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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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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언어분석과 종교관성경신학-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분석과 종교관

이름 : 이근호(IP:220.230.122.170)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언어의 한계와 종교

2007년 6월 6일 이 근 호 목사

Ⅰ 서론

원어 분석, 혹은 원어 낱말 분해에 설교에 사활을 거는 자들이 있다. 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자투리 철학행위를 하고 있는데 마치 성령의 도움으로 올바른 성경해석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자부하고 있다. 성경 원어 분해에는 아무 것도 안 나온다. 단지 “이토록 ‘나’ 정당함은 기어이 사수하고 말리라”라는 오기만 되돌려 나올 뿐이다. 십자가 앞에서의 자기 부정이 원어 분석을 통해서는 자동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왜 그런가? 이미 육적인 자기 철학이 원어를 파는 분석도구로 맹렬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여기 대단한 분석기구들이 분석철학, 혹은 ‘언어실증주의’라는 이름으로 동원되고 있다. 그들은 언어 안에서 완벽한 진리를 규명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덤벼든다. 그 언어가 코란이든, 불경이든 성경이든, 논어든 상관없이 다 적용된다. 왜냐하면 어떤 거룩한 책이 되었던 결국 문자와 낱말의 집합체로 되어 있고, 그 논리성은 인간의 논리성에 포착될 수 있다는 미련을 포기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Ⅱ 본론

1. 프레게(1848~1925)의 형식언어 주창

우리의 일상언어는 애매하고 다의적(多意的)이다. 이렇게 되면 전달되는 과정에서 옳고 그름이 불분명해진다. 어떻게 하면 이 애매성과 다의성을 제거할 수 있을까? 프레게라는 철학자는 논리적인 언어, 즉 기호언어를 발명했다. 소위 ‘형식언어’를 만들어낸 것이다. 모든 것을 논리학의 개념으로 환원시키겠다는 것이다. 수학뿐만 아니라 모든 학문 분야를 이루는 언어는 원자 명제의 진리치에 관련된 함수들이라고 보는 것이다. 거기서 연역적으로 도출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는 수학적 인식의 논리적인 연관관계와 구조를 분석하는 것이 철학을 비롯해서 수학, 심지어 종교경전까지 근본 진리 문제를 탐문하는 것으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여기서 우선 수학부터 손을 대었다. 수학을 논리학을 전환시켜 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현대 수리논리학이 탄생한다. 그는 논리학에 양화사量化詞 (‘모든’과 ‘어떤’)와 변수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했다. 일상 언어에서 보편성에 해당하면 ‘모든’, 특수성에 해당하면 ‘어떤’이라는 개념을 사용한 것이다. 또 특정 개념의 위치에 x, y와 같이 대체될 수 있는 변수를 도입했다.

예를 들어 ‘인간은 이성적이다’라는 종래의 철학적 문장을 수리논리적으로 표현하면 ‘모든 x는 y다’라는 식으로 진위 계산이 가능한 수학 공식으로 만들 수 있다.

전통적인 철학은 한 문장을 구성하고 있는 낱말의 의미와 그 연관을 밝힘으로서 그 문장의 의미를 찾았다. 하지만 주어와 술어의 관계는 그런 식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 유기적 연관을 밝혀내야 한다.

문장의 구조도 함수의 구조와 똑같다. 주어는 확정적이지만 술어부분은 불완전하다. 여기서는 ‘개념’과 ‘대상’을 구분하라고 요구한다. 프레게는 주어에 해당되는 것을 ‘고유명사’로 보고, 술어에 해당되는 것은 ‘개념어’로 보고, 고유명사가 지시 하는 것을 대상이라고 보고, 개념어가 지시하는 것을 개념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해서 문법적인 분석과 논리적인 분석이 상호 다르다는 것을 말했다,

고유명사와 개념어의 논리적 기능이 서로 다르고, 따라서 개념어는 문장의 주어부에 올 수 없는 것이다. 개념도 함수와 마찬가지로 불완전하고 다 채워지지 않지만 반면에 대상은 완전하게 채워진다. 이렇게 해서 대상은 문장의 주어로만 사용하고 개념은 술어에만 사용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예1) 소크라테스는 철학자다

예2) 철학자는 현명하다

예1)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지시하는 것이 대상이고 철학자가 지시하는 것은 개념이 된다. 하지만 그 동일한 철학자는 예2)에서는 대상이 된다. 따라서 고유명사(소크라테스)와 개념어(철학자)는 구분된다. 이처럼 표층적 구조(문법적 구조)가 심리적 구조(논리적 구조)를 어떻게 은폐하고 있는지도 밝혀낼 수 있다고 보았다.

이를 통해 어떤 형이상학도 배제한 논리분석철학이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논리분석의 방법이 확장되면 전통철학이 다루었던 형이상학적 존재론의 영역이 새로운 논리적 존재론으로 대체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처럼 기호 논리학을 통해서 언어를 재구성하게 되면 그 어떤 언어나 일상언어도 논리적 변형규칙에 준해서 그 진리치가 분명하고 명료하고, 참과 거짓이 확정된다는 것이다. 의미나 개념의 객관성은 언어 사용의 논리적 특성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예1) 소크라테스는 소크라테스다.

예2)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스승이다.

프레게는 표현의 의미와 그것이 지시하는 것을 구별한다. 즉 두 개의 표현은 동일한 대상을 지시하면서도 의미(sense 혹은 meaning)에 있어서는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meaning이라면 예1)과 예2)는 같다. 하지만 sense라면 예1)과 예2)는 같지 않다. 예1)은 정보적인 가치가 없는 반면에 예2)는 정보적인 가치가 있다.

또한 프레게는 '저녁 별'과 '샛별'이라는 표현을 고찰한다. 물리적 대상으로서의 샛별은 바로 저녁별이다. 만일 그것들이 동일한 것이라면, 그때 '샛별은 저녁별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샛별은 샛별이다'와 똑같은 것일 뿐이고, 이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가 천문학자일 필요도 없고 천문학에 관해 알아볼 필요조차 없다. 그러나 표현의 의미와 지시와의 구별은 '샛별'과 '저녁 별'이라는 표현이 동일한 대상인 금성을 지시하지만, 각각 서로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각각 서로 다른 방식으로 금성을 지시한다는 것을 우리가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하나는 '아침에 보이는 별'을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저녁에 보이는 별'을 의미한다. 그러나 양자는 다 같이 동일한 대상인 금성을 지시한다.

그러므로 샛별이 저녁별이라는 발견은 새벽에 보이는 별이 저녁에 보이는 별과 동일한 별이라는 발견이고, 그 발견은 천문학적 관찰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샛별이 저녁별이다'는 '샛별은 샛별이다'가 제공하지 못하는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그에 의하면 전통적인 철학자의 오류는 이처럼 맥락을 무시하고 오직 낱말만을 들여다보았기 때문에 생겨났다고 했다.

2. 러셀(1872~1970)의 동조

러셀은 프레게와 같은 의견을 가지고 시작한다. 모든 존재론적인 문제들은 언어의 참된 논리적 구조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발생한다고 했다. 예를 들면 모든 명제의 문법적 주어는 어떤 실체를 대표해야 한다고 가정한다면, 그 때 우리는 프랑스의 현왕(지금은 프랑스는 왕이 없음), 류들, 수들과 같은 사물들은 우리의 존재론에 포함되는 것으로서 인정해야만 한다.

우리는 언어를 통하여 세계를 기술(記述)하고 있는 것이다. 언어분석은 일상언어가 존재론적으로 오도적이기 때문에 필수불가결하다. 이것은 사람들이 스스로 말하는 것에 대하여 불충분한 근거를 가지기 때문이 아니라, 언어의 문법적 형식과 논리적 형식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것을 드러내는 것은 언어의 문법적 구조가 아니라 그 논리적 구조이다. 문법적 범주와 논리적· 존재론적 범주가 하나인 것으로 혼동하게 되면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러셀의 의하면 이름들은 지시하지 않는다. 개념이 지시하며, 언어속의 지칭은 이름이 아닌 기술에 의하여 성취된다.

문법적으로 주어-술어 형식인 명제 속에서 나타나는 한정기술이 개별자를 대신하는 기호라고 생각하는 상식적 견해를 채택한다면, 우리는 인정할 수 없는 결과들에 직면한다. 실제적인 세계에서 또는 어떤 가능한 세계에서 발견될 수 없는 그런 어떤 것은 우리의 존재론에서 매우 기묘한 첨가물이 된다.

하지만 ‘프랑스의 현왕(現王)은 대머리다’와 같은 명제는 주어-술어 형식이 아니다 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 때 주사를 대신하는 실체를 발견하려는 욕구는 경감된다. ‘프랑스의 현왕’은 이름이 아니기에 위의 명제의 주어로서 기능하지 않는다.

이처럼 프레게의 논리주의 전통에서 러셀은 좀 더 엄밀하고 그리고 좀 더 철학적인 방식으로 수학을 논리학으로 환원시키려 하고, 그 도구로서의 새로운 논리학의 체계를 완성시키려고 한다. 러셀은 철학적 분석의 방법으로서 기술이론(descriptive theory)과 이러한 기술이론과의 연관 하에서 드러나는 존재론적 함의를 가진 논리적 원자론(logical atomism)을 제시한다.

특히 그는 집합의 집합으로서의 수의 기초를 정초시키려 했던 프레게가 고려하지 못한 패러독스(역설)를 발견하고, 이에 나름의 답으로 유형론(theory of types)을 제시했다.

그리고 프레게가 말하는 문법적 주어로서 드러나는 정관사 기술구가 바로 그 자체로 완전한 고유명사는 아니라고 보고 그것은 더 이상 분석될 수 없는 직접지(acquaintance)의 대상으로 환원시켜야 한다고, 다시 말해 불완전한 부호를 완전한 부호로 환원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인식론적 함축을 지닌 기술이론으로부터 러셀은 논리적 원자론을 제시한다. 그의 기술이론이 함축하는 바는 전통적인 철학이 대부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왔던, ‘한 문장의 문법적 형식은 논리적 형식과 동일하다’는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점이다.

러셀은 기본적으로 논리학이 비록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특성들을 다룬다고 하더라도 실제세계와 관련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명제의 일반적 형식이 존재하며, 우리는 그러한 것들에 대한 인식적 근거로서 ‘논리적 경험’을 할 수 있다고 그는 주장했다.

결국 프레게와 러셀은 수학에 대한 논리주의적 태도로부터 수학을 일종의 불변의 실재인 논리적 대상에 근거지우려 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입장은 논리학에 대한 실재론적 입장을 취하게 하고, 결국 논리학을 일종의 대상에 대한 학(學)으로 만들었다.

3. 비트겐슈타인(1889~1951)의 비판

이들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비판의 핵심은, 논리는 대상에 관한 학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그것은 어떠한 관념적 실재 또는 어떠한 경험적 실재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프레게나 러셀이 말하는 의미에서의 논리적 상황, 즉 논리적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논리학은 더 이상 세계를 구성하는 사실 내지 존재의 궁극적 원리 또는 궁극적 실재를 탐구하는 과학이 아니다.

그러면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 논리란 무엇인가? 논리란 우리의 세계의 한계, 그리고 언어와 사고의 한계로 본다. 다시 말해 논리는 우리가 사고할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것의 한계라는 것이다. 그의 논의에 따르면 논리는 러셀이나 프레게와는 달리 대상적인 것이 아니라, 언어와 세계를 가능하게 해 주는 선험적(경험 이전)인 조건이면서 동시에 세계와 언어의 한계라는 것이다.

따라서 논리는 그 안에서 가능한 모든 것이 일어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으로, 더 이상 정당화나 설명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논리를 넘어서 논리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런 입장에서 언어의 계층성을 인정하는 러셀의 유형이론을 비판한다.

왜냐하면 논리는 우리가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그리고 사고할 수 있는 전제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사실이 구성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논리학의 명제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이 보여주는 바는 무엇인가?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논리학은 프레게나 러셀이 본 것과 같이 이성에 기초하며 사유에 의해 인지될 수 있거나 논리적 대상에 대한 직접지(知)를 통해 발견하는 원초적인 실제에 대한 학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논리학은 러셀이나 프레게가 파악한 것처럼 근원적인 논리학의 법칙이 실재하여 그것으로부터 연역해 낸 일련의 학적 체계도 아니다. 따라서 논리학의 명제는 경험적 세계의 실재나 대상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며, 세계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세계의 골격, 즉 세계의 형식적-논리적-속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그것의 참됨은 부호 자체로부터 인지될 수 있는 동어반복을 일반화시킨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러셀이 말하는 것처럼 어떤 자명한 원초적인 명제들이나 관념들로부터 이끌어내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논리의 필연성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논리학의 선천성은 우리가 비논리적으로 생각할 수 없다는 데서 성립된다. 다시 말해 논리학의 선천성은 우리가 비논리적으로 생각할 수 없다는 데서 성립된다.

다시 말해 논리학의 선천성은 우리가 비논리적으로 사고할 수 없다는 데서, 그 참됨은 사실과의 관계 속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에서 보여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논리학의 모든 명제는 각기 그 자신의 증명이며, 논리적 증명에서의 과정과 결과는 등가적이라는 것이다.

결국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의 핵심은 ‘논리학은 그 자신을 스스로 돌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논리의 정당화는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주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정당하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언어와 세계는 그림-그리는 관계에 있고, 그것들은 같은 중심을 갖고 관계 맺어져 있다. 또한 언어를 구성하는 요소명제들이 다른 요소명제의 참과 거짓을 결정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독립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세계 속의 사실들은 독립적이며 우연적이다.

즉 세계 내의 어떤 사실도 다른 사실을 필연적으로 일으키거나 사라지게 할 수 없으며 그것들 사이에는 어떤 선천적이거나 필요적 관계도 있지 않다. 이런 점에서 말 할 수 있는 것은 세계 속의 사실에 관한, 즉 우연적인 관한 것이다.

프레게와 러셀은 우리가 일방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데서 언어에 대한 오용 및 곡해가 발생한다고 보고 학적 엄밀성을 위해 의미의 확정성과 명제의 양극성을 기초로 한 이상언어(형식언어)를 구축하고자 했다. 물론 비트겐스타인도 이 명제의 양극성과 의미의 확정성을 전제로 하고 말한다. 즉 명제의 의미, 그리고 이름의 뜻은 확정적이어야 하며, 의미 있는 명제는 참이거나 거짓이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한다. 세계가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한 명제가 의미를 가지는지의 여부는 다른 명제가 참인지의 여부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논리적 부담이다. 뿐만 아니라 세계의 그림(참이거나 거짓인)을 그리는 것이 불가능해질 것이라고 말한다.

즉 언어를 구성하고 있는 명제가 참될 수 있는 가능성, 즉 의미의 가능성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언어 자체 내에서 참됨을 보증받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언어 외적인 것과의 연관을 맺음으로써 즉 세계와의 연관을 통해서 그 참됨을 획득하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 언어의 참됨 즉 의미의 궁극적 기반은 결국 언어 자체에 있기 때문에 무한퇴행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으며, 이는 언어의미의 궁극적 기반일 수는 없다. 따라서 그것은 언어 자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세계와의 관계맺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바로 이러한 언어의 의미가능성에 대한 고찰로부터 세계가 등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비트겐슈타인은 러셀과는 달리 경험적 탐구를 통해서가 아니라 언어에 대한 선험적인 고찰을 통해 세계에 대한 논의를 전개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언어는 세계와 어떤 관계를 통해서 의미를 가지는가? 언어는 요소명제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요소명제는 언어의 의미의 궁극적 단위체로서, 비트겐슈타인은 이 요소명제가 세계와 직접적인 연관을 맺는다고 본다. 그리고 이 요소명제가 아닌 다른 명제들은 이 요소명제들의 진리함수라는 것이다. 그 요소명제는 그는 ‘실재의 그림’으로 보았다.

한 낱말은 한 대상의 이름이며, 복합 명제(complex proposition)는 한 사실(fact)의 표현이고, 복합 명제가 분석된 최종적 형태인 요소 명제(elementary proposition)는 한 사태(stste-of-affairs)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명제들은 세계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라는 물음과 “명제들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라는 물음들은 “요소 명제들은 세계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와 “복합 명제들은 어떻게 요소 명제들과 관련을 맺고 있는가?”라는 질문의 형태로 바뀌어 질 수 있다.

이러한 질문의 답변으로서 비트겐슈타인은 요소 명제들은 논리 원자론적으로 분석되어진 최종적 형태이므로 더 이상 분해불가능한 원자적 사실들에 대한 ‘논리적 그림들’이며, 그리고 복합 명제들은 요소 명제들의 ‘진리 함수’라고 말한다. 상호독립적인 요소 명제들이 논리적 연결사들의 의해 결합함으로써 복합 명제를 구성하고 이들 복합 명제들의 진· 위는 요소 명제들 각각의 진리 함수에 의해 결정된다.

즉 언어의 기능을 세계를 그리는 것으로 본 것이다. 언어가 어떻게 세계의 그림일 수 있는가? 그것은 사고(思考)와의 연관을 통해서 가능하다. 그에 다르면 사고는 사실에 대한 그림이다. 그러나 사고가 어떻게 세계의 그림일 수 있는가? 그것은 세계 속에 사실의 구성요소인 대상들과 사고의 구성요소들이 대응하며 또한 그림이 그리는 사실의 일정한 방식처럼 사고의 구성요소들이 일정한 방식으로 관계함으로써 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명제가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명제의 구성요소인 이름들이 세계의 구성요소인 대상들과 관계, 즉 이름 부르는 관계를 맺음으로써, 그리고 명제에서의 그 구성요소들이 사실의 구성요소들이 서로 간에 맺고 있는 것과 같은 일정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음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 사태들은 서로 독립되어 있다. 필연적으로 오직 논리적 필연성만 있을 뿐이다. 더 나아가 한 요소명제가 논리적 조작을 통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경우 이외의 어떤 요소명제들의 진리함수적 결합으로 이루어진 명제도 필연적으로 참이거나 거짓이 아니며, 결국 복합적 사실들의 관계 역시 필연적이 아니라 우연적이다.

예를 들면, “사과는 달다”라고 누가 이야기하니 어떤 이가 “사과는 둥글다”라고 주장한다. 이 둘 사이는 상호 오류가 성립될 수 없고 독립적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어떤 이가 “사과는 빠르거나 슬퍼”라고 말하는 것은 오류가 된다. 이 오류는 오로지 올바른 논리적 공간 안에서만 오류로 알려질 수 있는 문제다.

이처럼 모든 대상은 논리적 형식 속에 놓여있으며 그 가능성의 공간이 논리적 공간이 된다. 결국 이 세계란 논리적 공간 내에서의 우연적인 사실로 구성되는 것이고, 그 사실은 반드시 세계가 지금 그대로 있어야 할 어떤 필연성을 띠는 것이 아님을 뜻한다.

이것은 곧 문법의 역할이 규범적이지 않아야 하는 말과 같다. 그 대신 문법은 순전히 ‘기술적(記述的)’이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기술적 성격이란 분석하고 정의를 내리는 대신에 사용의 맥락에서 우리 앞에 놓여진 것을 단지 기술할 뿐이다. 이것은 곧 언어의 다양성과 차이성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는 ‘가족유사성’( family resemblances)라고 부른다. 일반성을 지닌 본질 찾기를 이것으로 대신하자는 것이다. 가족 구성원은 가족이라도 결코 동일하지 않다. 그러나 코가 비슷하다든지, 눈썹이 비슷하다든지, 걸음걸이가 비슷하다는 가족 유사성을 나타낸다. 바로 이 유사성이 쌓여 문법을 이루고, 그 문법 안에서 서로들 언어게임을 하고 사는 것이다.

예를 들면, "비가 온다!”는 말을 할 때에, 오랜 가뭄 속에 지내던 농부의 외침과 내일 소풍가야 할 아동들의 외침이 사뭇 다르다. 비 옴의 현상에 대해서 서로 다른 언어로 기술하면서 동조하는 자들끼리 그 안에서 언어게임으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다. 가족 유사성을 만끽 하면서. 이로서 비트겐슈타인은 본질주의를 거부한다.

4. 비트겐슈타인이 보는 종교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 윤리, 즉 삶을 살 가치가 있도록 하는 것의 문제는 우연적인 차원 즉 사실의 차원에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말할 수 없는 것’의 필연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필연성이라는 것도, 논리적 필연성 뿐이며, 사실적 필연성 또는 인과적 필연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윤리란 우연을 넘어선 필연의 문제이며 이것은 곧 논리의 필연성과 연관이 있다. 윤리는 말할 수 없는 세계 속의 사실은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윤리의 근거, 종교의 근거를 주체로 보고 있다. 선과 악은 주체를 통해서만 들어오는데 그러나 주체는 세계의 일부가 아니라 세계의 경계라는 것이다. 즉 선하거나 악한 것은 표상의 세계가 아니라 의지(意志)하는 주체이다. 주체가 세계의 경계라는 것은 주체는 학문의 대상이 아니라는 말이며, 곧 세계는 곧 나의 세계라는 말이다.

따라서 세계의 한계는 나의 언어의 한계이며 나의 한계이다. ‘한계’라는 말은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없다는 말이다. 즉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나의 의지에 따르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세계는 나의 의지로부터 독립적이다. 나는 완전히 무력(無力)하다.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은 종교를 말한다.

종교인의 세계는 비종교인의 세계와 다르다는 것이다. 당연히 필연적 논리성도 그 안에서 다르다. 가치관도 다르다. 삶의 의미관도 다르다. 종교인은 ‘영원의 상(想’) 아래서 세상을 본다고 말한다. 그림을 따로 그리게 되는 것이다. 종교신앙을 근거를 논리적으로 밝히려는 종교인들의 노력과 마찬가지로, 종교신앙이 논리적인 근거가 없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는 비종교인들의 태도에 대해서는 그는 비판적으로 본다. 왜냐하면 종교의 세계는 우리의 일상적인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이기 때문이다.

신부가 자기 종교에 대해 합리적 근거를 제시하려는 태도가 오히려 비합리적이며, 그러한 태도는 미신적 믿음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트게슈타인은 비판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종교를 믿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이 동일한 언어적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어떻게 그는 설명하고 있는가?

비트겐슈타인은, 표층문법과 심층문법의 차이를 살핌으로써 그 원인을 알려준다. 이 둘을 혼돈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표층문법의 차원에서 볼 때 종교를 믿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이, ‘신’, ‘믿음’, ‘최후의 심판’ 등의 언어를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심층문법의 차원에서 볼 때, 그것은 전혀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음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그림, 즉 다른 문법이 지배하는 언어를 사용하며, 이 문법에 의해 그 낱말들이 의미하는 바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교적 주체에 대한 의견의 상치는 외견상의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종교를 믿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닌 종교적 믿음의 수준이 다른 사람에게도 일어난다고 비트겐슈타인은 말한다.

이처럼 그에게 있어 그림이 인정되는 종교적 언어게임은 우리의 삶의 형식을 반영한 것이다. 어떤 교리도, 그리고 그 교리가 얼마나 건전하냐의 상관없이 그 사람의 삶 자체를 규제라는 힘으로 종교는 말을 한다는 것이다. 존재에 대한 경이나 기적은 우리의 존재에 대한 ‘어떻게’나 ‘왜’를 지시해주는 것이 아니라, 설명될 수 없는 (말할 수 없는) 무엇인가에 대한 표지이다. 이 놀람의 능력을 과학이나 철학이 손상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오늘날 사람들이 옛사람들이 모두 신과 운명에 대해서 함부로 접근 못하는 영역인 줄 알아서 그 앞에서 멈춰 선다. 하지만 오늘날의 사람들은 마치 모든 것이 그것으로 설명된 것처럼 보이려 하는 그런 종교를 가지려는 반면에 (다시 자기 자리를 찾고자 하는 반면에) 옛사람들은 분명한 종점을 종점으로 인정하고 그 종점을 마주보면서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이런 자기 목적적 과학이나 철학이나 종교를 비트겐슈타인은 비판한다. 과학적으로나 합리적으로 세상을 보지 말고 경이로움으로 우리가 기적 안에 놓여 있음을 인정하라고 비트겐슈타인은 현대인들에 독촉한다. 이것을 그는 ‘선한 삶’이라고 부른다.

Ⅲ 결론

복음을 모르는 자들은, 언어에서 실제로 능력이 나오는 것임을 믿지 아니한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데살로니가전서 2:13)

그리고 복음을 모르는 자들은 이 말씀의 능력이 십자가 사건에서 지속적으로 영원토록 흘러나와 인간의 모든 지혜와 능력을 부정해버린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래서 창세전부터 구원받기로 작정된 자들은,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공로에만 구원의 능력을 돌리게 되어 있다. 이것은 원천적인 자기 부정이다. 아예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태어나기 전에 확정된 사실로 인하여 자기부정이 십자가 앞에서 평생 해야만 하는 운명임을 감사히 받아들이게 된다.

따라서 이들의 입에는 다음과 같은 고백이 나온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못 박힌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한다. (고린도전서 2:2)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이 왜 없는지, 왜 자신의 이름으로 자신이 구원받지 못하는지 성도는 십자가를 통해서만 수긍하고 수용한다.

기독교, 그것도 우리가 만들어낸 세상읽기의 일종이요 그림그리기이요 따라서 환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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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3-07 18:43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언어의 한계와 종교

2007년 6월 6일 이 근 호 목사

Ⅰ. 서 론

원어 분석, 혹은 원어 낱말 분해에 설교에 사활을 거는 자들이 있다. 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자투리 철학행위를 하고 있는데 마치 성령의 도움으로 올바른 성경해석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자부하고 있다. 성경 원어 분해에는 아무 것도 안 나온다. 단지 “이토록 ‘나’ 정당함은 기어이 사수하고 말리라”라는 오기만 되돌려 나올 뿐이다. 십자가 앞에서의 자기 부정이 원어 분석을 통해서는 자동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왜 그런가? 이미 육적인 자기 철학이 원어를 파는 분석도구로 맹렬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여기 대단한 분석기구들이 분석철학, 혹은 ‘언어실증주의’라는 이름으로 동원되고 있다. 그들은 언어 안에서 완벽한 진리를 규명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덤벼든다. 그 언어가 코란이든, 불경이든 성경이든, 논어든 상관없이 다 적용된다. 왜냐하면 어떤 거룩한 책이 되었던 결국 문자와 낱말의 집합체로 되어 있고, 그 논리성은 인간의 논리성에 포착될 수 있다는 미련을 포기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Ⅱ. 본 론

1. 프레게(1848~1925)의 형식언어 주창

우리의 일상언어는 애매하고 다의적(多意的)이다. 이렇게 되면 전달되는 과정에서 옳고 그름이 불분명해진다. 어떻게 하면 이 애매성과 다의성을 제거할 수 있을까? 프레게라는 철학자는 논리적인 언어, 즉 기호언어를 발명했다. 소위 ‘형식언어’를 만들어낸 것이다. 모든 것을 논리학의 개념으로 환원시키겠다는 것이다. 수학뿐만 아니라 모든 학문 분야를 이루는 언어는 원자 명제의 진리치에 관련된 함수들이라고 보는 것이다. 거기서 연역적으로 도출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는 수학적 인식의 논리적인 연관관계와 구조를 분석하는 것이 철학을 비롯해서 수학, 심지어 종교경전까지 근본 진리 문제를 탐문하는 것으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여기서 우선 수학부터 손을 대었다. 수학을 논리학을 전환시켜 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현대 수리논리학이 탄생한다. 그는 논리학에 양화사量化詞 (‘모든’과 ‘어떤’)와 변수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했다. 일상 언어에서 보편성에 해당하면 ‘모든’, 특수성에 해당하면 ‘어떤’이라는 개념을 사용한 것이다. 또 특정 개념의 위치에 x, y와 같이 대체될 수 있는 변수를 도입했다.

예를 들어 ‘인간은 이성적이다’라는 종래의 철학적 문장을 수리논리적으로 표현하면 ‘모든 x는 y다’라는 식으로 진위 계산이 가능한 수학 공식으로 만들 수 있다.

전통적인 철학은 한 문장을 구성하고 있는 낱말의 의미와 그 연관을 밝힘으로서 그 문장의 의미를 찾았다. 하지만 주어와 술어의 관계는 그런 식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 유기적 연관을 밝혀내야 한다.

문장의 구조도 함수의 구조와 똑같다. 주어는 확정적이지만 술어부분은 불완전하다. 여기서는 ‘개념’과 ‘대상’을 구분하라고 요구한다. 프레게는 주어에 해당되는 것을 ‘고유명사’로 보고, 술어에 해당되는 것은 ‘개념어’로 보고, 고유명사가 지시 하는 것을 대상이라고 보고, 개념어가 지시하는 것을 개념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해서 문법적인 분석과 논리적인 분석이 상호 다르다는 것을 말했다,

고유명사와 개념어의 논리적 기능이 서로 다르고, 따라서 개념어는 문장의 주어부에 올 수 없는 것이다. 개념도 함수와 마찬가지로 불완전하고 다 채워지지 않지만 반면에 대상은 완전하게 채워진다. 이렇게 해서 대상은 문장의 주어로만 사용하고 개념은 술어에만 사용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예1) 소크라테스는 철학자다
예2) 철학자는 현명하다

예1)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지시하는 것이 대상이고 철학자가 지시하는 것은 개념이 된다. 하지만 그 동일한 철학자는 예2)에서는 대상이 된다. 따라서 고유명사(소크라테스)와 개념어(철학자)는 구분된다. 이처럼 표층적 구조(문법적 구조)가 심리적 구조(논리적 구조)를 어떻게 은폐하고 있는지도 밝혀낼 수 있다고 보았다.

이를 통해 어떤 형이상학도 배제한 논리분석철학이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논리분석의 방법이 확장되면 전통철학이 다루었던 형이상학적 존재론의 영역이 새로운 논리적 존재론으로 대체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처럼 기호 논리학을 통해서 언어를 재구성하게 되면 그 어떤 언어나 일상언어도 논리적 변형규칙에 준해서 그 진리치가 분명하고 명료하고, 참과 거짓이 확정된다는 것이다. 의미나 개념의 객관성은 언어 사용의 논리적 특성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예1) 소크라테스는 소크라테스다.
예2)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스승이다.

프레게는 표현의 의미와 그것이 지시하는 것을 구별한다. 즉 두 개의 표현은 동일한 대상을 지시하면서도 의미(sense 혹은 meaning)에 있어서는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meaning이라면 예1)과 예2)는 같다. 하지만 sense라면 예1)과 예2)는 같지 않다. 예1)은 정보적인 가치가 없는 반면에 예2)는 정보적인 가치가 있다.

또한 프레게는 '저녁 별'과 '샛별'이라는 표현을 고찰한다. 물리적 대상으로서의 샛별은 바로 저녁별이다. 만일 그것들이 동일한 것이라면, 그때 '샛별은 저녁별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샛별은 샛별이다'와 똑같은 것일 뿐이고, 이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가 천문학자일 필요도 없고 천문학에 관해 알아볼 필요조차 없다. 그러나 표현의 의미와 지시와의 구별은 '샛별'과 '저녁 별'이라는 표현이 동일한 대상인 금성을 지시하지만, 각각 서로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각각 서로 다른 방식으로 금성을 지시한다는 것을 우리가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하나는 '아침에 보이는 별'을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저녁에 보이는 별'을 의미한다. 그러나 양자는 다 같이 동일한 대상인 금성을 지시한다.

그러므로 샛별이 저녁별이라는 발견은 새벽에 보이는 별이 저녁에 보이는 별과 동일한 별이라는 발견이고, 그 발견은 천문학적 관찰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샛별이 저녁별이다'는 '샛별은 샛별이다'가 제공하지 못하는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그에 의하면 전통적인 철학자의 오류는 이처럼 맥락을 무시하고 오직 낱말만을 들여다보았기 때문에 생겨났다고 했다.

2. 러셀(1872~1970)의 동조

러셀은 프레게와 같은 의견을 가지고 시작한다. 모든 존재론적인 문제들은 언어의 참된 논리적 구조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발생한다고 했다. 예를 들면 모든 명제의 문법적 주어는 어떤 실체를 대표해야 한다고 가정한다면, 그 때 우리는 프랑스의 현왕(지금은 프랑스는 왕이 없음), 류들, 수들과 같은 사물들은 우리의 존재론에 포함되는 것으로서 인정해야만 한다.

우리는 언어를 통하여 세계를 기술(記述)하고 있는 것이다. 언어분석은 일상언어가 존재론적으로 오도적이기 때문에 필수불가결하다. 이것은 사람들이 스스로 말하는 것에 대하여 불충분한 근거를 가지기 때문이 아니라, 언어의 문법적 형식과 논리적 형식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것을 드러내는 것은 언어의 문법적 구조가 아니라 그 논리적 구조이다. 문법적 범주와 논리적· 존재론적 범주가 하나인 것으로 혼동하게 되면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러셀의 의하면 이름들은 지시하지 않는다. 개념이 지시하며, 언어속의 지칭은 이름이 아닌 기술에 의하여 성취된다.

문법적으로 주어-술어 형식인 명제 속에서 나타나는 한정기술이 개별자를 대신하는 기호라고 생각하는 상식적 견해를 채택한다면, 우리는 인정할 수 없는 결과들에 직면한다. 실제적인 세계에서 또는 어떤 가능한 세계에서 발견될 수 없는 그런 어떤 것은 우리의 존재론에서 매우 기묘한 첨가물이 된다.

하지만 ‘프랑스의 현왕(現王)은 대머리다’와 같은 명제는 주어-술어 형식이 아니다 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 때 주사를 대신하는 실체를 발견하려는 욕구는 경감된다. ‘프랑스의 현왕’은 이름이 아니기에 위의 명제의 주어로서 기능하지 않는다.

이처럼 프레게의 논리주의 전통에서 러셀은 좀 더 엄밀하고 그리고 좀 더 철학적인 방식으로 수학을 논리학으로 환원시키려 하고, 그 도구로서의 새로운 논리학의 체계를 완성시키려고 한다. 러셀은 철학적 분석의 방법으로서 기술이론(descriptive theory)과 이러한 기술이론과의 연관 하에서 드러나는 존재론적 함의를 가진 논리적 원자론(logical atomism)을 제시한다.

특히 그는 집합의 집합으로서의 수의 기초를 정초시키려 했던 프레게가 고려하지 못한 패러독스(역설)를 발견하고, 이에 나름의 답으로 유형론(theory of types)을 제시했다.

그리고 프레게가 말하는 문법적 주어로서 드러나는 정관사 기술구가 바로 그 자체로 완전한 고유명사는 아니라고 보고 그것은 더 이상 분석될 수 없는 직접지(acquaintance)의 대상으로 환원시켜야 한다고, 다시 말해 불완전한 부호를 완전한 부호로 환원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인식론적 함축을 지닌 기술이론으로부터 러셀은 논리적 원자론을 제시한다. 그의 기술이론이 함축하는 바는 전통적인 철학이 대부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왔던, ‘한 문장의 문법적 형식은 논리적 형식과 동일하다’는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점이다.

러셀은 기본적으로 논리학이 비록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특성들을 다룬다고 하더라도 실제세계와 관련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명제의 일반적 형식이 존재하며, 우리는 그러한 것들에 대한 인식적 근거로서 ‘논리적 경험’을 할 수 있다고 그는 주장했다.

결국 프레게와 러셀은 수학에 대한 논리주의적 태도로부터 수학을 일종의 불변의 실재인 논리적 대상에 근거지우려 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입장은 논리학에 대한 실재론적 입장을 취하게 하고, 결국 논리학을 일종의 대상에 대한 학(學)으로 만들었다.

3. 비트겐슈타인(1889~1951)의 비판

이들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비판의 핵심은, 논리는 대상에 관한 학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그것은 어떠한 관념적 실재 또는 어떠한 경험적 실재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프레게나 러셀이 말하는 의미에서의 논리적 상황, 즉 논리적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논리학은 더 이상 세계를 구성하는 사실 내지 존재의 궁극적 원리 또는 궁극적 실재를 탐구하는 과학이 아니다.

그러면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 논리란 무엇인가? 논리란 우리의 세계의 한계, 그리고 언어와 사고의 한계로 본다. 다시 말해 논리는 우리가 사고할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것의 한계라는 것이다. 그의 논의에 따르면 논리는 러셀이나 프레게와는 달리 대상적인 것이 아니라, 언어와 세계를 가능하게 해 주는 선험적(경험 이전)인 조건이면서 동시에 세계와 언어의 한계라는 것이다.

따라서 논리는 그 안에서 가능한 모든 것이 일어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으로, 더 이상 정당화나 설명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논리를 넘어서 논리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런 입장에서 언어의 계층성을 인정하는 러셀의 유형이론을 비판한다.

왜냐하면 논리는 우리가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그리고 사고할 수 있는 전제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사실이 구성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논리학의 명제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이 보여주는 바는 무엇인가?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논리학은 프레게나 러셀이 본 것과 같이 이성에 기초하며 사유에 의해 인지될 수 있거나 논리적 대상에 대한 직접지(知)를 통해 발견하는 원초적인 실제에 대한 학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논리학은 러셀이나 프레게가 파악한 것처럼 근원적인 논리학의 법칙이 실재하여 그것으로부터 연역해 낸 일련의 학적 체계도 아니다. 따라서 논리학의 명제는 경험적 세계의 실재나 대상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며, 세계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세계의 골격, 즉 세계의 형식적-논리적-속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그것의 참됨은 부호 자체로부터 인지될 수 있는 동어반복을 일반화시킨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러셀이 말하는 것처럼 어떤 자명한 원초적인 명제들이나 관념들로부터 이끌어내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논리의 필연성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논리학의 선천성은 우리가 비논리적으로 생각할 수 없다는 데서 성립된다. 다시 말해 논리학의 선천성은 우리가 비논리적으로 생각할 수 없다는 데서 성립된다.

다시 말해 논리학의 선천성은 우리가 비논리적으로 사고할 수 없다는 데서, 그 참됨은 사실과의 관계 속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에서 보여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논리학의 모든 명제는 각기 그 자신의 증명이며, 논리적 증명에서의 과정과 결과는 등가적이라는 것이다.

결국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의 핵심은 ‘논리학은 그 자신을 스스로 돌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논리의 정당화는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주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정당하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언어와 세계는 그림-그리는 관계에 있고, 그것들은 같은 중심을 갖고 관계 맺어져 있다. 또한 언어를 구성하는 요소명제들이 다른 요소명제의 참과 거짓을 결정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독립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세계 속의 사실들은 독립적이며 우연적이다.

즉 세계 내의 어떤 사실도 다른 사실을 필연적으로 일으키거나 사라지게 할 수 없으며 그것들 사이에는 어떤 선천적이거나 필요적 관계도 있지 않다. 이런 점에서 말 할 수 있는 것은 세계 속의 사실에 관한, 즉 우연적인 관한 것이다.

프레게와 러셀은 우리가 일방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데서 언어에 대한 오용 및 곡해가 발생한다고 보고 학적 엄밀성을 위해 의미의 확정성과 명제의 양극성을 기초로 한 이상언어(형식언어)를 구축하고자 했다. 물론 비트겐스타인도 이 명제의 양극성과 의미의 확정성을 전제로 하고 말한다. 즉 명제의 의미, 그리고 이름의 뜻은 확정적이어야 하며, 의미 있는 명제는 참이거나 거짓이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한다. 세계가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한 명제가 의미를 가지는지의 여부는 다른 명제가 참인지의 여부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논리적 부담이다. 뿐만 아니라 세계의 그림(참이거나 거짓인)을 그리는 것이 불가능해질 것이라고 말한다.

즉 언어를 구성하고 있는 명제가 참될 수 있는 가능성, 즉 의미의 가능성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언어 자체 내에서 참됨을 보증받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언어 외적인 것과의 연관을 맺음으로써 즉 세계와의 연관을 통해서 그 참됨을 획득하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 언어의 참됨 즉 의미의 궁극적 기반은 결국 언어 자체에 있기 때문에 무한퇴행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으며, 이는 언어의미의 궁극적 기반일 수는 없다. 따라서 그것은 언어 자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세계와의 관계맺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바로 이러한 언어의 의미가능성에 대한 고찰로부터 세계가 등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비트겐슈타인은 러셀과는 달리 경험적 탐구를 통해서가 아니라 언어에 대한 선험적인 고찰을 통해 세계에 대한 논의를 전개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언어는 세계와 어떤 관계를 통해서 의미를 가지는가? 언어는 요소명제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요소명제는 언어의 의미의 궁극적 단위체로서, 비트겐슈타인은 이 요소명제가 세계와 직접적인 연관을 맺는다고 본다. 그리고 이 요소명제가 아닌 다른 명제들은 이 요소명제들의 진리함수라는 것이다. 그 요소명제는 그는 ‘실재의 그림’으로 보았다.

즉 언어의 기능을 세계를 그리는 것으로 본 것이다. 언어가 어떻게 세계의 그림일 수 있는가? 그것은 사고(思考)와의 연관을 통해서 가능하다. 그에 다르면 사고는 사실에 대한 그림이다. 그러나 사고가 어떻게 세계의 그림일 수 있는가? 그것은 세계 속에 사실의 구성요소인 대상들과 사고의 구성요소들이 대응하며 또한 그림이 그리는 사실의 일정한 방식처럼 사고의 구성요소들이 일정한 방식으로 관계함으로써 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명제가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명제의 구성요소인 이름들이 세계의 구성요소인 대상들과 관계, 즉 이름 부르는 관계를 맺음으로써, 그리고 명제에서의 그 구성요소들이 사실의 구성요소들이 서로 간에 맺고 있는 것과 같은 일정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음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 사태들은 서로 독립되어 있다. 필연적으로 오직 논리적 필연성만 있을 뿐이다. 더 나아가 한 요소명제가 논리적 조작을 통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경우 이외의 어떤 요소명제들의 진리함수적 결합으로 이루어진 명제도 필연적으로 참이거나 거짓이 아니며, 결국 복합적 사실들의 관계 역시 필연적이 아니라 우연적이다.

예를 들면, “사과는 달다”라고 누가 이야기하니 어떤 이가 “사과는 둥글다”라고 주장한다. 이 둘 사이는 상호 오류가 성립될 수 없고 독립적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어떤 이가 “사과는 빠르거나 슬퍼”라고 말하는 것은 오류가 된다. 이 오류는 오로지 올바른 논리적 공간 안에서만 오류로 알려질 수 있는 문제다.

이처럼 모든 대상은 논리적 형식 속에 놓여있으며 그 가능성의 공간이 논리적 공간이 된다. 결국 이 세계란 논리적 공간 내에서의 우연적인 사실로 구성되는 것이고, 그 사실은 반드시 세계가 지금 그대로 있어야 할 어떤 필연성을 띠는 것이 아님을 뜻한다.

4. 비트겐슈타인이 보는 종교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 윤리, 즉 삶을 살 가치가 있도록 하는 것의 문제는 우연적인 차원 즉 사실의 차원에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말할 수 없는 것’의 필연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필연성이라는 것도, 논리적 필연성 뿐이며, 사실적 필연성 또는 인과적 필연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윤리란 우연을 넘어선 필연의 문제이며 이것은 곧 논리의 필연성과 연관이 있다. 윤리는 말할 수 없는 세계 속의 사실은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윤리의 근거, 종교의 근거를 주체로 보고 있다. 선과 악은 주체를 통해서만 들어오는데 그러나 주체는 세계의 일부가 아니라 세계의 경계라는 것이다. 즉 선하거나 악한 것은 표상의 세계가 아니라 의지(意志)하는 주체이다. 주체가 세계의 경계라는 것은 주체는 학문의 대상이 아니라는 말이며, 곧 세계는 곧 나의 세계라는 말이다.

따라서 세계의 한계는 나의 언어의 한계이며 나의 한계이다. ‘한계’라는 말은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없다는 말이다. 즉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나의 의지에 따르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세계는 나의 의지로부터 독립적이다. 나는 완전히 무력(無力)하다.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은 종교를 말한다.

종교인의 세계는 비종교인의 세계와 다르다는 것이다. 당연히 필연적 논리성도 그 안에서 다르다. 가치관도 다르다. 삶의 의미관도 다르다. 종교인은 ‘영원의 상(想’) 아래서 세상을 본다고 말한다. 그림을 따로 그리게 되는 것이다. 종교신앙을 근거를 논리적으로 밝히려는 종교인들의 노력과 마찬가지로, 종교신앙이 논리적인 근거가 없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는 비종교인들의 태도에 대해서는 그는 비판적으로 본다. 왜냐하면 종교의 세계는 우리의 일상적인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이기 때문이다.

신부가 자기 종교에 대해 합리적 근거를 제시하려는 태도가 오히려 비합리적이며, 그러한 태도는 미신적 믿음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트게슈타인은 비판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종교를 믿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이 동일한 언어적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어떻게 그는 설명하고 있는가?

비트겐슈타인은, 표층문법과 심층문법의 차이를 살핌으로써 그 원인을 알려준다. 이 둘을 혼돈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표층문법의 차원에서 볼 때 종교를 믿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이, ‘신’, ‘믿음’, ‘최후의 심판’ 등의 언어를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심층문법의 차원에서 볼 때, 그것은 전혀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음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그림, 즉 다른 문법이 지배하는 언어를 사용하며, 이 문법에 의해 그 낱말들이 의미하는 바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교적 주체에 대한 의견의 상치는 외견상의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종교를 믿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닌 종교적 믿음의 수준이 다른 사람에게도 일어난다고 비트겐슈타인은 말한다.

이처럼 그에게 있어 그림이 인정되는 종교적 언어게임은 우리의 삶의 형식을 반영한 것이다. 어떤 교리도, 그리고 그 교리가 얼마나 건전하냐의 상관없이 그 사람의 삶 자체를 규제라는 힘으로 종교는 말을 한다는 것이다. 존재에 대한 경이나 기적은 우리의 존재에 대한 ‘어떻게’나 ‘왜’를 지시해주는 것이 아니라, 설명될 수 없는 (말할 수 없는) 무엇인가에 대한 표지이다. 이 놀람의 능력을 과학이나 철학이 손상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오늘날 사람들이 옛사람들이 모두 신과 운명에 대해서 함부로 접근 못하는 영역인 줄 알아서 그 앞에서 멈춰 선다. 하지만 오늘날의 사람들은 마치 모든 것이 그것으로 설명된 것처럼 보이려 하는 그런 종교를 가지려는 반면에 (다시 자기 자리를 찾고자 하는 반면에) 옛사람들은 분명한 종점을 종점으로 인정하고 그 종점을 마주보면서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이런 자기 목적적 과학이나 철학이나 종교를 비트겐슈타인은 비판한다. 과학적으로나 합리적으로 세상을 보지 말고 경이로움으로 우리가 기적 안에 놓여 있음을 인정하라고 비트겐슈타인은 현대인들에 독촉한다. 이것을 그는 ‘선한 삶’이라고 부른다.

Ⅲ. 결 론

복음을 모르는 자들은, 언어에서 실제로 능력이 나오는 것임을 믿지 아니한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데살로니가전서 2:13)

그리고 복음을 모르는 자들은 이 말씀의 능력이 십자가 사건에서 지속적으로 영원토록 흘러나와 인간의 모든 지혜와 능력을 부정해버린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래서 창세전부터 구원받기로 작정된 자들은,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공로에만 구원의 능력을 돌리게 되어 있다. 이것은 원천적인 자기 부정이다. 아예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태어나기 전에 확정된 사실로 인하여 자기부정이 십자가 앞에서 평생 해야만 하는 운명임을 감사히 받아들이게 된다.

따라서 이들의 입에는 다음과 같은 고백이 나온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못 박힌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한다. (고린도전서 2:2)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이 왜 없는지, 왜 자신의 이름으로 자신이 구원받지 못하는지 성도는 십자가를 통해서만 수긍하고 수용한다.

기독교, 그것도 우리가 만들어낸 세상읽기의 일종이요 그림그리기이요 따라서 환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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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