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5월 25일 강의
광주 5월 25일 강의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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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교회(IP:220.♡.176.168)
07-06-02 00:29
광주 강의(07.5. 25) 26-1
시간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요한 2서입니다.
요한 1서에서 사도요한이 적그리스도에 대해서 그냥 못 본 척 지나가는 것이 아니고 철저하게 적그리스도를 거론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누구라는 것을 적그리스도와 대비해야 뚜렷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구원한다는 것은 이 세상이 이미 죄악으로 완전 장악되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하는 겁니다.
그리스도가 와도 적그리스도가 생길 정도니까 이 세상에 그리스도가 안 왔더라면 이 세상이 얼마나 점잖은 체하고, 훌륭한 척하고 이 세상은 아무 문제없는 것으로 그렇게 느껴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리스도가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적그리스도가 비로소 자기 정체를 참지 못하고 드러내지요. 예수님이 오신 것은 이 세상을 툭 건드려보는 거예요. 건드려보면 아무 일없이 평온하게, 지금 이 아파트 앞 고속도로에 차들이 다니잖아요. 모든 것이 아무 이상 없이 정상적으로 잘 돌아가잖아요. 아무 이상이 없는데 그리스도 이야기만 끄집어내면 갑자기 역겹다든지 반발이 튀어나온단 말이죠.
그걸 통해서 그 전에 우리가 세상을 보던 그 안목이 문제가 많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우리가 그냥 ‘괜찮아. 이 정도면 정상이야! 다들 그래. 다들 이렇게 살아가는 거야. 우리가 별나게 살 필요 뭐가 있어.’ 라고 이렇게 안일하게 좋은 쪽으로 좋게 해석하면서 이 세상에 묻혀 살아가는 이 모든 것이 사실은 다 비정상이라는 겁니다.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있는데, 우리가 여기 있습니다. 이 사람을 P1이라고 하고 남들을 P2라고 합시다. P1, P2 이 두 인간이 살고 있을 때에 여기에도 가족이 있을 것이고 이쪽에도 가족이 있을 것이고 이 가족과 가족이 모여서 또 더 큰 모임을 가질 것이고 이렇게 된단 말이지요. 그럴 때 사람들은 이 세상 전체가 어떻게 돌아가는가 하는 것은 모르지요. 평생 살아도 다 모르지요. 모르지만 남들이 P1은 P2를 보고, 남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보면서 그것을 모방하면서 살아가지요. 남들이 살아가는 것을 흉내 낼 때, 남들 살아가는 것이 정상이고 문제없다고 이야기해 준다는 것은 무슨 심보냐 하면, P2가 남들이 정상이란 말이 아니고 그 사람을 흉내 내고 있는 내가 정상이고 싶어서 그렇게 이야기한단 말이지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우리는 모방하고 싶은 사람이 많잖아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는 책이 나왔거든요. 거기에 보면 이런 것이 있어요. “이웃은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자”라는 표현이 있어요. 보통 성경을 보면 사단이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자지요. 살아가면서 이웃이 우리를 넘어지게 해요. 왜냐하면 이웃을 모방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그래요.
만약 잘 사는 동네에서 티고 타고 다니면 그것은 화젯거리가 되겠지요. 그런데 다 티고나 다마스만 타는 동네에서 티고 타면 그것은 별 문제가 안 되지요. 결국 이것이 뭐냐 하면, 내가 똑같은 티고나 소형차를 타도 지금 이웃이 누구냐에 따라서 내가 정상 인간 취급 받기도 하고, 정상보다 못한 인간 취급 받기도 하잖아요. ‘나’라는 것은 결국 누구에 의해 결정되는가 하면 내 주위에 포진해 있는 이웃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내가 결정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웃을 정상적으로 본다는 말은 이웃이 정상적이란 말이 아니라 결국은 이웃을 본 받고 싶어서 이웃처럼 살고 싶어 하는 내가 정상이고 싶어 하는 욕망 때문에 그렇단 말이지요.
쉽게 말해서 ‘내 친구 욕하면 나는 싫다.’ 이것은 무슨 뜻이에요? 그 친구의 친구가 나잖아요. 그러니까 친구를 욕하면 곧 나를 욕하는 것이 되기에 듣기 싫다는 것 아닙니까. 이 말은 내가 그 친구를, 다른 사람 보기에는 비정상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정상이라는 말 아닙니까. 정상이기 때문에 친구로 지내는 것 아닙니까.
친구가 정상이라고 생각하지만 친구에 대해서 연구해 본 적도 없어요. 하지만 내가 그 친구에게 마음이 끌리고 한다는 것은 누가 뭐래도 내 친구 만큼은 나는 정상으로 본다는 것 아닙니까.
이것을 철학자는 이렇게 이야기해요. 제가 리꾀르를 해석한 글에도 나와 있는데 여러분 그 글 읽어 보셨어요? 무척 어렵지요. 거기에 이런 내용이 있어요. ‘사람은 타인을 통해서 자기를 해석한다.’ 사람이 혼자 있을 때 외로운 이유가 뭐냐 하면 나에 대해서 뭐라고 해석할 근거가 없기 때문에 외로운 거예요. 그래서 개나 고양이라도 키우는 겁니다. 이것이 일종의 타인 대체물이 되니까. 혼자 있으면 내가 누군지 몰라 흔들리기 마련이고 그것 때문에 고독한 거예요.
사람은 평소에 자기를 의식하면서 살아가는데 남이 없으면 내가 어떻게 나를 의식할지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사람은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나 청소년 들은 항상 친구를 찾지요. 왜 찾느냐 하면 부모는 나를 비정상으로 보지만 친구는 나를 정상으로 봐주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를 정상으로 보는 그 그룹을 더욱 더 찾고 갈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우리들만의 세계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 여기에 그리스도가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의 세계를 완전히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놓았어요. 그리스도가 옴으로 뭐라고 했는가 하면, ‘너는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죽음이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죽음으로 봤거든요. 이것은 창세기 3장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는 자는 누구든지 죽은 자예요.
창세기 5장에 보면 아담이 오래 살아도 죽었더라. 죽었더라. 마지막 끝이 뭐냐 하면 죽음으로 끝나는 겁니다.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올라갔지요. 에녹 외에 나머지 사람은 다 죽음입니다. 창세기 6장에 보면 그 죽음이란 내용이 약간 더 상세하게 되어 있는데, 심판으로 되어 있지요. 신약에 와서 좀 더 상세하게 되어 있는데 그것은 심판 정도가 아니고 십자가에서의 저주가 됩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소급해서 앞까지 다 이야기하면 ‘선악과 따 먹으면 너는 저주 받아라.’ 이런 뜻이에요. 그리고 선악과 따 먹도록 부추긴 세력들을 찾아내지요. 찾으면 여자가 나오고 여자 배후에 있는 뱀이 나오지요. 그래서 이것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워서 해결할 문제지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전투 양상에 따라서 그 다음 이 저주가 풀리느냐, 마느냐 결정 납니다.
그런데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이야기는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만 알려진 비밀이기에 대한민국 단군의 후손들에게는 이야기 안 했어요. [주몽] 드라마 보세요. 거기에 여자의 후손, 뱀의 후손은 안 나오지요.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자기들 끼리 정상이라는 거예요. 아무 일 없다는 거예요. 아무 문제없다는 겁니다. 코미디에 여자의 후손, 뱀의 후손 나오던가요? 안 나오지요. 그냥 웃고 치우는 거죠.
한국교회에 여자의 후손, 뱀의 후손 나옵니까? 안 나와요. ‘좋은 아버지 되기.’ 이런 것만 나오지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우리끼리 모였으니까 무조건 정상이라는 겁니다. 그리스도를 이야기 안 하는 교회는 그 자체가 문제예요. 듣기 좋든, 싫든 간에 그리스도를 이야기해 줘야 비로소 그리스도와 내가 비교가 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빼버리면 서로 좋은 사람끼리 비교되기 때문에 결국 남는 것은 ‘우리 다 같이 좋은 사람이다.’ 이것밖에 안 남아요. 결론은 ‘역시 우리는 잘 났어.’ 이것밖에 안 나온단 말이죠.
요한 1서의 내용은 우리를 죽음으로 봐요. 이것이 전제입니다. 선악과 따 먹은 자는 죽음이다. 우리에게 죽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살아 있어도 산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누가 그렇게 말합니까? 우리를 만드신 분이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에서 ‘너는 죽음이다. 너는 저주다. 결국 네가 흙으로 돌아간다.’ 고 했을 때, 그것은 하늘에게 이야기한 것 아닙니까. 이것을 온 신체에 한 몸으로 이야기해 주실 분,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따라서 그분이 세상을 향해 죽음이라고 했을 때 그러면 생명은 어디 있습니까? 생명은 바로 나만이 생명이다. ‘예수 그리스도 = 생명’이 되는 거지요.
그러니까 요한 1서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생명을 눈으로 본 바요 손으로 만진 바라.’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만지고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으면 그 사람에게는 생명이 없다는 거지요. 생명이 없다는 말은 죽어있다는 거지요. 그리스도와 연관되지 않으면 죽어 있다.
하나님이 창세기 3장에서 말씀으로 하시다가 실제로 이 땅에 오셔서 온 몸으로 이야기할 때, “너희들은 죽고 내가 바로 생명이다.” 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그리스도가 없어도 생명이 있다.’고 우긴다면 그것이 바로 적그리스도가 되는 겁니다.
로마서 8장 2절에 보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 어디에 갇혀 있다는 말입니까? 죄와 사망의 법에. 그런데 철학자들과 과학자들과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펄펄 살아 있다는 거예요. 영안실에 있는 시체는 죽었지만 영안실 시체를 눈 부릅뜨고 바라보고 있는 나는 지금 살았다는 거예요.
인간은 근본적으로 죽음과 삶이 뭔지도 몰라요. 죽음과 생명도 분간 못해요. 그 정도로 인간들은 마귀에게 속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국교회는 전부 사기꾼이지요. 교회에 간다는 것은 사기 집단에 가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지 않는 교회는 사기꾼입니다.
로마서 8장 2절을 다시 봅시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되어 있는데, 사람들은 자꾸 2절 앞부분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에만 관심 두는데, 생명과 성령의 법을 좋아하려면 내가 어디에 속했다는 것을 확정지어야 됩니다. 나는 뭐냐 하면, 죄와 사망의 법에 있어야 돼요.
그러면 어느 정도까지 고백되어야 되는가 하면, ‘나는 이래서 죄와 사망의 법에 있었습니다.’라는 사례들을 고백할 수 있어야 돼요.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만이 이미 거기에서 벗어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단 말입니다. 논리가 그렇잖아요?
내가 군에서 제대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제대했다는 것은 과거 군에 있었기에 제대한 것이지, 군에도 한 간 여자가 나는 군에서 제대했다고 하면 말이 됩니까? ‘너 군에 갔어?’ ‘안 갔는데.’ 안 간 사람이 무슨 제대를 이야기 해.
예수님이 우리에게 의미 있다는 말은 ‘너는 죄와 사망의 법에 놓여 있었던 인간이야.’ 라는 뜻이에요.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안다는 말은 ‘내가 죄와 사망의 법에 있었다.’는 것을 평생 느끼면서 사는 거예요. 그래서 죄와 사망의 법이 뭔지를 알아야 돼요. 이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율법이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탐내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이것이 성경 말씀에 가득 들어 있어요. 그러면 이 성경 말씀은 안 보고, 안 듣는다는 말은 결국 뭐냐 하면, 성경 말씀을 펼치면 날 지적하니까, 지적하는 성경 말씀 벗어버린다는 것은 결국 ‘나는 정상이다.’는 말 아닙니까. 이 말은 ‘나는 죄와 사망의 법’ 그 따위 것 모른다는 말 아닙니까. 죄와 사망의 법을 모른다는 것은 결국 그 사람한테는 생명과 성령의 법이 필요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 없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교회가 성경을 바르게 이야기 안 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가라지들만 수천명 모여서 교육관 짓고, 주차장 만들고, 개척교회 세우고 해도 전부 가라지들만 모으는 거예요. 알곡은 없어요.
그런데 교회가 더 나쁜 것은 가라지를 모았는데 그것을 알곡이라고 우기는 것이 문제에요. TV에 나오는 장00 목사 이런 사람들 전부 가라지거든요. 왜 가라지냐 하면 ‘죄와 사망의 법’을 이야기 안 하니까 가라지인 것입니다. 군에도 안 가보고 군대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거예요. 전부 엉터리지요. 군에도 안 갔는데 제대를 했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이사야 같은 경우에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6:5) 라는 것이 성립 되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사하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해서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도 똑같이 죄와 사망의 법이 얼마나 지독한가를 이 땅에서 실컷 고생시키면서 확인시킵니다. 죄와 사망의 법이 얼마나 정상적인 흉내를 내면서 살아가는가 하는 그 역겨움을 온 몸으로 느끼도록 하십니다.
로마서 8장 3절에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여기에 뭐가 나오지요? ‘죄 있는 육신의 모양’
예수님은 육신은 육신인데 무슨 모양입니까?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은 죄 있는 육신 아닙니까. 이 죄 있는 육신이 어떻게 돼요? 하나님에 의해서 죄를 정했지요. 이것은 죄가 임했다는 것입니다.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져서 죄가 정해졌지요. 이것이 십자가 저주 받음이잖아요.
그러면 십자가는 뭔가? 죄를 확정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왜?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누굽니까? 죄 있는 육신이 달렸고,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했지요. 그것으로 죄란 것은 분명히 저주 받는다고 확정되었지요.
제가 하는 말은 이런 뜻입니다. 마태복음 10장 28절에 보면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고 하셨지요.
이 이야기한 것이 그 당시 듣는 사람은 잔소리로 들릴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잔소리가 아니라 실제로 십자가에서 저주를 온 몸으로 받는 거예요. 죄 있는 자가 어떤 저주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십자가에서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앞당겨 이야기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앞당겨 ‘네가 육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영과 육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할 때, 예수님은 어떤 입장에서 그 말씀을 했겠습니까? 장차 자기가 십자가 위에 매달릴 것을 미리 앞당겨 이야기 했겠지요.
이 철없는 인간들아 너희들은 또 잔소리 한다고 하겠지만 지금 예수님은 장차 십자가 질 것이 뻔한 일이잖아요. 미리 아셨잖아요. 십자가 위에 달린 안목으로 십자가 밑에서 철없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씀이에요. ‘육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말고 육과 영을 지옥에 멸하는 자를 두려워하라’는 이 말씀을 자기가 몸소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왔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아버지에게 버림 받아야겠지요. 버림 받는 그런 입장에서 그 이야기를 하셨다 이 말이죠.
그러면 우리가 성경 말씀을 보고 기도나 무슨 일을 할 때 우리도 어떤 입장에 서야 돼요? 우리가 십자가에 달린 입장에서 성경을 보라 이 말입니다. 로마서 8장 2절을 볼 때 그냥 보지 말고, 십자가에 올라가서 가시 면류관 쓰고, 손발에 못 박힌 입장에서 성경을 볼 때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이게 얼마나 감사하냐 이 말입니다.
이것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 아닙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입장에서 신구약 성경 전체를 다 보는 거예요. 그럴 때 실감나는 겁니다. 비로소 이해가 되는 거죠.
그래서 제가 말씀 안에서 십자가를 찾아내지 아니하면 그 설교는 엉터리라는 것이지요. 구약이든 신약이든 그 본문에서 목사 본인이 느끼는 십자가를 다시 증거해야 됩니다. 교인들 앞에 ‘나는 십자가에 박힌 채 이렇게 살아갑니다.’ 하는 것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이 평소에 한 말씀 한 말씀 했던 그 마음의 배경, 그 배경을 빼먹고 문자만 달랑 기억하는 식으로 성경을 봐요. 이런 식으로 성경을 보는 것은 비정상이라는 겁니다. 창세기 3장에 의하면 그것이 바로 죽음이고, 그것이 죄와 사망의 법에 묶여 있는 사람의 특징이라는 겁니다.
헌금을 해도 재벌이 고급 사무실에 앉아서 돈 얼마 헌금하는 것은 동냥이나 기부금입니다. 헌금이라는 것은 십자가에 달려서 ‘나의 모든 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라는 태도. 기도를 해도, 예배 참석을 해도, 전도를 해도 항상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채로 하는 이것을 가지고 성령의 일,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는 겁니다.
제 글에 이런 것이 있어요. ‘어떤 일을 할 때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게 되면 하나님 일이고, 어떤 일을 해도 지가 잘났다고 생각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은 나로 하여금 늘 회개케 하는 ‘내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다.’ 사망의 법이 뭔지 알고 거기서 제대한 입장에서 이 모든 것이 순전히 하나님의 공로지 내가 잘라서 빠져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늘 느끼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일입니다.
이제 요한 1서를 정리해 봅시다.
요한 1서는 예수님 자신이 생명으로 오셨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이 세상 모든 것은 뭐가 됩니까? 죽음이 되고. 이 죽음의 세계에 생명이 오셔서 생명이 어떤 식으로 확산되어 나가는가? 그 이야기가 요한 1서 내용입니다.
확산시켜 나갈 때 죄 사함이 되었고, 사랑 또는 화목제물 또는 성령 여러 가지 이야기 했지요. 결국 사랑, 죄 사함, 성령 등 요한 1서에 나오는 모든 용어들은 죽음의 세계에 생명의 능력이 임하는 증거가 되는 그런 결과물들, 그런 업적들. 그런 이야기를 하죠.
새까만 종이에다 흰 물감이 뚝뚝 던질 때, 그 물감 한 방울이 떨어질 때 그것이 생명이고, 사랑이고, 그것이 성령이고 이런 식으로. 새까만 바닥에다 허연 생명을 똑똑 던지는 작업을 생명 되시는 분이 성령을 통해서 하신단 말이지요. 그 이야기가 요한 1서입니다.
던지게 되면 여기에 이 세상은 가만히 있지를 않지요. 하얀 물감에 대해서 반발을 하지요. 반발할 때 생명 빼고 나머지는 다 적그리스도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리를 합시다. 생명이 옴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은 벌써 심판 과정에 있다는 것이지요. 그 작업에 우리가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제 요한 2서로 넘어갑니다.
요한 1서에서는 하나님의 생명이 구원하는 백성은 어떤 사람도, 마귀도 그 사람한테는 하나님의 생명을 훼방할 수 없다. 하나님의 생명을 취소하거나 방해하거나 뺏어가거나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사도 요한이 이런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빼앗길까봐 염려하는 것도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주신 믿음이 내가 잘못해서 빼앗기고 없어지면 어떡하나 걱정하는 것은 진짜 하나님의 생명을 안 받았기 때문에, 얼마나 엄청난 것이 왔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 힘으로 지키려는 부질없는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럴 필요 없어요.
믿음이란 것이 뭡니까? 믿음이란 어떤 조건도 불필요하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 믿음입니다. 내가 믿어서 구원 받는 데는 어떤 조건도 필요치 않다는 것을 온 몸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어떤 조건도 필요 없어요. ‘믿고 난 뒤에 잘해야 되지.’ 이런 조건도 필요 없고, ‘이렇게 기도하니까 믿었다.’는 조건도 필요 없고, ‘내가 믿는다는 것은 단 한 순간도 잊지 않아야지.’ 라는 조건도 필요 없고, ‘예수 믿고 난 후 이런 짓은 끊고 이런 짓은 꼭 해야지.’ 라는 생각도 불필요하고. 어떤 것도 필요치 않고, 믿음이 왔음 그 자체로서 충족되었기에 더 이상 뭘 보탤 필요가 없어요.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생명입니다.
요한 1서를 보게 되면, 사도 요한의 특징은 자신이 타락할까봐 걱정하는 대목이 없어요. 제 책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거기에도 나오는데, 이 책에는 녹취한 내용 말로 새로운 것이 굉장히 많이 들어갔습니다. 거기에 보면, 사도 바울의 특징이 그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서신을 보면 그침이 없어요. 쫙 그냥 밀어붙여요. 사도 바울이 주저하는 것이 없어요.
사도 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 1서를 보면 겁나는 것이 없어요. 자기 하는 일에 할까 말까 주저하는 것이 없잖아요. 생명이 임했기에 그렇습니다. 사도 요한이 그렇다는 것은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죠.
저라고 해서 고민거리가 없겠습니까만, 저는 세상 것으로 인해 고민이 찾아오면 다시 한 번 생각해요. ‘내가 왜, 무엇 때문에 세상에 존재하는가?’ 그것은 오직 복음을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것을 다시 느낍니다. 그렇다면 어떤 고민을 할 때 복음을 거쳐서 고민해 본 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저 사람이 왜 날 귀찮게 합니까?’ 라고 생각하다가, 복음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아, 하나님께서 복음을 위해서 저 사람을 보냈구나!’ 이렇게 됩니다.
항상 ‘복음을 위해서’라고 한 번 거쳐서 생각해 보세요. 그냥 생각하지 말고. 왜 광주 분들을 만나게 했을까? 복음을 위해서. 왜 어떤 사람은 나를 이단이라고 욕하며 헤어지게 만드는가? 복음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를 생각해야 될 이유가 ‘복음을 위해서’ 생각 안 하면 결국 ‘나를 위해서’가 됩니다.
‘복음을 위해서’가 아니면 ‘나를 위해서’가 됩니다. 이것은 여자의 후손 편에 서는 것이 아니고 뱀의 후손 편에 그대로 머물겠다는 그런 고집입니다.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이외에는 없어요. 여기에 나는 없어요. 그렇잖아요?
하나님께서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을 나눴지 제 3의 단계 이근호 후손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사이에 이근호 후손이 없다는 말은 결국 내 중심으로 생각한다는 자체가 반칙이란 뜻이지요.
하나님의 약속에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전쟁을 하잖아요. 그것이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기본 틀 아닙니까. 거기에서 따로 ‘나’를 생각한다는 것은 그 생각 자체가 반칙입니다. 마치 축구를 하는데 22명이 운동장에서 어떻게 하면 상대 골대에 골을 넣을까 생각하면서 열심히 뛰고 있는데, 한 선수가 경기 마치고 난 뒤에 노래방에서 노래나 부를까 하면서 어느 노래방을 갈까 이런 생각을 하면 그것은 반칙이죠. 축구 경기하라고 뽑았는데, 다른 21명의 선수는 축구에 관심이 있는데, 자기는 노래방에서 노래 부를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선수 자격도 없고 축구의 관점에서 보면 반칙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을 증거하라고 하는데, ‘나는 어떻게 살지? 나는 뭘 먹고 살까? 여기서 쫓겨나면 어디서 자지?’ 이렇게 내 생각을 한다는 자체는 반칙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럴 때는 어떻게 할까요? 방금 말씀드렸지요. ‘복음을 위해서 나는 언제까지 살아야 하나? 복음을 위해서 뭘 해야 되지?’ 이렇게 “복음을 위해서”를 한 번 거쳐서 다시 자기를 돌아봐야 해요. 그러면 둘 중 어느 쪽에 속했는지 판명이 되지요. 그러면 나는 없어지고 나는 여자의 후손에 속하든지 뱀의 후손에 속하든지 둘 중 하나에 속할 것이잖아요. 그러면 깔끔하게 마무리 됐잖아요.
직장에서 어떤 고민을 하고 있더라도, 여호와의 증인이 와서 괴롭히더라도 “하나님. 왜 날 괴롭힙니까?” 하지 말고, ‘나’라는 노선을 하나님은 인정한 적이 없고, ‘복음을 위해서 여호와 증인을 만나게 했구나.’ 라고 ‘복음을 위해서’를 한 번 거쳐서 자기 존재를 둘 중 어느 편에다가 예속 시키세요. 이것이 바로 요한 1서에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자기가 없으니까 나란 존재가 나의 걸림돌이 안 되겠지요? 장애물이 안 되지요. 사람에게서 제일 큰 고민거리가 누굽니까? 자기 아닙니까.
어떤 분이 아프리카 근해에서 고기잡이를 하다가 해적들에게 잡혔습니다. 얼마 전에 이런 일이 있었지요? 그것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고민하는 사람이 몇 명 되겠습니까? 100명 혹은 200명 정도 될까요. 납치된 가족 친지들이나 회사, 정부 관계자 정도가 걱정을 하겠지요. 그 외 사람들은 별 걱정 안 합니다.
그런데 만약 내 아들이 잡혔다. 그 때는 남의 자식 해적에게 잡히든 말든 전혀 관심 없다가 내 아들이 잡혔을 때는 환장하지요. 남이 이라크에 가서 죽고 하면 별 신경 안 썼는데, 내 아들이 죽었다고 하면 난리가 납니다. 아들 유해가 공항에 도착을 하면 엄마는 정신을 못 차립니다.
결국 이것이 뭐냐 하면, 사람의 모든 고민과 괴로움의 원인은 세상 중심에서 보는 것이 아니고 내 중심으로 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내가 나의 가장 큰 골치 덩어리에요. 나를 괴롭히는 인간이 바로 나예요. 나를 가위질해서 없애버리면 돼요. 나를 없애는 방법은 나를 어느 소속에다 속해버리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소속해 버리면 내 것은 내 것이 아니고 누구의 것이 됩니까? 주님의 것이 되지요. 주님의 것이 되면,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지요.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을 보면, 태어나서 죽는 그 사이에 모든 일이잖아요. 그런데 ‘사나 죽으나’ 가 되면 그 사이에 있는 모든 일도 내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입니다. 그러면 집에 자식이 애를 먹인다. 잘못 생각하면 ‘자식이 애를 먹이는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 하고 방치할 수 있지만, ‘주여, 복음을 위해서 나는 왜 아버지가 되었습니까?’ 라고 물으면 됩니다.
흔히 복음을 잘못 알면 ‘내 몸이 내 몸이 아니고 주님의 몸이니까 나는 주의 일 안 한다. 주님이 알아서 하겠지.’ 하고 제 멋대로 노는데, 소속을 해야 된다니까요. 소속된다는 것이 노는 것이 아니잖아요. 소속한다는 말을 오해해서 백수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요.
소속이 되었다는 것은 주의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내가 주의 일을 했는데 이제는 주께서 하시는 주의 일을 주께서 나를 사용하셔서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복음을 위해서 나는 뭘 할까?’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나에 대해서는 가위표를 하고 내가 나에게 방해물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어려움이 와도 주께서 복음을 위해서 어려움을 주셨다고 생각하면 내가 고민할 필요가 없어요. 그 어려움 가운데서 주님이 어떻게 일을 하는가 그것만, 주님의 뜻만 알면 되지, 내가 따로 고민할 필요 없단 말이지요.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사람들이 고민하는 것이 무엇 때문에 고민하는가 하면, 실패할까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렇고, 실패하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남이 나를 실패자로 보는 것이 두려운 거예요. 사람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남의 비난이라고 했잖아요. 지난 주일 설교에서 그런 말 했어요.
사람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 남에게 비난받는 것입니다. 혼자 있을 때는 아무 일 없어요. 사람이 혼자 있을 때는 내가 있는지 없는지 몰라요. 그런데 방에 누가 들어오면 그 때부터는 나라는 존재가 느껴집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저 사람 앞에서 나는 어떻게 처신 할까? 내 옷차림은 괜찮은가? 이런 생각이 들지요.
그런데 혼자 있으면 옷을 벗든 입든 별 상관도 없고 나의 존재를 못 느껴요. 타인이 내 앞에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나는 나로서 규정이 되는 겁니다. 그 타인이 요한 1서에서는 누가 왔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옴으로 비로소 나는 예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가 발견되고 새삼스럽게 정리가 되지요. 이것이 요한 1서이고.
요한 2서에서는 “장로는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이렇게 시작됩니다.
1장 1절에서 “택하심”이란 말이 나와요. 택하셨다는 것은 ‘나의 운명을 결정짓는 분이 내 앞에 계신다. 나와 마주하고 계시다.’ 이런 뜻입니다. 내 운명, 나는 과연 천당 갈 거냐? 내가 지옥 갈 거냐? 라는 것을 내 선에서 결정하고 처리 못한다는 겁니다.
‘나는 이제 교회 나왔으니까 구원 받을 거야.’ 이것은 택하심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래 가지를 않아요. 사람의 자기 결심은 오래 안 갑니다. 기분 좋으면 교회 나오지만 기분 나쁘면 교회 안 오거든요. 오래 안 갑니다. 오래 안 간다는 말은, 결국 사람은 어떤 결심을 할 때--
사람이 결심을 한다는 것은 자기의 팔을 내미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고무줄을 늘여 당기듯이 쭉 당겨보는 거예요. 하지만 그 줄을 놓으면 다시 자기에게 오지요. 사람의 결심이란 자기와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멀리 날려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결심했다는 것은 나를 확장시켜보는 것이지 --
사람이 사랑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너를 사랑해.’ 이것은 스파이드맨과 똑같은 거예요. 사랑이 떨어져 나가서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을 거미줄로 쫙 뽑아서 다시 사랑의 주체인 나로 재빨리 당겨오기 위한 전략이죠. 전략인데 그것이 너무 노골적이기 때문에 좋은 말로 하는 것이 “나는 너를 사랑해.” 이렇게 하는 겁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사는 방식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겁니다. ‘내가 널 사랑한다.’는 말은 ‘너는 내 식대로 안 살면 죽어.’ 이런 뜻이에요. 그래서 연애시절과 결혼 시절이 차이가 나는 겁니다. 연애할 때는 늘 동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만나는 순간만큼은 상대방의 구미를 맞춰주면 되지요. 그런데 구미에 맞춰주고 집에 돌아와서 얼마나 피곤합니까. 구미를 맞춘다는 것은 잠시 내가 살아왔던 방식을 접고 상대방이 원하는 방식대로 해 주는 것이 구미를 맞추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연애시절에는 같이 있는 짧은 시간만 그렇게 하면 되기에 참을 만하지요. 그러나 결혼하면 그것이 안 됩니다.
내 사는 방법을 지속적으로 강요하는 것 이것을 두 자로 ‘사랑’이라고 합니다. 결국 이것은 나의 영역의 확장입니다. 이것은 피차 마찬가지입니다. 서로의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싸움이 벌어집니다. 서로 영역 다툼을 하면서 싸우다가 휴전하고 반복하다가 거기에서 나름대로의 습관과 버릇이 생겨서 정치적 타협이 이뤄지고 해서 이제는 사랑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정치적 타협으로 살지요. 내가 이만큼 양보했으니까 너도 좀 양보를 해라. 이것이 조정국면인데, 서로 조정하면서 살지요. 결국은 한 번도 자기 삶을 포기한 적이 없는 위험한 줄다리기 식으로 조정국면을 유지하면서 평생을 가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 그 중 어떤 가장이 ‘내가 너를 택했다.’고 나오면, 택한 자는 우리 다섯 명 가족 가운데 속하지 않은 독보적인 존재가 되어야 해요. 그것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인간들의 조정국면, 정치적 타협 이런 것에 전혀 동조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쳐들어와서 하는 말이 ‘나는 너를 택했다.’ 이렇게 나와요.
1절에 나오지요. “장로는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편지하노니” 이렇게 되어 있지요.
장로라는 것은 복음에 대해서 잘 알고 교회의 책임 즉 하나님의 계시를 맡은 자라고 보면 되지요.
택하심을 입었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택하심이 되는가를 잠시 설명을 하겠습니다.
요한 1서의 주제는 생명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이라고 했지요. 그러면 이 세상은 자연적으로 죽음이지요.
자, 그러면 생명 속에서 택하심을 입었다는 말은 이 죽음이 순수한 죽음 덩어리가 아니고 처음부터 여기에 하나님이 심어놓은 생명의 씨앗, 생명의 택하신 자가 여기에 있다는 말 아닙니까. 택한 자는 창세 전부터 있으니까. 쉽게 말해서 이것을 윤곽을 드러내는 겁니다.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제발 성경 보고 점차 착해진다든지, 점차 훌륭하게 된다든지, 점차 인간이 되어간다고 보시면 그것은 성경을 보는 것이 아니고 불경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식으로 성경 해석하지 말고, 내가 미처 몰랐던 내 운명이 서서히 윤곽이 드러나고 내 정체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아, 나는 저 세상 사람과 같이 살 운명이 아니었구나.’ 라는 것을 감을 잡는 거예요. 그것도 점차 점차. ‘아하, 내가 만들어가는 운명이 아니었구나.’ 나는 세상 사람같이 내 구원은 내가 알아서 해야 되고, 영생 얻는 것도 내가 열심히 믿고 뭔가를 해야 되는 것으로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고, 내가 구원 얻은 자라면 나를 구원하신 분이 일방적으로 택하셔서 나의 정체를 드러내시는 구나. 이렇게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고고학 발굴 할 때에 유물들이 그냥 보입니까? 안 보입니다. 수천년 동안 진흙에 묻혀 있는데 어떻게 보입니까. 안 보이지. 그런데 고고학자들은 지도와 문헌을 통해서 ‘분명히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문화제 신청하고 예산 타내서 역사학과 학생들과 땅 파는 일군들 불러서 삽질하면서 찾아내는데, 심지어는 여자들 눈썹 그리는 붓으로 붓질을 하면서 찾아내요. 그런 작업을 통해서 비로소 수천년 전의 그 실체가 드러나지요.
지금 요한 1서, 2서가 말하는 것은, 우리보고 개과천선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파묻혀 있는, 사망과 죄의 법에 파묻혀 있는 생명의 법이에요. 아시겠어요? 택한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귀한 자녀란 말이지요. 그걸 천사가 와서 성령을 통해서 훅훅 불고 닦고 붓질해서 주께서 작업을 개시해서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기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 이것이 성경의 뜻입니다. 왜? 뱀의 후손 따로 있고 그 다음에 여자의 후손이 따로 있기 때문에. 우리는 뱀의 후손 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뱀의 후손에 가려져 있던 여자의 후손이 있다는 것을 주께서 온 천하에 우주에 내 백성이 있다는 것을 공개하고 싶어서 우리에게 성령으로 찾아오신 것입니다.
잠시 쉽시다.
우리교회(IP:220.♡.176.168)
07-06-14 16:51
07. 5. 24. 이근호 목사님의 광주강의 둘째시간 녹취록 올립니다.
광주 강의(07. 5. 25) 26-2
지난 시간 끝에 한 이야기가 뭐냐 하면, 선택이라는 것은 이미 확정된 운명자가 누구냐를 발굴하는 발굴 현장이라고 했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성령께서 윤곽을 드러내게 합니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로마에 갈 생각은 없었습니다. 자기는 로마에 갈 이유도 없고.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밤에 주께서 뭐라고 합니까? “‘너는 로마로 가라’가 아니고, 너는 로마로 가게 된다.”고 하지요. 그렇지만 어떻게 가는지 그 방법은 안 가르쳐주지요. 그런데 갑자기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데, 로마 시민이란 이유로 로마에 가게 되지요. 그러면 사도 바울은 뭘 압니까? 전에 ‘네가 반드시 로마에 선다.’는 것을 이미 주께로부터 들었기에, 풍랑이 일 때 감을 잡지요. 태풍이 오고 뭐가 와도 나는 안 죽는다. 왜? 반드시 로마에 가서 이 복음을 전해야 하기 때문에.
그 전에 바울은 뭐라고 했는가 하면, 에베소서에서 “이 도성에는 내 백성이 많음이라.” 이게 무슨 뜻입니까? 사도 바울은 본인의 인생이란 게 없어요. 다만 여기에 택하심을 입은, 영생 주기로 작정된 자에게 그 사람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서, 고고학자로서 발굴하기 위해서 주께서 사도를 여기에 투입시키는 거예요.
투입시키면 이 사람들은 평소에 자기 삶을 살다가 바울의 복음을 듣고 “야, 무슨 저런 귀한 말씀이 다 있나. 저게 진리네. 이제 세상이 달리 보인다.” 하고 수십년 잠자다 깨어난 영혼처럼 죽음에서 깨어나지요. 이렇게 깨어날 때 이것은 바울의 자기 능력으로 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하지요.
그리고 이렇게 깨어난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마치 핵분열 하듯이 또 깨어나게 하고 그렇게 하지요. 그런데 이러한 모든 전략과 원리가 바로 성경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가짜들, 이단들도 성경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이 맞는 이야기인지는 성경을 통해서 구분해야지요.
자, 이제 요한 2서를 봅시다.
1절에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편지하노니”
편지하는 이유가 뭐라고 했습니까? ‘너는 구원 받기로 선택 된 자’라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해서 발굴하는 현장으로 복음을 전하는 편지를 보내는 것입니다.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여 나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하는 것은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할 진리를 인함이로다”
방금 제가 한 이야기 아닙니까. 우리가 이렇게 각지에서 모인 것은 누구로 인한 능력입니까? 이 본문대로 하면 누구의 능력입니까? 주체가 누굽니까? 진리지요. “진로를 인함이라” 이 말은 무슨 뉘앙스가 들어 있습니까? 이 진리는 택하심을 입은 자가 아니면 도저히 안 받아들이기 때문에 우리와 함께 진리 안에 거할 수 있다, 없다? 거할 수 없다는 겁니다.
이 말을 쉽게 하면, 사도가 하는 말이 ‘내가 지금 진리를 전하는데 내가 전하는 진리에 함께 동참한다는 것은 곧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이미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 한해서만 그런 현상이 일어나고, 만약 택하심을 입지 아니한 사람 같으면 내가 전한 진리에 우리와 더불어 거할 수가 없다.’ 하는 이야기를 지금 편지로 한다 이 말입니다. 아시겠죠?
그렇다면 이 말은 선택 받지 못한 사람이 들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이게 순환논리가 돼요. 모순된다는 겁니다. 니꾀르의 해석학에 보면 나오는데 그것은 너무 어려워서 말 못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미장원이 어디 있습니까?” 라고 물으니까, “슈퍼마켓 옆에 있습니다.” 그러니 “슈퍼마켓은 어디 있습니까?” “이발소 옆에 있습니다.” “이발소는 어디 있습니까?” “미장원 옆에 있습니다.”
여기에 어떤 새로운 것이 나타난 것은 없잖아요. 그냥 돌고 돌지요. 미장원 옆에 슈퍼마켓. 슈퍼마켓 옆에 이발소. 이발소 옆에 미장원이잖아요. 돌고 도는 거예요. 이것을 폐쇄성이라고 해요. 갇혀 있다는 거죠. 강강수월래처럼. 강강수월래가 분명히 자꾸 도는데, 뭔가 움직이는데 백날 돌아도 맨 그 자리잖아요.
선택이란 것이 들어가게 되면 이런 현상이 나타납니다. “누가 선택했는가?” “주님이 선택했다.” “그러면 나는 선택 되었습니까, 안 되었습니까?” “네가 주님을 믿나?” “믿습니다.” “주님 믿으면 선택된 것이다.” “그럼 주님 믿으면 모든 사람이 선택된 것입니까?” “아니다.” “그러면 뭡니까?” “선택되었기 때문에 주님을 믿는다.” 이런 식이란 말이지요.
그런데, 주님께서 왜 이런 폐쇄성으로 하느냐 하면, 바로 이 선택의 폐쇄성을 이해 못할 사람들을 이 강강수월래 밖으로 떠밀어내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습니다.
마태복음 11장을 한 번 봅시다. 25절부터 27절까지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제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불신자가 이 내용을 봤을 때 이해하겠어요, 못 하겠어요? 이해 못하지요. 어떤 점을 이해 못하는가 하면, 첫째, “슬기롭고 지혜 있는 자에게는 숨기시고” 이것이 이해가 안 됩니다. 슬기롭고 지혜 있는 자에게 숨기시는 이유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을 믿을 때 자기 슬기와 지혜를 총 동원해서 믿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믿을까봐 의도적으로 그것을 차단하기 위해서 슬기롭고 지혜 있는 자에게는 숨는 방향이에요. 아무리 따라가서 “하나님 어디 있어요? 예수님 어디 있어요? 내가 믿고자 합니다.” 해도 계속 도망치는 거예요. 숨습니다. 안 잡힙니다. 결국 인간이 뭘 포기해야 돼요? 슬기롭고 지혜 있는 것을 포기를 해야 돼요. 왜 포기를 해야 되나? 포기를 해야지만 오직 구원은 아버지와 예수님의 뜻, 하나님의 선택에 있음이 훼손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남자가 여자에게 청혼을 하는데 어떤 조건이 있나 하면, 저 여자가 먼저 나를 남편감으로 절대로 좋아하지 않는 조건을 걸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자기가 여자에게 청혼하려고 하는데, 여자가 ‘나는 당신이 좋아요.’ 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도망쳐야 됩니다. 왜? 조건에 안 맞기 때문에. 계속 그 여자는 그 남자에 대해서 안 좋아져야 되고, 몰라야 되고, 결혼은 생각도 안 해야 돼요.
하나님의 일의 특징이 뭐냐? 꼭 생각나지 않을 때 일을 시킵니다. 그런 것 못 느꼈어요? 생각하면 생각한 일은 절대 안 이뤄지고, 미처 생각을 못했는데 일이 이뤄지지요. 나 혼자만의 경험인가? 그렇지요? 우발적입니다. 왜냐하면 계속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협조했다든지 관여했다는 것을 전면 차단시키기 위해서 그 방법밖에 없어요. 내가 생각하는 방법대로 절대로 안 이뤄집니다. 다른 말로하면 내 기도대로 이뤄지는 방법은 하나도 없어요. 내 기도한 대로는 마귀가 응답해 주지 주님은 절대 응답 안 해줘요. 대표적인 것이 욥입니다.
욥은 기도가 하나도 응답된 적이 없어요. 욥은 기도 가운데 ‘나중에 부자 되고, 죽은 자식 대신 새로 태어날 딸들이 더 예쁘고’ 하는 것이 있었습니까? 없어요. 주께서는 욥이 기도하지 않은 것만 골라서 줘요.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살아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되지요. 몽땅 은혜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공로가 되는 겁니다. 내가 만약 낌새를 알고 했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공로가 아니고 그 속에 나의 지혜와 똑똑함도 포함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슬기롭고 지혜 있는 자에게 숨기는 방향으로 하십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어린아이한테 나타내십니다. 어린아이의 특징은 받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어린아이한테 노동을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어린아이는 어른이 제공하는 대로만 하면 됩니다.
어린아이에게는 뭐가 옵니까? 자기 아버지께서 아들의 구원자라는 것을 알려주지요. 그러면 이 말씀은 왜 했습니까? 결국 이 말씀은 진짜 선택 받아서 구원된 사람이 뭐다? 주님 앞에서 뭘 찾는다? 슬기를 자랑하고 지혜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어린아이였습니다.” 라는 고백을 할 뿐입니다. 어린아이는 책임질 것이 없지요. 그러니까 끝에 뭐라고 했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쉬게 할 수밖에 없지요. 어린아이한테 돈 벌어오라고 합니까, 노동을 강요합니까? 세상에 이것보다 마음이 편하고 쉬운 것이 어디 있습니까? ‘가만히 있는데 구원 받았다.’ 이것이 발굴입니다. 나는 그냥 수천년 동안 흙속에 파묻혀 있었는데 그것을 발굴자가 공사를 해서 위의 흙을 다 걷어내고 드디어 내가 창세전부터 구원 받기로 작정된 자라는 것이 비로소 윤곽이 드러납니다. 이렇게 되면 내 자랑할 것은 없고, 오직 주께서 찾아오셔서 건져내고 더러운 것을 깨끗이 씻어주시고 보살피셔서 마귀로부터 지켜내시는 것 전부다 누구의 공로입니까? 주님의 공로죠.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구원 받은 점에 대해서 더 이상 노동이라는 부담을 갖지 마세요. 구원 받기 위해서 뭘 해야 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벗어나는 방법은 자아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이에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면 내 일이라고 하지요.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내가 관여할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에 하늘의 뜻이 나에게 이뤄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잖아요.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 이뤄지게 해 달라고.
내가 뭘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전부 받는 거잖아요. 용서 받았기 때문에 용서하는 거예요. 용서했다는 말은 이미 용서 받았다는 뜻이에요. 간음하다 주님께 용서받은 여자가 다른 간음한 여자를 용서하겠습니까, 안 하겠습니까? 당연히 용서하지요. 그렇잖아요. 사랑 많이 받은 자가 남을 사랑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사랑하지요. 강요가 아니고, 이것은 법이 아니고 자연적으로 그것이 나올 수밖에 없지요.
전교에서 꼴찌하는 여학생이 전교에서 꼴찌 바로 앞에 있는 여학생에게 “너 공부 너무 못한다.”고 이야기 못하잖아요. “이 돌대가리야, 너희 아버지가 불쌍하다. 부모 돈 받아서 공납금 내고 공부하면서 끝에서 두 번째가. 나가 죽어라.” 할 수 있어요? 안 되지요.
그래서 제가 첫째시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뭘 하든지 자기를 십자가에 매단 채 거기서 성경을 보든지 기도를 하고 전도를 해야 자기 공로가 안 나옵니다.
나중에 발굴되고 보니까 우리 가슴에 십자가 문신이 새겨져 있어요. 컴퓨터 칩처럼 성도 속에 십자가가 작동해서 죽을 우리 몸도 살리신다고 로마서 8장 11절에 나오지요. 죽을 우리 몸도 살리신다고.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 영으로 말미암아 죽을 우리도 살리십니다.
성경을 보게 되면 이것이 기억나는데 성경을 안 보고 세상살이 하다 보면 이런 것이 다 없어지고 ‘내가 해야 되고, 내가 따라 잡아야 하고, 내가 저 사람을 이겨야 되고, 나는 실패자가 되면 안 되고, 남에게 비난을 받으면 안 되고, 남들 보란 듯이 성공한 자로 살아야 되고’ 이렇게 되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사는 거예요. 온 세상 무거운 짐을 다 오라고 손짓하는 거예요.
‘완벽해야 돼. 실수가 있으면 안 돼. 하자가 있으면 안 돼.’ 이것을 자꾸 불러 일으켜요. 이렇게 되면 결국은 뭡니까? 슬기롭고 지혜 있는 자가 되어야 하고.
그래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성경 보는 시간을 주셔서 은혜와 사랑으로 발굴된 자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시지요. 어떤 때는 너무 심하게 떠민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하나님의 일은 예상 밖의 일을 하시는데 ‘하나님께 실망했다’는 것은 마음속에 예상한 것대로 안 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본인은 뭔가를 예상한 줄도 몰랐는데 막상 일이 터지고 나니까 실망과 더불어 자기 기대한 것이 튀어나오게 됩니다.
특히 부모들이 얘들 키 안 커고 할 때 “우리 얘는 하나님 은혜 주신대로 삽니다.” 라고 말은 하면서도 키가 안자라면 ‘저걸 병원에 데려가고 호르몬 주사를 맞혀야 하나’ 고민합니다. 이것은 뭡니까? ‘하나님 주신대로 받습니다.’ 해놓고, 하나님이 주실 모든 데이터와 설계도를 이미 따로 갖고 있었어요. 키는 180cm 이상, 얼굴은 귀엽고, 머리는 지혜롭게. 이런 자기 나름대로의 조건이 있었어요.
이것은 고고학 현장이 아니고 공장입니다. 우리는 고고학 현장에 와 있지 공장에 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요한 2서에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진짜 택한 자에게 이렇게 하나님의 진리 가운데서 만나게 해 주신다는 이것을 감사하자는 것입니다.
3절에 보면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고 합니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 이것은 사도들이 상투적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은혜, 긍휼, 평강 이 세 가지의 공통점은 인간이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힘쓴다고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은 위로부터 주어지는 거예요.
“사람은 왜 삽니까?” 하고 길가는 사람에게 물어보세요. 그러면 “행복하기 위해 산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행복을 원하면서 싸서 불행의 길로 접어들어요. 행복을 찾기 위해서 불행의 길로 접어든다고요.
‘나는 불행해도 괜찮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이미 행복의 길로 접어들었는데, ‘나는 행복해야 돼’ 라는 생각 때문에 늘 불행하고, ‘나 같은 인간 불행해도 괜찮아.’ 하면 늘 행복이고 그래요. 얼마나 인간들이 바보인지 몰라요.
우리는 행복할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는 불행해도 싸요. 불행해도 괜찮아요. 이런 마음을 주실 때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요 긍휼이요 평강입니다.
자, 그러면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은혜가 무슨 뜻인가? 우리의 모든 행함은 거부당한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은혜를 다른 말로 하면 선물 아닙니까. 선물을 받아야 된다는 말은 우리의 행한 것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서 제일 답답한 점은, 하나님이 받지도 않는 것을 가지고 그렇게 애써 모았다고 자랑을 하고 있어요. 돈 모았다. 적금 수억을 탔다. 하나님이 받습니까? 하나님이 받지도 않는 것을 왜 그렇게 자랑하는지 모르겠어요. 하나님은 돈도 안 받고 아무것도 안 받아요.
하나님은 자기가 준 것만 남기면 O.K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과 믿음과 소망 이것만 있으면 하나님은 그를 사람 취급합니다. 그 사람 속에 자기가 주신 것 때문에 사람 취급해요. 그런데 하나님 주신 것은 생각 안하고 자기가 공들여 만든 것을 가지고 자꾸 들이대면 그런 자는 사람 취급 안 합니다.
거지 나사로가 왜 천당 갔겠습니까? 부자는 왜 지옥 갔어요? 부자는 돈이 많은데 왜 지옥 갔습니까? 부자란 이유 때문에 지옥 간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은 자기가 공들여서 평생을 두고 모아놓은 그것이 자기를 대신했기 때문에 지옥 갔어요.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은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예수님을 앞장세우기 때문에 구원 받는 겁니다.
우리를 대신한 분이 있기 때문에 구원 받는데, 부자들은 자기를 대신한 것이 예수님이 아니고 자기가 공들인 돈밖에 없기 때문에 그래서 지옥 가는 겁니다. 그래서 부자가 지옥 가는 겁니다. 돈 이외는 내세울 것이 없어요.
성도는 예수님을 앞장세우고 어린 양을 따라가지요. 하늘나라 문지기가 문 열어 줄 때 우리가 노력한다고 문 열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때문에 문이 열려요. 다윗의 자손에 의해서 천국 문이 열리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아무리 돈 전쟁, [쩐의 전쟁]을 벌여도 구원 못 받습니다. 사채놀이 백날 하고 돈 벌어도 구원 못 받아요.
긍휼이 뭡니까? 은혜는 우리의 행한 것을 일체 안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긍휼은 뭡니까? 우리는 죄인이다. 긍휼은 우리를 불쌍히 여김입니다. 용서지요. 우리는 죄인이고.
평강이란 것은, 우리는 항상 불행과 두려움 속에 있지요. 그러니까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안 오면 우리는 자기 행함 속에서 죄를 지으면서 저주가 올까 불안해하면서 전전긍긍하는 이것이 우리 모습이잖아요. 그런데 이 위에 은혜와 긍휼이 오니까 진짜 성도는 “은혜와 긍휼과 평강만 있으면 만족합니다.” 라고 할 때 그들과 함께 모일수가 있는 겁니다.
이것이 요한 2서에서 지금 여러분들은 “진리와 함께 모여 있다.”고 할 때 이 세 가지가 함께 모였다는 겁니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고마워서 함께 모였다는 뜻입니다.
4절에 “너희 자녀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여기에서 “아버지께 받은 계명”이라는 말이 있는데 아버지의 계명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뜻이 최종적으로 일괄적으로 다 나타나는 것이 있어요. 그 계명이 뭡니까? 요한 1서 3장 23절에 “서로 사랑”하는 것이지요. 이 서로 사랑은 복음을 아는 사람을 미워하지 않을 때 그것이 서로 사랑입니다.
사도 요한을 사랑한다는 말은 사도 요한이 하는 말을 수용한다는 뜻 아닙니까. 복음을 수용하지요. 결국 이 사람들이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그냥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뭘 매개로 해서 사랑하는 거예요? 복음 때문에 서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이. 복음 때문에 모이고, 복음 때문에 흩어지고, 복음 때문에 서로 형제임을 알 때 이 사랑은 영원한 사랑이 되겠지요. 왜? 복음이 영원하기 때문에.
자기 몸속에 영원한 철이 들어 있으면 그 사람은 영원한 철인이 되지요. 왜? 철이 들어 있기 때문에. 철이 나중에 섞어버리면 철인 아니지요. 마찬가지로 우리 속에 복음이 들어오면, 우리는 성깔대로 싸웠다가 화해했다가 만날 그러지만, 그래서 인간의 성깔대로 서로 사랑하라고 하면 이것은 오래 못 갑니다. 복음이 있다면, 복음이 영원하기 때문에 영원한 은혜, 영원한 긍휼, 영원한 평강이 있고 이것 때문에 모인다면 그것은 영원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일괄적으로 최종적으로 마무리하면서 주신 계명이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오게 되면 계명은 끝나는 것입니다. 계명은 내가 지켜야 되는 것인데 사랑이 와버리면 이제 영원한 것이 왔기 때문에 개인적인 것은 없는 겁니다. 사랑 안에 있으면 되지요.
5절에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 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오직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
있는 것 내 놓으란 말이죠. 사랑으로 발굴 되었으니까 그 발굴된 사랑을 내 놓으면 된다는 겁니다.
6절에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좇아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
참 말이 어렵지요? 왜 어려운가 하면, 너희로 하여금 너희 되게 한 그 무엇 그것이 사랑이라는 겁니다. 사랑 받았기에 받은 것 내 놓으면 된다는 겁니다.
화투 칠 때 “피사리 내 놓아라, 공산 내 놓아라” 할 때 화투도 모르는 사람한테 뭘 내 놓으라고 하면 공장에 가서 찍어 냅니까? 방금 화투 8장씩 받았잖아요. 받은 것 중에 내 놓으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을 받은 것이 있기 때문에 내 놓으라는 거지요. 네 사랑 말고 주님의 사랑. 나 이렇게 해서 죄인입니다. ‘이렇게 해서 나는 간음한 자요. 이렇게 해서 살인한 자요. 이렇게 해서 이웃을 미워한 자요.’ 이런 것 내 놓으란 말이지요. ‘그런데 용서함 받았고 긍휼함을 입었고 그래서 저는 평강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9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하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우리가 죄 없단 말입니까? 있지요. 있는데 우리의 죄를, 우리의 저주를, 우리의 심판을 우리에게 돌립니까, 안 돌립니까? 안 돌리는 이 평강을, 이 긍휼을, 이 은혜를 입었으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지요.
그래서 교회라는 것은 십자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교회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당신은 교회를 무시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