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마 10:16-23 (전도자의 수난)
Re..마 10:16-23 (전도자의 수난)
이름 : 이근호(IP:)
전도자의 고난
2003년 8월 17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10:15-23
10: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10:17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 하리라
10:18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10:19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10: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10:21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10:22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0:23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오늘날 과연 예수님께서 염두에 둔 교회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교회가 이 세상 속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버티는지를 알고 계십니다. 그 내용이 바로 오늘 본문에 담겨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교회 나올 때, 남들로부터 위로받고 사랑받기 위해서 나옵니다. 물론 약간의 행운이나 축복도 은근히 노리고 오지요.
그런데 이런 기대감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되어 있는 교회의 모습과 너무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예언을 잘못하신 겁니까? 아니면 오늘날 인간들이 엉뚱한 교회를 세워놓고 교회라고 우기는 겁니까? 설마 예수님께서 실수한 것은 아니겠지요.
그렇다면 지금 인간들은 엉뚱한 곳에서 교회를 세워놓은 것입니다. 사람들이란 자신이 가능한 것만을 겨냥하면서 움직입니다. 그렇게 되다보니 구원이라는 것도 자신이 가능한 것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하나님도 일부 도와주시고, 자신도 일부 협조해서 그래서 온전한 구원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구원이란 전적으로 예수님의 힘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인간들은 도저히 못해내는 것이 구원받는 일입니다. 왜 인간은 구원에 불가능할까요? 그 일부를 오늘 본문은 소개하고 있습니다. 21절에 보면,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교회에 나올 때 나름대로 뭔가 얻겠다고 나오는 인간들에게 예수님은 이런 식으로 교회를 정립해 버립니다. 진정 예수님의 사람이냐? 그렇다면 이런 일을 당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겁니다. 사람들이란, 자신의 힘으로 구원되지 않고 하나님의 힘으로 구원된다는 공식을 대단히 좋아들 합니다.
하지만 이 때부터 그 사람은 왜 자기의 힘으로 구원되지 못하는가를 알아가야 될 남은 여생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차마 자진해서 들어 설 수 없는 험악한 시험의 환경 속으로 성도를 집어넣습니다. 그렇게해서 비로소 인간은 자기 힘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됨을 명백하게 하시려고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꼭 이런 식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십니까? 이 점에 대해서 오늘 본문에는 2개의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이 2개의 단어를 가지고 충분히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18절에 나옵니다.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증거'라는 단어에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또 다른 중요한 단어는 23절에 나옵니다.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여기서는 '인자'라는 말이 나옵니다.
자.. 이 2개의 단어를 서로 연결시켜 봅시다. 즉 예수님은 성도를 뭘로 보느냐 하면, 예수님의 인자(人子)되심을 증거해야 하는 증인으로 뽑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흔히 사람들이 교회를 찾는 이유는, 자기에게 이득이 돌아올 것을 기대하고 찾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친히 예언하신 교회상은 그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인자되심이 이 세상 한가운데서 증거하라고 주님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인자라는 것이 뭘까요? 다니엘 7장에서 보면, 인자라는 분은 하나남과 함께 계신 분이신데, 마지막 때에 구름타고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백성과 아닌 자를 날카롭게 구분짓는 분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백성의 나라를 영원한 제국으로 만들고 그렇지 않는 자들은 지옥불에 넣어버리는 작업을 하시는 분이 바로 인자입니다.
그런데 이 인자 되시는 예수님을 자진해서 증거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예수님께서 인간으로서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행하셔서 그 사람을 성도되게 하셨습니다. 그 위력이 어느 정도가 하면, 17-18절에 보면 나옵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 하리라" 여기서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받겠다는 사람은 모조리 다 차단되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금 말씀드립니다만, 구원이란 자기 능력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가능한 일을 성도에게 덧입혔습니다. 이 점이 보다 분명해지기 위해 하나님께서 성도들로 하여금 도저히 극복될 수 없는 환경 안으로 집어넣게 됩니다.
자... 과연 이런 형편에서 성도는 어떤 마음 가짐을 가져야 할까요? 어떤 목사님께서 자기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제가 이 교회를 은퇴하고 나서도 이 교회는 저의 남은 식구를 챙겨줄 의무가 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일반 세상 기업체에서 설립자가 오랫동안 그 회사를 위하여 희생, 봉사했다면 그 회사는 그 설립자의 남은 인생을 책임 질 필요성이 있다는 점에 있어 상식선에서도 충분히 동의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라는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란 사람을 의지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란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한 일 속에 놓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목사님은 그런 소리를 해서는 아니됩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여러분, 저는 인간들이 감히 행하지도 못한 것에 마음을 두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더 소원이라'고 했습니다. 어서 몸을 떠나 주님을 뵙는 것이 유일한 소망이라고 했습니다. 저도 사도 바울처럼 살고 싶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교회란 인간의 능력으로 불가능한 힘이 작용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흔히들, 오래 살아남으면 축복이요, 일찍 죽으면 저주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에게 그것과는 정반대입니다. 살아남은 자는 천국에서 쉬는 자보다 훨씬 고생스럽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왜 우리 인간들은 이런 생각을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이 생리요 또한 그 속에서 태어나고 자란 우리들의 생리입니다. 전도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말씀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싶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보고싶습니까? 인간의 생각이란 기껏해야 항상 자기 이득만 챙기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전도에서도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실시하십니다.
오늘 본문, 19-20절에 보면,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무엇이 우리 의견을 말하는 것인지 무엇이 성령께서 하시는 일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란 기본적으로 마음 속에 우선 순위를 정해놓고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삶이냐에 대해서 마태복음 6:33절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언급하신 적이 있습니다.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마음의 우선 순위를 살핀다는 것이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어떤 부자의 경우를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청년은 자기 딴에 하나님을 배려해 준다고 최선을 노력을 다 한 사람이 나옵니다. 하나님 말씀을 어릴 때부터 충실하게 지켜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21-22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찐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천국은 이로서 이 청년에게는 바이 바이가 되었습니다. 성령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죄와 아울러 오로지 예수님의 공로만으로 구원받음을 확실히 고백케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받은 자의 특색입니다. 성령님께서도 인간의 불가능성을 확실히 들추어내십니다.
따라서 자기 힘으로 구원받고자 하는 자도 교회에서 탈락이요, 자기 힘으로 구원받지 못하겠다고 낙심하는 자도 교회에서 탈락입니다. 이 점을 사도 바울이 잘 알고 있기에 빌립보서 4:12-13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즉 인간이 도저히 할 수 없도록 하시면서 하나님의 일은 진행되는 것입니다. 분명히 인간은 자기 방어와 자기 이들을 먼저 챙기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바로 이런 것들이 죄악임을 지적하시면서 하나님의 일을 성사시킵니다. 이것이 전도자가 보여주는 진정한 '자유'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우리 예수님께서 치밀하게 짜놓으신 계획대로 모든 것이 움직여지는 것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그 계획에 우리 자신도 놓여 있음을 확신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