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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woorich070224c-인간구원을 위한 신학구조(3) 녹취자유게시판미가

woorich070224c-인간구원을 위한 신학구조(3) 녹취

이름 : 한윤범(IP:59.6.189.212)

woorich070224c-인간구원을 위한 신학구조(3)

(강의:이근호 목사)

법이 뭐냐? 양심은 안 된다는 거예요. 양심은 모호해서 안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양심이라 하는 것은 자기 변명조로 나서기 때문에 나 양심 따라 했으니까 봐 줘 라든지, 양심 따라 했으니까 난 정당하다. 이것은 안 되고. 딱 형식에 맞춘, 그것 때문에 형식이성이 생겼다.

형식이성이 생겼다는 말은 백 사람이 나 잘났다, 서로 잘났다 할 때 형식이성이 딱 되어서 어, 당신 이성이 틀렸어. 이건 맞아. 딱 형식적으로 규정이 되어야 되지, 그렇지 않고 본인이 잘했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다 손 다 들지, 뭐.

강도도 강도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많아요. 사람은 무슨 짓을 하던지 항상 변명거리는 붙어 있게 되어 있습니다. 법이 형식적이 되지 아니하면 이건 기준이 없어서 이거는 윤리도 아니고 도덕도 아니고, 이거는 자기 팔 자기가 흔드는 자기주장 밖에 나올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하나의 형식이란 결국 형식 자체가 법제화되어야 되는데 그래서 하나님의 뜻은,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뜻은 곧 법이라는 형식으로 외견화된다. 구체화된다. 법 없는 곳에는 하나님 뜻도 없다. 하나님은 법으로만 말씀을 하신다. 이렇게 되는데

이번 시간에는 '법'이 뭐냐? 이걸 분석해 보니까 법은 언어입니다. 맞지요. 법은 언어로 되어 있지요. 그 대표적인 것이 십계명이잖아요. 십계명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법을 주었다는 말도 되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언어적으로 말씀을 하셨다 이 말이에요. 언어적으로.

하나님께서 십계명에다 글씨를 쓰실 때 한국말 썼습니까? 어디 영어로 썼겠어요? 그들의 민족 말로 썼지요. 이건 하나님의 배려 아닙니까? 하나님은 자기 뜻을 전달할 때 언어라는 매체를 가지고 전달한다 이 말이죠.

하나님이 언어라는 매체로 전달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받을 때는 언어를 이해한다는 조건하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뜻을 줬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요. 하나님께서 우리가 알아먹을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그것은 누구나 다 형식이성에 의해서 실천은 못한다 할지라도 실천은 나중 문제라 할지라도 일단 형식으로 아, 이거는 옳다, 이거는 그르다 판단력을 조성할만한 형식이성에 합당한 법으로 주셨다. 라는 이것이 신학자들이나 철학자들이 한결 같이 주장하는 겁니다. 특히 천주교에서 개신교도 그렇게 이야기하지만 교회에선 그렇게 이야기한단 말이죠.

그런데 막상 그걸 형식이성에서 실천이성으로 옮겨서 실천에 행동으로 옮기려고 할 때에 무슨 뜻이냐, 의미론이죠. 무슨 의미냐? 무슨 의미냐고 이렇게 파고 들어갈 볼 때는 이 법을 언어적으로 기호학적으로 분석에 들어가야 돼요. 이게 무슨 의미냐 이 말이죠.

살인하지 말라가 무슨 의미냐 이 말입니다. 살인하지 말라가 하나님 뜻인지 믿습니다. 믿고요. 모세 율법에 그거는 하나님이 주신 그런 신성한 실정법이라 하는 걸 믿는데 지금 지키고 시작하는데,

살인하지 말라가 무슨 뜻입니까? 라는 거기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물을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방금 논리에 의하면 없단 말이죠. 왜냐하면 알아먹도록 준 말씀인데 그걸 다시 나한테 물으면 안 되잖아요. 살인하지 말라 니 몰라? 무슨 뜻인지. 몰라? 네, 압니다. 고개 숙여야죠. 알아 들어먹으라고 준 말인데 못 알아듣는다면 자칫하면 못 알아듣는 것 때문에 책임추궁 당할 수 있단 말이죠.

그럴 때 어떻게 합니까? 아, 이런 뜻이구나 하고 짐작되겠지. 그게 교재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제가 길게 쓸 테니까 주무실 분은 주무세요. [작가->창작과정->작품->해석과정->독자] 다 썼습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하나의 의미가 생길 때 작가가 자기의 뜻을 담아서 의미를 담아서 작품을 창작할 때 그게 작품이 되는데, 그 작품을 두고 그 다음에 뭐가 필요하냐 하면, 해석과정이 필요하단 말이죠. 해석과정. 해석이 요구된단 말이죠. 해석이 요구된다는 말은 이 독자가 방향을 이렇게 트는 거예요. 그 다음에 나오는 거. 그 뒤에 보면.

독자가 해석과정이 아니고, 해석원칙이죠. 해석원칙을 가지고 그 다음에 작품을 더하고 그 작품을 더해서 창작과정을 탐색을 하고, 탐색을 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작가 탐색을 하게 되죠. 방향이 작가에서 창작과정, 작품, 해석과정, 독자 이런 방향이 작가는 이런 방향을 가지고 독자에게 다가오면,

독자는 독자적인 노선이 또 따로 있어요. 독자는 자기 나름의 해석원칙을 가지고 작품을 대하면서 창작과정을 탐색, 탐색이라. 연구를 하고 아, 당신이 김춘추 이런 사람이구나. 당신이 소설가 이광수 이런 뜻으로 했겠지. 이 두 노선이 따로따로 논다고. 따로따로 노는 거예요.

따로따로 놀면서 작가가 무슨 이야기를 했던지 상관없이 독자는 자기 나름대로의 의미를 자기를 위하여 뽑아내지요. 그 만나는 매체는 뭐냐? 작품이죠. 작품을 통해서 평소에 자기가 지향했던 따로 자기한테 도로 회수하는 방법으로 의미를 창출하는 거예요. 그게 대표적인 것이 바로 산상설교에 나오는 모세의 율법에 대한 해석을 놓고 바리새인과 예수님의 해석이 엇갈리죠. 엇갈리는 게 아니고 서로 대립되죠.

그리고 요한복음에 보면 그게 충돌되죠. 너희가 모세를 알았더라면 나를 믿었으리라. 너희들이 모세부터 모르니 나를 못 믿지.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은 가만있지 않고 네가 모세의 법을 어겼으니까 죽어도 마땅하다. 너는 귀신 들렸다. 너는 이단이다.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이단의 집단이다. 이렇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앞에서 그렇게 욕을 얻어먹었다면, 오늘날 우리들이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바리새인 나는 싫어. 라고 한다면 우리 속에 있는 바리새인 요소를 알고 싫어. 라고 해야 되는데, 바리새인이 어떤 측면에서 모세를 해석했느냐를 그것도 개뿔도 모르면서 나는 바리새인이기 때문에 싫어. 자기는 바리새인이면서도 바리새인이 싫다는 그러한 이중적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이 바리새인이나 이런 사람들이 결국은 아담에 속한 사람이고, 아담에 속한 사람에게는 어떤 해석이 나오는가? 그것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이 뒷부분에 나와요. 교재에 나오는데 미리 말씀드리면,

'똑딱이'라는 말이 나오거든요. 똑딱이라 하는 것은 '똑'하고 '딱'하고 나중에 실제로 물리적으로 측정하면 시계바늘이 똑도 아니고 딱도 아니고 뭐, 똑같아요. 똑같지만 인간들은 그 칸막이를 일부러 자기 의미화시키기 위해서 너는 이거부터를 '똑'이라고 보고, 쭉 가다가 지 마음에 드는 걸 끊어서 '딱'이라 봐서 그 둘 사이를 하나의 스토리를 전개해 만들어요. 하나의 스토리를 끊어버린다니까.

일방적이죠. 일방적으로 하는데 그 스토리를 만들 때 왜 당신은 거기서부터 똑이라 보고 왜 나머지는 딱이라고 그렇게 일방적으로 끊습니까? 그걸 가지고 뭐냐 하면, 문학적 개인의 상상력이라고 봅니다.

그대로 읽어보면, [작가의 상상력 안에는 자신의 속해 있는 그 사회의 성질을 함유하고 있기에 타인과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고자 작품 활동을 한다. 겹쳐진 사회구조가 작가의 예리한 해석력으로 인해 펼쳐지고 그 틈 사이에 숨어 있는 의미가 비로소 만개한다. 작가는 자신의 상상력을 사건이라고 간주하고 그 사건의 다발을 텍스트화시켜서 자체적으로 독립적 존재임을 외부에 알리고, 그 독립된 텍스트가 문학(문예)의 옷을 걸치고 나타나서 자기 시대가 요구하고 확인하고 싶은 진리치를 예술적 유혹으로 포장하여 타인과 대화에 나서는 것이다.]

하나의 작가는 작품을 가지고 남들 교육하려고 합니다. 훈계를 하려고 해요. 그리고 현재 사회는 윤리와 도덕, 참된 진리를 원합니다. 왜 진리를 원할까요? 아까 제가 이야기했죠. 왜 진리를 원합니까? 신의 뜻에 부합되지 않으면 누가 봐도 신의 뜻에 방해물이 되기 때문에 존재가 힘들어 안 돼요. 존재가 편하려면 신의 뜻에 합당해야 돼요. 그런데 신의 뜻은 우리 내부에서 뭐가 이루어진다? 선함, 착함, 올바름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면 이 사회가 악이 횡행하다면 드라마를 꾸밀 때 어떻게 해야 돼요? 선이 이기고 악이 지는 정도가 아니고 악이 개차반 돼야 되죠. 인간이 어그러진 악에 대한 복수심까지 다 풀 수 있는, 박살내야 돼요.

지금 주몽 드라마 하고 있지만 제가 작가 쓰면 대소 왕자, 저렇게 안 합니다. 죽여 버립니다. 칼 가지고 주몽한테 찔려 죽고, 그리고 예소야 저래 놔두면 안 돼요. 해서 여자 둘 할 수 없지. 받아들여서 같이 별궁 만들어서 예소야 이제는 병도 낫고 태기가 와서 병 고쳐서 잘 되서 소선노하고 예소야 하고 둘이 껴안고, 우리 새로운 자매 행세하자 이래 돼야, 시청률 60 몇 프로 올라갑니다. 올라가려면 그래 해야 돼요. 대소 왕자 오래 살면 안돼. 죽여 버려야 돼요.

사회적인 겹쳐서 욕구들이 있어요. 앞으로 욕구 나옵니다. 욕구들은 선을 자기는 선을 행하지 못하면서도 뭔가 대리 선을 행하는 영웅이 나타나서 그 사람의 선한 덕을 보자는 거예요. 우리가. 나는 그렇게 선하지 못하지만 누가 선한 분이 등장해서 가만있어도 선한 축복을 받기를 원하는 겁니다.

교회 당회장 원할 때 기도 많이 하고 금식 많이 하는 사람 원해요. 왜? 기도발이 넘치는 분이 와서 나는 비록 기도 못하지만 목사가 대신해서 기도 많이 해서 교회 부흥시키면 교회부흥 널널하니 좋지, 뭐. 돈 팍 들어오고. 월급날 안 닥쳐도 되고 얼마나 좋아요.

그러면 그렇게 교회부흥이 안 된다는 말은 뭐냐? 평소에 신의 뜻에 거슬렸다는 뜻 밖에 안 되잖아요. 광주화평교회. 신의 뜻을 거슬렀어. 인원수가 몇 명 안 된다니까. 신의 뜻을 거스르면. 뭔가 신을 뜻을 자꾸 대립되기 때문에 신이 복을 안 줘서 안 커진다 이 말이죠. 이걸 안 커지는 게 왜 저주가 되느냐 하면, 다시 이야기할게요. 이거 벌써 세 번째인데. 또 이야기해야 됩니다. 누가 없는 거 같은 느낌이 드는데 다시 이야기할게요.

자신의 유용가치가 뭐로 환산돼야 됩니까? 돈으로 환산될 때 이게 진리치에요. 진리다 말이죠. 이 시대가. 저게 복 받았느냐, 복 안 받았느냐 하는 것은 뭐냐 하면, 그 사람의 유용가치가 돈으로 환산될 때 그걸 진리로 보는 겁니다. 마르크스 이야기하는 것이 이겁니다.

지금의 하나님의 해석을 잘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잘 전해서 사람들의 만족을 사람들의 선에 대한 욕구를 교회가 돼야 된다 이 말이죠. 만족시키는 교회가. 그렇게 되려면 사회가 용납하는 선을 이기고 악을 죽이고 선이 승리하는 그런 방법으로 그런 스토리로서 성경을 똑딱 올려서 잘라야 되는 거예요. 성경을 놓고 거기다가 어떤 스토리를 짜고 그 작품 활동을 할 때 설교라는 작품 활동을 할 때 딱 끊어서 승리하는 자에게 해주란 말이죠.

그게 뭐냐? 선한 자에게는 승리가 주어지고 복이 주어지고 악한 자에게는 저주가 주어질 때 보고 그 청중들은 박수를 보내면서 동의를 한다 이 말입니다. 복이 뭐라고요? 자기의 유용가치가 돈으로 환산되는 거잖아요. 그러면 간증집회 밖에 더 있습니까? 바쳤더니만 뭐 왔다? 열 배나 갚아 주었더라. 열 배나 돈으로 왔다 이 말이죠.

지금 이 강의를 케이블 목사들 들었으면 세상에 저런 방법도 있는 걸 모르고, 안 그러면 지금까지 내가 그런 방법들을 써왔구나. 아마 동감할 거예요. 돈 벌 수 있는 간증거리를 많이 만들어서 바쳤더니만 교회 충성했더니만 유용가치 했더니만 돈을 버니까 그 돈 못 번다는 것은 그만큼 당신, 저주받은 사람이라는 뜻이거든요.

그러면 저주받은 사람은 뭐로 돌려야 돼요? 복 받은 사람으로 돌리려면, 여러분 선한 일을 해야 되는데, 선한 일이 뭐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는 교회에 갖다 바쳐야 되죠. 유용가치. 이건 진짜 참 의미 있는 부흥회다. 정말. 바쳐야 복을 받으니 바쳐야 복을 받는 거예요. 바쳐야.

이것이 현재 사회가 요구하는 의미에요. 합당한 의미다. 독자들이 해석원리가 작품을 통해서 이렇게 나온다 이 말이죠. 그 시대가 요구하는 확인하고 싶은 진리치를 예술적 유혹으로 포장해서 하는데 이 작품 하겠다는 이것이 교회에 그대로 적용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해석이 문제점이 뭐냐? 그렇게 해서 하는데 그 선악을 할 때 뭔가 자기의 유용가치를 하기 위해서 여기서 형식화된 형식 언어죠. 형식 언어인 법, 법이 동원되어서 이렇게 그걸 지킴으로서 아, 우리 정 목사님 안 오셨구나. 뭔가 빠졌다 싶더라.

이렇게 해서 형식 언어가 법이 여기 동원된다 했는데 그렇다면 결국 방금 이야기한 이 지점에서 결론을 내리면 뭐냐? 결국 법이라 하는 것은 누가 요구합니까? 법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요구하기 전에 인간이 요구하고 있죠. 인간은 법 없이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은 율법을 준 겁니다. 인간이 죄가 어떤 식으로 현재 구성되어 있는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추가적으로 율법을 줘서 그 율법을 줌으로 말미암아 죄인을 더욱더 죄 되게 구체화시키는 겁니다.

여러분 두부 만들 때 두부가 처음에는 액체 아닙니까? 거기다 뭘 간수 넣고 그러면 하나의 고체화되죠. 액체화된 죄의 흐름을 고체화시키는 방법은 응어리지게 하는데 그게 뭐냐? 나는 법대로 했다는 거예요. 법이 등장하죠. 법을 내세우는 겁니다.

법을 함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그 법에 대해서 우월성을 가지고 법에 매여 있는 채로 행동하는 걸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다시 말하면, 다른 말로 해서 너는 죄에 얽매여 있고 죄에 묶여 있는 채로 행동한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겠다는 것이 하나님 뜻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한번 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8절에,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율법이라 하지 말고 그냥 법이라 하세요. 이 대목과 관련해서. 다시 읽겠습니다. "만일 그 유업이 법으로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니라" 했죠. 그러면 약속은 무엇을 통과하지 않습니까? 법을 통과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법을 통과하지 않습니다. 약속은 법이 없이 따로 법외에 다른 계통으로 오게 되어 있는 게 약속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의미 해석을 뭘 통해서 의미 해석합니까? 반드시 선악, 그러니까 형식이성, 법을 통해서만 옳고 그름을 판단합니다. 그러면 진짜 약속 받은 놈은 뭐가 깨져야 돼요? 율법적 사고방식이 깨어져야 되죠. 그런데 율법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율법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을 깨겠습니까? 절대로 못 깨죠. 뱀이 자기 꼬리를 물어서 삼킬 수 있습니까? 안 되죠.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약속이 율법을 가지고 율법을 있는 사람을 율법으로 저주함으로써 아예 율법으로 살겠다는 그 인간 자체를 죽여 버리죠. 그게 십자가 사건입니다. 함께 죽자. 너 나하고 같이 죽자. 이 말입니다. 너는 나하고 같이 죽음으로써 너는 산 사람이 되고, 나하고 같이 죽지 않은 사람은 죽은 그대로 놓여 있고. 이게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율법이 있다는 말은 곧 저주 아래 놓여 있다는 증거니까. 주여, 저는 법을 받았습니다. 마, 니 저주 아래 있다는 뜻이야! 오, 의인? 진짭니까? 저 십계명 받았습니다. 마, 니 저주 아래 있다는 증거로 십계명 준 거야. 뭘 알아야지, 니가. 니가 지금 저주에 있다는 뜻에서 법을 준 거야.

니가 저주 아래 있으면 법을 안 줬어. 저주 아래 있기 때문에 법을 줘서 아하, 저주 맞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법을 준거다 말이죠. 그래서 그 법을 지켜서 구원받겠다 하는 것은 그거는 저주에서 알아서 벗어나겠다는 말인데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여러분, 저주에서 벗어난다는 말 자체가 성립 안 돼요. 왜냐하면 이게 지옥 간 사람이 왜 주를 찬양하느냐 이유가 나오는데, 지옥 갈 사람들이 주를 찬양하는 이유가 뭐냐?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저주에서 벗어난다는 벗어난 주체는 또 뭐예요? 저주 안 섞였다는 뜻입니다. 그렇잖아요. 제가 지금 말장난하는 겁니까?

저주라 함은 옴팡 뒤집어써야 저주지, 저주 받을 걸? 저주 받고 있을 걸? 이러면 저주 아니잖아요. 아직도 뭔가 가능성 갖고 있잖아요. 저주 안에 있다는 말은 가능성조차 없는 거예요. 현재 우리는 가능성이 없는 거예요. 다른 말로 우린 구원받겠습니다. 말할 자격이 없다 이 말입니다, 우리는. 그냥 저주 아래 있는 자지, 어떻게,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말할 자격도 없는 자에요, 우리가.

우린 그걸 모르고 법대로 해서 바르게 살면 하나님 주신 형상 가지고 영혼 가지고 잘만 하면 천사처럼 되서 구원받겠지. 이걸 생각하는 거예요. 그것 자체가 법에 포위되어 있고, 그게 법에 포위되어 있고 다른 말로 하면 성경에 포위되어 있다는 게 갈라디아서 3장 22절 봅시다. 21절에,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뭐 했으니?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약속이라 하는 것은 믿음이라 하는 것은 저주 아래 있는 자에게 이런 믿음이 나올 수 없고, 약속이 등장할 때 약속과 병행해서 주어지는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자체가 은혜기 때문에 우리한테는 나올 수 없고, 믿음이라는 것은 은혜기 때문에 약속 안에 들어있는 겁니다. 이걸 어떻게 표현하나 하니까 이렇게 하면 되지요.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를 쓰려고 하니까 볼펜이 없어요. 그런데 사랑하는 자로부터 먼저 편지가 왔어요. 뜯어보니까 안에 볼펜이 들어있단 말이죠. 당신 나한테 편지 쓸 때 무슨 볼펜 갖고 썼냐 말이죠. 당신이 주신 볼펜 갖고 썼다. 그게 바로 뭐냐?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이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린 쓸 볼펜도 없어. 왜? 저주 아래 있기 때문에. 우린 아는 것은 법 밖에 몰라요. 법 이외엔 아무것도 몰라요. 법에 옳고 그름을 법으로 따져요. 우린 형식이성 때문에 법으로 따진다고.

그래서 그러면 그 법은 나오는가? 그 법이 십자가였다 말이죠. 그러니까 십자가 눈앞에 보이는데,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너를 꾀더냐? 십자가와 약속을 가미하면서 중간에 율법은 새로 가입된 것이기 때문에 울법이 주류가 아니라는 거예요. 율법이. 진짜는 약속이 그리스도가 처음부터 은혜였고, 처음도 은혜였고, 나중도 은혜였고, 은혜로만 이루어지는 게 천국이라는 거예요.

우리는 그 가운데서 뭐가 드러나야 하느냐? 우리는 저주 받아야 된다는데, 우리가 저주 받은 사람으로 인정 안 하잖아요. 우린 나쁜 짓 안 했습니다. 아하, 나쁜 짓 안 해서 저주가 아니고, 법을 생각한다는 자체가 저주 안에 있다는 뜻이야. 이 바보야! 왜 그걸 몰라. 선생 같으면 분필 가지고 던져 버립니다.

법을 생각, 법을 잇겠다는 자체가 이미 저주 아래 있다는 뜻이에요. 왜냐? 법이라 하는 것은 추가적인데 너는 저주 아래 있는 놈이야. 뜻에서 추가적으로 주어진 것이 하나의 상표처럼 붙어 있는 것이 율법인데, 세상에 자기를 때리라고 준 주걱을 모르고 거기서 뜯어먹는 흥부의 마누라처럼. 에이, 나가. 때리니까 두 개 붙었다고 빨아먹는 흥부 마누라의 그 치사함. 하나님이 율법을 가지고 귀때기 때렸는데 야, 이거 지키면 되겠다. 복 받겠다. 그 치사함, 한심스러움.

아까 영원법, 실정법, 전부다 뭡니까? 그저 완벽한 신학체제가 몽땅 다 뭐예요? 그게 원래 인간의 본성 가운데 선악과 따먹은 나온 그게 아주 저주 받은 나는 죄인 맞습니다. 라는 표를 내는 거예요. 그런 신학을 유지한다는 게. 나 저주받은 놈 맞습니다. 아예 표를 내요.

자, 그러면 지금부터 어렵게 해요. 이제까지 쉬운 거고. 이제부터 상당히 어렵습니다. 어려워서 설명하기도 어렵고, 그래서 저는 제일 좋은 것은 여러분 교재 있으면 같이 읽어보면 참 좋은데. 여기에 이런 말씀 있습니다.

[선천적으로 색깔을 본 적도 없는 장님이 그가 비록 색을 인지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실수 없이 색에 대한 낱말들의 용법들을 배운다. 만일 경험주의적 설명에 따르면 그는 결코 색에 대해서 낱말들의 의미를 알 수 없어야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님들은 사물을 볼 수 있는 똑같은 방식으로 의미론적 대조를 익힌다.]

이건 뭔 뜻이냐 하면, 의미라는 것을 분석해 보니까 의미라는 것이 대상이 있어서 붙이는 게 아니고, 그 대상은 핑계고 대상을 갖다놓고 서로 대비되는 두 개념을 만들어놓고 그 틈바구니에 대상을 딱 놓는 식으로 그게 의미를 설정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제일 쉬운 게 남자, 여자 있는데. 성경에도 그러지요. 남자, 여자. 여자가 여자보고 여자라 하면, 당신은 뭐요? 난 여자입니다. 왜 여잔데? 다른 말로 하면, 당신은 여자로 보지만 명칭을 남자라 하면 왜 안 되는? 이래 되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여자라 하는 것은 반드시 뭐를 의미를 두느냐 하면, 남자 있음을 이렇게 손가락질을 할 경우에만 여자라는 게 의미가 있어요.

그래서 라캉이란 학자는 말하기를 이 세상에 여성은 없다 이거에요. 여자가 없다고 했어요. 왜 여자가 없느냐? 여자는 없고, 여자를 괄호를 치고 여자는 뭐냐? 남자의 흔적이라는 거예요. 여자하면 안 돼요. 남자의 흔적. 남자로 하여금 남자 있음을 알려주기 위한 보조 개념이 여성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래 나가면

그래서 남자 없는 여자는 여자가 아니에요. 다시 말하면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이라 할 수 없어요. 왜? 정체성이 없어요. 반드시 여자는 남자가 있어야 여자입니다. 남자가 없으면 그냥 짐승이지 여자라고 할 수 없어요. 다만 그때는 남자 없다 하지 않고, 남자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면 봐주겠습니다. 언제나 있어요, 언제나 있어요. 아하, 여자 될 가능성이 있구나. 라캉의 이야기입니다. 제 이야기 아니고. 라캉의 이야기에요.

이것은 여성의 의미는 남성 없이는 여성인 자체 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겁니다. 여자가 뭐냐? 머리 길다. 그거 가지고 여성이 안 돼요. 왜냐하면 남자가 머리 길면 그만이니까. 여성 본래 대상을 분석해서 나온 개념이 아니고, 뭣이 아니고 이거냐 할 때만 거기다 의미를 갖다 붙인다 이 말이죠.

도로 빨간불, 파란불도 마찬가지입니다. 파란불일 때 운전할 때 왼쪽으로 가는 거 오른쪽으로 가는 거, 미국하고 우리하고 같은가요? 일본하고 다르고 하잖아요. 그게 그 나라의 차이 다르다. 그게 여기 교재에 보면, 남자가 넥타이 매는 거, 여자가 치마 입는 것 그걸 가지고 뭐냐? 이 대립체제가 일어나요. 대립체제가 관습이고 문화에서 대립체제란 말이죠.

모든 문화와 관습은, 야곱스란 학자도 그런 이야기 했지만, 모든 사회적 의미라 하는 것은 대립됨을 통해서 남자, 여자가 대립되었으니까 역할을 분담하기 위해서 이게 분업의 발전인데. 분업하기 위해서 뭔가 경계선을 쳐야 돼요. 강제적으로. 너는 밥이나 해. 너는 사냥하고. 여자는 밥하고, 남자는 사냥하러 나가는 거예요. 경계선을 쳐야 되는 거라.

하리수는 굉장히 곤란해요. 사냥할 수도 없고 밥할 수도 없고. 그런 것은 뭐냐? 저주 받은 인간이에요. 그거는 신에 저주 받은 게 아니고, 사회에서 저주받은 거지요. 사회에서 저주받았다 하면 너무 섭섭하니까 신의 저주 받아서 니 팔자가 그렇다 이렇게 해버린 겁니다. 우리나라 호적 간에 남자도 여자도 아닌 그런 거 없어요. 남자냐, 여자냐 이래 묻지, 남자 여자 아닌 사람을 따로 하는 그런 거 없다 말이죠.

주민등록번호에 여자는 뭐로 시작합니까? '2'로 시작하지요. 2.5로 시작하는 사람 없어요. 2.5 없어요. 2.5해서 은행에 계좌 설정 못합니다. 2.5가 어디 있어? 2.5가. 사회가 구획이 안 되더라도 억지로 구획을 지어야 사회가 돼요. 사회 분업이 되고 질서가 유지된다고요.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할 때 그게 독자들이 원하는 이미지고 의밉니다.

의미라는 게 나 혼자 소주 먹고 누워서 끄집어내는 게 의미가 아니고, 내가 남들이 나로 하여금 유용가치, 나를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들어주기 위해서 나는 어떤 의미를 지금 생산해야 되느냐? 거기에 의미를 따라서 사람들은 쏠릴 수밖에 없어요. 편승할 수밖에 없다고요. 매사에. 그래야 다른 사람하고 의사소통이 될 거 아닙니까? 야, 박지성이 축구 잘하더라. 이러고 하는데 박지성이 누군데? 이러면 의사소통 자체가 안 되지요. 나, 당신하고 안 논다. 이래 된다고.

개그나 코미디가 사람들의 딱딱한 질서체제 때문에 떨어져나간 그러한 의미들을 다시 주워서 찾아 줌으로 말미암아 딱딱한 사회에서 정신적으로 사람을 스트레스를 풀게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말도 안 되고 엉뚱한 소릴 함으로써 웃게 하지요.

예를 들면 개그 가운데 [킬로만자로의 걔]라는 게 있어요. 걔가 이 개가 아니고 걔라 하죠. 걔가 걔냐? 이케한다고요.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너가 태산이냐? 이카거든요. 아니다. 뫼이로다. 그 높다하되가 누구냐? 하면 높은 놈 하나 등장해서 내가 높다하되다. 이래 나온다고.

이거는 사람들이 말도 안 되는 걸 이야기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약간의 루즈하게 만드는 거예요. 긴장을 풀어주는 겁니다. 그만큼 우리는 사회라는 것 때문에 사회가 요구하는 의미라는 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에 강제적으로 우리가 탈락시킨 것들이 많이 깔려 있어요.

그걸 오락이나 일탈이라 하죠. 탈선, 일탈을 통해서 그런 걸 푸는 거잖아요. 나이트클럽도 마찬가지고. 노래방에 가서 여기 맬 넥타이를 여기다 매잖아요. 왜 그렇게 합니까? 만약에 여기 맬 넥타이를 여기 매고 회사 들어가면 그거는 쫓겨납니다. 왜냐? 그쪽 의미에선 안 통하거든요. 이래 나가서 무슨 바이어를 만납니까? 그게 말이 안 된다고.

그래서 뭐냐 하면, 결국 선과 악이라는 것은 이미 외부에서 지적해 줬어요. 선과 악은. 사회가 용납하면 선이고, 사회가 돈으로 가치 인정해 주면 그건 악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양심껏 사는 것도 악이 될 수 있는 사회가 오늘날 사회에요. 양심껏 사는 것, 바르게 사는 것. 이게 악이 되는 사회입니다. 그래서 우리교회 이단 아닙니까? 복음 전했다고 이단 돼버렸어요. 악이 되는 사회에요. 그들 의미하고 안 통하는 의미니까.

그렇다면 여기서 남는 게 의미가 사회적인 욕구를 한다면, 그럼 사회적 욕구에서 만들어낸 게 뭐냐? 그게 언어죠. 언어를 가지고 라캉은 상징어. 인간의 본성이 나옵니다. 이제 약간 힘든 시간을 보낼 텐데요. 좀 참으시길 바랍니다.

인간의 자아는 이거는 혼돈 상태에요. 창세기 1장 2절입니다. 이거는 어두움 밖에 없어. 혼돈상태. 어린애가 오면 혼돈상태에요. 어린애가 어느 정도냐 하면, 엄마가 아프면 자기 몸이 아픈 줄 알고 엄마하고 분화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자기 몸을 통일체로 보지 못해요. 머리 따로 놀고 몸 따로 놉니다.

그런데 어느 날 순간 애가 육 개월 지나면 거울을 볼 때 거울에 비친 자기 몸이 따로따로 노는 것이 아니고, 한 덩어리인 것을 느끼지요. 일체감 느낍니다. 하지만 아직도 자기 내부에는 없어요. 엄마하고 분화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자아라는 게 없어요. 엄마 자아가 자기 자아에요. 자기를 대신하는 겁니다. 자아가 없어요.

이십사 개월 지나면 아기는 엄마 따로 내 따로 되는 겁니다. 그럴 때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자아가 생겨요. 자아는 허구입니다. 자아는 허구에요. 이건 자기 마음대로 만든 거예요. 누가 몸이 아픕니다. 아파서 수술했습니다. 아플 때 누가 아픕니까? 내가 아프지요. 아플 때 이런 소리, 하나님이여, 왜 저를 아프게 합니까? 이 문제에서 문제점이 뭐예요?

하나님이 아프게 한 건 맞는데, 그 몸이 누구 몸이냐 하면, 자기 몸이 아니거든. 누구 몸? 예수님 몸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에 보면, 값을 주고 산 예수님의 몸을 예수님이 자기 몸을 자기가 아프게 하는데 거기서 톡 튀어 나와서 반문하기를 왜 저를 아프게 합니까? 니가 누군데? 안 보이는 니가 톡 튀어 나왔느냐? 아픈 건 맞는데, 왜 저를 아프게 합니까? 누구시죠? 걔가 걔냐? 누구신데 아프다 해? 이 몸이 누구 몸인데.

자아는 엄마 몸에서 분화되면서 그냥 분화되는 게 아니고 내용물을 채워야 돼. 그 채우는 것이 뭐냐? 외부에 있는 사회 이미지가 이 속에 담겨서 내용물을 채우게 됩니다. 그래서 이것은 뭐냐? 사회가 바뀌면 안에 내용물도 덩달아 바뀌겠어요, 안 바뀌겠어요? 바뀌겠지요. 예를 들면 젖을 떼야 될 애가 우유 안 먹고 젖 먹는다면 사회에서 뭐가 가해집니까? 이게 어디서 다 큰 아가 젖을 먹어. 때리지요. 거부하고. 그러면 걔는 뭘 느낍니까? 아하, 내가 요구하더라도 사회가 안 받아주니 여기에 적응해야 되죠. 이게 바로 윤리입니다.

그러면 이 윤리 때문에 걔가 젖을 빨고 싶다는 게 사라집니까? 이게 사라지는데 어디로 사라지느냐 하면, 문제가 큰 문제로 변해요. 달리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태어날 때 사라진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게 어디에 누적이 되느냐 하면, 이게 자기 무의식에 차곡차곡 쌓입니다. 한번 두고 보자. 내 젖 먹을 때 엄마가 젖을 안 줘? 그렇다면 엄마, 당신도 한번 당해봐라. 해서 나중에 엄마가 우유를 늦게 줬다. 아앙 하고 울어버리죠.

이건 뭐냐 하면, 나도 자아 있다. 나도 한 인간이다 말이죠. 반발심이죠. 그때 귀싸대기 날아오죠.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아하, 우는 것도 때를 맞춰 울어야 되겠구나. 그걸 뭐라고? 윤리라고 합니다. 눈치껏 울어야 된다. 눈치껏. 그런데 이걸 때려주는 엄마, 아빠가 안 때려주면 어떻게 됩니까?

뭐든지 장난감 사 달라 하고. 이건 완전히 식당에 가도 지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물론 나 같은 사람은 가만 두지 않겠지만 다른 사람 같으면 그거 못 본 척 하고 남의 자식이라고 가만있다고요. 아무도 개망나니죠. 개망나니는 혼자 살면 개망나니 소리 안 듣습니다. 어디서 개망나니입니까? 사회 내에서 개망나니죠. 사회 내에서 개망나니라니까.

사회가 어느 정도로 복잡하냐 하면, 정보를 모르면 개망나니 취급 받습니다. 전부다 오른쪽으로 차를 모는데 혼자 왼쪽으로 몰면 우에 됩니까? 개망나니죠. 그래 자기는 아무 남을 해코지 할 생각 없이 그냥 조용해서 갔거든. 그게 사회적 규칙에 보면 차는 오른쪽으로 사람은 왼쪽으로 있는데 그걸 몰랐던 거예요. 정보가 어두워서 개망나니 되는 겁니다.

할머니가 육교에서 저거 웬 다리가 저기 있지? 다리인지 알지 저리로 건너가는 줄 모르고 가까운데 그냥 가면 돼요. 갔는데 차에 치었다. 보상 안 나오거든요. 왜? 무단횡단이기 때문에. 왜 보상 안 나오느냐? 정보가 어두워서. 그럼 정보가 왜 어두우냐? 누가 가르쳐주지 않거나 가르쳐줘도 귀가 어둡다고 핑계 대서 안 들어서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할머니는 밖에 나가면 안 돼요. 그냥 집에 붙어 있어야. 괜히 나와서 의료보험만 올리고 나중에 사고만 터지고, 가정 식구들 애만 먹여.

자, 그렇다면 여기서 라캉의 제일 중요한 거 합니다. 이제부터. 뭐냐 하면, 이 사회적 그걸 상징계인데 상징세계인데 사회죠. 사회가 뭐로 억압하느냐 하면, 말할 때 '하지 마', '멈춰'. 전부다 뭐예요? 이게 법이에요. 법으로 인간은 자기 개체화시켜요. 법으로 자기 주체에 이미 법이 들어있어요. 모든 게 법으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 무의식에 뭐가 남습니까? 법을 떠난 뭐가 있어요? 본능이 있지요. 짐승적인 본능이 있지요. 이 본능과 자기 안의 법하고 타협을 해서 행동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정치적인 타협하는 거예요. 양보를 하고 타협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술 한 잔 먹었다 하면 법이 없어지고 본능이 나오지요. 니, 임마. 하고 행패를 부리지요. 나중에 술 먹어서 그랬습니다. 공손하게 나온다 말이지요.

그런데 지금 이것이 보통 이러한 균형을 정상인으로 보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정상인이 이게 옳다는 뜻입니까? 문제는 이게 사회가 요구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지, 사회는 이 정상인 생각하는 그 법을 뛰어넘는 다른 권력들이 이 법을 깨면서 억압을 하게 돼있어요. 이것은 뭐냐 하면, 법의 이름으로, 법 있잖아요. 나중에 무의식이 있는데 의식이 있잖아요. 의식은 뭐로 되어 있어요? 법이잖아요. 이게 인간의 욕망이, 제일 중요한 대목입니다. 오늘.

법을 빙자해서 깨는 게 아니고, 법을 이용해서 자기 욕망은 욕망대로 다 이루고 법대로 했다는 거예요. 재판받을 때나 이런 거, 재판 과정에서나 정권, 권력 쥔 사람들이. 그리고 횡포자지요. 그런데 법으로 따지면 하자가 없는 거예요. 이것은 법은 핑계지요.

이게 뭐냐? 이게 로마서 7장입니다. 법대로 했는데 주님 보시기는 법을 빙자해서 악을 확산시킨 거예요. 산상설교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이 욕을 먹는 이유가 거기 있어요. 니가 모세 법을 이야기하면서 사실은 니가 나를 죽이려고 하는구나. 우린 법대로 했다는 거예요. 법은 핑계에 지나지 않아요. 법보다 뭐가 셉니까? 인간의 욕망이 더 셉니다.

그래서 인간은 결국 법과 이걸 합쳐서 욕망을 합쳐서 이걸 가지고 주체라 하지요. 또는 자아라 하지요. 주체거든요. 주체는 자기 욕망을 변명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뭘 부르느냐 뭘 찾느냐? 법을 찾아요. 이 법이라 하는 것은 금지거든요. 금지라고. 뭘 하라 하는 것도 뭘 해선 안 되고 하는 것이 포함된 금지입니다. 금지라면 욕망은 그 금지를 밀어붙이지요. 밀어붙이면 이 금지를 딛고 금지 너머를 차지하고 싶은 것이 우리 욕망이잖아요. 그죠?

그러면 금지는 그걸 금하지요. 금지 바깥에 넘고 난 뒤에 이걸 따로 또 법을 만들어버리면 이건 넘어도 괜찮지요. 그렇지요? 난 하루에 두 시간 기도해야 돼. 그런데 바쁜데 두 시간 기도를 한 시간 밖에 못했습니다. 그때 어떻게 해요? 법을 어겼잖아요. 한 시간만 기도해도 되는 걸로 옮겨버리고, 그 다음에 한 시간을 여유롭게 즐기는 자기 욕망을 달성한다 이 말이죠.

그러면 법을 때려치워버리지. 법을 때려치워버리면 자기 주체가 주체화시킬 게 없잖아요. 마치 어린애들은 미친놈 되잖아요. 나라는 게 없어요. 나라는 게 형성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돼요. 법을 있어서 법을 가지고 간수처럼 해서 법이 있어야 내가 형성된다고.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달리기하는 선수가 거북이보다 달리기 선수가 더 빠르지요. 그러면 달리기 선수가 거북이를 따라내면 어떻게 돼요? 그거는 달리기 자체가 날아가 버려요. 달리기 자체가 의미가 없어 버린다고.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면, 거북이를 따를 수 있어도 항상 거북이 뒤따라가야 돼요. 그래야 계속 자기는 달리기 선수라는 푯대가 남는 겁니다.

이걸 라캉이 발견했어요. 사람은 자기가 앞서 갈 수 있으면서도 앞서 가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 계속 자기 의를 챙기려는. 계속 선함에 남기 위해서는 앞서가질 않아요. 그리고 사람은 앞서 갔으면 어떻게 하냐? 앞서 갔으면 거북이 말고 굼벵이를 앞서 놓고 뒤따라가는 거예요. 그래야 자기는 계속 달리기 선수로서 남기 때문에. 결국 자기변명이죠. 법을 통해서 자기변명 계속하는 거예요.

그런데 라캉이 연구한 바에 의하면 어떤 게 있느냐 하면, 법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사람들이 안 넘으려 하잖아요. 안 넘으려고 한다면 넘으려는 본능이 두 배나 세 배 자꾸 증가한다는 겁니다. 저걸 안 넘어야 돼. 안 넘어야 돼. 안 넘으려고 하면 할수록 그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언젠간 먹고 말거야. 치토스! 그것하고 똑같은 말이에요. 언젠간 넘고 말 거야.

'하지 말라'가 이게 로마서 7장인데 ‘하지 말라’로 인하여 더욱더 넘어야 될 목표점이 새로 생긴 겁니다. 하지 말라 하면 언제 건 그걸 넘어야 속이 시원해. 약을 올려. 하지 말라는 게. 그래서 남자가 여자보고 사귀자고 할 때 여자가 한번 튕겨줘라. 튕겨줘라 말이죠. 여자는 튕겨줘야 여자 맛이 난다니까. 제가 광주에서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여자가 튕기는 맛도 없이 그냥 오게 되면 남자가 도망갑니다. 그림 한번 그려봅시다. 부담돼서.

남자는 평생 남자로 살았잖아요. 앞으로 계속 남자로 살 거예요. 남자의 미흡함이 뭡니까? 여자지요. 미흡함이라 하는 것은 그냥 있는 게 아니고, 미흡함은 우리 속에 뭘 자극시킨다? 욕망을 자극시킵니다. 여자마저 내 것 만듦으로 말미암아 내 미흡함을 채우려 합니다.

채우면 채울수록 난 남자기 때문에 여자를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그러한 양심, 또는 윤리가 작용하지요. 윤리는 뭐라 카냐 하면, 법이잖아요. 여성은 함부로 대하지 말고 공주처럼 대해야 된다. 여왕처럼 받들어 모셔야 된다는 게 법이 있다 말이죠. 그게 법이 있어야 가정교육 잘 된 거예요. 가정교육이 잘 된 거다 말이죠.

가정교육하면 할수록 점점 더 욕망은 강렬하지요. 게다고 여자가 또 튕긴다고. 흥. 튕기잖아요. 튕기면 그게 자극이 돼서 언젠간 먹고 말거야 달려든다 말이죠. 그럴 때 자기가 지금 접근하지도 않았는데 여자 쪽에서 먼저 달려들어 버리면, 자기 만족함이 없잖아요.

내가 먹어야 만족하지, 먹혀버리면 만족함이 없거든요. 엄마야, 하고 도망쳐요. 속도 너무 빠르다. 이러지 말래이. 이러지 말자. 결혼 전에 이러면 안돼. 도망친다니까. 튕겨서는 안 되거든요. 달려들어서야 도망가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남자는. 막 손 끌고 그러면 엄마야, 나 집에 가야 된다. 엄마가 일찍 들어오라 했다. 그렇게 용감했던 사람이.

그리고 난 뒤에 여자를 차지했지요. 차지하고 난 뒤에 잘해야 정당한 법을 해야지요. 그게 바로 결혼입니다. 결혼하고 난 뒤에 어떻게 됩니까? 다른 여자 또 있지요. 이번에 다른 여자가 또 궁금하다니까네. 이걸 강제로 막는 거예요. 강제로 해서 법으로 막는 거예요.

이 법의 자리에다 사도 바울의 권면과 명령을 다 집어넣어 보세요. 그것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것을 집어넣어 버리면, 그것이 나로 하여금 결핍을 느끼고 결핍을 무엇을 자극한다?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던 무정형의 혼돈상태를 자극합니다. 욕망을 자극합니다. 아직 구체화되지 않은.

그러니까 나는 지금 돈을 사랑하는 이게 나가 아니라 돈을 사랑하지 않을 정도로 절대적인 천사처럼 되는 게 이게 나야. 라는 어떤 목표가 생깁니다. 그러면 돈을 안 사랑해 보는 그런 지점에 대해서 공격하게 돼요. 그러면 어떤 때는 나는 돈을 사랑하지 않았다. 하고 그 증거를 내 놓지요. 하다 그게 허물어지면 또 다른 걸로 변명하고. 그것이 나에게 하나의 성경을 보는 뭐가 된다? 나를 위한 하나의 이미지로 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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