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33:20-24 (영원한 예루살렘)
사 33:20-24 (영원한 예루살렘)
이름 : 우리교회(IP:122.47.52.59)
본문: 이사야 33장 20-24절
제목: 영원한 예루살렘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이사야-2005/089강-사33장,20-24,(영원한,예루살렘)-isa070523.hwp
우리교회
07-05-23 21:33
영원한 예루살렘
2007년 5월 23일 본문 말씀: 이사야 33:20-24
(사 33:20) 『우리의 절기 지키는 시온성을 보라 네 눈에 안정한 처소된 예루살렘이 보이리니 그것은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이라 그 말뚝이 영영히 뽑히지 아니할 것이요 그 줄이 하나도 끊치지 아니할 것이며』
(사 33:21) 『여호와께서는 거기서 위엄 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리니 그곳은 마치 노질하는 배나 큰 배가 통행치 못할 넓은 하수나 강이 둘림 같을 것이라』
(사 33:22) 『대저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이시요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자시요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니라』
(사 33:23) 『너의 돛대 줄이 풀렸었고 돛대 밑을 튼튼히 하지 못하였었고 돛을 달지 못하였느니라 때가 되면 많은 재물을 탈취하여 나누리니 저는 자도 그 재물을 취할 것이며』
(사 33:24) 『그 거민은 내가 병들었노라 하지 아니할 것이라 거기 거하는 백성이 사죄함을 받으리라』
하나님께서 이 지상에 자신의 자리를 따로 지정해 주셨다는 점이 참으로 기이하고 신기하고 반가운 일입니다. 예를 들어, 대구 지방에 대통령의 별장이 있다면, 여기에는 밤낮으로 경찰이 경비를 설 것이 분명하고 또한 별장이 있는 것을 봐서 이 나라에 대통령이 분명히 있음을 간접적으로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이 지상에 자신이 영원히 기거하시는 터를 따로 잡으셨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엄연히 계시다는 의미가 됩니다. 더구나 그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과 더불어 살아가는 백성이라면 그 자부심이 하늘을 찌를 것입니다. 왜냐하면 설마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리를 자진해서 부수거나 철회하지 않을 분이라면 곧 그 성전과 함께 살아가는 백성들을 버리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의 자부심은 대단한 것입니다. 이 세상 어느 지역에도 없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상주하시는 집이 있다는 것은 영광 중에 영광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지리적인 성전은 신약에 와서 깨어져 버립니다., 그 어떤 경우라도 파괴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던 그 성전이 이방민족의 이방종교의 말굽 아래 와해되어 버리고 불타버립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20절에 나오는 ‘예루살렘 영원설’은 순전히 엉터리 예언입니까? 신약에 오면 성전은 그리스도 몸을 두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예수 안’이 영원한 성전입니다. 구약의 성전은 신약의 예수님을 말하는 모형입니다. 어떻게 해서 예루살렘의 지리적 의미가 사라져 버리는 것일까요? 24절에 보면, 성전 안에 있는 자를 용서함을 받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약 성도들은 성전 앞에서나 안에서 자신의 죄인됨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사야는 성전에서 자신의 본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나는 죄악 중에 거했다”는 겁니다. 따라서 성전 안에서 용서함의 기능이 작렬한다는 것은 그 성전에 출입하는 백성은 죄인으로서 출입하는 겁니다.
따라서 그 용서의 진원지가 되는 메시야의 하실 일을 고대한다는 것은 자신이 죄인의 입장에서 메시야를 고대해야 한다는 겁니다. 예루살렘의 영원성이란 곧 죄 사함의 영원성이요, 죄사함의 영원성이란 인간을 영원한 죄인으로 고정시키는 일을 메시야께서 하신다는 겁니다.
예루살렘이라는 장소에서 두 가지 사연이 짓들어 있습니다. 역대하 3:1에 보면, 솔로몬이 성전을 짓는 장소는 모리아 산으로 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22장에 보면, 모리아 산이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제단을 쌓았던 곳입니다. 거기서 하나님께서는 오직 이삭만을 바칠 것을 고집했습니다.
이는 그 누구도 이삭을 대신할 수 없음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배타적인 제물을 원했습니다. 독보적인 중보자만을 지정하셨습니다. 디모데전서 2:5에 보면,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다”고 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아브라함 이웃집에서 아브라함의 행위를 보고서는 이렇게 위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들 하나 잃어버려도 또 낳으면 되지 않느냐”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에게 있어 이삭의 의미는 다른 인간으로 대체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오직 그만 고집하셨다는데 의의를 둡니다. 이것은 제물 선택권이 인간에게 일체 주어진 바가 없다는 말이 됩니다. 하늘과 땅이 통하는 제단의 제물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 지정된 자에 국한 됩니다.
땅에서 하늘로 뚫어 나아가는 방식은 소용없습니다. 구원의 숨통은 인간 세계 바깥에서 인간 세계 안으로 뚫어오는 방식으로만 진행됩니다. 이삭을 대신할 만한 인물은 이 지상에 없습니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결정 앞에서 인간은, 오직 자기만을 고집하는 절대적 배타성을 포기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죄인임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구원을 요구할 그 어떤 권리도 자기에게 없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구원되고 아니 되고의 모든 권리는 오직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메시야에게만 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구원에 있어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하게 배타시 당하는 위치에 놓여져 있습니다.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서 그 뒷 부분의 말씀을 심도있게 음미해 보셔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가자”가 아니라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서 올 자가 없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갖고 계신 세상을 향한 배타성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구원시킬 자격자 자체에 대해서도, 아무도 그 분을 대신해서 자격을 갖고 있다고 주장할 수 없는 겁니다.
역대하 3:1에 보면, 솔로몬이 성전을 짓는 장소는 역대상 21장에 나오는 오르난의 타작마당이 있던 곳이기도 합니다. 오르난의 타작마당은 다윗이 친히 제단을 특별히 쌓아야했던 곳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다윗이라는 인물의 위상을 드러내기 위해서 임재하신 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식으로 다윗의 독보성을 드러내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사단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대적하게 만들었습니다. 심지어 다윗까지 사단에 의해 격동되었습니다. 다윗이 하는 짓은 이스라엘의 인구를 계수하는 일이었습니다. 신하의 만류도 소용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괘씸하게 보였습니다.
그제사 다윗이 자신의 죄를 알고 자신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빕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냥 아무 일 없이 다윗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세 가지 사태 중에 하나를 선택케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믿고, 하나님께서 직접 나서서 유발시키는 사태를 선택했습니다. 즉 전염병이 온 나라에 도는 사태를 선택한 것입니다.
과연 사흘만에 7만 명이라는 백성이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는 천사에게 징벌을 거두기를 명하십니다. 그리고 난 뒤 백성들에게 다윗의 은총으로 징벌이 멈춘 것처럼 보이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다윗으로 하여금 오르난의 타작마당에서 제단을 쌓게 하시는 일입니다.
이처럼 백성들은 하나님의 일 속에서 다윗왕의 위상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죄사함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영원한 죄사함의 독보적 권리가 오직 예수님에게만 있음을 알게 하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예수님 때문에 죄사함 받은 것을 잊지 않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