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35: 1- 2 (하나님의 아름다움)
사 35: 1- 2 (하나님의 아름다움)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68)
본문: 이사야 35장 1- 2절
제목: 하나님의 아름다움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이사야-2005/092강-사35장,1-2,(하나님의,아름다움)-isa070613.hwp
이근호
07-06-13 21:08
하나님의 아름다움
2007년 6월 13일 본문 말씀: 이사야 35:1-4
(사 35:1)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사 35:2)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사 35:3)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여주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여주며』
(사 35:4) 『겁내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굳세게 하라, 두려워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수하시며 보복하여 주실 것이라 그가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우리가 성경을 바라볼 때마다 하나님께서 벌리시는 계획들이 등장합니다. 당연히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추진하시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성경 말씀을 대할 때마다 감사하고 신나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들은 이 성경보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나름대로 세상에 대한 아름다운 기대를 따로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욕망이 원하는 아름다운 상태에 대한 희망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무엇이 나에게 행복하며 무엇이 나를 즐겁게 해줄것인가에 대한 나름대로 포부를 품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 주인공은 자기 자신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자신의 일에 몰두하다 보니, 하나님의 일도 남의 일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무덤덤하고 무관심하기 마련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시냐에 대해서 몰라도 된다고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생각해놓은 아름다움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사람들이 감히 상상치도 못할 아름다움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사람들이 깜짝 놀랄만한 아름다움입니다. 사도 바울이나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벌리시는 아름다움으로 인해 심지어 그 앞에서 자기 목숨을 부지하겠다는 생각마저 잊어버릴 정도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내세운 약속이나 말씀은 친히 수행하신다는 것이 너무나도 기분좋아서 자기 속에 뛰고 있는 목숨마저 하짢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당연히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어나가실 일입니다. 우리가 신경을 쓰던 아니 쓰던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어나가실 계획이 오늘 본문에 나와있습니다.
사람들이 성경 말씀을 그대로 외운다고해서 그 말씀을 썼던 사도와 동일한 믿음과 느낌을 가졌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앵무새도 이 성경 구절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들은 하나님의 말씀 이루심 때문에 자신의 목숨까지 잊을 정도지만 모든 이들이 그 성경 말씀을 그대로 읽는다고 해서 모든 이가 자기 목숨에 연연 안하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인간의 아름다움을 이루는 방식이 상호 다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아름다움이란 자기가 주인공이 되어서 자기 욕망이 시키는대로 움직일 때 일시적으로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물론 계속 허탈과 허무가 찾아들지만 말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란 오늘 본문에 보면, 모든 것을 광야와 메마른 땅이 되게 하는 방식으로 진행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사정없이 모든 것을 부셔버리고 황무지로 만들어버립니다. 그것이 아름다움을 세우시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사람들이 도저히 그것을 눈치 챌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황무지를 만들어버려야 그 황무지에서 백합과 샤론의 아름다움이 생명력으로 가지고 피어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방식과 정반대의 방식입니다. 인간들은 선악과를 따먹은 그 습성이 여전히 간직하고 있기에 보기에 탐스럽고 먹음직한 유혹을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그런 유혹이 영글어내는 아름다움만을 사모하고 있습니다. 이런 인간들에게 하나님께서 전혀 아름답지 못하고 추하고 외면하고 싶은 비아름다움으로 메시야를 보내신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황무지 방식과 전혀 상관없는 것입니다. 도리어 마귀가 좋아라하는 일입니다. 인간들이 이런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우선적으로 그들이 자기 죄 문제조차 자기 힘으로 처리해 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그들이 목적하는 그 아름다움 안에도 여전히 무서운 죄가 담기게 된다는 겁니다.
사람들의 습성은 자기 문제를 자기가 끌어모은 힘으로 달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점점 황무지가 되는 식으로 아름다움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그 황무지에다 자기 힘으로 뭔가 계속 심어야 일이 된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방식은 그게 아닙니다. 아예 인간들이 일체 기대하는 것이 없게 모든 것을 광야로 만들고 황무지로 만들어버립니다.
이것은 인간들이 미리 예상한 아름다움하고 아무런 상관없는 아름다움을 만들겠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죄를 품고 있는 그런 아름다움도 아니요 인간의 죽음의 흔적과 징조가 포함된 그런 허술한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일체 인간의 행함과 상관없이 순전히 예수님의 공로만 성사되는 아름다움입니다.
그 안에는 죽음도 없고 죄도 없고 두려움도 없고 슬픔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홀로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런 아름다움을 고대하고, 믿는 자는 더 이상 두려움에 떨 필요가 없습니다. 더 이상 약한 손이나 그 어떤 염려도 필요치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내부에서 솟아오르는 죽음의 힘을 어찌 할 줄 몰라서 억지로 누려고 사는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식에 의하면 의도적으로 우리 안에 죽음과 죄의 세력을 있음을 까발리면서 진행됩니다. 요엘 2장에 보면.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는 모든 것이 깜깜해지는 날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날이 바로 성도가 구원받는 날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깜깜해지는 날을 즐겁게 손꼽아 기다리는 자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불신자들처럼 세상 일에 대해서 두렵거나 겁내거나 공포에 떨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자기 속을 황무지와 광야로 만들어버리시는 것이 원래 하나님께서 벌리시는 일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평소에 아무리 위선적으로 자기를 가려도 인간 내부에서 올라오는 죄와 죽음의 공포를 자력으로 감추기에는 역부족입니다.
신명기 8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일부러 자기 백성들을 광야로 이끄시는 이유가 나와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을 낮추기 위함’입니다. 사람이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면 망합니다. 악마는 항상 하나님의 방식과는 반대로 우리의 마음을 높여서 다른 식의 ‘아름다움’을 쟁취하려고 거래를 걸어옵니다.
인력으로 이런 악마의 유혹을 뿌리칠 재간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쉼이 없이 우리의 마음을 황무지로 만들어 오직 하나님의 아름다움으로 피어나는 생명의 전시장으로 만들어내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세상적인 버릇을 하나님의 아름다움으로 낱낱이 부셔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