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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안산 5월 11일 강의 (고린도후서 4장)강의고린도후서

안산 5월 11일 강의 (고린도후서 4장)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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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1-24 15:47

ansan070511

안산강의 2007년05월11일(고린도후서 4장)

(고후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그렇게 되어 있죠.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무엇으로 보시냐? 하면, 우리가 지난 시간에 여기까지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떤 가치로 보느냐? 하나의 그릇으로 보십니다. 빈 그릇. 그릇이라 하는 것은 무엇이 담기느냐에 따라서 그 그릇의 가치가 결정되겠죠, 무엇이 담기느냐.

만약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오늘 본문 고후4:7에 나오는 보배가 없다면, “(고후 4:7)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 이렇게 되어 있는데, 그릇은 질그릇... 보통 그릇인데, 질그릇 그 자체가 무슨 가치가 있는가? 별로 가치 없죠.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질그릇을 금그릇으로 만드십니까? 그것도 아니죠.

지금 사람들이 “왜 나는 저 사람처럼 되지 못하는가? 나는 왜 재벌이 되지 못하는가? 나는 왜 좋은 가정에서 못 태어났는가?” 이런 것 가지고 따지시는데, “나는 왜 큰 교회 당회장이 아닌가?” 따지시는데... 그래서 무엇을 위해 기도하느냐하면 이 ‘그릇 바꾸기’ 위해서 기도하잖아요, 그릇 바꾸기.

큰 교회 당회장 되게 해 주시고, 뭐 어떻게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시고, 몸은 건강하게 해 주시고... 하는데, 성령께서 하시는 기도는, 그 뒤에 나오는데, 바로 그와 같은 우리 인간들의 잘못된 사고방식: ‘그릇이 나빠서 구원 못 받는다’ 는 이 잘 못된 사고방식을 완벽하게 두드려 부스기 위해서 ‘이 그릇 안에 들어있는 이 보배가 얼마나 대단한 보배냐’를 앞으로 못난 너을 가지고 한번 뽄때(본보기)를 보이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뽄때(본보기)는 뭐냐? 뒤에 나오죠. 8절에 보면 “(고후 4: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이 질그릇이 뭐 아주 가치가 있고 대단한 능력이 있어서 싸이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질그릇 깨지지 말라고 그렇게 보호해 주는 것이 아니예요. “(고후 4:9)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핍박을 당해도 버린 바 되지 않는 것이 뭐 질그릇 자체가 고귀해서가 아닙니다.

왜 우리는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는 것이냐 하면 우리 자신이 문제가 아니고 우리 속에 뭔가 담겨져 있는데 그것이 ‘보배’거든요. 사실 성경에는 보배가 우리에게 담겼다 하지만 우리 자체가 하나님이 주신 보배를 보배 값을 쳐주질 않습니다. 아주 시시하게 여기죠.

우리는 이 ‘그릇 바꾸기’에 잔뜩 힘이 가 있고 정신이 가 있지, 이 ‘보배’의 고결함 귀중함 이것은 우리 자신부터가 시시하게 봅니다. 복음... 하면, 복음은 성경 안에 들어 있는데 뭐 우리가 신경 쓸 필요가 뭐 있나, 하지만, 이 복음에 대해서 하나님은 굉장히 진지하게 그것을 중요시 여기는데, 막상 ‘복음을 믿습니다, 압니다’, 하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 생각과는 달리, 우리가 그것을 거부하고 시시하게 보는 경향이 있어요.

기독 산악회라는 거 만드셨어요? ^^ (그것을 어떻게 아셨어요?^^) 인터넷에 들어가 보니 나오데요. 요즘 장사가 잘 안되어서 시간이 남아서 그런데 관심이 있는 겁니까?^^ (관심이 있어서요) 진짜 몇몇 사람이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들자 해서 만든 겁니까? 홀로 만드신겁니까? (아직은 정식으로 아니고... 한 사람만...) 하여튼 젊은 목사님들이 두 서너명이 시작해서 결국 끝에는 하나만 남고...^^ ㅎㅎㅎ

사람들은 여기에 ‘금덩어리 있다!’고 하면, “와~~ ”, ‘돈 다발이 있다!’고 하면 “와~~”, 누가 돈 어떻게 벌었다 하면 펀드에서 벌었다하면 그것에 신경을 쓰지, 누가 “복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면 관심이 하나도 없어요. 그러니 이 세상에서 예수님 가신 길이 무슨 길이냐 하면, 남들이 따라 안 가려고 하는 따라 오려고 생각지도 않는 좁은 길이라 하잖아요. 찾는 이가 굉장히 적죠.

그래서 사람들의 그 사람이 목적하는 바, 그 사람이 살아가는 모든 행동의 동기 부여가 어디에서 나오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최종적으로 무엇을 기뻐하느냐’ 하는 것을 보면 알아요, 무엇을 기뻐하느냐.

복음으로 기뻐하면 평소에 그 사람의 행동이 복음 중심으로 그 길을 가는 사람이고, 복음을 제시해도 ‘그런 것 싫다 가져다 치워버려라’ 하고 딴 데 간다는 말은 그만큼 복음을 대체할 만한 다른 기쁨으로 복음을 대체했다는 것이죠.

대표적인 것이 바로 교회 목사들이죠. 목사들의 기쁨은 뭐냐? 교회에 있습니다. 제가 어느 곳에 댓글을 달았듯이 예수님에 대한 신앙이 식상하면 그 다음부터는 예수 안 믿고 교회를 믿게 되어 있어요. ‘교회에 대해서 너무 탓하지 마라, 교회를 부정적으로 보지 마라’ 이 말은 뭐냐 ‘나 이제 예수 신앙 다 거덜났습니다. 없습니다’ 그런 뜻이예요.

‘나는 예수 믿는 재미로 사는 사람이 아니고 나는 교회에 취직한 재미로 삽니다’ 그런 뜻이예요. 그러니까 이단이죠. 그런데 안 그런 목사가 어디 있어요. 다 그러잖아요. 그러니 다 이단이죠. 다~들 그렇다고 해서 이단이라는 것을 빼 주자는 것은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리는 성경대로 할 뿐이지 사람들이 우쌰우쌰 데모한다고 성경이 변경 될 리는 없을 것 아닙니까? 그렇잖아요.

스데반 집사나 사도 바울이 주님이 주신 그 계시, 자기는 그리스도의 종이라 했거든요, 그리스도의 종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받은 계시가 따로 있다고 했어요. 내가 받은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 했잖아요.

그러면 그 사도 바울은 이 성경 말씀에 목숨을 걸은 거예요. 여기에 바늘도 안 들어가요. 누가 뭐래도 누가 겁주어도 위협이 될 수가 없어요. 무슨 실패니, ‘그러면 실패한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한 수 더 떠서 뭐라 하는지 아십니까? ‘너 그러면 실패한다’ 하면 대답은 ‘나 이미 죽었다.’

‘너 그러면 인생 실패야’, 라고 하니까 사도 바울이 ‘나 죽은 놈이거든.’ 죽은 시체가 되었단 말이죠. 죽은 시체한테 따지며 ‘어이 너 실패했어’ 따져 봐야 죽은 놈이 뭐 꿈적합니까? 이미 죽은 싸늘한 시체인데. 상관없어요. 그것은 사도 바울이 지금 위대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사도 바울은 뭐다? 자기는 그냥 질그릇, 보통 그릇에 불과한데 자기가 위대한 것이 아니고 자기 안에 뭐가 들어 있습니까? 죽음을 이기신 생명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 생명이 나에게 ‘생명 값’을 하는 거예요.

생명이 가만히 있는 생명은 생명이 아니잖아요. 생명이 나를 가지고, 이 사도바울을 가지고 자꾸 돌아다니며 분탕칠을 하는 겁니다. ‘다르잖아!’하고 외치는 거예요. ‘너희 사는 것과 내 생명하고 이렇게 다르지’ 하고, ‘너희들의 기쁨이라 하는 것은 살아있는 자신을 더욱 더 살게하는 기쁨이라면, 내가 주는 생명의 기쁨은 “이미 우리는 죽은 자다. 죽은 자 이기에 내 안에 살아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 만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그 재미로 산다.’

그것이 바로 보배답다는 것이죠, 보배. 아무리 그릇이 질적 향상을 구하고 질적 성숙을 이야기 하고 질적 진보를 이야기 해 봐야 그것은 말짱 소용없는 거예요. 정작 중요한 것은 ‘내 안에 누구있다!’ 그게 더 중요한 거예요.

구원받을 때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예요. ‘내 안에 누구’로 인하여 그 분 때문에 구원받는 겁니다. 내가 그 분을 붙잡아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그분이 나를 떠나지 않기 때문에 구원받는 겁니다. 그래서 이미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안에 들어있다는 말이 맞는 말이예요. 꼼짝마라! 이니까,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와야 하는 그런 입장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진짜 예수로만 살아가는 목사는 예수님 이야기하고, 예수 버리고 살아가는 목사들은 교회 이야기 하죠. 그래서 목사들이 이단이라는 겁니다. 교회 이야기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하면 교회유지하기 위해서는 전도 필요하죠 돈도 필요하고 헌금도 필요하고 이런 선교가 필요하죠, 돈 되는 소리 할 것 아닙니까..

그래서 이미아씨가 (인터넷에) 올렸던 글을 보면, 전도할 때 일당 주고 1시간당 7천원내지 1만원주고 전도지 돌리는 아르바이트 시킨다는 그것을 보고 분통이 터졌어요. 그래서 댓글 달기를 예수 믿는 신앙이 거덜나면 교회 믿게 되어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교회를 극복하지 못한 목사는 그 것은 이단이라고 보면 됩니다.

사람들이 나를 공격하는 이유는 무어냐 하면 ‘왜 교회를 부정적으로 보느냐?’ 그 대목이예요. 나는 ‘그 따위 소리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왜, 교회를 부정적으로 본다는 그런 소리가 나온다는 그런 사고방식이 뭐냐? 말이죠. 너 정신을 어디에 팔고 있느냐? 성경에 교회라 하는 것은 사도바울과 함께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입니다.

언제 사도바울이 교회 되려고 애쓴 적이 없습니다. 왜? 자기가 이미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답게 되자, 하면 되는데, 교회 되자,라는 것은 없어요. 교회를 자기가 만들 수 있다면 교회되자가 될 수 있는데 교회 되고 안 되고는 주님 소관인데 자기가 자기 마음대로 됩니까?

자기가 그리스도의 몸 된다고 어디 면접시험 필기시험 본다고 하나님께서 교회되게 해 주세요? 안 해주지요. 그냥 질그릇이 보배가 담기면 교회가 되는 것이지요. 성경을 안 보고 복음을 안 본다는 말은 ‘나는 이제 식상하다’는 뜻입니다. 식상하다는 무슨 뜻인지 알지요? 이제는 지겹다 이 말 아닙니까. 저는 그것을 ‘노쇠화’라 합니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학문이나 양심이나 감정으로 만들어 낸 것은요 ‘시효’가 있어요.

인간이 만들어 낸 감정인 사랑이라는 것도 시효가 있어요. 하나님이 주신 사랑이 아니고 자기가 만들어낸 믿음 소망 사랑은 시효가 있어요. 특히 미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사람 많이 죽인 조00가 미워 죽겠지만 세월 한 6개월만 지나가 보세요. 조00가 누구더라? 다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세월이 약이다.’ 하잖아요. 세월이♫ 약이겠지요♬ 세월이 약이라 지나면 잊어버려요. 대학 떨어져 재수할 때 자살하고 싶어하는 아이들이 많아요. 하지만 학원에 들어가 출퇴근하든지 먹고자면서 공부하다보면 2월초 대학 떨어진 것 다 잊어버립니다. 인간의 감정은 시간이 지나면 다 노쇠해 버립니다.

그러니까 교회 교인들이 처음에 주님 믿고 천부여 어소서 손들고 까불고 하다가 나중에 손내리고 몇 개월 안가서 교회 부흥하자고 외칠 때 동의하는 이유가 뭡니까? 이미 자기가 임의로 조작된 신앙이기 때문에 세월 따라서 이것은 사라져 없어져버립니다.

어려울 때 잠깐 새벽기도 나와서 눈물 콧물 흘리지요. 세월 지나가면요 뭐 아주 노쇠해 버렸는데요. 이제는 식상했다, 이제는 지겹다 말이죠. 사람은 말씀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돈으로 산다, 이래 나온다 말이죠. 돈이 주는 기쁨이 말씀이 주는 기쁨보다 더 좋다, 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런 말을 했어요. 내가 환란이나 궁핍이나 부요해도 어떻든지 내 할일은 다 한다. 이 부요함이 유혹이 되요. 궁핍함은 말할 것도 없고. 지금 뭐 궁핍함이 말 할 것도 없잖아요. 얼마나 신앙생활 하는데 시험거리인지 모르죠. 동반 자살하고 싶은 생각이 얼마나 나겠습니까? 그런데 그것 이상으로 위험한 것이 무엇이냐? 이제는 내 영혼아 걱정하지 마라, 는 이 넉넉함.

교인 한 천명 되어 보세요. 보너스 1년에 800프로 주고, 때마다 안식년 주어 해외여행 보내주고, 애들 공납금 다 나오고, 사택 거대한 100평짜리 사고, 고급 외제 차타고 목사라고 하면서 돌아 다녀 보세요. 여기에 무슨 예수가 좋겠어요, 당회장이 좋지. 그래서 똑똑한 교인 하나 나오면 이단이라고 잘라서 보내버리잖아요. 어디 내 자리 넘보느냐, 하잖아요.

어려우면 그나마도 내가 죄를 지어서 어렵다는 식으로 해서 붙어 있는 척이나 하지, 부요한 가운데 있으면 이것은 척도 안합니다. 슬슬 예수 복음 농담 따먹기가 되어버려요. 왜냐하면 그거 없어도 나의 행복은 감쇄되지 않기 때문에. 교회 있으면 성경 버려도 나의 행복에 지장이 없다고 보는 거예요. 오히려 귀찮기만 하지요.

그러니까 오늘날 한국 교회가 이단이라니까요. 전체 전 교인의 이단화, 이예요. 중국(?)같은데서는 전국민의 신자화처럼 전 신자의 이단화이예요. 교인들을 전부 다 이단으로 만들어 놓았어요. 사도 바울은 이런 소리 전혀 안 듣습니다. 안 좋아해요. 왜? 없거든요. 속에 보배가 없거든요. 보배 없는 사람들에게 이런 소리를 하려니 뭐가 좋겠어요. ‘에이씨 내가 납득이 안 되는 소리를 왜 하십니까?’ 이런 느낌밖에 없지요.

제가 사도 바울이 하는 이야기를 한 문장으로 하면 이렇습니다. ‘죽는 것이 좋지 아니하면 하나님 일 아니다!’ 이렇게 봅니다.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더 좋게 느껴지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면 하나님 일 생각할 때는 언제입니까? 그건 요거 그대로 ‘죽는 일이 사는 것보다 더 행복할 때’. 그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일이 되요. 사모님은 아이들 셋 놓고 죽기 힘들텐데..^^ 사모님 없으면 아이 셋 못 살 텐데 ^^ 죽는 것이 좋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일이 아니고 결국 자기 일이 되요. 자기 일을 살짝 하나님의 일이라고 빙자하는 거예요.

귀신을 속이려고 해봐요. 이거요 이 한 마디에 안 들키는 사람 없어요. 다 들키게 되어 있어요. 이 것이 바로 십자가 아닙니까? 십자가로 다룬다는 말은 뭐냐하면 묻는 거예요. ‘너 죽어서 제대하고 어서 빨리 나하고 합류하자. 좋지?’ 스데반 집사에게 좋지? 하니까 좋습니다! 이것이 바로 죽는 것이 사는 것 보다 더 좋다는 겁니다.

제가 지금 과도하게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대로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봅시다.
“(고후 5: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니라”

이것을 이천명 (모이는) 교회 목사들이 이것을 한 단 말입니까? 예배시간에 사도신경에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내가 믿사오며... 이것은 예배 처음에 상투적으로 다 하잖아요. 유치원 아이들도. 사도신경 대신에 ‘차라리 우리가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게 하옵소서.’ 이렇게 큰 교회에서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어느 교회 어느 성당에서 그렇게 해요?

우리 교회에서 이렇게 하면 목사님 너무 심합니다 ^^ 이렇게 나올지도. 전능하사... 사도신경 대신에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니라’ 이렇게 외우게 할 수 있느냐 말이죠. 성경대로 말씀이잖아요. 제가 지어낸 것이 아니잖아요.

이것이 다 무어냐? 우리를 힘들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네가 생각한 그 이상으로 우리 자신이 귀하다, 이 말이죠. 내가 내 자신을 보는 것 보다 훨씬 더 귀해요. 왜? 내가 나를 보는 것은 내 껍데기 내 학력 내 취미 다른 사람들의 나에 대한 평가 인식 나의 자존심 이런 것을 보지만, 주님은 그런 껍데기 소소한 것는 안 보시고 정말 내속에 자신을 직접 넣어 주신 것을 보시거든요. 그것이 무어냐? 보배예요, 보배.

자 보배가 어떤 위력을 가지고 활동을 하는지 그 뒤에 봅시다.
“(고후 4:9)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여기서 제가 한 번 적어 볼께요. <핍박을 받아도...> 그 다음 뭐라 되어 있습니까? <버린 바 되지 않는다> 그 다음에...또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그 다음에 뭡니까? <망하지 않는다> 이렇게 되어 있죠. 이것을 둘로 나누어보자는 것이죠. <핍박을 받아도 /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이 대목은 현재 세상이 누구를 공격하는 겁니까? 질그릇을 공격하는 것이죠. 부셔버릴까 저 인간. 죽여버릴까? 이런 것 아닙니까.

그런데 만약에 세상이 이렇게 질그릇 공격할 때 ‘엄마야 무섭다’ 이러면 그 사람은 속에 뭐가 없다? 보배가 없다는 것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세상 권력을 충분히 이용하고 계신 것이죠. 너는 가짜야 하는 뜻으로 핍박이 온다 말이죠. ‘엄마야 무서워 잘 못 했어요 다시는 예수 안 믿을께요.’ 이렇게 나온다면 아무리 목사라도 장로라 해도 복음 강의해도 ‘너는 가짜구나’ 들통이 나는데

하나님께서 감사하게도 고맙게도 핍박을 받고 고난을 당하게 하시는 것은 우리를 힘들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세상이 주는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이 우리가 평소에는 바쁘다보니 몰랐었는데 세상에! 핍박받고 고난받고 하다보니까 내가 미쳐 몰랐던 큰 가치! 보배! ‘버린바 되지 않고 망하지 않는다는 이 큰 가치가 나를 지배하고 있구나! 나를 통치하고 있구나!.’ 그것을 새삼스럽게 아는 그 행복. 그 기쁨. 이것을 돈 주고 수천억 주고 살 수 있습니까? 정주영 정몽준 정몽헌 이런 인간들이 돈 주고 이런 것을 사 낼 수 있습니까?

만약에 이것을 돈 주고 살 수 있다면 가난한 사람은 천당 다갔어요. 부자들만 갈 거예요. 그런데 얼마나 감사한지, 하나님은 가난, 부자 보지 않으시고 일방적으로 이것 주시고, 버린 바 되지 않고 망하지 않는다는 이 것을 주셔서 인간 같지도 않은 인간, 죽어도 별 탈도 없는 인간을 아직도 지금 죽을지 모르지만 아직까지는 살아 있어요.

살아 있으니까 이렇게 이야기하고 마주 볼 수 있잖아요. 저는 가끔 엉뚱한 생각을 하는데 해가 하늘에 떠 있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해요. 그거 누가 매달았어요. 참 그거 매달은 사람 없잖아요. 참 신기하잖아요. 하늘에 붕 뜨잖아요. 해야 나오너라 우리가 시켰습니까? 우리는 평소에 살아가는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어야 행복하잖아요.

그런데 태양은 내 뜻대로 안 되잖아요. 그래도 우리는 태양을 보고 행복을 느낄 수 밖에 없잖아요. 태양은 내 말을 듣지 않고 다른 분의 말을 듣는 느낌이 들잖아요. 기적이죠. 정말 신기한 일이 아닙니까. 제 말뜻을 잘 이해해야 되요. 아침에 청소를 깨끗이 해 놓았는데 내가 놓지 않은 다른 어떤 물건이 여기에 와 있다면 무섭죠. 도둑이 들어왔나. 창문 열고 들어왔나? 누구야 도대체. 나의 의미로만 지배하는 이 공간에 내 의미에 예속되지 않는 다른 의미가 침투해 있다는 것. 무서운 일이죠.

그런데 태양이 바로 그런 것 아닙니까. 달이 그런거예요. 그래서 시편 136편에 보면 해를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8) 해로 낮을 주관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9)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그것만 생각해도 우리가 내 마음대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감사히 여기지 않고 내가 내 요구대로 우긴다는 것.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까 내가 존재한다는 것에 감사할 줄 모르고 내가 상대방을 꺽어야 비로소 약간의 감사가 튀어나올 정도로 우리의 영혼은 이미 지저분할대로 지저분해져서 아주 썩었죠. 아주 이단 중에 이단이죠.

그것을 요한계시록에서는 악마에 속했다고 하죠. 악마에 속했으면 지옥가야지 다른 대안이 없잖아요. 그런데 오직 성령 받은 사람만이 버린 바 되지 아니하고 망하지 아니한다. 망해야 되는 데도 불구하고 안 망한다는 것. 버린 바 되어도 괞찮은데 안 버려진다는 것. 이것이 내 인생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내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이 이것보다 더 우리를 편안하게 해 주는 것이 이 세상에 없어요. 내 마음대로 안된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 안 되니 절망이다’가 아니라 반대로 ‘다 주님 마음대로 되니 내가 신경 쓸 것이 없네’ 라는 행복감으로 다가와야 되요.

내 마음대로 안 되니 좌절하자가 아니라 맡기면 되네. 걱정한다는 자체가 이것은 나에게 주제 넘는 일이네. 컨베이어 벨트에 물건이 가만있어도 실려 나가듯이, 공항에서 가만히 서 있으면 길이 움직여서 움직이는 도구로 사람이 갈 수 있듯이 우리 인생도 아무리 춤을 추고 몸부림쳐 봤자 우리를 움직이는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뜻을 알아서 그 위에 (우리가) 놓여있다는 것을 아는 행복, 그 외에 다른 행복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남편 믿다가 남편에게 호되게 당할 것이고 아내 믿다가 아내에게 호되게 당합니다. 20년 동안 친구로 생각했다가 당한 사람있잖아요. 000이..

예수 안 믿고 이근호 믿다가 당하죠. 당연한 것 아니예요? 그래놓고 영혼이 피폐하다고. 세상에 예수 믿는 사람이 영혼이 왜 피폐해요. 예수 믿고 있는데 이근호가 잘 못 가르쳐서 피폐해졌다. 그러면 이근호는 예수님보다 더 세네. ^^ 십자가마을 보세요. 십자가만 보면 피폐해 진다고. 예수님보다 이근호가 더 세다구요.^^

십자가의 진수가 그 다음에 나옵니다. 봅시다.
“(고후 4: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미쳤나? ^^ 여러분들이 죽은 이순신 짊어집니까? 연개소문 짊어지고 갑니까? 죽은 연개소문을 왜 짊어지고 갑니까? 짊어질 필요 없지요. 너는 그 시대로 끝났고 나는 지금 21세기이고. 너는 AD 6-7세기경이고 너는 너의 시대이고. 연개소문이 몇 년이죠? 너는 너의 시대고 나는 나의 시대이고. 시대가 다른데 어떻게 하나로 결합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보배는 된다는 거예요. 보배는 옛날의 그 예수가 아니라 보배는 지금의 예수님이 그 예수님이라는 거예요. 그 예수님 제자들과 함께 하셨던 그 예수님이 지금 너희와 함께 하고 있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10장을 봅시다. (오늘 성경공부 너무 잘 된다) 18절 부터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오늘 서울에서 강의할 때 성령에 대해 집중적으로 할 거예요. 영에 속한 사람과 육에 속한 사람에 대해 할 건데 미래 당겨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아버지의 성령께서 시대나 공간이나 지리적인 것을 초월해서, 아버지의 성령께서 직접 너희 속에 들어가서 이야기한다는 거예요. 우리 속에 들어와서.

너희 속에 있는 것이 성령이죠. 밖에는 성령이 없다는 말이 아니고 성령께서 옛날의 율법은 뭐냐하면 돌판가지고 그냥 우리 밖에 말씀이 있죠. 돌판가지고 이것 지켜라 지켜라 이래 되잖아요.

그래서 성화론자 개혁주의 이런 사람들은 뭐라합니까? ‘성경에 하라고했는데 해야지 왜 말이 많나? 성경이 호구로 주어져있나?’ 이래 따지잖아요. 그런데 새언약은 뭐예요? 우리 밖에 문자로 주는 것이 아니고 그 말씀을 하라하라 하는 그 분이 직접 하라!

한 거리 2-3미터 띄어 놓고 저 쪽 2미터 밖에 외곽에서 우리보고 ‘어이 해!’ 하고 지시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서 성령께서 이 지시와 더불어서 성취가 일어나는 겁니다. 지시와 더불어서 성취가 일어날 때 만약에 성령이 없는 사람은 어떠냐하면 ‘하나님이여 이 말씀은 내가 지켰습니다’, 이래 나올게 뻔합니다. 왜? 자기 외에는 아무도 없으니까. 그런데 성령이 있는 사람은 뭡니까? ‘이것은 성령님만이 했습니다’, 하려면 무엇이 되어야 되요? 여기 마태복음 10장에 뭡니까? ‘내가 아니오’가 되어야 되죠.

그러니까 결국은 성령이 들어오게 되면 우리 안에 성령하고 또 누가 있다? 우리라는 것이 살아 있는데, 우리의.. 라고 하는 것은 뭐다? ‘내가 한 것이 아니요’라는 말을 하면서 살아있다 이 말입니다. 이것이 어렵습니까? 그런데 내가 이런 소리하니까 사람들이 뭐라하냐면 ‘당신은 우리 신자를 맨날 부정적으로 본다’이런단 말이죠.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러잖아요, 이근호 목사는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은 죄라고 했는데 기도하는 것도 죄냐? 설교하는 것도 죄냐? 헌금하는 것도 죄냐? 전도하는 것도 죄냐? 이따위 소리나 하는 거예요. ‘다 죄다’ 하니까 ‘뭐 그런게 다 있나?’.

‘우리는 죄’라는 것을 이야기 하면서 하는 거예요. 시편 51편에 보면 다윗이 뭐라했습니까? 나는 상한 심령. 주께서 원하는 고백은 뭐다? ‘나는 상한 심령입니다.’ 상한 심령에서 그 다음에 안 상한 심령이 되는 것이 아니고 다윗이 언제 상한 심령이 되느냐 하면은 계속 밧세바하고 간통할 때 상한 심령이 아니라 성령이 오게 되면 ‘나’라는 본체 자체가 상한 심령이라는 것을 성령이 올 때마다 알고, 만약에 성령이 충만하지 않으면 모르죠. 나 잘났다, 이래 되겠죠.

시편51편에서 하는 말이 ‘내가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다’ 했죠. 그러면 무슨 말입니까?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날 때마다 죄이고 태어나지 않은 때에는 죄가 아니란 말입니까? 태어날 때 그 때만 죄이고 한 살 때 영세 받으면 죄가 아니란 말입니까?

그것이 아니고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난 자식이 죽을 때까지 죽 이어진다 말이죠. 그것이 상한 심령이란 말이죠. 그런데 그 사실을 언제 안다 말이죠? 그 사실을 밧세바는 알았습니까? 우리아 만날 때 알았습니까? 몰랐어요. 언제 알았습니까? 성신이 올 때.

성신이 나단 선지자를 통해 말씀을 통해 올 때, 나단 선지자의 말씀을 통해 성신이 역사할 때 비로소 소급하여 ‘지금부터 내가 나쁜 놈이다’, 이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나는 나쁜 놈이었고 처음부터 나쁜 놈이라는 것은 세월이 가서 죽을 때도 나쁜 놈으로 죽는다, 따라서 하나님이 나에게 준 것은 무어냐? 하나님의 은혜를 주셨다. 주께서 꺽으신 피로 인하여 내가 씻음을 받은 것입니다.’

이 사실은 다음 주에 나오는 책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에 보면 이 대목을 설명해 놓았습니다. 층이 두 층이라고 이야기 했고, 한 층은 죄인을 은혜로서 이렇게 용서하시는... 거기에 하나님의 의가 우리가 무엇을 말씀을 지켜서가 아니라 용서하심 자체가 곧 뭐가 된다? 하나님의 은혜가 된다.

‘우리가 항상...,’ 해 놓고 <우리가>에 여러분의 이름을 집어넣어 보세요. ‘이근호가 항상..’. 이렇게. ‘전용렬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그러니 몸이 시커멓게 되었잖아요 ^^ 등산을 많이해서 그런지는 모른지만 ^^ ‘항상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결국 뭐냐하면 예수님께서 찾아오신 목적이 우리 소원을 이루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 생명을 우리를 그릇으로 사용하여서 드러내기 위해서 찾아오셨다는 것이 분명히 확인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곧 세상을 볼 때 나 중심으로 보는 것 자체가 곧 말도 안된다, 는 것입니다. 아까 그랬죠. 태양이 있다는 것이 나 중심적인 사고에서 보면 태양이 나의 허락도 없이 왜 뜨는지 건방지잖아요. 태양에 수갑을 채울까요? 어떻게 할까요? 태양이 내 중심으로 뜨는 것이 아니듯이 세상이 내 마음대로 안 되잖아요. 안되는 줄 알면서 왜 우리는 내 맘대로 살아갑니까?

그것은 인정하자 말이죠. 날 때부터 본성이 나 밖에 모르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 하잖아요. 그렇다면 그것을 죄라고 왜 인정하지 않느냐 말이죠. 그것이 더 못되었다 말이죠. 본인이 자기중심으로 살아가면서 그것이 죄인 줄, 죄로 살아가면서 기어이 죄가 아니래. 그래서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말이죠. ‘죄인인 놈 나와!’ 해도 나오는 사람 없어요. 주께서는 성령을 보내셔서 죄인되게 해서 죄인 되게 한 사람은 이미 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죠.

성령이 있으니까 내가 죄인임을 알죠. 그것도 엄마의 모체로부터 태어날 때부터. 특별히 나쁜 일을 해서가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태어나나자 마자 그냥 죽어도, 간난 아이처럼 태어나자마자 죽어도, 그 애는 죄 때문에 죽는 거예요. 그 아이의 구원 문제는 우리 소관을 떠난 문제예요. 주께서 허락하면 천당가는 것이고 허락안하면 지옥가는 거지요. 이런 거예요.

지난 수요일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관심사가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정낙원 목사님 글에도 나와요 ‘너를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이에요. 보통사람들은 예수를 알 때 이미 자기 이득을 생각하면서 뭔가 얻고자 해서 예수께 나오는데 예수님은 우리가 그런 태도로 산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의 요구, 우리의 간절함을 절대 돌아보지 아니하시고 뭐라하냐면 ;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 자신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합니다. 아쉬워하고 있는 나에게 관심을 가지게 하는 것이 아니고, 관심을 완전히 칼로 잘라버리고 인정 안 해 주고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그러니 말이죠.

‘우리 산 자가 항상...’ 우리가 죽은 자가 아니죠. 산 자가... 예수 안에서 우리가 살아있어요. 산 자이기에 우리가 죽음에 넘기우게 되요. 우리 산 자가 항상 죽음에 넘기움은 누구를 위해서 입니까? 앞에 보면 예수를 위해서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아니 우리 방금 살았다 하지 않았습니까? 산 자라 했잖아요. 이 말은 뭐냐하면 우리가 살았냐 죽었냐를 묻는 것이 아니고, 산자냐 죽은자냐의 구분은 주님께서 너를 어떤 기능으로 사용하시느냐에 따라서 주께서 활용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죽어도 산자고 주께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쪽으로 활용 안하면 그것은 죽은 자가 되어 버려요.

우리 산자가 그러니까 지옥 갈 사람들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천당 갈 사람은 항상 예수를 위해서 어디에 넘겨야 됩니까? 죽음에 넘기워야 되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우리 안에 있는 보배가 무슨 능력이 있느냐 하면 ‘죽음 자체도 별 문제가 아닙니다. 죽는다 해도 큰 문제 아닙니다.’ 라는 것을 알려주는 목적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것을 늘 보여주자는 차원에서 우리로 하여금 죽음에 넘기우고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음에 넘기운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그것에 대해서는 (피곤하겠지만 조금만 참으세요) 여기 고린도후서 1장 5절

‘(고후 1: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그리스도의 위로가 넘치려면 그 전에 전제조건이 무엇이 있어야 하나요? 고난이 먼저 깔려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 왜 고난이 깔려 있어야 되는가? 그 이유가 1장8절에 나옵니다.

(고후 1: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여기에 ‘힘에 지나도록...’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자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이 선까지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닥친 환란은 우리의 힘으로 감당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하고 지나가 버렸어요. 그러니 우리는 죽이든지 살리든지 뭐 이제는 자포자기 상태죠. 죽어도 할 수 없고. 그렇게 될 때에 우리의 뭐까지 끊어지고? 살 소망까지 끊어졌죠.

‘(고후 1:9)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여기 자기만 의지하면 우리는 절망이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로마서 8장에보면
(롬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 8: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롬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결국 우리 몸을 무슨 몸으로? 아예 죽은 몸으로 간주를 하죠. 죽은 몸으로 간주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죽을 몸이기 때문에 죽자는 거예요. 아까워서 죽지 않는다게 없어요. 죽을 몸인데 뭐가 아깝습니까!. 그만 살래. 죽을래. 이것은 뭐 아주 용기가 있어서 하는 소리가 아니고 내가 원래 이런 입장에 있습니다. 그냥 고백하는 것 뿐이예요.

살면 감사하고 죽어도 더 감사하고. 제대할 날짜 다가오면 감사하잖아요. 전목사님도 보니까 작년보다 올해가 점점 제대 날짜가 가까웠어요. 아이고 축하 해요. 축하할 일입니다 ^^ 그래서 생신을 축하할 때 태어난 날을 기점으로 하지 말고 죽는 날을 기점으로 생신 축하하자. 생신축하 합니다. 죽을 날이 가까웠으니... ^^ 이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생신이 아니죠. 생신 축하한다는 말 자체가 안 된다. 죽을 날을 미리 앞 당겨서 죽자 하는 식으로 해야되요. 그렇게 나오면 이제 사도바울이 들었던 것처럼 미친 놈 소리는 듣는 겁니다. 오용익 목사님 말처럼 미친 놈, 년들이 되는 거고. ^^

사도바울이 그래서 말하길, 나는 미쳤다. 주님의 사랑에 미쳤다. 내가 미쳐도 주님의 사랑에 미쳤다. 무엇에 미쳤는가를 봐라. 내가 지금 미친 것 맞는데 어디에 미쳤나? 돈에 미쳤나 명예에 미쳤나? 교회 부흥 성장에 미쳤나? 살아남을까 애쓰는 것에 미쳤나? 아니면 도대체 나는 어디에 미쳤나? 너희들 한 번 돌아봐라. 나는 주님의 사랑에 미쳤다.

그 다음에 나온 말이 뭔지 알아요. 그런즉 누구든지 예수님에 의해 사는 사람은 자기를 위해 살지 말고 자기를 위해 죽었다가 사신 그리스도를 위해 살게 하셨느니라. 이것이 새로운 피조물이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나오잖아요.

이 고린도후서를 보면요 어는 귀절 들어가보더라도 말씀에 푹푹 빠져요. 아스팔트 새길 디뎌보면 빠지듯이 말씀에 복음의 깊이에 푹 들어가요. 푹신푹신하고 첨벙첨벙 막 내려가요. 어디에 닿아도 주님의 사랑이고 주님의 용서의 피가 내 발바닥에 다 묻히게 됩니다. 고린도 후서. 고린도전서도 마찬가지고. 성경 전체가 마찬가지이지만.

우리가 죽을 육체가 아니면 주님의 산 생명이 안 나옵니다. ‘나는 죽었습니다’ 할 때에 비로소 예수님의 생명으로 나오지, ‘나는 잘 났습니다. 나는 대단합니다’ 이래 나오면 그것은 자가기 자기를 증거한 것이지 어떻게 예수님을 증거한 거냐구요. 내가 수백번 천번 이상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십자가 마을에서. 우리가 죽는다 할 때에 생명이 나온다고. 그런데 무슨 소린지 못 알아듣는 거예요. 피폐하게 만든다고 하고.

피폐하게 한다면 그럼 좋다. 이근호신학은 다이어트 안되는 사람들 다 오라. 피폐하게 해서 살 싹 빠지게 하니. 그래서 000 목사님이 이렇게 되었는가? ^^ 피폐해서....

12절에 봅시다. ‘(고후 4: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이 말은 다르다는 말이 아니고요.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도의 무리를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늘 고난과 환란과 죽음에 몰아넣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사도가 존재하고, 그 사도를 인하여 영생을 얻은 사람은 생명이 누구의 희생 때문에 살았는가를 보여주는 증인 역할을 하라고 존재하는 겁니다. 물론 나중에 또 이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죽을 육체가 되어서 예수의 생명이 나오겠죠.

‘(고후 4:13) 기록한 바 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 이것은 내가 지금 엉뚱한 소리를 하고 미쳤다하는데 이걸 안 미쳤다하고 듣는 사람은 같은 형제임이 분명합니다, 라는 뜻이예요.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해도 하나도 없고 다 어디갔는지 없고.... 이것도 주께서... 내 중심으로 생각하면 안 되거든요. 주께서 그렇게 하신거예요.
신앙생활을 하려면 굴욕을 당하는 쪽으로 나가시면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굴욕을 안당하는 것이 아니라 당할 수 있는 쪽으로 자꾸만 전진하시면 됩니다.

‘(고후 4:14)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자 여러분 부도가 났다. 갑자기 사기를 당해서 부도가 나서 돈 한 1억, 30년 모아놓은 재산을 다 날렸다, 재테크하다 5천만원 사기당해 다 날렸다. 그 때 한강다리를 건너갈 때 위험하죠. 왜? 살 소망이 없기 때문에. 그런데 고린도후서 4장14절 보세요.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

그러면 그 동안 주께서 우리를 살리신 것은 나에게 5천만원이 있는 것 때문에 살린 것이 아니고, 5천만원이 없었더라도 지금까지 살아왔어요, 5천만원이 없더라도. 그런 뜻 아닙니까? 그죠? 그러니까 5천만원과 내가 사는 것이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착각이었죠. 내가 태어 날때부터 없어도 무방할 태양이 있는 것처럼 없어도 되는 내가 왜 있느냐? 주께서 살려 주신 거예요. 우리를 살려 주신 것은 그 때는 몰랐는데 지금 와 보니 예수 그리스도의 살리심이 있다는 것을 알리시기 위해서 우리를 살려 주신것예요. 그렇다면 5천만원을 날린 것은 그것은 내가 해야 될 일과 관련이 없는 사항이죠. 물론 5천만원 있으면 아이스케이크 더 많이 먹을 수 있고 좋지요. 좋은데 관련은 없잖아요. 내가 해야 될 일과 5천만원은 관계가 없잖아요.

내가 관련 있는 것은 스데반 집사처럼 돌아 맞아 죽더라고 ‘주여 용서하소서’ 그게 할 일이지 5천만원가지고 선교센터해서 선교사 보내고하는 것은 내 할 일 아니잖아요. 그것도 내가 안한다고 주께서 안한다는 말이 아니고 주께서 하시면 하는 것이지만 뭘 하든간에 그걸 하든 안하든 있던 없던 간에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살리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살리신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이다. 이게 바로 질그릇 안에 있는 보배의 특성이 되는 것입니다.

자, 그 다음에...‘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왜 그 앞에 서게 하시는가. 지금 한국교회 교인들이 사기인지 진짜인지 모르겠는데 나도 예수 믿습니다. 구원받았습니다. 주장해 좋고 그 다음에 자기 사업한다고 도망치고 마는 거예요. 복음 앞에 오지도 않고, 말씀 앞에 오지도 않고 주님 앞에 오지도 않고 고맙습니다, 하고 가버리는 거예요.

마치 아이가 학교갔다 오니까 내가 맛있는 간식을 해 놓았다 하니까 아이가 하는 말이 어머니 고맙습니다. 해 놓고는 자기 방에 들어가 게임하는 것과 똑 같은 거예요. 주 앞에 선다는 말은 주 앞에 서는 것 외에 다른 기쁨은 없습니다, 하는 사람만 날마다 주 앞에 서게 되어 있어요. 세상에 제일 황당한 것이 무엇이냐? 주 앞에 서서 딴 데 보는 놈. 허허. 이거 무슨 짓입니까? 예?

교장 선생님이 아이에게 상 주면서, ‘상장. 이 사람은 행동이 방정하고 어쩌고 저쩌고 모범이 되므로 상을 준다’, 하는데 아이는 상 받을 생각은 안하고 두리번 거리면서 나 어때? 이러고 있으면 진짜 행동이 방정한 놈이 되죠. ^^ ‘이게 지금 누구 앞에 서있는데 지금!’ 그런 행동을 하는 아이는 내 앞에 아무도 없다고 느끼면서 하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잖아요.

그러니까 요즘 교인들 보면 주 앞에 안 서려고 해요. 예배마치면 도망치기 바빠요. 어떤 사람은 골프장 앞에 서기를 원하고 어떤 사람은 연속극 앞에 어떤 사람은 프로 야구 앞에 전부 다 주님 앞에 안 서려고 해요. 왜? 식상하니까. 노쇠한 예수. 늙어빠졌어. 처음에 믿을 때는 안 지키면 뭐 내리는 줄 알았는데 이제는 보란 듯이 얼레리꼴레리 속여도 벌 안 내리는 것 보니까 무능한 하나님.

주께서는 겁주어서 폭력으로 그 앞에 서게 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사랑으로 서게 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습니다. 폭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으로. 계속 사랑으로. 왜 사랑으로 하느냐 하면 ‘나를 누구보다도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한테도 ‘베드로야 저 사람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말은 뭐냐하면 ‘너 내 앞에 서는 게 안 좋으냐?’ 그런데 베드로는 그것도 모르고 두리번 두리번 거리다가 ‘저 사도 요한은요?’ 남을 지적하지요. 참 산만해요. 두리번 두리번거리고 참 산만해요. 정신을 엉뚱한데 팔고 있어요.

그래서 이런 문제는 뭐냐하면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가진 것이 있다 여기면 가진 것이 있으면 가진 것 앞에 서려고 하지 주님 앞에는 안 서려고 합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뭐냐하면 가졌다고 여기는 우리를 죽은 자로 보죠. 어리석은 부자 알죠. 창고에 그득한 곡물을 채워놓고 그 다음에 뭐라 합니까? 자기는 창고 앞에 서있죠. 주님 앞에 서는 것이 아니고.

창고 앞에 서 있으면서 하는 말이 뭐냐 ‘내 영혼에 염려하지 말라’. 주님 십자가 앞에 서서 그런 소리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십자가 앞에서 ‘내 영혼아 이제 걱정 놓아라. 주께서 다 이루셨단다.’ ‘아이고 주여 감사합니다.’ 이러면 얼마나 좋아.

내가 주님 앞에 선다는 것은 그 소리 같이 들읍시다하고 서는 것인데, 그 사람은 자기 것이 안 된다고 자기만의 것. 자기만의 남이 손 못대는 자기만 손을 댈 수 있는 왕, 신이죠. 내가 신 놀이할 수 있는 것 앞에 설 때 내 영혼아 걱정하지 마라. 할 때 그 많은 곡물이 누구것이 되겠는가?

제가 대전에서 강의할 때 그랬잖아요. 큰 교회 예배당에 많은 교인앞에서 당회장 목사가 ‘내 영혼아 큰 교회가 나를 먹여 살린다.’ 그때에 모든 교인들이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데려가면 그 교회는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후임자의 것이 될 것이다. 너 죽고 난 뒤에 아무것도 없다. ’

사람이 가진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을 지키려고 합니다. 지키려고 할 때 사람은 무슨 버릇이 나오느냐면 의를 채우려고 해요. 착하게 살려고 해요. 왜? 착하게 살면 내가 진짜 아끼는 것을 주께서 대리해서 지켜줄 줄 알고. 그런데 사람이 착하게 산다는 자체가 뭐냐 하면 결국 뭡니까? 사람을 공격해야 되죠. 내 허점을 발견한 사람을 공격해야 되죠.

그러면 뭐가 빠져요? 감사가 안 나오겠죠. 사람이 자기 의가 있으면 감사가 안 나옵니다. 완벽을 기하려고 하지 감사가 안 나와요. 나 이렇게 잘났다하고 변명이 나오고 감사가 안 나와요. 고맙습니다가 안 나오고 나 잘났지요. 그러니까 내 것 내가 좋아하는 것 하나님 손 대지 마세요. 그 거 내가 수십년 모아 놓은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해도 특히 자녀를 가진 부모들은 특히 엄마, 남자야 뭐 관심도 없고 여자같은 경우 엄마같은 경우에 자기 자식 누가 때리면 3개파 조폭도 없어요. ^^ 그 자식이 무어냐하면 자기 의가 되기 때문에. 내가 자식 키우느라고 얼마나 애썼는지 아느냐 그 자식이 있어야 예수님이 들어가고 만약 그 자식이 없으면 예수님이 없잖아요. 그래서 자식이 갑자기 죽으면 부모들이 굉장히 화가 나는 이유가 마치 내가 죄인된 것 같은 느낌이 들죠. 자식 죽는 것이 아까운 것이 아니고, 졸지에 내가 죄인으로 남에게 부끄럽게 수치스럽게 드러났다 이것이 못 참는다는 말입니다 .

그게 주님 앞에 안 서고 늘 사람들 앞에 자기를 내 세우려고 하기 때문에 자기 방어의 벽이 그만큼 두꺼운 겁니다. 그래놓고 뭐 예수를 믿어요? 에라이 거짓말쟁이. 주님 앞에 서면 나는 죄인 되고 죄인 되었기에 죄인을 부르러 오신 주님 앞에 용서받는 그 감사가 얼마나 큰데...

말로는 주님 앞에 섰다고 해 놓고는 교인들 앞에서 나 어때요? 이 장로 어때요? 이 목사 어때요? 이 집사 어때요? 해 놓고, 누가 험담하면 이씨 죽을려고! 달려들고. 결국은 주님 앞에 서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장기를 과시하려고 서는 그런 인생. 그게 무슨 그 안에 보배들은 사람이예요.

보배가 아니라 똥이라고 해야죠. 그건 배설해야 합니다. 똥은 배설해야 기쁨이지. 똥이 있다고 나쁜 것은 아니고 배설하면 되요. 그런데 그걸 더 채운다는 것이 문제아닙니까. 더러운 것들을 채우는 거예요. 내가 학력이 얼마며 지식이 얼마며 그것을 더 채운다는 것이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채운 걸 자랑하니까 남들 보기에 주님 보기에 똥을 자랑하는 거예요. 나 똥있다! 똥있다! 에라이 자랑거리다. (질문; 배설도 내 마음대로 안 되잖아요?) 여기 말은 성도보고 합니다. 되게 하십니다. 네, 되게 하지요. 말씀은 성도냐 아니냐를 확인하는 차원이기에 성도라면 동의하고 아니면 처음부터 모이지도 아니합니다.

‘(고후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크! 이제 ‘그러므로’의 이유를 알겠지요. 앞에 쭉 설명했잖아요. ‘그러므로’라는 말은 네 몸이 네 것이 아니고 주님 것인데 우리가 낙심을 왜 내 것인양 여기고 낙심을 하느냐 이 말이죠. 낙심을 하려면 낙지나 먹어라! 말도 안 되는 개그이지만. 썰렁한 개그이지만...

‘우리 겉 사람은 후패하나..’ 썩나? 마나? 썩어야죠.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썩는다는 것 때문에 신경쓰지 말고 새로운 것 때문에 기뻐하는데 그 새로움은 언제 등장하느냐 썩을 것이 썩을 때 비로소 새로움이 등장합니다. 만약에 안 썩으면 이 몸이 안 썩는 줄 알고 착각합니다. 내가 썩어줘야 내 안에 다른 분이 새롭다는 것이 그 때만 드러나기 때문에 썩을 때 우리 바싹 썩읍시다. 등산하며 썩고 마누라 때문에 썩고 애들 때문에 속상해서 썩고 남편 때문에 속상해서 썩고... 마, 바~싹 썩읍시다!

사람이 우는 이유가 뭔지 알아요? 자기의 헛된 환상이 깨진 것 때문에 속상해서 울어요. 자기의 틀, 세상을 보는 틀이 깨어졌기 때문에. 자기 틀대로 뭐가 되어야 되는데 틀에 안 맞는 일이 벌어졌거든요. 그 때문에 내 틀을 어느 놈이 깼노? 해가지고 속상한 거예요.

그 틀은 무어냐? 자기 장기, 자기 자랑, 자기 우등함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틀이거든요. 그것이 깨어졌다는 것은 뭐냐면 졸지에 나는 죄인 되니까. 죄인 되었다는 말은 나는 살만한 가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게 억울해서 미치는 거예요. 그래서 우는 거예요. 그래서 여자들이 불행스럽게도 이 땅에서 더 오래 살아야 되요. 제대 못하고. 고생 한번 싫 컷 해 보아라. 그래서 평균 수명이 길어요. 남자라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떠나야 되는데 떠나지 않고 밍기적거리며 미련을 둔다는 것. 미련 때문에 눈물이 더 많잖아요. 눈물이 많다는 것은 그 만큼 미련이 많다는 것입니다. Don't cry for me, Argentina 아르헨티나 나를 위해서 울지 말아라. 나는 떠나 간다 이 말입니다.

‘(고후 4:17)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누가 이루십니까? 주께서 이루십니다.
‘(고후 4: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돌아보면 아무것도 우리 목표점이 우리 뒤에는 없다는 말입니다. 지나고 나면 우리에게 없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가야될 길이 끝이 있다 달려할 길인데 보이지 않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보이지 않는 것이 여러분을 당기고 있습니다. 여러분 속에 들어가서 보배로서 당기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니님 아버지, 우리자신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분명히 알아서 세상 때문에 낙심하는 일이 없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9-11-12 17:48:41 녹취 : 조현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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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633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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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