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의 전달구조 2-b (이근호목사/030512)
복의 전달구조 2-b (이근호목사/030512)
이름 : 오용익(IP:59.3.201.208)
(복의 전달구조 2-b)
--------(이어서)
‘욥기’는 하나님과 사탄의 내기 때문에 발생된 하나의 고난이죠. ‘욥기’에서 이야기 하는 것은 인간은 껍데기라는 겁니다. 주제는 뭐냐? ‘인생은 껍데기다. 알맹이는 하나님이 채운다.’ 그래서 마지막에 축복을 누가 채웁니까? 하나님이 채우잖아요. 그러니까 욥의 말이 맞지요. “주신자도 하나님이요 거두시는자도 하나님.” 그러니까 껍데기잖아요. 나는 껍데기에 불과하고 내 안에 뭐가 담기든지 , 내안에 뭘 채우시는지는 내가 관여할 바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는 그냥 껍데기에 불과하니까요. 어떤 껍데기? 하나님을 증거 하는 껍데기. 하나님의 축복을,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답게 증거하고 표출하는 그냥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욥기’입니다. “주신자도 하나님이요 거둔 자도 하나님이다.”는 것은 목회자들이 처음 목회할때는 이것을 자기 신조처럼 잘 지킵니다.
그러다가 교회가 안정이 되면서 당회장 생활을 한 십수년 하게 되고, 교인들에게 인정도 받고, 목사가 무슨 말을 해도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처럼 들을 때는, 그 다음부터는 “주신자는 하나님이요, 내 것을 더 이상 빼앗아 갈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현재 한국교회의 문제가 뭐냐 하면, 한국교회가 예수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보고 한국교회를 따라오라는 거예요.
지금 한국교회 문제가 그점이에요. “예수여! 날 따라오라.” 교회를 뒤에서 밀어 달라는 거죠. 교회가 교회를 버리고 예수를 따라갈 때 그때만이 교회입니다. 왜? 껍데기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생명을 채워야 할텐데, 기존의 교회 있음을 가지고 교회 있음으로 채워서는 안된다는 말이죠.
“껍데기를 생명으로 채우는데 생명은 싸움의 결과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 이것을 이삭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삭과 리브가를 통해서 생명이라 하는 것은 두 세력과의 싸움의 결과로서 주어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삭을 사용한 겁니다. 그러면 이 두 생명이 어떤식으로 싸우는가?
창세기 25장 23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창세기 25:2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거꾸로 되어 있어요. 거꾸로. 처음에 A와 B가 태어나게 했다가, 처음의 A는 밑으로 곤두박칠치고, B는 위로 올라가는 이런 식으로 되는 겁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이 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되며, 높은 자가 낮아지고 낮은자 높이 되는 이런 방식으로 무엇을 설명하느냐 하면, 생명이라는 것을 설명해요. ‘생명이란 바로 이것이다’ 하는 점을 설명하는 겁니다.
창세기 48장에 보면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에게 축복할 때, 두 팔을 나란히 해서 축복하지 않고(∥모양) 두 팔을 어긋맞게 해서 축복하죠(× 모양). 나란히 해서 축복하도록 하는 것은 요셉이 배치했죠. “아버지! 얘가 큰아들이거든요.” 하면서 야곱의 오른손쪽에 놓고, “아버지! 얘는 둘째 아들입니다.” 하면서 야곱의 왼쪽에 놓으면서 그렇게 하시면 된다는 식으로 배치했죠.
그런데 야곱이 엇갈리게 축복하는 겁니다. 요셉이가 “어~어~! 바뀌었습니다!” 야곱이는 “나도 안다. 다 안다” 해놓고 어긋나게 축복했습니다. 생명이 무엇인가? 생명이란 이렇게 될줄 - ∥모양의 방식으로 알았는데 결국 × 모양의 방식으로 엇갈린다는 그런 인식의 변화, 그것이 바로 생명을 아는 사람의 인식의 변화죠.
낮은 자가 높아진다는 것.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죠. “내가 들려야 한다.” 사람들 보기에는 무시하게 되었고 사람들 보기에는 비참하게 되었지만,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고 낮아진 그분이 가장 높으신 분으로 오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로서 가장 낮게 오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기피하고, 사람들이 찾지 않는 그 낮은 곳이 오히려 생명을 떨어뜨리고 간 흔적이에요.
따라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자기가 스스로 서기 위해서 사용하는 자신의 완력의 자리가 ‘와장창’ 무너져야 되죠. 그래서 야곱의 경우에 축복받기 전에는 자기 힘으로 하려고 하다가 축복 받고 난 뒤에는 자기 힘을 다 빼앗긴 상태가 됩니다. 그러면 뭐가 축복인가? 나는 내가가진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 그것이 바로 축복입니다. 그것이 축복이에요.
그럼 당신은 당신의 힘으로 살아가지 않는다면 누구의 힘으로 살아가는가? 바로 그것이 생명의 힘이라는 거죠. 나는 내 힘으로 살면 죽을 수밖에 없고, 내 힘은 왕창 부서지고, 생명의 힘이 나를 살릴 때 그때 비로서 나는 산다는 것. 이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먼저된 자가 나중 되고 큰 자가 도리어 어린 자를 섬기는 이런 역전적인 상황이 벌어지는 겁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해보면,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높은 자를 먼저 태어나게 하시고, 즉 처음부터 A(야곱)를 처음 되게 하시고, B(에서)를 나중 되도록 태어나게 하면 되는데, 일부러 나중 될자를 먼저 태어나게 하시고, 먼저 된 자를 나중 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현재 인간이 알고 있던 생명은 생명이 아니고 죽음임을 알게 하려고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럼 적들의 사고방식은 무엇이겠어요? A(먼저 된 자)가 계속해서 A(계속 먼저 된자 고수)되고 B(나중된 자)는 계속 B(계속 나중 된자로 고수)되게 하는 그런 방식이 바로 적들의 사고방식이죠. 자, 여기에 자식 두명이 이렇게 태어나게 되니까, 나중에 여기서 생명이 나오게 되는데, A를 에서라 봅시다. B를 야곱이라고 봅시다. 이때 A(에서)에 누가 붙느냐 하면 이삭이 붙게 되죠. 이삭이 에서를 좋아해요. B(야곱)에는 리브가가 붙습니다.
자식을 달라고 기도해 놓고는 가정파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사람이라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주게 되면 그 주는 것을 통해서 자기의 모든 신앙도 다 깨져 버리고, 그 주는 것을 통해서 그동안의 은혜도 다 깨어지는 현상이 비일비재하게 생겨나는 겁니다. 차라리 없었더라면 싸우지 않을 것을.
형제간에 떡이 두 개 있을 때 사이좋게 먹다가 마지막 한 개만 남을경우에는 싸움이 벌어지죠. 하나님께서 완전히 가정이 다 깨어지게 만들어요. 완전히 가정이 분해되는 과정 속에서 복의 근원되는 이삭이 큰 실수, 아무것도 아닌 자에게 축복을 하는 그런 큰 실수를 하게 만들어요. 결국 이삭이 무엇을 모릅니까? 이삭은 생명을 잉태해야 될 사람이, 생명이 뭔지조차 전혀 모르고 있는 겁니다.
이삭은 생명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고, 리브가도 야곱을 택했습니다만 리브가도 야곱의 성격이 좋아서 한것 뿐이니 그도 역시 생명이 뭔지를 모르고, 특히 에서도 물론 장자 됨의 의미를 모르고, 야곱도 자기가 장자가 되려고 환장한 사람이지 하나님의 생명이 뭔지를 모르는 사람이에요.
네 식구 다 한결같이, 생명과는 상관없는 죽음과 연관 된 사람인 것을 전부 다 있는 대로 들통 내는 거예요. 있는대로 다. 그럼 생명은 뭐냐? 없지요. 그러면 생명은 뭐냐? 결국 하나님만 생명이고 인간들 집단에서는 어떤 경우에라도 생명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는 생명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창세기 26장부터 이야기가 그런 식으로 흘러가는 거죠.
그렇게 흘러가는데, 창세기 26장에 보면 이삭과 리브가가 제2의 아브라함과 사라인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옛날 아브라함과 사라가 어떤 도시에 가서 자신들이 생존하기 위해서 사실은 부부지만, 남매간으로 위장해서 가만히 살려고 하다가 나중에 들통이 나서, 오히려 하나님을 모르는 자에게서 꾸중을 듣는 그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삭과 리브가가 부부가 아니고 남매인 것처럼 위장을 해서 들어갔다가 도리어 꾸중을 듣게 되죠.
(창세기 26:9,10)
9 이에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이르되 그가 정녕 네 아내여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느냐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생각에 그를 인하여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라 10 아비멜렉이 가로되 네가 어찌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백성중 하나가 네 아내와 동침하기 쉬웠을 뻔하였은즉 네가 죄를 우리에게 입혔으리라
이것은 이삭과 리브가가 아무리 생명이 어떻고, 아무리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 하지만 역시 인간에게 가장 기본적인 것은 살고보자는 겁니다. 살고보자. 오늘날 교인들의 마음가짐은, 그 마음속에서 외치는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살고보자. IMF전에는 ‘잘살아보자’였어요. 지금은 그냥 ‘살고보자’입니다. 이 정신으로 교회 옵니다.
그것을 목사가 탓할 수가 없어요. 왜? 목사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죠. 목사가 목회 하면서, 예수가 어떻고, 서로 사랑이 어떻고, 이웃 사랑이 어떻고 하면서도, 그런 내용의 설교를 하면서도 ‘나도 살고보자’는 것이니까. 너희만 사나? 나도 살자. 우리 같이 살고 보자. 모두 다 ‘살고보자’이다.
그런데 이삭도 그러하고 아브라함도 그러하고 사라도 그러합니다. 모든 인간이 살고보자는 그것이 사람의 가장 밑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위로를 받는 거예요. 아하! 위대한 이삭도 그랬었구나. 나만 믿음 없는 인간인줄 알았더니, 여기 믿음 없는 인간 또 있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이유 때문에 이삭과 리브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는 막대하고, 예상치도 못한 놀라운 축복이 주어집니다. 양과 소의 증식이죠. 여러분들이 마태복음 13장에서 100배, 60배, 30배의 열매가 맺힌다는 이 말은 이미 농사꾼의 계산법에 이런것이 없어요. 그저 2배, 작년보다 약간 많은 1.5배. 이정도거든요. 이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직접 관여한다는 뜻이에요.
내가 예상한것을 거둔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적접 관여하기 때문에, 예상치도 못한 놀라운 일을 우리에게 추가적으로 부여해주시는 겁니다. 인간의 심리란 이렇습니다. 자기가 예상한대로 되면 기쁘지요. 하지만 아무리 좋은 것도 자신의 예상과 달리 새로운 것이 등장할 때는 이것이 기쁜것이 아니고 무서워요. 정말 굉장히 무섭습니다. 만약 시험볼때 시범적으로 “하나님 5번 문제를 모르겠습니다. 나중에 찍을테니까 그것이 시험 다 끝나고 난뒤에 정답이 되게 하옵소서 3번.”
그렇게 찍었는데 정작 그게 맞았다고 할때, “하나님!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이런 소리가 나오잖아요. 그런데 반대로 “하나님! 제가 시험지의 문제를 다 모르겠습니다. 다 모르니 다 찍습니다. ‘1.2.3.4’ ‘1.2.3.4’ 다 찍었습니다. 그 중에 한 10퍼센트만 맞게 해주세요.” 했는데 나중에 100점을 맞고 자기 반에서 일등을 해 버린 거예요. 이것은 하나님이 좋은 것이 아니고 무서워요.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그런 기도 안하겠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이럴줄 알았으면 내가 기도를 안했을겁니다. 차리라 빵점이 낫지. 이토록 무서울줄 몰랐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볼 때는 사람은 공포를 느끼는 겁니다. 그게 누구냐 하면 삼손의 아버지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이 나타날때는 두려워서 오히려 하나님을 기피하는, 차라리 안만난 것으로 여기고 싶은 그런 두려움이 있거든요. 인간은 이 ‘살고보자’하는 이것을 기본으로 해서, 어떻게 이 ‘살고보자’ 하는 이 생명은 생명이 아니고, 어떻게 진짜 생명은 이 ‘살고보자’는 사람들에게 은혜로 주어지는가?
그 맛보기로 양과 소등의 가축들이 증식되는 거예요. 그 땅 사람들이 이삭을 볼때 놀래는 겁니다. “와! 이 땅에서 이렇게 축복받는 사람은 당신이 처음입니다. 당신같은 사람은 처음봤습니다 -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요즘 이런 노래 텔레비전 광고에 많이 나오대요.
이삭은 자기는 그냥 살려고 했을 뿐인데, 하나님께서는 예상치도 못할 축복을 주었다는 것은, 그것은 분명히 앞으로 전개될 사항이 단지 ‘살고보자’가 아니라 진짜 생명을 주실 것임을 암시하고 있는 겁니다. 자, 그러면 생명은 어떻게 주는가? (지금 갑자기 전기가 나가는 이유가 뭐죠? 하나님의 불길한 징조인가요? 강의를 멈추라는 징조인가요? “그만하라는 것 같습니다.” 아니에요. 좀 더 해야 됩니다.)
생명을 주기 위해서, 이쪽 동네는 전혀 생명이 아닌, 즉 생명이 전혀 없는 세계상을 다 보여줍니다. 추잡하고 더럽고 아주 속된 목숨들의 갈등. 이것을 다 보여주는 거예요. 생명과 다 관계없고, 네 식구가 서로 서로 자기 이득을 챙기는 이런 속된 모습을 완벽하게 보여주는 것이 그 뒤의 전개과정입니다.
아버지는 그저 자기가 먹고 싶은 별미를 원했고 그 사냥한 고기를 가지고 별미를 만들어서 아버지의 기분을 맞춰줄 수 있는 것은 둘째아들 야곱이 아니고 첫째아들 에서가 다 채워줄수 있었습니다. 27장을 봅시다. 이삭이 눈을 들어 축복을 해 주시는데, 에서에게 “네가 사냥한 고기로 별미를 만들어서 나를 기쁘게 하면 내가 너에게 축복하리라.”
그러니까 인간들은 자기취향에 맞는 사람을 오히려 더 선호해서 밀어주려는 그런 더러운 속성이 실체가 다 드러나죠. 그것을 누가 컨닝했느냐 하면 자기 부인인 리브가가 그것을 듣고, 자기사람 밀어주기 위해서 야곱에게 축복하기 위해서 배후에서 야곱을 다 조종합니다. 야곱은 리브가의 조종대로 목소리도 변조하고, 형처럼 털로 위장해서 축복을 가로채게 됩니다. “어머니! 제가 이래도 되겠습니까?” “나만 믿고 해라.” “알겠습니다.”
이렇게 단짝이 되어서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라는 것을, 인간적인 방식으로 쟁취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인간적인 방식으로 쟁취하려는 음모가 여기 다 들어 있죠. 이 모든 것이 사실은 하나님의 생명하고 전혀 관계 없어요. 관계가 없는데, 인간은 원래 하나님이 뭘 주시겠다고 하면 방법은 자기들이 구상하잖아요. 이런 더러운 것을 유감없이 다 보여주는 것이 창세기 27장의 내용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삭이 눈이 어두웠을 때에 그때에 어떻게 했습니까? 그것을 야곱이 인간적인 방법으로 가로챘습니다. 가로챘을 때 그 근거가 뭐냐하면,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는 명분입니다. 분명히 맞지요? 큰자가 어린자를 섬긴다고 하니까 분명히 이 축복은 나에게 올것이지 형에게 갈것이 아니고 형은 결국 자신을 섬기게 되어 있다고 해석합니다.
누가 봐도 그것은 맞는 이야기죠. 그러데 그것은 맞는 이야기 아닙니다. 야곱은 그런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해서 자기 입장을 정당화시켰지요? 그렇게 하고 나니까 형이 나중에 그것을 알고, 죽이려고 하니까 그때부터 야곱은 형을 피해서 떠도는 생활을 한겁니다. 축복과는 전혀 거리가 먼 삶이죠. 형과의 원수가 되어서 떠도는 생활이 되는 겁니다.
자 이렇게 볼때 두형제가 날때부터 싸우는 목적이 뭡니까? 전부다 생명을, 하나님의 축복을 누가 더 가지느냐에 대한 더러운 짓거리를 보여주는 두 사람이 야곱과 에서입니다. 이 싸움은 어디까지 연장되느냐 하면 레아아 라헬, 이 두 자매간에 - 여자가 싸움이 더 무섭다니까요 - ‘누가 남편의 사랑을 빼앗아서 독차지 하는가?’의 치열한 싸움이 야곱과 에서의 제 2탄으로 벌어집니다.
차지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자식을 낳으면 남편이 내 사람이 되겠지’라는 것입니다. ‘자식낳기’ 입니다. 제가 지난 주일 저녁에 그런 설교를 했습니까? 여자가 남편 빼앗기는 기분이 어떤 기분이냐 하면, 마치 애들이 오댕을 먹고 있는데, 언니가 와가지고 그 오댕을 쏙 빼가 버리면, 막대기만 들고 있는 기분입니다. “이게 뭐고 이거! 이 가시나가!”
그러니까 “내꺼야!” 하는 것이 이유가 있는 겁니다. 남자는 여자들의 그런 기분을 몰라요. 남자들은 “내가 왜 네것이 되느냐. 나는 그냥 나인데.” 하지만 그것은 남자 생각이고 여자는 결혼과 동시에 행복이기 그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는 곧 남편을 지켜야 된다는 거죠. 옛날의 결혼이라는 것은 결혼하면 곧 결혼이 된 것으로 알지만, 지금의 결혼은 처음에 결혼할때의 그 조건이 유지되는 조건하에서만 결혼 생활을 유지합니다.
만약에 처음에 결혼할때의 그 기쁨과 사랑이 없다면 항상 헤어질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 오늘날 현대인들의 결혼이에요. 그래서 작년까지만 해도 이혼율이 33%였는데 올해 들어서 통계에 보면 47%입니다. 두쌍중의 한쌍은 이혼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혼하신 분들은 지금 대단한 인내성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아직도 안헤어지고 있는 사람들은 보통 인내성을 가진분들이 아닌데, 그러나 인내성이란 항상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니까 시간이 좀더 짧아진다, 혹은 길어진다, 그뿐이지 항상 그러한 가능성을 누구나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10년을 잘해도 소용없어요. 지금 잘해야 되고.
하여튼 레아와 라헬 이 둘간의 싸움에서 나온 부산물이 뭐냐? 열두 아들입니다. 왜 열두 아들인가? 하나가 죽었거든요. 하나가 죽어버리니 더 이상 경쟁상대가 없으니까 열둘에서 멈춘거예요. 하나가 죽어버렸는데 뭘 경쟁해요. 싸움의 대상이 있어야지. 그래서 열둘에서 멈춘거죠. 아마 살아 있었으면 열셋, 열넷, 계속 낳았을거예요.
이런 여성의 시샘, 질투, 한 남자에 대한 사랑을 놓고 서로 차지하기 위해서 싸운 인간의 모든 흔적이 열두 아들이에요. 이게 무슨 축복입니까? 이게 무슨 축복이에요? 이게! 인간의 더러운 흔적이지! 남편이 하나고 아내가 하나였으면 열둘을 낳았겠습니까? 남편 하나에 여자가 둘이기 때문에 생긴 사건이에요. 아내가 둘이기 때문에.
보통 우리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남자가 결혼하고 난 뒤에 아내가 죽었다. 여자는 혼자 살수 있지만 남자는 혼자 못살잖아요. 그래서 새로운 여성과 결혼을 했는데 그 남자에게 이미 자식이 하나 있다. 결혼할 조건이 내 능력이 안되기에 자식을 더 이상 낳기 싫다. 전처의 아들이지만 잘 키울수 있으면 결혼 하겠다. 여자는 남자를 좋아하고 사랑하기에 꼭 내몸으로 난 자식이 없어도 된다고 여기고, 결혼만 하면 그만이라고 여기고 결혼을 합니다.
그러나 막상 결혼 하고 난 뒤에는, 전처의 자식을 몹시도 미워하는 거예요. “♬~신데렐라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요~♬. 그 다음에 뭡니까? “♬~언니와 계모에게 구박을 받았더래요. 아샤~ 아샤~♬.” 그처럼 갑자기 결혼하고 난 뒤에는 마음이 휙 바뀌어 가지고, 자기도 자식이 있어야 겠다고 남편에게 우겨서 자기 자식을 낳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자식 하나가 둘이 되지요.
왜 그렇게 전처의 아이를 싫어합니까? 싫은 것을 어떻게 합니까? 그것이 정답이에요. 인간은 라헬과 레아의 본성에서 한발자국도 못 벗어남을 왜 오늘날 교인들은 몰라요? 자꾸 믿고 난 뒤에 성화된다고 예수를 본받자고 하는 짓이 전부 다 말짱 소용없는 짓이에요. 본받기는 뭘 본받아요. 인간의 본성이 어디갑니까? 인간 성깔이 어디 가요?
이런 것을 감춘다고 사람이 깨끗해지고 더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기 주제파악을 끝까지 해야 돼요. 점점 더 자기의 죄를 파는 것이 주의 일이에요. 내가 지금 죄를 지하 몇 미터 까지 파들어 갔나? 그걸 파헤치는 그것이 성도의 생활입니다. 내가 예수 믿고 새사람 되었다고 하는데 새사람 같은 소리 하고 있습니다. 성질은 그냥 감추어 두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그냥 감추어 두면 정신병 됩니다. 우울증 생긴다니까요. 전처 자식을 미워하는 그런 것이 어디로 가는줄 알아요? 자연적으로 자기 아들에게는 “얘야 먹어라” 하지만, 전처 자식에게는 “우이 씨”가 나오게 되어 있어요. “위풍당당 --”에 보면 나오잖아요. 그 드라마 끝났어요? 끝났는지 어쨌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거 뭐 일부러 보겠습니까? 그냥 아내가 어쩌다가 틀어 놓으면 “그만 자자” 하면서 실눈 뜨고 약간 보고 뭐 그 정도죠.
살짝 보니까 ‘신데렐라’, 그 내용이 나오더라는 말이죠.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을 주려는 것이지, 우리 인간성 달라져서 구원하는 그런 하나님은 없습니다. 절대로 안 달라지지요. 안달라지는 것을 은혜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식으로 용서를 해주시지, 우리 성질이 바뀌고 그런것은 없습니다.
다만 다른 것은 뭐냐? 전에는 죄지어 놓고도 “뭐가 죄냐?” 라는 식으로 자기를 위장하는 사람이 이제는 조그만한 것을 봐도, “그래. 나는 그것 밖에는 안돼.” 하고 점점 더 자신의 실체를 알아가는 것. 그것이 남들앞에는 온유와 화평으로, 성령의 열매로 등장하는 거예요.“제가 이렇게 못났습니다. 제가 이렇게 부족한데 그래도 천당 가는 것만 해도 감사할 뿐이죠.” 이런식으로 달라질 뿐이지, 죄 안 짓는다든지, 완벽하다든지, 그런 것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결국 레아와 라헬이 낳은 이 열두아들의 모습은 바로 옛날 인간적인 야곱의 작품이에요. 옛날 인간적인 야곱의 속성이 레아와 라헬이라는 이 속성으로 그냥 확대 된 겁니다. 야곱은 나중에 이스라엘로 바뀌죠. 문제는 야곱의 옛날 속성인 그 열두 아들은 아버지처럼 바뀌지 않는 다는 거예요. 나중에 바뀝니다만 이 열두아들의 속성은 당장에 아버지처럼 바뀌지를 않아요.
결국 이것이 축복은 아니에요. 하지만 축복이 되게 하죠. 그 자체가 축복은 아닌데. 그것은 죄악된 흔적인데 그 죄악된 흔적을 축복되게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작용, 그것이 하나님의 주신 생명이라는 거죠. 생명! 무슨 말인가 하면 생명이란 뭐냐? 죽음을 들춰놓고 생명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그 뒤에 등장하는 것이 생명이다 이말입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죄에서 너를 구원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죄가 무엇인가’를 지독스럽게 깨닫게 하는 그 과정을 통해서 ‘죄에서 구원이 무엇인가’를 동행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거죠. 그러면 야곱의 열두아들이 생산되는 그 과정부터 야곱은 야심이 있죠. 그 야심이란 자기는 축복의 근원이라고 합니다.
창세기 28장에서 갑자기 뭐가 나옵니까? 야곱이 잠을 자는데 사다리가 꿈에 나타나서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했지요? 그때 야곱이 큰 오해를 합니다. ‘나는 축복의 사람이다. 마땅히 하나님이 나에게 찾아 오셨구나. 따라서 나에게 축복이 온다면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이것이 큰 오해였어요. 하나님은 야곱의 그런 생각을 들어 주시는 분이 아니고, 창 28장 14절, 15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28:14,15)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 남북에 편만 할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생각하는 그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고, 야곱에게 따로 준비한 뜻이 있습니다. 그 뜻을 이루기까지 떠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그 뜻은 뭐냐 하면, 야곱으로 하여금 야곱이가 생각하는 그 축복이 얼마나 잘못된 축복인가를 다 들추어내기 까지 하나님은 야곱을 떠나지 않는다는 거예요.
지금도 우리는 어떤 상황이 되면 그 상황을 가지고 자기에게 가장 유리한쪽으로 자꾸 상상을 해요. 사람에게 제일 괴로운 것이 뭐냐? 자꾸 상상한다는 것이 자꾸 자기를 괴롭게 만들어요. 자꾸 꿈과 비전을 상상한다는 것이 오히려 그것이 자기를 괴롭게 한다 이말이죠. 복권을 왜 삽니까? ‘왠 종이? 이거 하나 살까?’ 이래서 사는 사람은 없어요.
그걸 사면서 온갖 꿈을 다 꿔요. 어떤 경찰관은 삼백얼마를 해가지고 사표 내고 산다는데. 그런것이 자꾸 상상에 추가되면서, ‘지금 이것이 곱빼기에 곱빼기가 되면 백 몇억이 될텐데 그걸 가지고 뭘 할까?’ 자꾸 상상을 하기 때문에 그 상상과 돈을 맞바꾸기 위해서 그것을 사는 거잖아요. 그러한 인간적인 모든 것이 어디서 나왔다?
그것은 축복의 근원이 아니라, 죄악의 근원, 바로 야곱이 본성상 가지고 있었던 잘못된 죽음의 근원에서 나오는데, 그 죽음의 뿌리를 뿌리채 뽑아 내면서 그것을 축복으로 전화시켜요. 축복으로. 이것을 축복으로 전환시키는 이것이 오늘날 하나님의 우리에게 대한 작용입니다. 우리는 자꾸 거룩한 체 믿음 좋은체 하지 마세요. 그냥 솔직하게 있는대로 다 털어 놓으세요. 어차피 뽑힐것인데 매도 미리 맞는다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속성을 낱낱이 다 끄집어 낼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기도할 때 만약에 목사를 안하고 소를 키운다고 한다면, 그러면 기도하란 말예요. “하나님이여! 작년에는 소가 일곱 마리였는데 이제는 바다의 모래같이 하늘의 별같이 소가 많아지게 해 주시옵소서. 이게 내 소원이니까 주시옵소서.” 저혼자 하라는 말이죠. 그걸 교회와서 하면 안되고요. 어차피 그런 마음이 들어 있는 이상 그런 기도밖에 할 수가 없어요.
그렇게 기도는 내 마음대로 하고, 그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소 다 죽어버리고. “주여! 감사합니다.” 그게 기도의 응답이고 뭐 그런 거죠. 그걸 “아니야. 그러면 반대로 생각 해야돼. 하나님! 소가 다 죽어도 좋습니다. 나는 주님만 사랑합니다.” 아침에 보면 또 다 죽어 있어요. 그런 식으로 위장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런 식으로!
내가 먼저 매 맞는 흉내를 내면, 설마 미안스러워서라도 하나님께서 못때릴 거라고 여기는데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냥 때려버립니다. 어차피 나올 거. 어차피 죽을 때까지 나와야 될거. 야곱이가 인간적으로 간파한 축복은 열두 자녀였고, 막대한 재산이었잖아요. 결국 하나님께서는 뭘 칩니까? 자녀를 치는 것도 아니고, 재산을 치는 것도 아니고, 야곱을 쳐버립니다. 야곱을 죽이고 이스라엘로 축복의 사람으로 태어나죠.
전혀 자신이 예상치도 못한,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리라고 생각지도 못한거죠. 전에 생각했던 하나님의 일은 교회 일이지만, 다시 태어나 보니 교회 일이 아니고 진짜 축복인 예수의 일을 할 줄이야 누가 알았냐 말이죠. 교회일이 아닙니다. 교회일은 축복이 자기 노동의 대가가 될 수 있기 때문이죠. 교회가 아니고 예수님의 일을 하는 사람. 그 사람은 예수님이 축복해 주시고 예수님이 만나줘야 가능하지, 인간의 힘으로는 예수 일을 못합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일을 하면서도 자꾸 뭘 생각하느냐 하면, “제가 예수님의 일을 할테니까 제가 원하는 것을 주시렵니까? 아들이 없는데 아들을 주시렵니까?” 자꾸 그런 거래 같은, 자꾸 흥정을 하려는 그런 심보가 자꾸 생겨나요. “제가 예수 일을 열심히 할 테니까 병든 아내를 낫게 해주시겠습니까?” “행복하십니까?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자꾸 이런식으로 흥정하는데 그것은 예수가 자기 목적달성의 수단에 지나지 않지요.
주님의 하시는 생명은 그저 우리 인간의 속성을, 그러니까 열두 자녀도, 재산도 다 소용없고 나 자신이 문제라는 겁니다. 내가 스스로 야심을 없애고 이제부터는 그 껍데기에 하나님의 축복 생명되시는 분이, 생명이 들어오는 그러한 인생이 야곱부터 바뀌고, 요셉이 바뀌고, 그 다음에 열두 아들이 다 바뀌는 것이 바로 창세기의 남은 일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야곱과 이삭과 아브라함이 천국에 이미 도착했다는 소식을 우리가 접했습니다. 그들이 과연 훌륭했습니까? 그들이 과연 완벽했습니까? 우리처럼 똑같이 부족하고, 자신밖에 모르는 철저한 이기주의자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았습니다. 그러나 생명은 따로 있었고, 그 죄를 죄되게 드러나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생명을 구체화 시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제는 우리의 행위를 가지고 자랑할것이 아니라, 주님의 용서하심을 증거할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김대식(IP:220.♡.176.171)
07-04-20 12:00
목사님 수고하셨습니다. 제가 한글문서로 옮기는 중에 그림 내용이 있다고 자꾸 에러가 나던데 아마 여기에서는 생략이 된채로 올려진 모양인것 같습니다. 한글문서 파일을첨부파일로 붙여주시면 제가 다시 편집해서 올려볼테니 만약 한글문서 파일이 그림 때문에 여러개 입니다. 압축파일로도 올려주시면 됩니다. 수고해 주십시요.