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 6월 8일 강의
안산 6월 8일 강의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68)
관리자(IP:220.♡.41.203)
10-11-17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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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san070608
2010-11-17 17:01:51 녹취 : 조현창
ansan070608고후4장10절
고린도후서를 쭉 해왔습니다. 고후 4장 10절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여기서 소위 역사적으로 성경을 보고 역사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이것이 상당히 낯설죠. 왜냐하면 예수는 전에 죽었잖아요.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기 전에 이미 예수님은 돌아가셨잖아요. 그렇죠. 그렇지 않습니까?
여기 10절에 보면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할 때, “몸에 짊어짐을” 말 자체가 시간상으로 성립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미 돌아가셨다, 이 말이죠. 돌아가신 분을 왜 또 다시 짊어지느냐 말이죠. 이순신 장군 죽었잖아요. 죽은 이순신 장군의 무덤 파서 시체를 들고 다닌단 말입니까? 그게 아니죠?
그러니 여기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이 말은 앞에 7절에 보면 뭐가 옵니까? 성령이 오지요.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이 하는 일이 뭐라고요? 이미 전에 죽었던 예수님의 죽으심을 자기 백성에게, 성령이 임한 사람에게, 되풀이해서 짊어지게 하는 일을 누가 하신다? 성령이 하신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성령은 어디에 구애받지 않습니까? 역사에 구애받지 않죠, 역사에. 십자가와 오늘날 우리와의 사이에 이천년 이라는 텀(term기간)이 있잖아요. 이것이 성령에게는 문제가 되요 안 되요? 전혀 문제가 안 되는 거예요.
성령께서는 옛날에 죽었던 예수님의 십자가를 오늘날 짊어짐에 있어서 성령한테는 전혀 문제가 안 되죠. 그게 시간이라는 이천년 갭(gap)이 장애요소가 아니잖아요? 그죠? 장애 요소가 아니니까 결국은 신앙생활을 할 때 무슨 요소를 빼 버려라? 시간요소를 빼야 된다 이 말입니다.
시간 요소를 빼버리면 뭐만 남느냐하면, 지금 여기가 안산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오후 4시죠. 시간은 4시고 공간은 안산이잖아요. 그런데 성령 안에서는 이것은 뭐냐하면... 십자가 그 때, 유행가에 있잖아요. 영화에 뭐 있죠? 그 때 그 사람. 박정희 죽을 때 그 때 그 장소 있죠. 십자가에 죽었던 그 때 그 사건이 지금 여기에 되풀이 된다 안 된다? 되풀이 되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이 여기에서 되풀이 되는데 지금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은 무엇이 방해하기 때문에 그러냐하면, 우리 속에서 뭐가 나오냐 하면 ‘시간관’이 있고, 우리 속에 ‘공간관’이 있다 말이죠. 제가 이런 소리하면, ‘목사님 돌았습니다. 여기 지금 안산입니다. 여기 갈릴리 아닙니다. 왜 그러십니까. 정신 차리세요!. 치매 걸렸습니까? 여기 안산이예요. 갈릴리 아니예요’ 이렇게 하고. ‘목사님 오늘이 2007년도입니다. AD28년 아니예요. 여기 지금 2007년입니다. 정신 차리세요!’
‘지금 목사님은 시간관도 공간관도 없습니까?... 하려면 여기 안산에 동산교회라고 큰 교회 있습니다. 그것과 견주어 보고 생각을 하던가 해야지. 안산동산교회 놔두고 왜 2천년 뒤로 붕 뛰어서, 십자가가 ‘옛날 십자가’인데 왜 자꾸 ‘지금 여기에’ 십자가라고 합니까?’ 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뭐라고 해야 되요? ‘당신은 그러면 고린도후서 4장 10절이 당신에게 해당되지 않는다...’ 이 말 아닙니까.
제가 비트겐쉬타인 글을 쓰면서 결론 부분을 이렇게 해 놓았죠.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이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죠. 이것이 얼마나 신기한 이야기입니까? 이것이 왜 신기한 것이냐 하면, 우리가 말씀으로 다가 간다고 생각하지, 어느 인간이 말씀이, 우리는 가만히 있는데, 내 속에 허락도 없이 들어와서 나로 하여금 말씀으로 무장케 한다, 는 생각을 누가 하겠어요!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세요’ 라는 푯말이 있을 때 그것을 읽은 것은 ‘내 눈’이고, 잔디밭에 들어가서는 안 되겠다 생각한 것도 ‘나’이고, 그것을 판단해서 행동으로 옮겨서 ‘나 잔디밭에 안 들어 갈래’ 이 모든 것이 누가 합니까? ‘내’가 하잖아요. 그죠?.
이런 사람이 있었어요. ‘십계명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라, 할 때 어떤 부자 청년이 ‘부모를 공경했습니다. 다 지켰습니다’. 이렇게 ‘자기’가 말씀에 다가가려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누구에게 다가가지 못했습니까? 자기가 말씀에 다가 갔다고 착각했는데, 막상 말씀되신 예수님이 왔을 때 그는 다가갔습니까 안 다가갔습니까? 도망쳤지요!
‘네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하니까 황급히 도망쳐버렸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인간이 말씀가지고 주님께 다가선다는 것이 애초부터 이것은 성사가 안 되죠. 성립이 안 되죠. 그러면 말씀 지키는 것도 불가능하죠. 왜? 말씀을 지키려면 우리가 다가가야 되는데, 다가 가기보다는 도망쳐야 되는데요. 말씀 지킨다는 것이 성립이 안 되죠. 말씀 못 지키면 지옥 누가 갑니까? 우리가 가는 거죠. 그냥.
완전히 지금 한국 교회하고 성경, 사도바울하고 정 반대예요. 사도 바울은 주의 성령이, 주의 말씀이 내게 다가온다고 보고 있고, 한국교회는 ‘네가 다가가야 그것을 쟁취하고 손에 쥐어야 그 사람에 한해서 구원받는다’, 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말씀을 쥐려면 사람 속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시간’과 ‘공간’ (의식이 자리잡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조금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시간과 공간속에 사람이 있다, 이 말은 ‘자아’라는 즉 ‘나’라는 것에 시간과 공간(의식)이 있는데 사람의 ‘자아’라고 하는 것은, 딱 깨놓고 이야기해서 ‘자기 과거의 산물’입니다, 과거의 산물.
우리가 하나의 쓰레기통이라면 여기에 무엇이 담기겠습니까? (자기) 과거가 다 담기겠죠. 그래서 ‘나’라고 하는 것은 누구의 작품이예요? (자기) 과거 경험의 작품이 되는 겁니다. ‘과거 없는 나가 없다’ 이 말이죠. 이것이 인간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이것이 맞다고 생각하십니까? 이것 착각입니다. ‘과거 없는 나가 없다’라는 것은 이렇게 해서 나온 거예요.
그러면 사람이 고민을 한다. 왜 고민합니까? 과거가 없으면 고민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어요. 고민이란 뭐냐 과거부터 쭉 가져온 고민이예요. 근심이다 말입니다.
만약에 지금 이 집에 쌀이 똑 떨어졌다. 쌀이 떨어졌다는 것이 고민될 경우는 언제냐하면 어제까지 먹을 쌀이 있었다는 것과 비교해 볼 때 고민이 되는 겁니다.
어제(까지) 만약에 보리쌀(만)이 있었는데 오늘 쌀이 없다면 걱정하겠습니까 안 하겠습니까? 걱정 안 하지요. 어제 보리쌀 먹었으니 오늘도 보리쌀 먹으면 그만 아닙니까. 그런데 (만약) 어제 쌀이 있었는데 오늘 쌀이 없다면 이것은 큰 고민이 되죠.
결국 사람은 무엇을 의식하는 겁니까? 과거를 의식하는 거예요. 이 말은 ‘나’라는 인간을 쪼개보면 전부 다 ‘지나 간 것’. 지나 간 것만 소복이 들어 있어요. 손목사님 안 그렇습니까? 그렇지요. 그러니까 지나간 것만을 (생각)한다는 것은 뭐냐면... 지금 오늘의 주께서 만들어 주신 것은 생각 안 하고...
사실은 이것이 결론은 이렇습니다. 자아는요. 지나간 것이 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미래에서 당기는 힘이 있어요, 미래에서... 미래에서 당기는 힘이 뭐냐하면 십자가의 힘입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천국에 가셔서 우리를 당겨주는 힘으로 날마다 우리에게 잡초이지만 참새이지만 키우는데...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미래에서 어떤 힘이 와서 나를 마구잡이로 자꾸 당겨간다는 생각은 안하고, 경상도 말로 딸려간다. 목사님도 경상도 아닙니까? 딸려가죠. 땡기는 거예요. 딸려가는 거예요.
우리는 과거의 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 지금 이거 없으면 안되요. 이거 놓치면 안 되요. 나 자살할 거예요. 나 이거 키우려고 얼마나 애썼는데요, 이거 깨지만 난 살 희망이 없습니다.’
이러시면서 하나님은 성도를 미래의 힘으로 땡긴다고요.
지금은 희미하지만 나중에는 땡기는 힘과 우리가 뭐로 맞댄다? 얼굴을 마주보면서... ‘봐라 자슥아 내가 그렇게 땡겼는데 너는 그렇게 세상 봤잖아. 봐라 땡기는게 안 좋으나... 야 봐라 손에 못 자국 봐라. 너는 십자가가 옛날 사건인 줄 알았지. 나에게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 나에게는 시간개념이 없었어. 처음부터 계속해서 십자가 안에서 너를 땡겨 왔다’ 말이죠.
땡기는데... 우리는 시간과 공간 개념이 있기 때문에 그 땡기는 힘을 지금 나의 것으로 붙잡으려는 그런 무모한 시도를 해요. 지금 이 자리에(공간) 나의 것 즉 과거. 나라는 것은 과거가 만들어 내고 현재 가진 것, 이 자리에 있는 것, 선풍기 피아노 있잖아요. 이것은 내 것이란 말이죠. 왜? 과거가(로부터) 주어졌으니까. 과거가 현재에 이어진 것 맞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오늘 밤에 이것들을 도둑맞으면 우리는 섭섭하지요. 왜? ‘나’는 ‘과거의 생각’인데 과거에 이상하게 뭐가 있었는데... (있었던) 피아노가 없잖아? 왜 없나? 도둑맞았구나! 아이고 죽겠다! 이것은 뭡니까? 이미 우리는 과거에 근거해서 살아간다 말이죠.
그런데 사도 바울은 뭐라 봅니까? 과거 미래 현재가 날라가 버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미래이지만... 과거 현재 미래가 아니라, 고린도후서 4장 10절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사도바울을 칼로 쫙 쪼개면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습니까? 과거가 들어있는 것도 아니고, 과거 현재 미래가 ‘무시당한 것’이 들어 있지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십자가 사건’이 들어있지요, 십자가 사건이.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 그 사람들은 과거를 알고 있었어요. 그들이 엠마오로 내려가는 이유가 이제는 예루살렘에서 별 볼일 없다는 겁니다. 왜? 자기가 따르던 예수님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처형되어 이미 무덤에 묻혀버렸지요. 그러면 자기들은 별 볼일 없잖아요. 그러니까 다 접고 그냥 고기잡이 하러 가던지 간단 말이죠.
가는데 그 때 예수님이 나타났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은 엠마오에서 나타난 것이 아니고 공간을 초월해서 나타났지요. 참 이거 요한복음을 알아야 되요. 예수님이 문 닫혔을 때 들어왔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이 어디로 들어 온 겁니까? 사람들은 ‘예수님이 제자들이 있는 문 닫힌 곳에 들어왔다’ 생각하잖아요.
저는 그래 보지 않고, 제자들이 예수님이 계신 곳에 이끌려온 거예요. 와 보니까 예수님이 계신 거예요. 도마가 뭐라 합니까? 없다, 나는 안 봤다는 겁니다. 그 때 예수님이 어디서 나타났는지 나타났잖아요. ‘자슥 나 여기 있잖아!’. 너는 과거와 나라는 공간, 시간과 공간으로 예수님을 거기에 포착, 붙잡아 맨단 말이죠.
우리 손 목사님 이 교회에 만약 예수님께서 붙잡아 매면 얼마나 좋겠어요. 아픈 애들 와서 안수 받으면 병 다 나아버리고, 가난한 사람들 안수 받으면 다 부자되어버리고... 예수님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지어드리고, 손 목사님은 살짝 빠지는 거예요. 왜? 예수님이 대장이니까. 자기는 싹 빠지는 (겸손의) 재미가 있단 말이죠. ‘예수님 한 번 솜씨 부려보세요. 나는 주님 시키는대로 하겠습니다.’ 하면 얼마나 신나는 일이냐 말이죠.
그런데 그래되면 뭐가 빠지냐 하면 고후4장 10절이 안 된다 이 말이죠. 왜? 사도 바울은 지금 주님께 끌려 온 것이지, 사도 바울은 자기가 예수님을 붙잡은 것은 아닙니다. 이것을 한 번 적어봐야겠다, 이거 너무 중요하다. 요약해서 사도 바울은 뭐는 아니다? ‘자기가 예수님을 붙잡지 않았다’. 왜? 붙잡으려면 예수님은 과거와 공간을 가지고 들어와야 되요.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말이죠.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는 사람(예수님)이고, 사도바울 본인은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잖아요. 그러니 여기에 억지로 붙잡아야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이것이 불가능한 것을 사도 바울은 알죠. 이것은 X 표이고.
그 다음에 O표는 뭡니까?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붙잡지 않았다면 정답은 무엇이죠? 예수님이 자기가 있는 곳, 시간과 공간이 없는 세계에 누구를 초대했다? 사도바울을 초대한 거예요. 이것을 가지고 유명한 <예수 안>이라고 하는 겁나다, 그 유명한. <예수 안> 이거 박사 학위 논문해도 모르는 예수 안.
신앙생활 하면 안 되요! ㅎㅎㅎ 세상에! 신앙생활에 붙잡힌 예수가 어디 있어요! 그것은 가짜 예수예요. 신앙생활 하면 안 되요. 왜냐하면, (신앙생활)하면 자기가 천당간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하면 안 되요. 그러면 천당 못 갑니다. 성령이 안 찾아 오면 천당 못 갑니다.
(아이구 오랜만입니다. 고생 많았지요. 지금 신앙생활 하지 말라고 고함지르고 있는 중간에 오셨습니다^^ 더우시면 선풍기 돌리세요...) 지금 이 이야기를 끄집어 내려면 엄청난 이야기를 끄집어 내야되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철석같이 알고 있는 한국 교회에게 신앙생활 하지 마라... 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제가 했는데...
신앙생활하지 마세요... 왜냐? 인간은 시간과 공간이 있기 때문에 신앙을 하게 되면 신앙생활 자체가 ‘행함’이 되요. 그러면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됩니다. 그런 예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찾아가서 구원시키지, 나 있으니까 나를 붙잡아서 구원받아라, 고 가르치신 그런 예수님은 없습니다.
지금 고후4장10절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읽어 봅시다. 참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지. (고후 4: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짊어짐은 사도바울의 능력이 아니라는 것이 그 다음 7절부터 나오죠.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는 것은 그가 지금 누구 안에 있기 때문에? 성령 안에 있기 때문에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을 누가 벌인다? 성령께서 벌리니까 나는 성령 안에 있으면서 성령의 능력이 나의 답답함보다 더 우세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를 이용한 거예요.
나에게 답답한 일이 벌어지게 해가지고, 그거 봐 니 답답하지. 하지만 니는 답답한 가운데서도 안 답답하잖아. 누구 덕인지 알아? 성령의 덕이야. 성령의 솜씨 발휘하려고 우리를 답답한 가운데 몰아넣네... 주님께서.
아주 남들 같으면 아주 천번만번 낙심할 일을 우리에게 들이닥치게 해서 성령께서 헤헤 거리면서 어떻게? 재밌지? ㅎㅎ 낙심되나? 이상하게 안 되는데요. 안 되지? 누구 덕인지 아나? 니 잘 났나? 아닙니다. 성령의 공로입니다. 그렇지.
성령이 함께 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주님이 함께 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남들이 견디지 못하는 답답하고 괴롭고 근심되는 일을... 이거는 예고도 없이 들이닥치네, 예고도 없이.
이것이 좁은 길 아닙니까. 영생이고... 다른 길은 영생이 없어요. 좁을 길로 가야 영생 이예요. 그래서 성도에게는 파이프인데 이것이 좁아요. 두세 사람이 들어가면 좁아서 머리 터져요. 못 들어갑니다. 겨우 들어가는데... 답답하고 우겨쌈을 당할 수밖에 없는 가운데서도 무엇을 느끼느냐하면, 참 내가 주님을 잡아댕겨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나를 자기 세계 안으로 초청했다는 것을 순간순간 한걸음, 한걸음 뗄 때 마다 새롭게, 새롭게 느끼게 하는 겁니다.
느끼게 하면 한마디로 ‘겁대가리’가 없죠. 겁나는 것이 없죠. 사람 내 사람 만든다고 겁내지 않고, 몸 아프다고 겁나지 않고, 남한테 우사(무시?)당한다고 겁나지 않고, 교도소 간다고 겁나지 않고, 천지개벽 나도 겁나는 것이 없고...
땡겨주는 힘으로 구원받습니다! 내가 주님께 다가가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계속 땡겨요. 당기고, 당기고, 당깁니다.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우리의 육의 본성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주님을 내 것으로 붙잡고, 붙잡고, 붙잡고..., 주님은 붙잡는 손을 뿌리치고 당기고, 당기고, 당기고... 매일같이 싸움이 벌어집니다.
주님이여 우리 집에, 주님이여 우리 가정에... 자꾸 주님을 붙잡으려고 하고, 주님은 네가 내 안에 내가 네 안에. 계속 우리를 끌어당기는데 그 당길 때에 10절에 보면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늦게 오신 분을 위하여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예수 죽은 것과 지금 사도 바울하고 수십 년의 간격이 있지요. 그죠? 그렇다면 죽은 이순신 장군을 지금 짊어 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지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를 과거의 예수를 이렇게 기억해서 지금 2000년에 내가 믿습니다! 이런 식으로 믿음을 따내서 구원받으려고 합니다.
그런 믿음은 없습니다. 그것은 가짜입니다. 가짜 신앙이예요. 왜냐하면 진짜 신앙은 뭐냐하면 예수하고 우리 사이의 2천년이라는 갭(gap간격)이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2천이라고 하는 것은 숫자에 불과합니다. 2천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시간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나타나는 육적인 현상, 육적인 어떤 습관입니다.
이것이 시편에 나오죠. 우리의 삶이 70을 살던 80을 살던 주님에게는 뭡니까? 한 줌 밖에 안 되지요. 너는 12살, 나는 서른 살, 이것이 의미 없습니다. 2천년이 의미가 없어요. 왜 의미가 없느냐? 예수님의 부활은요 시간과 공간을 완전히 까부수고 무시합니다.
2천년되었다고 믿음이 작아지는 것도 아니고 산속에 있다고 믿음 없는 것도 아니고 불교, 절에 있다고 신앙 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가능케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예수 죽인 것을 짊어짐은...’ 입니다.
‘예수 죽었다’를 세자로 하면 뭐가 되겠습니까? ‘십자가’죠. 예수 죽은 것을 짊어 졌다 이 말은 그 때부터 세상을 공격할 때 네가 나서서 (공격)하는 것이 아니고 네 속에 이미 침투한 십자가의 놀라운 능력이 너를 가지고 십자가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관계하겠다! 관계.
네가 주책없이 나서지 말고 네 속에 십자가 능력이 너를 통해서 발산되는 그 힘으로 네가 이 땅에서 무슨 짓을 (하든지) 하도록 다 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 죽인 것을 짊어지면 우리는 무엇에서 벗어납니까? 책임감이 없어지죠. 책임감이 없어지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면...
따라 해 봅시다 ‘예수님의 공로’라 합니다.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받습니다. 예수님의 공로라는 말은 무엇을 전제로 하느냐면 우리에게 대한 ‘모독’, 또 ‘모독’. 우리 가치에 대한 ‘모독’, 모멸이죠. 천명을 전도해도 박살 내 버리고, 천명을 칼로 찔러 살인했다 해도 그 것도 박살내버리고, 선이든 악이든 그것을 일체 문제 삼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네가 악했느냐 착했느냐가 아니라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받습니다. 그 말은 무엇이냐 하면 지금 예수님이 나를 갖고 논다는 뜻이예요. 그 분이 쳐들어와서 나를 가지고 놀 때 그 때 우리는 ‘내가 누구냐?’를 자기에게 묻지 마세요. 내가 누구냐를 묻는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나는 지금 어디까지 왔니? 그것 묻지 마세요. 내가 누구냐, 어디까지 왔느냐, 내가 몇 살이지, 내가 사는 곳은 어디인지, 내가 몇 평짜리 아파트에 사느냐... 이런 물음이 의미가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누구냐는 없어지고 무엇으로 바뀌느냐? ‘나는 주의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나는 주의 것’이기 때문에 따로 독립해서 ‘나는 누구이지요? 나는 어떻게 살면 되지요?’라고 묻는 물음을 허락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자살하는 이유가 뭔지 알아요? 살면서 내가 누구인지 모르니까, 삶 이후 죽은 뒤에 내가 누구냐(를) 기어이 밝혀내려고 약 먹고 자살하는 겁니다. 자기가 누구냐를 모르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가 누구냐 관심 없으면요 늙어 죽지 그냥 죽지(자살)는 않거든요. 기어이 성급하게 자기를 앞당겨서 스스로 죽이겠다는 말은 ‘도대체 내가 누구냐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 뒤에 따라 나오는 것이 내가 누구냐를 모르면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도 모르고, 왜 내 인생은 힘든지 이유를 모르겠다하고, 왜 나는 날 때부터 부모가 없는지 그 이유도 모르겠다하고, 나는 왜 하는 일 족족 안되느냐, 그 이유도 모르겠다 하고.. 이 전부 다는 결국 ‘내가 누구냐?’를 모르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누구냐?’를 묻는 순간 그것은 마귀의 시험에 빠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누구냐를 물을 필요가 없게 만들었어요. 뭐냐하면 ‘너는 이미 주의 것’이기 때문에 주의 것으로 확정되었기 때문에 따로 내가 독자적으로 내가 누구지요? 라고 물을 필요가 없다니까!
이미 주의 것임을 아는 사람이 왜 묻겠습니까? 이게 콜라거든요. 콜라가 저에게 이야기 합니다.
콜라; 목사님
나; 왜?
콜라; 저 콜란데요...
나; 그래, 왜 무얼 묻는데?
콜라; 제가 누구죠?
이렇게 묻지를 못하잖아요. 사람들은 주님이여 지금 내가 이래 살아야 되겠습니까? 내가 왜 이 모양입니까? 교회도 안 다니고 왜 이렇게 합니까? 내 생활이 왜 이렇게 힘듭니까? 라는 질문들을 줄여버리면 뭡니까? ‘하나님 내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나를 힘들께 합니까?’ 바로 그 질문입니다.
그런데 그 질문을 허락치 안는다니까요! 너는 그런 질문을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거예요. 왜? 이미 십자가가 너와 함께 죽었고 너는 십자가때문에 이미 죽은 자로 간주되기 때문에. 죽고 그리스도의 것으로 살아났기 때문에 그런 질문조차도 우리에게는 부질없는 질문이 되는 겁니다. 그것을 늘 느끼고 살아가십니까?
그러니 사도바울의 고린도후서 4장 얼마나 중요한지요. 정말 중요합니다. 소위 믿는다, 나도 한 신앙한다, 나도 전도 좀 한다, 백날 사람들이 이야기해도 이 고후4장 10절에서 12절 들이대면... 전부 다 넘어갑니다. 전부 다 이단입니다. 전부다 가짜들입니다.
11절봅시다. ‘우리 산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또 나오죠. 누가 누구를 넘긴단 말입니까? 넘기는 자가 누굽니까? 성령이죠. 예. 예수님, 성령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께서 우리를 죽음에 넘기는 이유가 뭡니까?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의 무슨 육체? 우리의 ‘죽을 육체’예요. 그러니 우리는 진작 죽어도 상관없는 육체예요. 죽을 육첸데 우리가 살았다는 것은 무엇때문에 살았다? ‘예수님의 공로’로 산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는 아직도 살아있습니다. 예수님의 공로로 산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공로... 아! 이 말은요 천번을 들어도 싫증나지 않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공로로... 사람이 모든 근심걱정이 오는 경우는 예수님의 공로에 관심이 없어졌을 때, 얼굴 돌릴 때, 근심 걱정이 옵니다. 예수님의 공로에서 얼굴 돌리고 다른 사람을 통해서 내가 누군지 파악하려 할 때 근심 걱정이 오고 마귀가 옵니다.
일곱 귀신의 일곱 배인 사십구명의 귀신이 다 들어옵니다. ‘내가 쓸모 있는 인간이 되어야 겠다! 내가 저 사람에게 가치 있는 인간이 되어야 겠다!’. 가치 없는데 자꾸 가치 있어야 되고, 쓸모 없는데 쓸모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마귀에 큰 시험이 들어서 고민에 빠지고 결국 자살로 이어집니다.
여기 담배피우는 문제 아이들 있잖아요. 가들 딱 깨놓고 하는 모든 행동이 뭐냐? ‘선생님 또는 목사님, 저... 내가 누굽니까? 일찍이 부모 여의고 나 왜 이래 사는지 뭐 도대체 내가 뭐길래 남들은 저래 사는데 도대체 내가 얼마나 벌을 받았길래 이래 살아야 됩니까?’. 그래서 반항조로 이런 행동을 합니다.
결국 한마디로 뭡니까? ‘내가 누구냐?’를 모르겠다 아닙니까. 그래서 ‘내가 누구냐?’를 찾기 위해 오토바이도 타고, 훔치기도 해 보고, 때려 보기도 하고(저 놈이 쎄나 내가 쎄나 한 번 때려보고), 돈도 빼앗아 보고... 결국 이것은 뭐냐하면 ‘아! 나는 저 놈보다 낫구나!’
자꾸 내가 뭔지 몰라서 나를 어느 위치에 밖아 넣을지 몰라 적당한 위치 내가 만족하는 위치에 자기를 집어넣기 위해서 자꾸 모험을 하고 도전을 하고, 남이야 피해 입든지 말든지 자기 괴로움만 거기다 자꾸 분풀이 하듯이 칼질하는 거예요. 칼질하고 도둑질하고 나쁜 짓 골라서 하고...
내가 뭔지 모르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 보면 ‘네가 누군지 알 필요 없다!’는 거예요. 가만히 있으면 지옥에서 땡겨주는 놈은 지옥가게 되어 있고, 내가 몰라도 천국에서 땡겨주는 사람은 만날 십자가 알게 되어 있고... ‘아, 나는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구나!’ 알게 되어 있고... 그런 겁니다.
그 다음에 ‘죽을 육체에...’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매일 한끼 두끼 먹는 것은 누구 공로냐 하면 ‘예수님의 공로’입니다. 예수님의 공로라는 말은 아까 말했듯이 무엇을 모독한다? 나의 가치와 나의 인격을 완전히 ‘모독’하는 말이죠. ‘저 착한 일 했거든요...’ ‘에라이’. ‘저 나쁜 짓 했거든요...’ ‘에라이’. 착한 짓해도... 나쁜 짓 해도... 아무짓 안하고 가만히 있어도.. ‘에라이 니는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를 모독하는 거예요... 나는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받아요. 이거 살아 생전에 여러분 증거 지금 하고 계실 줄 믿습니다. 국토순례 하면서 증거하세요. ^^ 예수님의 공로로...
그 다음 12절 봅시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 역사하고...’ 야! 이거 또 어렵다! 사망은 우리 안에 역사하고... 예수 믿고 나면 나는 사망은 이제 물 건너 간 줄 알고 ‘사망, 바이바이!’ 한 줄 알았더니만 천만의 말씀... 예수 믿고 난 뒤에 사망이 우리를 떠난 것이 아니고 ‘사망이 본격적으로 우리 안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역사하고 있습니다.
부글부글 끓고 있으니까 우리는 죽는 것이 무섭잖아요. 예수 믿어도 죽는 것이 무섭잖아요. 굶어죽는 것도 무섭고 ???도 무섭고, 교통사고 나는 것도 무섭고 강도도 무섭고, 도둑도 무섭고, 죽는 것이 무서워요.
그런데 죽는 것이 무서워야 되요. 왜? 무서워야 우리는 뭘 안다?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알지요. 그래서 우리는 약해져야 됩니다. 어떤 가수가 노래했어요. 약해지면 안된다고... ‘여자여자여자’(?)라는 노래에 ‘여자여 약해지면 안된다’는 가사가 생각나네요^^.
약해야 돼요! 얼마나 약한지... ‘약한 중에 나는 강함이라... 내가 약한 것이 주의 은혜라... ’ 이것이 고린도후서 뒤에 나옵니다. 약하면 약할수록 주님의 은혜는 더욱 더 높아지니까... 약한 재미로 삽시다! 아무것도 내 세울 것 없는 재미! 사망이 내안에 크게 역사한다는 재미!, 그래서 지금 너무 역사해서 스데반 집사처럼 지금 굶어 죽어도 주께서 나를 영접하신다는 그 재미!.
이것이 ‘자유’입니다. 이것이 근심 걱정 두려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짓굳게도 얄굳게도 12제자에게 무엇을 갖지 말라? 전대를 갖지 말고 두벌 옷을 갖지 말고 그 다음에 그들을 늑대 안에(소굴에) 집어넣지요. 왜 그렇습니까? 약해지라고!. 얼마나 세상이 무서운가 알라고!, 절대로 네 힘으로 못 버틴다고!, 그리고 니가 말한 것은 니가 말한 것이 아니고 니 안에 누가 말한다? 니 안에 성령께서 이야기 한다!는 겁니다.
이렇게 보면 지금 이야기 한 모든 것은 교회하고 아무 상관이 없어요. 교회 통해서 구원받지 하고 아무 상관도 없어요. 교회가 아니고 주님이 찾아와서 구원받는 겁니다. 주님이 찾아 온 사람을 성경에서는 교회라 합니다. 교회라는 것은 결과적인 개념이예요. 교회 만들어 놓고 채우고 이게 아니라 주님이 찾아 온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그게 교회예요. 결과적이예요. 그래서 두 세 사람이 있는 곳에 내가 함께 있다. 오늘도 숫자가 그 정도 되는데... ^^
자 그렇게 보고 한 번 붕 뛰어 봅시다. 진도는 나가야 맛이니까. 여기 15절에 보면 ‘모든 것을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은 은혜가 망하는 사람에게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그래서 은혜가 망하는 사람에게 감사함으로... 정말 주님께 감사하는 사람이 많으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그 말입니다. 이것은 그렇게 아니까 넘어가고요...
16절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이제 낙심 안 할 이유가 있죠. 뭐냐하면 그 사람은 뭐 해야 합니까 후패해야 되죠. 그렇다면 좀 어렵게 해 봅시다. 육은 육으로 해결이 안 됩니다. 왜? 육에는 사망이 작용해야 되니까. 사망이 역사해야 되니까... 육은 죽을 육이기 때문에 육이 육을 해결 못합니다.
그런데 육체(육신)에 가장 가까운 학문이 뭡니까? 신학이나 성경 빼놓고 일반 학문에서 육체와 가장 가까이 있는 학문이 무슨 학문이죠? 생물학, 지리학... 여러가지 중에서 뭡니까? 의학이죠. 그죠? 목사라고 병원에 안 갑니까? 가죠. 가잖아요. 장로 병원에 가죠. 천하의 선지자도 아프면 병원에 가죠. 그러면 결국 그들은 아무리 신앙이 어떠하고 뭐 중도 불경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아프면 어디가야 됩니까? 아프면 병원에 가야되고 의학을 의존해야 되겠죠.
그게 상당히 재미있잖아요. ‘죽으면 죽으리라!’가 아니라 ‘죽으면 살리라!’하고 병원에 간다 이말입니다. 그러면 이 육신의 최고 책임자는 교회나 절간이 아니고 결국 뭐가 되요? 병원이죠, 병원. 그러면 지금 뭐가 진리에 가장 가까워요? 신앙이 진리에 가장 까가운 것이 아니고 의사들이 알고 있는 의학이 가장 실감나게 현실적이고 실재적이라는 생각... 든 적 없습니까?
아프다고 기도해 낫는 것이 아니고 약 한 첩 먹으면 된단 말이죠. 약사나 의사나. 그러면 약사나 의사나 그 사람 의견을 한 번 따라봅시다. 지금 우리가 고린도후서 4장 하지만, 요걸 잠깐 접고, 지금 이걸 덮어버리고 의사나 약사가 생각하는 인간의 육체, 육은 뭐냐?
그들은 어떻게 육의 문제를 해결하느냐? 그걸 잠시 생각해 보자 이말입니다. 인간은 200조개의 세포로 되어 있습니다. 이 세포는 누구로 부터 공격을 받아요. 2가지 공격을 받는데 하나는 여러가지 공격이 있는데... 곰팡이도 있고 박테리아 그 다음에 바이러스의 공격을 받습니다.
곰팡이는 여러분 다 아시고... 버섯 같은 것. 박테리아와 바이러스의 차이점은 박테리아는 자가번식, 자가복제가 되는 것을 말하고, 바이러스는 남의 세포에 기생하여 기대어 덧붙어서 사는 것이 바이러스라 합니다. 이런 차이가 있는데... 이 박테리아, 바이러스가 뭐를 공격합니까? 200조개의 세포를 공격하지요. 그러면 이것을 한 자로 뭡니까? 병이 생기는 겁니다.
병이 생긴다고 하는 것은 세포가 죽는다 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지금 예수믿고 육체가 후패하지 않으려면 신학을 버리고 뭘 해야 합니까? 의학을 해야 되죠. 의학을 하고 의사가 되면 물론 안 죽기야 하겠습니다만은 그래도 뭐는 알아요? 자기 신체, 육에 대해서 남보다 더 빠삭하게 아주 잘 알겠지요? 적어도 목사보다... 육에 대해서... 더 잘 알겠지요.
심지어 이 박테리아, 바이러스는 내성이 생겨서 항생제로 죽여도 그 다음에 약을 주면 약이 안 먹혀요. 자기도 살려고 저항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도 성경연구하지 말고 무엇을 연구해야냐면, 의학을 공부해서 육을 육으로 살리는 방법을 강구해야 될 겁니다.
강구를 하지 않으니까 우리는 애들 아프면 어디를 갑니까? 약국에 가든지 병원에 데려가죠. 뭐냐하면 ‘야, 목사의 수준으로서는 안 되겠다. 저 의사한테 의지해 봐라’, 육신에 관한 문제이니까. ‘약국에 가서 약사 조언 듣고 약 한재 지어먹어라.’ 그러면 애가 ‘아니, 그러면 목사님은 육이 뭡니까? ’ ‘애야, 내가 육에 대해서 아는 것이 뭐 있어야지... 내가 의사가?’ 이러면서 의사에게 맡기죠.
자, 그러면 성경은 거기에 대해서 뭐라고 합니까? 그러면 이 의학의 문제점... 의학이 그러면 진리입니까? 진리 아니죠? 그러면 의학이 진리가 아닌 이유를 대 보세요... (청중대답; 의학을 하는 사람도 죽으니까...) 예, 저 비슷한 말인데요... 요 성경 그대로 하면 그 사람은 후패하나... 할 때, 저의 답변을 한 번 들어 보세요. 그 사람은 후패하나,,, 하는 것이 우리와 상의해서 주께서 하시는 말씀입니까? 주님이 일방적으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고 한 거예요? (청중대답;일방적으로...) 일방적이죠.
그러면 의사는 지금 무엇을 거부하는 거예요? 주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거예요. 불신자 의사가 하는 말이 ‘어이 예수야, 어이 하나님, 니가 아무리 말씀을 해도, 나 니말 안 듣는데이... 내 육체 내가 알아서 살린다. 물론 천년만년 살겠다는 것은 아니고 살 때까지 살겠다는데 니 간섭하지 말거래이’ ‘니가 뭐 니 ???(38분41초) 더라’ 라고 하는 이야기도 목사님 말대로 그 인간 죽죠.
그러면 인간은 죽는 것이 당연합니까 죽는 것이 비정상입니까? 죽는 것이 당연하고 정상이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신앙생활을 어떻게 해야되요. ‘죽는 것이 당연하다!’, 부터 신앙 생활을 시작해야지요. 돈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오래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해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결혼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왜 주의 ? 아직 살아 있습니까 라는 물음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해야지요.
이게 사도바울 아닙니까. 주여 오늘 왜 육이 살아있습니까? 우리 애 둘은 왜 살아있어요? 오다 뒤져버려도 할 수 없죠. 그 사람은 후패할 사람이고 말씀대로 되니까... 이미 사망은 우리안에 역사하잖아요. 사망이 역사하기 때문에 오늘부로 역사 끝나면 참새떨어지듯 죽어야 됩니다.
그런데 사망은 역사하는데 내일까지 산다면 그것은 누구 덕입니까? 죄 없으신 생명이 죽은 우리 위에 역사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그 것 때문에 사는 거예요. 그러면 불신자는요? 마귀의 그 것 때문에 사는 거예요. 왜? 성경에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은 살아 남아있다. 이것이 약속적 개념의 성경관점입니다.
사람은 없어요. 철도의 두 노선처럼 끝가지 갑니다. 뱀의 후손이 생생하게 살아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여자의 후손의 가치가 드러나니까... 여자의 후손이 생생하게 살아있아야 합니다. 왜? 뱀의 후손이 아무리 쎄도 거기서 탈출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에... 십자가의 공로로... , 예수님의 공로를 증거하기 위해서 뱀의 자손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이단들이 활동을 해야 됩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뭐냐 하면... 살려달라고 할 것이 아니고 ‘이상합니다! 왜? 살아있습니까? 아직도!’ ^^ 그래서 주기도문에서 무슨 양식이라 했습니까? 세상에 ‘일용할 양식!’. 완전히 출애굽아닙니까. 출애굽은 그것을 배워 준 거예요. 이틀치가 허용이 안 되었습니다. 하루만 살아라 이 놈들아. 마태복음 6장 산상설교에 뭐라 되어 있습니까? 내일 염려는 언제하고? 내일하고... 오늘 염려는? 오늘로 결재 마감해 버려라!. 오늘로 끝나 버렸다.
이 말은 과거의 잘못을 지금까지 갖고 있는 것은 바보 등신이예요. 주님께서는 오늘 살려주는 역사가 있는데 과거에 자기가 잘 해서 지금까지 끌고 왔다는 거예요. 내 힘으로 내가 끌고 왔다는 겁니다. 아까 처음 강의할 때 뭐라 했습니까? 인간은 무엇의 산물? 과거의 산물. 이게 얼마나 바보 등신같은 사고 방식이예요!
그래서 과거가 있기 때문에 복수라는 것이 있고 어려서 누구에게 상처받은 것 복수하려 하고 죽은 아버지 무덤에 소주 한병 가지고 가서 ‘아버지 제가 출세해서 왔는데 왜 죽으셨습니까’ 죽은 사람 무덤붙들고 헛 된 짓 하고... 환상이예요. 환상!.
결국 마귀가 매일 우리에게 환상을 심어 주었어요. 성경은 안 보고, 그 대신 드라마를 통해서 환상만 가득 심어서 건전하고 괜찮은 환상으로 내가 새롭게 나인 것을 확립하려고...
사도바울에 의하면요, 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다 가짜예요. 다 가짭니다. 그래놓고 지는 신앙생활 했다고... 신앙생활 하면 안 되요. 하면 안 됩니다, 왜? 하면 환상을 낳아요. 신앙생활하지 말고 ‘예수의 것이 되면 그게 곧 신앙’입니다. 신앙은 결과적인 거예요. 주의 선물로 오면 신앙인이 되고, 믿음이 선물로 안 오면 신앙인이 안 되고... 그냥 신앙생활하려고 애쓴 것 밖에 안 되고. 가짜죠.
이미 우리는 후패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살았거든 보너스 받은 걸로 아셔야 되요. 살게 된 이유도 없어요. 아무 이유 없어요. 무이자예요. ‘무이자, 무이자, 아무 이유 없어...’ ‘대출은 계획적으로... ’ 대출은 계획적으로 할 필요도 없어요. 그냥 아무 이유 없어요. 그냥 창세전에 구원한 거예요. 우리와 의논해서 구원한 것이 아니고 누구 구원하기로 작정하고 그 구원에 합당한 인간을 새롭게 만들어 낸 것이 저와 여러분들 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에 살 다 보니까, 아담의 죄를 ??보니까, 우리는 남들처럼 환상에 완전히 뒤집어져 버렸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과거의 산물입니다. 과거에 내가 이래 있었으니까 지금은 더 나아야 한다, 자꾸 과거와 견주며 살아갑니다. 그거 날마다 깨어져야 되요. 우리는 미래가 땡겨서 살지 과거가 밀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가 지금 땡기고 있어요. 마구 마구 땡깁니다. 우리가 가기 싫어도 마구 땡겨요.
그 다음에, 4:16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이렇게 되어 있지요. 이제는 이 말이 이해가 되요. 앞에 10, 11절이 이해되어야 이 말이 이해가 되요. 4:17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그러니까 우리고 하여금 환란에 있도록 한 것은 큰 것이 있음을 알려주기 위함이니...
18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야! 이 말씀이 얼마나 귀한 말씀인지... 이것은 제가 일어서서 시범을 보여야 합니다. 자 보세요. 사도바울이요... 과거의 산물이라면, 이것이 과거입니다. 그 뒤에 미래가 있다면, 이래 본다면... 돌아보면 미래가 보이잖아요. 그러니 이래 보는 것은 아니예요. 지금 어디를 보냐하면 미래를 쳐다보기 때문에 과거라 하는 것은 과거를 보려면 어떻게 봐야합니까? 뒤돌아 봐야 과거가 보이죠.
그러니까 지금 사도바울은 이렇게 미래를 보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돌아보는 것은 그 따위 것은 신경쓰지마라 그 말이죠. 과거에 무슨 큰 일을 했든지, 과거에 신데렐라처럼 살았든지, 과거에 백설공주처럼 살았든지, 잊어버려라 말이죠.
‘저, 사모님은 처녀 때는 아주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신 것 아닙니까?’ (청중남편?;저한테 시집오고서 다 잊고 삽니다 ㅎ ㅎ ). 잊어버려야 되요! 안 잊어버리면 ‘복수’ 복수 안되면 자살입니다. 복수가 되면 자살 한 하고, 복수가 안 되면 자살해요. 복수가 되면 성공했다고 또 또 ... 진행형이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뭐냐하면 나를 지금 후패케 만드는 능력이 어디서 오는지 쳐다보고 있는 거예요. 그게 지금 하늘나라 정비소에서 교체작업에 들어가는 거예요. 중고를 교체작업 하려면 중고가 와야 새것으로 바꿀 것 아닙니까? 그래서 땡기는데 뭘 땡기느냐 중고품 땡기고 있는 거예요.
중고품을 크레인으로 땡기고 있어요. 야, 빨리와. 빨리와. 빨리 교체해야지. 빨리해야지가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나옵니다. 8절에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차라리 교체하는 것이 낫다, 말입니다. 이 몸 가지고 살려고 애쓰는 것 보다 차라리 ‘빨리 좀 땡겨 주이소’. 나 돌아보기 싫어요. 빨리 땡겨 주이소.
나를 현재 후패케 해 주시는 그 능력을 나는 고맙게 여깁니다. 왜? 날로 늘 새로운 것이 여기서 있으니까... 불신자는 땡기는 것이 없으니까 날로 새로운 것이 없으니까 구차없이? 과거 붙들고 보복하듯이 복수하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복수한다고 총 들고 하는 것이 아니고요, 복수가 딴게 아닙니다. 사촌들아 한 번 봐라, 내 얼마나 성공하는 지 봐라! 이게 복숩니다. 동창들아 니 내 무시했지. 내 느그들보다 더 좋은 차 탄다. 이게 복숩니다.
전부다 무엇의 산물? 과거의 산물이죠. 내가 나를 천국에서 밀어내겠다는 부질없는 짓이예요. 그런데 성령이 땡겨버리면 내가 나를 구차이? 안 밀어도 땡겨주는 힘이 강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쪽으로 지금도 쉬지 않고 끌려가고 있습니다.
18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말이죠. 사도 바울이 지금 양쪽을 다 보고 있어요. 양쪽을 다 소개하고 있어요. 보이지 않는 것과 보는 것 다 양쪽 다 보면서 자기는 뭐 한다? 뭐는 잠깐이고? 현재 있는 이것은 잠깐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고.
참, 사도바울 완전히 예수 이야기밖에 안 해요. 교회 부흥 얘기 안하고 뭐 밖에 ‘자기 안에 예수님이 지금 살아있다!’ 그 이야기 밖에 하지 않죠.
자, 5장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많이 피곤들 하시니까... 5장1절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이 거 한 번 설명해야 겠네요.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여기서 땅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그러면 사도바울이 땅이라고 했을 때 무슨 뜻이냐 하면 이미 천사에 의해서 멸망 대상이죠, 요한계시록 2장에 나오죠. 이미 이 땅은 골로새서에도 나오잖아요. 이미 이 땅에서는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는지라... 땅과 하늘을 이렇게 둘로 쪼개서 땅은 뭐냐? 땅은 무슨 짓을 해도 땅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일체 없는 곳. 나를 구원시켜주는 곳이 없는 곳. 이 땅의 세계에서 우리의 장막집이... 그 다음에 뭡니까? ‘우리의 장막집이... ’ 무너지죠!
이 무너진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다시 세울 마음이 없다, 이 말이예요. 이 땅에 있는 우리 육체를 다시 세울 마음이 전혀 없다. 무너지면 무너지도록 놔 둬 버려요. 5:1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결국 이 한 문장에 뭐를 완전히 도외시합니까? 소위 땅에서 나오는 모든 일 개척교회를 하든 약국을 하든 병원을 세우든 하여튼 땅에서 뭐 프로야구 누가 이기고 박찬호 어떻게 되고 박지성이가 무엇을 하고 이 땅의 것은 어떤 것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는 데 전혀 보탬이 된다 안 된다? 전혀 그것은 해당 사항이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공로하고는 아무 해당사항이 없습니다. 다만 이 땅은 우리와 함께 무너지게 만든다, 이 말입니다.
5:2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 사람은 완전히 무엇을 보느냐면 과거를 탄식하면서 탄식하기 때문에 간절히 사모하고... 이것은 결국 뭐냐하면 아예 이 땅을 포기한 사람에게서만 이러한 마음가짐이 나오겠죠.
어떤 미련을 (갖고) 더 얻을 것이 없다고 확정 된 사람. 이 땅의 것에서 더 이상 아무것도 나올 것이 없다는 것을 이미 아는 사람에게는 사모하기를 하늘 것만 사모한다는 말입니다.
자 그렇다면, 아까 다시 봅시다. 인간은 무엇으로 되어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으로 되어 있죠. 시간은 뭐다? 우리는 과거의 산물이고... 공간은 현재 내가 끌어 모아 놓은 것. 내 소유, 재산, 친구, 자식, 내 부모... 나를 둘러싼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것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은 현재 내가 지금 뭐합니까. 내가 지금 후패하죠. 후패하는 데 이 땅의 것들이 나의 후패를 도와 줄 필요가 없죠. 왜냐하면 후패하는 것을 결정하는 힘은 땅에서 오는 힘이 아니고 어디에서 오는 힘이다? 지금 하늘에서 이런 능력이 오기 때문에 후패에 대해서 아쉬워한다든지 이것을 괴앙히 괘씸해 한다든지 이것을 원통해 할 필요가 없다 이 말이죠.
만약에 이 후패가 원통하면요 이 거 구원받으려고 할 거 아닙니까. 삼촌 좀 도와주소, 아버지 좀 도와주소... 할 거란 말입니다. 그리되면 이 후패를 뭐 해야되요? 이 후패를 지연시키는 기능 밖에 안 하죠. 그러니 이건 결국 뭡니까. 하늘의 것을 사모한다, 안 한다? 별로 하늘을 사모 한 한다는 뜻이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자꾸 우리가 땅의 것을 붙잡으면 잡을수록 붙잡는 것을 때려부수워서 우리로 하여금 방향을 어디로 바꾸게 합니까? 하늘의 것만 사모하는 방향으로 우리를 지금 몰아 넣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이야기예요. 그것도 기쁘게 즐겁게 아무 염려없이...
5장4절 끝에 봅시다.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함이라...’ 죽을 것이 누굽니까? 후패한 우리죠. 후패한 우리가 어디한테 삼킨다? 생명에 삼킨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죽을 것을 하나의 ‘새우’라고 합시다. 삼키는 것은 ‘고래’라고 합시다. 죽을 것은 진입?해야 돼요. 저를 삼켜달라고 들이메야? 되요. 그러면 생명에 삼킨 것이 되죠. 현재 이것이 바로 아까 이야기한 사망은 우리 속에 역사하고 생명은 죽을 육체인 우리에게 역사하죠.
이렇게 사니까 이미 이 사람은 세상의 것에 미련을 두지 않으니까 마음 껏 무슨 일을 할 수 있느냐... 그럼 자살할까요... 자살이 아니고 마음껏 무슨 일을 할 수 있어요? 생명의 일을 마음 껏 할 수 있습니다. 왜? 자아가 방해가 안 되니까... ‘내’가 주의 일에 방해가 안 되니까 주님은 나를 통해서 마음껏 주의 일을 할 수 있는 겁니다.
내가 따로 독립적으로 살려고 하면 방해가 되겠죠. 그런데 이미 나는 죽은 자로 간주하기 때문에 죽은 자로 간주시켜서 주께서 마음껏 나를 통해서 여러분을 통해서 일하도록 조치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후패케 하는 겁니다. 후패케하고 세상 것을 생각지 않게 하는 겁니다.
그 이유가 뭐냐면 바로 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예요. 우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를 사용해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여기 5장7절에 유명한 말씀이 나오죠.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한다...’ 이것도 말이 어렵죠. 여기 믿음으로 행한다는 말에 뭐가 포함되어 있습니까? 믿음도 포함되어 있고 또 뭐가 포함되어 있습니까? 행함도 포함되어 있죠. 그런데 뭐가 뭘 삼키죠? 믿음이 뭘 삼킵니까. 행함을 삼켜버리면 요 행함은 사라지고 뭐가 나와요? 믿음만 나오게 되요. 믿음에게 삼켜지는 행함을 우리는 믿음의 행함이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 + 행함’ 이렇게 되면 안되죠. 왜냐? 이것은 안 삼켜진 것이니까. 이건 이단되는 겁니다. 믿음따로 믿어야되고 행함 따로 행해야되는 것은 이단입니다. 믿음에 의해 삼켜지는 그 행함이 있을 때 그것만이 믿음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물을 때 무엇을 물어야 되요? 믿었으니까 행하라? 둘 다 묻는 것이 아니고 뭐만 물어면 됩니까. ‘믿습니까?’라고 물으면 됩니다. ‘믿습니까?’ 하면 ‘믿습니다’.
그 다음에 (5장7절)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라, 되어 있는데... 그러니까 믿음안에 뭐가 포함되어 있다는 말입니까? 보이는 것을 포기했다 해야 이 말이 성립됩니다. 뭔 뜻인지 알겠습니까?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한다는 말에는 보는 것과 뭐하고 반대가 된다? 내가 믿어야 될 것과 보이는 것과 같다, 반대다? 완벽하게 반대가 되는 거예요. 그렇잖아요.
믿기도 하고 보는 것도 하면 안 되잖아요. 나는 믿지... 보이는 것은 생각 안 한다... 이래야 말이 된다 이 말이죠. 나는 믿기도 하고 보는 것도 챙긴다... 이러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다 이 말이죠. 나는 믿음으로 행하지 보이는 것으로 하지 않는다... 이 말은, 보는 것하고 우리가 믿고자 하는 것과는 안 보이는 거다 말이죠. 안보이는 것을 믿어야 진짜 믿음이지 보이는 걸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말이죠. 그것은 행함에 해당된다 이래 되는 겁니다.
왜 우리가 보이는 것을 믿으면 안됩니까? 보이게 되면 보는 자가 누굽니까? 육체아닙니까. 육체는 후패해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후패해야 될 것을 보아서 뭐 할 건데요. 점점 후패해 가는데... 여기 녹음기가 있는데 이것이 고장나면 녹음하겠습니까. 고장 안 났으니까 녹음하고 있는거죠. 고장 났지만 믿는다... 이러면 곤란하다 말입니다.
고장난 육체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후패해야 되죠. 우리가 믿는 것은 우리는 죽을 육체이지만 살아 있는 육체에 의해서 삼킴을 당한다는 것을 보이지 않는 것을 우리가 믿고 그 믿음대로 우리는 행합니다. 그래서 여기 말씀은 요한계시록에 네 행한대로 구원받는다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요한계시록 22장12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일 한 대로 갚아주리라 하는 것은 행함을 강조한 것이 아니고 고후5장7절에 나오는 것처럼 믿음으로 행한 그 행함. 그걸 의미하는 겁니다. 부흥사들이 이것 가지고 사기치면 넘어가면 안됩니다.
지난 주 제가 설교 할 때에 십일조에 대해 언급했는데 여러분 십일조는 의와 신과 인을 더해서 십일조 하라 했는데 그렇게 십일조 할 사람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놓고 자꾸 십일조하라고 하니 의와 신과 인을 붙여서 십일조 할 사람이 이 세상에 아무도 없거든요. 예수님만이 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못합니다. 그런데다가 십일조하라고 우기니 얼마나 엉터리인지 말이죠.
자, 이거 하나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이것이 뭐냐하면 빨리 땡겨 주소! 경상도 말로... 아이구 땡겨줄거 빨리 땡겨 주소. 이미 우리는 죽은 인간인데 살아있는 자체가... 우리가 안 죽은 것이 기적이라는 거죠. 진작 죽어도 괜찮은데 주님이 살아 계시기에 우리가 살아 있는 거예요. 주의 것으로... 불신자들은 마귀의 것으로 살아있고...
그러니 하루하루 살는 것이 감사할 뿐이죠. 그래서 여기에 보면 ‘그런즉 우리가 거하든지 떠나든지... 그 다음에...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거하든지... 떠나든지... 벌써 사도바울이 이 말을 할 때에는 뭐냐하면 궁둥이가 들썩 들썩, 빨리 안 보내줍니까. 출석불러 주이소. 빨리 저 차 타고 가야 될 텐데... 저 사람이 먼저 새치기 하는 구나. 내가 죽어야 될 텐데... 들썩뜰석 차라리 담대하여 원하는 것은 차라리 이 몸을 떠나서 주와 함께 가는 그것이라.
그런 마음으로 목회를 하고 전도를 하니까 세상에 겁나는 것이 하나도 없잖아요. 세상에 내가 사람의 옷이나 귀한 것을 탐하지 아니하고, 남들이 잘 사는 것 부러워하지 아니하고, 궁둥이가 들썩들썩하는데 남 잘사는 것이 부러울게 뭐가 있습니까? 저택에 살아도 후패한 몸 가지고 살아야 될 테니까... ??? 내가 생생한 몸으로 큰 집 살면 몰라도 후패해가는 몸 가지고 저택에 살면 큰 저택이 내 몸의 후패를 돌이킬 수 없잖아요.
그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이 모든 것이 어디에서 나왔다? 우리가 주님을 가까이 간 것이 아니고 주님이 아예 나를 쳐들어 와서 예수의 죽은 십자가를 과거 이천년전 사건이 아니고 지금 우리 이 자리를 뭐로 만듭니까. 이 자리를 십자가 죽은 그 때 그 장소로 매일같이 만들어서, 여기 항상 우리가 예수 죽인 것을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서 나타나게 하려 하는 그러한 목적을 주님께서는요... 실수없이... 정말 오류없이... 지금도 잘 해 나가고 있으니까 우리가 너무 걱정하지 맙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일은 실수가 없고 실패가 없는데, 우리는 보이는 것을 보면서 혼자 겁내고 두려워하고 걱정하고 염려하고, 내일 일만 생각하면 두려움에 떨 수 밖에 없는 약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의 주님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 되었다는 것을 바로 알아서 이제는 나의 주님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주의 것이 됨을 안심 놓고 믿고 행하고 의지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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