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의 전달구조 4-a (이근호목사/030513)
복의 전달구조 4-a (이근호목사/030513)
이름 : 오용익(IP:59.3.201.208)
무안수련회 4 (이근호목사, 2003. 5. 12-13. 전남무안화평교회)
하나님의 원수에 대해서 계속 이야기해 봅시다. 로마서 5장 10절을 보겠습니다.
(로마서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우리가 원수되었을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이렇게 되어 있지요? 다른 말로 이야기 해 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의 의미를 알고 싶으냐?”
“예! 알고 싶습니다.”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원수됨을 너는 인정하느뇨?”
“아니요!”
이러면 그것은 앞뒤가 잘 안맞죠. “‘하나님의 원수됨’을 저는 인정 못하겠습니다.” 한다면 그것은 “당신은 지금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라는 것과 같은 이야기가 되지요. ‘하나님의 아들이 죽은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이기에 돌아가셨는데 이 사실을 인정하느냐’고 묻는 이야기에요.
자꾸 사람들이 ‘내가 하나님을 잘 믿으려고 얼마나 애를 쓰고 있는데,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냐’고 발뺌을 하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원수란 것은 구약적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구약의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 보면 왜 자꾸 값비싼 짐승의 제물을 우리가 보기에 아무런 생산성도 보장되지 않는 것을 그냥 허비하는 것처럼 보일만큼, 애매한 짐승제물을 잡아서 불태우고, 또 불태우는 작업을 매일같이 상번제로 아침에 한번 저녁에 한번, 또 절기때마다 소비하는 겁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하나님의 거룩이 인간쪽에서는 형성되지 않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렇다면 “내가 하나님의 원수된 것을 믿습니다.” 할때에 “내가 볼때 당신은 굉장히 믿음이 좋은 것 같은데 원수는 대체 뭐가 원수란 말입니까?” “글쎄요. 원수라고 하니까 원수라고 하는 것인데 뭐가 원수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는데요.” 이렇게 될 수가 있다는 말이죠.
사도바울은 그 원수됨을 뭐로 보냐면 ‘자기의’라고 봅니다. 마지막시간인데 어려워요. 잘 들어 보세요. 이렇게 ‘자기의’와 ‘예수님의 의’가 같이 있어야 ‘예수님의 의’가 부각이 됩니다. ‘자기의’가 부각된 그 예가 뭐냐 하면, 바리새인입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함께 했던 생활, 그 삼년의 기간에 바리새인들을 통해서 ‘자기의’가 부각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 율법을 가지고 어떻게 자기의를 고수했는가?’ 인간은 자기의를 고수하는 것이 상식이고 본능인데 그것이 뭐가 잘못된 거냐고 물으신다면, 그 ‘자기의’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유발하고, 예수님을 원수관계로 유발한다는 것을 네가 아느냐 이말이죠. 바리새인들을 보면서 그것을 파악하라는 거죠.
제가 이야기가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2장에 가면 율법에서 말미암는 의라는 것이 예수님의 죽음을 헛되게 하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는 거죠.
(갈라디아서 2:20,21)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사람들을 착하게 살도록 만들어 주겠다는 것을 왜 마다하고 뭐라고 하느냐? 율법은 하나님의 뜻이고 그 뜻을 전해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겠다고 가르치는데 그것이 뭐가 나쁘냐?’고 합니다. 그런데 그 율법을 주장하는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헛되게 하기 때문에 그것이 이단이 되는 겁니다.
문구들을 지금 대충 정리하고 있는데, - 사람이 무슨 일이 터지면 거기에 따라서 파생되는 상상력이 동원되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닙니까? - 저는 앞으로 교단이나 노회를 만들게 된다면
첫 번째, 주일성수나 안식일이나 기타 율법을 강조하는 목사는 사양합니다.
두 번째, 교인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교인 위에 군림해서 목사를 위한 교회를 하겠다는 인간은 사양합니다.
세 번째, 노회는 결코 개교회의 재산이나 행정등 기타 모든사항에 간섭하지 않습니다. 이런 등등의 몇가지를 지금 초안으로 적어 놓고 있습니다.
왜 그런 식으로 하느냐 하면, 이것이 한국교회에 하나의 복음 전달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루터처럼 그렇게 개혁할 수는 없고요. 루터는 농민들과 합세해서 사회적으로, 혹은 계층적으로 억압 받는 부류의 사람들이, 그 당시 억압을 가한 봉건영주들이나, 교회의 지도자들이 빌미를 제공했기 때문에 루터의 개혁이 성공할수 있었다면, 칼빈은 개혁에 성공하지를 못했지요.
루터의 성공에 뒤를 쫒아서 그냥 그것의 내용물이나 가져온 것뿐이죠. 지금은 개혁을 위한 개혁은 안되고, 다만 복음증거 차원에서 이런 것을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의 어떤 악한 조건이 복음증거에 일체 지장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자는 말이죠. 악한 조건이 되면 될수록 그것이 복음전파의 멋진 재료로써 활용할 수 있다는 생각을 여러분들이 좀 가져 주셔야 합니다.
나는 부교역자인데 나쁜 당회장과 그밖의 사람들이 나를 이 교회에서 추방했다. 그것을 그냥 묵히지 말고 누가 맞는가 하는 식으로 그것을 대비해서 그 자체를 복음 증거의 재료로 삼으라는 말입니다. 성경에 보면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이야기가 바로 그 이야기잖아요. 여기서 ‘때’를 이야기하는 것은 어떤 경우, 혹은 어떤 상황이 와도 복음증거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디모데후서 4:1-5)
1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하나님의 원수됨이란 것은 뭐라고 했습니까? ‘자기의’라고 했습니다. 공관복음을 포함한 4복음서가 전부, 곧 예수님의 3년 공생애동안이 바리새인들이 추구하는 ‘자기의’ 의해서 예수님이 수모당하고 비난받는 것이라면 공관복음의 해석은 다 끝난겁니다. 사도바울의 신학을 역으로 여기에다가 집어 넣으면 된다 이말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정리한 책이 ≪바울과 예수≫라는 책입니다. 그 책을 제가 요약했지요? 왜 ‘예수와 바울’이 아니고 왜 ‘바울과 예수’ 인가? <융겔>에 따르면 그것은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했던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의 내용은 사실은 먼저 기록된 사도바울의 사상으로 예수님의 행적을 재조명한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의 사상은 뭐냐? 오직 예수님의 의만이 참된 의고, 인간의 행함에서는 안된다는 그 정신으로 복음서를 다시 보자는 겁니다. 그래야 비로서 하나님의 나라가 의의 나라인것이 보인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얼마나 괜찮은 책이에요. 이화여대출판사에서 나온 책이죠. 그 책을 제가 소개해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을 설교할때에 ‘너무나 질린다’라는 그런 심적인 부담에서 벗어나세요. 이 두가지를 끄집어 내면 되지요. ‘자기의’ 끄집어 내고, ‘예수의’ 끄집어 내서, 이 ‘자기의’가 가만히 있으면 괜찮은데 가만히 있지 않고, 꼭 예수님의 의를 핍박하는 성향을 발휘합니다. 아직 악마는 등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나중에 나옵니다.
다만 인간들 차원에서 예수님도 인간으로 오셨고, 이들도 인간이니까 인간들 차원에서 이런 갈등이 유발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이 거룩이고 무엇이 거룩이 아니냐’ 하는 그점 때문에 유발된다는 거죠. 모든 것이 다 그래요. 모든 것이. 마태복음 8장에서도 “백부장의 믿음이 좋다”는 그것으로 끝내면 좋을 텐데요.
그것으로 끝내면 예수님이 얼마나 칭찬받고 사랑을 받겠습니까? 꼭 뒷말을 붙여가지고 사서 욕을 얻어 먹어요. 뭐냐하면, “그러나 하나님나라의 본 자손은 바깥 어두운데 쫒겨나서 울며 이를 갈리라.” 왜 이런 쓸데없는 소리를 해가지고, 이것이 빌미가 되어서 수모를 당하고 핍박을 당합니다. “너만 좋으면 좋다고 하지 왜 남까지 이단을 만드느냐?”라는 식이 되어서 결국에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잖아요.
성경은 꼭 이렇게 그들의 이야기를 다 해놓고, “그런데 그것이 아니올시다” 하면서 “예수님 자신의 의가 이것을 이깁니다” 하는 식으로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복음이 죽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성경을 보실 때 이런 틀을 가지고 보시면 공관복음 해석은 다른 틀, 다른 범주가 없다고 확신해도 좋을 겁니다.
왜 그렇게 확신합니까? 사도바울과의 연관성 때문입니다. 사도바울도 예수님이 가르쳤고, 마태, 마가, 누가, 요한도 예수님이 다 가르쳤기 때문에 같은 예수 안에서 같은 사상이기 때문에 서로 연결되어야 그것이 지당하고 마땅한것인데 거기에 대해서 하는데 기죽을 필요없어요. 당연한 것을 하고 있기에 기죽을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자 하나님의 원수됨에서 약간 난해한 것이 있습니다. 조금 더 봅시다. 로마서 5장 10절에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되었을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여기까지 보게 되면,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못견디고 치어서 죽게 되었다고 이해하기 쉬울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자기 행동에 대해서 후회하는 거예요.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대목을 지나고 있습니다. 특히 교인들 가운데 그런 교인들이 있으면 참 곤란해요. “내가 예수를 죽였다. 내가 죽였다!” 굉장히 가상해 보이고 억수로 믿음 좋아 보여요. 그런데 가만히 그사람의 평소의 행동을 보면 남들에게도 그래요. 조금만 남에게 잘못된 행동을 보이면 그걸 가슴에 품고 계속 후회로서 후회하면서 하루를 다 보낸다는 말이죠.
그리되면 그것은 기쁜 소식이 아니고, 예수 죽인것에 대한 책임추궁 때문에 슬픈 소식이 되어 버려요. 로마서 5장에 보면 뭐가 나오냐 하면 ‘화목제물’이 나옵니다. 화목제물을 알아야죠. 화목제물을! “나같은 년은 죽어야 돼!” 그것은 자기 고집이고 일종의 자기 완벽주의고 자기선함에 대한 다른 우회적인 표현에 불과한 거예요. 왜 하나님이 제시한 선물을 왜 거절합니까?
“나는 이런 선물을 받을 자격도 못돼요.”
“그렇습니까? 그럼 받으세요.”
“자격 안된다니까요.”
“그런 마음 같으면 받을 자격 됩니다. 받으세요.”
“어허이! 안된다니까요!!”
그것은 무슨 똥고집입니까? 그게! 무슨 그런 자존심이 다 있습니까? 예? 남들 보면 속아 넘어가겠네. 사람이 잘못하고 실수한 것을 용서해 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따로 선물을 마련했는데, 그 선물보따리까지 거부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진짜 악마의 모습이 아닙니까? 가롯유다가 어떤 사람인가요? 가룟유다가 양심대로 산사람입니다. 오늘날 가룟유다 같은 그런 공직자, 그런 성직자 있으면 나와보라고 하세요.
자기가 저지른 실수에 대해서 자기가 죽음으로 책임지겠다는 사람. 전에 크로스 빌리지에 보니까 그런 사람이 있데요. 자기 잘못을 본인 스스로 책임지겠다는 사람이 나오데요. 애고 뮈서워라! 그러면 가룟유다가 최고의 원조가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왜 자기 자존심때문에 거부하느냐 이말입니다. 자기 부인이 안되요. 자기 부인이. 자기 마누라는 되는지 모르겠지만 자기 부인이 안되잖아요.
성경을 보면서 특히 이 전라도 사람들 참 순박하잖아요? 순박해서 인간관계는 좋을수 있는데 그 순박이 자칫하면 화를 자초할수가 있어요. 너무 순박해서 남에게 피해 입히는 것을 성질상 못참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면 안돼요. 주님께서 우리를 껍데기로 사용하시기에 좀 뻔뻔 스럽지만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그대로 받아 들이세요. 사랑이니까.
‘화목제물’이 뭐예요? 먼저 저쪽에서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잖아요. 내가 화해한다면서요. 화목제물이 뭐예요? ‘레위기’에 보면 3가지 제사가 나오는데 제일 먼저 번제가 나오고, 속죄제가 나오고 그 다음에 화목제가 나오죠. 속죄제는 속건제와 구분해서 더욱 세분화되죠. 번제와 화목제는 인간들쪽에서 모세율법에 의거해서 바치는 겁니다. 그러나 화목이 되게하는 것은 백성들 수준이 아니고, 이것은 하나님과 제사장 관계로 합의해서 주어지는 거예요.
이 제사장이 오늘날 누구냐 하면 오늘날 대제사장 예수님이에요. 이 화목제물은 누가 먹 느냐 하면 제사장을 앞장세워서 온 백성들이 같이 먹어요. 이미 이 제사제도 속에서 속죄제 먼저 드리고 번제 드리면서 이 거룩하지 못한 세계에 죄에 대해서 책임을 추궁해요. 그런데 거기서 그치면 안된다고요. 뭐냐? 화목케 하시는 것까지 해야 돼요.
잘 들어보세요. 이것을 구약의 사도 바울서신이라고 해 봅시다. 그러면 구약에서 공관복음은 뭡니까? 바로 우리가 배우는 창세기라는 겁니다. 아시겠어요? 이 사상을 가지고 어디에 집어 넣는다? 창세기에다 그대로 집어넣으면 오케이 이말이죠. 뒤에 나오는 해석은 앞에 나오는 해석을 좀더 구체화 세밀화 시키기 때문에 앞에 나오는 것은 뒤에 나오는 해석에 의해서 해석되어져야 한다는 거죠. 그러면 뒤에 나오는 것의 그 해석의 바탕은 뭐냐? 그것은 앞에 있는 것이다 이말이죠.
이것을 제가 아주 어렵게 이야기 해서 ‘창조는 구원의 시작이요, 구원의 완성이다.’ 이것은 완전히 선문선답이죠. 중국의 선불교 비슷한 이야기 같이 들리는데.
(질문) “창세기 1장도 다 그런식으로 봐야 합니까?”
(답) 그렇게 봐야 합니다.
원불교처럼 시작과 끝이 만나잖아요. 창세기하고 요한계시록하고 손을 맞잡잖아요. 뱀이 뱀을 무는 것처럼. 뱀이 뱀을 무는 것을 꿈을 꿔서 화학의 어떤 구조를 발견했다는 과학에서 믿기지 않는 그런 전설도 있어요. 그 과학자가 하도 그 화학구조 때문에 고민 고민하다가 꿈을 꾸었다죠.
꿈에 뱀 여섯 마리가 꼬리를 서로 물고 무는 장면을 보고서 ‘저거다’ 해서 벤젠의 이중구조라는 것이 있는데 그 해답을 찾았다는 이야기인데 지금은 거짓말로 보고 있어요. 또 거짓말중에 두가지 거짓말이 더 있는데 하나는,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뉴튼이 만유인력을 발견했다는 것.
그것도 거짓말이고 또 하나는 갈릴레오가 피사의 사탑에서 낙하실험을 하기 위해서 물체를 떨어뜨렸다는 것도 거짓말입니다. 온천하가 다 진짜인줄 믿고 있죠. 지구는 지금도 돈다고 했다는 그것도 네 번째 거짓말이죠. 그런말 한적 없습니다. “살려만 주이소.”라고 했죠. 자끄엘룰은 그런말을 인용했지만 그것은 후대사람들이 계속해서 교회에 대항하기 위해서 갈릴레오를 일종의 도구로 이용해 먹은 거지요. 대체 누구의 말이 맞는지 믿거나 말거나죠. 그것이 중요한 문제는 아니니까요.
자! 하나님의 원수되었다고 했는데 조금 더 어렵게 나가 봅시다. 그러면 목사님 말씀대로 ‘내 죄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구나 나는 참 별 볼일 없는 인간이구나’라는데서 그치면 안된다는거죠. 그러면 가룟유다처럼 되니까. 그렇게 만들어 놓고 그 다음에 그 원수된 자에게 주시는 화목제물 주심을 받자 이말이죠.
그렇다면 ‘하나님의 원수가 뭐냐?’ 하는 것은 화목제물을 분석함으로써 알게 돼요. 이것이 이제 논리상 머리가 나쁜 사람은 잘 감이 안오는 것인데요. 하나님의 원수 되었기 때문에 원수된 자를 위해서 화목제물을 주었다면 “아이고! 감사합니다” 그걸로 그칠일이 아닙니다. 지금 뭐가 안되냐 하면, “내가 왜 하나님의 원수입니까? 내가 얼마나 착하게 살려고 애쓰는데 나같이 착한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하세요” 라고 하거든요.
화목제물이란 선물 보따리를 풀어보면 거기 뭐가 들어 있어요? ‘아하! 내가 하나님의 원수일 수밖에 없구나’ 하는 내용물이 거기 담겨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나에게 소포를 보냈는데 앞의 표지가 ‘너는 원수된 자다!’ ‘헉! 내가 하나님의 원수된 자인가!’ 뒤표지를 보니까 ‘내가 화목케 해서 예수님의 의를 보낸다’ ‘아이고! 감사하게도! 그러면 그 안에 무엇이 있을까?’ 뜯어 보니까 뭐가 나옵니까?
요한일서 한번 봅시다. 지금 화목제물을 그런 식으로 정리해놓은 논문이 없어요. 있는지는 확실치 않은데 제가 본적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화목제물이 상당히 어려워서요. 요한일서 4장 10절을 봅시다.
(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제발, 착한체 하고요, 양심고운체 하는 그것은 주님앞에 아무 소용이 없어요. 오히려 자기 신앙을 막을 뿐입니다. 특히 촌에 사시는 할머니들. 저도 박사교회에서 경험이 있지만. 아이고 얼마나 양심들이 고운지.
“제가요. 성경은 몰라도 목사님의 말씀은 무조건 믿습니다.”
“할머니! 목사 말 듣지 말고 성경보세요.”
“아이고. 이 나이에 내가 뭘 알리요. 그저 목사님! 시키는대로만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아이고! 몰라요.”
“예수도 모르면서 무슨 세례를 받습니까?”
줄수도 없고 안줄수도 없고. 성경은 안배웠대요. 성경을 배우라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이 누구냐는 거죠. 모른대요. 들으면 다 잊어버린대요. 세상에 예수도 모르는채 천당에 가겠다니. 왜 그러냐 하면 양심이 고와서 그래요. 쉽게 말해서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 이 못난 배우지 못한 할머니는 그저 주의 사자 목사님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양심 하나 슬만합니다.” 그 소리에요.
바리새인들이 보면 무지 좋아할 사람입니다. 또 ‘자기의’라. 할머니식의 노인다운 ‘자기의’죠. 그리 보면 참 목회자로서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죠. 이상적인 교회를 구상했는데, 이상적인 교회는 안되고 이상한 할머니들만 찾아오고. 배우는 것은 다 잊어버린다고 하죠. 남 세례받으니까 자기도 받는다고 하죠.
교회에서 남 챙기는것은 다 챙기려고 하고요. 남 떡먹으면 자기도 먹겠다고 하고, 포도주 마시면 한잔 더 달라고 하는 식으로 먹고 싶어 하죠. 그놈의 착한 양심은 끝까지 가니. 하나님앞에 내놓을 것은 정화수 떠 놓을수도 없고, 내놓을 것은 양심 하나 뿐이니 하나님의 원수됨을 어떻게 아느냐 말이죠.
요한일서 4장 10절에 보면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냈다” 고 합니다. 화목제물의 내용이 뭐냐하면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 그 사랑은 무슨 사랑이라고요? 두가지를 겸해서 보여주는 사랑이라는 겁니다.
무슨 두가지?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을 사랑한 적이 없다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그 보답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한것이 아니라는 점. 우리가 하나님을 너무 순수하게 찾으니까 그 점이 가상하고 너무나 대견스러워서 착하다고 그 보답으로 하나님의 응답이 나타나서 우리에게 온 사랑이 아니라는 말이죠.
이것을 오늘날 소위 배웠다는 불신자 교수들, 김용옥부터 해서, 천주교신부들 이것을 몰라요. 이것을 모른다니까요.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것은 뭡니까? 그것은 너 자신을 사랑한 거예요.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고 빙자한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싶은 거예요. 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건데요? 그야 자기 구원받고 싶어서죠.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그것을 빌미로 해서 내가 사랑받고 싶어서죠. 그것은 화목제물이 아니에요. 그것은 원수에요. 하나님의 화목제물을 모독하는 원수라니까요? 내가 나 사랑해서 내 구원받고 싶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도용하는 것은 자기 사랑이지 자기부인이 아니라는 말이죠.
성경은 말합니다. 화목제물에 미쳐라! 네 구원에 미치지 말고, 영생 받는일에 미치지 말고, 화목제물이라는 그 대상자에게 미치라는 겁니다. 예수한테 미쳐버려라. 예수믿는 너에게 미치지 말고! 이것은 인력으로 되지를 않습니다. 정말 이것은 되지를 않아요.
구약의 제사법에 보면 하나님이 바른 향을 드렸을 때 응답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바른향이란 뭐냐? 제단에서 나오는 불로 지피는 향을 드릴 때에 한해서만 하나님께서 응답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응답이 안되면 그 향불을 들고 간 제사장이 죽지요. 나답과 아비후가 그래서 죽잖아요.
그렇다면 우리가 제사장 되어서 성전에 들어갔다고 칩시다. 우리는 거기서 무엇을 발견하는 겁니까? 내가 바친 양은 무참히 놋제단의 그 심판의 불로 다 태워 죽입니다. 그런데 그 제물을 태워죽이는데 그 전에 안수를 했다 말이죠. “이 백성들의 죄를 여기에 인계합니다.” 여기서 죄를 인계한다고 할때 인간은 그냥 놔둔채 죄만 쏙 빼서 인계한다는 소리가 아니고, 그 인간 전체를 던진거예요.
하나님께서 그것을 말끔히 다 죽음으로 처리해 버리더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것은 따로 남는 것이 없지요. 붕하니 떠서 다 날라갔으니까. 우리것은 없다. 심판속에서 다 날라갔으니까 우리 것은 없는데, 없는데 하나님편에서 화목제물을 통해서 우리에게 비로소 제공하는 것이 있더라. 그것이 뭐냐하면 그게 거룩이더라 이말이죠.
왜 거룩이냐? 하나님과 만났는데 안죽었으니까 거룩이잖아요. 그것이 ‘브니엘’ 아닙니까? 내가 하나님과 대면했으나 안죽고 생명이 보전되었다고 했고 그것이 야곱이 받은 축복이잖아요. 하나님과 함께해도 안죽는 사람이라는 말이죠. 그게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천국에 앉으려니와”(마 8:11, 참고:눅 13:28)입니다. 그들은 천국에 갔잖아요. 모세와 엘리야도 천국에 갔다 말이죠.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대목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화목제물로 화해의 손길로, 참 건방지기 짝이 없고, 자기 사는 것밖에 모르고, 자기사랑할줄 밖에 모르는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사랑의 손길로 내려준 거예요. 그것이 우리속에 꿈틀거리고 살아나고 있지요.
(4-b로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