐합니다.
* 그런데 왜 아까 화를 내었습니까?
* 그건 화를 낸 것이 아니라, 화를 내고 싶었는데 성령께서 오셔서 기뻐하도록 해주셨습니다.
* 당신은 왜 글을 쓸 때 화를 내었습니까?
* 그건 화를 낸 것이 아니라 교육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지, 사실은 웃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거짓말에 거짓말을 이어간다는 것이다. 이제 교재에서 두 번째를 보자.
** 둘째로, 인간의 행함에 의한 성화가 성사되는 과정이 빠지면 구원에 이를 수 없음.
◈ 인간의 행위가 추가된 과정이 있어야만 구원 !!
여기에 보면, 인간의 성화가 성사되는 과정이 아니라, '행함에 의한' 성화의 과정이란 것이다. 그러니 인간의 행위가 빠지면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성화론자들은 주장하기를, 그냥 인간의 성화가 성사되는 과정이 아니라, 인간의 행함에 의한 성화의 과정이 빠지면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자칫 잘못하면 십자가의 강도가 그냥 대단하게 구원을 받을 수도 있고, 세리와 창기가 자기와 다른 사람들과 같이 동일하게 구원을 받아버리면, 성화론자들은 그야말로 미치고 환장을 해버린다는 것이다. 그런 일을 있어서는 안 되기에 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의 행위가 추가된 과정이 있어야만 구원이 성립되기 때문에, 그러니 만약 그런 행위가 추가된 과정이 없다면 구원에 이르지 못했다고 확정을 지어버린다는 것이다. 이것을 조금 더 설명을 해보면, 여기서 1번과 2번을 겹쳐보자는 것이다.
** 첫째, 인간의 행위가 추가로 바르게 실천되지 아니하면 결코 거룩이라는 것이 이어질 수 없음.
** 둘째로, 인간의 행함에 의한 성화가 성사되는 과정이 빠지면 구원에 이를 수 없음.
1번은 '이어짐' 이고, 2번은 '행함' 인데, 이것을 합쳐보면,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끊임없는 행위로 보다 더 나은 거룩을 자기가 계속해서 이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숙제를 계속 해야 한다는 말이다.
◈ 697m에 도달한 사람은 어떠한가?
이것이 중요한데, 여기 있는 산이 700m가 정상인데 너무 힘들어서 300m에 머문다면 그 사람은 실패자라는 것이다. 성화론자나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 의하면 말이다. 그러면 697m에 도달한 사람은 어떠한가? 이 사람도 역시나 지옥에 갈 사람이라는 것이다. 물론 지옥에 가더라도 697m를 올라갔기 때문에 약간의 선풍기 선선한 바람이 나오는 지옥에 말이다. 나름대로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에 말이다.
* 질문 - 그렇다면 1번과 2번에 있어서, 실제로 그들이 화를 낸다든지 하는 성화가 되지 못한 모습이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면 화를 내지 않게 된다고 하지 않나요? 자기들의 힘이 아니고 말입니다.
* 답변 - 그들은 자기 힘인데, 그것을 둘로 나누어서, 외부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힘이 일단 자기 안에 들어오면, 하나님의 힘의 작용은 끝이 나고 이제 자기가 알아서 한다는 것이다.
* 질문 - 물론 더러는 자기 힘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래도?
* 답변 - 아닙니다. 목사들은 앞의 것을 사용하는 교인들은 따로 있고, 뒤의 것을 사용하는 교인들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좀 안다고 자기를 공격하는 교인들에게는, 그 다음에 뭐라고 변명을 할 것인가를 고려해서 말이다.
* 질문 - 그렇게 해서 사람들을 각자 수준에 맞추어서 꼬시는 건가요?
* 답변 - 그러다가 복음에 대해서 좀 아는 사람이 나오면, 자기가 말하는 취지는 그게 아니라, 그것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 다들 그렇게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렇게 인간에게 상당한 가능성을 주게 되면?
* 답변 -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기본이고, 그러니 더 이상은 이야기하지 말자는 것이다. 문제는 이 하나님의 능력이 어떻게 자기 것으로 만들어지느냐는 것이다.
◈ 하나님의 에너지를 나의 에너지로 !!
그러니 제가 말하는 행함은, 도대체 자기가 무슨 일을 하게 되면 그 하나님 것이 자기 것이 되는지, 바로 이 행함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하는데 자기가 게을러서 받지 않으면 자기가 성화되는데 보탬이 안 되는 에너지가 되기 때문에, 보탬이 되는 에너지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하는 것을 어떤 식으로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지, 거기에 맞추어서 성화론을 구성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1번의 경우를 보면, 아무리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해도 자기가 행함에 나서지 않으면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의 거룩' 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의 거룩으로 내가 구원받는다" 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거룩이 아니라 말이다. 그야말로 PC방이고 비디오방인데, 즉 자기만의 공간이라는 것이다. (사실은 고시텔?)
그러니 복음을 알면서도 자기만의 공간을 가지겠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하다는 것이다. 이웃과 전혀 교제도 없이 말이다. 그러면서 복음을 연구한다고 하면서 자기만의 공간에 갇혀 있는데, 그러나 점점 더 자아가 구축되어 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 예수님이 어떻게 마귀의 후손과 싸웠는가?
지금 우리가 성화론을 두 번째 죽음과 두 번째 부활로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즉 두 번째 죽음과 두 번째 부활이라는 결론을 가지고 성화론을 비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두 번째 죽음과 부활이 가지고 있는 취지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가 두 번 죽고 두 번 산다는 차원이 아니라, "도대체 예수님께서 우리를 데리시고 다니면서 어떻게 마귀의 후손과 싸웠는가?" 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도대체 무슨 일을 우리에게 벌리셨는지를 말이다. 그러니 거기에 우리의 개인적인 자리를 끄집고서 들어갈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화론자들은 자기만의 자리를 깔아놓고서, 즉 제3의 자리를 잡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들은 무엇이 안 되는고 하니, 외부에 있는 능력이 자기의 허락도 없이 침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십자가의 능력이 자기에게 침투해서 자기가 무엇을 하겠다는 것을 모두 부정해버린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당신이 아무리 예수라고 해도 내 허락이 없이는 내 안에 들어가지 못해"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집사님, 그것은 복음이 아닌데요?
복음을 모르는 어느 집사님에게 가서 "집사님, 그것은 복음이 아닌데요" 라고 하면 뭐라고 하겠는가? "아, 그런 것은 내가 다 알아서 합니다" 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집사님에게 무엇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이야기해주는데, 그런데 그 집사님은 오해하기를,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으니, 그것은 내가 알아서 처신하라는 것이 아닌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런 처신의 문제가 아니라, 집사님에게 그런 이단을 붙여준 것은 그곳에서 나오라는 이야기인데, 그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자기가 다 알아서 하겠다는 것이다. 즉 "아, 내가 알아서 할 문제가 아니구나. 구원문제는 주님의 문제이지 내 문제가 아니구나. 그냥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고, 믿기만 하면 되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 교재에 있는 세 번째 경우를 보자.
** 셋째로, 성화 과정에 있어서 인간이 주도적으로 행사해야만 함. 만약 성령님이 주도적으로 나서면 이것은 '인간 성화'가 아니라 '성령 성화'가 되기 때문에 애초부터 성화를 인간에게 부탁할 사항이 아니라 성령님에게 부탁할 사항으로 전이된다. 따라서 철저하게 성화에 있어 인간의 의지나 능력이 주도권이 쥐고 진행되는 과정이지 성령님이 주도권을 쥘 수는 없음.
◈ 누가 주도적으로 하는가?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까, 인간의 행위가 빠지면 안 되고 인간이 주도적으로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가 지금 "누가 하는가?" 라는 것을 묻는 것이 아니라, 누가 '주도적'으로 하느냐는 것을 묻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성령님이 주도적으로 하시면 '성령성화'가 되고, 자기가 주도적으로 하면 '인간성화'가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도적' 이라는 것은 둘을 용납하지 않는데, 주인은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령님이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성령님에게 부탁할 사항으로 전이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화론자들은 자기가 알아서 하면 되지, 왜 성령님에게 기대고 비비느냐고 시비를 건다는 것이다. 그렇게 "가만히 있으면 무슨 일이 되겠는가?" 라고 말이다.
◈ 가만히 있으면 무슨 일이 돼?
그러나 이 말이 얼마나 모순이 되는지 한번 적어보면, "가만히 있으면 무슨 일이 돼?" 라고 되묻는데, 그것은 일이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일이란 도대체 누구의 일인가? 그러니 결국은 가만히 있으면 일이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질문 속에는, 이 일 속에는 애초부터 가만히 있으면 되는 일은 일로 취급하지 않겠다는 것이 깔려있다는 것이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의롭게 되는 것은 주님 때문인데, 그런데 가만히 있으면 되는 일을 받은 사람이 왜 가만히 있으면 안 되는 일을 생각하느냐는 것이다. 아직도 꿈에서는 군대에서 제대를 못하고 난리라는 것이다. 얼마나 고생을 했으면 말이다. 꿈은 어리석은데, 아직도 제대말년이라는 것이다. 제대를 한 지가 20년이 넘었는데 말이다.
오늘날 우리교회나 복음을 안다고 하는 목사들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이미 구원을 받았는데, 그러니 목 베임을 당해도 괜찮은데, 그런데 뭔가 꼬이게 되면 "맞아. 산으로 올라가는데 미끄러져서 그렇구나. 아직 130m가 남았는데 내가 그것을 소홀히 했어" 라고 말이다. 그러니 자기는 아직도 산 위로 계속 올라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무슨 복음이냐는 것이다.
◈ 이미 일의 구덩이에 풍덩 !!
우리는 이미 평지에 있는데, 그리고 우리가 일을 하지 않아도 이미 일의 구덩이에 풍덩 빠져있는데 말이다. 왜 자기 신상에 일어난 변화를 가지고 다른 일을 생각하느냐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러면 놀아도 되겠네요" 라고 하는데, 그렇게 놀아도 될 일이 또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놀아도 될 일이 무엇인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사이에서는 제3자에 불과한 인간이 뭔가 일을 열심히 한다든지, 논다고 하는 것이 다 빠져버리고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언약대로 일을 하는 것이지, 사람보고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다시 정리해보자면, 그들의 주장은 성화에 있어서 인간이 주도권을 쥐어야 하고, 성령님이 주도권을 쥐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성화론 논쟁을 할 때 "성령님이 하십니다" 라고 했더니, 그쪽에서는 반드시 "당연히 그것은 기본이고, 성령님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우리 인간이 무엇을 해야하는가?' 라는 것을 이야기하는데, 그런데 이근호 목사는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설사 성령님과 인간이 서로 교제하면서 협력한다할지라도 어디까지나 성령님은 그냥 외부에서 안타깝게 요청하고, 하소연하고, 사정하고 부탁할 위치에 있기만 하지 결코 직접 관여해서 대신 행동해 주는 입장은 못된다고 보고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라는 주체자는 인간이라는 주체자의 그 주체영역까지는 침범하지 못하는 입장에 놓여 있는 형편이라는 것이다.
◈ 성령님은 엿을 붙이시고 !!
이것은 제 이야기가 아니고 성화론자들의 주장인데, 예를 들어서, 수능시험을 칠 때 직접 시험을 치는 것은 인간의 일이고, 학교정문 앞에서 엿을 붙이고 간절히 기도하는 엄마의 일이 바로 성령님의 일이라는 것이다. 성령님은 "힘내라, 힘! 아자아자, 파이팅!" 이라고 외칠 수는 있어도, 직접 수능시험을 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즉 자기 시험점수로서 자기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다.
아까 자아와 주체를 나누었는데, 심지어 성령님이 자기 속에 들어와도 마찬가지인데, 성령님은 안타깝게 학교정문에서 발을 동동 굴리면서 서 있다는 것이다. 성령님이 주체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말이다. 주체가 허락할 때만 도와주면 되고 말이다.
이런 형태는 우리나라의 토속종교를 조사해보면 다 나오는데, 무당들의 신학이 있는데 그들이 신학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귀신이 자꾸만 압력을 가하는데, 물론 무당들은 처음에는 해서 거부하는데, 그러나 자꾸 몸이 아프고 해서 할 수없이 받아들이면, 그때부터는 입장이 바뀌어서 무당이 주도권을 잡게 되는데, 무당이 위에 서고 최영 장군이나 이순신 장군 같은 귀신은 밑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무당이 필요할 때마다 최영 장군 귀신을 불러내면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이렇게 자기 항상 주도권을 결코 놓치지 않겠다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 신학자들의 사고방식이라는 말이다. 자기 주도권을 그 누구에게라도 빼앗기지 않겠다는 것이다. 설령 그분이 성령님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이렇게 볼 때, 과연 신앙이 없는지 있는지를 본인이 납득이 가는 윤리성으로 측정을 통해서 그 때 그 때마다 확인해 보겠노라는 의도에서 비롯된다. 구원에 합당한 열매를 윤리적으로 측정해서 비로소 안심하겠다. 그리고 이것은 '신앙 있음'으로 삼겠다는 처사이다.
◈ 계속해서 위선자가 될 수밖에 !!
그러니 아직도 자기가 나쁜 짓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니 신앙이 있다는 말인데, 그래서 장로가 말하기를, "그러면 목사님, 먹는 것 입는 것 족한 줄로 아시니까, 월급을 깎아도 별 불만이 없지요. 그런데 지난번에 왜 그렇게 월급을 올려달라고 그렇게 난리를 피웠습니까? 라고 하면, "아하, 그때는 꼭 돈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제가 교인들을 좀 교육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했죠" 라고 둘러댄다는 것이다. 물론 장로도 다 아는 거짓말이지만 말이다. 그러니 계속해서 위선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만약에 처음부터 참으로 이럴 의사가 전혀 없었다고 한다면 추가적인 인간의 행함의 거론을 하지 않을 것이다. 즉 '신앙 있음'='구원 완성'='거룩 달성'이 충족됨을 증거할 것이다. 그리고 사도들의 서신에 나오는, 그리고 예수님의 산상설교에 나오는 온갖 명령들이 '신앙'의 내용에 관한 사항으로 초점이 모아진다.
◈ 그런데 왜 산상설교가 있는가?
이것이 신앙의 완성이라고 한다면, 즉 '신앙 있음'='구원 완성'='거룩 달성' 이라면 더 이상 추가적인 인간의 행함을 거론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 주장에 의하면, 우리와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 예수님의 산상설교가 필요 없는데, 그러면 마태복음 1장부터 십자가, 십자가, 십자가로 나가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요한계시록까지 말이다.
그런데 왜 산상설교가 있는가? 그것은 바로 십자가로 구원은 받지만, 그 다음부터는 이 산상설교를 지켜서 행함으로 구원의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나가기 위해서, 그런 추가적인 행함을 위한 명령들이 필요하기에, 그래서 예수님의 산상설교가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신약성경이 합리적으로 납득이 된다는 말이다.
우리나라의 유명한 신학자들의 주석에 보면 산상설교 부분에 이런 것이 나오는데, "그러니 태만하지 말고 온전히 지켜서 이것을 이룹시다" 라고 말이다. 저는 그 대목을 읽으면서 무슨 생각이 들었는고 하니, "니는 그렇게 했나? 먹든지 마시든지 걱정하지 않았나" 라고 말이다.
다음 부분이 좀 중요한데, 교재를 보자.
** 그런데 만약 자신의 행위를 자신이 측정하는 식으로 신앙을 확인코자 한다면 성경에 나오는 모든 명령들이나 말씀들은 무엇을 믿느냐 하는 신앙 내용에 관한 사항이 아니라 도리어 신앙으로 온전치 못하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추궁하는 말씀이 될 것이 뻔하다.
자기가 지금 하는 행위를 남이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추구하는 것인데, 남이 추구한다고 하더라도, 속으로는 "마, 치우소.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 "내가 지키겠다, 혹은 못 지키겠다" 라는 것은 누가 결정하는가? '내'가 판단해서 '내'가 결정한다는 말이다.
◈ 탕자와 잃어버린 양 !!
그렇다면 탕자가 미쳤다고 집에 돌아오는가? 탕자가 집에 돌아올 때는 자기 판단은 완전히 다 버리고 왔다는 것이다. 그렇지요?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찾아서 들고 오려니까, 양이 하는 말이, "때가 되면 내가 알아서 갈텐데 왜 오셨어요?" 라고 하면서 도망치려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가 잃어버림을 당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양은 자기가 500m 정도는 자기가 알아서 돌아다녀도 생각할지 몰라도, 그러나 목자가 찾아왔다는 것은 500m의 괴리를 양의 능력으로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고, 그래서 데리고 가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잃어버린 양으로서 간주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양이지, 우리가 알아서 가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탕자의 경우에도, 탕자에 집에 왔을 때도 잘 왔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고개를 빳빳이 들고 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얼굴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입장에서 왔다는 것이다. "어떻게 감히 안방에, 그냥 저기 마굿간에서 자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탕자가 겸손해서 그런가? 그것이 아니라, "저는 잃어버린 자입니다" 라는 것이다. 그렇게 잃어버렸으니 찾아주지 않아도 할 수 없고 말이다.
◈ 주께서 지옥에 가라고 기도해도 당연합니다 !!
제가 만약에 어느 교회에 가서 "여러분, 예수님이 기도하지 않으면 지옥에도 갈 수가 없습니다" 라고 했을 때, "맞습니다. 우리는 지옥에 가도 당연합니다. 주께서 지옥에 가라고 기도해도, 우리는 그렇게 당해도 쌉니다" 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성도라는 것이다. "아니, 어디서 그런 믿음이" 라고 하면서 서로 놀라고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이 그렇지 않고, "천국이든 지옥이든 겨우 50m인데, 그 정도는 제가 알아서 다 합니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자기는 아직 잃어버림을 당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잘 나가는데 말이다.
목사의 입장에서 특히 세상에서 제법 번듯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다루기가 참으로 힘들다는 것이다. 그 사람들은 그 직업을 가지지 위해서 평생을 노력했기에, 결단코 포기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눈물 콧물 다 범벅이 되어서 구한 직업인데 말이다. 그러니 정말로 주의 은혜가 아니면 '잃어버림'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조금만 더 하고 마치겠는데,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그렇다면 성화론의 초점은 의외로 간단히 다음과 같이 정리가 된다. "내가 만족하는 거룩을 내가 과연 더 이상 미흡함이나 모자람이 없이 완전히 생산하고 또한 그 이상의 상승할 그 어떤 여분도 남겨지지 않고 거룩으로 꽉꽉 채워진 그 완전한 상태를 계속 유지해 나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 내가 만족하는 거룩 !!
여기에 '내가 만족하는 거룩' 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래서 성경에서는 잔치집에 가지 말고 초상집에 가라고 했는데, 잔치집에서 만족하는 기준이 따로 있는데, "야, 드레스가 참 이쁘네. 내가 결혼할 때는 저런 거는 없었는데"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초상집에 가게 되면, "자기가 비록 가난하게 살아도 이렇게 건강하게 있는 것만 해도, 세상에 이런 은혜가 어디 있노. 살아있을 때 마음껏 복음을 전하자"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아무에게나 드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소위 '만족함'에 대해서, "나는 교회에 얼마나 충성을 다하는데, 나하고 새벽기도를 할 때 항상 먼저 나가면서 나보다 좋은 신랑을 만나고, 나는 이게 뭐고" 라고 하는데, 그래서 "이왕 만난 신랑은 할 수 없지만, 이 신랑을 더 크게 잘 만들어야 되겠다" 라고 하면서 만족도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만족하는 기준을 누가 정했는가? 자기가 스스로 정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겁한 변명이나 하고 말이다. 이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