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의 전달구조 4-b (이근호목사/030513)
복의 전달구조 4-b (이근호목사/030513)
이름 : 오용익(IP:59.3.201.208)
(4-a에서 계속)
누가복음 2장에 보면 크리스마스때에 잘쓰는 구절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중에 평화로다.” 하나님이 기뻐하셔서 뽑아낸 사람들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요한복음의 주제가 무엇이냐 하면 내가 이 세상사람들을 전부다 다 사랑한 것이 아니고, 이 세상 사람들 중에서 내가 따로 뽑아서 내 사람으로 찾아낸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을 봅시다. 칼바르트는 여기서부터 시작해서 자기 신학을 정립했어요.
(요한복음 5:20,21)
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여기에 보면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그 다음에요.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지요?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하! 이것이 왜 칼바르트로 하여금 완전히 쇠뭉치같은 큰 종에 뜅! 하고 한방 머리를 얻어 맞은 것이 되었나요? 그전까지의 신학은 - 칼빈도 그렇고요. - 예수는 별로고요.
예수는 저리가고, 나, 인간. 하나님은 하나님. 우리끼리 정리할것 정리하고, 해결볼것 해결하자는 쪽이에요. 아까 그 할머니처럼이요. “하나님! 믿습니다. 그 밖에 것은 나는 몰라요. 들으면 다 잊어버려요.” 예수는 빠지고 하나님과 인간사이에서 해결할 문제라 이말입니다. 예수는 단지 중보자로서 우리가 미흡한 것을 도와주고 후원해 주는 것 뿐이라는 이런 생각들을 해 왔었는데, 그것 전부가 다 인간들이 만든 종교였다는 거예요. 종교!
이것은 칼바르트 자신에게 하나의 혁명이었어요. 이것은 정말 수십시간을 걸쳐서 설명하고 강의해도 결국 사람들은 잘 안받아 들이려고 해요. 어떻게 해서 우리가 아들까지만 멈추느냐? 아들에서 더 나아가서 하나님까지 나가야 한다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래서 제가 그렇게 이야기 했지요.
“구약의 제사장 제도는 그게 아닙니다. 제사장까지만 가고 거기서 하나님께로 가는 것은 제사장몫입니다. 다른 사람은 들어가지도 못하고 갈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안’까지만 갑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만남은 예수님의 몫이지 우리가 할 권한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에 보세요. 어린양보좌에까지만 갑니다. 그 다음부터는 예수님이 하실 몫이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아무리 설명해줘도 그것이 이해가 되지 않아요. ‘예수는 그저 우리의 후원자. 치고 빠지는 분. 고맙다는 인사만 받고 뒤로 빠지면,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과 직접 상관하고.’ “옛날에는 우리가 성령 못받아서 능력이 없어서 율법, 말씀을 못 지켰는데 이제는 예수님께서 용서해주시고 성령 내려주셔서, 말씀을 직접 순종하는 인간으로 변화되었기에, 이제는 예수도 빠지고 성령도 빠지고 뒤에서 도와주셔서 말씀을 지키는 위치에 놓여 있다. 그것이 인간승리 아니겠는가!”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것이 바로 잘못된 인간의 종교심리에서 나왔다는 거예요. 인간이 신이 되고자 하는 그 본성의 연속성이라는 거죠. 본성의 연장. 여기서 연장이란 확장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계시고 인간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이것도 부수고(인간), 인간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도 부수라는 말입니다. 왜? 인간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가짜니까.
돌연히 출현한 예수님을 통해서 양쪽을 새로 연장 곧 확장시키는 거예요. 뭐는 뭐답게? 하나님은 하나님답게. “나를 본자가 아버지를 보았다.”(요 14:9) 어떻게 아버지를 보느냐? 예수님을 통해서 새로운 아버지가 여기서 시작이 되고, 새로운 인간, 새로운 피조물도 여기서부터 새롭게 출발하는 거예요.
그러면 뭘 버려야 돼요? 이걸 버려야 되죠. 인간이 있고, 그다음에 하나님이 있는데, 옛날에는 제대로 인간 못되어서 율법을 못지켰는데, 이제는 율법지키겠다는 이것을 버려줘야 되죠. 이것을 버려주고, 오직 우리는 예수한테 미쳐버려야죠. 예수님의 은혜로 다 하시는 거죠. 예수님의 의로 다하시고. 우리는 하나의 껍데기로서 예수님의 의를 담는 껍데기에 지나지 않죠.
제가 이렇게 주장을 하니까 어떤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이근호 목사의 신학은 ‘예수 일변도’다. 그 소리를 듣고는 참 송구스러워서요. 내가 그런 영광을 얻을 자격이 있나? 얼마나 듣고 싶었던 이야기입니까? 사도바울이 그렇게 듣고 싶었던 이야기. “네가 예수에 미쳤구나.” 왜 하나님 있고, 인간 있으면, 예수는 잠시 도와주고 은퇴, 조기은퇴하라는 거죠.
예수 덕분에 우리가 있다는 거죠. 거듭난 우리, 거듭난 이성, 거듭난 감정, 거듭난 의지를 가진 우리가 있다는 것. 예수는 얼쩡거리지 말고 나가달란 말이죠. 이런 본성, 이런 의도 때문에 인간에게는 예수를 잠시 이용하고 마는 겁니다. 재벌총수하고 사귀어야지 재벌 아들하고 사귀면 뭐합니까? 이제 재벌 아들은 좀 비켜나라는 겁니다.
예수를 이야기하면 그것은 다 안다고 합니다. 이미 상 치웠다는 말이거든요. “너희가 예수를 알아? 네가 예수 맛을 알아?” 궁극적으로 이게 안돼요. 마지막으로 이게 제일 안돼요. 예수 이용할거냐? 예수 중심으로 변할거냐. 마지막 선택은 그거예요. 모든 불신자들이, 그리고 모든 불신 신학자들이 - 요즘은 불신자 = 신학자이기에 같이 써도 괜찮은데 - 모든 신학자들이, 공부를 해보면 ‘토마스아퀴나스’를 비롯해서 전부가 다 노리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처럼 거룩하게 될수 있다’는 겁니다.
꼭 선악과를 따먹게 했던 마귀의 속삭임이에요. 성화이론. 세상에 성화라는 것이 어디 있어요? ‘화’가 무슨 뜻의 ‘화’자 입니까? 점차 변화된다는 뜻의 ‘化’ 아닙니까? 무슨 거룩이 점차 변화되는 그런 거룩이 있어요. 그냥 거룩을 입은 것이지. 입었다는 말을 그들이 이해못해요. 제사장이 제사할 때 옷을 입어요. 옷입을때 팔 하나만 끼고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을 통째로 입어 버렸어요.
안은 죄인이고, 바깥에는 주님의 거룩이고 그런거예요. 거룩이. 그걸 이쪽 끼우고 하는 식으로 뜨개질합니까? “야야! 팔은 아직 못 짰다. 네가 알아서 짜라” 그런 식입니까? 거룩은 그냥 입는 거예요. 방탄조끼 입듯이 그냥 입는 겁니다. 그게 거룩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한 바가 그렇다는 말이죠.
하나님께서 화목제물을 드릴때는, 차츰 차츰 화목하는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을때 이미 그순간 의롭게 되었어요. 의롭게 된 이상은 오늘 죽어도 영광스럽게 됩니다. 하늘의 영광을 입어요. 우리는. 교회는 이겁니다. “어떤 인간이든 다 오너라. 다 죄인으로 만들어 버릴테니까. 이 세상의 어떤 인간이든 오너라. 다 용서해 줄테니까.”
교회는 용서하는 곳이에요. 새삼스럽게 인간 만들어 내는 곳이 아닙니다. 인간 만들어도 인간 되는 사람이 없어요. 죄인을 용서해서 의인되게 하는 곳이 교회죠. 용서를 받을라 치면 자신이 왜 하나님의 원수인줄을 알아야죠. 원수를 알려면 아무리 할머니든 할아버지든 ‘자기의’의 정체를 알아야죠. 그 자기의의 정체가 뭡니까? 이방인들에게는 뭐가 남아 있어요? 더러워 썩어질 양심때문입니다. 양심!
양심의 원조가 누굽니까? 가룟유다 아닙니까? 가룟유다. 세상에 자기 양심 때문에 자살하는 인간이 누가 있습니까? 양심에 따라서 자살하는 사람을 구경하고 싶으면 일본에 가면 많아요. 일본의 사무라이들, 어떻게 죽습니까? 할복자살 하잖아요.
일본의 가미가재 군대에 갈 때 집에서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그 남편이 조국을 위해서 목숨바친다고 남편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서 미리 죽는다고 여자들이 칼 들고 자살하잖아요. 내가 죽을테니까 마음놓고 조국을 위해서 싸우라고. 여자들이 남자 못되어서 환장했어요. 제가 계백장군 부인인가? 그것이 옳은 일인줄 알고.
소위 남자들은 어릴때부터 가정에서 대대로 쇠뇌를 받습니다. 쇠뇌를 받아서 결혼때도 자기부인도 그러려니 하고 결혼했지요. 결혼하고 보니 자기가 생각한것과 반대가 되어 있죠. 세라토닌이 나오는 때인 6개월은 목숨바친다는 식으로 사랑하죠. 세라토닌의 효력이 6개월밖에 안가거든요. 그 다음부터는 사랑의 효력이 떨어져가지고 ‘니 누고?’ 이렇게 됩니다.
‘어? 옛날에는 우리 엄마가 우리 아버지에게 그렇게 안했는데’ 이렇게 되니까 자꾸 가정에 갈등이 생기죠. 자꾸 남자는 옛날의 가정에서 배웠던것. ‘여자는 남편을 위해서 항상 장렬하게 죽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세대가 바뀌었으니까 그런 사고방식이 안통한다는 말이죠.
그 호주제 논쟁을 제가 여러차례 보았습니다. ebs에서 토요일에 논쟁하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호주제 누가 옳은가’하는데 유교의 대표자가 하는 말이 있어요. 그 여자 발제자가 무슨 이야기를 하니까 “이혼한기 뭐 말이 많나?” 이럽니다. 니 한번 살아봐라 이혼 안하게 되었나? ‘자기의’입니다. ‘양심!’ 끝까지 남아 있는 자기 무기입니다.
그래서 총신의 어떤 엉터리 같은 사람이 있는데, ‘이한수’인가 그 교수가 말하기를 “이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양심을 새로운 양심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거예요. 양심을 새로운 양심, 곧 선한 양심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선한 양심이란 것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양심이에요. 양심자체를 의로 간주하는 양심은 아닙니다.
(디모데전서 1:18,19)
18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19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도권을 가졌다는 그 양심. 그러니까 타락한 놈은 뭡니까? ‘예수 갖고 되나? 나는 내 양심 갖고 따로 살아야지.’ 그런 놈들이 믿음에 파선한 놈들이에요. 믿을게 없으니까 자기 자신을 믿고, 자기양심을 믿는 거예요. ‘자기의’입니다. 제가 단순히 율법주의를 반대하기 위한 반대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전체가, 오늘 공부하는 이 야곱 전체의 사고방식이 뭐냐하면,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이 있을 때만 그것이 축복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거룩과 의의 관점에서 성경을 보고 세상을 보자는 일관된 사상에서 제 이야기가 나온겁니다. 인간이 얼마나 착해지느냐는 이 관점이 아니에요. 인간이 얼마나 거룩해질수 있느냐 하는 그런 관점이 아니에요.
원래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인간을 만들었을때의 의도대로 인간은 거룩되게 의롭게 해야 되는데, 그 의가 인간에게는 없잖아요. 하고 싶어도 나이 많아지면, 몸이 약하고, 정신력이 희박한데 어찌 합니까? 됩니까? 안되잖아요. 실수하고, 실패하고. 양심! 양심! 하지만 그 양심은 전부 자기 합리화하는 양심 아닙니까?
이쪽의 양심이 저쪽의 동네에 가면 통하지를 않지요. 어떤 동네에 가면 밥먹으면서 “아이고, 반찬 참 맛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 해주는 것이 양심상 좋은 사랑이 되지만, 어떤 동네에 가서 그런식으로 말하게 되면 “그러면 내가 만든 반찬이 맛이 없다는 말입니까?” 하고 문화적차이로 인한 시비로 들려서 그렇게 나올수가 있거든요. 그런것들을 일일이 다 어떻게 할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의와 거룩, 이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땅을 일부러 찾아 오셨습니다. 우리를 꾸짖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것뿐입니까? 아니요! 꾸짖는 것은 꾸짖는 거고, 따라서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지만, 놀랍게도 한보따리의 선물을 가져왔어요. 그게 뭐냐? 먼저! 먼저 화해의 실질적인 효력성. 이것을 우리에게 약속을 한겁니다.
예수님이 대사지요. 하늘나라 대사가 되어서 우리에게 약속을 했습니다. “내 피를 마시는 자, 내 살을 먹는자는 영생을 얻으리라.” 요한복음 6장에서 “누구든지 내 피와 살을 먹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얻을수 없느니라.” 이미 모든 것을 언급했어요.
“어렵도다!”
“가라! 너희들도 함께 가지 왜?”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제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네가 잘나서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그런 소리를 하라고 너희들을 내게 붙여 준것이다 누구든지 아버지께서 오게 해 주지 않으면 아무도 내(예수)게로 올수 없다”
그림하나 그려봅시다. 인간있고 하나님있다. 이것이 지금 우리들의 신학사고입니다. 이 모든게 부서져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보내셔서, 이렇게 생각했던 사람을 부서지게 해서 누구에게로? 오직 ‘예수 중심’으로 모이게 하는 것은 아버지의 역사하심이 아니면 이렇게 될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모인 사람은 예수만 보이지 다른것이 보일 리가 있습니까?
제가 ‘우리교회’에서 장로님 인도 하에 부르는 가스펠송의 가사를 죽 보니까, 가사가 썩 마음에 들어요. 대부분 다들 괜찮아요. 그런데 이런 노래를 기존교회에서 부르고, 그 노래로 찬양을 했다는 것이 이상스러워요. 왜냐하면 분명히 기존 교회들이 이단들인데. 예를 들어서 그런 찬양가사가 있어요. 예수외에는 돈과 명예도 싫다는 내용의 가사. 집회하고 부흥회할 때 오직 예수만 좋다는 그 노래를 강단에서 기타치면서 불렀잖아요.
그렇게 불러놓고서 그 다음에 나오는 설교내용은 왜 그 노래 부른것 하고 반대로 나오냐는 말이죠. 결국 그사람들이 단지 노래부른 그 선교단체를 살짝 이용만 했죠. 인간에게 감흥을 주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도용한 것 뿐이고, 그 가사 내용은 전혀 관심없고, 그 다음에 실제적으로 자기 장사하는 용도로 사용하는 것 밖에 더 됩니까?
찬송가 가사 보면 좋은 가사들이 있어요. 물론 되도 않은, 성경의 취지와 맞지 않는 그런, ‘어머니 기도 못잊어 옵니다’이런 희한한 가사도 있지만. 진짜 제대로 된 가사들도 많이 있어요. “♬~주 예수 보다 더 좋은 것은 없네” 아니 무슨 맘으로 그 노래를 부릅니까? 무슨 맘으로. 만약 그 노래부를때 “당신 예수 일변도요!” 그런 욕을 하렵니까?
저와 여러분들의 갈길이 험악한 것은 이런 이유때문입니다. 기존 목사들이 목회를 해 보니까, 전부다 예수 믿는다고 주장을 하지만, 이것은 다 핑계에 불과하고, 진짜 예수 믿는 사람은 잘 안보이더라는 거죠. 안보이더라는 것에서 더 발전하면 “없는것이 정상이다.” 그보다 더 발전하면 “없다! 그러니 예수? 이것은 사기다. 내가 안믿는 예수를 네가 왜 믿어?” 이것은 있을수 없는 것이라는 말이죠.
“나도 예수 안믿어 지는데, 네가 어떻게 예수가 믿어져? 이것은 있을수 없는거지.” 그래서 목사도 예수 안믿고, 교인도 예수 안믿고 다들 예수 안믿는 동네에서 “너도 예수 믿지 말라!”는 거죠. 다 옷을 벗고 나왔는데, 혼자 코트입고 나서 버리면 이것은 웃기는 얘기 아닙니까? 우리는 다들 예수 안믿기로 작정하고 교회 믿기로 작정하고 교회를 나오는데, 혼자 교회에서 예수를 주장하니까 나가라 이말 이에요.
노회도 마찬가지고 어디도 마찬가지에요. 그런 상황에 우리가 놓여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할 일은 역시 변산반도 관광하는 것 밖에 더 있어요(?). “아멘!”(회중). 이미 화목제물 챙겨 놓았겠다. 우리가 언제 구원받겠다고 했어요? 하나님쪽에서 먼저 손길을 내밀어,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됨을 알려주시고, 너 자체에서는 거룩 생산 안되고, 의가 생산될수 없기에, 예수만 의지하고 믿으면, 하나님께서 본인이 약속했기 때문에 - 믿는 자는 의인이 되리라. 모든 죄를 묻지 않겠다고 - 그 약속을 믿고 그 나머지는 간식이나 먹고 집에 가면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복음을, 대대로 오는 분들에게 많은 분들에게 전할수 있는 그 일을 저희에게 맡겨 주옵소서. 우리의 양심상 일하지 말고, 오직 주님께서 상황 주심에 따라서,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전할수 있는 복음에 둘러싸인 껍데기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