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601b 울산강의-창세기16장(2) 녹취
20070601b 울산강의-창세기16장(2) 녹취
이름 : 한윤범(IP:59.6.189.212)
20070601b 울산강의-창세기16장(2)
(강의:이근호 목사)
잉태치 못했다는 말은 이제는 세상과 인연을 끊으라는 말입니다. 네가 갖고 있는 자질, 능력, 하나님께 축복 받을 수 있는 능력, 자질 있다고 여기는 걸 이젠 포기해라. 너 아무리 애써도 잉태 안 될 거야. 잉태 안 되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것이 축복이다 이 말이에요. 잉태 안 되게 해주시는 축복, 내 힘으로 안 되게 해주시는 그 축복, 그거는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고, 천국 갈 사람만 받는 축복이다 말이죠.
그런데 지옥 갈 사람은 자기 능력대로 마음껏 모든 것이 다 되지요. 계속해서. 잉태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해요. 하갈은 자기가 여자주인의 남편, 아브라함하고 관계해서 임신했다는 이것을 굉장히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4장 28절에 보면, "그때 육체로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했다." 했어요. 이게 창세기 16장하고 반대의 느낌이 안 듭니까? 창세기 16장에는 누가 누구를 멸시해요? 여자주인이 종보고 멸시하는데 질투하고 하는데.
갈라디아서에선 해석을 이렇게 합니다. 그때 하갈이 누굴 핍박했다 했습니까? 애가 없다는 구실로 여자주인을 아주 얍잡아 보고 무시했다 이래 되는 겁니다. 네 번째 해석 가지고 창세기를 봐야 돼요. 에이, 사도 바울 엉터리다. 요새 하여튼 신학하는 사람들 다 위험한 사람들 입니다. 그래서 이 책에도 나와요. 신학하는 사람들 이단이라고. 신학자들 이단이라고 나오는데.
잉태할 능력이 일부러 없게 했어요. 그 머리말, 책 가까이 있어서 좋네. 머리말 그 대목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십자가가 우리를 파먹었고 우리는 껍데기만 남았다. 그 다음에 가벼워서 좋았다.] 저는 그래 느꼈어요. 저는 대전강의 마치고 이상하게 껍데기만 남겠다는 걸 느꼈고.
뭘 느꼈느냐 하면, 여러분들 돼지 껍데기 있잖아요. 그걸 생각했다니까. 돼지 껍데기 초장 찍어 먹는 초장 말고 간장 찍어 먹는 그런 느낌 들었어요. 다 파먹고 껍데기만 남은 채로 그렇게 저는 대전을 떠나 왔어요. 이건 제 생각입니다. 1번과 3번 해석이죠. 제 생각인데 해석인데.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뭔가 할 수 있는 여력이 바탕을 끊어버렸어요. 왜냐하면 어머니는 위에 따로 있으면 되지, 내가 나를 구원하는 어머니 노릇을 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엄연히 구원해 주는 기계장치가 위에 있다면 내가 조물락조물락 해서 날 구원할 수 있는 바탕을 만들 필요조차 없다 이 말입니다. 그게 광야입니다. 광야.
내 한번 적어 볼게요. [모레가 움직이면 설 곳이 없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모레가 계속 움직이는 모레에 집을 세우면 우에 되겠습니까? 집을 세울 수가 없지요. 허물어지겠지요.
우리 인생이 뭐냐 하면, 모레처럼 움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박으려 해요. 그만, 그만 난 여기서 인생 다 여기가 좋사오니. 자꾸 이거 뭔가 박으려 해요. 그런데 우리 인생은 어디로 가느냐 하면, 어디로 쏠리느냐 하면, 죽음으로 다른 말로 하면, 두 언약으로 총집합니다. 천 명 있으면 천 명 전부다 어디 가느냐? 두 언약 사이로 지금 자석 끌리듯이 쫙 당겨서 가고 있어요. 가보면 니 언약, 내 언약 달라요. 노선이 달라요. 바지 가랑이가 두 개 갈라진 것처럼 갈라져 있어요.
그런데 여기선 전부다 자기 기준, 자꾸 모레 위인 줄 모르고 그것도 움직이는 모레, 움직이는 모레 위에 자꾸 박으려 합니다. 자식한테 기대려다 자식한테 욕 얻어먹고, 며느리한테 믿다가 며느리한테 호되게 당하고, 그 다음에 부모 믿다 부모한테 당하고, 친구 믿다 친구 보증서서 날아가고. 자꾸 뭔가 움직이는. 사랑은 움직인다 하지요.
젊은 아들이 사랑, 사랑하지만 전에 니, 나 사랑한다 했잖아. 하면 그땐 그때고. 지금은 우리 갈라서자. 이게 여자입니다. 앳된 사랑 믿을 게 못 돼요. 자꾸 뭔가 움직인단 말이죠. 움직이는데 본인이 움직이고 싶은 게 아니고, 그냥 하나님이 당겨요. 두 언약의 능력으로. 아까 했잖아요. 저주의 능력과 축복의 능력으로 니는 니 갈 길 가야지. 하고 당기는 중이기 때문에 모레로 자꾸 움직여 갈 수밖에 없습니다.
가는데 가면서 하갈과 이삭은 장차 갈라디아서 4장에 나오는 이 두 면면을 미리 앞당겨서 보여주죠. 앞당겨서 보여주는 겁니다. 보여주는데 하갈이 잉태를 했다는 이유 때문에, 잉태, 연속성이죠. 이어짐이죠. 그런데 이삭을 핍박을 했잖아요. 그게 육에 속한 사람이 성령을 받은 사람을 핍박한 것 같이 나오지요.
그래서 이게 뭐냐 하면, 하갈이 잉태했다는 말은 두 언약적인 구조에 의하면, 하갈이 잉태했다고 자랑할 때 반드시 구원받는 사람은 잉태할 게 없다는 것을 짐작하시기 바랍니다. 아하, 나도 예수 안 믿는 사람처럼 잘 되면 좋겠다. 이거 기대하지 마세요.
이걸 이야기 해주는 게 욥입니다. 욥 부자 될 때 자기 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욥이 믿음이 좋았지요. 가져갈 때 뭐라 했습니까?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간 하나님이다. 이건 뭐냐 하면, 나는 항상 주님께서 뭔가 실리는 그런 수레바퀴에 불과하지 내 것이라고 여길 수 없다 이 말이에요. 나중에 하나님이 주시잖아요.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잉태했다고 했을 때는 지금 제가 관점을 이야기합니다. 이삭은 어떻게 됩니까? 라고 묻지 말고 이 둘 사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두 언약을 소개하려고 하니까 두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 되려면 두 언약이 나와야 되고. 두 언약이 되려면 한쪽이 잉태 되면 반드시 이삭은 잉태 되지 못하는 여자가 돼야 된다 말이죠. 이걸 당연지사로 수용해야 그게 믿음이다 이 말입니다. 수용을 해줘야 돼요. 이게 믿음이에요.
모든 것이 하나님 뜻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이거는 다른 불교나 스토아학파나 다른 철학에도 조금만 도 닦는 사람은 다 이야기해요. 우리는 그게 아니고 우리가 수용하란 말이 아니고, 우리는 두 언약 가운데 축복의 언약대로 돼야 될 그런 팔잡니다. 그걸 수용을 받아줘야 돼요 그걸.
받아주는데 어떤 식으로 운명이 찾아오느냐 하면, 집이 세 채가 있고 땅이 십오만 평 가져도 나는 하늘나라를 바라볼 그런 운명인 것을 저는 수용합니다. 이렇게 살아가야 된다 이 말이죠. 한 달 수입이 천만 원이 넘고, 그야말로 빌딩을 열 채 갖고 있어도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도 하나님이요 하여튼 내 신경 쓸 것 없고, 자식이 막 키스트, 서울대 다 들어가고 별 대학 다 들어가도 나는 소망은 하늘나라입니다. 라는 생각을 하기 위해서 그런 운명으로 저는 확정되었습니다를 수용해 달라 이 말이죠. 그게 믿음이다 이 말입니다. 집이 몇 채 있던지 간에.
근데 사람들은 그래 하지 않고 이게 4번인데. 1번, 2번, 3번식으로 하면 해석을 하게 되면, 내가 무엇을 해야 구원받지? 자꾸 출발점이 나에요. 내가 어떤 해석을 하고 어떻게 살면 나는 구원받지. 나가 출발점이 되는 겁니다. 근데 믿음은 뭐냐 하면, 내가 출발점이 아니고, 나는 이미 먼저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 가운데 천국 갈 자가 어떤 자냐를 보여줄 그런 역할을 해야만 함을 받는 거예요. 하나님의 개입을 수용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껍데기지만 안에는 하나님 것으로 가득 차겠지요. 집이 세 채 있든 뭐가 됐든 어떤 재산을 가졌든 자식이 열 명이 되던 백 명이 되던, 자식 백 명이 되면 곤란하지만 한 열 명이 되던 하여튼 관계없이 이것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천국 가려면 이런 것에 연연하지 말고 이미 우리 어머니는 하늘에 있으니까 갈라디아서에 보면 하늘에 우리 어머니가 있다 했으니까 하늘에 어머니에 의해서 나는 그렇게 운명 지어졌음을 이걸 수용해서 살아가는 사람. 그것이 바로 여기에 잉태치 못한 역할을 잉태치 않음으로써 충실히 다 하는 거예요.
자기가 잉태치 못한 자라는 것을 충실히 알 경우에만 잉태했더라도 그 자식은 하나님의 개입으로 된 자식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그 자식을 하나님께 바칠 수가 있는 겁니다. 고스란히 백 퍼센트. 아이고, 아까워라. 아이 하나 더 낳아서 둘째 아이 바치지. 이런 거 없어요. 그냥 그대로 바치게 되어 있죠. 아마 이웃집 사람 있어서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어요. 아이고, 안 됐소. 안 됐지만 하나님 것이니까 아들 하나 밖에 없는 거 바치면 하나 더 주시겠지, 참으세요. 이웃 사람이 위로한답시고 할 때 아브라함은 이렇게 했을 거예요.
하나님은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아니고, 그 아들. 둘, 셋 중에서 그러니까 아들이 열 명이 되던 백 명이 되던 하나님이 찾는 것은 내가 잉태치 못했다는 것을 확정지을 수 있는 그 아들. 그 아들만 원하거든요. 그 아들이 누구냐? 예수님이죠.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다는 말은 내 힘으로는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는 차원에서 저는 예수 믿습니다. 하는 그 예수님을 자랑하고 증거하는 것이 성도가 해야 될 역할입니다.
제가 성도의 역할을 강조하는 이유가 뭐냐? 예수 믿고 천당 갑시다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란 말이죠. 그거는 가만있어 보자. 예수 믿을까, 부처 믿을까? 이렇게 골라골라 잡을 입장이 아니고, 우리 타고난 태생이 예수 그리스도를 싣고 담아야 될 운명으로 태어났음을 그렇게 자기를 바라보라 이 말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기적 아닙니까? 사람이 인간으로 남자로 태어나서 줏대도 있고 오기도 있는데 남들은 지 자랑하는데 나는 자랑할 거 없어. 그게 부자연스럽지요.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고 돈 좀 생기면 자랑하고 싶은데. 글쎄 그게 나의 역할이 아니란 말이죠.
제가 대전해서 강의하면서 했잖아요. 교인 천 명이 있고 만 명 있어도 오늘밤에 네 영혼 데려가면 다 천 명이 누구 것이 되느냐? 이 말이죠. 후임자 목사 거 되겠지요.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교인수가 몇 명이 되던 그게 아니고, 오늘밤 내 영혼 데려가면 그 교회는 내 교회 아니고 내가 그 교회 목사 계속 안 해요. 오늘밤 죽어버리는데 교회하고 무슨 관계있습니까?
내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교회 부흥시켰다 이 역할 하는 게 아니고, 내가 교회가 목사를 하던 장로를 하던 관계없이 예수님 때문에 저는 구원됐습니다를 고스란히 증거하는 그 역할하라고 우리가 운명 지어진 사람이 우리다 말이죠. 그게 바로 이삭 계통입니다. 따라서 이삭이 이삭되기 위해서 누가 등장해야 되는가? 이삭을 핍박해야 될 한 여인이 태어나야 한다. 그 여인이 뭐냐? 하갈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 이단이 있는 것을 감사해야 돼요. 감사해야 돼요. 왜? 세트니까. 언약을 세트 아닙니까? 예수님은 한분이지만 예수님의 가랑이, 예수님 보고 가랑이하면 곤란하지. 그 바지 가랑이는 반드시 뭡니까? 두 개에요. 사람이 당하는 저주, 그거 저주 아닙니다. 저주 값은 저주 근처도 안 갔어요. 축복, 축복 아닙니다.
진짜 저주는 예수님에서만 나와요. 예수님에게만 버림받는 그게 저주고, 예수님에게 받아들이는 게 그게 축복이고. 예수님에게만 나오지 다른 사람은 저주, 축복도 아닙니다. 우리는 그 예수님을 증거하는데 다행스럽게도 그리스도의 용서를 증거하는 편에 섰기 때문에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내 자랑을 안 해도 되는 내 자랑을 일체 안 해야 되는 그런 역할을 맡은 겁니다.
그게 바로 사도 바울이 이 아브라함과 사라와 하갈의 해석을 이렇게 했습니다. 잉태치 못한 자여, 그 다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즐거워하라” 이게 아도 못 낳는데 뭘 즐거워해요. 이걸 다 아니까 잉태치 못하게 해서 천당 보내는구나. 아이고, 즐거워라. 이래 되는 겁니다. 미쳤지 뭐 미쳤지요.
사도 바울이 구약의 이 대목 이게 이사야에 나오는 대목인데 그러니까 이사야에 나오던 어디 나오던 사도 바울이 완전히 하나님 계시 받아서 성경 전체를 그리스도로 모아서 네 번째 해석을 해요. 예수님이 해석하는 해석이에요. 그게 뭐냐? 우리는 그냥 예수님을 증거하는 그러한 역할, 배후에 불과하다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잉태치 못한 자야 아주 즐거워하라. 핍박받거든 대단히 즐거워하라. 왜? 너희들이 바로 구원된 자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갈라디아서 4장을 우리한테 적용시켰다면, 1200년 전에 예수님 오기 전 아브라함한테 어떻게 적용을 시켰는가? 그걸 본문을 봅시다. 이래 기초를 깔고 어떻게 적용을 시켰는가 봅시다. 그러고 보니까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뭔가 걱정, 염려를 한다는 것이 참 우리 주제 파악이 안 돼서 걱정, 염려하는 것이지 그거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럴 필요도 없어요. 미안하고 죄송하라고 안 하고 살아가는 게 아니고, 우리는 역할이 그리스도의 공로를 잊어버리지 않는 역할만 해야 될 의무가 있습니다.
여기에 창세기 우리가 4번을 잠시 잊어버리고 1번, 2번, 3번 해석으로 돌아가 봅시다. 여기 1번, 2번, 3번식으로 해석해 드립니다. 이렇게 됩니다.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 롱롱 타임 어고우. 참 영어 선생 앞에서 웃긴다. 원스어폰어타임. 옛날에 어떤 날에 아브람과 사래가 살았어요. 둘이 아주 금슬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기도 아기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두 부부를 너무너무 사랑해서 아기를 주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그만 성급한 우리 아내가 하나님이 주신 아기를 자기 여종을 통해서 하나님, 남편하고 아기를 낳으면 그것도 하나님 뜻이 아닌가? 이렇게 받아들였다. 이 말이죠.
1번, 2번, 3번을 인간적으로 해석을 해보면 어쨌든 간에 사래라는 여인이 수작을 부렸잖아요. 그죠? 하나님의 약속 믿고 가만있으니까 주여, 약속, 약속 이랬습니까? 약속을 약속이고 성질 급한 건 급한 거고. 그대로 다 하는 거예요. 이게 재밌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저주가 어디서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고, 저주가 구원받는 나에게서 저주가 나온다는 사실이에요. 도배지가 초배지 위에 덮쳐있어서 도배지라는 겁니다.
죄 누가 져요? 저나 여러분 같이 져요. 매일같이 죄를 질질 흘리고 다닙니다. 저주가 어디서 나오는가? 사래에서 나와요. 먼저 사래가 권유했습니다. 남편하고 동침해서 니 씨받이 노릇해라. 여종이 할 일 뭐고? 맨 날 설거지만 하는 게 아니라 될 일이 아니지 약속이 아니지.
그리고 그렇게 해놓고 그게 약속에 위배된다 생각 안 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하기 위해서는 가만있으면 안 되고 뭐 최선을 다해야 그게 하나님 약속이다. 여러분 많이 듣던 옛날에 교회에서 얼마나 들었습니까? 하나님이 일하실 때 그냥 일하시는 게 아니고, 사람을 통해서, 통해서 일하지 않느냐? 목사들이 얼마나 헌금 강조할 때 했습니까?
오병이어를 봐라. 도시락 없었으면 빵 먹었겠는가? 작은 푼돈이라도 내라. 그 이야기 얼마나 많이 했겠어요. 부흥사들이. 지분을 가져라. 그러니까 다른 말로 하면, 하늘나라에 그냥 공짜로 가지 말고 지분을 가져서 백 퍼센트 쥐면 주님께 너무 오만스러우니까 0%라도 1%라고 어느 정도 했다는 소리 듣고 가야 하늘나라 상급이 마일리지가 쌓인다. 이거 그 이야기잖아요.
글쎄 그걸 이단시하고 욕할 것이 그 이단이 어디서 나왔다? 지금 울렁증, 우리가 매일같이 쏟아내고 있다는 거예요. 복음을 들으면서도 매일같이 내일되면 털어냈더니만 또 그게 나와요. 죄를 질질 흘리고 다닌다니까.
그 죄가 무슨 죄냐 하면, 바로 하나님 공로로 구원받지만 미안스러워서 행색이라도 해야지 라면서 우리가 하는 행동에 어떤 의미를 주는 내가 하는 교회에서 하는 어떤 자꾸 의미를 거기에다가 덧붙이려는 의미라는 스티커를 붙여서 주께서 십자가로 구원 받은 거 아는데요, 알지만 이거 제가 헌금한 것도 깨나 제가 그냥 함부로 한 게 아니고 힘들게 했습니데이. 축복해주소. 이게 우리 속에서 계속 나와요.
나오면서 그 다음에 뭐도 나오느냐 하면, 바로 그렇게 나왔던 그 저주가 하갈이 뭘 핍박해요? 그렇게 내뱉었던 나를 핍박하죠. 전에 기도 사십일 금식해서 첫째 애 서울대학 집어넣는데 와 둘째 이번에 전문대 갔는 것은 니, 기도 얼마 했노? 라고 내가 스스로 나한테 질책해요. 이제는 신앙이 많이 낙후 되었구먼. 첫 아들 서울대학 넣을 때 그렇게 새벽기도 철야 하더니만 이제는 뭐 큰 아이 넣었다고 둘째 아들은 놔두니 전문대 가잖아. 봐라. 신앙생활 꼬라지하고는.
내가 내뱉은 짓이 나로 하여금 시험거리로 되돌아오게 되어 있어요. 되돌아와요. 전에처럼 기도해야지. 전에 오년 전에 기도원에 뿌리 뽑을 때 소나무 뽑을 때 얼마나 믿음 좋았노. 세상에 새순교회 나올 때 복음이 좋아서 열한 시 예배인데 열시 반에 나오더니만 한 육 개월 지나고 난 뒤에는 열한시 십분 되서 들어와서 예배 사도신경 다 빠져먹고 설교할 때, 설교 들으면 됐지. 하고 들어와요. 이 교회 말고, 우리교회. 이 교회는 별로 없고요. 우리교회.
내가 내뱉은 그 업적과 종교적 실적이 내가 나태하다고 다시 꾸짖는 그런 핍박하는 식으로 그러면 나는 또다시 그걸 자극받아서 그래 전에 만큼 못해. 더 해야지. 또 죄를 내놓습니다. 예수님 보면 기가 차고 한심하지요. 아이고, 논다 잘 논다. 주님의 공로로 구원받는다고 그렇게 이야기했건만 내가 나하고 거래해요. 나하고 내하고 흥정해요.
이게 이렇습니다. 사람이 행동을 하면 하나 내뱉게 되면 여러분이 다 아는 이야기니까. 행동을 하게 되면 이게 그 다음 행동의 표준이 돼요. 그 다음 행동은 어디를 표준삼느냐 하면, 어제 이렇게 행동했는데 지금 어떠냐 이 말이죠. 두 가지 경우죠. 하나는 어제는 기도를 삼십 분 했는데 오늘 오 분밖에 안했다. 나는 나쁜 놈이다. 그리고 나쁜 놈, 착한 놈을 어디 기준으로 하느냐 하면, 어제 내가 한 행동에 따라서 하는 거예요.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이 책에 나옵니다. 반성을 하면 착한 사람 되기 때문에 반성을 했더니만 반성했던 그 영혼은 내일을 위해서 또다시 반성거리로 스스로 전락해야 돼요. 지금 반성거리 돼야 내일 반성거리 남아 있기 때문에. 주님 보시기에는 한심스럽지요. 혼자 놀지요. 혼자 븅, 뿅뿅 혼자 노는 거예요. 혼자 종교놀이 하고 있는 거예요. 십자가 공로로 구원받았는데 혼자 흥정을 하고 있다는 거예요. 이러면 잘했습니까, 이러면 못했습니까? 쓸데없는 것 하고.
그거는 뭐냐 하면, 우리가 사래기 때문에. 평생 이 버릇 안 없어집니다. 그냥 가요. 왜 그러냐 하면, 우리가 이미 구원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게 많이 나오면 나올수록 좋아요. 좋다 하면 어폐가 있지만 좋아서 나오는 건 아니지만 하여튼 그냥 나오게 되어 있지만. 이런 게 나올 때마다 우리는 성령에 의해서 뭘 봅니까? 그리스도를 예수님의 공로를 보게 됩니다. 이런 게 안 나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볼 기회를 놓쳐요.
어제 등산가서 엎어져서 지금 어깨 걸려서 길도 아닌 걸 가서 혼자 길 아닌 것을 까불다가 앞에 서서 물에 질둑 미끄러져서 여기 어깨 담이 결려서 아픈데 다른 같이 간 세 명의 동료는 헤헤거리면서 좋은 길로 가버리고, 나는 혼자 앞서가다 엎어졌거든요. 그럴 때 이렇게 넘어지고 다치고 하면 반드시 어제 일을 합니다. 어제 내가 무슨 짓을 했노? 놀고 있네. 무슨 짓은, 죄 졌지. 어제 기도 많이 했으면 그건 죄 아닌가요, 그럼 어제 나쁜 짓하고 오늘 기도하면 착한 일 한 겁니까? 아무 상관이 없어요.
다만 고마운 것은 그런 행동을 통해서 내가 몰랐던 잊어버렸던 죄를 또다시 깨닫게 하시는 그 작업을 도배지 위에서 초배지가 뚫고서 그걸 해주신다는 겁니다. 매일같이. 매일같이 우리는 뒤에 있는 피가 그러니까 피 흘렸지. 그러니까 피 흘렸지. 계속해서 우리의 종교놀이, 종교게임을 계속해서 지적하면서 아무 상관없어. 아무 이유 없어. 대출은 계획적으로. 나와 있죠. 무이자. 아무 이유 없어.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줄 그것을 언약 두 가랑이로 확정되었기 때문에 그 가랑이가 무슨 짓을 해도 아무 이유 없이 구원받아요. 내가 내 운명을 확정지어 나가는 게 아니고, 확정지어진 운명 위에서 혼자 쫄랑쫄랑대고 까불고 찢고 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하고 아무 상관없이 구원받습니다.
그게 십자가 피로써, 그래서 사도 바울이 십자가가 있는데 누가 너를 꾀더냐? 마귀가 그래 하거든요. 십자가 있는데 자꾸 십자가 말고 왜 네 자신의 행동에도 그렇게 주문해서 그것을 완전을 기하려하고 완벽을 기하려고 하느냐 말이죠. 그런 짓 하지 말란 이 말이죠.
다만 나오는 성깔대로 나와 놓고 다만 성령 안 받은 사람은 잘했다고 하죠. 우리는 뭡니까? 그것마저 아무 쓸데없는 죄가 된다 이 말이죠. 어제를 기준해서 나 성화 됐습니다. 어제를 기준해서 나 이제 범죄 했습니다. 나 이제 지옥 가지 싶은데. 하고 혼자 좌절했다가 혼자 좋아하다가 어제를 기준해서. 내일되면 오늘이 어제 되니까.
이러한 그것을 사래의 몸에서 한 몸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그래서 16장에 보면 그걸 잘 설명했어요. 사래가 권유해서 애 낳으라 해놓고 막상 애 낳으니까 사래가 어떻게 합니까? 과감하게 핍박을 하지요. 핍박을 오히려 사래가 해요. 구박을 못 이겨서 임신한 그 임산부를 내쫓아버립니다. 쫓아버리는데 여기서 갈라디아서 4장 해봅시다. 아주 말이 재밌어요. 여기 말을 반대로 했어요.
4장 30절에 보면, "그러나 성경을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뭐하라? 내어 쫓으라" 창세기 16장에 보면 사래가 성질나서 내어 쫓게 되어 있지요. 그죠? 인간적인 성질로. 그런데 갈라디아서에선 뭡니까? 내어 쫓으라는 임무를 맡아서 내어 쫓는 거로 되어 있지요. 이해되십니까?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제가 어떤 교인을 미워했습니다. 새순교회 어떤 교인을 아주 미워했어요. 저는 아주 미워서 마구 미워했어요. 잘난 척 하기도 하고 미워했는데 참 이게 아주 웃기는 이야기인데. 나중에 하늘나라에서 편지가 툭 떨어졌어요. 보니까 그 아무개 집사를 미워하라 이래 나온 거예요.
내가 얼마나 미안한지, 왜 미안하냐 하면, 나는 내 성질나서 사적인 감정에 의해서 마구 미워했는데 다 미워하고 난 뒤에 마치 내가 뭐로 등장하느냐 하면, 내가 거룩한 말씀을 거룩하게 성취한 사람으로 등장해 버렸어요. 그 놈의 그 집사는 미워해야 돼. 잘했어. 착하도다, 착해. 착하긴 뭘 착해. 그걸 우리가 아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릴 통해서 일을 완성케 하는데 미안스러워 하면서 완성케 하는 거예요. 아, 이거 이해 안 되십니까? 이해되시죠.
그러면 이런 반대 예를 들게요. 목사님, 목사님 오늘은 아니 목사 아니다. 하나님, 하나님 오늘은 무슨 설교 할까요? 그렇다 하나님의 계시다. 오늘 잠언서를 하겠다. 라고 하고 심방 가 잠언서 하려는데 자, 기도 마치고 찬송 마치고 잠언서를 들치는데 그만 커피를 쏟아서 잠언서 다 버렸어요. 그러니까 전도서를 한 거예요. 할 수 없이 잠언서 안 돼서 전도서를 해버렸단 말이죠. 하고 난 뒤에 편지가 왔어요. 편지가 오기를 너는 전도서를 하여라. 편지가 왔단 말이에요.
그건 뭐예요?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는 쪽쪽 안 되게 하시면서 하나님 일을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더라. 사실은 두 번째 경향이 더 많아요. 제가 이야기할게요. 성도는 지가 하고자 하는 일은 하나도 안 되고, 안 되는 것만 되게 하셔서 기어이 예수님의 증인 만드는 것이 하나님 솜씨입니다. 하나님 우리 갖고 노는 재미가 거기 있어요. 일체 안 돼요. 일체 안 되게 해요. 하나도 안 되게 하셔요.
그래서 우리는 성질부리잖아요. 내 다시는 예수 안 믿는다. 내 다시는 교회 나가나 봐라. 그 다음날 교회 안 나가잖아요. 그 다음에 편지가 와 있어요. 다음 주일날 반드시 교회 가지 마라. 편지가 와 있다고. 내가 나쁜 짓 한 것은 하나님 명령 돼버리고, 내가 하고자 바르게 살고자 하는 것은 일체 안 들어주시고. 그러면서도 그거 하고 까부는 것과 관계없이 이미 십자가 공로로 구원받고.
왜 그렇게 하십니까? 그게 뭘 의식하느냐 하면, 지옥 가는 사람들은 우리하고 반대로 살기 때문에 그래요. 지옥 가는 사람들을 대비 세트로 대비가 돼야 돼요. 우리는 나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지옥 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 그걸 반대로 뒤집는 일을 하나님께서 강제로 뒤집는 일을 해주시는 겁니다. 반대로 뒤집어져요.
그래서 하갈과 후손이 하는 일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이거는 하갈이 아니지만 나중에 바지 가랑이가 쭉 갈라져요. 뭐냐 하면, 야곱과 에서의 경우인데 이거는 쉬우니까 쉬울 거예요. 야곱과 에서의 공통점은 둘 다 축복을 받아내려고 환장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결과는, 야곱은 축복이 돌아가고 에서는 저주가 돌아가죠. 자, 봅시다. 둘 다 축복 받으려고 환장했어요. 내가 만약 소설 쓰면 야곱을 너무나 착해서 형님 하세요. 저 같은 게 뭔 축복입니까? 이렇게 했더니만 하나님께서 그 마음씨가 가상하여 축복을 에서에서 빼어서 줬다. 내가 소설 쓰면 그렇게 쓸 거예요.
그런데 놀랍게도 야곱이건 에서건 똑같아. 축복 서로 못 가지려고 싸웠어. 태어나기 전부터 싸웠어요. 어떤 쌍둥이가 붙잡고 한판 벌이고 태어난 놈 누가 있습니까? 엄마 태중이 완전히 K1 리그야. 엄마 자궁이 K1 게임장이라 완전히. 한 판 싸우고 두 판째 나와서 싸우는 거예요. 전반전 안에서 뛰고 후반전 나와서 뛰는 거예요.
이건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 구원 받는 것은 사람의 다툼하고 니 생각하고 아무 이유 없어. 아무 상관없이 간다 말이에요. 이거는 로마서 9장에 보면, 야곱은 사랑받기로 작정했고 에서는 미워하기로 작정했다. 사랑받기로 작정했다. 미워하기로 작정했다의 그 작정. 주께서 ‘작정’이라는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둘 다 아무 작정과 상관없이 지 성깔대로 살게 그냥 방치하죠. 지 성깔대로 방치함으로 말미암아 작정하심의 위력이 인간의 행위를 능가한다는 것을 그렇게 해서 증거하는 겁니다.
이게 네 번째 해석이에요. 일체 스스로 자기 구원받을 조치를 자기가 인간이 할 수 없다는 것을 네 번째 하는 겁니다. 근데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어떻게 했습니까? 말씀을 1번, 2번, 3번 해석을 하는 거예요. 아아, 쉽다. 쉬워. 하나님 뜻대로 살아라. 뜻대로 살지 뭐. 바리새인보다 의가 더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가장 천국에 다 왔어. 조금만 올라가면 천국이야. 거의 다 왔어. 밀어버리면 확 넘어가요. 확 밀어버리죠.
여러분, 야곱에게 사다리가 왔잖아요. 예수님은 사다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사다리가 왔다는 건 사다리가 백이면 다 사다리 온 게 아닙니다. 천 명이면 천 개 다 온 게 아니고, 하필이면 사다리가 야곱에게만 왔어요.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야곱을 통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해서 하나님이 개입하지 아니하면 구원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야곱이 사다리 꿈꾸려고 연습 꿈을 꾼 적이 없습니다.
일방적인 개입에 의해서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식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방식으로만 우리가 구원된다는 것을 우리의 너무나 인간적인 것을 같이 세트로 묶어서 증거케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인간적인 것을 감출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럴 필요가 없어요. 어떤 사람은 그러면 당신 말대로 하면, 녹음되니까 좀 분명히 이야기해야 돼요. 당신 말대로 하면 죄를 마음껏 지으라는 겁니까? 하는데 죄라는 것이 뭐냐 하면, 죄를 억지로 짓는 것만 죄가 아니고, 1번, 2번, 3번 하나님 말씀대로 바르게 사는 것도 죄라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사람이 능력이 있잖아요. 잉태할 능력, 잉태한다는 이걸 생략하고 잉태할 능력 이건 이삭 경우니까 일단 생략하고요. 잉태할 간주하고 능력 있잖아요. 능력은 발휘해야 맛이 나요. 이게 바둑 둘 줄 아는 사람 있습니까? 바둑이 한 오단 쯤 되고 프로 쯤 되면 구급짜리 하수들 바둑 두면 못 참습니다. 장기 잘 두는 사람은 뺨 맞으면서 훈수합니다.
가게 인테리어 볼 줄 아는 눈을 가진 사람은 남의 동네와도 간섭해야 돼요. 밀양에 와서 갓 젊은 새댁이 와서 피아노학원 차리면서 전도연이가 저, 새로 옆집에 이사 왔는데요, 피아노학원 하는데요, 떡 좀 드세요. 이런 말 하면 몰라. 장사 안 되지요. 너무 시커먼데 이거 하얗게 바꿔보시면 장사 잘 될 텐데. 이렇게 한다고. 그러니까 여자가 돌아서서 얼마나 화를 내는지. 이게 어디서 와서 막 미장원에서 험담하다 걸리는 대목 나오거든요. 일상적인 이야기가 다 나온다 말이죠.
사람은 능력이 있으면 꾹 참는 속성이 아닙니다. 이 능력이 무슨 능력이냐? 염려하지 마라. 사래의 능력입니다. 아까 제가 이야기한 우리는 다 아담으로 사래의 능력이 있기 때문에, 사래의 능력이 뭐라고요? 뭔가 가지면 자랑하고 싶고, 선한 거 해놓으면 과시하고 싶고 그것이 우리를 후회할 줄 알면서도 그렇게 해요. 에라 내뱉으면 시원하잖아요. 뭔가 배설하면 시원하듯이. 이 능력을 발휘하는 맛에 살아가요.
그런데 불신자는 능력을 발휘하면 그것으로 끝이에요. 그게 전부에요. 이것이 죄라고 십자가 져서 알게 하는 것은 영적 사람만이 가능합니다. 성령 안 받은 사람은 이걸 못해요. 실컷 발휘해놓고 아이고, 천당 가는데 무슨 소용 있나? 아무 소용없다. 이상스럽게 이게 주님 공로로 구원받지, 교회 봉사한다고 구원받나? 이게 아무 때나 나올 이야기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착한 일 할 때도 이런 능력이 나오면 참 신기하지만 교회에서 남한테 밉상 받을 때가 있어요. 이유 없이 모함 받고 이유 없이 밉상 받을 때 있어요. 그럴 때 사람 못 참습니다. 야곱이 못 참듯이. 참지를 못해요.
그런데 그 가운데서도 아이고, 내가 저걸 밟는다고 구원받나? 주님 능력으로 구원받았지. 내가 꼭 밟아야 되나.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 이게 인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이에요. 언약의 능력입니다. 축복의 능력이 왔기 때문에 내가 뭘 복수하고 내 힘으로 심판하고 싶어도 그걸 아이고, 치우자. 그냥 그만두지. 나만 욕 얻어먹지 뭐. 주께서 하시겠지. 라는 마음이 든다 말이죠. 들잖아요. 들어놓고 하나님께서 기쁨 주잖아요.
그 다음에 사래가 어떤 사래가 있느냐 하니까 역시 인간성이 좋으니까 참으니까 복 받았지. 라고 새로운 사래가 또 튀어나와요. 매일같이 계속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아무 이유 없어. 예수님 공로로 구원받지, 이런 걸 조종한다고 이걸 조종하고 조심스럽다고 될 문제가. 우린 조심할 필요도 없이 사래의 능력이 막 튀어나옵니다.
어쨌든 창세기 16장 봅시다. 이제 감이 좀 정리가 되는데요. 16장에서 "내어 쫓으라" 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내어 쫓으라 하는 것이 이게 사래가 아이고 야야, 같이 살고 싶다. 내가 니 핍박했지. 아기 있다고. 그러지 말고 니 아기 낳아라. 이게 아니고 멸시하고 이러니까 핍박을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여기 보면, 여자 주인을 멸시했지요. 멸시하니까 내어 쫓아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일종에 보면 학대지요. 하갈을 학대했지요. 하갈은 억울하지요. 시킨 대로 했는데 왜 학대하느냐?
그러면 보통 뭐라고 하는 줄 압니까? 사람들이 이런 사래의 특성이 있어요. 내가 당신이 시킨 대로 했는데 왜 당신은 미워하느냐? 하면 그 미워하는 말이 왜 내가 시키는 대로 하느냐 이 바보야. 하거든요. 왜 내 시키는 대로 해 이 바보야. 당신은 날 미워하느냐? 나도 몰라. 미워지는 걸 어떡해? 이렇게 한다고요. 미워지는 걸 안 밉다고 도저히 말 못하겠다. 이것이 아주 성질 나쁜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고, 매일같이 우리가 이걸 쏟아냅니다.
여러분 드라마 보면서 드라마 배우하고 여러분하고 아무 관계없어요. 괜히 미운 사람 있고, 말씨도 미운 사람 있고, 눈 크다고 쌍꺼풀 밉고, 다 미운 사람 다 있어요. 무슨 악한 감정 있다고. 언제 봤다고. 사람은 사래기 때문에 튀어나온 감정을 추스를 여유도 없이 그냥 튀어나온다고. 그게 우리 역할입니다. 살아가면서 그 역할이에요. 그 배후에 두 언약에 의해서 가기 위해서 이렇게 한다는 그것까지 이해한다는 것은 성령을 받아야 가능한 겁니다.
그래서 학대받은 사래가 이제는 하갈이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것은 뭐냐 하면, 사래와 사라의 갈라짐. 그리고 앞에 하갈이 사래지요. 하나의 사래가 둘로 갈라지게 되죠. 둘로 갈라지는 게 영원히 헤어지는 게 아닙니다. 둘이면 뭐 해야 되느냐? 영원히 인류 끝까지 여기는 대립이죠. 대립해야 되고 투쟁해야 되고 다툼이 일어나요. 이스마엘과 이삭과.
서로가, 서로가 필요해요. 이삭이 이삭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 아스마엘이 필요하고, 이스마엘이 왜 지옥 가느냐 알기 위해서 이삭이 필요하고. 선은 악을 위해서 있고 악은 선을 위해서 있는 겁니다. 둘이 짝을 이루어야 의미가 생기는 거예요. 빨간색은 파란색이 있어야 되고, 파란색은 빨간색 있어야 횡단보도가 성립되듯이 짝이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짝이 있어야 돼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때 그냥 예수님이 아니고, 짝을 통해서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십자가에서 저주 받았다. 그것을 이야기해요. 십자가에서 용서받았다. 의와 죄를 양쪽을 다 이야기해줘야 이게 십자가를 제대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뭘 이야기합니까? 용서만 이야기하고 저주 이야기 안 하죠. 죄에 대해서 이야기 안 하니까 그들은 세트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그냥 예수님을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처럼 그냥 자기 구원할 이용물인 줄 전문가인 줄 생각하는 겁니다.
자, 이제 사래가 갑니다. 갈 때 여기에 9절에 보면,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니라"
결국은 이게 추방당하고 하갈이 아브라함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라함이 이름하여 이스마엘로 다시 들어오죠. 결국은 이게 하나님께서 갈라놓고 다시 합쳐야 되죠. 합치면서 그 다음엔 또 뭐냐? 왜 사라는 하갈이 될 수 없는가, 하갈은 왜 사라가 될 수 없는가를 뚜렷하게 분명하게 윤곽을 지어주면서 이제는 더 대립되게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집에서 이스마엘은 큽니다. 사실은 할례를 누가 먼저 받나? 이삭보다 누가 먼저 할례 받았어요? 이스마엘이 먼저 할례를 받아요. 온 집안에.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두 하갈과 사래는 누구한테 복속 됩니까? 아브라함에 복속되지요. 아브라함이 가장이니까. 사실은 아브라함 그 다음에 아브라함의 언약, 다른 말로 하면 저주와 축복의 언약. 이런 것 속에서 인류 역사는 축복, 저주 이 외에는 다른 노선이 없도록 이렇게 흘러가는 식으로 전개가 됩니다.
자, 그렇다면 아브라함 언약이 가는 곳에는 이렇게 갈라짐의 그러한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마치 배가 지나가면 가만있는 바닷물이 둘로 갈라지듯이 저와 여러분들이 가는 곳에서 저주 받을 사람과 축복 받을 사람이 갈라지듯이 이젠 성도 있는 존재하는 그 장소가 구원받을 자와 구원받지 않을 자를 쪼갈라지죠.
누가 압니까? 구원받을 그 사람은 알지요. 아, 저 사람은 교회 다녀도 지옥 갈 사람이구나 안다고. 확정은 못하지만 주께서 하시기 때문에 확정 못하지만 아, 저건 복음 아니다. 아는데 상대방은 그걸 전혀 눈치 못 채지요. 아이고, 같이 교회 다니십니까? 감사합니다. 우린 구역예배 어떻게 하고. 예, 알았습니다. 그러지요.
밀양의 영화에 보면 주의 깊게 봐야 됩니다. 밀양 영화에서 보실 때 놓치는 게 뭐냐 하면, 밀양 천변에서 설교가 부흥 집회할 때 세 가지 요약을 해줘요. 그 요약을 기억을 해야 돼요. 네 거리에 플래카드 그거 빨리 지나가면 상처 받은 영혼 기도회. 그거 놓치기 쉽고. 또 뭐냐 하면, 밀양남부교회 그것이 예배당 세트에 있어요. 그건 세트가 실제 있는 것 같아요. 남부교회, 교회에서 그걸 놓치면 안 됩니다. 아, 밀양남부교회구나. 그거는 주의 깊게 본 사람은 나온다고.
성도, 사도 바울이 복음을 아는 사람한텐 향기고 내가 전한 건 향기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악취난다. 이 말은 사도 바울은 향수병을 틀고 죽 다니는데 다른 사람은 야, 향기 좋다. 하고 따라오는 사람 있고, 어떤 사람은 저 냄새 역겹다고 저리 가라고 미는 사람 있고. 자기 역할이 향수병을 틀고 그것을 온 동네방네 돌아다니는 역할 한다는 겁니다. 심지어 로마까지 가야 돼요. 자기 의도하지 않았는데.
그처럼 성도의 임무는 뭐냐 하면, 언약을 하나님의 구원받는 언약과 저주 받는 언약이 뭐냐를 그걸 증거하기 위해서 누가 합니까? 여러분 합니까? 여러분 전도 하나도 못해요. 저도 못하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요강 단지 하나 놓듯이 향수 나는 것을 이렇게 놓기만 놔버려요. 그 자리 딱 있어요. 나는 학교면 학교, 직장이면 직장 안에 가만있으면 돼요. 가만있으면 알아요. 저 교회 다녀도 이단이구나. 가만있어도 알아요. 주께서는 배치를 그렇게 하십니다. 가만있어도 알아요.
저는 우리교회 교인 누가 오더라도 하나님 보내서 왔다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보내서 왔다는 말은 우리교회 교인된다는 말은 아니고, 보내서 왔다는 겁니다. 보내서 오셨으니까 향수, 복음의 향수만 틀어놓고 있으면 돼요. 당신은 거기 있고, 나는 여기 있고. 틀어놓고 냄새 역겹다 나가면 할 수 없고. 향수다 하면 감사하고. 그 뿐이라니까. 저는 서서하고 목사님은 앉아서 하고 그 차이뿐인데.
그러니까 제일 중요한 게 목사가 설치면 안 되잖아요. 목사가 앞장서서 이래 설치면 안 돼요. 그렇게 되면 목사 비위 맞춘다고 주님 생각하는 것을 놓치기 쉽습니다. 목사 비위 맞춰야 되지, 주님 섬겨야 되지, 시아버지 둘이 되서 골치 아파 안 돼요. 그냥 주님만 바라보도록 향수가 얼마나 귀한 향수인지 목사부터 그 향수만 증거해야 돼요. 복음만 증거해야 돼요.
17장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많이 힘들었으니까. 17장 19절에. 자, 그러면 17장 넘어가기 전에 마지막 이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그럼 왜 이스마엘을 그 집에 들였습니까? 왜 이스마엘을 다시 들였습니까? 여주인에게로 다시 학대 피해서 지가 도망갔는데 하나님께서 다시 여주인에게 돌아가라 해서 학대를 무릅쓰고 갔는데 왜 가게 했느냐 하면, 지금 아직 누가 나타나지 않았어요? 이삭은 안 나타났지요.
그럼 누구 나타났습니까? 이스마엘을 나타내고 이스마엘 정도가 아니고, 이스마엘 누가 낳았어요? 하갈이 낳았지만 사실은 하갈은 누가 시키는 대로 했습니까? 사래가 시키는 대로 했지요. 그러니까 이스마엘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사래의 인간적인 능력이 계속 남아 있지요. 그죠?
우리가 예수의 십자가를 믿는다는 말은 우리가 개과천선 되는 거 아닙니다. 우리의 인간성 더러운 거 뚜렷하게 남아 있어야 돼요. 돈 좋아하고, 뭐 좋은 것 다 좋아하고, 좋은 집 좋아하고 그런 더러운 짓 다 있어야 돼요. 이것 때문에 누가 가해자다? 이것 때문에 누가 죽었다? 예수님, 이삭이 번제로 바치듯이 예수님이 피해자가 되서 우리로부터 죽었다는 걸 알아야 돼요. 만약에 우리 자신을 자꾸 피해자로 봐버리면 예수님이 자기 안 도와준다고 그렇게 땡깡부리고 그렇게 원망하면서 기도할 거란 말이죠.
그런데 우리 마음속에 이스마엘 이것이 넉넉히 다 있어야 돼요. 뚜렷하게 있어야 돼요. 하나님께서 이걸 평생 버리지 않습니다. 이거 하고 그 다음에 그리스도를 양쪽을 다 비교하면서 있으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마엘은 집에 와야 하고, 이스마엘 너는 아니야. 왜? 사래가 낳았기 때문에. 태가 살아있는 아니 하갈의 태가 살아있지만 사실 하갈은 누구 소속입니까? 사래죠. 사래가 자기 태가 죽은 것을 알고 하갈을 갖다 붙였으니까 결국 이건 사래가 낳은 자식이죠.
사래가 낳은 이스마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래의 태가 죽어서 두 번 다시 하갈을 불러오지 않은 상태에서 죽은 그대로 그냥 갖다 바쳤더니만 거기서 이삭이 태어나죠. 없는 데서 있게 하는 것이 진짜 천국이냐? 너는 지금 없는데서 있는 믿음이냐 니가 만들어낸 믿음이냐를 내부적으로 한번 비교해 보란 말이죠. 니 행함으로 믿은 거냐 니가 믿음 없는데 믿음이 이상하게 생기느냐? 그걸 내부적으로 보라는 거예요. 그걸 평생 같이 비교하게 하는 겁니다.
이럴 때 우린 뭘 알 수 있느냐? 아, 저 사람은 가짜 믿음이고, 저건 이단이고, 저건 지옥 갈 사람이고 하, 저건 기적이다. 저건 형제 맞다. 세상에 저런 고백이 있을 수가 없어. 형제여 만나서 기쁘다. 이런 것을 우리로 하여금 주위에서 교제가 이루어지도록 그렇게 하는 겁니다.
한번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우리 자신이 구원 된 게 아니고 구원되신 주님이 찾아오시면서 우리가 구원되었음을 다시 한번 고백합니다. 우릴 그냥 가만두지 아니하시고 늘 간섭하시고 다 이루었다고 이야기 해 주시고 성질대로 그대로 있으면서도 상관없이 구원되었음을 그 주님의 은혜를 자랑할 수 있는 저희들 삼아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