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1013 안산강의 - 요한복음 20장 (3) : 생명과 사명. 녹취
20061013 안산강의 - 요한복음 20장 (3) : 생명과 사명. 녹취
이름 : 오용익(IP:59.3.201.208)
요한복음 강의 (이근호 목사. 06. 10. 13. 안산나라장로교회)
지난 시간에 요한복음 20장에서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이렇게 소개했죠? 27절에서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그러니까 도마쪽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보고 “아하! 예수님 맞네.” 이런 식으로 예수님과 교제할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되지를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이 알아보지를 못합니다. 예수님 쪽에서 뭔가 계시를 줄때,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알아볼만한 능력을 줄때, “아! 예수님 맞습니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어요. 누가복음에 나오는대로 엠마오로 내려가다가 예수님을 만난 두 제자도 그랬습니다. 예수님과 길을 동행하면서도, 예수님을 쳐다보면서도 예수님을 못알아 봤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뒤에는, 다른 방식으로 자기 양을 찾는다는 겁니다. 다른 방식으로. 지금까지 인간들이 알고 있는 그러한 방식, 인간들이 세상 사람들과 통하고 있는 그런 교제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예수님을 알아보게 하는데, 그것은 예수님 쪽에서 나가신 영에 의해서 비로소 예수님을 알아보는 방식으로 그 사람과 교제하게 됩니다.
예수님 쪽에서 나가는 방식이 뭐냐 하면, 예수님이 하신 일을 인간 속에 담는 그러한 방식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신 일을 우리 속에 담는 거예요. 열두제자의 직업이 다 다른 것을 아시잖아요? 마치 오늘날 우리가 하는 일이 다 다른 것처럼. 그러나 일이 각각 다 다르고, 연세 많은 분, 적은분이 다 다르게 있더라도, 예수님이 자신이 하신 일을 여기에 담으면, 그때 그 사람은 예수님 몸의 지체가 되고 예수님 몸의 부분이 되는 겁니다.
이걸 전에 문어발이라고 했어요. 문어 알지요? 문어 머리 되시는 예수님과 그 발이 되는 우리들. 이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느냐 하면, 예수님이 하신 일을 우리 속에다 담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자기 기대를 가지고 교회에 와서 뭔가를 얻겠다는 것은 그 자체가 교회가 아니지요. 그리스도 몸이 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우리 속에 담는 방식으로 자기의 몸, 자기의 교회가 되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하신 방식이 뭐냐? 27절에 보니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이것은 예수님이 부활되었어도 뭔가 흔적이 있다는 겁니다. 그 흔적이 뭐냐? 예수님이 죽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할 때 어떻게 이야기하기를 원하는가?’ ‘사람들, 자기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 할 때, 어떤 식으로 이야기하기를 원하느냐?’ 하면 “우리는 죽은 예수를 믿는다.” 이겁니다. 사람이 이야기 할 때, 산사람과 이야기를 해야 의미가 있지, 죽은 사람을 붙들고 이야기 한다는 것이 의미가 없잖아요.
“실례지만 작년에 돌아가셨지요? 이런 이야기가 의미가 없잖아요.” 작년에 돌아가셨는데. “실례지만 재작년에 돌아가셨는데 요새 월급 얼마나 받습니까?” 이런 말이 의미가 없잖아요. 재작년에 돌아가셨잖아요. 귀신하고 이야기를 해서 뭘 얻겠다는 말입니까? 이미 돌아가셨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은 자기를 남들에게 소개할 때 ‘이미 돌아가신 분’이라고 소개하라는 거예요.
사람들의 인식에는 ‘이미 돌아가신 분은 더 이상 살아 있는 사람과의 교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벽을 뛰어 넘는 거예요. “이미 죽은 자이지만 나는 살아났으니까 너희들과 나와는 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한 관계에 속한다”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의 베드로 설교에도 나오고, 사도바울의 설교에도 나오는데 그 대목을 사도행전에서 한번 찾아볼까요? 사도행전 2장 24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사도행전 2:24)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만약에 어떤 사람이 “이근호! 당신이 뭐하는 사람입니까?”라고 물으면,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는 분을 소개하는 사람입니다.” 이러면 끝나는 문제입니다. “너 요새 예수 믿는다는데 예수가 어떤 분인데?” 그때는 사도행전 2장 24절의 말씀대로 “사망에 매여 있지 않은 분을 저는 믿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것이 사도행전 2장 17절에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 나오는 ‘환상, 꿈, 비전, 징조’ 이런 것들은 마지막 때에 나타나는 기이하고 특이한 현상입니다.
인류사에 이런 현상이 없었어요. 예수님의 성령이 오고 난 뒤의 특이한 현상이 뭐냐? 죽은 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는 겁니다. 죽은 자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그 죽은 자가, 이 세상 곧 죽은 자의 제국을 그분이 쥐고 있고, 산자와 죽은 자를 몽땅 그분의 자기 손아귀에 쥐고 있더라. 그분이 심판주고 영원한 제국의 임금님이시다’ 하는 것을 소개하라고 우리에게 성령이 임한 겁니다.
죽은 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단순하게 죽은 자가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죽은 자인데 우리를 깜짝 놀래키기 위해서 “그래 죽은 자로만 알고 있지? 죽은 것은 맞는데 지금 살아 있다. 그러니 네가 이제 죽었다.” 네가 이제는 죽은 거예요. 사도행전 13장 36절, 37절에 보면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좆아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하나님의 살리신 이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 이렇게 되어 있지요.
사도행전 13장 30절에 봐도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살리신 지라.” 이것을 사도들은 성령 받아서 증거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면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점을 가지고 기뻐해야 되죠. 사도행전 1장 22절에도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 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고 합니다.
여기에 무엇을 증거 할 사람이라고 합니까? 예수의 부활이죠. 부활이란 것은 이미 죽은 적이 있다는 말이죠. 이미 죽은 분인데 살아났다는 말이죠. 그것을 증거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이 오신 다음에 일어나는 아주 특이한 현상에 속합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그래서?”
“예수가 죽은 가운데서 살아났다.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그래서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 뭐냐?” 이렇게 이야기 할 겁니다. 고린도후서 10장 5절과 6절을 봅시다. 거기에 보면 그에 대한 해답이 나옵니다.
(고린도후서 10:5,6)
5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6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도다.
여기 보면 그리스도에게 뭐한다고요? “복종케 하니”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그 다음에 뭐하려고? “벌하려고.” 우리가 할 일은 이렇게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돼요.
“우리가 성도입니다.”
“아 예. 그러면 살아가는 목적이 뭡니까?”
“몰라요.”
이렇게 나오면 곤란합니다. 분명히 고린도후서 10장 5절, 6절에 보면, 우리가 사는 목적이 뭐냐? 밥 먹고 살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온 세상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는 겁니다. 모든 높아진 이론들, 철학, 경제, 사회 등, 여러 가지 이론들을 다 파하고, 다 부수어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기 위함인데 그 이유가 뭐냐? 주께서 벌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심판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상하게 교회 안다녀도 착한 사람 많습니다. 착한 사람 많지만 예수님을 안 믿는다는 그것을 교만케 보는 겁니다. 그것을 높아졌다고 보는 겁니다. 모든 인간들의 사고방식이 높아진 거예요. ‘예정론’을 따지고 하는 그런 것이 다 높아져서 그래요. 여기 쉼터에 나오는 학생들이 “부모가 어쩌고 해서 가출했습니다. 나는 가만히 있는데 남들이 건드려서 도둑질을 했습니다.” 이것이 전부다 그리스도께 복종하지 않는 모습이에요.
이게 마음이 높아진 거예요. 여러분들이 이제 나이가 40쯤 되었으니까 이걸 알아야 돼요. 이 사회에서 우리가 뭔가 안다는 상식이나 양식이라는 것은, 이것이 관습입니다. 관습. ‘뒤르캥’이라는 학자가 아주 잘 파악했는데 관습이란 말은 버릇이죠. 이게 왜 중요하냐 하면, 우리 청소년들이 어떤 범죄를 저지른다든지, 남 탓하고 부모 탓을 하고, 나를 무시해서 그렇게 했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잖아요.
그들의 내부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사고방식들이 꽉 차 있어요. 그 꽉 찬 사고방식들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자기가 연구한 것이 아니고 주위에 있는 풍습과 관습과 관행들과 버릇들이 전부다 여기에 뭉쳐있어서 그런 거예요. 그런데 이 청소년들이 쥐고 있는 모든 것이 다 뭐냐 하면, 그리스도 앞에서 전부다 교만하기 짝이 없는 높아진 것들의 관행이고 습관이고 생활양식들입니다.
문제아들 부모 가운데 술 안 먹는 부모 봤어요? 다 술 먹잖아요. “내 돈 내고 내 술 먹는데 그게 어떤데?” 하지만 자기돈 내고 자기 술 먹는 그것이 성경에 보니까 “술 취하지 말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복종치 않는 교만이라는 말이에요. 부모가 그따위 식으로 그리스도께 복종치 않으니까, 자식도 그 부모의 관행과 관습과 버릇을 그대로 인수인계 받는 거예요.
사람들 마음을 파 보세요. 거기 새로운 게 없습니다. 거기 새롭다 할 것이 없어요. 목사님이 지금 안계시기 때문에 사모님께서 이것을 잘 기억해서 다시 알려 주세요. 처음부터 잘 기억할 수 있겠지요? 정리 해 보면 이렇습니다. 1) 예수님이 우리를 지체로 삼는 방식은 자기 것을 우리에게 담는 방식이다. 우리는 문어발에 불과한데 문어가 문어 머리가 한 일을 그대로 담는 것이다.
2) 우리가 세상에서 직업이나 직책, 혹은 나이가 다르다고 할지라도 동일한 것을 담게 되는데 그 담는 내용이 뭐냐? “내 손과 내 옆구리를 봐라”입니다. 3) “그 손과 옆구리”의 의미란 바로 죽은 분이라는 뜻이죠. 죽은 분이 우리 속에 있음으로서 우리는 생명의 관계 비로소 내 목숨이 아니고 다른 목숨이 우리 속에 들어 왔는데, 그것을 ‘영생’ 받았다 ‘생명’받았다고 합니다.
4) 그렇게 들어 왔을때 우리의 할 일은 뭐냐? 그리스도의 하신일이, 그 예수님의 죽음을 가지고 뭐라고 하냐면 ‘대신죽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죽고 나도 죽으면 둘 다 죽어 있으니까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지 않느냐? 연탄가스 피워서 예수님과 내가 함께 둘다 죽었으면 그만이지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할거예요.
예수님 껴안고 “죽자, 죽자” 하면 그것은 집단 자살 밖에 더 됩니까?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을 가지고 하늘나라에서는 뭐라고 하느냐면, 그것을 가지고 ‘의’라고 하는 거예요. d왜 ‘의’가 되느냐? 그것은 새언약의 완성이기 때문에 그래요. 구약에 보면 언약대로 행하면 그게 ‘의’가 되는 거예요.
말씀대로 안하면 그것은 ‘의’가 아니에요. ‘의’라는 것을 자꾸 우리 머리에서 끄집어 내지 마세요. 우리 ‘의’를 자꾸 들이대지 마세요. 그것은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취된 것을 의라고 합니다. 단순하게 생각하세요. 그런데 그 말씀은 우리가 이루지를 못합니다. 예수님이 이루는데 어떻게 이루느냐? 죽음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니까, 예수님과 함께 죽는 그 자리가 의로운 자리고 그것이 천국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끌어안고 죽는 그것을, 주님께서 대신 죽은 그 현장을 비로소 ‘의’라고 하고 다른 말로 하면 ‘거룩’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 주께서 오신거죠.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까지는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이 의고 ‘거룩’이 되는지를 사람들이 알았겠습니까? 몰랐겠습니까? 몰랐죠.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안 나왔던 거예요.
예수님이 오셔서 비로소 새롭게 밝혀진 사실이지, 그 전부터 우리가 알았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다 튕겨 나가버린 거예요. 왜냐하면 그들은 기존의 사고방식을 - 아까 기존의 사고방식을 뭐라고 했습니까? 관습, 버릇, 관행, 습관, 습성, 인간사 - 그대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것들을 모아서 ‘생명’이니 ‘의’니 ‘거룩’이니 했는데, 이런 것과는 너무나 독특하게, 전혀 낯설게 내가 대신 죽은 그것이 ‘의’라고 나왔을 때, 이것은 아주 특이한 겁니다. 이것은 비밀된 지혜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해요. 여기까지는 아시겠죠? 이렇게 설명하시면 되고요.
그렇다면 인간이 만든 관성과 관행이 어디서 만들어졌는가? 그것을 생각해 봅시다. 제가 방금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은 날 때부터 자기가 자기인생관을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고, 주변 사람들, 가까운 사람들이 쇠뇌 시키고, 그리고 약 올리고, 강요하고 주입하게 되죠. 주입하고 억압하게 되면 인간은 날 때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여기서 반발이 일어나게 되죠.
반발하게 되면 자기 죄성에 합한 것은 받아들이고, 합하지 않은 것은 내뱉어 버리고요. 그래서 독특하게 새로 성장하는 겁니다. 이런 외부의 주입과 모여 있는 기본 상식 - 그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미리 형성된 인생관이랄지, 사고방식, 그런 의식들이 없으면 아기는 새로운 의식들을 자기가 창안 할 수는 없어요.
있는 것 편집하고 있는 것 재구성 할뿐이지, 새롭게 독특한 것을 만들어 내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갖고 있는 사상이 뭐냐? ‘해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데, 그 되풀이 되는 것을 어떻게 만드는가? 그것을 지금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것을 설명하는 이유는, 구약에서 우상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그와 같은 맥락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은 자연 속에 둘러싸여서 삽니다. 옛날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없다고 여겼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공기에요. 공기는 눈에 안보이니까 사람들은 이것을 없다고 여겼는데 나중에 는, 텅텅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공기로 가득 채워져 있다는 것을 알지요. 옛날 사람들은 더 선배들한테 어떻게 배웠느냐 하면, ‘우리는 대자연의 일부’라고 배웠습니다. ‘대자연의 일부.’
‘사람은 대자연의 일부다’라고 배웠기에, 대자연에서 태어나서 자연 속에서 살다가 자연으로 돌아간다고 여겼습니다. 자연의 혜택을 입고 돌아간다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이 자연은 어디서 생겼느냐? 이 자연밖에 신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화의 세계입니다. 신이 이 자연이라는 매개를 통해서, 그러니까 신, 곧 ‘일자’(一者)가 ‘누스’(nous), 이것을 ‘로고스’라고 하는데 어떤 이성, 일정한 법칙을 가지고 영으로서 대자연을 만들었다.
‘일자 - 누스(법칙) - 영 - 자연’으로 왔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자연의 인간은 신이 되는데, 자연에서 영이 되고, 인간은 영혼이 되죠? 영혼이 되어서 신의 법칙에 들어가서 신으로서 합일된다는 겁니다. ‘자연(인간) - 영혼 - 법칙 - 신(일자)’가 됨. 이것이 인간들이 만고의 진리라고 본겁니다. 어떤 종교도 이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 법칙을 보니까 기독교의 ‘성화론’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신은 법칙이 있고, 그 법칙에서 영이 오죠. 왜 그냥 자연이 안 되느냐 하면, 자연 속에는 인간도 있지만 돌멩이도 있잖아요. 코스모스가 있잖아요. 그 코스모스가 전부 살아 있는 것은, 인간이 빌어서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신이 살아 있기에 코스모스가 살아 있잖아요.
신은, 一者로서 한분이지만, 신이 만든 자연은 다양하지요? 하나가 다양하게 되려면, 신은 변동해야 합니까? 변동하지 말아야 합니까? 변동이 없어야 되죠. 신이 변동하면 그것은 믿을만 한것이 못되죠. 왔다 갔다 하면 어느 신을 믿어야 할지 모르잖아요. 신은 변동이 없는데 대자연은 변동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변동을 일으키는 힘은 영에서 나온다고 본겁니다.
그래서 코스모스의 영이 다르고, 달의 영이 다르고, 별의 영이 다르고, 돌멩이의 영이 다 달라요. 다만 인간의 영이 좀 우수하죠. 그래서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죠. 이것을 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주 납득이 되는 것이 뭐냐 하면, ‘개’를 보면 알잖아요. 개를 오래 키워 보면 이놈이 아주 한 식구같이 놀잖아요.
고양이나 강아지. 그때 “아유, 요거 영물이야. 영물!”이라고 안합니까? 자연 속에 다양하게 여러 종류가 다양하게 있지만, 돌멩이보다 강아지가 더 친밀한 것은, 그런 다양한 종류 중에서도 더 친하게 지낼 수 있다는 말은, 영이 적게 포함되고 많이 포함된 그 정도에 따라서 더 친하게 지내는 영이 있는 거예요. 그게 소나 개입니다. 소팔 때 울지요?
개를 사람들이 키우는데 그 개는 정말 웃깁니다. 개가요, 개가 사람인줄 알고 개보고 막 나가라고 합니다. 저는 사람에 속한다고 여기고, 개를 보면 같은 부류로 보지 않고 개로 봅니다. 그게 마음이 높아 진거죠. 이사야 1장에 나오잖아요. “소는 자기 구유를 알고, 나귀도 주인을 알건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죠.
모를 수밖에 없지요. 죽은 자이기에 계시해야 합니다. 그들이 지금 자연 속에 있으니까, 이 자연 속에서 그들은 생명의 전부를 느낍니다. ‘여기서 자연과 더불어 있어야 산다. 혹은 생존한다’가 여기서 결정된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6장을 봅시다. 6장 12절부터입니다.
(요한계시록 6:12-17)
12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 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같이 되며 13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같이 땅에 떨어지며 14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기우매 15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16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17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인간 앞에 내가 살았다고 하는 그 공간인 산과 섬이 자리를 옮기고, 달빛도 핏빛으로 바뀌고, 별들이 떨어지고, 온천지가, 그 무대장치가 확 없어지고 나니까, 그 다음부터는 단독적으로 누가 누구를 맞대어 보게 되어 있어요. 어린양의 그 무서운 진노의 광채와 그 밑에 있는 인간들만 덜렁 남은 거예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는 식으로.
그 전까지는 뭐였습니까? 대자연, 영원히 변치 않는 달, 영원히 변치 않는 해, 매일 매일 영원히, 다음날 그 다음날도 떠 있는 별. 이것으로서 신의 작품이며, 이것이 신의 보자기이며, 신의 이불이고, 신의 따스함이라고 여겼는데, 그 따스한 이불을 걷어치우니까, 남는 것은 뭡니까? 어린양의 진노밖에 없지요? 그러니까 너무 무서워서 주체를 못하니까 “산에 있는 바위들아! 나를 좀 가려줘. 어린양의 진노가 무서워서 내가 견딜 수가 없구나.”
딱딱한 바위가 어떻게 자기를 포근히 감쌀 수 있겠습니까? 오죽 답답했으면 바위보고 자기의 수치스러움을, 자기의 초라함과 처참함을 가려 달라고 했겠습니까? 그 정도로 자신은 망해버린 거예요. 인생 다 산 거예요. 대자연이 전부인줄 알고 살아가는 것이 이 세상 불신자들의 사고방식입니다. 즉 “인간은 산에서 나고 물에서 나고 인간은 흙으로 돌아간다”는 그런 식의 사고방식이 청소년들에게 부모를 통해서 세계관으로서 주입이 되어 있잖아요.
어느 인간도, 어떤 가정도 어린양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그렇게 안 가르쳐요. 별이 있고, 하늘이 있고, 달이 있고, 섬이 있고, 육지가 있는 이 세상사에서 ‘어떻게 하면 잘 먹고 잘사느냐’ 이것에 모든 인생가치를 다 거는 겁니다. ‘죽어도 이것에 죽고, 살아도 이것에 죽겠다’고 이렇게 했는데, 그 무대장치가 이동성 무대가 되어서, 그것을 확 치워버리고 나니까, 신도 자연에서 만든 그 신이 가짜였어요.
그래서 남는 것은 하나님의 어린양의 보좌였어요. 어린양.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니까 아까 고린도후서 10장 말씀 아시겠지요? 우리가 할 일이 뭐라고요? ‘모든 이론들을 다 파해서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는 일’이 바로 성도가 해야 될 일입니다. “교회 나가시는데 하실 일이 뭡니까? 세상 직업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진정 무엇 때문에 사십니까?”
이렇게 물어 오면, 이렇게 해야죠. “남들에게 이야기를 해서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기 위함입니다.” 사람이 인생이 목적이 뚜렷하고 분명하다는 것은 행복입니다. 그것은 다행스러운 이야기입니다. 인생에 목적이 없이 사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왜 사는지를 모르고. 그냥 갈때까지 가보는 거죠. 그냥 갈때까지.
그런데 성경 고린도후서 10장에 분명히 나와 있잖아요. “모든 이론을 파해서 부수어 버리고 모든 이론을 파해서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려 함이라.” “복종 안하면 어때?” 하지만 나중에 그들이 알고 있는 모든 인생관, 해와 달과 별이 전부 사라질 때, 남는 것은 어린양의 진노와, 자주자든 종이든 어떤 직업이든 상관없이, 그 진노를 가릴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고, 쏟아지는 것은 하나님의 무서운 유황불밖에 없죠.
어린양 앞에 바로 서는 이것이 실제 현실입니다. 이 현실 말고 다른 현실은 없어요. 참 무섭지요? 그럼 앞에 있는 이것은 뭡니까? 상상의 세계죠. 허구죠. 허상이죠. 오늘날 이 세상 사람들은 거의 99.999퍼센트가 허상에 묶여 사는 거예요. 그야말로 망상에 묶여 살아요. 꿈이에요. 그냥. 아무것도 아니에요. 실상은 어린양의 얼굴 앞에 우리에요.
이것은 하나의 연극이에요. 연극. 없어지고 사라져야 할 꾸며낸 연극이고 무대장치입니다. 무대장치는 사라지고 어린양 앞에 우리입니다. 나머지는 다 사라지고 없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설교를 했습니다. “무엇이, 어떤 것이 어린양을 가리느냐? 철학, 경제, 사회, 이런 것들도 가리지만 특히 가정과, 교회와, 신학. 이런 것들이 어린양을 가리고 있어요. 어린양의 진노”
신학박사가 어린양의 진노를 가릴 수 있습니까? 신학박사 될 생각 하지 말고, 예수님 앞에 자기를 내놓으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지난번 설교에서 이런 소리를 했잖아요. 어떤 사형수가 있습니다. 한 번도 교회를 나오지 않던 사형수입니다. 찬송도 모르고, 교회가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모르고 십일조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 사형수가 비오는 날 철벅 철벅 사형장으로 걸어가면서 마지막 요한계시록의 이 성경쪼가리의 말씀을 보고 어린양의 보좌 앞의 진노에서 아무도 설수 없음과 예수님의 주권을 믿는다면 그 사람은 구원받잖아요. 그걸로 되었잖아요. 뭐가 더 필요한데? 왜냐하면 그 사람은 직접 현실을 느껴요. 현실을.
우리도 그 현실 속에 있는데 왜 어린양의 진노가 안 보이느냐 하면, 가상현실, 이 상상력에 의해서 생겨난 것들, 이 상상의 산물인 가정, 망상의 산물인 교회, 역시 망상의 산물인 국가, 이런 것들이 어린양의 보좌를 가리고 있으니까 우리는 이런 것들을 현실로 보잖아요. 지금 이 논의가 어린양의 보좌가 아니라, 이 중간에 놓여 있는 이것이 과연 망상이냐? 실제는 어디 있느냐?
이런 논의가 ‘포스트모더니즘’, ‘장 보들리야르’와 ‘알튀세르’라는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많이 논의가 돼요. 그것을 좀 설명해 드리면 이렇습니다. ‘장 보들리야르’의 「시물라시옹」이라는 책에 보면, “가상세계가 실제세계를 정복함으로 말미암아, 이제 실제세계라는 것은 가상세계의 새끼로서, 가상세계가 만들어낸 실제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실제들’ 밖에 없죠. ‘실제’는 하나가 아니고, ‘실제’가 많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어떻게 많은가? ‘알튀세르’의 이야기를 들어 봅시다. ‘마르크스주의’를 먼저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이렇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문명과 재산등 가치있는 것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노동에 의해서 얻어진 것이다. 그러면 돈이나 이런 가치있는 것들은 누구에게 돌아가야 합니까?
노동하는 노동자에게 돌아가야 하는데, 이것이 노동자에게 가지 않게 중간에 가로채는 놈들이 있더라는 겁니다. 그것을 ‘자본가’라고 합니다. 물론 ‘자본가’가 다 가로채지는 않아요. 그런데 자본의 이자보다 더 많이 가로채기 때문에 그들은 계속 투자할 의지가 있게 됩니다. 이자 받아 먹을것 같으면 은행에 집어넣고 말지 무엇 때문에 투자하겠습니까? 투자하겠다는 것은 은행이자보다 더 크게 이익 볼 수 있을 때만 투자하거든요.
그런데 그 투자의 원천을 조사해보니까, 그 투자가 결국 자기가 도로 가져갈 몫이 아니에요. 다만 노동자의 노동의 가치가 50이라면 그것을 40으로 낮추고, 10을 빼먹는 식으로 가져가기 때문에 그들을 계속해서 또 투자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것을 잉여가치에 대한 착취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계급이 두 가지 밖에 없는데, 하나는 노동자계급과 그것을 가지고 즐기는 계급인 자본가계급인 두 계급밖에 없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자본가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시장터에서 사람들이 물건을 팔고 사면서, 교환하면서 그 가치를 빼먹는 식으로 하고 있다고 봤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사회를 살아보면서 죽 보니까,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난 뒤에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계급이 노동자와 자본가로 따로 나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노동자 자체가 자본가의식을 가지고 있으면 자본가고 자본가가 노동자의식을 가지고 있으면, 그게 자본가라 할지라도 노동자에 속한다는 겁니다. 일률적으로 두 패로 나뉘어지는 것이 아니더라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나뉘어지는가? 군데군데 나눠지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병원에 가면 누가 있습니까? 원장님 계시고, 간호사가 있죠. 그러면 누가 노동자입니까? 간호사가 노동자고, 원장님은 투자자니까 잉여가치를 가져가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원장님은 교회집사님이고 그 간호사의 남편이 교회장로님이고 본인이 권사라면, 교회에 가게 되면 누가 더 높아요? 권사가 집사보다 한 끗 높잖아요.
이쪽(교회)에서는 누가 사용자입니까? 권사가 집사보고 “헌금 좀 내란말야. 교회 돌아가는 것 보고 돈 좀 내라”고 닦달 낸다고요. 그러니까 옛날에는 전체를 두 패로 나누었는데, 지금은 교회에 가면 교회 나름대로의 나누는 패가 따로 있고, 병원이면 병원, 감옥이면 감옥, 학교면 학교, 가정에서는 가정마다 패가 따로 나눈다는 말이죠.
옛날에는 가정에서 남자라는 이유로 억압을 했는데, 지금은 남자가 놀고 여자가 돈벌면, 여자가 위에 속합니다. 여자가 힘을 행사해요. 남자는 제발 헤어지지 말자고 싹싹 빌어야 합니다. “제발 좀 살아줘. 같이 좀 살아줘 제발 좀 자식을 위해서 살아줘.” 마누라고 좋아서 사는 것이 아니고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그래요.
공통점은 뭐냐? 전부 다 경제적 문제인데, 옛날에는 국가를 경제적으로 총괄적으로 두 패로 나누었는데, 지금은 그게 아니고, 가정이면 가정, 병원이면 병원, 이런 식으로 그 안에서 이런 원리들이 다 작용하더라는 말이죠. “목사님! 지금 경제이야기만 하면 안돼잖아요?” 하는데 제가 지금 경제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이런 경제적인 토대 위에서만 비로소 양심이라는 것, 신앙이라는 것, 의롭다는 것, 선함이라는 것이 여기서 나와요.
마음이 곱다고 선한 것이 아니라, 돈을 갖고 있을 때 선한 사람이 돼요. 돈을 얼마나 내놓을 수 있느냐가 선한사람의 기준이에요. 돈 못 내놓으면 선한 사람이 아닙니다. 돈이 없는 사람은 가치가 없는 사람이에요. “나 마음은 착한데요.” 그것은 소용없는 거예요. 착한 마음이 돈으로 될 때 선한 겁니다. 착한 맘을 보고 선한 것이 아니고, 돈이 된다는 이유 때문에 선한 겁니다.
이것은 모든 단체에서 다 마찬가지에요. 가정, 회사, 국가, 다 마찬가지에요. ‘알튀세르’같은 사람은 이것을 가지고 현실이라고 본거에요. 그래서 ‘알튀세르’가 뛰어나고 유명한 사람입니다. 고전주의 경제학자인 ‘아담스미스’는 보수주의 학자이고, 「자유론」을 쓴 ‘존 스튜어트 밀’이라는 사람은 자유주의입니다. 여기서 나온 자유주의가 또 있어요. ‘하이에크’, ‘노직’, ‘롤즈’ 이런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아담 스미스’는 “능력대로 살도록 놔두라”는 겁니다. “시장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유지되기 때문에 안될놈은 나가버리고 될 놈만 되도록 하자”는 겁니다. 안될놈 백날 붙들고 있어봐야 발전이 안된다는 거예요. 될 사람은 엘리트 교육을 해서 되게 하고, 안될 인간은 천대하고, 도태시켜 버려야 나라가 발전이 된다고 보는 겁니다.
여기서는 자연스러운것이 가장 선한 거예요. 무슨 뜻이냐 하면, 경쟁을 통해서 선을 이루는 겁니다. 만약에 여기서 ‘평등’이라든지 ‘균등’이 나서버리면 다같이 거지꼴을 못면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존 스튜어트 밀’은 한걸음 양보해서 “기회는 줘야 할것 아니냐?” 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공무원시험을 치는데, ‘공무원 시험은 이렇게 치른다’는 법을 정할 때, 가진자가 의회에 진출하게 되고 의회에 진출한 가진자는 가진자 입장에서 법을 제정하거든요.
그렇다면 의회에 진출한 가진자들, 좀 산다 하는 사람들이 자기 자식들을 공직 - 공직이란 국가로부터 봉급을 받는 거잖아요. 국민의 세금을 거두어서 주는 거죠. - 에 집어넣기 위해서 자기한테 유리한 쪽으로 법을 제정할 수가 있지요. 그래서 옛날 조선시대 때 뭡니까? ‘공직은 양반만이 된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양반만이 된다’는 법을 누가 정했습니까? 양반이 정한 거예요. 저희끼리 정한 거예요. 그러면 상놈들이 “왜 너희끼리 법을 정하냐?” 하면, “국가를 지키는게 누구냐?”고 나오죠. 옛날에 공장이 없을 때는 토지가 재산이었잖아요. 토지만 상속된다면 계속 토지의 값은 상승되는 겁니다. 그러면 처음에 토지를 받을 때 어떻게 받느냐? 나라에 큰 공을 세울 때 받습니다.
‘5대손이 장군이며, 6대손이 좌의정이다’ 하면 나라에 세운 공로가 있기 때문에, 옛날에는 벼슬아치들이 장군들이었거든요. 주몽에 나오잖아요. 오이, 마리, 협보, 등등. 그런 사람들이 땅을 받아요. 그 땅을 자기대가 끝나면 국가에 다시 반납을 해야 하는데 반납을 안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반납하라고 하면 왕에게 으름장을 놓으니까, 왕이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반납이 아니고 계약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세습제가 됩니다.
원래 봉토라는 것이 월급을 받는 식으로 받는 것이 봉토인데, 나중에는 봉토가 세습이 되면서 봉건주의가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한번 귀족은 영원한 귀족이 되어 버렸어요. 농민들은 아무리 해도 귀족이 안돼요. 그래서 반발을 하는데 그때 당시 중세의 신앙이 뭡니까? 하나님(일자)에서 누스(이성). 그 다음에 누스(이성)에서 영, 영에서 그 다음에 자연. 이 자연에 순서가 있는 것은 신께서 인간에게 총기와 예지력(지혜)를 준 양 만큼 서열이 매겨질 때 나라의 꼴이 되니까, 농부로 태어나서 천대받는 것은 신의 운명이고 섭리이니까 거스를 수 없다는 겁니다.
농민이 귀족에게 대드는 것이 아니고, 귀족에게 지혜를 준 하나님께 대드는 것이 됩니다. “대들면 죽인다. 대드는 인간을 죽이는 것은 신의 뜻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옛날 중세때는, ‘왕 - 귀족 - 기사 - 농민’, 이런 순서로 계급이 지워져 있었고, 그 밑에는 아예 계급도 없는 천민들, 노예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숫자는 누가 더 많은가? 노예들이 더 많아요. 로마시대같은 경우에, 로마시의 70%가 노예들이었습니다. 30%가 70%를 계급제로 해서 완전히 묵사발 만드는 거예요. 노동은 노예들이 다 하고, 귀족들은 시와 음악 예술을 즐겼어요. 이것은 구약의 바로왕도 마찬가지죠. 히브리인들은 실컷 벽들을 만들기 위해서 노예살이를 한거예요.
히브리인들 가운데 노래 잘하고, 춤 잘추는 사람들 있어요. 깡그리 무시됩니다. 노예의 예술은 예술이 아니고, 가진 자의 예술이 예술이에요. 히틀러가 유대인들 가운데 똑똑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잖아요. 알아도 그들에게는 죄수유니폼을 입혀서 다 포로수용소, 아우슈비츠에 집어넣어 버렸어요. “너희의 똑똑함은 똑똑함이 아니고, 우리 게르만족의 똑똑함만 똑똑한 것이 된다”는 거예요.
민족이 다르고, 피가 다르기 때문에 노래를 아무리 잘해도 잘하는게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은 기회를 아예 꺽어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존 스튜어트 밀’은 “안되는것은 어쩔수 없더라도 기회는 줘야 되지 않느냐?”하는 겁니다. 그래서 공무원 시험에서 계급을 철폐해 버렸어요. 나이, 성별, 학력, 장애정도 등, 다 무시하고 사법시험을 다 공평하게 치는 겁니다.
기회의 균등을 주되, 합격된 자에게는 특별대접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왜? 합격된다는 것은 그만한 책임과 노동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것은 차별을 둬야 한다는 것이 ‘존스튜어트 밀’의 주장입니다. ‘존 스튜어트 밀’에 근거해서 현대의 모든 관료, 행정체제가 다 돌아가고 있어요.
그 뒤에 ‘롤즈’가 나옵니다. 자. 법은 똑똑한 자, 가진 자가 정하죠? 그럼 법은 자연적으로 누구에게 유리하도록 되어 있습니까? 이미 가진 자, 이미 똑똑한 자에게 유리하게 되겠지요? 한번 법조계나 의학계에 들어온 사람은, 한 달 수입이 많기 때문에 다른 애들보다 과외를 많이 시킬 수가 있지요. 학군도 좋은 학군에 가면 경쟁이 되지요.
촌에서 일등을 해봐야 자기보다 더 잘하는 학생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는 일등이지만 나중에 도시에 가보면 자기 반에서 중간도 안돼요. 왜? 경쟁의 대상이 수위가 낮기 때문에. 대충 공부를 해도 일등을 했는데, 강남의 애들은 대충 공부해서는 안되고, 바싹 해도 중간이라. 그래도 강남의 중간이 촌의 우등생 보다 뛰어나거든요.
다시 이야기해볼까요? 애들이 클 때 가지고 있는 그 지혜의 수준이라는 것은, 그 둘러싼 환경에 의해서 수용되는 것이거든요. 제공되는 것이란 말이죠. 요즘 애들은 심청이 이야기를 하면 잘 못알아 듣잖아요. 성장과정에서는 대화자체가 안되잖아요. 개념이 차이가 나니까 같은 이야기를 해도 낮춰서 이야기를 해야지, 그냥 이야기를 하면 그 애가 무슨 말인지를 못알아 듣는다니까요.
그래서 격차가 벌어지니까 이렇게 했습니다. 가진 자가 계속 우위에 서버리면 그들은 계속해서 떼돈을 벌 것이 아닙니까? 자본가들은 계속 공장에서 물건을 생산하는데, 그 물건을 누가 소비해줘야 합니까? 소비는 노동자들이 해줘야 할 게 아닙니까? 노동자들이 월급을 적게 받다 보니까 구매력이 떨어지잖아요.
mp3를 시장에 내놓아도 살수가 없는 거예요. 왜? 밥 먹고 사는 것도 겨우 겨우 하는데, 언제 이런 고가품을 사겠습니까? 또 한가지. 없는 사람에게 배려할 때, 이것은 숫자에 고려되지 않는 충성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충성심. 애사심. 인정. 맹목적인 복종이 있어요. 그것이 생산의 능률을 급증시켜요.
지금 여기 쉼터의 아이들이 목사님 내외분에게 반항심을 세게 표현하면, 목사님은 같은 음식을 먹어도 괴롭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이들이 잘 따라주고 순종을 잘하면, 반찬이 좋지 않아도 밥 먹는 기분이 좋아지지요. 이것은 아이가 애정을 받게 되면 - 심지어 개도 자기를 예뻐하는 주인을 안다고요 - 애정을 쏟아준 사람에게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재정적으로, 그 비용을 절감시키는 효과가 있어요. 왜냐하면 애를 먹이지 않으니까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사회가 서로 사랑하면, 경찰관이라는 직업을 없애고 전부 다 이런 쉼터만 만들면 됩니다. 범죄가 없는데요. 그런 영화 있었지요? ‘투캅스’란 영화에 보면, 하도 범죄가 없으니까 나라에서 파출소를 폐지하려고 해요. 그러니까 답답해서 일부러 범죄를 만들어 내려고 하잖아요.
아예 아픈 사람이 없으면 의사가 좋습니까? 안좋습니까? 아픈 사람이 아예 없으면 참 좋은 세상인데 의사는 곤란해지겠죠. 그때는 의사가 다른 직업을 찾아 나서야겠죠. 어차피 세상은 이상사회는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배려해 준다는 것이, 계산상 따져보면 오히려 배려 안해준 것보다, 심하게 매질하는 것보다 훨씬 값이 덜 들어가죠. 그런 쪽으로 복지정책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 ‘롤즈’의 이론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가지고 ‘수정자본주의’라고 합니다.
그런데 방금 이야기한 모든 것들은 다 어디에 기초합니까? ‘이 대자연에서 노동을 해서 얻어진 경제적인 그것이 나의 생명의 원천이 된다’는 그 논리죠. 이 논리에 대해서 반대하거나 부정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무도 없지요. 그런데 요한계시록 6장을 우리가 봤잖아요.
이게 전부 다 가상현실이었다는 것으로 날라가 버리고, 진짜 우리를 살리는 것은 대자연 바깥에 주시하고 있던 어린양의 보좌, 그분의 주신 죽음에서 이긴 생명만이 우리의 생명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에게 복종해야 된다는 거예요. 모든 이론을, ‘알튀세르’라든지 이런 모든 이론을 다 파기하고, 오직 그리스도에게 복종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생명입니다. 자, 요한복음 20장 30절, 31절입니다.
(요한복음 20:30,31)
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다른 표적도 많이 행했지요?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했는데,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왜 다른 표적들이 많이 있는데 그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요?
도마가 지금 예수 믿고 얻은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얻은 것이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냥 창자국에 손 넣어 보고, 예수님 손 만져보고, ‘아, 내 대신 돌아가셨구나’ 그거 알뿐이지 뭘 얻었습니까? 아까 말한 경제적인 효용이 뭐가 있습니까? 없잖아요. 없는데 이런 도마의 이야기는 왜 기록했습니까? 이런 경제적인 효과라는 것이 영생을 가리는 그런 표적밖에 안된다는 겁니다.
더 쉬운 예로,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했지요? 그 때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일단 반대했잖아요. “여자여, 그것과(경제적인 문제)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 하면서 기적을 행하는데, 그 기적이 첫 번째 기적이 아니고, 첫 번째 표적이라고 합니다. 표적이에요.
단어는 같은 뜻이지만, 그냥 단순한 기적이 아니고 표적이라는 것은, 인간들이 의미하는 기적 자체의 의미는 빠지고, 뭔가 표적을 행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쏠리게 하는 방향성을 지닌 어떤 기적. 그러니까 기적에서 얻은 것을 버리고 달려가야 될 그분. 그것이 요한복음 6장에 나옵니다.
‘오병이어’, 떡 얻어먹고 고기 얻어먹었는데, “야! 떡이다” 하면서 경제적인 효용을 원하고, 이거면 되었다고 달려 왔을 때, “아니다. 네가 얻어먹은 것 전면적으로 거부해라”고 합니다. 얻어먹었는데 어떻게 부인합니까? 이미 얻어먹었는데. “그거 신경 쓰지 말고 내가 주는 떡은 내 살과 피다” 했을 때 그들은 다 떠나고 말았죠.
사실은 오늘날 한국교회는 다 떠나야 돼요. 주일날 모여야 될 사람들이 아닙니다. 다 떠나야 될 사람들이에요. 열두제자도 예수님을 떠났지요. 가룟유다는 자살로서 떠났고, 나머지는 무섭다고 예수님을 포기했지요. 그런데 예수님 쪽에서 다가왔잖아요. 아버지가 내게 보내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수 없다는 뜻에서. 예수님이 다가오시는데 그 다가오는 방식이 뭐더냐 하는 겁니다.
그 표적이 뭐였습니까? 병고침이었습니까? ‘오병이어’였습니까? ‘오병이어’같으면 다 떠났어요. 아니지요? 물위를 걸었습니까? 그것도 아니지요? 물이 포도주 되는 것이 신기하잖아요. 여기 물이 있는데 “이얍” 하니까 포도주가 되었어요. 그러면 정말 신기한 거잖아요. 하지만 “이걸 떠나라” 이 말이죠.
포도주는 포도주고 이게 되더라도 이걸 떠나야 된다는 말이죠. 왜? 무엇을 위해서? 우리가 전해야 될 ‘그 손의 못자국과 창 자국’을 위해서 이걸 포기해야 된다는 말이에요. 떠나야 된다 이말 입니다. 만약에 진작부터 예수님의 죽음이 생명인 것을 알았더라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난 뒤에 그들은 세상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았겠죠.
세상이 무섭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이 세상 사람보다 처진다는 이야기밖에 안되잖아요. 예수님의 주신 생명이 정말 세상 천하보다 더 능력이 있다면, 세상을 구태여 무서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옆에 최홍만이 강호동이같은 덩치가 옆에 붙어 있으면서 “형님!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이러고 있는데, 되도 않는 깡패 한 놈 왔다고 “아이고! 무서워라” 하는 것은 결국은 누구를 모독하는 거예요.
옆에 있는 최홍만이나 강호동의 능력을 아주 우습게 짓밟는 것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교회와서 축복 달라는 것은, 그 소리가 무슨 소리냐 하면, 예수님을 짓밟아 버리는 소리에요. “예수님 당신이 그따위 식으로 할거면 나를 떠나세요.” 그것과 똑같다고요. 그러니까 교회가 예수님을 모독해요. “서울대에 몇 명 합격했습니다.” 이런 것이 다 예수님의 생명을 모독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뺨을 때리는 것과 똑같습니다. 밑에 있던 로마 군병은 예수님이 귀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입던 옷이 귀했어요. 그래서 저희들끼리 ‘가위, 바위, 보’를 해서 예수님의 옷을 차지하려고 했지요. 예수님의 껍데기는 좋아하고, 생명은 버리는 것. 세상의 미련한 놈이 조개의 알맹이를 먹어야 할텐데, 조개 알맹이는 버리고 껍데기를 씹어 먹어요?
대게 같은 것은 알맹이, 속살을 먹어야지 껍데기나 씹고 있으면 그것은 웃기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인간들이. 알맹이 이야기를 했다고 이단이라고 소리치고요. 모든 이론을 파한다는 것은, 어린양이 살아 계신 것이 현실이니까, 심지어 교회, 가정, 종교, 신학마저도 어린양을 가리는 역할을 한다는 거예요.
참, 오늘날 교회에서 이 가정 문제 - 가정에 일이 있어서 교회 못나온다는 - 이거 참! 도데체 당신은 그럼 무슨 낙으로 살고 무슨 힘으로 살고 무슨 보람으로 삽니까?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말씀으로 산다고 했는데. 예수님의 생명이 결국 내 목숨보다 무가치 하다는 것 밖에 안되잖아요.
사실은 주님이 우리의 그런 면을 이해해요. 왜? 도마도 그랬고, 열두제자도 다 그랬으니까 이해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으로 찾아오신 거예요. 우리를 이해하기 때문에. 이해하기 때문에 아직도 안산모임이 끊어지지 않고, 주께서 이해하시기 때문에 이 생명이 “그 이름을 힘입어” 오는 겁니다.
“그 이름을 힘입어”가 무슨 말이냐 하면, 힘, 능력이 이름을 가진 분에게서만 나온다는 말입니다. 이름이라는 것은 어떤 실체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름이라는 글자가 중요하다는 말이 아니고, 실체가 있기 때문에 이름이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없으면 예수님이라는 이름도 없어요. 예수님이라는 실체가 살아 계시기 때문에 “주 예수”의 이름이 의미가 있는 겁니다.
“주 예수 이름”으로라는 것은 뭐냐? “예수님이 살아 계신 것을 믿습니다”하는 뜻이에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 주심을 믿습니다” 하는 뜻입니다. “누가 키를 한자나 더할 수 있느냐?” 마태복음 6장에 나오지요? 정형외과 의사입니까? “누가 키를 한자나 더할 수 있느냐, 누가 공중의 새를 기르느냐?” 이 말은, “주 예수의 이름을 믿는다”는 이 말은, “지금 예수님은 살아 계셔서 나에게 생명을 직접 주고 계심을 나는 믿습니다” 하는 뜻이에요.
이근호가 없는데 이근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의미가 없잖아요. 있으니까 ‘이근호씨!’라고 이름을 부르잖아요. 이름이라는 것은 이름에 걸맞는 실체가 있다는 뜻이에요. “주 예수님”을 부른다는 말은, 이름만 달랑 외운다는 뜻이 아니고, “저는 예수님 품에 제 몸을 던지겠습니다.” 그런 뜻이라는 말이죠. “그 예수 이름에 던져진 사람은 생명을 얻으리라.”
“너는 아니다”는 말입니다. “생명은 나에게 있지 너는 아니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네 이름을 포기하고 내 이름만 의지하라는 말입니다. 내 능력에만 의지하라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 창자국과 못자국을 봐라. 내가 너와 함께 죽었다”는 겁니다. 로마서 6장 한번 봅시다.
저는 감사한 것이, 이런 복음적 이야기가 아직도 안산 땅에서 이야기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해요. 아직도 이런 진리가. 다른 복음은 안되거든요. 다른 복음은 저주받아요. 진짜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이것이 아직도 이야기가 되는 곳이 있다는 것, 이야기가 되는 공간이 있고, 시간이 있다는게 참!
(로마서 6:3,4)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 보면 4절에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무엇이 되었나니? 함께? “장사되었나니.” “함께 장사되었다.” 이것을 길에 가는 사람을 붙들고 “당신이 장사되었다”고 하면 귀싸대기 얻어맞을 일입니다. 지금 세포가 살아 있는데 죽기는 누가 죽어요. 아직 나이가 창창한데 죽기는 누가 죽어요.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이나, 습성, 습관, 사고방식, 사상, 이것을 비켜 갑니다. 어린양에서 직접 내려 쪼이는 식으로 우리에게 이야기를 걸어와요. “어린양이 죽었다고 하면 죽은 거야!” “숨 쉬고 있더라도?” “숨 쉬고 있더라도 죽은 것은 죽은 거야.” 장사지낸 거예요.
그리고 우리보고 죽었다고 하는 말보다 더 심한 말이 우리보고 살았대요. 결국 우리보고 살았다는 말은 이제 우리가 숨 쉬는 것을 사는 것으로 보지 않아요. 그것은 죽은 걸로 간주해요. 결국 살았다는 말은 우리 속에 살아 계신 분이 있다는 거예요. 우리 안에 함께 죽고 함께 사신 분이 있기 때문에 살았다는 거예요.
그것을 ‘관계론적’이라고 합니다. ‘관계론적.’ 어떤 사람이 “어떤 때는 자신이 성도라고 느끼다가도, 어떤 때는 못느낀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하루에 1.5초라도 성도라고 느낀다면 그것은 참 대단한 것이다”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그럼 목사님은 성도 안되었다가 또 성도가 된다는 말입니까?” 이렇게 오해하는 사람이 있어요.
여러분! 여기 부부가 계시는데, 하루 종일 아내 생각만 어떻게 합니까? 24시간 아내생각 못하지요? 안되잖아요. 안되지요. 안 된다는 말 자체가 말이 안 되지요. 오히려 한순간이라도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참 귀한 남편이지요. 그러면 생각이 안 될 때는 남편이 아닙니까? 아니지요? 그걸 ‘인식론’이라고 합니다. ‘인식론.’
‘인식론’은 ‘존재론’이 아닙니다. 존재가 있더라도 인식될 때가 있고 안 될 때가 있어요. “목사님!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까?” 할 때에, “가끔 가끔 예수님 생각하면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그분이 오해하기를 “그러면, 그리스도인 되었다가 안되었다가 그렇게 되느냐?” 이 말이죠. “안될 때는 죽은 놈이고, 될 때는 산사람이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인식론과 존재론을 오해한 거예요. 제 말을 오해한 거예요. 부부가 늘 서로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부부 맞아요. 그러나 늘 생각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예수님이 우리 구주 맞습니다. 하지만 늘 생각나지는 않아요. 그러나 생각이 난다는 것은 우리 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주의 능력이 임해서 그렇다는 말이죠.
그러나 아무리 강요해도, 심지어 예수를 생각하려고 애를 써도, 자기를 위한 예수를 생각할 때는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나 같은 인간도 주께서 구원하셨다’ 그런 생각이 들어야 그리스도의 사람이지, ‘내가 믿어줄 때만 그리스도의 사람이지’ 이러면 그것은 여전히 자기중심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이 말이죠. 그리스도인이 아니에요. 될 수가 없습니다.
로마서 6장에서 “이미 함께 죽었고.” 그것도 어렵지만 “뭐가 죽었어? 내가 살았는데!” 이것도 어렵지만, “함께 살았다”가 더 어려워요. 이게. 왜냐하면, 지금 사는 것을 자꾸 살았다고 우기기 때문에 그래요. 지금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고 죽어가고 있는 거예요. 이것을 살았다고 한다는 말은, 우리를 통해서 주께서 십자가의 복음을 담는 것이 우리를 통해서 흔적이 빛처럼 발산될 때 ‘아, 내가 이미 내 몸이 아니고, 이미 주와 함께 죽고, 주와 함께 부활된 몸으로서 주께서 지금 다루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낄 때, 이것을 가지고 로마서 6장에서는 ‘의의 종’이라고 합니다. ‘의의 종’
의의 종인데 그 결과가 뭐냐? 22절에 보니까 ‘의의 종’은 그 결과가, 그 열매가 뭐라고 했습니까? “죄의 삯은 사망”이지만, “의의종의 결국은 영생”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영생’을 토하고 있는, ‘영생’을 발산하고 있는 성도가 되는 겁니다. 저는 예수 안 믿고, 복음에 관심 없는 사람들이 지금 뭐하고 있느냐 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에게 복종치 않고 있는 현상이라고 봐요.
자기는 중립이라고 보는 거예요. ‘내가 믿어주면 믿고’, 이런 식으로 생각하거든요. 그것이 아니고, ‘내가 믿을까? 말까?’ 그렇게 하고 있는 자체가 지금 그리스도에게 복종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이고, 그 증거의 뜻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주위에서, 가정이 어떻고, 국가가 어떻고, 핵폭탄이 어떻고, 이런 식으로 하니까 여기에 관심이 있고, 실제로 어린양의 보좌의 따가운 눈총에는 관심도 없어요.
세상의 주위 사람들이 ‘콩나물 가격이 올랐니, 석유값이 어떠니, 북한 핵이 어쩌고’ 하는 뉴스거리들이 나오면 여기에 대해서 관심 두고요. 이것이 전부 허상인데. 그 허상에서 반발하기도 하고, 동조하기도 하면서 그들은 이것을 가지고 ‘생명’, 이것을 가지고 ‘사는것’, 이것을 가지고 ‘목숨부지하기’라고 하거든요.
사람의 목숨은 죽는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놈도 부활시켜요. 지독해요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는데 죽은 놈도 무덤 속에서 끄집어내서 심판해버립니다. 아까 뵌 그 일하시는 분이 교회 안다니고 예수 안믿지요? 그 사람들이 설거지를 하고, 열심히 봉사하고, 여러 가지 일을 했지만 사고방식이 뭐예요? 논의하는 화제거리가 다 뭐예요?
어린양의 무서운 진노의 빛이 아니잖아요. 그러면 그들은 주워 들은것을 자기 인생관으로 삼는 거예요. 주워들은 것을. 맹목적으로요. 아무 목적도 없어요. 그래서 그리스도에게 복종치 않아요. 그리스도에게 복종치 않으면 나중에 무엇을 준다? 고린도후서 10장을 다시 봅시다. 고린도후서 10장 6절부터.
(고린도후서 10:5)
5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6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여기 보면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뭐하려고?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도다. 누가요? 누가 벌하신다고요? 지금 우리가 복종하는 그리스도가요. 이 소식을 누구보고 전하라고요? 우리보고 전하라는 거예요.
우리는 죽은 자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전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속에 있는 ‘함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분의 능력’이 임하면, 우리는 이것을 증거 하는, 우리 속에서 그것이 발산되는 그런 순간들이 올 거예요. ‘내가 왜 이러지? 내가 이런 소리를 왜 하지?’ 할 정도로. ‘내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이런 모습이 왜 나오지? 아! 이것이 내 몸이 아니구나. 내 운명이 이미 끝나버린 나는 이제 죽은 놈이구나.’
사람이 나이 들어서 더 산다고 해서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에요. 이미 죽었어요. ‘이미 함께 장사되었다’고요 아까 봤지요? ‘이미 장사되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뭐라고 하느냐? 연세가 있는데 아직 안 죽었다는 거예요.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환상에 의해서 만들어낸 가치관이고, 그 배후에 계신 어린양의 보좌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미 너는 죽었고, 이미 너는 살았다”는 거예요.
그것은 세상 사람들 인식에서 함께 놀 필요 없다는 겁니다. 물론 동조는 안하죠. 그런데 함께 울고불고 할 필요가 없다 이 말이죠. 그들이 울고 웃는 것은 전부다 이 세상 안에, 이 자연세계의 하늘의 별과 달과 햇빛 아래서 논의되고 있는 그것 때문에 ‘울고불고, 좋았다가 나빴다가, 인생이 괜찮았다, 성공했다, 행복이니 불행이니’ 하고 있다 이 말이죠.
드라마보세요. 전부다 이거 아닙니까? 소서노나 대소왕자나 주몽이 언제 어린양을 이야기 하던가요? 말 타고 다니면서 부여 이야기만 하지 어린양은 안 나오잖아요. 연포왕자가 어떠니, 계루부족이 어떠니 그런 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