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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woorich070224d-인간구원을 위한 신학구조(4) 녹취자유게시판[신학]

woorich070224d-인간구원을 위한 신학구조(4) 녹취

이름 : 한윤범(IP:59.6.189.212)

woorich070224d-인간구원을 위한 신학구조(4)

(강의:이근호 목사)

육적인 사람들의 종교적인 욕구를 만족, 법을 만족하기 위해서 다른 말로 하면 변명거리를 제공하기 위해서 그 짓하는 거예요. 변명거리, 당신은 구원받은 사람 맞습니다. 왜 이렇게 생각하고 사니까. 변명거리. 법을 율법을 계속 주는 거예요. 아까 이야기한 계속 저주받은 사람에 해당되는 법을 줘버리는 거예요. 그것은 결국 그리스도의 복음을 계속 가리는 역할을 하겠죠. 완전히 점점 더 이단 되게 하는 거예요.

-본인은 그거 모르잖아요.

성령 안 받았으면 모르죠. 그런데 안 하는데 그걸 일러 주면 반발하죠.

끝으로 한 시간만 합시다. 그래 뭐 참았고. 한 시간만 합시다.

이 교재에 보면, [사람들은 상징의 질서 속에서] 상징은 질서가 아닙니다. 그런데 상징이 질서가 돼버리면 은혜가 돼버리죠. 상징은 질서가 아닌데 상징은 질서 속에서. 상징은 질서를 가져버리면 이것은 바로 은혜가 되죠. 다른 말로 하면 뭐가 됩니까? 법이 돼요.

모든 언어는 명령법입니다. 그 모든 언어가 다 명령법이에요. 비가 온다. 다 명령법. 눈이 내린다. 우에라고. 눈 봐라. 눈 봐라든지, 옥상에 장독 닫아라든지 무슨 어떤 명령이에요. 사진기 들고 나오라는 뜻인지, 낭만을 모른다는 뜻인지, 눈 온다 이 말은 외투 입고 나가라는 뜻인지 어떤지 간에 그 상황과 문맥과 전체, 그게 하나 명령이에요.

명령이라는 것은 자신의 세계 속에 타인을 초청하는 겁니다. 지배하는 거예요. 타인을 내 세계로 지배하는 거고, 그 명령을 거부하는 것은 타인의 세계가 자기한테 점령당하는 것을 거부하는 겁니다. 눈이 내리는데. 우째라고. 우에라고. 한두 번 오나. 이러면 그거는 거부죠.

이처럼 각자의 꾸는 환상을 꾸는데, 그 환상은 뭐냐 하면, 이 상징으로 만족하면 좋겠는데 이 상징세계가 타인들에 의해서 자꾸 깨어져요. 또 새로운 상징이 등장하니까. 상징이 깨어진다는 것은 주체가 안정감을 찾지 못해요. 35평 아파트 사서 주여,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했는데 나중에 십년 지나니까 재개발 들어가더란 말이죠. 주체가 안정감을 찾지 못해. 주체의 분열입니다. 그러면 이젠 50평짜리 새로 입주하던지 해야 돼요. 흔들리니까.

그런 식으로 가는데 그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심리에서 그런 사람 말고 가스통? 메를 퐁티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말하기를 그것은 심리적인 것이 아니고, 인간의 신체 자체가 흙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죽음으로 가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 이래 보는 겁니다.

사람이 젊을 때는 모르지만 젊을 때는 나이를 몰라요. 그러면 늙을수록 자기 나이 계산에 더 나이 모른다고 하지만 나이 계산에 집착을 합니다. 젊을 때는 젊음이 나이를 대신해요. 늙음은 대신할 게 없기 때문에 나이 가지고 버티는 겁니다.

만 오십팔 년, 뭐 육십 해도 되는데, 만 오십팔 년 이 개월 해서 기어이 높이고자 하려고. 상징, 숫자. 숫자가 상징. 이십 아홉 살, 서른 살. 스물 팔 세 오 점 해서 삼십이란 상징을 안 벗어나려고 그만큼 발버둥하지요. 근데 신체 자체가 여기 글에 보면, [신체가 주체를 끌고 간다. 최종목적은 부셔져서 죽는 것이다. 부셔진다는 삶의 죽음을 우회해서 천천히 가고 있다.] 삶은 죽음을 우회해서 그러니까 천천히 가는 거예요. 다만 죽는 건 마찬가지고.

천천히 지연시키면서 즐거움을 통해서 죽음을 잊도록 하는 조치가 뭐냐? 새로운 인간의 욕망을 생명, 아까 처음에 있는 욕망을 뭐라 했습니까? 태어날 때 갖고 있는 생명 자체지요. 그걸 조금씩, 조금씩 발산해서 쾌락을 그걸 '잉여쾌락'이라 하는데 잉여쾌락을 즐기면서 자기 자신을 즐기면서 그만큼 또 깨지면서 그것으로 어떤 즐거움을 찾으면서 죽음의 아픔을 깨지는 아픔을 지연시키는 쪽으로 간다.

결국 이것은 인간은 계속 안에 쾌락을 즐기기 위해서는 욕망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이 안에 상징을 지켜놓고는 다시 텅텅 비게, 텅 빈 공간으로 자기가 만들어버려요. 하나 지켜 놓고는 비게 만들고.

이런 겁니다. 어, 삼성이 우승했으면 좋겠다. 우승하고 난 뒤에는 갑자기 뭐가 있는가? 텅 비지요. 또 뭐 없나? 또 뭐 없나, 또 다른 거 없나? 이래 되지요. 스포츠신문에서 프로야구 끝나면 할 게 없잖아요. 스포츠신문 프로야구 끝나고 나오는 게 뭐냐 하면, 누구 자살한 거 랄지 연예인 ( ) 심지어 이승엽 훈련한 것까지 나오고. 하도 낼 거 없어서. 이게 뭐냐? 텅 빈 걸 채워 넣어야 돼요.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교회 왔다가 빠져나가는 이유는 교회가 잠시 텅 빈 곳을 채워 넣었을 뿐이고, 그 다음에는 또 다른 즐거움을 향하여 질주하기 때문에 교회 안 나오는 겁니다. 따라서 그걸 보충할 계속해서 교회에다 그걸 붙들고 있으려면 계속 채워줘야 되거든. 채우기 위해서 뭐냐 하면, 좋은 아버지 되기, 꽃꽂이하기 이런 걸 채워서 붙들려고 애를 쓰지요.

그러다보면 교회가 무리를 합니다. 복음은 갖다 버리고 세상적인 즐거움 가지고 무리를 하고. 특히 젊은애들 붙들기 위해서 드럼하고 키보드해서 두드리고 하다가 멤버 떠나버리면 창고에 들어가지요. 그게 박사교회에. 창고에 들어가 있을 거예요.

그래서 칸트는 이 이런 인간의 모순을 알기 때문에 인간을 이렇게 합니다. 칸트는 말하기를 인간은 도덕적인 법을 무조건 지켜야 된다는 게 있고 그리고 시간과 공간, 인간을 둘러싼 환경이 우리로 하여금 그걸 지키지 못한 걸 쌓이면서 그걸 매울 수 없다. 이걸 알아요.

그래서 칸트의 숙제였는데. 뭐냐? 인간의 정말 바르게 살아야 된다는 그런 윤리도 있는 반면에, 있지요. 법을 가지고 자기 정당함을 위해서, 반면에 바르게 살지 못하다 보니까 결국은 선과 악 사이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최악과 덜 나쁜 그 사이를 선택할 뿐이죠.

근데 최악이라 하는 건 누가 만들어냅니까? 자기가 상상해서 만들어내요. 그런데 최악은 아직 먼 거예요. 나는 사람을 때렸다. 최악이다. 살인자가 웃습니다. 그것도 최악이가? 멀었다. 나는 담배를 피웠다. 최악이다. 니, 마리화나 피워봤나? 이래 된다고. 그러니 사람은 죄악도 점점 더 늘어나고 그만큼 덜 나쁜 기준도 점점 더 악화되고. 아, 전에 이게 나쁜 줄 알았더니만 이게 진짜 나쁜 게 아니구나. 이게 좋은 쪽이구나. 하고 자꾸 이동하고.

이러한 모순점을 해소하기 위해서 칸트가 뭘 하느냐? 그 순수이성은 아까 이야기한 형식이성이에요. 순수이성은 무엇이 옳고 올은 거다 하는 게 순수이성이고, 그 다음에 그걸 지켜야 된다는 게 실천이성인데, 그 둘 사이를 메우기 위해서 뭘 집어넣는가? 비판이성을 이야기해요.

비판이성을 하는데 어떻게 반성하느냐 하면, 만약에 이런 식으로 반성하면 반성해도 소용없잖아요. 어떤 식으로 반성하느냐? 그것을 바로 칸트에서는 바로 미로, 뷰티. 미로 반성하게 됩니다.

지금 여러분, 교재 없으니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요. 이렇습니다. 칸트는 어떻게 하면 이 철학으로써 사회윤리가 인간들이 도덕적으로 번성할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무조건적으로 인간에게는 선을 향하는 게 있다. 야, 이거 멋지다. 그건 순수한 신이 주신 이성이다. 하나님이 주신 이성이다. 이건 양심이니까 포기하면 안 된다.

그런데 그것만 있으면 안 돼? 실천을 해야 되니까. 실천을 해야 되는데 실천이 잘 안 되더란 말이죠. 안 되는 걸 되게 하기 위해선 뭔가 힘이 필요한데, 담배가 나쁜 줄 알면서도 끊지 못할 때 뭔가 힘이 필요한데 어떻게 힘이 필요한가? 그게 뷰티, 아름다움으로 보충하면 된다. 아름다움이 비판이성인데,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칸트의 미학에는 '장엄'이에요. 장엄미. 여러분, 장엄이 뭔 뜻이냐 하면, 장엄 또 다른 말로 하면 경이로움. 이거 알겠지요. 장엄, 경이. 이거 미학하는 사람 잘 압니다. 장엄미, 경이. 자연을 크게 만들어요. 그림에다.

그 당시 19세기 중반에 나오는 미학의 발전에 보면, 칸트 이후에 보면, 예술을 통해서 인간을 순화하고 인간을 도덕적으로 고양시키고 높이기 위해서 그림인데, 왜냐하면 그림은 하나의 교육 자료였거든요. 큰 계곡에 폭포가 있고 여기에 인간을 개미보다 더 작게 그린 거예요. 큰 폭포가 있고 물보라가 막 넘치고 큰 산이 있고 강이 있는데 사람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너무 작아서 안 보이지요. 색깔로 해야 되겠다.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거의 안 보이지요. 한 폭의 동양화 같잖아요.

이건 보는 사람이 뭘 하라는 겁니까? 인간이 욕심을 부려봐야 인간아, 아무것도 아니다. 인간은 개미만도 못한 존재이다. 내가 왜 쓸데없이 욕심을 부렸던고. 장엄과 대자연의 장엄과 신이 주신 경이로움, 그것이 하나의 미학의 예술적인 장엄미로써 우리로 하여금 순화시켜서 다시 한번 순수이성이 추구하는 절대 윤리에 우리가 실천에 옮기도록 그렇게 방법으로 채택한 게 칸트의 철학입니다.

여러분 칸트 철학 보니까 교회 목사 같지요. 예를 들면 화산이 폭발하고 그러니까 화산 폭발하고 지진 하면 설교재료로 안 좋습니까. 전에 쓰나미 날 때 설교재료로 얼마나 써 먹었습니까. 까불지 마라. 인간이 과학이 뭐냐? 지진이 나서 이십이만 명이 죽었는데. 화산이 터지고 폭풍에 나무 가지가 부러지는 광경을 보면서 장엄을 느낍니다.

왜 인간은 자연의 파괴를 보면 마음에 고양되는가? 그거는 인간과 자연이 다른 점이다. 신은 자연을 파괴하면서 또는 높이면서 그걸 통해서 신의 느낌, 신의 손길을 인간에게 부여하기 위함이다. 이게 숭고함이다. 이 숭고함이 선과 악에서 벗어나 선과 악을 일치시켜 가까이 하게 한다. 이게 칸트의 윤리적 이상입니다.

자, 그런데 이러한 윤리적 이상이 뭣에 라캉에 의하면, 숭고, 경외함. 이게 뭐가 되냐? 이게 바로 상징질서를 파괴하는 하나의 실재계, 실재계라 하는 것은 인간이 상상한 최고의 계거든요. 실재계가 상징계를 파괴하면 일시적으로 사람이 겸손해질진 모르겠지만 인간의 욕망이 그렇게 만만치가 않다는 겁니다.

이 실재계를 뭐로 받는가? 자기 것으로 삼아버립니다. 그러면 자기가 뭐가 돼요? 경이로운 자가 되고, 자기가 아주 우수한 아주 장엄한 천사가 돼버립니다. 그러면 시시한 장엄은 장엄도 아니야, 이제부터는. 시시한 경이로움은 경이로움도 아니에요. 왜? 그 정도는 이미 아이고, 수가 낮아가지고 말이야. 그 정도 기적은 내가 다 안다고.

그러니까 여기서 라캉은 말하기를 왜 그렇게 하는가? 그래야 또 도전할 여분의 잉여쾌락이 생겨요. 그러니까 라캉은 뭣을 아무리 좋은 소리, 삼위일체, 복음이고 십자가고 뭐고 간에 다 집어넣어 봐도 인간이 일단 그것을 자기 것으로 삼는 이상은 그것마저 딛고 그 다음에 더욱더 자기의 욕망, 자기가 신되고 싶은 자기의 신의 괴물 같은 얼굴 내밀고 싶은 거예요.

이게 뭐냐? 십자가 그 이후입니다. 십자가 믿고, 이건 아는 거고, 주님, 주님 앞에 죄인 맞습니다. 됐지요? 됐지요 이제. 죄인 인정하지요. 그 다음에 나를 영광스럽게 만들 어떤 방안을 제시해 달라는 거예요.

이 욕구에 대해서 항상 여분을 둡니다. 항상 인간은 여분을 둘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런 여분을 두는 쪽으로 인간은 시간을 해소해 뭘 만든다 했습니까? 똑딱, 하나의 자기를 위한 스토리를 늘 상정하지요. 늘 자기는 소설가입니다. 자기 시나리오, 미래의 시나리오, 과거의 시나리오, 자기 미래와 현재와 짜서 상상력을 동원해서 자기 시나리오.

나는 앞으로 내년에는 이렇게 되면 좋겠다. 그 후에는 이렇게 됐으면. 자기 시나리오를 풀어서 짜요. 삼년 기한 줄게. 자기가 자기한테 기한 줘요. 삼년 내에 이번에 난 뭐 하겠습니다. 똑딱을 자기가 임의로 시간을 짧아서 그렇게 한다 이 말이에요. 근데 그게 다 자기의 문학적 상상의 허구에 불과한 거죠.

그거는 제일 처음에 첫 강의할 때 뭐가 어떻다 합니까? 니만 그렇나? 니만 그래. 니는 왜 보편성을 볼 줄 몰라. 초창기에 첫 시간에 제가 뭐라 했습니까? 신은 보편성으로 다가 오는데 사람들은 보편성을 시답지 않게 여기고 자꾸 자기만 튀려 하는 거예요. 똑같이 되라 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분노에요.

특히 여자들이 옷 똑같은 것 입으면 그 다음부터 옷 안 입습니다. 갖다 줘 버립니다. 또 다른 옷 입고 나와요. 남과 똑같은 옷 입으면 굉장히 싫어요. 물론 잘난 사람 같으면 영광스럽지만. 만약에 목사가 설교하는데 저하고 똑같은 감히 집사가 똑같은 옷 입으면 오후예배 때 딴 거 바꿔 입어요. 같이 먹으려고 말이야. 어디 니하고 나하고 같나? 같이 튀려고 하는 거예요. 독특하게.

왜 튀려고 하느냐 하면, 그래야 여분이 생기니까. 왜 여분이 생겨야 되느냐 하면, 그래야 내가 목표가 또 생기잖아요. 목표가 있으면 목표가 있어야 그 다음에 행동에 나설 이유가 되니까. 나는 목적 없는 인간은 아니야. 아무래도 목적이 있다고. 그래서 끔쩍거린다고. 그래서 자꾸 여분을 만드는 겁니다. 시나리오를 짜면서.

그래서 그것을 안타깝게 여긴 것이 하이데거입니다. 교재에 보면 나오지요. 하이데거는 반대로 이야기해요. 내가 장엄과 경이를 내 욕망이 만들어낸 게 아니고, 나는 존재가 주저앉은 하나의 흔적에 불과하다는 거예요. 라이프니찌도 그런 이야기했는데요. 내가 사건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이것은 아까 이야기한 중세철학이지요. 우리에게 뭐가 있다? 자유가 있다. 자유 가지고 뭐한다? 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내가 뭔가 선택하잖아요.

하이데거는 그게 아니고, 하나님의 존재가 우리가 같이 할 수 없는 어떤 존재가 사건을 일으키면 그 사건을 일으킨 그 장소에 내가 있다는 거예요. 우리는 사건을 만드는 자가 아니고 사건화 된 사람이다. 사건이 사건화 된 그런 순간에 우리가 놓여 있다 이 말이죠.

따라서 그래 되면 뭐가 없어져요? 내가 했다는 것이 아니고 우발성이 나로 하여금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걸 성경적으로 풀이하면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이거와 똑같은 거예요. 그러니까 어떤 신학해석도 철학을 벗어날 수 없어요. 어떤 성경구절 해석도.

특히 헤겔 이야기 들어볼까요. 헤겔 이야기하면 기가 차지요. 헤겔 들어보면 놀래 버립니다. [인간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서 어디서 소멸되는가? 아담에게 물어봐서는 안 된다. 아담 밖에 있는 분에게 물어봐야 된다. 십자가의 죽음을 절대 주인으로 끌어와서 속죄와 부활의 주체로 제시한 사람이 헤겔이다.]

헤겔은 내가 내가 누구냐고 걔가 걥니까? 라고 내가 묻지 말고, 십자가 죽음을 죽으신 속죄와 부활하신 분에게 그분한테 물어봐야 된다는 거예요. 그것도 모르고 데카르트나 칸트는 자꾸 내 문제를 내가 분석해서 내가 알려고 했는데 그것은 잘못이라는 거죠.

헤겔은 인간은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부정성에 의해서 우리가 생겼다는 거예요. 부정성, 이걸 가지고 성육신이라고 하죠. 하나님이 자기를 버림으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 우리 인간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나에게 날 보고서는 모르고 나를 부정성으로 되게 하신 그분의 긍정성 속에서 비로소 봐야 된다. 그게 뭐냐? 십자가 앞에서 성육신 앞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봐야 우리가 보인단 말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의 부정성, 신이 사람이 됐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거든요. 더러운 사람이 죽었다하는 그 죽음. 신이 무슨 죽습니까? 신이 죽음을 맛본다는 하는 것은 이거는 우리가 예상한 신이 아니에요. 낯선 신이에요. 깜짝 놀랄 만한 신이라고. 그동안 우리는 몰랐지.

왜 몰랐는가? 내 중심에서 자꾸 파고 들어가니까 모든 걸 내 중심으로 돌아가니까 아, 그런 하나님이 그러한 줄 몰랐는데 하나님이 성육신을 통해서 공개해주니까 나는 하나님의 부정성,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를 포기한 그 흔적으로 남겨 있는 것이 나구나.

그렇다면 하나님의 그 부정성은 결국 부정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다시 회복성으로 돌아가는 거죠. 왜? 하나님은 자기 증거 던져놓고 회수하니까. 그러면 나는 그 성육신을 통해서 부활되는 겁니다. 이게 헤겔 철학이에요. 이거 뭐, 완전히 루터 철학 아닙니까. 루터신학 아닙니까?

그럼 내가 헤겔에게서 문제 삼는 것은 언약적 십자가가 아니고, 십자가 주가 아니고, 성육신이 주가 된다는 거예요. 인간의 존재가 신으로 다시 화하는 거기에 관심이 있지, 죄가 무엇이냐는 그냥 스쳐지나가는 거예요. 죄가 무엇이냐를 그냥 몰라도 돼. 다만 우리는 그냥 연약한 인간이다. 그걸로 충분하다는 거예요. 그래 되면 칼 바르트 되죠.

죄가 무엇이냐를 그건 몰라도 돼. 어떤 사람 말대로 죄가 그건 몰라도 돼. 주께서 구원하셨어. 왜 자꾸 죄에 신경 써. 그런 거 몰라도 돼. 그냥 구원하면 그만이지, 고맙다 하면 끝나는 거지 왜 자꾸 신경 쓰는 거야. 그래 된다 이 말이죠. 십자가를 잊어버리자 이 말입니다. 죄를 묻지 말자는 것은 십자가를 몰라도 돼. 뭔가 왔다 갔어. 이래 되는 거거든요. 그것도 제가 보기에는 인간 자기중심에 아주 가장 십자가에 가까운 유사 십자가 신학, 철학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이데거 이야기 다시 해봅시다. 하이데거는 자아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은 계속 존재가 보니까,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나는 가만있으니까 어, 왜 자꾸 저 지구가 도노? 이래 된다 말이죠. 근데 따지고 보면 내가 가만있는 게 아니에요. 변화가 나를 움직이고 같이 변화시키는데 우리는 내 중심으로 보기 때문에 나는 가만있는데 태양이 돈다. 이래 되는 겁니다. 사실은 그게 아닌데.

하이데거는 이래 합니다. 변화가 위주고 우리는 그 변화에 있어서 잠시 고정된 것이라고 왜 이런 발상의 전환을 못 하느냐 이 말이죠. 모든 것이 내 중심으로 하니까 나오는 것은 경쟁밖에 안 나오죠. 경쟁 나오고 자기 욕망에 대한 발산. 문제는 내가 중요하니까 내 욕망도 중요해지는 겁니다.

너, 사람을 왜 죽였어? 성질나서 죽였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결국은 내가 중요하니까 내가 품고 있는 거 다 중요한 거예요. 누구보다도? 남의 갖고 있는 모든 것보다 내가 더 중요해요. 심지어 예수님 죽음보다, 예수님도 안 중요해. 내가 중요할 경우만 예수님 중요한 거예요.

그렇게 되니까 하이데거는, 하이데거가 신을 믿느냐 안 믿느냐 그 논쟁이 아직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하이데거가 신을 인정한 소리가 많기 때문에. 하이데거가 신을 부정한다는 이야기보다 인정한 이야기가 훨씬 많아요. 신을 부정한 이야기는 거의 없어요. 다만 신에 대해서 이야기 안하고 철학적으로 다 바꿔서 이야기하니까 신이 있는데, 교양상 철학자니까 철학으로 했다. 이렇게 이야기한다 말이에요.

하이데거가 히틀러에 대해서 동조를 안 했지만 반대는 하지 안 했거든요. 왜 그러냐 하면, 히틀러란 독재자가 태어난 것이 우리가 태어난 게 아니고, 우리가 반대한 것도 아니고, 그거는 뭐냐? 이 우주가 사태가 태어날만해서 태어났다 이 말입니다. 구태여 도와줄 필요는 없더라도 뭐 할 필요 없다? 구태여 반대할 필요는 뭐가 있느냐 이 말이죠. 그래서 하이델베르그 대학인가 프랑크푸르트 대학 추방되었지요. 나중에 폐쇄 당하고 쫓겨나서 끝까지 계속 쫓겨났잖아요. 동조자라고.

하이데거는 이래요. 날 위해 어떻게 하면 나 위주로 벗어날까? 어떻게 하면 나로 나 되게 하는 사건 위주로 변화 위주로 나를 그쪽에다 넘길 수 있느냐? 그렇다면 난 그 변화에 같이 물 타기하면 되지요. 올라갈 때 올라가면 되고, 내려갈 때 내려가면 되는 거지요. 히틀러가 내려갈 때는 같이 내려가고, 히틀러가 올라가면 같이 또 올라가고.

그래서 유명한 우리나라 철학자는 하이데거와 화엄종, 화엄경과 연관시켰잖아요. 하이데거 철학이 딴 게 아니고 불교를 철학화시킨 것이다. 불교가 바로 그것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로 시작해서 내가 보기는 산이네. 오, 내가 보니 물이네. 거기에 뭐가 들어갑니까? '내'가 들어가죠. 도를 닦게 되면 오, 산은 산이 아니네. 내가 되니까 저 산도 산이 아니고, 흙이네. 물은 물이 아니고 흙탕물이네. 환경오염이네.

산은 옛날 그때부터 내가 봤던 산이 아니고 그 물이 아니에요. 왜? 내가 변하니까 가만있는 산도 변하고 물도 변하는 거예요. 나중에 내가 깨지니까 내 자체가 변화될 수밖에 없는 나 자체를 생각 아예 안 해 버리니까 오, 비로소 산은 산 그대로 보이고, 물은 물대로 보이는 거예요. 그래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고. 그 다음 두 번째는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지만 결국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이 말이에요. 이게 무슨 물 같은 소리에요.

그 가운데 뭐가 빠졌습니까? 죄가 빠졌지요. 개 같은 이방인이 빠졌지요. 개 같은 이방인이 빠진 거예요. 이렇게 고상한데 무슨 개 같은 이방인입니까? 무슨 짐승 같은 못한 인간이 어디서 튀어나옵니까? 저주 받을 지옥 갈 놈은 납니다. 그 소리가 어떻게 튀어나와요. 그러니까 철학도 잘못 되고 신학도 잘못 된 거예요.

나는 개 같은 인간입니다 나올 수 있는 신학, 나는 개 같은 지옥 갈 인간입니다. 나는 이방인에 불과합니다. 나올 수 있는 그런 언약이 나와야 돼요. 그게 십자가에서만 나오는 겁니다. 그게 뭔가 고상한 것, 반정립, 정립, 테제, 테제를 반대한다고 해도 안 나와요.

마지막으로 산은 산이요 물은 물, 이야기 다했으니까 이제는 시간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하겠습니다. [시간의식 조작을 통한 구원시도] 이건 칸트가 이야기했죠. 사람은 절대적인 것을, 아까 신이라는 개념이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강의를 많이 해서 정리가 안 될 텐데.

신은 뭐냐? 신이 있어서 신이라고 하는 게 아니고, 이것저것 아니니까 신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말이죠. 다른 것을 중심 삼아 봐야 다른 것이 신이 되니까. 결국 마찬가지거든요.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그게 신이 돼요. 신은 없다가 신이 된다니까.

생각해 보세요. 신이 없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그걸 지시할 수 있는 확정된 게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러면 이게 신이지, 뭐. 이 신이 아니고 내 신이 신이다. 이런 말이지, 신이 없다는 말이에요, 그게. 신은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없다는 말도 성립이 안 되는 겁니다. 원래 부터 대상이 없는데 없단 말이 성립이 되겠어요.

귀신은 없다. 말이 안 돼요. 듣는 귀신 굉장히 기분 나쁘죠. 왜냐하면 귀신이 없는 것이 아니고, 없음과 귀신은 연결 안 된다. 이 말을 해야 옳은 말이죠. 야, 이 말이 더 어렵다. 어떤 대상이 없을 때는 없다는 말도 그게 연결이 안 돼요. 대상이 어, 성경책 있는데 없다. 이럴 땐 되지만 성경책은 대상이기 때문에 물질이기 때문에 되는데, 물체가 없을 때는 그게 성립이 안 된다니까.

흔히 드라마 같은 데 보면 그 여자가 남자한테 뭐라 합니까? 좋아할 때 뭐라 합니까? 미워, 미워. 이카잖아요. 진짜 미우면 아무 소리 안 하고 그냥 가버립니다. 미워, 미워 때린다는 건 좋다는 뜻이에요, 그게. 물론 너무 때리면 안 되지만.

신의 개념에 대해서 딴 데 찾을 수가 없어서 절대적인 것을 찾다보니까 뭐가 있느냐 하면, 칸트는 시간을 찾아요. 시간과 공간은 무조건 절대적이에요. 세상에 어느 동물이나 인간도 시간, 공간을 의식 하지 않고 사는 인간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리 무지한 짐승이라도 절벽 끝에 서면 도망치지, 절벽과 꺼진 공간과 높아진 공간도 분간 못해서 어이, ( ) 한다는 것은 그건 만화책에나 나오는 거예요. 만화책에 절벽 같은데 막 달리는 사람 있지요. 관성의 법칙에 의해서. 한참 가다보면 후회하잖아요. 이게 뭐고? 하고 돌아가잖아요. 누구처럼 성질 급해 가다가 돌아오잖아요.

어떤 인간도 공간과 시간을 절대화시키지 않은 인간은 없습니다. 이 말은 공간과 시간을 겁낸다는 뜻이에요. 절대 앞에서 항상 인간은 겁을 내요. 그러니까 인간은 시간을 겁내고, 공간을 겁냅니다. 그런데 그게 이천년 대 들어와서 양자역학, 양자론이 등장하면서 세상에 공간과 시간이 깨져요. 절대성이 깨져요. 전부다 상대성으로 변하고 말았어요. 뭐냐 하면, 자연에서 절대적인 것을 뭐로 잡느냐?

성경에 빛 나오지요. 우리는 빛을 기정사실화시키고 절대화시키고 기정사실화시킵니다. 그런데 물리학자들은 그렇게 만만치 않아요. 뭐냐? 빛이 무엇이냐 묻습니다. 세상에. 빛은 빛이다. 이러면 끝나는데 빛이 무엇이냐? 빛은 어디서 나왔느냐? 빛이라 하는 것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물질에서 에너지가 나온 게 빛이라 이래 보는 거예요. 물질과 빛을 연관시켜서 전 세계 모든 것을 다 해명하는 거예요. 물질을 분석하고 분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빛이 동원되지 않으면 물질은 깨지지 않습니다.

칼이 무뎌지면 깨지질 않아요. 절대적인 칼 가지고 깨야 이게 깨집니다. 그럼 절대적인 거, 정말 절대적인 것은 손 못 되는 절대적인 것은 절대로 안 깨지는 그거, 그 빛은 바로 빛을 절대화시킨 거예요. 그럼 빛은 빛의 힘으로 모든 물체를 깨는 겁니다. 그러니까 빛이라 하는 것은 보통 빛은 가시광선이라고 하고 그것보다 짧은 빛이 있어요. 그 에너지의 빛을 가지고 전부다 모든 사물을 다 쪼개는 겁니다. 하지만 칼 그 자체는 시비 걸면 안 돼요. 그래서 이 빛을 절대화시킨 겁니다.

칸트는 그 당시에 루터 신학이기 때문에 뭘 절대화시켰습니까? 시간과 공간을 절대화시킨 겁니다. 시간과 공간인데 특히 시간이라는 것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A라는 지점과 B라는 지점이 있는데, 지금 내가 여기서 라면을 먹고 있다. 라면을 먹고 있을 때 이거는 내가 B라는 내가 봐도 그 시간에 라면 먹고 있었고, 비록 멀리 있어서 안 보이지만 그 시간에 라면 먹고 있을까요, 안 먹고 있을까요? 공간은 멀리 있어도 시간은 같은 시간이에요. 왜? 시간은 절대적이기 때문에. 망원경만 있으면 이 사람이 라면 먹는 게 보이겠지요. 그렇지요? 여기에 대해 이의 있습니까? 이의 없지요.

그런데 혹시 이런 사건이 있다. 내가 라면을 먹고 있는 그 순간에 망원경을 갖다 봤는데 라면을 안 먹고 있어요. 한 시간 동안 보니까 그때 라면 먹고 있어요. 이런 경우 상상 됩니까, 상상 안 됩니까? 아이고, 목사님. 거짓말 마세요. 그건 완전히 허굽니다. 말도 안 돼요. 그 허구를 그 허구 같은 것이 실제였고, 그게 실제가 되면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동시에 본다는 게 다 허구가 되는 겁니다. 결국 우리는 그동안 허구 속에 살아 왔어요.

이것은 뭣을 뜻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한국에 재림해도 필리핀은 내일 재림하는 거예요. 동시성이 깨져버린 겁니다. 그것은 바로 빛의 절대 때문에. 뭐의 절대? 빛의 속도는 어떤 경우에도 일초에 삼십만 킬로미터로 동일해요. 여기서 십 광년 떨어진 별 같으면 십 광년은 무조건 떨어졌어요. 그거는 빛이 삼십에서 오십 늘어난 법이 없기 때문에 이유 없이 삼십 년 떨어진 곳이에요.

그렇다면 시간도 빛이 절대화되면 빛의 속도가 절대화되면 시간도 공간도 다 변하는 겁니다. 빛이 있는 곳에 공간이 휘어져요. 공간이 휘어진다는 말은, 공간의 개념은 아직까지 인정하지 않았어요. 공간은 없어요. 공간 대신 뭐냐 하면, 중력으로 바꿨어요. 중력장으로 바꿨어요.

이게 점점 어렵게 되는데. 못 알아듣는 이야기만 방언만 하고 있는데 제가. 공간이라는 게 없어요. 중력장만 있어요. 공간이라는 것은 우리가 엉터리로 허구적이고 중력장만 있어요. 그래서 여기서 저기서 가고 싶어도 중력이 다르면 자기는 바로 간다고 가는데 나중에 보니 돌아가게 되는 겁니다.

이게 지금 우리가 사고방식이 상상을 모든 성경에 나오는 성경적 개념의 언어가 차지하고 있는 절대 시간과 절대 공간의 그 언어개념 가지고 이 양자역학과 맞지 않아요. 성경에서 말하는 성경의 단어가 생겼던 그 단어가지고 소통하던 그 세계 절대 공간과 절대 시간과 절대 세계하고 이 세계가 맞질 않는다고. 빛이 지나가면 무게도 달라져요. 질량도 달라지고 공간도 줄어들고 빛이 가면 시간도 늦어져요.

그 공식이 상대성 공식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누가 아나? 아무렇게나 써도. t = t0/[1-(v/c)2]1/2 (?) 이 공식에 의해서 시간은 그만큼 광속에 c는 광속인데 속도고. 광속이 얼마나 따라 붙느냐 시간이 늘려지느냐가 결정되는 겁니다. 시간이 느려진다는 말은 동시성이 깨졌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같은 공간에 같은 시간대에 같이 있지 않다는 뜻이에요. 따로 따로 딴 세계에 있는 거예요. 그걸 중력장이라는 딴 세계에 놓여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걸 오스카 쿨만이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은 시간 맞춰서 오신다는 겁니다. 제가 답답해서. 하나님은 시간 맞춰서 시계 보고 오시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오시는 때가 그 시간이에요. 도둑놈이 도둑 오는 시간이 뭡니까? 도적질하는 그 순간이 도둑놈 오는 그 시간이라니까요. 어제 광주에서 했잖아요. 엄마가 방구 뀌는 시간이 방구 뀌는 시간이라고. 방구 뀌면 그게 방구 뀌는 시간이에요. 언제쯤 뀔꼬? 이런 거 없어요. 사건이 시간을 결정하는 것이지, 시간이 사건을 결정하는 거 아닙니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시느냐 하면, 우리 보고 우리가 하는 시간 기다리는 것이 아무 쓸데없다는 짓이란 말이에요. 오실 분을 기다려야지. 어떤 분을 기다려야지 어떤 흔적을 기다리고 시간을 기다리고. 그거는 자기중심적인 시간개념이죠. 이런 것들이 기존의 사고방식과 모든 것이 다 다른 겁니다.

그래서 이 시간의식 구조에 대한 똑딱 이야기 문제를 좀더 상세하게 하기 전에 왜 우리가 이걸 해야 하느냐 하면, 소위 개혁신학의 문제점이 바로 여기 있어요.

이 책에도 나옵니다만 개혁신학은 인간이 신을 알 수 있는 배경을 뭐로 잡느냐 하면, 시간으로 잡아요. 때가 되면 오신다는 거예요. 말이 굉장히 맞는 것 같죠. 때가 되면 오신다는 거예요. 오시는 그 분이 때를 결정하는데 그게 아니고, 주님도 우리도 양쪽 다 시계보고 올 때 됐습니다. 하고 온다는 거예요. 둘 다 시간은 절대적인 것이고, 그 절대 속에 하나님이 절대적인 시간을 활용해서 그 절대적인 시간에 같이 약속 지켜서 온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은 시간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시간은 지키는 사람을 깨부수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뭐냐 하면, 현재 역사 속에서는 완벽한 신학이 구성될 수 없기 때문에 어떻게 하느냐? 자꾸 하나님의 시간에게 미루자는 거예요. 왜? 시간만은 절대적이기 때문에 좀더 좀더 지나고 지나면 점점 더 나아질 게 아니냐 말이죠. 이게 개인적인 성화론과 전체적인 신학의 발전과 맥락이 같지요.

사람은 예수 믿고 난 뒤에 날이 갈수록 성령께서 도와주셔서 날이 갈수록 더 성화된다 하는 거룩의 티를 낸다는 것과 신학이라는 것도 점점 더 신의 나라에 가까워 점점 신학이 완벽에 가깝다는 그것과 그러니까 우리 신학자는 완벽에 가까울수록 뭐 한다? 자체적인 무슨 이성? 아까 이야기한 무슨 이성입니까? 비판이성이죠.

아까 다 잊어버렸습니까? 칸트의. 칸트의 처음에는 무슨 이성? 순수이성. 이거 목표지요. 그런데 실천이성은 잘 안 되지요. 그 메움을 뭐로 메운다? 비판이성으로. 비판이성의 내용이 뭐라 했습니까? 장엄, 경이로움, 인간이 어쩔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그러한 섭리 이런 걸 메워서 이 둘 사이를 순수이성에 나서고자 동기부여가 될 수 있다 이 말이죠.

그 칸트의 철학을 신학에 그대로 적용시키면, 비록 지금은 부족하오나 앞으로 잘만 하면 주님이 원하시는 신학, 해내겠습니다. 하고 자꾸 가능성을 시간에 핑계대고 자꾸 미루는 겁니다. 이게. 그래서 개혁주의자들은 결국 설교하든 강의하든 마지막에 남는 게 뭡니까? 제가 뭐 알겠습니까? 하나님께 맡겨야지요. 이거라. 그래 저는 최선을 다했을 뿐이고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기겠습니다. 이거에요. 되게 저희끼리는 굉장히 겸손한 거예요. 그런 거 하고.

여러분 이단입니다. 이거하고. 이거는 교만이고. 제가 뭐 남을 이단이라고 할 자격이 됩니까? 부족한데 기다려봅시다. 주께서 알아서 할 건데. 이거는 겸손이고. 제가 보기에는 그 겸손이 교만이에요. 솔직히 믿을 게 없다. 하여튼 시간이나 때워보자. 이런 식으로 나가다 자기를 감추는 그것이 뭐냐? 내가 보기에 교만이에요. 예수님 십자가 졌으면 십자가 앞에 죽은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이단입니다.

그 다음 아까 이야기했지만 좀더 봅시다. [가령 1000페이지의 소설을 가정해 보자. 천 페이지의 소설이 있다면 시간적 지평 범위 내에 있지 않음으로 경험을 체계화하여 존속하기 위해서는 훨씬 많은 허구적 장치가 필요하겠지만] 그 시계가 지침이 똑같은 소리로 갑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걸 가지고 인위로 지 마음대로 앞에 것을 '똑' 뒤에 것을 '딱' 똑딱똑딱 이게 되풀이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똑과 딱 사이에 비어 있는 것이 아니고, 흐르고 있지요.

자, 봅시다. 머리 나쁜 사람 듣기 곤란한 이야기인데. 시간은 흐르는데 사람이 이걸 앞에 것은 똑으로 딱으로 해서 드러냈다 말이지요. 그러면 이 사이에 있는 것은 뭐가 되느냐 하면, 중립적인 가치를 지니죠. 중립적인 가치지요.

특히 이런 게 군대에 가면 많지요. 어이,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사역! 이카거든요. 그런데 그 가운데 중대장 닦갈이, 중대장 당번이 끼어 있다고. 소대장님, 저는 중대장 심부름해야 되겠네요. 저를 왜 중립적인 가치로 똑같이 봅니까? 그래? 니 빠져라. 저, 엄마 면회 왔습니다. 니 빠져라. 결국 군에 가면 사역 뽑아 놓고 나중에 한 다섯 명 와요. 원래 군댄 그런 거예요. 빼고 항상 쓰레기로 찌꺼기로 남습니다. 그래서 사역하고, 다른 사람은 놀고, 합니다.

똑과 딱을 구분 해놨으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강제적으로 이 안에 똑같은 시간이 흐른다고 강제적으로 그렇게 차압당한 상태에 놓여 있어요. 이게 바로 허구란 말이죠. 지금 이 시간에 다른 나라에선 유전이 발견되고, 다른 나라에선 이라크 전쟁하고 있는데 그런 거 관계없어요. 내가 임의로 딱 정했으면 딴 것은 다 시시한 걸로 사라지는 겁니다.

3월 14일 날 우리교회 어떤 청년이 결혼식합니다. 그러면 결혼하는 엄마 된 권사님이나 아빠 된 집사님께서는 지금 그 앞에 이라크 그런 건 관심이 없어요. 지금 관심 없지요? 인간적으로 관심 없지요. 어떻게 하면 이거 빨리 결혼식을 무사히 치르느냐? 여기에 집중하게 되는 거예요.

그 집중도가 뭡니까? 그 집중도를 가지고 작가의 상상력이고 본인의 일방적인 자기 나름대로 상상력이다. 그게 뭐냐? 자기 위주의 시간관념이에요. 간증 집회라 때도 마찬가지고 그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 여러 가지 오스카 쿨만이나 여러 가지 바하의 이야기 있지만 판넨베르그의 이야기 있지만. 판넨베르그의 이야길 하겠습니다. 이런 시간개념에 대해서 반대하면서 판넨베르그가 뭐냐 하면, 묵시를 이야기했어요. 야, 이게 판넨베르그가 보통 사람이 아니지요.

오스카 쿨만 보고 야, 그런 게 아니다. 당신이 이렇게 된다면 뭐가 문제가 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셨다. 마지막에 오셨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 십자가 재림 이후에 뭐가 남아 있어야 돼요? 계속 시간이 남아 있어야 돼요. 왜냐하면 남아 있어야 재림과 이걸 끊었으니까. 이걸 끊은 게 되니까. 중간에 이렇게 끊은 게 되죠.

만약에 안 끊고 시간이 없다면 이건 뭐냐 하면, 미래의 확정된 개념이 계속 여기 적용되겠지요. 이게 판넨베르그의 사상입니다. 뭔 뜻인지 참. 시간이 이어지지 않는다면 묵시세계 아닙니까. 묵시가 된다면 그 묵시의 의미가, 다시 봅시다.

어떤 사람이 시간을 임의로 끊었다는 말은 요 나름대로의 자기 나름대로의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서 했다. 아까 전 시간에 했지요. 그렇다면 의미가 뒤에 남아 있다면 이것을 확정해야 되잖아요.

예를 듭시다. 어떤 애가 춘향전을 보는데 성질 급해서 춘향이 잡힌 대목까지 봤어요. 그래서 우는 거예요. 춘향이 잡혔대. 죽었대. 춘향일 다 본 사람은 그게 아니고, 춘향이 왔을 때 어사또가 출도해서 살았다 이래 하잖아요. 그러면 애는 울 필요 없잖아요. 어디까지 알아야 돼요? 아하, 내가 똑딱을 잘못 잘랐지요. 춘향일 전체를 다 잘라야 되는데 중간에 자르다 보니까 혼자 착각해서 우는 거예요. 아이고, 우리 불쌍한 춘향이 죽었다. 나중에 춘향이 뭐가 되는데? 나중에 춘향이 암행어사 사모님 되서 지금 서울 지검장 되고 있는데. 어느 시댄데 웃기잖아요.

그렇다면 지금 뭐가 문제냐 하면, 똑은 끊을 수 있어요. 딱은 어디서 끊느냐 문제에요. 딱은 어디서 끊습니까? 나는 암에 걸렸다. 근데 내 기도하니까 암이 나았다. 암 나은 시점을 끊고 난 뒤에 이틀 만에 죽었다 하면 우에 됩니까? 문제 있잖아요. 간증에 문제 있다고. 그게 후라이보이가 그래 죽었는데. 자기 나았다 했는데 죽어버렸잖아요.

끊는 문제를 판넨베르그는 그래 끊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똑딱을 끊을 때 최종적으로 끊어야 된다 이 말이지요. 자, 끊게 되면 최종적으로 이래 되지요. 그 다음에 끊었을 때 이 시점에서 모든 내용을 알게 되지요. 여기서 끊어서 내용을 이렇게 전개하기 보다는 이미 끊어진 묵시세계에서 거꾸로 전개해야 맞는 게 아니냐 하는 게 판넨베르그의 생각입니다. 이제 이해되십니까?

판넨베르그가 이렇게 돼버리면 어떤 점에서 성도에게 도움이 되느냐 하면, 스데반 집사처럼 죽더라도 그거 참으라 이 말이죠. 그러면 사도 바울에 있는 말씀 그대로 다 되지요. 그 말씀 그대로 다 되는 겁니다. 그런데 판넨베르그 이러한 문제점이 있어요. 뭐냐 하면, 이게 신학이 어려운데.

방금 한 거 이해되겠지요. 미래 확정된 걸 가지고 현재 적용시켜야 그게 정답이지 그냥 해보자는 식으로 해선 안 된다 이 말이죠. 근데 문제가 뭐냐 하면, 묵시가 역사에 어떻게 침입합니까? 이게 문제라. 묵시가 이렇게 쳐들어왔으면 여기에 역사가 없어져야 돼요.

근데 판넨베르그는 그건 또 아니라는 거예요. 판넨베르그는 우에 되느냐 하면, 역사는 역사대로 밀어붙이고, 여러분 역사가 역사대로 밀어붙인다는 말은 좀 어렵지만 뭐냐? 원인이 있어서 원인 따라 결과 나온다 이 말 아닙니까.

근데 묵시라 하는 것은 사건이기 때문에 없잖아요. 이 땅에서 어떤 원인 없잖아요. 근데 한 사건, 예를 들어서 십자가 사건이 있으면, 십자가 사건이 원인 때문에 생긴 사건입니까, 아니면 묵시적으로 생긴 사건입니까? 둘 중에 어느 거예요? 이게 판정이 안 된다고. 묵시적 개입된 것인지. 원인과 결과가 되려면 이게 도 복잡해요.

자, 원인과 결과가 돼야 이게 역사로 인정받는데 역사라 하는 것은 반드시 원인에 따라서 결과에요. 무슨 어떤 것도. 여기 물이 있는데 물이 여기 있다 이리 왔습니다. 역사적 사건 때문에. 이거는 사건이 터져서 이게 아닙니다. 묵시적 사건이 아니고, 누가 했노, 누가? 내가 들어서 갖다 놨지. 그래야지. 그래야 이유가 있지. 이래 묻는다 말이죠. 그냥 가만있는데 오더이다. 이런 거 없단 말이죠.

반드시 역사에서 원인과 결과를 묻잖아요. 물으면 여기서 인간의 지성의 한계가 드러나는 거예요. 원인을 물으려면 그 결과를 예측해서 원인을 설정할 수밖에 없어요. 이게 인간의 특징이에요. 인간의 한곕니다. 참 이게 어려운데. 집에 가서 생각하지 말고 여기서 한번 생각해보세요. 잠시 시간을 줄 테니까. 이게 원인이다 할 때는 결과를 예상하고 난 뒤에 원인을 정할 수밖에 없다 이 말이죠.

콜롬보 형사가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 이 사람이 왜 죽었느냐? 할 때 칼이 있고 강도가 들어와서 죽었구나. 이래 되는데 콜롬보 형사가 아하, 강도가 와서 칼 들고 맞아 죽었구나. 이게 되는데 말도 안 되는 의사가 와서 뭘 봤느냐 하면, 그 죽은 사람 초등학교 때 성적표를 봤는기라. 수학 점수가 나빠서 이게 죽었구나. 이러면 안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 사람이 수학 점수가 좋았습니까? 죽은 사람이. 그 말 맞잖아요. 나쁜 건 맞잖아요. 나쁜 건 맞는데 뭐는 아니다? 죽는데, 목소리 갔다. 낼 설교 못하겠다.

죽는데 전적인 사건화, 역사화는 안 되잖아요. 수학 못 한 거 하고 이 사람이 20년 후 죽은 거 하려면 역사가 길어져야 돼요. 수학을 못해서 중학교를 나쁜 델 갔더니만 친구를 잘못 만났는데 그 친구의 친구 사촌 형이 강도질해서, 그러면 너무 길잖아요. 너무 길다니까. 그러면서도 친구 만난 게 원인인지, 수학 못 한 게 원인인지 그게 갈래가 모호하다 이 말이죠.

따라서 어떤 것을 역사화 시킬 때는 모든 사태를 다 적용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 입맛대로 따로 정해 버리는 겁니다. 그냥. 이게 역사야. 권력자에 따라서 역사가 바꿔요. 왕에 따라 역사가 바뀐다고. 자기 취임을 긍정하는. 노무현 대통령은 뭐였습니까? 열린우리당은 몇 년 가는 당이라고? 100년 간다고 역사를 규정했잖아요. 몇 년 갔습니까? 5년도 못 갔잖아요. 이게 전부다 뭐냐? 자기 위주에요. 전부다 자기 위주에요. 그래 시간 자체가 자기 위주로 수행 될 수밖에 없습니다.

판넨베르그의 문제는 역사를 인정한다는 거예요. 역사를 인정하고 또 묵시를 인정하니까 역사와 묵시가 어떻게 이게 연결되느냐? 여기에 매직이 있고 바카스 있고 물 있다면 다른 대상 같으면 되는데 하나의 시간이란 사건을 통해서는 두 가지 섞일 수가 없어요. 둘 다 역사는 묵시를 배척하게 되어 있고, 묵시는 역사를 배척하고 되어 있는데 하나는 원인이 있는 거고 원인이 없다 하고 어떻게 같이 섞입니까? 어떻게 일어났는데? 미래의 뜻에 의해서. 어떻게 일어났는데? 원인이 있어서. 이건 말이 안 되잖아요.

판넨베르그가 이러한 문제점이 있습니다. 판넨베르그가 묵시가 개입된다는 것은 이야기 잘했는데 왜 개입되느냐 하면, 부활의 영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거예요. 예수님의 부활은 시간에 구애 받지 않고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부활하시는데 아무나 개 같은 이방인 구원하면 되니까. 성령세례 와서. 그게 되질 않는데 그것이 어떻게 역사를 인정해야 되느냐? 그 문제가 딜레마에 빠지는 겁니다.

자, 이제 결론을 맺겠습니다. 마지막에 아, 결론 맺어서 제 의견을 이야기해야 되겠지요. 마태복음 13장, 거기 보면 비유장이라는 유명한 비유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천국의 비밀을 아는 자에게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며” ‘허락’이란 말이 나와요.

그리고 성경에 민수기에 보면, 신명기 봅시다. 신명기 2장 30절. 다같이 읽어봅시다. 성경책 없는 사람들 약 올려야지. “헤스본 왕 시혼이 우리의 통과하기를 허락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네 손에 붙이시려고 그 성품을 완악케 하셨고 그 마음을 강퍅케 하셨음이라” 되어 있지요.

여기 가만있는 사람 완악케 하고 강퍅케 한 주체가 누굽니까? 하나님이시죠. 제가 이야기하는 건 이겁니다. 신학을 구태여 할 필요 없이 신학이 만들어져요. 신학이 딴 것이 아니고 신앙고백 형식으로 만들어집니다. 신앙고백은 허락하셔야 되는 거고, 주께서 지옥 간 사람은 주께서 일부러 강퍅케 하셨고 마음을 완악케 하시는 대상이 되면 그 사람은 지옥 갈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것은 주의 이름을 위해서 하나님은 반드시 지옥 가는 역할을 해야 돼요. 한 쪽은 반드시 천국 가는 역할을 해야 됩니다. 이게 토기장이 비유에요. 한쪽은 귀한 그릇을 하나님의 축복을 담는 귀한 그릇을, 하나는 천한 그릇을 하나님의 진노를 담는 천한 그릇을 이렇게 만드시는 그 작업에 우리가 언약적으로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본성상 우리는 이미 범죄 했기 때문에 아담 속에 있기 때문에 그걸 거부하죠. 그 거부하는 게 뭐냐? 그것이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기 죄를 모르는 이상은 주님에 대한 사랑과 고마움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죄를 통해서 우리 죄가 이러니까 자꾸 내 힘으로 나를 구원시키려고 하는 이러한 죄를 지으니까 그걸 비켜가서 주께서 구원하시는 구원이 내 의도와 상관없이 주께서 따로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건져내셨다는 것을 죄를 통해서 다시 한번 감사하지요. 왜? 내 죄가 뭔가 알기 때문에.

그래서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은 일체 너하고 상대해서 너를 구원하진 않겠다 이 말이죠. 이미 아신 자를 부르시고 다시 끄집어내는 식으로 너희들이 구원받았다. 이래 되는 겁니다. 이게 성경에서는 너희들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천국의 비밀이. 저쪽에는 철저히 가려졌다. 뭐 때문에 그렇습니까? 갖고 있는 우리의 죄로 인하여.

그래서 바라기는 이런 공부를 하면서 우리의 배설물들이 이런 죄가 나오거든 이런 죄가 나올 때 항상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이것이 배설물에 해당된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런 철학과 신학들이. 우린 이걸 내 소유화시켜서 이것 가지고 구원되리라.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것 자체가 죄인 줄 아시고, 이런 걸 생각 안 해도 우리가 주께서 지금도 우리에게 한결같이 성령께서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계속 인도하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요한복음 14장 봅시다. 제가 광주 가서 상당히 은혜를 받은 대목인데요. 14장 16절요.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그 다음 18절에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항상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하겠다는 것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다는 것이 우리의 요청 사항이 아니고, 그냥 우리 보고 일방적으로 통보사항이죠. 내가 그렇게 하겠다는 거예요.

제가 광주에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아가서에 보면 사랑이 나오는데 사랑은 한 사람만 사랑해도 충분해요. 지독하게 따라와요. 계속 그 여자를 따라온다고. 그 남자가. 남자가 자꾸 여자를 끝까지 사랑해준다고요. 그 사랑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그러한 언약 속에 있다는 것을 여러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내 위주로 내 행동 위주로 살다보니까 내 운명이 내 손에 달렸을 줄 아는데 이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 속에 하나님 계획 속에 놓여 있다는 언약 속에 놓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개 같은 이방인으로서 마땅히 지옥 가도 합당한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를 믿게 하시고 그것이 약속인 걸 구원하시는 능력인 걸 깨닫게 하시니 비록 세상 사람들한테 어리석으나 우리한테는 구원의 지혜요 자랑거리임을 저희들이 잊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마치겠습니다. 다 잊어버렸는지 모르겠어요. 하여튼.

-그러면 ‘이미’와 ‘아직’하고 하나님나라에서 나온 그런 개념은 다 상상으로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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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8,422건 중 327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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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 자유게시판 내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왜 나를 차단하지 않는지...궁금?? 신명기 최고관리자 07-06-16
271 자유게시판 어느 교회에서 생긴 일(정 목사님의 3개월 짜리 부목사 생활담) 이사야 최고관리자 07-06-16
270 자유게시판 20070601b 울산강의-창세기16장(2) 녹취 창세기 최고관리자 07-06-15
269 자유게시판 광주강의 녹취록 올립니다. - 최고관리자 07-06-14
268 자유게시판 20060609 서울강의 - 갈라디아서 제 1강 녹취 갈라디아서 최고관리자 07-06-13
267 자유게시판 능력 없는 목사 - 최고관리자 07-06-12
266 자유게시판 20070601a 울산강의-창세기16장 녹취 창세기 최고관리자 07-06-11
265 자유게시판 두려움 없는 사랑 디모데전서 최고관리자 07-06-10
264 자유게시판 정판옥 목사님, 누님 별세 - 최고관리자 07-06-08
263 자유게시판 20061013 안산강의 - 요한복음 20장 (3) : 생명과 사명. 녹취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07-06-06
262 자유게시판 이준 성도님 심방기 - 최고관리자 07-06-06
261 자유게시판 십자가 마을 여름수련회 안내 [수련회] 최고관리자 07-06-05
260 자유게시판 현실, 본성, 예수님의 십자가 마가복음 최고관리자 07-06-05
259 자유게시판 오용익 목사님의 멋진 글 - 최고관리자 07-06-04
열람 ➜ 자유게시판 woorich070224d-인간구원을 위한 신학구조(4) 녹취 [신학] 최고관리자 07-06-04
257 자유게시판 woorich070224c-인간구원을 위한 신학구조(3) 녹취 미가 최고관리자 07-06-04
256 자유게시판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 최고관리자 07-06-02
255 자유게시판 광주 강의(07. 5. 25) 녹취록 올립니다. - 최고관리자 07-06-01
254 자유게시판 이단을 연구합시다 히브리서 최고관리자 07-06-01
253 자유게시판 건의 사항 : 개혁주의가 나오게 된 배경을 ... [신학] 최고관리자 07-05-31
252 자유게시판 밀양-영화평 - 최고관리자 07-05-30
251 자유게시판 20060908 안산강의 - 요한복음 20장(2) : 사랑관계. 녹취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07-05-30
250 자유게시판 진정으로 뻔뻔해지자 - 최고관리자 07-05-28
249 자유게시판 나그네와 이사 - 최고관리자 07-05-26
248 자유게시판 화평교회 홈페이지 이사 - 최고관리자 07-05-25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