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하나님이셨고 나는 나였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셨고 나는 나였다.
이름 : 이미아(IP:58.72.145.22)
하루도 빼먹지 않고 하는 일이 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하는 일이 있다.
그것은 거울 앞에 서서 화장을 하는 일이다.
화장을 하면서 느끼는 것은
위장 되어지는 사람의 얼굴이다.
분첩으로 분을 발라 얼굴을 두드려가는 그 쾌감.
자신을 다른 사람 만들어가는 그 쾌락.
화장을 하기 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가 없다.
자기를 감출수만 있다면 인간은 무슨 짓이든 할 것이다.
맨 얼굴이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 그 습관적인 위장 앞에서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서 위장 되어져서 살아가는 그 습관적인 본성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렘22:21).
너무도 익숙한 우리들의 위장술.....이미 그 위장술은 "나"라는 본질이었다.
세상은 처세술에 강한 사람들이 성공하고 대우받고 인기를 끌고 힘이 모아지지만
교회는 위장술에 강한 교인들이 성공하고 대우받고 인기를 끌고 힘이 구축되어진다.
우리는 위장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속이면서 산다.
그것에 속을 하나님이 아니지만
인간의 생각은 어리석게도 자기 생각을 믿고 살기에 그것이 통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속이면서 산다는 것은, 직접적인 어떤 생각과 행동을 하며 속인다기 보다는
자기들의 삶에 충실하게 살아가고 있는 그것을 말하고 싶다.
정말 열심히 자신들의 삶에 충실한 자들이다.
한 달이, 일주일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정도로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그것이 왜 하나님을 속이면서 살아간다고 말할수 있겠는가만은
분명히 하나님을 속이면서 사는 행위이다.
하나님과 인간은 결코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처럼 오늘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시고 인간은 인간의 일을 하면서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물과 기름처럼 아무리 해도 섞이지 않는 그 답답함과 막막함이
문득 너무도 무섭게 덮쳐왔다.
왜 덮쳐왔을까?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나는 "나"이기 때문이다.
본래부터 하나님은 하나님이셨고 나는 나였다.
빠른 세월의 흔적은 죽음이라는 소용돌이 안으로 빨려 들어가게 하고
그 현실이 무섭도록 토해내도록 한다.
나는 이렇게 나의 일만 하다가 가는구나......
인간이 죽는다는 것 말고 지극히 현실적인 일이 또 있을까?
죽는다는 것만이 현실이요, 나머지는 다 환상일 뿐이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원욕이 그치리니 이는 사람이 자기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자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라.....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12:1-8).
죽음이라는 고귀한 선물을 통해서 예수님이 눈 앞에 밝히 보여진다.
물과 기름같은 관계인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예수님은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셨고 생각하게 하셨고 쳐다 보게 하셨고 불러 보게 하셨고 관심있게 하셨다.
예수님은 오로지 자기라는 한 길 외에는 없는, 자기들의 삶에만 관심두며 자기들의 영역이나 확장하며 살아 왔던
우리들을 이끌고 가셨다.
일 많고 말 많았던 그 길고도 긴 여정을 한 번도 포기함이 없이 한 번도 홀로 내버려둠이 없이 우리들을 이끌고 가셨다.
지금껏 내가 산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 안에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주인이신 그 천국에 내가 갈 수 있는 것도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내 안에 사셨기에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나라에 예수님이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을 들러리 삼아서.......
이러한 고백을 우리에게 토해내도록 예수님은 영원히 변치 않을 일을 감행하신 것이다.
보이는 사랑으로, 보이지 않는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 그 예수님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지 않고 자기들의 삶에만 정신 팔려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을 속이는 행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인간은 그 무엇을 해도 자기 밖에 모르는 존재로 끝나고
예수님은 그 무엇을 해도 십자가의 사랑으로 끝난다는 것을!!!
우리가 죽는 다는 것을 생각지 않는다면 아무런 낙이 없다.
저주 받은 현실은 화장발로는 감추어지지 않는다. 감당조차 할 수 없다.
자기가 볼 때에도 혐오스러운 자기 얼굴에 핀 시커먼 기미가 다 드러나야 한다.
죽음이라는 것으로 낙관주의나 비관주의나 허무주의를 조장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죽는다는 것으로 삶의 용기를, 삶의 목적을 가지고 살았다고 한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빌1:21-23).
주님이 주신 현실을 인정하며 사는 것이 삶의 용기를 주고 삶의 목적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삶의 목적을 따질 겨를도 없이 주님이 배치시켜 놓으신 현실을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확실한 죄인들이라는 사실만 증거되어지는 그 현실을------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살든지 관심 없고 예수님이 하신 그 일과 지금도 하고 계시는 그 일에만 관심 있으신 그 현실을-----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이 세 분이 속닥거리시는 그 일을 인간이 관여할 수 없다.
우리는 지 맘대로 사는데 결국엔 속닥거리신 그 일을 하셨다는 것을 내놓도록 하시는 것이다.
감히 땅엣 것 밖에는 모르는 인간인 주제에 삶의 의미를 찾고 삶의 목적을 찾으며 산다는 것. 얼마나 시건방진 일인가.
속된 말로 얼마나 겁대가리 없는 짓인가.
이근호(IP:220.♡.122.170)
07-05-10 06:57
화장을 하든, 뭘하시든 열심히 사시면서도 하나님을 잊지 않고 사시는 것이 놀랍기만 하네요. 사람이란 생활에 바쁘면, 하나님 생각 안하는 법인데...
참으로 믿는 생활을 하는 자라면, 비록 아무리 분주해게 행함 생활을 해도 상관없이 '믿음'이라는 하나님 나름대로의 하나님의 일은 그 사람 속에서 맹렬하게 작동하는 법이니, 바쁘다는 것을 핑계로 하나님 생각 안했다는 흔히 주장들은 이미아 성도님의 경우와 대조헤 놓고 보면 거의 거짓말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